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결국 돌아온 ‘기라드’ 기성용

  • 구동환 기자 9dong@ilyosisa.co.kr
  • 등록 2020.07.27 11:21:10
  • 호수 12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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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물갔다고? 이대로 끝낼 순 없다! 

[일요시사 취재1팀] 구동환 기자 = ‘기라드’(기성용+제라드) 기성용이 돌아왔다. K리그 복귀를 신고한 기성용이 축구팬들을 흥분하게 하고 있다. 월드컵 3회, 올림픽 2회, A매치 110경기 출전 등 굵직굵직한 이력이 있는 그다. 축구대표팀 캡틴을 지낸 베테랑 미드필더 기성용이 친정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 FC서울 입단 기자회견 갖는 기성용

FC서울을 대표하는 축구스타 기성용이 국내 리그로 복귀했다. 기성용은 FC서울과 3년6개월 동안 계약해 2023년까지 뛰게 됐다. 기타 계약 조건은 상호 합의 하에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K리그에 정통한 관계자는 “K리그 연봉킹 전북현대 김진수(14억3500만원)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서울 최고 연봉자 고요한과 비슷하거나 더 많은 수준이다. 양측은 바이아웃(약 7억원)도 넣은 것으로 전해졌다”고 밝혔다. 

친정팀으로
캡틴의 귀환

기성용은 지난 22일 서울월드컵경기장서 열린 FC서울 입단 기자회견서 “K리그에 다시 서려고 그동안 많이 노력했는데, 드디어 오게 돼 행복하다”며 “팬들에게 좋은 축구, 만족하실 수 있는 플레이를 보여드리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지난 2월 스페인으로 떠나며 구단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향후 K리그 복귀를 다시 고려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던 그는 이날 입단식과 기자회견에선 그 일을 훌훌 털어버린 모습이었다.

검은 수트 차림으로 들어와 엄태진 사장으로부터 받은 유니폼 상의로 갈아입고, 머플러도 목에 걸어 본 그는 내내 고무된 표정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기성용은 “여러 모로 과정 등에서 아쉬운 게 있긴 했지만, 지금부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서울FC와 새로운 시작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기성용은 “겨울엔 구단에 섭섭한 부분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의견 차이가 컸다”며 “다들 아실 테니 그때 감정이 상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감염증 때문에 스페인서 가족과 떨어져 지내면서 가족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고, 떠난 뒤에도 K리그 복귀에 대한 생각을 늘 마음에 두고 있었기에 2차 협상서 서로 이해를 넓히게 됐다”고 마음을 돌리게 된 계기를 전했다.

올해 초 기성용은 FC서울로 복귀를 타진했다. 하지만 이적료 및 위약금 문제가 불거지면서 무산된 바 있다. 사건을 요약하면 뉴캐슬서 입지가 좁아진 기성용은 아시아서 선수생활을 이어가기를 희망했다. 중국 쪽으로 가닥이 잡혔으나 코로나19의 영향으로 K리그로 선회했다.

기성용이 한국행을 희망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FC서울과 전북현대는 이내 계산기를 두드렸다. 애초에 기성용은 FC서울서 셀틱으로 이적할 당시 계약서에 ‘국내 복귀 시 우선협상을 해야 한다’ ‘국내 타 구단 입단 시 26억원의 위약금’ 조건을 걸었다.

조건에 따라 FC서울과 협상한 기성용이었지만, 이적료를 두고는 조율이 되지 않았다. FC서울 측에서 터무니없는 금액을 제시하며 기성용을 힘 빠지게 만들었다. 결국 FC서울의 협상은 결렬됐고 전북현대도 기성용에 대한 관심을 보였지만, 위약금 26억원이 부담스러워 관심을 접었다.

이도 저도 아니게 된 기성용은 결국 K리그 행이 무산됐다. 

11년 만에 국내 K리그 복귀
FC서울과 이적료 갈등 봉합

이때 당시 구자철은 자신의 유튜브를 통해 아쉬움을 전했다. 구자철과 기성용은 축구 실력이 떨어지기 전에 국내 축구팬들을 위해 K리그 복귀를 하자는 의견도 나눴다고 한다. 기성용이 얼마나 K리그에 대한 애정이 큰 것을 알기에 구자철이 안타까움을 전한 것. 


이 같은 FC서울의 프런트 행동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게 일기도 했다. 스타성 있는 선수를 헐값에 데려오려고 했던 점, 위약금을 받기 위해 대승적인 차원서 절감해주지 않은 점 등은 축구팬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결국 친정팀에 실망한 기성용은 다시 해외로 방향을 틀었고 올해 2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마요르카와 6개월 단기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기대를 안고 나선 스페인 생활은 코로나19 여파로 리그가 중된되면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이후 6월부터 시즌이 재개됐지만 훈련 도중 발목 부상을 당해 리그서 4경기 연속으로 출전하지 못했다. 결국 마요르카 측과 기성용 측은 계약을 연장하지 않기로 하며 귀국을 선택했다.
 

▲ 미드필더 기성용

기성용이 스페인서 자리 잡지 못할 때 또 한 명의 ‘용’이 K리그를 누비고 있었다. 독일 프로축구 구단 보훔서 생활을 마무리한 이청용이 K리그로 돌아와 경기장을 누비며 울산 현대호랑이 축구단 상승세에 큰 역할을 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건재함을 과시하며 고국으로 돌아오고 싶어하는 해외파 선수들에게 귀감이 됐다.

이청용의 활약을 지켜본 K리그 팬들은 기성용의 국내 복귀 무산을 보면서 더욱 더 아쉬워했었다. 그런데 마침내 국내로 돌아온 기성용이 국내 경기장서 누빌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기다린 것이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축구 팬들은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2014년 브라질, 2018년 러시아까지 세 차례 월드컵에 출전했고 2012년 런던올림픽서 동메달을 딴 기성용이 K리그서 맹활약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기성용은 어릴 때부터 탄탄대로의 길을 걸었다. 기성용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5년간 호주 존 폴 칼리지에 유학을 다녀왔다. 아버지인 기영옥씨는 “축구만 아는 선수가 되지 말라는 뜻에서 어린 나이에 유학을 보냈다. 성용이는 영어로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쓰는 것도 완벽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스페인 생활
6개월 종지부

이후 2006년 18살이란 나이에 U-20 대표팀에 선발돼 2007년 20세 이하 월드컵에 참가했다. 당시 대표팀의 중앙수비수들이 줄 부상을 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기성용을 중앙수비수로 기용하며 4백 수비를 3백으로 바꿔 전술을 기성용에 맞춰 대회에 임했다.

같은 해 기성용의 소속팀이었던 FC서울에서는 세올 귀네슈라는 외국인 감독이 기성용을 신뢰한 덕분에 꾸준히 출장 기회를 가졌다. 18세였던 기성용은 K리그 20경기에 출장하며 꾸준히 실력을 향상시켰다.  

2008년에도 부상 후유증으로 시즌 초반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으나 4월2일 수원과의 컵대회 경기서 선발 출전한 것을 시작으로 팀의 주전 미드필더로 활약했고, 8월 대구 FC와의 경기서 프로 데뷔 후 첫 골을 성공시켰다.

절친한 팀 동료 이청용과 함께 비슷한 시기에 자리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2008 시즌이 끝난 후 열린 시상식서 있었던 시즌 베스트 11 투표서 가장 많은 표를 얻으며 자타공인 최고의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또 최연소 베스트 11이 됐다는 사실로 눈길을 모으기도 했다.


그 전까지 최연소 베스트 11은 1998년의 고종수(당시 20살)였으나 기성용이 19살의 나이로 경신했다.

승승장구하던 FC서울은 2009년 두 마리의 용을 잃게 된다. 기성용은 셀틱으로, 이청용은 볼튼 원더러스로 보내면서 전력에 누수가 생겼다. 셀틱으로 이적한 첫 해 폴커크와의 경기로 SPL 데뷔전을 하며, 본인의 장기인 정확한 패스 보급과 프리킥을 자랑했다. 데뷔전서 최우수 선수에 뽑히며 성공적으로 보내는 듯했으나 부상 여파로 점점 출전 수가 줄어들었다. 

출전 경기 수가 줄어든 바람에 기성용은 팀을 떠나려고 했지만 구단서 붙잡았다. 결국 다음 시즌도 셀틱서 보내야 했다. 세인트 마렌과의 경기 3-0 상황서 교체된 기성용은 들어간 지 10분 만에 중거리 골을 넣었고,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 데뷔골이 됐다.

이후 셀틱의 미드필더들이 부상을 잇달아 당하자 기성용의 출장 기회가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기성용의 문제로 지적되던 수비 가담도 월등히 좋아지고, 차두리로 셀틱 구단으로 이적하면서 심리적인 안정감도 찾게 됐다. 

2012년 런던올림픽이 기성용의 터닝포인트가 됐다. 당시 감독이었던 홍명보 현 대한축구협회 전무의 부름을 받고 박주영, 구자철과 함께 동메달을 획득했다. 구자철과 함께 중원을 장악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자 잉글랜드가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 리그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으며 국제대회서 경쟁력을 선보인 기성용은 EPL로 도전장을 내밀며 스완지시티로 이적한다. 


2005년 8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한 박지성 이후, 이영표(전 토트넘), 설기현(전 레딩), 이동국(전 미들즈브러), 김두현(전 웨스트브로미치), 조원희(전 위건), 이청용(전 볼턴), 지동원(전 선덜랜드), 박주영(전 아스널)에 이어 열 번째 한국인 프리미어리거가 된 기성용은 축구팬들의 기대감을 갖게 했다.

유럽서
‘펄펄∼’

기성용은 스완지시티서 중원의 한 축을 담당하며 대다수의 경기를 선발 출전했다. 이적 이후 시즌 초반에는 EPL 선수들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국내 축구팬을 잠 못 들게 했다. 

기성용의 플레이 스타일은 장단점이 뚜렷했다. 예리하게 상대방 진영 빈 공간에 깊숙하게 찔러넣는 패스를 자주 구사했다. 당시 스완지에는 발이 빠른 측면 공격수가 많았기에 기성용의 패스는 절묘하게 들어갔다.

하지만 속도가 느리고 활동량이 많지 않아 수비형 미드필드로서는 좀 아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라운드의 전방위를 뛰어다니던 박지성과 비교했을 때 비판의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장점이 뚜렷했기에 선발로 나서는 경기가 많았다. 결국 38경기에 출전해 3개의 도움을 기록하며 성공적인 데뷔 시즌을 마쳤다.

국가대표로도 중추적인 역할을 맡은 기성용은 2014 브라질 월드컵, 2015 아시안컵, 2018 러시아 월드컵 등 굵직한 국제무대 대회서 두각을 보였다. 지난해 치렀던 아시안컵 조별서 경기를 뛰다가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대표팀 명단서 빠지기도 했다.
 

▲ 기성용 선수 ⓒFC 서울

지난해 1월30일 아시안컵을 마지막으로 기성용 선수는 공식적으로 국가대표 은퇴를 발표했다. FC서울 입단 기자회견서 대표팀 복귀에 대해 묻자 기성용은 “대표팀 자리는 정신적으로 부담이 많은 곳”이라며 “어린선수들이 잘해주고 있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적이 없고 소속팀서 좋은 모습을 보이는 게 첫 번째 목표”라고 밝혔다.

기성용이 맹활약하게 된 데엔 부친의 영향도 있었다. 부친은 광주 토박이로 광주공업고, 금호고, 전남대를 졸업했으며 실업팀 국민은행 축구단서 짧게 선수생활을 하고 1982년 은퇴했다. 이후 지도자로 변신해 금호고, 광양제철고, 청소년대표팀 감독을 지냈다. 금호고 감독 시절 고종수와 윤정환을 국가대표로 길러낸 명장이며, 아들 기성용도 국가대표로 성장시킨 지도자다.

2010년 광주FC 창단 작업부터 공을 들인 기씨는 2015년에는 단장으로 임명돼 무보수로 일해왔다. 단장직을 맡으면서 금호고 등 유소년 선수 육성을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어릴 때부터 연령별 대표팀 발탁
스코틀랜드·잉글랜드 등지서 활약

광주FC팀의 1부 리그 승격과 전용구장 건설이라는 업적을 남겼지만, 지난해 12월 건강상의 문제로 단장직을 사임하고 쉬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기성용의 절친은 구자철과 이청용으로 유명하다. 이청용 1988년생 7월생, 기성용 1989년 1월생, 구자철 1989년 2월생 등 비슷한 또래이면서 젊은 나이에 해외 팀으로 이적해 서로에게 의지가 됐다. 서로 떨어져 있어도 의사소통을 많이 하는 사이로 똘똘 뭉쳐 K리그 부흥과 유소년에 대한 철학을 공유하기도 한다.

세 선수들이 각기 다른 성격이 급속도로 친해지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기성용의 FC서울 복귀 소식이 전해지자 이례적으로 타팀 소속인 이청용은 구단 영상을 통해 “굉장히 기다려진다. 같은 팀은 아니지만 상대 팀으로 만나게 된다면 기분이 묘할 것 같다. 즐거울 것 같다. 수준 높은 선수들이 있으면 경기 질도 높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팀과 팀의 대결이지만 서로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고 소속팀에 승리를 위해 각자 열심히 한다면 팬들도 즐겁게 경기를 보실 것이라 기대한다”고 반겼다. 

기성용은 축구 실력뿐 아니라 배우 한혜진과의 결혼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는 2012년 SBS <힐링캠프>에 출연하면서 한혜진과 처음 연을 쌓았다. 이후 친해진 두 사람은 연애상담을 하며 친해지며 누나동생으로 편하게 지내다가 2013년 1월부터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해 3월 한혜진의 이니셜이 새겨진 기성용의 축구화가 대표팀 연습 중 취재진의 카메라에 포착되며 열애설이 불거졌다. 말하자면 기성용 본인이 직접 팬들에게 한혜진과의 관계를 내보인 셈이다.

이후 한 매체서 이 둘의 데이트 하는 모습의 파파라치 사진까지 공개되자 기성용은 트위터를 통해, 한혜진의 소속사도 열애를 인정했다. 기성용은 한혜진과 지난 2013년 7월에 결혼했고, 2015년 9월 딸 시온양을 품에 안았다.

지난 2016년, 잘 알려지지 않은 축구팬을 열광하게 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의 부친에 따르면 당시 중국프로축구 상하이 상강서 기성용에게 연봉 220억원을 제시했다고 한다. 세금을 포함하면 실제 연봉은 무려 400억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중국 러브콜
220억 거절

토트넘 감독 출신이자 무리뉴의 눈이라고 알려진 빌라스 보아스가 기성용에게 두 차례나 연락했지만 기성용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놀랍게도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주장이 한 수 아래인 중국 프로리그서 뛰는 게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게 그 이유였다.


<9do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철없던 기성용 SNS ‘말말말’

지난 2007년 올림픽 축구대표팀일 때 우즈벡과의 경기력에 대한 지적이 있자 자신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답답하면 니들이 뛰든지”라는 글을 게재해 네티즌들의 거센 악플을 받은 적이 있다. 이 사건 직후 논란이 일자, 얼마 뒤 문제의 발언을 삭제했지만 이미 기자들에 의해 기사화되어 보도됐고, 9시 스포츠 뉴스에도 기사화가 됐다.

2014년 런던올림픽 이후 부산의 안익수 감독이 박종우에게 “국가대표도 예외는 없다. 정신무장이 안 돼 있다면 누구든 2군으로 내려갈 수 있다” “투지 있는 플레이가 장점이었는데 요즘 기성용처럼 볼을 차려 한다” “투지 있는 터프한 플레이가 종우의 장점인데 그런 것이 사라졌다. 열흘도 넘게 고민해서 내린 결정이다”고 질책했다.

이에 대해 기성용은 “나처럼 볼 차면 2군 가니?” 하고 대응한 것.

국내 축구팬들은 기성용의 말 한마디에 또 비판을 하며 관전모드로 돌입했지만 사건은 일단락이 됐다.

2013년 최강희 감독은 월드컵 최종예선 막바지 3경기를 앞두고 기성용을 소집하지 않았다.

기성용은 자신의 SNS에 “리더는 묵직해야 한다. 그리고 안아줄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을 적으로 만드는 건 리더의 자격이 없다”는 의미심장한 글을 올렸다.

네티즌들은 최강희 감독을 저격하는 글이라고 생각하면서 비판을 했지만, 기성용은 교회 목사님의 말씀이었다고 해명한 바 있다.

이 외에도 최강희 감독 시절 홍명보 감독을 떠오르게 하는 알파벳 M, B가 그려진 모자를 게시하거나 비공개 SNS에 최강희 감독을 조롱하는 듯한 글이 공개돼, 공식적으로 사과하기도 했다.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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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아웃’ 김병기 수난 시대

‘투아웃’ 김병기 수난 시대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지난 6월 김병기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후보가 서영교 의원을 누르고 22대 더불어민주당 2기 원내대표로 당선됐다. 김 원내대표는 내란 종식과 헌정 질서 회복, 권력기관 개혁을 외쳤다. 이로부터 두 달 뒤인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정청래 신임 당 대표가 선출됐다. 이재명정부 첫 여당 지도부가 제모습을 갖추면서 안정 궤도에 접어드는 듯했다. 약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와 정청래 대표의 첫 갈등이 불거졌다. 정 대표가 지난 9월11일 여야 원내 지도부가 합의한 3대 특검법 합의안에 대해 “협상안을 수용할 수 없고, 지도부 뜻과 달라 재협상을 지시했다”고 밝히면서다. 불안불안 이인삼각 특검법 개정안의 핵심인 기간 연장을 제외한 채 합의해 특검법의 취지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게 정 대표의 입장이다. 김 원내대표는 곧바로 반박했다. 원내 지도부와의 긴급회의를 거듭하던 그는 밖에서 기다리던 취재진을 향해 “정청래한테 공개 사과하라고 그래!”라며 소리쳤다. 이후 당 안팎에서 원성이 쏟아지자 김 원내대표는 오히려 취재진을 향해 “왜 자꾸 합의라고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는 “(합의가 아니라) 1차로 논의한 것이고, 무엇보다도 의원총회에서 추인을 받아야 한다”며 “수사 기간과 규모에 다른 의견에 있으면 그 의견을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제 총론만 (발표)하고 나갔는데 원내수석들이 각론에서 너무 많이 나갔다. 마치 합의가 된 것처럼 보도됐다”며 합의문이 아니라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두 사람 간의 갈등은 사흘 만인 13일 봉합됐다. 김 원내대표는 자신의 SNS에 “심려 끼쳐서 죄송하다. 심기일전해 내란 종식과 이재명정부의 성공을 위해 분골쇄신하겠다”고 게시글을 작성했다. 이렇게 냉전은 끝났지만 지지층의 비난은 거셌다. 김 원내대표를 향해 ‘수박’ ‘변절자’ 등 원색적인 비판을 쏟아내며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문재인정부 당시 민주당 대표를 지냈지만 지난 대선에서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의 손을 들어준 이낙연 전 국무총리의 행보와 비교하는가 하면 ‘역시 서영교 의원을 뽑아야 했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나왔다. 지지층의 미묘한 기류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번에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 검사 징계안을 놓고 두 번째 갈등이 터졌다. 법사위 소속 범여권 의원들이 대장동 항소 포기에 반발한 검사장 18명을 고발한다고 밝힌 데 대해 “협의가 없었다”고 선을 그으면서 개혁 의지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온 것이다. 지난달 19일 법사위 소속 민주당·조국혁신당·무소속 등 범여권 의원들은 검찰의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에 이의를 제기한 검사장 18명을 국가공무원법 위반으로 경찰에 고발했다. 여당 간사인 민주당 김용민 의원은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 조직 기강과 헌정 질서를 무너뜨린 검사장 18명의 집단 항명 행위에 대해서 국가공무원법 위반 혐의로 고발한다”고 밝혔다. ‘당심’이 뽑은 정, ‘의심’이 뽑은 김 연일 삐거덕…벌써 이재명 리더십 부재? 김 원내대표는 고발 소식이 알려진 뒤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지금 봤다”며 “그렇게 민감한 것은 정교하고 일사불란하게 해야 한다. 협의를 좀 해야 했다”고 당혹한 기색을 보였다. 이어 “뒷감당은 거기서 해야 할 것”이라며 고발장을 제출한 법사위 쪽에 책임을 물었다. 법사위의 검사장 고발은 원내 지도부뿐 아니라 당 지도부와도 사전 논의가 없었다는 게 김 원내대표의 설명이다. 하지만 김용민 의원은 검사장 고발 문제에 대해 “당의 기조와 흐름이 잡혀 있는 상태에서 저희가 고발장을 그날 제출하는 기자회견을 한 것뿐, (원내 지도부와) 소통이 없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김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원내(지도부)와 소통할 때 이 문제를 법사위는 고발할 예정이라는 걸 얘기했다”며 “원내가 많은 사안을 다루다 보니까 (고발 문제를) 진지하게 듣거나 기억하지 못하셨을 가능성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저희가 더 적극적으로 설명을 해야 했지 않았느냐는 지적을 한다면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면서도 “소통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당시 한 여권 관계자는 “당 대표가 당 전체를 이끄는 일이라면 원내대표는 말 그대로 원내 상황을 조율하고 총괄하는 위치인데, 오히려 갈등을 키우고 있으니 (민주당) 의원들도 혼란스러운 것”이라며 “이런 상황이 조금씩 노출되면서 지지층까지 불안함을 느끼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당과 원내,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뉜 민주당의 배경에는 정 대표와 김 원내대표의 선출 방식이 거론된다. 강경 지지층이 밀어 올린 정 대표와 달리 김 원내대표는 당내 의원 선거를 통해 당선됐다. 당시 원내에 친명(친 이재명)계가 다수 포진했던 만큼 김 원내대표 의중은 ‘명심(이재명 대통령의 의중)’에 가깝다. 더 강하고 더 빠르게 개혁을 외치는 정 대표의 지지층과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 강성 지지층에게 김 원내대표는 이미 ‘투아웃’이다. 여기에 정 대표의 공약이었던 대의원과 권리당원 간 표 반영 비율을 ‘1대 1’로 변경하는 당헌·당규 개정이 부결되면서 지지층의 반발이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밑서 치솟고 위서 누르고 그동안 민주당은 당 대표나 최고위원 등 선출 시 대의원과 권리당원 투표 반영 비율을 20:1 미만으로 규정해 왔다. ‘동등한 1인1표제’는 정 대표가 당 대표 경선 당시 공약으로 내건 정책 중 하나로 “나라의 선거에서 국민 누구나 1인1표를 행사하듯 당의 선거에서도 누구나 1인1표를 행사해야 한다”고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일부 의원들 사이에서조차 ‘졸속 추진’이라는 비판이 나오면서 정 대표와 김 원내대표 두 사람 모두 시험대에 올랐다. 정 대표 쪽에선 대의원·권리당원 1인1표제는 ‘이재명 대통령이 당 대표였던 때부터 추진됐던 개혁의 실현’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일각에서 ‘시기’와 ‘방법’을 문제 삼는 등 반대 의견에 부딪혔다. 권리당원의 힘으로 대표직에 오른 지 3개월이 조금 지난 상황에서 1인1표제를 추진하자 친명계 조직인 ‘더민주혁신회의’와 일부 당원 등을 중심으로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민주당 이언주 최고위원은 1인1표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 최고위원은 “대의원·권리당원 1인1표제 논란이 커지고 있는데 이는 찬반의 문제라기보다 절차의 정당성·민주성 확보, 그리고 취약 지역(영남 등)에 대한 전략적 규제와 과소 대표성이 핵심”이라고 분석했다. 친명계인 윤종군 의원도 SNS를 통해 “당원주권 강화 방향에 동의한다”면서도 “전 지역 권리당원 표를 1인1표로 하는 것에는 이견이 있다. TK(대구·경북) 등 영남지역 당원 자긍심 저하, 당세 확장 장애 조성이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현 상황과 관련해서 한 정치권 관계자는 “당 대표는 당 컨트롤이 안 되고, 원내대표는 의원들 컨트롤이 안 되는 상황”이라며 “지난 지도부(이재명 당 대표, 박찬대 원내대표)가 워낙 합이 좋았고 당 대표 리더십도 강했기 때문에 더욱 비교된다. 중심축이 없으니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반 발자국만 앞서도 자기 정치라는 뒷말이 나오는 것”이라고 봤다. 결국 정 대표의 1인1표제는 중앙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지난 5일 치러진 투표 결과 중앙위원 총 593명 중 373명이 투표에 참여해 찬성 277표, 반대 102표로 과반이 찬성하지 않아 부결된 것이다. 남은 고비 얼마나? 원내 일각에서는 무리하게 밀어붙인 ‘정청래발 개혁’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김 원내대표의 고충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한다는 해석이 나온다. 대통령실에서조차 몇 차례 속도 조절을 주문했지만, 지지층을 등에 업은 정 대표는 ‘개혁 골든 타임’을 필두로 숨 가쁘게 달리고 있다. 그런 김 원내대표가 내란전담재판부 추진을 못 박으면서 ‘쓰리아웃’은 겨우 면했다는 분석이다. 그는 지난달 24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내란전담재판부는 국민의 명령이기 때문에 당연히 설치한다”며 “여기에 대해 더는 설왕설래하지 않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내란 사범에 대한 ‘사면권 제한’ 조치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원내대표는 “시간이 지나면 내란 사범이 사면돼 거리를 활보하지 못하도록 내란 사범에 대한 사면권을 제한하는 법안도 적극 관철하겠다”며 “내란 사범을 사면하려면 국회 동의를 받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만일 윤석열 전 대통령 등 내란 주요 피의자에 대한 내란죄가 확정될 경우 사면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로부터 약 일주일 뒤인 지난 4일 범여권의 주도로 ‘내란전담재판부(내란특별재판부)’ 설치법이 법사위 전체회의를 통과했다. 법사위는 해당 법안을 이달 중 본회의에서 처리하겠다며 속도를 냈다. 해당 재판부는 12·3 내란 사태와 관련해 윤 전 대통령 등이 연루된 내란 사건 전담을 골자로 한다. 내란전담재판부 판사 및 영장전담법관 추천위원회는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한 법무부 장관과 판사회의에서 추천한 총 9명으로 구성된다. 내란전담재판부로 성난 지지층 달래도… 위헌 폭탄 껴안고 걸어가는 ‘불’꽃길 구성을 마친 추천위원회는 2주 안에 영장전담법관과 전담재판부를 맡을 판사 후보자를 각각 정원의 2배수로 추천해야 하며 최종 임명은 대법원장의 몫이다. 또 형사소송법상 피고인의 구속기간은 최대 6개월이지만 특별법에서는 내란·외환 관련 범죄에 대해 구속기간을 1년까지 연장할 수 있도록 했다. 국민의힘은 위헌 소지가 있다며 반발했다.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은 “한마디로 판사가 마음에 안 든다고 골라 쓰겠다는 ‘지귀연 판사 바꾸자는 법’”이라며 “사법부의 무작위 배당 원칙을 위반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이미 재판하는 사건도 뺏어서 다른 판사한테 맡기겠다는 삼권분립의 침해”라고 지적했다. 이날 법사위에 출석한 천대엽 법원행정처장 역시 “1987년 헌법 아래 누렸던 삼권분립, 사법부 독립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질 수 있다”며 “내란특별재판부법에 여러 가지 위헌 요소가 있다”고 반대했다. 천 처장은 “헌법재판소가 결국 이 법안에 대해 위헌 심판을 맡게 될 텐데 헌재소장이 추천권에 관여한다면 심판이 선수 역할을 하게 돼 룰에 근본적으로 모순이 생긴다”며 “헌법재판소장과 직·간접적 관계에 있는 헌법재판관들이 재판(위헌심판)을 맡을 수 없게 된다면 ‘내란특별헌법재판부’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이 법이 예정하고 있는 바”라고 설명했다. 내란전담재판부 추진으로 개혁 동력을 얻었지만 후폭풍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위헌 가능성을 지닌 사법개혁을 진행하는 건 위험요소가 다분할뿐더러 원내대표로서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두고 중도층 민심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다. 한 민주당 출신 의원은 <일요시사>와의 전화 통화에서 “지금 민주당은 집단 의존 증상이 있다. 지난 총선에서 이재명 당시 대표에게 충성하는 정치인만 대거 유입되다 보니 여당이 된 지금 제대로 갈피를 못 잡는 것”이라며 “2차 종합 특검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내란전담재판부를 어떻게 꾸릴 것인지, 조희대 대법원장을 어떻게 할 것인지 등에서 국민의 피로도를 높이지 않으면서도 종합적인 전략을 짤 사람이 없다”고 지적했다. 175석 버거웠나 그러면서 “내란전담재판부가 설치되면 국민의힘이 위헌을 걸 것이고, 법원에서 위헌 소지가 있다고 보는 만큼 위험성도 크다. 하지만 헌재에서 위헌 판결을 내리지 못하게 하려면 민심을 우리 편으로 끌고 와야 하는, 법률 싸움이 아닌 고도의 민심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고 덧붙였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원팀’ 원내대표단?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단에 때아닌 ‘내 편 봐주기’ 논란이 일었다. 민주당 문진석 당 원내운영 수석 부대표가 인사청탁 의혹에 휩싸였지만 ‘엄중 경고’에 그치면서 팔이 안으로 굽은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앞서 지난 2일 문 수석이 본회의장에서 김남국 대통령실 디지털소통비서관에게 문자로 특정 인물을 거론하며 “내가 추천하면 강훈식 실장이 반대할 거니까 아우가 추천해줘”라고 보냈고, 이에 김 비서관이 “제가 (강)훈식이 형이랑 (김)현지 누나한테 추천할게요”라고 답한 것이 언론에 포착됐다. 인사 청탁 논란이 불거지자 문 수석은 “부적절한 처신에 송구하다”고 고개를 숙였지만 국민의힘은 ‘김현지 실세’ 프레임을 다시 띄우며 이재명정부를 압박했다. 김 원내대표의 엄중 경고로 논란을 수습하려는 분위기가 이어지자 강성 지지층은 “과감히 내쳐야 한다”며 더 강한 징계를 요구하고 있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