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일이냐 삶이냐’ 유아인의 속내 

“내 인생의 관찰자가 됐다”

[일요시사 취재2팀] 함상범 기자 = 배우 유아인은 성공가도를 달려왔다. 2003년 열일곱의 나이에 KBS2 <반올림>을 시작으로, 수많은 작품서 뛰어난 연기를 펼치며 끊임없이 성장해왔다. 매 작품 열정을 보인 그는 방송과 영화계서 캐스팅 0순위였다. 배우로서 커다란 명예인 칸 영화제에 초청돼 레드카펫도 밟았다. 스스로 “세속적인 성공은 충분히 이뤘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삶은 비교적 풍요로워 보인다.
 

▲ ▲배우 유아인 ⓒ고성준 기자

유아인은 새로운 성공을 노리고 있었다. 경제적 성공을 넘어서 더 단단하고 깊이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몸부림 중이었다. 오락물에 가까운 영화 <#살아있다>를 선택한 이유도 변화와 맞닿아 있다. 삶에 있어 더욱 깊이 고민 중인 유아인의 속내를 살펴봤다.

배우 유아인의 작품은 대부분 무겁고 깊었다. 선생 말을 지지리 안 듣는 고등학생(<완득이>)과 의상부터 언행까지 모든 것이 불량한 성균관 유학생(<성균관 스캔들>)을 넘나들었고, 나라가 망하는 것에 인생을 베팅해 큰돈을 거둬들인 주식 재벌(<국가부도의 날>)이자, 인간에게 치욕을 주는 것을 거리끼지 않는 재벌 2세(<베테랑>)이기도 했다.

스무 살이나 많은 유부녀와 사랑을 나눈 피아니스트(<밀회>)였으며, 배경이 조선일 때는 복잡한 사연으로 혼재한 사도세자(<사도>), 이방원(<육룡이 나르샤>), 숙종(<장옥정, 사랑에 살다>)이었으니, 그가 걸어온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은 파도가 몰아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유아인이 이번에 선택한 작품은 <#살아있다>다. 정체불명의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살아있는 사람들을 뜯어먹기 시작하면서 아파트 인근이 통제 불능에 빠진 가운데, 전화와 인터넷 등 모든 통신이 끊긴 채 홀로 아파트에 고립된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 영화는 영화 <부산행>을 시작으로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까지, 두터운 마니아층을 확보한 좀비물이다. 좀비가 횡행하는 때에 사람 간의 유대감을 조명한 작품. 유아인은 극중 게이머이자 20대 청년 준우를 연기한다. 


이제껏 복잡한 내면을 표현해온 유아인은 <#살아있다>에서는 다소 선명하고 단순한 성향을 가진 준우를 표현한다. “비교적 가벼운 오락물을 선택한 것 역시 도전이었다”는 유아인은 긴 러닝타임의 중반부까지 혼자 이끌고 간다. 그 홀로 있는 시간이, ‘자가격리’를 쉽게 볼 수 있는 요즘가 긴밀히 맞닿아 있어, 공교로운 공감이 일어난다.

가족이 외출한 사이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좀비들로 인해 오랫동안 홀로 아파트 안에 갇혀 있었던 준우의 일상으로 꽤 오랜 시간을 채운다. 다소 모험적인 선택이었음에도, 영화가 전혀 지겹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유아인의 입체적인 표현력 덕분 아닐까. <#살아있다>를 통해 또 한 번 진면목을 보인 유아인의 소회를 들어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 웃음 짓는 배우 유아인 ⓒ고성준 기자

-지난 16일 처음으로 영화를 봤는데, 소감을 말한다면?

▲어려운 시기에 작품이 나오게 됐다. 많은 분들이 좋은 말씀을 해주고 계셔서 아직까지는 기대가 된다. <#살아있다>는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시는 분들에게 공감대를 드리고 좋은 느낌을 드릴 수 있을만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초·중반부까지 홀로 작품을 이끌어가는데, 부담감도 상당했을 것 같다.

▲사실 부담이 컸다. 그 부담이 이 영화를 선택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 정도의 미션을 돌파해나가는 재미랄까. 도전의식을 자극하는 요소가 있고, 장르적 특성도 살아있으면서 인물색도 강했기 때문에 도전하고 싶었다. 사실 나 혼자만 등장하기 때문에 초반부를 지루하게 느낄까 여전히 걱정된다. 그 부분이 지루하면 실패하는 영화다. 부디 많은 관객이 준우와 함께 호흡해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유아인의 캐릭터는 기본적으로 색이 분명했다. <#살아있다>의 준우는 그 색이 불분명하다. 일상에 있는 누군가를 표현하려 했다는 생각이 든다. 


▲꽤 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옆집 청년을 상상하며 연기했다. 물론 옆집 청년이라고 다 똑같지는 않다. 크게 거슬리지 않고 현실성이 살아있는 인물로 표현하려 했다. 게임 속에서 활약하고 장난치는 모습들을 상상하며 연기했다. 

-영화 내에서 표현하기 어려웠던 장면이 있나?

▲처음에 게임 화면 속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장면이 어려웠다. 게임을 하지 않아서 보통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더라. 일상적이고 평범함이 묻어나는 대사였는데, 그런 장면이 부담스러웠다. ‘하이하이’라는 대사는 현실성이 없고, 설정 같고 흉내 내는 모습 같았다. 

<#살아있다> 홀로 이끈 그만의 진면목
‘코로나 시대’ 공교롭게 공감 가는 영화

인물의 성향은 평범하지만 상황은 극단적으로 몰린다. 인물을 표현하는 데 있어 중점을 둔 부분이 뭔가. 

▲가장 염두에 둔 키워드는 편안함이다. 두드러진 매력이나 기운보다 편안함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일상의 자연스러움과 극한의 감정으로 가는 과정이 리드미컬하게 자연스럽길 바랐다. 또 귀여움도 보여주고 싶었다. 애교를 잘 떨어서 나오는 귀여움이 아니라, 그냥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오는 귀염성을 가진 친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극중 준우는 스트리밍을 하는데, 대사가 많지 않다. 충분히 대사를 넣어서 인물의 색을 넣어줄 수 있었을 것 같았는데, 없었다. 편집된 것인가?

▲<#살아있다>는 진행이 상당히 빠른 영화다. 캐릭터 소개가 아주 선명하게 나오지도 않고, 상황 설명도 크지 않다. 영화 시작하자마자 바로 사건이 벌어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군더더기 없이 진행됐어야 했다. 구체적인 설명과 표현들은 지양됐던 현장이었다. 

-이 영화는 좀비 혹은 괴생명체의 발생 근원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모호함이 크고 방향성도 잘 보이지 않는다는 단점도 있는 것 같다. 

▲모호함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했다. 뭔가 명확해지면 막막함과 두려움이 더 약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싶다. 근본적인 해결책과 답을 주지 못하고, 그냥 벌어진 사건이고, 상황에 맞게 일일이 대처하면서 살아가는 게 현실적이라고 느껴졌다. 영화 내의 상황이 일어난다면 추측만 할 뿐 누구도 정답을 갖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오열 신은 상당히 인상 깊었다.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는 눈물인데, 해당 장면서 인물의 감정의 정도도 보이고, 후반부 상황이랑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더라. 오열신은 열심히 준비한 것 같았는데...

▲사실 그 장면은 욕심냈다. 대본에 그 정도로 잘 설명돼있지는 않았다. 되려 반대 의견을 가진 분도 많았다. 오열 후에 오히려 슬픈 정보를 인지하게 되는데, 그 전에 눈물을 터뜨리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그럼에도 도전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고립된 인간이 느끼는 외로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누군가의 잘못이나 슬픈 정보 때문이 아니라, 극단적인 상황으로 인해 만들어진 외로움. 그런 감정이 배설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사실 정답은 없었다. 그래서 감독님께 혼자 리허설까지 해서 보내드리고 했다. 
 

▲ 배우 박신혜와 포토타임 갖는 유아인 ⓒ고성준 기자

-중후반부부터 박신혜가 등장한다. 박신혜와의 촬영은 어땠나?

▲로맨틱 코미디를 기대했지만, 그런 점이 없어서 아쉬운 면이 있다. 되려 판에 박힌 현장서 만나는 것보다 이런 재미가 있는 현장서 만나는게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내가 의견을 피력할 때는 강하게 하는 편인데, 그런 점에서 전혀 굴하지 않고 신혜씨도 자기 의견을 냈다.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의견을 내는 사람과 함께 하고 있다는 재미가 있었다. 현장서도 일상서도 그런 사람이 훨씬 재미있고 좋다. 

-MBC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한다. 의외의 선택이다. 심적인 변화가 있었나?

▲준우를 표현함에 있어 가장 크게 생각한 게 편안함이었던 것처럼 개인적으로도 편안함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 이야기인즉슨, 편하지 않게 살았다는 것이다. 불편해도 신념을 갖고 움직이거나,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것을 좋아했다. 계속 그렇게 살아가려면 쉬는 순간도 필요했다. 그런 생각들이 이런 오락적인 장르물을 선택하게 된 이유기도 하다.

예능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은 예전부터 있었다. 삶의 권태로부터 오는 새로운 시도를 통해 일종의 환기를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20대를 몽땅 연기에 투자했는데, 30대가 되고 나서보니 삶의 목적이나 방향성이 불분명해졌다. 지금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지만, ‘그냥 불분명할래’라는 태도로 살아가고 있다.

-삶의 목적과 방향성을 잃었다고 했다. 좀 더 주체적인 삶의 변화로 나아가는 것 같은데, 어떤 동기가 있었나. 


▲내가 생각해온 신념이나 목적이 동기가 분명하지 않고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내가 주체적으로 방향을 잡았던 것인 줄 알았는데, ‘사실 주입된 환상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경제적으로 많은 것을 성취했다. 그 성취를 위해 20대를 쏟았다. 그런데 그런 것들로만 살아갈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바뀐 것인가?

▲그냥 주변서 벌어지는 일이 삶이 되는데, 관찰자의 입장이 됐다. 내 인생에 내가 관찰자이자 주변인 같은 태도가 생겼다. 덜 애쓰고 살고 싶다는 갈망이 커졌다. 과거엔 모두 너무 잘하고 싶어했었는데, 이제는 좀 내려놓게 됐다. 예전에는 인터뷰할 때 똑같은 질문이 다섯 개가 나오면, 어떻게든 다른 대답을 하려고 했다. 이제는 그냥 허용치까지만 한다. 몸도 마음도 힘들어질 때가 있다. 실제로 숨이 가쁘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다.

“목적 잃은 삶, 날 불안하게 해”
“삶의 가장 중요한 동력은 사랑”

번아웃을 느낀 것인가.

▲그런 것일 수 있다. 유행처럼 번지는 것 같다. <버닝>이 생각난다. 버닝이 태운다는 의미인데, ‘우리가 태우고 있는 게 진짜 태워지고 있는 게 맞나’라는 생각도 든다. 부정적인 단어를 쓰고 싶진 않다. 남들처럼 살려고 쫓아가지 말자는 식의 생각을 하게 된다. 

-유아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에너지 원동력은 무엇인가?

▲사랑인 것 같다. 하하. 그게 맞는 것 같다. 오그라들어도. 사랑과 미움은 동시에 존재한다. 내가 어디에 집중할지를 선택하는 게 삶이면서, 내게 주어진 권한이다. 점점 의심스럽고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우리가 택하고 기대할 수 있는 건 사랑 뿐인 것 같다. 그것을 위해 에너지를 많이 쓴다. 


<intellybeast@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유아인이 밝힌 SNS 설전 이유
“사회에 대한 애정 때문에…”

지난 2017년 유아인은 대다수의 사람들과 트위터를 통해 설전을 벌였다. 멘션과 답글이 오고가는 과정에서 설전으로 크게 번졌다. 사람들은 소위 ‘애호박 대첩’이라고 명명했다.

“애호박으로 맞아봤음?”이라고 남긴 유아인의 글은 그를 폭력적인 인간과 여성을 혐오하는 인간으로 둔갑시켰다. 이후 네티즌들을 넘어 일부 셀럽들과도 다투기도 했다. 당시의 유아인이 보여준 전투력과 순발력은 그 분야에 상징과도 같은 진중권 교수를 뛰어넘을 정도였다.

일부는 그에게 환호하며 ‘빛아인’이라 칭했고, 반대 측에서는 입에 담을 수 없는 험한 말로 그를 비난했다. 상처가 남을 법한 사안이었다. 잃을 것이 많은 스타였던 유아인은 왜 상처뿐인 싸움에 최선을 다했던 것일까.

3년 전 ‘애호박 대첩’ 화제
일부 셀럽들과 글로 다투기도

“그때 말고도 나는 다양한 사회적인 이슈에 발언하는 사람이었다. 그냥 그 행위를 거리낌 없이 펼치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 당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회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 그렇게 한 거다. 그냥 그들을 소비자로 생각했다면, 쉬운 방법은 더 많았다. 많이 지쳤지만, 소통의 기회를 열게 되는 이유도 역시 사랑인 거 같다. 어떤 것이든 편견으로 판단한다면 뻔한 결과물이 나올 것이다. 그래서 사랑으로 진심으로 던진 것이다. 이제는 그런 똑같은 상황이 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부당한 일 앞에서는 충분히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기 바란다. 인터넷으로 소통할 수 있는 시대에 대중에게 연예인으로서 가진 생각을 전달하고 싶었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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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상병 특검’ 공수처 불편한 속내

‘채 상병 특검’ 공수처 불편한 속내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채 상병 특검’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야권의 4·10 총선 압승으로 더불어민주당의 움직임에도 속도가 붙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난감하기만 하다. 부족한 인력으로 인해 수사의 첫 단추도 끼우지 못하는 실정이다. 발 빠른 수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공수처 안팎에서는 정치권의 책임 떠넘기기에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조직이 와해되기 직전인데 수사에 속도가 어떻게 나겠느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출신 한 변호사의 말이다. 요즘 공수처의 분위기는 참혹하다. 해병대 ‘채 상병 사건’으로 반전을 꾀하고 싶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특별검사(이하 특검) 목소리가 거세지면서 ‘비교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대통령실 압수수색? 채 상병 사건 특검법 추진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공수처의 분위기는 암흑 상태다. 검찰 제도를 보완해 ‘상설특검’ 명목으로 출범했음에도 ‘늑장·부실’ 수사 논란 속에 결국 사건 기록을 특검에 넘겨줘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오는 5월2일, 임시국회를 열어 법안을 표결하자는 분위기다. 법안 통과를 위해서는 국회의장과 여당의 협조가 필요한데, 총선 이후 여당 일각서도 채 상병 특검에 동의하는 분위기가 표출되고 있다. 채 상병 특검 법안은 지난해 10월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뒤 180일의 숙려 기간을 거쳐 본회의 표결만 하면 언제든 통과할 수 있는 상황이다. 채 상병 사건 수사 갈래는 크게 두 가지다. 무리한 수색 지시 등 책임자를 가리는 본안 수사가 경북지방경찰청서 진행 중이고, 해병대 수사단의 초동 조사에 국방부와 대통령실 관계자가 개입했다는 외압 의혹은 공수처가 맡고 있다. 외압 핵심 피의자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지난달 주호주대사로 임명돼 부임 후 사퇴하는 과정서 대통령과 법무·외교부 장관의 직권남용 의혹도 공수처에 추가로 고발됐다. 야권이 특검을 통해 밝히려는 사안의 실체는 수사 외압에 집중돼있다. 특검이 통과되면 공수처가 내려던 실적이 특검으로 넘어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민주당은 이 대사 임명 과정서의 추가 의혹도 특검법안을 수정 발의해 포함할 계획이다. 공수처는 수사의 무게를 일부 덜겠지만, 6개월 넘게 진행해온 사건 기록을 외부에 넘긴다는 건 또 다른 비판의 빌미를 제공하는 셈이다. 특검 추진 본격화…수사팀 의욕 잃어 “이럴 거면 왜 강조하나” 불만 증폭 공수처 출신 한 변호사는 “인력난 때문에 고전하는 상황이다. 내부 얘기를 들어보면 ‘죽을 맛’이란다. 채 상병 사건 수사는 최선을 다하려 했는데 특검이 언급되면서 수사팀의 의욕이 상실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수처법상 수사 범위와 인원 범위가 지나치게 제한돼있어 실질적인 수사 기능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설명이다. 공수처법은 공수처의 수사 범위를 현직 공직자와 그 가족, 퇴임 3년 이내 전직 고위공직자로 한정하고 있다. 공수처 검사와 수사관의 인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현재 공수처법이 규정하고 있는 검사와 수사관의 규모는 처·차장 포함 검사 25명, 수사관 40명이다. 공수처법을 추진할 당시 규모는 검사 30~50인, 수사관 50~70인이 제안됐지만 법무부와 국회의 논의를 거치면서 현재 정원으로 대폭 감소했다. 공수처 관계자는 “총선과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인원 확대와 관련해 국회와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며 “검사의 신분보장을 위한 임기에 대해서도 개선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앞서 공수처는 최소한의 행정인력이라도 확보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 달라고 호소한 바 있다. 현행법상 행정인원 정원은 20명인데 지난 2022년 공수처는 행정직원 중 국·과장과 직제 파견자 등 7명을 제외하면 실제 가용인원이 13명에 불과해 수사관을 행정인력에 투입해야 할 상황에 놓인 바 있다. 공수처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법 개정이 필수적이라는 분석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특히 공수처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일치시켜 수사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공수처는 ‘공수처법상 기소권 없는 사건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연구용역’을 발주하는 등 수사 대상과 기소 대상의 불일치로 발생하는 구속영장 논란을 정리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하기도 했다. 인력난 가중화 지금까지 공수처가 채 상병 사건을 수사한 상황을 보면 초기 단계에 불과하다. 지난해 12월 이 전 장관 등을 출국금지했고, 한 달 후인 지난 1월 압수수색에 착수했다. 이후 포렌식과 참고인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 전 장관을 비롯한 국방부 지휘부와 해병대 수뇌부 등에 대한 조사는 특검의 몫이 될 가능성도 있다. 경우에 따라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등으로 특검 수사가 확대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공수처와 경찰은 특검법 처리 여부를 주시하며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총선 국면서 논란의 중심에 선 공수처는 수사를 신속하게 진행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입장이다. 공수처 지휘부 공백 상태가 영향을 줄 여지도 있다. 주요 피의자 소환 및 신병처리 등 주요 의사결정을 처장 대행인 부장검사가 결정하기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면서다. 만약 국회서 여야가 특검법 처리에 합의하는 수순을 밟으면 공수처도 새로 출범할 특검에 기록을 인계하기 위한 작업에 중점을 둘 가능성이 크다. 현재 본회의에 회부된 안은 민주당이 지난해 9월 발의한 법안이다. 민주당이 지난 3월, 이 전 장관이 주호주대사로 임명된 경위를 수사해야 한다는 별도의 특검안도 국회에 제출했기 때문에 이 두 법안이 병합되는 안도 거론된다. 본회의 회부 안건은 수사기간을 최장 100일로 정하고 있는데, 잔여 수사를 검찰에 이첩하도록 명시됐다. 경찰과 공수처가 시작한 수사가 특검을 거쳐 검찰 손에 넘어가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말도 나온다. 민주당이 3월 발의한 안은 잔여수사 이첩 대상을 검찰과 공수처로 정했다. 단추도 못 끼워 민주당이 특검법 조항 일부를 양보하고 국민의힘이 수사 대상 확대에 동의하는 시나리오도 정치권을 중심으로 나온다. 이런 과정서 본회의 회부 안이 조정될 수도 있다. 이 가운데 이 전 장관은 최근 변호인을 통해 공수처에 “소환조사를 진행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전 장관 측이 공수처에 소환조사를 요청한 것은 이번이 네 번째다. 이 전 장관 측 김재훈 변호사는 최근 공수처에 소환 촉구 의견서를 내고 “이 전 장관은 호주 대사직서도 물러났으나 공수처는 지금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며 “공수처의 이런 수사 방기 탓인지 정치권에서는 특검 필요성까지 제기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공수처에 보낸 의견서에서 “이첩 보류 지시는 직권남용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국방부 장관은 민간 수사기관으로의 사건 이첩에 대한 최종 승인권자이므로 인사권자가 인사안 결재 후 이를 취소·변경할 수 있듯이 그 승인을 변경할 수 있다”며 “해병대 수사단장에게 수사 권한이 있다느니, 수사단장에게 민간 수사기관으로의 이첩 권한이 있다느니 하는 것은 법 규정의 몰이해로부터 비롯된 억지”라고 주장했다. 이 전 장관 측은 ‘이 장관이 보고서를 회수하라고 지시하기 전에 대통령실 내선번호로 전화를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이 전 장관 측은 “이 전 장관은 대통령으로부터 (사단장을 빼라는)지시를 받은 사실이 없다”며 “당시 장관이 군사보좌관과 논의하는 과정서 ‘(초급 간부들까지 처벌 대상에 포함한다면)초급 간부들이 힘들어할 것 같다’는 의견을 나눴고 법무관리관실의 법리 검토를 거쳐야 한다고 판단해 이첩 보류를 지시했다”고 강조했다. 수사 인원 범위 제한적 법 개정 안되면 도루묵 이어 “재검토한 결과 8월24일 직접적인 혐의가 있는 2명을 경찰에 이첩했고, 해병대수사단 조사기록 원안도 그대로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 전 장관 측은 민주당이 추진하는 ‘채 상병 특검’도 비판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공수처의 1차 수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황인데 무엇이 미흡하고 국민적 의혹이 남아 해소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냐”며 “특검 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공수처의 신속한 수사와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공수처 수장이 석 달째 공석인 점은 제도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더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종 후보자 지명을 두 달 가까이 미루고 있다. 앞서 국회 공수처장후보추천위원회는 지난 2월29일 판사 출신 오동운(사법연수원 27기) 변호사와 검사 출신 이명순(연수원 22기) 변호사를 후보로 추천했다. 김진욱 전 처장과 여운국 전 차장이 임기 만료로 퇴임해 공수처가 ‘대행 체제’에 들어간 건 지난 1월 말부터다. 김선규 수사1부장이 처장 대행을 맡고 있지만, 지난달 제출한 사직서가 수리되지 않아 임시로 대행직을 수행 중이다. 최근 인사위원회서 연임이 불발된 수사1부 소속 김송경 검사(사법연수원 40기) 임기도 만료됐다. 김 대행이 이끄는 수사1부는 공기광 검사만 남게 된다. 별도 조직개편 계획도 없어 수사 부서 1개가 사실상 사라질 위기다. 윤 대통령이 공수처장 후보자를 지명해도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해야 임명이 가능하다. 21대 국회 임기는 내달 29일까지다. 22대 국회가 개원해도 원구성에 시일이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신속한 공수처장 공백 해소를 위해선 이달 안으로 후보 지명을 마쳐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수장 공백 장기화 우려 법조계에서는 특검 수사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공수처법에 따르면, 공수처는 이 전 장관에 대한 수사권은 있지만 기소 권한이 없다. 수사를 마친 뒤 검찰에 사건을 넘기고 검찰이 기소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구조다. 공수처 출범 당시 수사·기소권을 모두 줄 경우 일각에선 ‘무소불위 공수처’가 될 거란 우려가 제기되면서 공수처는 법관, 검사, 고위 경찰공무원에 대해서만 제한적 기소권을 갖게 됐다. 문제는 검찰이 채 상병 사건 기소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검찰을 관할하는 법무부는 지난달 8일, 공수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전 장관의 출국금지를 해제했다. 사건 처리의 중립성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특검을 통해 채 상병 사건을 수사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