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재료 이력서> (23·24) 쑥갓, 시금치

고려의 국화와 채소의 왕

오이, 쑥갓, 가지… 소박한 우리네 밥상의 주인공이자 <식재료 이력서>의 주역들이다. 심심한 맛에 투박한 외모를 가진 이들에게 무슨 이력이 있다는 것일까. 여러 방면의 책을 집필하고 칼럼을 기고해 온 황천우 작가의 남다른 호기심으로 탄생한 작품 <식재료 이력서>엔 ‘사람들이 식품을 그저 맛으로만 먹게 하지 말고 각 식품들의 이면을 들춰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나름 의미를 주자’는 작가의 발상이 담겨 있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인해 인간이 식품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 쑥갓 ⓒpixabay

 

쑥갓

다음은 속명(俗名) 호개(蒿芥)로 일컬어지는 김창업의 작품 ‘동호’(茼蒿) 이다. 

有菜不知名(유채부지명)
이름 모르는 채소 있는데
小花如菊黃(소화여국황)
자그마한 꽃 누런 국화 같네
茼蒿載本草(동호재본초)
동호는 본초에 기재되어 있는데
顧我考未詳(고아고미상)
보건데 나는 세세히 살피지 못했네 

고려시대 때부터 식용한 것으로 추측되는 쑥갓의 한자명이 위 작품에 등장하는 茼蒿(동호)이다.

김창업은 쑥갓의 꽃이 국화 같다고 했는데 정약용도 그의 작품서 茼蒿花似蘜(동호화사국)이란 표현을 사용해 ‘쑥갓 꽃은 국화와 비슷하다’고 했다. 


이를 살피면 쑥갓과 국화의 관계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쑥갓의 꽃은 국화와 닮았는데 조선조 실학자 이규경은 그의 작품인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쑥갓을 지칭해 高麗菊(고려국) 즉 고려의 국화로 명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쑥갓이란 이름은 어디서 파생했을까.

바로 동호의 속명 호개(蒿芥)에서 기인한다.

蒿芥에서 蒿는 쑥을 그리고 芥는 갓을 의미하니 더해 쑥갓이 된 것이다.

이 같은 이유로 쑥갓을 쑥을 의미하는 艾(애)와 芥(개)를 합해 艾芥(애개)라 칭하기도 한다.

여하튼 다시 위의 작품으로 돌아가 보자.


본초는 송나라 당신휘(唐愼徽)가 짓고 구종석(寇宗奭)이 수정한 ‘경사증류대전본초(經史證類大全本草)’의 약칭이다.

이 책은 약물학에 대한 저서로 증류본초라고도 한다.

김창업은 본초에 실려 있는 쑥갓을 세세하게 살피지 못해 그 이름을 알지 못했다고 했다. 

쑥갓의 유래를 살피면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로 알려져 있는데 그곳에서는 식용이 아닌 관상용으로 재배되고 있고 그 이름 또한 Crown Daisy(왕관 모양의 데이지 꽃)로 채소가 아닌 꽃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일성록>을 살피면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던 봉림대군(후일 효종)을 호종했던 노원 역리 출신 홍끗룡(洪唜龍)이 효종이 환국할 때 호개(蒿芥) 종자를 숨겨 와 왕십리에 파종했고 효종이 보위에 오른 이후 쑥갓을 진상해 가자(加資, 품계가 오름)됐다는 기록이다.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앞서 이야기, 고려시대부터 식용됐다는 이야기는 오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조선조 3대 임금인 태종 이방원이 ‘이제부터 어선(御膳)에 茼菜(동채, 쑥갓)를 올리지 말라’고 한 기록을 살피면 고려시대에도 식용됐다는 추측이 그르지 않다.  

이제 조선후기 문신이었던 이학규(李學逵, 1770∼1835)의 작품 쑥갓(艾芥, 애개)을 감상해보자.

蒿芽芥其臺(호아개기대)
쑥으로 싹 터 그 대는 갓인데
芳馨溢齒本(방형일치본)
그윽한 향기 입안 가득하네
嘗聞煗爐供(상문난로공)
일찍이 난로에 기여했다 들었고
再蒔須秋晩(재시수추만)
늦가을 다시 심어도 되네

위 작품에 등장하는 煗爐(난로)에 대해 부연한다.

난로는 난로회의 준말로 10월 초하루가 되면 화로에 숯불을 피우고 석쇠를 올려놓은 다음 쇠고기를 양념해 화롯가에 둘러앉아 구워 먹었던 풍습으로 그 과정에서 쑥갓이 등장했다고 한다. 


그만큼 쑥갓이 애용됐음을 의미한다.

실학자 이규경 ‘고려의 국화’로 표현
‘뽀빠이’ 하면 생각나는… ‘채소의 왕’

그 이유가 무엇일까.

위 작품에 그 이유가 함축돼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일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기려 한다.

그윽한 향기를 의미하는 芳馨(방형)과 난로회에 기여했다는 煗爐供(난로공)을 살피면 능히 짐작되리라 생각한다. 


시금치

시금치에 대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기록을 살펴본다. 

원산지는 페르시아지방으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에선 1577년(선조 10)에 최세진(崔世珍)에 의해 편찬된 <훈몽자회>에 처음 시금치가 등장하고 있어서 조선 초기부터 재배된 것으로 여겨진다. 
 

▲ ▲시금치 ⓒpixabay

이 내용이 옳은지 알아보기 위해 다음 작품을 살펴 보려 한다.

김창업의 형인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의 작품이다.

菠薐 俗名時根菜(파릉, 속명 시근채)
시금치 속명 시근채

菠薐傳數名(파릉전수명)
시금치는 여러 이름 전하는데
其始出波羅(기시출파라)
그 시작은 페르시아에서 나왔네
我國有俗稱(아국유속칭)
우리 나라에는 속칭 있는데
恐是赤根訛(공시적근와)
아마도 적근의 와전인 듯하네 

위 작품의 제목인 菠薐(파릉)이 시금치의 한자명으로 전래 과정은 <훈몽자회>의 내용이 맞다.

그렇다면 전래 시기는 어떠할까.

서거정의 작품이다.

謝金少尹同年 永濡 送菠菜子(사김소윤동년 영유 송파채자) 
동반 급제한 소윤 김영유가 시금치 씨앗을 보내준 데 대해 사례하다 

我有荒田數頃餘(아유황전수경여)
내게 내버려둔 밭 두어 이랑 있어
秋來擬種滿園蔬(추래의종만원소)
가을에 전원 가득 채소 심으려 했는데
感君多送靑菠子(감군다송청파자)
고맙게도 자네 시금치 씨앗 많이 거두어
急喚僮奴送弊廬(급환동노송폐려) 
급히 종 아이 불러 우리 집에 보내주었네 
圓莖如竹葉如磐(원경여죽엽여반)
둥근 줄기는 대같고 입은 너럭바위 같은데
滿甕沈虀味自酸(만옹심제미자산) 
항아리 가득 절이면 맛이 절로 새콤하네 
預識秋來滋味足(예식추래자미족)
가을 되면 맛이 풍부할 걸 미리 아니
煩君爲我一來看(번군위아일래간)
번거롭더라도 자네 나를 위해 와서 보시게

위 작품은 서거정이 1457년(세조 3) 평양 소윤(정4품)이었던 김영유(1418∼1494)가 시금치 씨앗을 보내준 일에 대해 김영유에게 사례하는 글이다. 

위 글에 등장하는 菠菜(파채)와 菠(파) 역시 시금치를 지칭하는데, 시금치가 서거정과 김영유에게 상당히 친숙한 나물로 여겨진다.

특히 사대부인 서거정이 시금치를 식용하는 방법까지 상세하게 알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훈몽자회>와는 다르게 오래전부터 즉 조선 이전 고려조 후반부터 시금치가 전래된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여하튼 시금치는 우리 세대에게 미국서 제작한 인기 애니메이션의 캐릭터 ‘뽀빠이’를 통해 친숙해졌다.

아직도 뽀빠이와 뽀빠이의 여자 친구 올리브, 악역으로 등장하는 블루토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질 정도다.

줄거리는 <두 얼굴의 사나이>(The Incredible Hulk)에 등장하는 헐크처럼, 평소에는 나약한 뽀빠이가 위기에 처하게 되면 시금치를 먹고 강력한 인물로 변해 블루토를 응징하는 방식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시금치가 남자들의 정력 강화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여기고 애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금치와 정력은 별개의 문제다.

그와 관련해선 1983년 5월10일자 <동아일보>의 기사를 인용해 본다.

‘시금치 정력제 안 돼’ ‘타자수 실수로 논문 잘못 알려져’라는 제하로 <AFP> 기사를 인용했다. 

「시금치의 다량섭취가 정력을 강화시킨다는 학설은 잘못된 것이며 이 학설을 근거로 뽀빠이 만화까지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 한 조심성 없는 여비서의 타자 실수에 그 전적인 책임이 있다는 보고서가 최근 발표돼 화제」

비록 시금치가 정력제로서는 적합하지 않지만 건강식품임에는 틀림없다. 시금치에는 채소 중에서 비타민 C가 가장 많이 들어 있다. 또 비타민 B1, 비타민 B2, 나이아신, 엽산, 사포닌 등이 함유돼있으며 당질, 단백질, 지방, 섬유질, 칼슘, 철 등의 영양소도 함유돼 있어 채소의 왕으로 불릴 정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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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회 문턱을 넘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이 사법부를 강타했다. 검찰은 1999년 특별검사제 도입 이후 권한을 조금씩 잃다가 올해 해체가 결정됐다. 검찰이 26년 전 느끼다가 현실이 된 불안을 이젠 사법부가 느낄 차례일지도 모른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범여권이 지난 24일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내란 사건만 맡는 전담재판부를 만들어 운영한다”는 취지의 예규 제정 방침을 밝혔다. 특별재판부 영장전담 법관 하지만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같은 날 논평을 통해 ‘24일 처리 방침’을 밝혔다. 이날 법안 처리는 이미 예고된 결과였다. 박 대변인은 지난 21일 오전 기자 간담회에서도 “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예정대로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이 원래 처리하려던 법안은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법’이었다. 이 법안이 통과됐다면, 12·3 비상계엄 관련 재판을 맡을 특별재판부가 설치되고, 영장 심사를 맡을 특별영장 전담 법관이 따로 배정됐을 것이다. 이들은 국회·판사회의·대한변호사협회가 3명씩 추천한 위원으로 구성되는 9인 규모의 추천위원회의 2배수 추천과 대법원장의 임명을 거칠 예정이었다. 아울러 상고심에선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임명했던 대법관은 모두 제척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에 대해선 각계에서 위헌 논란을 제기했다. 그러자 민주당은 지난 16일 내용을 대폭 수정했다. 명칭도 특별재판부에서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 전담재판부 후보추천위원회는 법무부 장관·헌법재판소 사무처장 등 외부 인사를 제외한 후 법관으로만 구성될 예정이다. 추천위원회에 들어갈 법관 중엔 각급 판사회의·전국법관대표자회의가 포함된다. 전담재판부에 소속될 법관은 추천위원회·대법관회의를 거쳐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 등 12·3 비상계엄 주요 연루자들은 이미 형사재판 제1심을 받고 있다. 전담재판부는 항소심부터 맡을 예정이다. 대법원은 민주당의 공세에 맞서 반격에 나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대법관 행정회의를 열어 ‘국가적 중요 사건에 대한 전담재판부 설치 및 심리 절차에 관한 예규’를 제정하기로 했다. 여기엔 “형법상 내란·외환죄와 군형법상 반란죄 사건을 전담해 집중 심리하는 전담재판부를 설치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대법원이 규정하는 전담재판부는 무작위 배당을 거쳐 사건을 배당받을 재판부가 지정되는 방식이다. 전담재판부로 지정된 재판부가 원래 맡던 재판은 다른 재판부로 재배당된다. 예규엔 “해당 재판부는 이후 내란·외환과 관련 없는 새로운 사건은 맡지 않는다”는 규정이 포함됐다. 하지만 민주당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박 대변인은 “사법부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왜 이렇게 늦게 했느냐”며 “왜 그동안 국민을 불안과 혼란에 빠뜨렸느냐”고 비판했다. 이어 “국회의 입법권을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맞춰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내란 전담재판부 신설이 갖는 ‘진짜 함의’ 대법원 예규 제정…반격 혹은 타협안 제시 민주당 정청래 대표도 같은 날 최고위원회의 중 “대법원이 헐레벌떡 자체 안이라고 내놨다”며 “더 일찍 해야 하지 않았느냐. ‘조희대 사법부’답다는 생각이 든다”고 비판했다. 국내 헌정사에서 특별재판부는 단 2회만 설치됐다. 제헌헌법 부칙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 등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를 설치했다. 반민특위엔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가 설치됐다. 특별검찰부는 검찰총장 등 9명으로 구성됐고, 특별재판부는 ▲국회의원 5명 ▲법조인 6명 ▲사회 저명 인사 5명 등 총 16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국회가 선출했다. 두 번째 특별재판부는 1960년 4·19 혁명 이후 개정된 제4차 개정 헌법을 근거로 설치됐다. 당시 개정 헌법엔 “3·15 부정선거 및 4·19 혁명 관련자들과 관련된 형사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를 둘 수 있다”는 취지의 부칙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설치된 특별재판부는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제정을 거쳐 설치됐다. 민주당조차 ‘특별재판부’를 ‘전담재판부’로 수위를 낮춰 처리했다는 이유로 내란 특별재판부에 대해 불거진 위헌 시비를 거론한다. 법원은 ‘무작위 전산 재판 배당’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 재판부에 특정 재판을 배당한다”는 취지의 특별재판부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위헌 시비가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아직 헌법재판소가 관련 합헌·위헌 여부를 가린 적도 없다. 하지만 헌법 제27조는 “모든 국민은 헌법·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 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 배당의 무작위성은 재판에 대한 외부의 부당한 압력·영향력으로부터 법관을 보호해 재판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운 원칙이다. 이는 위헌 시비가 불거진 핵심 이유였다. 그래서 과거엔 특별재판부를 설치하기 전에 개헌 과정 중 헌법 부칙에 그 근거를 규정했다. 헌법 부칙은 헌법 본문과 똑같은 효력을 가진다. 그래서 위헌 시비가 불거질 일은 없었다. 피해 가는 위헌 시비 하지만 위헌 시비를 피하려고 제시한 ‘내란 전담재판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이어졌다. 역설적으로 “기존 재판부 배당과 큰 차이가 없다”는 취지의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사법부는 이미 무작위 배당의 예외를 운용하고 있다. ▲특허법원 ▲서울행정법원 ▲지역별 가정법원 등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법원이 따로 설치돼있는 것도 무작위 배당의 예외다. 또 각급 법원은 이미 지식 재산·환경·의료 등 특정 전문 분야를 전담할 재판부를 분류한다. 법원장 재량에 따라, 재판장들과의 협의를 거쳐 특정 사건은 ‘적시 처리 필요 중요 사건’으로 분류해 특정 재판부에 배당해서 신속한 재판 진행을 추진한다. 기소된 사건이 이미 진행 중인 재판과 사실 관계·쟁점·피고인이 같으면, 이미 진행 중인 재판을 담당하는 재판에 배당한다. 물론 민주당이 거둘 수 있는 실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정 대표는 민주당이 ‘특별’을 ‘전담’으로 바꿔가면서도 서둘러 개정안을 추진하는 이유를 분명히 짚었다. 그는 “조희대 대법원장의 사법부와 지귀연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의 재판부는 내란·외환 사건의 심리를 의도적으로 침대 축구하듯 질질 끌었다”며 “조 대법원장은 경고·조치를 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보다 못한 입법부가 나서기 전에 사법부가 진작 내란 전담재판부를 설치했다면, 지난 1년 동안 허송세월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이 분통 터지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대표의 주장 중 핵심 단어는 ‘조희대’와 ‘지귀연’이다. 민주당이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를 추진할 당시 민주당 전현희 최고위원은 지난 9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지 부장판사를 지칭해 “재판의 공정성에 의구심을 갖도록 하는 인사들을 전보·징계한다면, 굳이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들기 위한 입법 조치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정 대표는 지난 15일 최고위원회의 도중 “조희대 사법부는 특검 수사 훼방꾼이 됐다”며 “조 대법원장이 지휘하는 대법원이 지난해 12월3일 내란에 동조한 건 아닌지 강한 의구심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사법행정사무를 총괄하는 조 대법원장의 권한 일부를 사실상 박탈하고, 지 부장판사를 내란 관련 재판에서 손 떼게 할 수 있다면, 민주당은 상당한 실익을 거둘 수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재판부 배당에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힘 실어준 진짜 이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당시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 이후인 지난 2018년 4월 “권한이 집중된 제왕적 대법원장을 견제하고, 법관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를 갖고 설치됐다. 보수 진영 일각에선 이를 일컬어 “지나치게 민주당에 친화적”이라고 비판한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 설치 직후 첫 의장으로 선출됐던 최기상 당시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는 현재 민주당 의원이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지난 9월 민주당이 주장한 의제 ‘대법관 증원론’을 포함한 상고심 제도 개선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어 “사법부는 대법관 증원안을 경청하고 자성해야 한다”는 취지로 보고서를 작성·공개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일컬어 “민주당에 힘을 설어주기 위해 토론회를 개최한 게 아니냐”는 비판 목소리도 제기됐다. 대법원의 이재명 대통령에 대판 파기환송 판결에 대해서도, 정 대표는 지난 9월 전국법관대표자회의에 “조 대법원장 사퇴 권고 등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 회복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일각에선 “대법원의 예규 제정은 반격”이라고 해석한다. 그 근거로는 “내란 전담재판부를 줄곧 반대하다가 갑자기 예규 제정을 밝힌 의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는 점을 들었다. 민주당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 외에도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꿀 만한 사법개혁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대해선 “민주당의 공세를 적절한 선에서 수용해 더 큰 공세에 대비하려는 의도”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특별재판부’가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고 해서 다른 사법개혁안 통과 시도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법원으로선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꾸려는 민주당의 시도를 보면서 검찰이 해체되는 과정을 되새길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미 민주당이 주도하는 사법개혁안 자체가 사실상 ‘기존 법원 해체’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조금씩 권한 잃다 해체 결정 검 종착역은 헌재 최고법원 등극? 민주당 등 범여권이 검찰을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으로 분리해 완수했던 검찰 해체에 대해선 “헌법은 검찰 조직의 존재를 전제로 검찰총장의 존재를 규정했다”면서 위헌 논란을 제기하는 반대 측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범여권은 이를 강행했다. 큰 틀에서 보면, 검찰은 ▲특별검사제도 도입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설치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 분리 등 과정을 거쳐 해체됐다. 최초의 특별검사(이하 특검)는 지난 1999년 김태정 전 검찰총장 부인에 대한 옷 로비 의혹과 한국조폐공사 노조 파업 유도 사건에 대해 진행됐던 최병모 특검이었다. 특검이 성립됐던 배경은 “검찰이 검찰총장의 부인이 연루된 사건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시선이었다. 아울러 당시 국회 구도는 여소야대였다. 한나라당은 “사건을 축소·은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흐름을 타고 강하게 밀어붙여 특검법 제정을 주도했다. 이후 현재까지 개별 특검법은 총 16개가 통과됐고, 상설 특검은 6회 추진됐다. 검찰로서는 1999년 최병모 특검 설치가 수사권·기소권 독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현재까지 총 22회의 특검이 성립됐다는 것은 검찰에 대한 각계의 불신을 상징하는 중요 사실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검찰을 노리는 다음 단계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었다. 최초의 검경 수사권 조정은 지난 2011년 진행됐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사법경찰관이 검사의 수사 지휘에 이의를 제기하는 재지휘 건의 제도 신설 등의 내용이 담긴 안을 대통령령으로 제정해 의결했다. 지난 2016년엔 ▲진경준 게이트 ▲정운호 게이트 ▲김형준 전 부장검사의 스폰서 의혹 ▲최순실 게이트 등이 연이어 발생해 검찰의 신뢰도에 대한 강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이는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장기간 논의된 검경 수사권 논의로 연결된다. 공수처도 설치됐다. 민주당 집권 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을 강하게 기억하는 지지자들의 비원을 외면하긴 어려웠던 측면도 있었다. 그렇게 검찰은 서서히 권한을 빼앗겼다. 그러다가 지난 9월에 이르러 검찰은 내년부터 중대범죄수사청과 공소청으로 갈라질 운명에 처했다. 특히 중대범죄수사청은 행정안전부로 옮겨진다. 서서히 권한을 빼앗기다가 끝내 해체를 앞둔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민주당 등 범여권은 ▲법원행정처 폐지 ▲법 왜곡죄 도입 ▲대법관 증원 ▲재판소원 도입 등 사법개혁안을 시도하고 있다. 범여권이 사법개혁안을 모두 통과시킨다면, 사법부로서는 “검찰에 이어 사법부도 한순간에 와해된다”고 인식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한순간에 와해된다 법원행정처가 없어지면 대법원장의 권한이 줄어든다. 법 왜곡죄가 도입되면, 판사의 재판도 법적 처벌 범위 안에 포함될 위험에 노출된다. 대법관이 늘어나 대법관의 권위·희소 가치가 줄어든 후 재판은 헌법소원 제기 범위 안에 포함된다. 최종 종착지는 헌법재판소가 대법원을 제친 후 최상위 사법기관으로 규정될 순간임을 배제하기 어렵다. 지난 24일은 사법부가 느낄 법한 공포가 처음 피부에 와닿은 날이었을 수도 있다. 새해엔 민주당과 사법부의 전쟁이 더욱 거칠게 진행될지도 모른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