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세청 ‘세무대’ 불신론 왜?

  • 구동환 기자 9dong@ilyosisa.co.kr
  • 등록 2021.02.22 13:09:42
  • 호수 13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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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옛날이여’ 주름잡다 힘빠졌네

[일요시사 취재1팀] 구동환 기자 = 국세청의 인재 화수분은 국립세무대학(세대)이다. 실제로 세대 출신들은 국세청을 비롯해 관세청과 주요 공직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최근 국세청을 주름잡던 세대 출신들의 힘이 빠지고 있다. 국세청 고위직 현황을 살펴본 결과, 세대 출신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모양새다.
 

▲ 국립세무대학

인재 채용 시 가장 큰 딜레마는 전문성과 학벌이다. 전문성과 학벌 모두 갖추면 좋겠지만 취사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전부터 국세청은 학벌보다 전문성에 초점을 뒀다. 1981년 세무 인력 양성을 위해 특수목적 대학으로 국립세무대학이 설립됐다. 처음에는 세무전문대학으로 출발해 국립세무대학으로 개편된 뒤 졸업생을 매해 배출하고 재경부와 국세청, 관세청 등에 특채돼 4000여명이 국가 세무 행정의 중추적 역할을 했었다.

인재 화수분
중추적 역할

세대는 학비 전액을 국고로부터 지원하고 졸업생 전원을 국세 분야 8급 공무원으로 임용하는 등 각종 특전을 제공한다. 고교 성적은 우수하지만 가정형편 등이 어려운 학생들이 많이 지원했다.

그러나 1999년 8월 정부가 9급으로 채용되는 일반대학 출신 공채 세무 공무원과 세대 출신 간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 등을 들어 세대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실제로는 세대 출신 사이에 강한 유대감을 형성하면서 ‘집단화’하는 데 정부가 부담을 느낀 것으로 알려졌다.

폐지 결정이 내려지자 학교 교수·재학생·졸업생 등이 헌법소원을 내는 등 강력히 반발했지만, 결국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그런데도 세대 졸업자 5000여명 중 청와대, 총리실, 기획재정부, 조세심판원, 국세청, 관세청 등 정부의 각 부처에서 핵심보직을 맡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뿐만 아니라 사무관급, 서기관급, 부이사관급 등 많은 이들은 모두 나름대로 역량을 인정받고 있으며, 이미 공직을 마친 1000여명이 세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세대 출신자의 전문직 자격증 취득 현황을 보면 세무사 1045명, 공인회계사 17명, 감정평가사 7명, 검사·변호사 11명, 관세사 12명, AICPA 11명 등 전문자격증을 취득해 자신들의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일각에선 2년제 전문대학 출신이라고 깎아내리기도 하지만, 일류 대학이나 4년제 타 특수대학과 비교해도 그 역량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1981년 국립세무대학 설립
1999년 형평성 문제로 폐교

또 세대 출신자들이 일반 공채 출신자들보다 주요 보직에서 많이 일하는 이유를 보면 주력이 40∼50대 핵심 연령으로서 20대에 8급으로 입사해 30대 초반에 이미 각 부서를 순환보직을 완료해 같은 연령대의 공채 출신들보다 역량은 비슷하더라도 5년 이상 실무 경력이 앞서 있다. 본·지방청 인력 충원 시 세대 출신이 우선 선택되는 이 같은 유리한 면이 있었다. 

비고시 출신임에도 ‘바늘구멍’이라는 국세청 고위직으로 승진하는 사례가 하나둘 나타났다. 그러면서 5000여명에 달하는 세무대학 졸업생들과 국세 공무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9급, 7급 출신 등 비고시 출신들의 ‘희망 동아줄’이 돼왔다.
 

▲ 국세청 ⓒ카카오맵

최근 서울지역 세무서장 중 90%에 가까운 이들이 세무대학 출신들로 채워지면서 세대 시대가 온 듯했으나, 고위직으로 승진할만한 인재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세대 1기 중에서는 김재웅 전 서울청장과 김한년 전 부산청장이 고공단 가급인 ‘1급’으로 승진하는 영예를 안았고, 권순박 전 대구지방국세청장도 지방청장을 역임하며 고공단 나급으로 승진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남아있는 세대 1기생은 없다. 마지막 세대 1기생이었던 구제승 전 광명서장, 배민규 전 서부산서장, 정재윤 전 잠실서장이 지난 연말 명예퇴직하면서 이제 국세청 최고참 세대출신은 2기생이 됐다.

세대 2기 중에서는 김형환 전 광주국세청장이 지방청장을 역임했고, 이청룡 대전국세청장, 이현규 국세공무원교육원장은 현재 고위직으로 남아있다. 세대 3기들도 최시헌 전 대구국세청장, 김진호 국세청 근로소득지원국장이 고위직으로 승진하며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비고시 출신
희망 동아줄

특히 문재인정부 들어 세대 3기 중에서 7명(박광수, 김성환, 이응봉, 현석, 이한종, 정종식, 김진호)이 국세청 본청 과장급으로 발탁되면서 고위직 승진 발판을 다져놓으며 세대 전성시대를 이루어갈 것이라는 기대감을 한껏 높였다. 3기 출신 인재들은 본청 과장급 주요 보직에 골고루 포진, 선배 기수들을 뛰어넘는 수준의 부이사관급 이상 고위직 진출자를 배출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세대 3기 출신 발탁은 지난 2014년부터 이뤄졌다. 최시헌 전 대구지방국세청장(2020년 12월말 퇴임)이 원천세과장으로 진출하면서 첫 본청 전입 테이프를 끊었고, 구상호 현 강남세무서장이 2016년 8월 일약 세원정보과장으로 발탁되며 바통을 이어 받았다. 엄밀히 따지면 이들은 이후 발탁된 동기들과 명백한 구분이 이뤄지는 ‘1세대’에 속한다.

본격적으로는 2017년 6월30일 한승희 전 국세청장 취임 이후 2세대에 해당하는 세무대 3기 출신들이 대거 본청 과장급으로 발탁되는 파란도 일어났다. 무려 7명(박광수, 김성환, 이응봉, 현석, 이한종, 정종식, 김진호)이 순차적으로 본청 과장급으로 진출한 것이다.

이들은 소위 ‘한승희 키즈’로 불리면서 성장했다.

물론 7명의 2세대 주자 중 능력과 평판에도 불구, 본청 전입 시 주어지는 승진 기회를 내려놓은 케이스들도 있었다.
 

▲ ▲ⓒ고성준 기자

행시 출신이 아닌 이상, 본청 진출에 성공한 세대 3기 출신 7명 전원이 부이사관으로 승진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특히 1세대 진출자들도 부이사관 반열에 올랐다는 점을 고려하면 7명 중 많아야 2~3명 정도가 부이사관 이상 승진이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인재가 없다”
고위직 인력난

하지만 이 같은 전망을 깨고 2세대 주자 중 무려 4명이 차례차례 부이사관으로 승진하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국세청 내부에서는 이들 4명이 무난하게 고위공무원까지 진출해 우수 인재들이 즐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1·2기 선배 기수들을 뛰어넘는 역대급 고위공무원 승진자를 배출하는 기수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물씬 형성됐다.


최소한 지난해 초반까지만 해도 이런 기대감은 보증수표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후로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본청 감찰담당관을 지냈던 박광수 전 국세공무원교육원 교수는 인천지방국세청 성실납세지원국장, 본청 법인세과장 재임 시절 부이사관으로 승진했던 김성환 전 대전지방국세청 조사1국장은 성동세무서장, 본청 소득세과장을 지낸 이응봉 전 대구지방국세청 조사1국장은 중부지방국세청 감사관으로 각각 배치됐다.

당연히 고위공무원 승진 티켓을 거머쥘 줄 알았던 이들은 크고 작은 문제에 얽히고설키며 더 이상의 전진에는 실패했다. 2세대 주자 4명 중 가장 빠르게 부이사관 반열에 올랐던 김진호 현 부산지방국세청 징세송무국장만이 올해 2월 고위공무원 승진에 성공했다.

일각에선 아직 이들에게 승진 기회가 열려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지만, 전반적인 흐름을 고려하면 남은 3명에게 고위공무원 진출의 기회가 돌아올 가능성이 그리 커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1~3기까지 승진…승승장구 
4기 이후부터 인원 확 줄어

세대 4기부터는 ‘인재가 없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현재 세대 4기 중 고공단으로 승진한 인물은 김재철 서울청 조사3국장, 이판식 부산청 징세송무국장 등 2명이다. 이어 부이사관으로 고공단 승진을 바라보고 있는 백승훈 서울청 납보관 등 딱 3명이 부이사관으로 승진했다. 


5기 중에서는 이미 고공단으로 승진한 장일현 전 부산청 성실납세지원국장(국방대 교육)에 이어 양동구 국세청 납세자보호담당관(부이사관)이 고공단을 바라보고 있다. 국세청에서 고공단으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부이사관으로 승진해야 하고, 또 부이사관으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본청 전입’이 매우 중요하다.
 

▲ ▲ⓒ국립세무대학

‘본청에서 고생한 이들을 승진 대상자’로 볼 수 있고, 이들 중에서도 전원이 승진하는 것은 아니므로 본청 전입자가 많아야 인재풀을 넓힐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본청에 있는 이들 세대 5기 서기관은 강승윤 장려세제신청과장, 김길용 부동산납세과장, 장신기 대변인, 박광종 징세과장 등 단 4명뿐이다.

세대 6기는 상황이 더 좋지 않다. 6기 중에서는 한경선 조사2과장 단 한 명만이 본청 과장으로 근무 중인 것으로 나타나면서 사실상 부이사관 승진 재원의 ‘씨가 말랐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6기 중에서도 김진우 송파세무서장, 최회선 서울청 조사3국1과장, 이세협 중부청 조사3국 조사관리과장 등은 지난 인사에서 본청으로 배치됐어도 무난했을 인재였다는 점에서 아쉬움도 남는다.

7기도 마찬가지다. 현재 본청에 근무 중인 7기는 이은규 국세청 기획조정관실 국세통계담당관 한 명이다. 장병채 양천세무서장, 김태우 인천청 조사2국장 등이 본청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세대 후배들의 아쉬움을 자극하고 있다. 특히 지난 2020년 9월 기준으로 살펴볼 때, 국세청 2만1000여 공무원 중 서기관의 수는 약 350명(4.5급 포함)으로 전체의 1.6%를 차지하고 있다.

진입장벽
높아졌다

이 중에서도 4급으로 승진한 세대 출신은 약 140명으로, 10명 중 4명이 세대 출신으로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세행정의 최고위직인 고공단으로 올라가기 위한 발판인 본청으로의 진입장벽이 점점 높아지면서 세대 출신들은 ’잘해야 세무서장인가‘라는 자조 섞인 말까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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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