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 재계 이끌 후계자 열전

돈도 돈 있어야 물려받는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정수 기자 = 재계 후계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차근차근 입지를 다지데서부터 완전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경우까지 다양하다. 특히 승계 궤도에 오른 후계자들은 저마다 미래 먹거리를 담당하면서 경영 능력 증명에 힘쓰고 있는 추세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장남 최인근씨는 지난 9월 SK E&S 전략기획팀에 입사했다. 직급은 사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인근씨는 지난 2014년 미국 브라운대에 입학해 물리학을 전공하고 보스턴컨설팅그룹(BCG) 인턴십을 거쳤다.

차근차근
승계 준비

인근씨가 몸담고 있는 SK E&S는 SK그룹의 에너지 계열사다. 그룹 지주사인 SK에서 90%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SK E&S는 액화천연가스(LNG), 신재생에너지, 에너지저장시스템(ESS) 등과 관련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업계 안팎에서는 인근씨의 입사를 경영수업으로 바라봤다. SK E&S는 그룹 주력 계열사로 꼽히지 않지만 친환경 에너지 사업을 담당하며 그룹의 미래 성장 동력을 견인할 수 있는 곳으로 평가받는다. 인근씨는 평소 신재생에너지 등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전해졌다.

SK E&S의 최근 3년간(2017~2019) 실적은 꾸준히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연결 기준 매출액은 5조5352억원, 6조4675억원, 6조5616억원으로 나타났다. 영업이익도 3557억원, 4478억원, 5260억원으로 매년 증가했다. 순이익 역시 3743억원, 4390억원, 6971억원으로 매해 개선됐다.


올해 실적은 관망세다. SK E&S의 3분기 누적 기준 연결 매출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2% 하락한 4조1837억원이었다. 영업이익 역시 직전년도에 비해 무려 74.2% 하락한 1185억원이었다. 다만 순이익은 39.2% 상승한 1조78억원을 기록했다. 인근씨 외에도 최 회장 장녀 윤정씨는 SK바이오팜에서 근무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차녀 민정씨는 지난해 SK하이닉스에 입사했다.

한화그룹은 3세 경영 시작을 알리고 있다. 그룹은 지난 9월 김승연 회장의 장남 김동관 한화솔루션 전략부문장을 사장으로 승진시켰다. 김 사장은 한화그룹 신성장동력 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크게 태양광과 수소, 그리고 헬스케어로 분류된다.

태양광 사업은 김 사장이 오랜 기간 담당한 부문이다. 김 사장은 그룹에서 해당 사업에 뛰어든 10년간 이를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수소 사업 역시 마찬가지다. 대표적으로 김 사장은 한화그룹이 미국 수소 시장에 뛰어들 수 있도록 수소전지차 업체 니콜라 투자를 직접 이끈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최근 니콜라가 사기극 논란에 휩싸이면서 미국 완성차업체 제너럴모터스가 지분 인수 계약 철회를 발표, 주가가 휘청거린 바 있다.

계열사 입사, 성장 동력 발굴
시험대 오른 경영능력 어떻게?

헬스케어 사업 부문 확대는 최근 이뤄졌다. 한화솔루션은 지난달 10일, 고순도 크레졸 시설에 1200억원을 투자한다고 공시했다. 전남 여수산업단지 소재로 연간 3만톤의 생산을 목표로 한다. 고순도 크레졸은 종합비타민제 등 헬스케어제품 첨가제로 사용되는 정밀화학 소재다. 김 사장이 사장으로 승진한 이후 추진하는 첫 번째 신사업인 만큼 주목을 받게 됐다.

올해 3분기 한화솔루션의 연결기준 누적 매출액은 6조6332억원으로 직전년도와 비교했을 때 5.5% 하락했다. 반면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지난해 동기간 대비 각각 28.2%, 57.7% 상승한 5288억원, 4010억원을 기록했다.


LS그룹 역시 3세 경영에 돌입했다. 그룹은 지난달 24일 임원인사를 발표하면서 이들을 계열사 최고책임자에 오르게 했다.
 

맏형인 구본혁 예스코홀딩스 부사장은 사장으로 승진해 예스코홀딩스 CEO(최고경영자)를 맡게 됐다. 그는 3세 가운데 유일하게 사장으로 승진한 인물이다. 앞서 구 사장은 지난해 예스코홀딩스 대표이사로 선임됐지만 경영 수업이 더 필요하다며 10일 만에 직을 내려놓은 바 있다. 구 사장은 고 구자명 LS니꼬동제련 회장의 장남이다.

구동휘 LS밸류매니지먼트 부문장은 E1 COO(최고운영책임자)로 선임됐다. 구 전무는 올해 38세로 그룹 최연소 COO에 등극했다. 또한 E1에 승진자가 아무도 없고, LS밸류매니지먼트에 있던 구 전무가 E1으로 넘어온 점을 미뤄 봤을 때 무게감이 실린다는 분석이다.

E1에는 애초에 COO라는 직책도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구 전무는 구자열 LS그룹 회장의 장남이다. 지난 2013년 LS일렉트릭 경영전략실에 입사한 그는 8년 만에 최고책임자 직을 수행하게 됐다.

구본규 LS앰트론 부사장은 COO에서 CEO가 됐다. 구 부사장은 지난 2007년 LS전선에 입사하며 첫 발을 뗐다. 그는 SPSX(슈퍼리어 에식스) 통신영업 차장, LS일렉트릭 자동화 아시아 태평양 영업팀장, LS엠트론 경영관리 COO 등을 역임한 바 있다. 그는 구자엽 LS전선 회장의 외아들이다.

오너 3세들이 그룹 지주사 LS에서 보유하고 있는 주식은 50만주(1.55%), 96만2500주(2.99%), 37만2000주(1.16%) 순이다.

미래 사업
어디에 얼마?

BGF그룹은 2세 경영에 착수했다. 홍석조 회장의 장남 홍정국 BGF 대표이사는 지난달 27일 부사장에서 사장으로 승진했다. 앞서 홍 대표는 지난 2017년 10월 BGF리테일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한 바 있다. 이어 지난해 10월 그룹 지주사인 BGF 대표이사가 됐다. 지난 9월 기준 홍 대표의 BGF 지분율은 10.29%다. 최대주주는 홍 회장으로, 53.34%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홍 대표는 편의점 CU 운영사 BGF리테일 등기임원이다. BGF리테일은 그룹 내 캐시카우로 꼽히지만 최근 상황은 만만치 않다. 편의점업이 코로나19의 여파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올해 3분기 누적 연결기준 BGF리테일 매출액은 4조6249억원이었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9% 증가했다. 다만 영업이익은 1266억원으로 직전년도 대비 16.7% 하락했다. 순이익 역시 17.5% 감소한 965억원이었다.

홍 대표는 새벽 배송을 신사업으로 선택, 지난 2018년 헬로네이처를 인수하며 박차를 가하고 있다. 당시 전략부문장을 맡았던 홍 대표는 인수 과정에 직접 관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BGF에서 헬로네이처 지분 50.1%를 보유하고 있다. 나머지 49.9%는 SK플래닛에 있다.

다만 매년 적자 폭이 커지는 점은 간과하기 어렵다.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헬로네이처의 별도 기준 매출액은 163억원에서 220억원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영업이익이 –81억원에서 –155억원으로 크게 감소했고, 순이익 역시 –37억원에서 –194억원으로 하락했다. 헬로네이처의 흑자전환 여부에 홍 대표의 경영능력에 대한 평가가 달려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코오롱그룹은 4세 경영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웅열 전 회장의 장남 이규호 코오롱인더스트리FnC부문 COO 전무는 지난달 26일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이 부사장은 코오롱글로벌 수입차 유통·정비 사업을 영위하는 자동차 부문을 책임지게 된다.

올해 36세인 이 부사장은 지난 2012년 코오롱인더스트리 차장으로 입사했다. 이후 2015년 상무보로 승진하며 국내 100대 기업 최연소 임원에 올라 눈길을 끌었다. 이 부사장은 다시 2년 만에 상무, 1년 만에 전무로 승진한 데 이어 2년 만에 부사장으로 선임되는 등 고속 승진 가도를 밟았다.

이 부사장이 활동하게 되는 코오롱글로벌은 그룹 매출의 절반 정도를 책임지는 계열사다. 이 부사장은 이곳에서 경영능력을 시험받게 될 것으로 분석된다. 이 부사장은 그간 진두지휘했던 코오롱인더스트리 패션부문의 실적 악화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 전 회장은 지난 2018년 퇴임을 밝히면서 “아들의 경영능력이 인정받아야 최고경영자(CEO)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그렇지 않으면 주식을 한 주도 물려주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경영능력
실적은?

현재 코오롱그룹 지주사 코오롱 최대주주는 이웅열 전 회장이다. 지분율은 49.74%다. 아직 이 부사장은 코오롱 주식을 1주도 보유하고 있지 않다.


이 부사장이 자리를 옮길 코오롱글로벌의 올해 실적은 상승하고 있다. 3분기 누적 기준 연결 매출액은 2조6921억원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5.9% 증가한 수치다.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더 큰 폭으로 늘어났다. 직전년도 대비 각각 53%, 115.8% 수직상승한 1290억원, 697억원을 기록했다.

65년째 동업경영을 이어오고 있는 삼천리그룹은 3세 경영 궤도에 들어섰다. 그룹 지주사 삼천리의 최대주주였던 이만득 명예회장은 지난 8월 2대 주주로 물러났다. 최대주주 자리를 꿰찬 인물은 이은백 삼천리 미주본부 사장과 유용욱 ST인터내셔널 실장이다.
 

이들은 각각 공동창업주인 고 이장균 회장과 유성연 전 ST인터내셔널 회장의 손자들이다. 또 이만득 명예회장의 형인 고 이천득 부사장과 유상덕 ST인터내셔널 회장의 아들이기도 하다.

이은백 사장과 유용욱 실장은 지난 8월 모두 4차례에 걸쳐 3574주를 사들였다. 그 결과 이들의 보유 지분율은 9.18%로 조정되면서 기존 최대주주였던 이만득 명예회장의 8.34%를 넘어서게 됐다. 전체 주식 수로 살펴보면 이은백 사장은 37만2070주를 보유하고 있다. 유용욱 실장은 이보다 1주 적은 37만2069주를 갖고 있다.

다만 최대주주 변경으로 당장 승계를 언급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지적도 있다. 현재 이만득 명예회장과 유상덕 회장은 그룹 경영 전면에 나선 상태다. 이들의 나이는 60대로 경영권을 당장 물려줄 시기는 아니라는 관측도 있다. 이만득 명예회장의 3녀 이은선 삼천리 상무가 전무로 승진한 점도 간과하기 어렵다.

이은백 사장은 지난해 12월 부사장에서 사장으로 승진했다. 2004년 삼천리에 입사한 그는 2014년부터 미주본부 부사장으로 근무했고, 지난해 사장으로 올라섰다. 유용욱 실장은 지난 3월 ST인터내셔널 사내이사로 이름을 올렸고, ST인터내셔널 회장인 부친으로부터 경영 수업을 받고 있다.

DB그룹은 세대교체에 들어갔다. 김준기 전 회장의 장남 김남호 DB손해보험 부사장은 지난 7월 그룹 회장에 선임됐다. DB그룹은 지난 1969년 김준기 전 회장이 창업했다. 50년 만에 2세 경영의 서막이 오른 셈이다.

당시 김남호 회장은 취임사를 통해 “앞으로 DB를 어떠한 환경변화도 헤쳐 나갈 수 있는 지속성장하는 기업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다짐한 바 있다.

후계 경쟁력 선점법 각양각색
최대주주 확보 승계의 마침표

김 회장은 DB그룹 지배구조 정점에 있다. 그룹은 DB손해보험 이하 금융 계열사와 DBInc. 이하 제조 계열사로 구축돼있다. 김 회장은 DB손해보험과 DBInc.에서 각각 9.01%, 16.83%의 지분율을 보유하고 있는 최대주주다.

DB손해보험의 올해 3분기 누적 기준 별도 영업이익은 5915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3.2% 상승했다. 순이익 역시 4420억원으로 직전년도 동기 대비 34.4% 상승했다.

DBInc.에서도 호실적을 기록 중이다. 회사의 3분기 누적 기준 별도 매출액은 지난해에 비해 16% 증가한 1978억원을 나타냈다.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동기간 각각 35.7%, 49.1% 증가한 205억원, 142억원이었다.

1975년생인 김 회장은 지난 2002년 외국계 컨설팅회사인 AT커니에서 3년간 근무했고, 2007년 워싱턴대 대학원에서 경영학석사(MBA)를 취득했다. 이어 UC버클리대에서 금융 과정을 수료한 뒤 지난 2009년 DB그룹에 입사했다. 김 회장은 동부제철, 동부팜한농 등 여러 계열사에서 실무경험을 쌓았고 DB금융연구소에서 금융전략실장 등을 역임한 바 있다.
 

한국테크놀로지그룹 후계 구도는 안갯속이다. 오너 일가는 조양래 회장에 대한 성년후견 심판과 함께 대립하는 모양새다. 구도는 차남 조현범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사장 대 장남 조현식 한국테크놀로지그룹 부회장과 장녀 조희경 한국타이어나눔재단 이사장, 그리고 차녀 조희원씨다.

그러던 중 한국테크놀로지그룹은 기존 조현식 부회장 단독 대표이사 체제에서 조현범 사장을 대표이사로 신규 선임하며 각자 대표이사 체제로 전환했다. 경영권 분쟁이 진행 중인 와중에 단행된 인사인 만큼 조현범 사장의 선임 배경을 두고 업계 이목이 집중됐다.

그룹 지주사인 한국테크놀로지그룹 최대주주는 조현범 사장(42.90%)이다. 그는 지난 6월 조양래 회장의 지분 23.59%를 시간외 대량매매로 확보하면서 최대주주로 단번에 올라선 바 있다. 조현식 부회장은 19.32%를 보유하고 있다. 조희경 이사장과 조희원씨는 각각 10.82%, 0.83%에 그친다.

터다지고
발판 마련

경영권 분쟁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조희경 이사장은 지난달 26일 <연합뉴스>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조 사장이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리기 전까지 아무 문제없었다”며 “조 사장이 가족도 모르게 비밀작전 하듯 갑작스럽게 주식을 매매하는 욕심까지 낼 것으로 생각하지는 못했다”고 밝힌 바 있다.

조 이사장은 성년후견 신청 뒤 조 회장이 ‘정말 사랑하는 첫째 딸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내용의 입장문에 대해서 “아버지가 쓴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아버지는 입장문에 나온 어법과 내용으로 평상시 말씀하지 않는다”며 “이처럼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아버지의 의견인 것처럼 모든 일을 조정하는 것이 현실이고 문제”라고 주장했다.

조 이사장은 성년후견 심판에 집중할 계획이다. 장남인 조현식 한국테크놀로지그룹 부회장은 지난 10월 참가인 자격으로 의견서를 냈다. 조희원씨도 의견서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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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