안철수 10년 방랑사

‘파랑→주황→빨강’ 돌고 돌아 반대편으로

[일요시사 정치팀] 김정수 기자 =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야권 단일화 후보 여부와 관계없이 안 대표는 국민의힘과 합당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의심의 눈초리가 적지 않다. 그간 안 대표의 정치 행보를 보면 그렇다.
 

▲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박성원 기자

오는 4월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누가 야권의 선수가 되느냐에 이목이 집중됐다. 국민의힘 안철수 대표도 집중 조명을 받았다. 일각에선 선거 이후를 주목한다. 특히 안 대표의 행보를 두고 그렇다.

앞으로
어떻게?

안 대표는 지난 16일 단일화 협의 과정에서 국민의힘과 ‘깜짝 합당’을 발표했다. 이날 안 대표는 야권 대통합을 언급하며 “서울시장이 되어, 국민의당 당원 동지들의 뜻을 얻은 뒤 국민의힘과 합당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안 대표는 ‘단일후보가 되지 않더라도 대통합을 위한 합당은 열려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답했다.

국민의힘 안팎에서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안 대표의 합당 발언을 보수층 표심 확보를 위한 전략이라 보는 비판이 있었다. 국민의힘 김근식 비전전략실장은 지난 16일 YTN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에 출연해 안 대표의 국민의힘 합당에 대해 “고정지지층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최근까지도 입당이나 합당은 절대 없다고 단호히 거부했던 그가 여론조사를 앞두고 합당을, 그것도 지금 하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서울시장 본선에서 이기면 그때 하겠다고 했다”면서 “정말 속셈이 보인다”고 질타했다.


당원들의 뜻을 모은다는 점도 만일을 위한 조건이라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었다. 일각에선 ‘또 간을 본다’ ‘철새가 또 왔다’며 안 대표의 합당 선언을 깎아내리기도 했다. 안 대표의 지난 10년간 정치 행보에서 비롯된 비판인 것으로 해석된다.

질질 끌다 합당 선언 야권통합 강조
‘믿지 못한다’ 미심쩍은 분위기 왜?

안 대표가 존재감을 드러낸 시기는 지난 2009년이다. 그는 MBC 예능프로그램 <무릎팍도사>에 출연, 16.6%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후  강연 등에 나서며 대중과 소통했다. 특히 청춘콘서트를 통해 인지도를 확실히 굳혔다. 이른바 ‘안풍’의 서막이 열린 시기다.

안 대표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든 시기는 지난 2011년 9월 서울시장 재보선이었다. 그의 존재감은 상당했다. 안 대표는 서울시장 출마설이 제기되자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당시 그는 출마설을 일축했지만 정치권은 크게 술렁였다.
 

▲ 손잡는 오세훈(국민의힘)-안철수(국민의당) 서울시장 후보 ⓒ국회사진취재단

서울시장 선거의 최대 변수로 급부상한 그였지만 고민도 많았다. 당시 안 대표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집권세력이 역사를 거스르고 있다”며 “출마하면 야권 단일화에 참여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계 입문을 강하게 부정했던 기존의 입장에 변화가 있었던 만큼, 출마설이 기정사실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안 대표는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이어 박원순 당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에게 이른바 ‘아름다운 양보’를 하며 한발 물러섰다. 결국 당시 선거에서 박원순 후보가 안 대표의 표를 끌어안으며 정몽준 후보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다. 

안 대표의 복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2012년 18대 대선에 출마했다. 당시 판세는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의 3자 구도였다. 안 대표는 무소속이었다. 


최대 변수
정치 신인

그는 문재인 후보와 단일화 협상을 진행했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결국 안 대표는 대선 불출마를 선언, 돌연 대선일에 미국으로 떠났다.

안 대표는 이듬해인 2013년 서울 노원구병 재보선에 당선되며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당시 득표율은 60.46%. 그의 영향력은 현재진행형이었다.

안 대표는 2014년 당시 제1야당이었던 민주당과 합당, 민주당 김한길 대표와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로 취임했다. 하지만 그해 열린 7월 재보선에서 참패하며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했다.

2016년 총선을 앞둔 안 대표는 국민의당을 창당했다.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소속이었던 전·현직 의원들이 ‘탈당 러시’를 이어가며 국민의당으로 입당한 바 있다. 당시 정치권 안팎에선 ‘철새따라 철새들이 날아간다’는 비판이 있었다.
 

▲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국회사진취재단

하지만 2016년 총선에서 안 대표의 국민의당은 호남을 중심으로 38석을 일궈내는 기염을 토해냈다. 거대 양당의 틈에서 제3지대 구축에 성공한 셈이다.

2017년 출마한 대선에서 안 대표는 3위로 낙선했다. 이후 국민의당 당 대표로 선출되면서 2018년 바른정당과 합당, 바른미래당을 창당했다.

안 대표는 2018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출마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3위로 낙선하게 되며 정치적 입지가 크게 좁아졌다.

나오고
들어오고

낙선 후 독일로 출국하며 한동안 정치와 거리를 두다가 지난해 1월, 정계 복귀를 선언했다. 그는 기존에 몸 담았던 바른미래당을 탈당하고, 오늘날 국민의당을 창당했다.

돌아온 안 대표는 지난해 총선에서 지지율 6.8%로 의석 3석을 차지했다. 현재 국민의당은 원내 4당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과정에서 안 대표는 여러 차례 소속이 바뀌었다. 살펴보면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탈당→2016년 국민의당→합당→2018년 바른미래당→탈당→2020년 국민의당’의 행보를 보였다. 정치권에서 ‘갈지자 정치인’이라고 비판받는 이유다. 


그러면서도 안 대표는 대선과 서울시장 선거 등 굵직굵직한 선거에 출마했다. 하지만 결과는 만족할만한 수준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박성원 기자

그래서인지 안 대표에 대한 평은 갈린다. 거대 양당이 아닌 제3지대 안착은 쉽지 않은 만큼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시도였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다. 반면 창당과 탈당, 합당을 반복하면서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해석도 있다.

그 연유로 안 대표는 정계 복귀와 출마 때마다 정치권으로부터 공세를 받았다. 2018년 서울시장에 출마할 때는 당시 더불어민주당 백혜련 대변인으로부터 “탈당과 창당의 연속인 그의 행보가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면 국민의당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바른미래당이 한 자릿수 지지율을 기록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날을 세웠다.

창당, 탈당, 합당…쳇바퀴처럼∼
대선 D-1년, 어디서 시작할까?

이어 “진정성이 아니라 본인의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른 행보”라며 “그 속에 국민은 없었기 때문에 현재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안 대표에 대한 평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민주당 박영선 서울시장 후보는 지난 10일 YTN라디오 <황보선의 출발 새아침>에 출연해 “(안 대표는) 새정치를 하겠다고 지난 10년 동안 계속해서 갈지자 행보를 했다”며 “이런 후보는 서울시민 돌봄 문제에 관해 많은 문제점을 노출할 것이란 생각을 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서울을 맡길 수 없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오늘날 안 대표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 당장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이는 곳은 국민의힘이다. 다만 이 역시 확신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안 대표는 지난 2020년 1월 귀국 당시 “보수통합에 관심이 없다”며 보수진영과 선을 그은 바 있다. 또 지난해 4·15 총선을 앞두고도 “투쟁하는 중도정당을 만들겠다. 기존 정당의 관성도 앞장서서 파괴하겠다”며 통합설을 일축했다.

일각에선 안 대표가 대선에 출마하기 위해 국민의힘에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내다본다.

할까?
말까?

차기 대선의 향배를 가를 수 있는 반문(반 문재인) 정서가 국민의힘을 중심으로 퍼져 있다는 점도 간과하기 어렵다. 안 대표 역시 ‘문재인정권의 폭주를 막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만큼, 차기 대권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합당에 무게를 둘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또 이미 서울시장 여론조사 등에서 자신의 경쟁력을 확인한 만큼, 대선 출마를 위한 세력 규합 등에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kjs0814@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숨 가빴던 ‘오-안’단일화, 희생 프레임 속셈은?

범야권의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와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치열한 단일화 경쟁을 벌였다. 안 후보가 지난 19일 국민의힘의 요구를 전격 수용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오 후보 역시 안 후보 안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두 후보의 양보는 단일화 시점을 하루라도 더 앞당기려는 자구책으로 읽힌다. 지난한 단일화 논쟁은 야권에게도 안 후보에게도 좋을 것이 없다. 

물론 오 후보와 안 후보가 주거니 받거니 하며 각자 양보한 것은 아니다. 오 후보자는 애초 안 후보자의 양보에 대해 ‘희생 프레임’을 가져가 놓고, 세부 사항을 살펴보면 안 후보가 교묘하게 ‘새 제안’을 내놓고 있다고 해석했다.

오 후보는 “안 후보가 어떤 안을 받아들인다는 것인지를 분명히 하면 좋겠다”며 “안 후보와 국민의당 이태규 의원의 의견이 다르다”고 반발하기도 했다.

여론의 반응도 엇갈렸다. 수차례 반복되는 번복으로 피로감을 줬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어쨌건 대승적인 차원에서 서로 양보에 나선 것 아니냐는 의견이 있었다.

오 후보와 안 후보의 단일화 과정은 험난했다. 초기에는 야권 모두 이구동성으로 조속한 단일화를 외쳤지만, 협상 테이블에서는 평행선을 달렸다. 특히 안 후보와 김 위원장의 갈등은 최고점을 찍었다.

안 후보는 오 후보와 여론조사를 두고 치열하게 다퉜다. 팽팽한 기 싸움은 늦은 저녁까지 이어졌다. 두 후보 측은 적합도와 경쟁력 문항을 두고 샅바싸움을 벌였다. 단일화 시한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지만 양측 모두 도장을 찍지 못했다. 곧 단일화 무산 가능성이 제기됐다.

그럼에도 단일화에 대한 기대는 있었다. 국민의당이 국민의힘이 내놓은 안을 일부 수용할 수 있다고 밝히면서다. 하지만 양당은 전화 여론조사 방식에서 큰 이견을 보였다. 국민의당은 ‘100% 무선전화 여론조사’를 역으로 제안했다. 국민의힘은 펄쩍 뛰었다.

여론조사 방법 두고 평행선
안철수 수용 자세로 출발

국민의힘은 ‘유선전화 사용자 10% 포함 여론조사’를 관철시키고자 했다. 인구의 25%가 유선전화를 사용하는 만큼, 객관성 확보를 위해 조사 대상에서 배제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국민의당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며 물러서지 않았다. 사실, 유선전화 사용자는 상대적으로 고령층에 속한다. 국민의힘 지지자들 중에서는 고령층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중도를 표방하는 안 후보보다 보수진영의 오 후보에게 유리한 조건이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유선전화 여론조사에서는 오 후보가 앞섰다. 반면 100% 무선전화 여론조사에서는 안 후보가 승리하는 그림이었다. 두 후보의 지지율은 비등비등하다. 굳이 핸디캡을 자처할 이유가 없다. 오 후보와 안 후보 모두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양측은 막판 합의를 성사시키려했지만 때는 늦은 뒤였다. 애초 공표했던 여론조사 기간은 이틀이었다. 또한 여론조사 결과가 후보 등록기한 전에 발표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결국 물리적인 시간 부족으로 단일화는 좌초됐다.

국민의힘 정양석 사무총장은 지난 18일 단일화 협상 결렬 이후 “두 후보가 여론조사를 하고 단일후보를 선출하기로 했지만, 그 약속을 지키기 어렵게 됐다”고 털어놨다.

국민의당 이태규 사무총장도 “여론조사를 시행하고 내일 단일후보를 결정하는 건 물리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렵겠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단일화 협상은 계속될 것이란 점을 분명히 했다. 오 후보와 안 후보의 단일화 결렬은 이튿날 재조명됐다.

두 후보가 각각 후보등록을 마치는 모습에서였다. 이들은 서울시선거관리위원회를 찾아 각자 후보등록을 마친 상태다.

한편 범야권 서울시장 단일화 후보 선호도 조사에서 두 후보가 초박빙 접전을 벌이는 것으로 지난 11일 나타났다.

한국리서치가 KBS 의뢰를 받아 지난 8일부터 이틀 동안 조사한 범야권 단일화 선호 후보에 따르면 오 후보로 단일화돼야 한다는 응답이 38.4%, 안 후보로 단일화돼야 한다는 응답이 38.3%로 조사됐다.

양자 가상 대결에서는 범야권 단일 후보가 누가 되든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후보를 앞서는 것으로 조사됐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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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회 문턱을 넘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이 사법부를 강타했다. 검찰은 1999년 특별검사제 도입 이후 권한을 조금씩 잃다가 올해 해체가 결정됐다. 검찰이 26년 전 느끼다가 현실이 된 불안을 이젠 사법부가 느낄 차례일지도 모른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범여권이 지난 24일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내란 사건만 맡는 전담재판부를 만들어 운영한다”는 취지의 예규 제정 방침을 밝혔다. 특별재판부 영장전담 법관 하지만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같은 날 논평을 통해 ‘24일 처리 방침’을 밝혔다. 이날 법안 처리는 이미 예고된 결과였다. 박 대변인은 지난 21일 오전 기자 간담회에서도 “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예정대로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이 원래 처리하려던 법안은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법’이었다. 이 법안이 통과됐다면, 12·3 비상계엄 관련 재판을 맡을 특별재판부가 설치되고, 영장 심사를 맡을 특별영장 전담 법관이 따로 배정됐을 것이다. 이들은 국회·판사회의·대한변호사협회가 3명씩 추천한 위원으로 구성되는 9인 규모의 추천위원회의 2배수 추천과 대법원장의 임명을 거칠 예정이었다. 아울러 상고심에선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임명했던 대법관은 모두 제척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에 대해선 각계에서 위헌 논란을 제기했다. 그러자 민주당은 지난 16일 내용을 대폭 수정했다. 명칭도 특별재판부에서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 전담재판부 후보추천위원회는 법무부 장관·헌법재판소 사무처장 등 외부 인사를 제외한 후 법관으로만 구성될 예정이다. 추천위원회에 들어갈 법관 중엔 각급 판사회의·전국법관대표자회의가 포함된다. 전담재판부에 소속될 법관은 추천위원회·대법관회의를 거쳐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 등 12·3 비상계엄 주요 연루자들은 이미 형사재판 제1심을 받고 있다. 전담재판부는 항소심부터 맡을 예정이다. 대법원은 민주당의 공세에 맞서 반격에 나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대법관 행정회의를 열어 ‘국가적 중요 사건에 대한 전담재판부 설치 및 심리 절차에 관한 예규’를 제정하기로 했다. 여기엔 “형법상 내란·외환죄와 군형법상 반란죄 사건을 전담해 집중 심리하는 전담재판부를 설치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대법원이 규정하는 전담재판부는 무작위 배당을 거쳐 사건을 배당받을 재판부가 지정되는 방식이다. 전담재판부로 지정된 재판부가 원래 맡던 재판은 다른 재판부로 재배당된다. 예규엔 “해당 재판부는 이후 내란·외환과 관련 없는 새로운 사건은 맡지 않는다”는 규정이 포함됐다. 하지만 민주당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박 대변인은 “사법부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왜 이렇게 늦게 했느냐”며 “왜 그동안 국민을 불안과 혼란에 빠뜨렸느냐”고 비판했다. 이어 “국회의 입법권을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맞춰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내란 전담재판부 신설이 갖는 ‘진짜 함의’ 대법원 예규 제정…반격 혹은 타협안 제시 민주당 정청래 대표도 같은 날 최고위원회의 중 “대법원이 헐레벌떡 자체 안이라고 내놨다”며 “더 일찍 해야 하지 않았느냐. ‘조희대 사법부’답다는 생각이 든다”고 비판했다. 국내 헌정사에서 특별재판부는 단 2회만 설치됐다. 제헌헌법 부칙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 등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를 설치했다. 반민특위엔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가 설치됐다. 특별검찰부는 검찰총장 등 9명으로 구성됐고, 특별재판부는 ▲국회의원 5명 ▲법조인 6명 ▲사회 저명 인사 5명 등 총 16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국회가 선출했다. 두 번째 특별재판부는 1960년 4·19 혁명 이후 개정된 제4차 개정 헌법을 근거로 설치됐다. 당시 개정 헌법엔 “3·15 부정선거 및 4·19 혁명 관련자들과 관련된 형사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를 둘 수 있다”는 취지의 부칙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설치된 특별재판부는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제정을 거쳐 설치됐다. 민주당조차 ‘특별재판부’를 ‘전담재판부’로 수위를 낮춰 처리했다는 이유로 내란 특별재판부에 대해 불거진 위헌 시비를 거론한다. 법원은 ‘무작위 전산 재판 배당’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 재판부에 특정 재판을 배당한다”는 취지의 특별재판부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위헌 시비가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아직 헌법재판소가 관련 합헌·위헌 여부를 가린 적도 없다. 하지만 헌법 제27조는 “모든 국민은 헌법·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 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 배당의 무작위성은 재판에 대한 외부의 부당한 압력·영향력으로부터 법관을 보호해 재판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운 원칙이다. 이는 위헌 시비가 불거진 핵심 이유였다. 그래서 과거엔 특별재판부를 설치하기 전에 개헌 과정 중 헌법 부칙에 그 근거를 규정했다. 헌법 부칙은 헌법 본문과 똑같은 효력을 가진다. 그래서 위헌 시비가 불거질 일은 없었다. 피해 가는 위헌 시비 하지만 위헌 시비를 피하려고 제시한 ‘내란 전담재판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이어졌다. 역설적으로 “기존 재판부 배당과 큰 차이가 없다”는 취지의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사법부는 이미 무작위 배당의 예외를 운용하고 있다. ▲특허법원 ▲서울행정법원 ▲지역별 가정법원 등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법원이 따로 설치돼있는 것도 무작위 배당의 예외다. 또 각급 법원은 이미 지식 재산·환경·의료 등 특정 전문 분야를 전담할 재판부를 분류한다. 법원장 재량에 따라, 재판장들과의 협의를 거쳐 특정 사건은 ‘적시 처리 필요 중요 사건’으로 분류해 특정 재판부에 배당해서 신속한 재판 진행을 추진한다. 기소된 사건이 이미 진행 중인 재판과 사실 관계·쟁점·피고인이 같으면, 이미 진행 중인 재판을 담당하는 재판에 배당한다. 물론 민주당이 거둘 수 있는 실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정 대표는 민주당이 ‘특별’을 ‘전담’으로 바꿔가면서도 서둘러 개정안을 추진하는 이유를 분명히 짚었다. 그는 “조희대 대법원장의 사법부와 지귀연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의 재판부는 내란·외환 사건의 심리를 의도적으로 침대 축구하듯 질질 끌었다”며 “조 대법원장은 경고·조치를 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보다 못한 입법부가 나서기 전에 사법부가 진작 내란 전담재판부를 설치했다면, 지난 1년 동안 허송세월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이 분통 터지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대표의 주장 중 핵심 단어는 ‘조희대’와 ‘지귀연’이다. 민주당이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를 추진할 당시 민주당 전현희 최고위원은 지난 9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지 부장판사를 지칭해 “재판의 공정성에 의구심을 갖도록 하는 인사들을 전보·징계한다면, 굳이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들기 위한 입법 조치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정 대표는 지난 15일 최고위원회의 도중 “조희대 사법부는 특검 수사 훼방꾼이 됐다”며 “조 대법원장이 지휘하는 대법원이 지난해 12월3일 내란에 동조한 건 아닌지 강한 의구심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사법행정사무를 총괄하는 조 대법원장의 권한 일부를 사실상 박탈하고, 지 부장판사를 내란 관련 재판에서 손 떼게 할 수 있다면, 민주당은 상당한 실익을 거둘 수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재판부 배당에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힘 실어준 진짜 이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당시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 이후인 지난 2018년 4월 “권한이 집중된 제왕적 대법원장을 견제하고, 법관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를 갖고 설치됐다. 보수 진영 일각에선 이를 일컬어 “지나치게 민주당에 친화적”이라고 비판한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 설치 직후 첫 의장으로 선출됐던 최기상 당시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는 현재 민주당 의원이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지난 9월 민주당이 주장한 의제 ‘대법관 증원론’을 포함한 상고심 제도 개선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어 “사법부는 대법관 증원안을 경청하고 자성해야 한다”는 취지로 보고서를 작성·공개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일컬어 “민주당에 힘을 설어주기 위해 토론회를 개최한 게 아니냐”는 비판 목소리도 제기됐다. 대법원의 이재명 대통령에 대판 파기환송 판결에 대해서도, 정 대표는 지난 9월 전국법관대표자회의에 “조 대법원장 사퇴 권고 등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 회복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일각에선 “대법원의 예규 제정은 반격”이라고 해석한다. 그 근거로는 “내란 전담재판부를 줄곧 반대하다가 갑자기 예규 제정을 밝힌 의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는 점을 들었다. 민주당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 외에도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꿀 만한 사법개혁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대해선 “민주당의 공세를 적절한 선에서 수용해 더 큰 공세에 대비하려는 의도”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특별재판부’가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고 해서 다른 사법개혁안 통과 시도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법원으로선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꾸려는 민주당의 시도를 보면서 검찰이 해체되는 과정을 되새길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미 민주당이 주도하는 사법개혁안 자체가 사실상 ‘기존 법원 해체’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조금씩 권한 잃다 해체 결정 검 종착역은 헌재 최고법원 등극? 민주당 등 범여권이 검찰을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으로 분리해 완수했던 검찰 해체에 대해선 “헌법은 검찰 조직의 존재를 전제로 검찰총장의 존재를 규정했다”면서 위헌 논란을 제기하는 반대 측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범여권은 이를 강행했다. 큰 틀에서 보면, 검찰은 ▲특별검사제도 도입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설치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 분리 등 과정을 거쳐 해체됐다. 최초의 특별검사(이하 특검)는 지난 1999년 김태정 전 검찰총장 부인에 대한 옷 로비 의혹과 한국조폐공사 노조 파업 유도 사건에 대해 진행됐던 최병모 특검이었다. 특검이 성립됐던 배경은 “검찰이 검찰총장의 부인이 연루된 사건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시선이었다. 아울러 당시 국회 구도는 여소야대였다. 한나라당은 “사건을 축소·은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흐름을 타고 강하게 밀어붙여 특검법 제정을 주도했다. 이후 현재까지 개별 특검법은 총 16개가 통과됐고, 상설 특검은 6회 추진됐다. 검찰로서는 1999년 최병모 특검 설치가 수사권·기소권 독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현재까지 총 22회의 특검이 성립됐다는 것은 검찰에 대한 각계의 불신을 상징하는 중요 사실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검찰을 노리는 다음 단계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었다. 최초의 검경 수사권 조정은 지난 2011년 진행됐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사법경찰관이 검사의 수사 지휘에 이의를 제기하는 재지휘 건의 제도 신설 등의 내용이 담긴 안을 대통령령으로 제정해 의결했다. 지난 2016년엔 ▲진경준 게이트 ▲정운호 게이트 ▲김형준 전 부장검사의 스폰서 의혹 ▲최순실 게이트 등이 연이어 발생해 검찰의 신뢰도에 대한 강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이는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장기간 논의된 검경 수사권 논의로 연결된다. 공수처도 설치됐다. 민주당 집권 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을 강하게 기억하는 지지자들의 비원을 외면하긴 어려웠던 측면도 있었다. 그렇게 검찰은 서서히 권한을 빼앗겼다. 그러다가 지난 9월에 이르러 검찰은 내년부터 중대범죄수사청과 공소청으로 갈라질 운명에 처했다. 특히 중대범죄수사청은 행정안전부로 옮겨진다. 서서히 권한을 빼앗기다가 끝내 해체를 앞둔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민주당 등 범여권은 ▲법원행정처 폐지 ▲법 왜곡죄 도입 ▲대법관 증원 ▲재판소원 도입 등 사법개혁안을 시도하고 있다. 범여권이 사법개혁안을 모두 통과시킨다면, 사법부로서는 “검찰에 이어 사법부도 한순간에 와해된다”고 인식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한순간에 와해된다 법원행정처가 없어지면 대법원장의 권한이 줄어든다. 법 왜곡죄가 도입되면, 판사의 재판도 법적 처벌 범위 안에 포함될 위험에 노출된다. 대법관이 늘어나 대법관의 권위·희소 가치가 줄어든 후 재판은 헌법소원 제기 범위 안에 포함된다. 최종 종착지는 헌법재판소가 대법원을 제친 후 최상위 사법기관으로 규정될 순간임을 배제하기 어렵다. 지난 24일은 사법부가 느낄 법한 공포가 처음 피부에 와닿은 날이었을 수도 있다. 새해엔 민주당과 사법부의 전쟁이 더욱 거칠게 진행될지도 모른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