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당 ‘김종인 비대위’의 성공 조건

칼 차고 돌아온 ‘여의도 차르’

[일요시사 정치팀] 설상미 기자 = “사회주의로 비난하지 말라.” 지난달 27일 출범한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회의 김종인 위원장이 대대적인 혁신을 예고하며 한 말이다. 하지만 김 위원장 앞에 산적한 과제가 만만치 않다. 과연 ‘김종인호’는 순항할 수 있을까.
 

▲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

미래통합당(이하 통합당) 쇄신을 책임질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가 지난달 27일에 공식 출범했다. 21대 총선 참패 이후 지도부 공백기가 지속된 지 42일만이다. 통합당과 김 위원장은 임기 문제에 대한 입장차를 보였으나, 당내서 총선 패배에 대한 수습이 시급하다는 절박감이 돌면서 결국 비대위가 꾸려졌다.

돌고 돌아
또 김종인

통합당은 상임전국위원회와 전국위원회를 열어 지난달 말 추인된 김종인 비대위의 임기를 연장하는 당헌 개정안을 의결했다. 당헌 개정으로 오는 8월30일까지로 규정한 부칙에 ‘비대위를 둘 경우는 예외로 한다’는 조항을 추가해 비대위 출범의 가장 큰 과제였던 임기 문제를 해결했다.

이로써 김종인 비대위는 보궐선거가 있는 내년 4월까지 통합당의 쇄신을 이끌어야 하는 중책을 맡았다.

김 위원장은 좌우 이념에 매몰된 당을 탈피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표명했다. 그는 국회 의원회관서 열린 전국조직위원장회의 비공개 특강서 “보수냐, 진보냐 하는 이념으로 나누지 말자. 더 이상 ‘보수’ ‘자유우파’라는 말을 강조하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통합당은 여권 세력과 정책을 ‘좌파’와 ‘사회주의’로 규정하며 색깔론을 지나치게 이용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불필요한 이념 논쟁으로 정치혐오를 부추긴 점이 21대 총선 패배의 큰 원인이 됐다는 지적이다.

당 내부에선 새로운 실용주의 노선을 지향하고 중도층 민심을 얻어야 통합당이 쇄신할 수 있다는 평가가 잇따랐다.

김 위원장은 “시대가 바뀐 만큼, 당의 정강·정책 등에서부터 시대정신에 맞는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정당은 국민이 가장 민감해하는 불평등, 비민주의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는 집단이라는 것을 보여주면 된다”며 탈이념을 강조했다.

통합당 비대위는 앞으로 통합당이 강조해왔던 신자유주의와 친기업적인 경제 정책 노선을 탈피해 경제적 약자를 위한 정책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김 위원장은 보수·진보를 막론한 정책들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 위원장은 “과거 경제민주화처럼 새로운 것을 내놓더라도 놀라지 말라”며 “정책 개발만이 살 길”이라고 큰 변화를 시사했다.

쇄신 닻 올려…여연 개혁 과제
청년·여성 두루 발탁, 중도 확장

당시 특강서 김 위원장은 구체적으로 독일 사례를 들었다. 김 위원장은 “독일은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신자유주의가 한계를 보일 때 보완을 잘했다. 배워야 한다”고 했다. 독일의 기민당은 보수정당이지만 진보 정책 등을 수용하면서 집권에 성공했다.


정치권에선 김 위원장이 독일 유학 경험을 살려 ‘기본소득제’를 도입할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김 위원장이 언급한 기민당은 보수정당임에도 불구하고, 저소득층 지원금 확대와 같은 공약을 펼쳐 집권에 성공했다.

기본소득제는 재산, 소득, 고용 여부 등에 상관없이 정부가 모든 국민에게 동일하게 최소 생활비를 지급하는 제도를 말한다.

성공한 전례도 있다. 김 위원장은 지난 2012년 통합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의 ‘박근혜 비대위’에 합류해 정강정책을 갈아 엎고 ‘경제민주화’를 제시해, 중도 표심을 얻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만 특강 후 기본소득제 도입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기본소득은 여러 가지를 검토해야 한다”며 “아무렇게나 하는 게 아니다”라고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 악수 나누는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사진 오른쪽)과 주호영 원내대표

비대위는 임기 초반에 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이하 여연)에 대한 개혁에 본격 드라이브를 걸 예정이다. 여연은 지난 20년 동안 정책 발굴 및 당의 비전과 전략 연구, 여론조사 등에 기여하며 당의 브레인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당 대표가 이사장을 겸임하기 시작한 후로부터 겸직 문제가 계속 불거지면서 당 대표 친위부대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여연 원장을 맡았던 통합당 김세연 전 의원 역시 여연이 당 대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여론조사 데이터를 왜곡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특히 이번 총선 과정서 미래한국당과 함께 과반을 얻을 것이라는 장밋빛 관측을 내세운 것은 여연 개혁의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김종인 키즈
세대 교체

일각에선 여연이 해체에 들어갈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가 당 회의서 ‘여연 해체’를 거론했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여연에 대해 “연구소 간판만 붙인다고 연구가 되는 게 아니다”라며 “제대로 안 되면 싱크탱크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통합당은 비대위 출범으로 소위 ‘태극기부대’로 지칭되는 극우세력과의 거리를 두고 중도층의 확장에 힘쓸 것으로 예상된다.

통합당 지도부는 지난해부터 여러 장외투쟁서 극우 세력들과 범여권에 대항해오면서 이들과 선을 긋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통합당은 차명진 전 후보의 ‘세월호 막말’과 같은 논란들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면서 이번 총선서 유례없는 대패를 당했다.

김 위원장은 당의 극우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비대위를 청년과 여성을 중심으로 꾸려야 한다는 의견을 당에 개진한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로 통합당이 지난 달27일 발표한 비대위 9인 중에는 여성으로는 초선의 김미애 의원·김현아 전 의원이, 청년으로는 김병민 서울 광진구갑 조직위원장·김재섭 서울 도봉갑 조직위원장·정원석 청사진 공동대표가 합류했다.

김병민 위원은 1982년생으로 정치평론가로 활동하다 이번 총선서 영입인재로 발탁돼 서울 광진갑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김재섭 위원은 1987년생으로 청년 정당 같이오름 창당준비위원장을 맡았다. 이번 총선서 퓨처메이커로 발탁돼 서울 도봉갑에 출마했으나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정원석 위원은 청년단체 청사진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이번 총선서 당 중앙선거대책위 상근대변인 역할을 수행했다.

김병민 위원은 “비대위원의 면면을 보면 당연직을 제외하고 물리적 나이를 3040으로 맞췄고, 수도권, 중도층의 민심을 무겁게 청취하고 국민이 원하는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는 쪽으로 비대위원을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한국 정치사를 돌이켜보면, 선거서 패배한 당은 어김없이 비대위를 꾸려왔다. 통합당만 해도 이번 김종인 비대위까지 합치면 8번째 비대위다. 하지만 비대위 체제는 대부분 실패에 그쳤다. 임시직에 불과해 짧은 기간 선거 패배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김 위원장이 비대위 출범 전 무기한 전권을 당에 요구했던 이유기도 하다.

대선 후보
어디 없나

김 위원장은 여러 차례 자신의 역할은 다음 대선서 당이 선거를 치를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승리를 이끄는 것이라고 밝혔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대선 후보가 나올 수 있도록 당 시스템 구축에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야권의 마땅한 대선 후보가 없다. 당 내부에서는 전국 단위 선거를 4번 연속 패배한 상황서 다음 대선까지 패배하면 당이 그대로 무너질 것이라는 절박함이 감지되고 있다.
 

▲ ▲지난달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서 열린 미래통합당 제2차 전국위원회서 구호 외치는 주호영 원내대표

한국갤럽서 실시한 차기 정치지도자 선호도 여론조사에 따르면, 여권 후보들이 큰 강세를 보이는 반면 야권서 선두를 달리던 통합당 황교안 전 대표도 지지율이  1%까지 떨어진 상태다.

통합당 안팎의 대선주자들이 비대위에 우호적이지 않은 점 역시 김 위원장에게 큰 부담이다. 김 위원장이 차기 대선 후보로 ‘1970년대생 경제전문가’를 내세운 것이 첫 화근이 됐다. 김 위원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서 “70년대에 출생한 사람 중 비전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 국가적 지도자로 부상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에 통합당 홍준표 전 대표는 “대한민국을 이끌 만한 능력과 자질이 되는가 살펴보는 게 우선”이라며 “30대, 40대가 그만한 정치적 역량이 있는 세대는 아니라고 본다”고 반박했다. 홍 의원은 김종인 비대위에 대해 “당을 제대로 혁신해 국민에게 다가가는 정당으로 만들어주면 좋겠다”면서도 ‘대선에 관여해선 안 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도 김 위원장으로부터 야박한 평가를 받았다. 김 위원장은 오 전 시장의 면전서 “무상급식을 주민투표 한 건 참 바보 같다”고 했다.

지난 2011년 오 전 시장은 무상급식을 시행할지를 주민투표에 부쳤다. 33.3%에 미달하면 시장직을 사퇴하겠다고 했는데, 투표율이 25%에 그쳐 그는 사퇴했다. 김 위원장의 발언에 대해 오 전 시장은 “수긍한다”며 “새로운 복지 패러다임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에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탈이념 정책 “사회주의로 비난 말라”
2년 남은 대선 ‘강한’ 리더십 변수

김종인 비대위를 반대해왔던 의원들과 충돌할 가능성도 있다. 중진 의원들 사이서 민주당과 통합당을 왔다갔다 한 김 위원장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은 데다, 대대적인 정책 노선 수정으로 인해 당내 반발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김 위원장은 이들에 대한 공천권이 없어진 만큼 이전 비대위 만큼 칼날이 예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김 위원장의 강한 리더십이 통합당과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킬 지도 미지수다.

정치권에선 그를 ‘여의도 차르(전제군주)’라고 일컫는다. 김 위원장이 지난 2016년 더불어민주당 비대위 대표로 전권을 휘두르며, 친노(친 노무현)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 물갈이를 했던 바 있기 때문이다. 당시 당의 전권을 쥐고 있던 그는 중요 결정들을 독점해 필리버스터를 중단하고 당내 주요 인사들 공천을 탈락시키는 등 전격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 미래통합당 청년인재 회동에 앞서 대화 나누는 참석자들

친노 세력의 공천 문제로 갈등의 골이 깊어지자, 김 위원장은 당시 자택 칩거에 들어가면서 독단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김종인 비대위는 앞으로 통합당의 이념, 정책 등 모든 것을 대대적으로 혁신해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김 위원장은 “바뀐 세상에 적응하지 않으면 국민의 관심을 가질 수 없다”며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세상 변화에 빨리 적응할 수 있는 정당이 되자”고 발언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종인 비대위는 6월 첫날부터 임기를 시작해 여러 정책들은 당내 논의를 거치며 구상을 구체화하고 단계적으로 공개할 전망이다.

닳고 닳아
무딘 칼날?

김근식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SNS에 김종인 비대위의 성공 조건을 “반성 없는 정당의 극복”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그야말로 상상 이상의, 아니 상상조차 못할 정도의 근본적 변화와 대혁신이 아니면 국민들의 야당에 대한 비호감을 바꿀 수 없다”고도 했다. 이어 “한국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통합당의 환골탈태와 근본혁신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의 과제”라며 “어물쩍 혁신하는 모양만 갖추거나 대충 변화하는 시늉만으로는 민주당에 헌납하는 야당이 반복되고 말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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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한미 정상회담 팩트시트가 공개되자, 가장 큰 화제가 된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에 대해 “문구가 추상적이어서 모호하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자극 받은 일본도 핵잠수함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핵잠수함 건조를 현실화하지 않으면 “일본에 핵 보유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의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하게 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달 29일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타결된 한미 관세·안보 협상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가 지난 14일 공개됐다. 가장 큰 논란은 핵 추진 잠수함(이하 핵잠수함) 관련 합의 문구였다. 산 너머 산 구체성 없다 팩트시트를 통해 확인되는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선 “구체성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팩트시트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민간·해군의 원자력 프로그램 ▲한미 원자력 협정에 부합하고 미국의 법적 요건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로 귀결될 절차 등을 지지한다. 이어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고, 한국과 조선 사업 요건 진전·연료 조달 방안 등을 포함해 긴밀히 협력한다. 미국은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 지지·승인·협력할 뿐이다. 이를 두고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같은 날 브리핑에서 “한미 정상의 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에서 건조하는 게 전제였다”며 “우리 핵잠수함을 미국에서 건조하는 방안은 거론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같은 날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며 “국내 건조 장소 합의는 팩트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기자들 앞에서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을 발표하면서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건조될 것”이라며 “미국 조선업이 곧 대대적인 부활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핵잠수함이 건조되려면, 산적한 현안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 팩트시트엔 건조 장소가 적시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명시해 발표했기 때문에, 미국이 순순히 양보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같은 회담 결과를 두고 양국의 주장이 엇갈리는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다.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및 핵연료 재처리엔 ▲한미 원자력 협정 부합 ▲미국의 법적 요건 준수 ▲한국의 평화적 이용 등 단서가 붙는다. 기술 이전 과정에도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핵잠수함 보유국은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인도 등 6개국이다.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30일 “미국이 핵잠수함 기술을 공유한 사례는 1950년대 최우방국 영국과 협력한 사례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미국의 핵잠수함 기술은 미군이 보유한 가장 민감하고 철저히 보호돼온 기술”이라며 “가까운 동맹인 영국·호주와 체결한 핵잠수함 협정에서도 직접 기술 관련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우리에겐 우라늄 농축·재처리 기술이 없어서 미국으로부터 핵연료를 공급받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하지만 연료 공급 장소·방식은 팩트시트에 명시되지 않았다. 연료 공급 방법을 확보하지 못하면, 핵잠수함을 만드는 의미가 없다. 핵잠 건조 추상적인데 “고정밀지도 내놔” 발 빠르게 비핵 3원칙 수정하려는 일본 미국의 법률 개정 절차도 거쳐야 한다. 미국 원자력법은 ‘미국이 다른 나라와 군사적 목적의 원자력 협력을 하려면, 원자력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미 원자력 협정을 개정한 후 미국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국제 무기 거래 규정도 상원의 동의를 얻어 개정해야 한다. 원자력 협정 개정이 팩트시트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미국 에너지부의 반대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미국 일각에서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한단 것이다.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미국에 고정밀지도를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팩트시트엔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포함한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정책에 있어 미국 기업이 차별당하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위치·재보험·개인정보에 대한 것을 포함해 정보의 국경 간 이전을 원활하게 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도 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온라인플랫폼의 ▲자사 우대 ▲끼워팔기 ▲멀티호밍 제한 등을 막는 내용이 담긴 우리의 온플법 제정을 반대했다. 팩트시트를 따르면, 미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가 어려워진다. 아울러 우리는 구글·애플이 요청하는 1:5000 축척 고정밀지도 국외 반출 요청을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정부는 애플이 요청한 지도 반출 여부를 다음 달에, 구글의 요청은 내년 2월 결정할 예정이다. 팩트시트에 게재된 합의 사항대로라면, 애플·구글의 요청을 수용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 박성훈 수석대변인은 지난 15일 논평을 통해 팩트시트 속 위험요소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박 대변인은 “정부는 ‘농·축산물 개방은 없다’고 말해 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대로 농·축산물 개방 문구가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고정밀 지도 반출 등 대한민국의 디지털 주권과 직결된 사안까지 미국의 요구를 반영해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반도체 관세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보다 불리하지 않게 한다’는 모호한 문구만 있다”며 “경쟁국 대만과 비교해 어떻게 적용할지 등 구체적인 내용은 팩트 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50억달러(약 36조7183억원) 규모의 미국산 군사 장비를 5년 동안 구매하고, 주한미군에 대해 330억달러(약 48조4682억원)를 포괄적으로 지원하면, 천문학적인 재정 부담을 떠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핵잠수함 건조 과정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라서 장밋빛 전망만 내세울 때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고정밀지도 반출 가능성 실제로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가 실현되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해서 실질은 아직 불투명하다”며 “선언이 지나치게 앞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는 핵잠수함 나비효과가 일본으로 번졌단 점이다.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자, 일본 정치권도 크게 술렁였다.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은 지난 12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미국·중국은 이미 핵잠수함을 갖고 있고, 지금은 핵잠수함을 보유하지 않은 한국·호주가 앞으로 보유하게 된다”며 “일본의 억지력·대응력을 강화하려면, 전고체·연료전지·원자력 등 다양한 동력원에 대해 폭넓게 논의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일본은 1967년 사토 에이사쿠 당시 총리가 선언했던 비핵 3원칙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비핵 3원칙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선언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일찍부터 핵무기 반입 금지 방침 완화를 주장했다.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도 같은 날 “현 시점에선 재검토 여부를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국회 연설에서 “내년 중 3대 안보 문서 개정을 위해 검토를 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3대 안보 문서는 ▲국가안보 전략 ▲국가방위 전략 ▲방위력 정비 계획 등을 말한다. 여기엔 비핵 3원칙이 모두 포함돼있다. 일본은 이미 지난 2022년 “반격 능력을 보유하고, 장거리 미사일 전력을 향상한다”는 내용을 3대 안보 문서에 포함했다. 묘한 것은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이 일본 국내 정치구도까지 뒤흔들 가능성이 있단 것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카이치 총리가 선출될 당시 라이벌이었다. 지난달 4일 진행된 자민당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183표(31.1%)를 얻었고, 고이즈미 방위상은 164표(27.8%)를 얻었다. 결선투표에선 다카이치 총리가 185표(54.3%)를, 고이즈미 방위상은 156표(45.7%)에 머물렀다. 하마터면 다카이치 총리는 자민당 총재·총리로 선출되지 못할 뻔했다. 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로 통하는 다카이치 총리에 반발한 공명당이 지난달 10일 자민당과의 연정에서 탈퇴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명당 사이토 데쓰오 대표는 고이즈미 방위상에 대해선 “정치자금 규제와 관련된 공명당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면서 호평했다. 고이즈미 방위상도 “지금까지 정책 실현에 대해 힘써 주신 것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화답했다. 미일 협력 중국 견제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0일 기적적으로 일본유신회와의 각외 협력 형태의 연립 정권 구성에 합의했다. 각외 협력은 연립 정권 구성엔 합의하지만, 내각엔 참여하지 않는 형태를 말한다. 일본유신회가 제시한 조건은 ▲오사카 부수도 지정 구상 수용 ▲국회의원 정원 10% 감축 ▲기업·단체 후원 폐지 ▲평화 헌법 개정 ▲방위력 강화 등이었다. 자민당과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모두 수용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1일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했다. 가장 큰 정치적 의미는 ‘당내 정적 포용’이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전혀 없는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해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정반대의 의미를 강조하는 해석도 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없는 고이즈미를 현안이 산적한 방위성 장관으로 임명해 자멸을 유도한다”는 취지의 해석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주어진 현안은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 ▲자주적 방위력 강화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 ▲방위 장비 수출 운용지침 폐지 등이다. 이중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은 ‘중국 견제’라는 미국·일본의 공통 이해관계로부터 시작됐다. 일본은 군사력을 강화해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역할을 맡으려고 한다. 미국은 일본의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더 효율적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 문제는 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 “방위비를 GDP(국내총생산)의 3.5%로 증액하라”고 요구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8일 진행된 미일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위비 증액·방위력 강화 방침을 설명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음 날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을 만나 “방위비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오는 2028년 3월까지 방위비를 GDP의 2%까지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방위 정책과 관련해 국내 정세와 가장 민감하게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을 곤란하게 할 사안이 있다. 바로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이다. 일본 오키나와현 소재 후텐마 기지는 기나완시 시가지 한복판에서 시 면적의 1/4을 차지하고 있다. 후텐마 기지는 1945년 건설됐고, 일본에서 크고 작은 논란을 일으켰다. 오키나와현의 주민 중 상당수는 미군의 범죄와 소음 피해 등을 이유로 기지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팩트시트’ 고이즈미 날개 다나 견제 압박 와중에 뜻밖의 호재 지난 2004년엔 후텐마 기지 소속 헬리콥터가 오키나와국제대학에 추락하는 등 사고도 여러 번 발생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편입된 시점은 1879년이었다. 1945년부터 1972년까진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따라서 오키나와에선 반미 감정이 강하고, 자민당 지지율이 낮은 편이다. 후텐마 기지와 관련해서도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섬 내 나고시 헤노코 이전을 추진했지만, 오키나와 현·주민의 반대가 강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23년엔 다마키 데니 현지사가 방위성이 신청한 비행장 설계 변경 신청을 승인하지 않고 공사 중단을 요구했다.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은 일본의 역사적 맥락과 맞물려 수십년 넘게 해결되지 못한 사안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중국 견제를 위한 새 안보 질서와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정치적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 2019년 고이즈미 방위상을 환경상으로 발탁했다. 이 임명에 대해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무게를 키우면서도, 문제가 발생하면 그를 정치적으로 낙마시킬 수도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의 아버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퇴임 이후 강력한 원자력 발전소 폐지론자가 됐다. “아버지의 활동이 아들의 정치적 미래를 흐리게 할 수 있어 고이즈미 방위상을 견제하는 묘수”란 평가도 있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기후 변화 문제는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등 적당히 괴상한 발언을 하는 등 바보 행세를 하면서 견제를 피했다. 한동안 일본에선 고이즈미 방위상이 진짜로 바보인지, 바보인 척 연기를 하는지 장난 섞인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후 고이즈미 방위상은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고노 다로 전 외상과 연합해 이시바 내각 탄생에 큰 공을 세웠다. 이어 농림수산상으로서 쌀값 폭등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지난 2023년엔 자민당 내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조기 의회 해산 및 총선거 진행을 적극적으로 제안한 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자민당은 중의원 과반에 미달하는 의석을 얻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더 큰 패배를 당하기 전에 적절한 시점에서 중의원 해산을 건의했다”며 긍정적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방위상 취임 이후엔 어떻게 구 아베파·아소파의 견제를 피할 것인지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한 사안은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견제 수위를 낮추면서 자민당·내각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뜻밖의 호재로 다가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이 일본의 핵잠수함 도입을 주도한다면,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가 될 수도 있다. 견제 회피 일거양득 우리의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일본 정치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사안이 된 것이다. 만약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불확실해지면, 이재명정부는 이 때문에 더욱 큰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일본의 군비 증강에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미래를 위한 발판을 제공한 것”이란 비판이 따라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핵잠수함 나비효과는 이렇게 일본으로 번졌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