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격 인터뷰> 영화 ‘내가 죽던 날’ 신예 박지완 감독의 뚝심

[일요시사 취재2팀] 함상범 기자 = 국내에는 상업영화 흥행공식처럼 따라다니는 것들이 있다. 먼저 이야기의 전개 속도가 빨라야 하며, 카체이싱처럼 화려한 볼거리가 동반되면 더 좋다. 인물 간의 갈등은 자극적인 소재일 때 더욱 끌리고, 배우들이 연기할 때 감정선도 진폭이 클수록 관심을 받는다. 엔딩은 힐링이나 위로보다 복수로 마무리돼야 더 짜릿하다. 이런 부분에 충실했을 때 흥행 요소가 있다는 말이 나온다. 
 

신작 <내가 죽던 날>은 앞서 언급한 흥행 요소를 철저히 피해갔다. 느린 속도감에 화려한 장면은 거의 없다. 충분히 자극적인 요소를 앞세울만한 소재도 깔아놓았는데, 활용하지 않는다. 배우들의 감정선도 전반적으로 절제돼있다. 주인공의 눈을 따라 사건으로 들어가는데, 도착점은 인물들의 깊은 감정이다. 새로운 화법의 이 영화가 강조하는 메시지는 위로다. 

흥행 요소를 비껴간 <내가 죽던 날>은 엄청난 여운을 남긴다. 사건 중심에서 인물 중심으로 변주하는 화법이나 인류애가 느껴지는 메시지, 배우들의 절제되고 차분한 연기, 존중과 배려가 담긴 연출자의 배려심이 영화에서 전달된다. 혹자는 지난해 국내 영화계를 강타한 <벌새>의 그것과 비슷하다고도 한다. 

박지완 감독의 뚝심이 없었더라면, <내가 죽던 날>은 색감이 분명한 좋은 영화로 탄생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걸출한 신인 감독의 출현이다. 다음은 박 감독과의 일문일답.

- <내가 죽던 날> 시나리오를 직접 썼다. 어떻게 출발하게 된 작품인가?

▲  2013년에 처음 시작해서, 컴퓨터에 넣어놓고 종종 꺼내서 붙이고 한 작품이다. 가끔 보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초고나 개봉작이나 엔딩은 비슷하다. 처음에 보여드렸을 때는 보신 분들의 욕망이 투영됐다. 


어떤 분들은 세진(노정의 분) 아빠 사건을 중심으로 범죄 스릴러를 만들자고 했다. 또는 현수의 아픔을 더 강하게 드러내서 극복기를 그려보자고 한 분들도 있었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서 기다렸다. 

그러다 권남진 PD님을 2018년 말에 만났다. 별 기대 없이 나갔는데, 제가 하고 싶은 걸 잘 읽어주셨고, 그러면서 시나리오가 확장됐다. 이 작품은 임자를 만나지 않으면 오해가 많을 수 있는 시나리오다. 

배우들도 잘 이해해야 하는데, 김혜수 선배가 정확하게 읽어줬다. 당시에는 ‘이게 뭐지?’ 싶었다. 혜수 선배가 캐스팅되고 나서는 일이 수월하게 풀렸다. 힘이 컸던 것 같다. 

- 놀라운 점은 작품의 뚝심이다. 기존의 흥행 공식을 벗어난 화법이다. 말 그대로 뚝심이 보인다.  

▲ 대단한 의지가 있었다기보다는 하고 싶은 얘기가 명확하게 있었던 것이다. 이 영화는 사라진 소녀의 코드를 따라가는데, 기존 이런 미스터리 영화와 도착지가 다르다. 샛길로 셀 수 있는 길이 많아서 섬세하게 지도를 그려야 하는 게 필요했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원하는 길을 갈 수 있었다. 

- 이 영화를 통해서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인가.

▲ 저는 사실 그 당시에 재밌는 것들을 넣은 것이다.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어떤 계기를 통해 서로 영향을 준다. 방금 전까지도 몰랐던 사람인데, 그 사람들 때문에 다음날을 잘 살 수 있는 그런 경우들이 있다. 나쁜 경우도 있겠지만, 좋은 경우도 많다. 그 부분을 영화적으로 보여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 섬세한 지도를 그려야 한다고 했는데, 중점적으로 생각한 부분이 뭔가. 

▲ 현수(김혜수 분)는 직업이 남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감정이 들어갈 것도 없고, 냉정하게 사건 속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수사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어떤 상황이었건 결과만을 보는 직업인데, 본인이 어떤 사건을 경험하면서 상황을 접해보니 다른 게 보인다는 걸 표현해야 했다. 이걸 표현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만들고 싶은 욕심은 강했다.

관객들이 따라갔으면 하는 바람도 컸다. 요즘 영화들은 신이 시작하면 가져가는 게 있어야 하는데, 현수는 사람을 만나는데 얻어가는 게 없다. 관객들에게 견디라고 하는 거다. 그것을 모두 견디고 나면 어떤 깊은 여운을 얻을 것인데, 견뎌줄지 궁금하다. 그래도 관객들이 워낙 똑똑하고 현명해졌기 때문에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제목이 강렬하다. 이 제목은 어떻게 선택하게 됐나. 

▲ 너무 어둡다고 해서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내가 죽던 날은 세진의 기준에서 죽던 날이다. 다시 말하면 다시 태어난 날이기도 하다. 현수가 세진을 보니까 나도 죽었던 날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고, 다시 살아가야겠다는 힘도 얻는다. 어떤 날을 기준으로 같이 겪은 것도 아니고, 시공간도 다른데, 만나는 지점이 있다. 이 아이러니를 읽어주길 바랬다. 

- 이 작품이 놀라운 것 중 하나는, 충분히 자극적인 요소를 깔아놨는데 하나도 활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세 수준으로 잘라낸다. 현수의 이혼 과정에서의 문제점, 세진과 남성의 하룻밤 등 여러 가지가 정황상 보이는데 장면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연출자의 배려심인가? 

▲ 현수의 사연 같은 경우는 이혼이 시작점이 됐을 수 있다. 정확히 말해서 이혼으로 인해 질문이 시작된 것이다. ‘괜찮은 삶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내 인생은 맞는 건가?’ ‘내 잘못인가? 아닌가?’ 이런 류의 질문이다. 

어찌 됐든 그 질문들로 인해 잠도 잘 수 없다.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있다. 어떤 면에서 현수는 모욕을 겪은 사람이다. 일부 사람들을 보면 너무 심한 모욕은 언급도 하지 않는다. 해명할 힘도 없고, 해명을 하면 더 깊은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 장면으로 보여주기보다 현수의 태도로 드러나길 바랐는데, 혜수 선배가 정말 잘해줬다고 생각한다. 

- 현수는 동료와 바람을 핀 건가? 정확하게 나오지 않았다. 

▲ 의도적으로 불분명하게 한 지점이다. 현수가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고 해도 후배인 경찰 파트너와 좋은 관계였고 한 번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면 그렇게 볼 수도 있는 다정함과 배려가 있는 관계였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후배의 아내와도 관계가 좋았을 테지만 결혼을 앞둔 상태에서 그런 소문을 맞닥뜨리게 되면 보통은 그 관계를 이어가기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현수 입장에서는 굉장한 모욕을 겪은 데다 친한 동료와 관계가 끊어야 하는 상황이었을 텐데, 현수의 캐릭터에서는 그 모욕과 관계된 그 어떤 언급조차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수근거림에 대해 대놓고 해명을 하지도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변호사가 남편의 주장에 대해서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냐고 물었을 때 해명이 아니라 ‘그 어떤 부탁도 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이죠. 아마 남편은 그런 현수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 ▲ⓒ워너브라더스코리아

- 세진의 경우도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았다. 2차 가해를 피하고 싶었던 것인지. 


▲ 세진이 주위에는 오빠를 제외하고는 각자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선과 악이 딱히 없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데, 희생까지는 하지 않는다. 형준(이상엽 분)도 좋은 의도였을 것이다. 세진이 아빠에 대해 알고 있으니 세진에게 뭔가 더 듣고 싶었을 것이고, 그러면 사건도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관객의 상상에 맡기고 싶었다. 만약 그게 형준의 잘못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나면 이 모든 불행이 형준 탓이 되버리니까. 그걸 바라지는 않았다. 그러면 변질이 되니까.

- 이 영화는 김혜수의 역할이 크다. 우울감을 기저에 깔고 있는 인물을 정말 훌륭히 표현했다고 본다. 

▲ 현장에서는 찍는 데 바쁘다 보니까, 연기를 잘하시는구나 정도였는데 편집하면서 보니까 정말 대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산이 넉넉한 것도 아니라서 스케줄이 정말 빡빡했다. 원룸은 뛰고 감정 잡고 등등 모든 장면을 하루에 해결했다. 그렇게 모든 걸 하루에 하는데 잘하는 분이 또 있을까 싶다. 척하면 척하고 알아 들으시고, 아이디어도 많이 주신다. 

저는 개인적으로 김혜수라는 배우에서 슬픈 눈이 보였다. 섬세한 선이 마음에 들었다. 연약한 김혜수를 오래 보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2019년 김혜수의 현재를 잘 담아내고 싶었다. 현수를 얼마나 따라갔느냐에 따라 영화를 보고 느끼는 폭이 클 것 같다. 개인적으로 많이 느끼길 바람이 있고. 김혜수라는 배우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따라오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 김혜수에 대한 첫 인상은 어땠나. 


▲ 선배님의 첫 인상은 매우 배려심 깊은 스타로 보였다. 제가 만난 선배님은 굉장히 작품에 대해 열정적으로 감상을 얘기해주셨고 정말 꼼꼼히 읽고 얘기해주시는 정성스러운 사람이었다. 다만 인물들의 상황에 매우 공감하고 그걸 표현하는 부분에서 아이디어도 주시고 해서 처음 만난 자리고 하시겠다고 답을 주는 자리는 아니라서 마음 속으로 거절 하시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뵙고 얘기를 들을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던 게 기억이 난다. 

- 기대 이상으로 연기를 잘한 배우가 세진을 연기한 노정의다. 이번 작품으로 연기력이 완전히 증명됐다고 생각한다. 

▲ 10대가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처음 정의를 만났을 때 가만히 있을 때는 표정이 서늘하다가 웃을 때는 활짝 핀다. 호기심이 가는 웃음이었다. 만나서 얘기해보니 어린 나이같지 않게 영민하고 똘똘하다. 경력도 많다. 아역 치고 학교도 열심히 다녔다. 친구들하고 잘 지내기도 하고, 특이한 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진이도 그럴 것 같았다. 주어진 조건에서 열심히 사는 친구. 

실제로 촬영할 때 정의는 좀 힘든 상태였다. 입시 때문에. 사실 연기만 하기도 벅찬 숙제인 정의 입장에서는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한테 ‘괜찮니?’라고 하면 눈으로는 ‘안 괜찮아요’라고 하는데, 다른 내색은 안 했다. 

정의는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의 세계에 있다 보니 지나치게 똘똘하다. 스크립터가 말하길 정의는 연결을 맞출 게 없다. 자기가 알아서 왼손 오른손을 다 맞추고 있다. 솔직히 안쓰러웠다. 얼마나 이 현장에서 많은 요구를 받았으면, 그런 것까지 다 고민하고 익혔겠나. 아마 세세하게 아역을 배려하는 현장이 많지 않았을 텐데, 본인이 이렇게 저렇게 하면서 스스로 기술을 익힌 거다.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그랬다. 태국 촬영 쯤에 학교에 합격했다고 해서 정말 기뻤다. 

- 이번에 입봉을 하게 됐는데, 이전의 이력은 어떻게 되나?

▲ 영화사 봄에서 마케팅 업무를 담당했다. <쓰리 몬스터> <달콤한 인생> <너는 내 운명>을 담당했다. 영화 학교를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영화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스크립터 일을 2008년부터 했다. 언제 데뷔할지 모르는 시간들이었다. 그 시간을 잘 보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많았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려고 했다. 

- 영화에 대한 설명, 스스로에 대한 판단, 타인에 대한 생각 등 전반적으로 냉철하다. 객관화가 매우 잘된 느낌이다. 

▲ 냉철하게 봐야만 한다. 주위에 조급하게 데뷔해서 실력 발휘를 못하는 친구들도 많이 봤다. 스스로 감독이라 칭하기 부끄럽다. 몇 편을 찍어야 감독이라는 칭호가 어울릴지도 고민해 봤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이야기를 계속 잘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럴려면 냉정해야만 한다. 나와 관객들과 이 세상이 원하는 이야기를 좋은 타이밍에 해야 한다. 

- 이번 영화를 하면서 힘들었던 게 있다면 혹시 무엇이었나. 

▲ 영화감독의 위치에서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게 있지만 마음대로 되는 건 없다. 혜수 선배님이 아무리 잘해도 내가 실수하면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 내가 유지할 수 있는 건 내 태도 밖에 없었다. 왜 만들려고 하고, 왜 이 영화를 선택했고, 어떤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더이상 영화를 찍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김혜수, 이정은, 노정의 뿐 아니라 대다수 배우가 이 영화의 의미를 읽고 들어와 줬다.

신인 감독에게 있어서는 과분한 이름이다. 근데 그 의미가 영화에 나오지 않으면, 저에게는 정말 악몽 같은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게 마음을 많이 졸이게 했다. 제가 분명히 어설펐을 것이고, 참견하고 싶었을 텐데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날 믿고 기다려줬다. 정말 판이 잘 깔렸고, 나에게는 투정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래서 결과가 좋아야만 했다.

- 힘든 순간이었을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내가 잘 가고 있구나라고 느낀 장면이 있을까. 

▲ 개인적으로 기대했던 장면이기도 한데, 후반부에 현수와 순천댁(이정은 분)이 만나는 장면이다. 촬영을 준비 중인데, 정은 선배가 울려고 한다. 눈물이 나오면 안 된다는 걸 본인도 알고 있는데 감정이 격해진 것이다. 배우들의 이해도가 높았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 고민은 누구부터 찍을 것이었냐였다. 연출자로서는 복이었다. 

또 촬영과 편집 기간을 거치는 내내 어떤 게 옳은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현수의 감정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최대한 이해를 돕고자 편집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코로나19 때문에 편집할 시간이 넉넉했다. 그래서 고민을 오랫동안 할 수 있었다. 똑똑해진 관객들이 이 감정선을 이해해줄 것이라 기대한다. 

- 이제 첫 걸음을 뗐다. 워낙 좋은 작품을 만들어서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포부가 있다면?

▲ 이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 이야기의 단점에 대한 얘기들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제가 생각한 이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이 맞다고 생각하고 밀어붙인 면이 없지 않은데 다행히 저와 생각이 같은 제작자들을 만나서 완성할 수 있었다. 만들고 보니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사실 관객들과 어떻게 만나게 될지 그래서 더 기대 되고 두렵기도 하다. 이미 세상에는 너무 많은 영화와 이야기가 존재하고 앞으로도 많을 테지만 그래도 제가 만들 영화를 위한 자리가 있다면 그래도 조금 다른, 좀 더 새로운 지점을 도전하는 영화였으면 한다. 또 그런 이야기를 기다리는 관객과 잘 만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래야 영화 만드는 일이 비로소 제 직업이 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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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캄보디아 주범 ‘리광호’ 정보기관 추적, 왜?

[단독] 캄보디아 주범 ‘리광호’ 정보기관 추적, 왜?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캄보디아를 향한 정부의 압박이 매섭다. 피해자이자 피의자인 한국인 수십명을 발 빠르게 송환한 데 이어 캄보디아에 대한 경제적 지원도 옥죌 계획이다. 정보·수사기관은 제일 먼저 대학생 피살 사건 핵심 인물인 리광호를 추적 중이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리광호는 이미 캄보디아를 떠나 라오스로 밀입국한 것으로 파악됐다. “리광호는 지난주에 이미 떴어요.” 리광호에게 대포통장을 만들어준 보이스피싱 조직원 A씨가 <일요시사>와의 연락에서 한 말이다. 리광호는 캄보디아 대학생 박모씨 피살 사건 주범으로 지목된 인물이다. 이미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에서 라오스 밀입국했다. 정보·수사기관도 관련 첩보를 입수하고 추적 중이다. “지난주에 이미 떴다” 리광호의 신상은 이미 이달 중순부터 텔레그램과 SNS 등을 통해 공개됐다. 1991년생인 리광호는 중국 길림성 훈춘시 출신이다. 키는 160㎝로 단신이며 각진 턱과 짧은 머리가 특징이다.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소학교) 졸업인 것으로 알려졌다. 캄보디아 수사당국은 박씨를 살해한 혐의로 중국 국적 조직원 3명을 체포했다. 앞서 박씨는 지난 7월17일 “현지 박람회에 다녀오겠다”고 한 뒤 캄보디아로 출국한 뒤 연락이 두절됐다가 3주 뒤 깜폿 보코산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캄보디아 캄폿지방검찰청은 지난 10일 박씨를 살해한 혐의 등으로 이들을 재판에 넘겼으나 핵심 인물은 따로 있다. 이들 조직원 3명은 박씨의 시신을 옮길 때 현장에 있었을 뿐이었다. A씨는 “캄보디아 경찰이 박씨를 살해한 혐의로 리광호를 잡기 위해 지난 8월 그의 은신처를 급습했었는데 리광호가 몇 시간 전에 미리 알고 도주했다”고 말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국내 인터폴, 경찰, 국정원 등 정보·수사기관도 캄보디아와의 공조를 통해 리광호를 추적 중이다. 그는 이달 초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에서 라오스로 밀입국한 것으로 전해졌다. A씨는 “라오스로 넘어갈 때 캄보디아 국경을 관리하는 공무원들에게 수천만원을 줬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넘어가기 직전에 대포 통장과 핸드폰을 급하게 만들어달라고 한 이후에 연락이 끊겼다. 지금은 미얀마로 넘어갈 준비라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주장했다. 수사기관 관계자도 “관련 첩보를 입수하고 추적 중인 건 맞다”며 “현지 경찰과도 공조 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리광호는 5년 전 베트남 하노이에서 보이스피싱 조직의 중간 관리자였다고 한다. 조직 내 수익을 빼돌리려는 계획이 탄로나자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가 지난해 7월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출국해 자신과 친분을 쌓은 이들을 모아 시아누크빌에 자리 잡았다. 리광호와 친분을 쌓은 인물 대부분은 조선족인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리광호는 조직에서 간부급은 아니었다. 납치 담당, 고문·협박 담당 등 맡는 일이 다 다른데 리광호는 가리지 않았다. 머리가 좋지 않아서 몸으로 하는 일을 주로 했다”고 설명했다. 라오스 북부 통해 미얀마 밀입국 준비 다른 주범 김, 강남 마약 음료 총책 이어 “조직 간부인 중국인들에게 무시당할 때마다 구금된 여자를 강간하거나 남자들에게 강제로 마약을 먹이고 폭행한다. 이건 리광호만 그런 게 아니다. 그러다가 구금된 이들이 죽으면 시신을 태운다”고 주장했다. 리광호는 현재 영등포경찰서와 인천지검의 수배 대상자다. 인터폴에서도 적색수배 상태로 확인됐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중국에서도 마약 밀수 혐의로 수배에 오른 인물이다. 중국에 다시는 못 들어간다. 들어갔다가 걸리면 사형”이라고 말했다. 국내 정보·수사기관은 리광호 외에 김모씨도 추적 중이다. 김씨는 리광호와 함께 박씨 사건 주범으로 의심되는 인물이다. 특히 리광호와 김씨는 2년 전 강남 대치동에서 발생했던 마약 음료 사건의 유통책으로 확인됐다. 마약 음료 사건은 지난 2023년 이모씨 등이 필로폰과 우유를 섞어 만든 음료를 강남 대치동 학원가에서 미성년자에게 제공하고 마시게 했던 사건이다. 당시 이씨 일당은 마약 음료 수백병을 만든 뒤 2023년 4월 대치동 학원가에서 ‘집중력 강화 음료’ 시음 행사라며 미성년자 13명에게 제공하고 실제 9명이 마시게 했다. 이후 음료를 마신 학생의 부모에게 연락해 “당신 자녀가 마약 음료를 마셨으니,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해 금품을 뜯으려고 시도했다. 불특정 다수의 미성년자를 속여 급성 중독성 마약을 투약하고 부모까지 노린 신종 보이스피싱 범죄라는 점에서 사회적 파장을 불렀다. 중국에 있던 주범 이씨는 사건 발생 50여일 만인 2023년 5월 중국 지린성 내 은신처에서 중국 공안에 검거돼 강제로 송환됐다. 대법원은 지난 4월 이씨에게 징역 23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마약 음료 제조자 길모씨는 징역 18년, 마약 공급책 박모씨는 징역 7년이 확정됐다. 진짜 두목 따로 있다 당시 필로폰을 공급한 중국 국적 총책은 검거돼 캄보디아 법원에서 26년형을 선고받았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리광호와 김씨는 수사를 통해 추적해 왔던 인물이다. 필로폰 4kg 이상을 밀반입하는 걸 주도했고 그걸 이씨와 박씨가 국내에 뿌렸던 사건으로 파악됐다”고 전했다. 리광호가 속한 캄보디아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의 웹사이트 중 일부는 북한 IT 전문가들이 구축한다는 게 <일요시사>와 접촉한 이들의 설명이다. 또 다른 조직원 B씨는 “전부 다 북한 애들이 하진 않는다. 허술한 웹사이트는 북한 전문가들의 작품이 아니다. 한국인 범죄자들은 피싱으로 중국 조직에 1억원의 수익을 안겨주면 수수료로 7~10%의 수고비를 받는다. 북한과 조선족은 더욱 싸다. 3~5% 정도면 굉장히 열심히 한다”며 “중국 조직 입장에서는 한국인들보단 북한이나 조선족을 동원하는 경우를 선호한다”고 했다. 최근 정부는 김진아 외교부 2차관을 단장으로 정부 합동 대응팀을 캄보디아에 파견했는데 여기에는 경찰청, 국정원 등이 참여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캄보디아 스캠 범죄를 매우 심각하게 여기고 국정원에 “발본색원해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조직의 사활을 걸고 확실하게 해결해 국민 걱정을 덜어드려라”는 특별지시를 내렸을 정도로 정보기관 내부에서는 리광호와 김씨와 같은 조직원들 추적에 사활을 건 분위기다. 국정원은 캄보디아 스캠 범죄조직은 중국 등 다국적 범죄조직이 캄보디아로 침투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프놈펜, 시아누크빌을 비롯해 총 50여곳에 약 20만명의 조직원이 있는 것으로 추산했다. 이들 조직들의 범죄수익은 2023년 기준 125억 달러(약 18조원)로 캄보디아의 국내 총 GDP의 절반 수준에 달했다. 다국적 범죄조직 이들 조직은 과거 카지노 자금 세탁 등을 했던 조직으로 코로나 팬데믹 이후 국경이 폐쇄되면서 캄보디아로 침투해 스캠 범죄로 범죄를 변경했다. 이들 조직은 자체적으로 무장경비원까지 배치하고 있다. 비정부 무장단체가 장악한 지역이나 경제특구 등 캄보디아의 다양한 지역에 분포돼있어서 캄보디아 정부도 단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정원은 한국인들의 현지 방문 인원과 스캠 단지(웬치) 인근 한식당 이용 현황 등을 통해 스캠 단지에 있는 한국인 범죄 가담자를 1000~2000명가량으로 추산했다. 국정원은 이들에 대해 “100%는 아니지만, 피해자라기보다는 범죄에 가담한 사람들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캄보디아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의 자금을 관리하는 배후로는 프린스그룹과 후이원이라는 현지 기업이 언급된다. 이 두 기업은 웬치에서 감금, 사기 행각을 벌이거나 북한 해킹 조직의 자금을 세탁하는 등 전방위 범죄를 저지르며 천문학적 수익을 벌어들였다. 프린스그룹은 캄보디아 최대 범죄 거점으로 지목된 ‘태자 단지’를 운영하는 등 조직적 인신매매와 불법 감금, 사기 등의 배후로 알려졌다. 중국에서도 불법 도박이나 성매매 등으로 범죄 자금을 벌어들였다. 베트남 국경 지역에 있는 진베이 단지는 중국 9개 성의 법원에서 심리된 83건의 형사사건에 연루된 상황이다. 천즈 프린스그룹 회장이 기업을 성장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훈 센 전 총리 등 캄보디아 고위층과 긴밀한 유착 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천즈는 수많은 논란에도 훈 센 전 총리 정권에 막대한 자금을 바치며 캄보디아의 최고위층 귀족 칭호인 ‘옥냐’를 캄보디아 국왕으로부터 수여받았다. 국내 은행사가 이들의 범죄 자금을 유통·세탁하는 데 이용됐을 우려도 나온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국민은행·전북은행·우리은행·신한은행·IM뱅크 등 국내 금융사의 캄보디아 현지 법인 5곳은 프린스그룹과 총 52건의 거래를 진행했다. 거래액은 1970억4500만원에 달한다. 아직 900억원이 넘는 자금이 여전히 현지에 남아 있다. 보이스피싱·스캠 조직 웹사이트 서버 북한이? 국정원·정보사 해외 파트·대북팀 동원해 추적 후이원은 범죄조직의 자금을 세탁하며 회사의 규모를 키웠다. 후이원은 ‘캄보디아의 알리페이’라고 불리는 후이원페이를 가지고 있는 금융, 결제, 정보기술(IT) 서비스 복합 기업이다. 이들은 자사의 기술력을 활용해 국제 해킹 조직이 사이버 사기, 랜섬웨어 등으로 얻은 범죄수익을 세탁해 왔다. 후이원페이는 훈 센 전 총리의 조카인 훈 토가 주요 주주로 등록된 회사이기도 하다. 정보기관에 따르면 이 기업은 북한 정찰총국 산하 해킹 그룹 ‘라자루스’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후이원은 공개·비공개 텔레그램 등 채팅방을 이용해 사기 조직과 자금 세탁범을 연결하고 범죄수익을 해외로 유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2021년 이후 700억~890억 달러 규모의 가상화폐 거래를 중개했고 일부는 라자루스로 흘러 들어갔다. A씨는 “북한 IT 전문가들이 피싱·스캠 관련 웹사이트를 제작하기 시작한 건 4~5년 전부터”라며 “북한이 제작한 사이트의 경우 퀄리티가 상당하다. 그 대가로 후이원이 스테이블코인을 만들어 북한 쪽에 수익을 전달하기도 한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해외 파트인 해외정보국과 대북 업무 담당자 상당수는 이미 캄보디아를 포함한 동남아 곳곳에서 관련 첩보를 입수 중이다. 국정원은 1차장이 해외 파트, 2차장이 대북·대공 업무를 담당한다. 2차장은 특히 북한 정보수집·분석 등 국정원의 대북 분야 실무를 총괄하는 자리다. 이외에도 국군정보사령부 동남아팀 휴민트(HUMINT·인간정보)들도 현지서 국정원과 정보를 공유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정보사 출신 한 군 고위 관계자는 “캄보디아 수도권에 대남공작원들이 많긴 하지만 웬치에 북한 대사관 관계자나 공작원들이 있진 않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고, 단지 대가를 받고 캄보디아 범죄조직 사이트를 만들어주거나 불법적으로 벌어들인 자금으로 세탁해 주는 게 북한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배후? 북한 연루설 다른 정보기관 관계자도 “국정원을 비롯한 정보사가 이번 캄보디아 사건에서 할 수 있는 건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으로 인해 우리 국민이 피해를 본 금액이 얼마나 많은지와 북한에도 그 금액이 흘러 들어갔는지, 북한과 관련된 인물들이 얼마나 있는지 등이다. 캄보디아에서의 대남 관련자들은 절대로 개인적으로 특정 행위를 하지 않는다. 예시로 캄보디아 무역 또는 사업가, 식당을 운영하는 인물 등이 대남공작원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