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초대석> 타고난 배우 이제훈 

카메라만 돌면 광기 어린 연기

[일요시사 취재2팀] 함상범 기자 = 배우 이제훈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영화는 <파수꾼>이었다. 2011년 저예산 영화로 개봉해 그해 있었던 모든 영화 시상식을 독식했다. 감독도 배우도 무명이나 다름없었던 <파수꾼>의 주역들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인물로 발전했다. 그 중심에는 이제훈이 있다. 영화 <고지전> <아이캔스피크> <박열>, tvN 드라마 <시그널> 등에서 보여준 뛰어난 연기로 그는 이제 가장 주목받는 30대 배우가 됐다. 
 

▲ 배우 이제훈 ⓒ넷플릭스

배우 이제훈의 연기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광기’다. 사전적 의미로는 ‘미친 듯한 기운’을 말한다. 이제훈의 눈에 가득 서려 있던, 살쾡이 같은 눈빛이 스크린을 압도한다. 

탄탄한 연기력 
부드러운 매력

자신이 갖지 못한 화목한 가정을 가진 친구 베키(박정민 분)를 향한 시기심을 뿜어낸 영화 <파수꾼>의 기태, 전쟁터서 살아남기 위해 마약이 든 주사기를 팔뚝에 힘껏 꽂던 <고지전>의 일영, 풋풋한 첫사랑에 실패하고 좌절했던 <건축학개론>의 승민, 한국판 히어로 탐정을 제시한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의 길동, 조선의 ‘개XX’이자 아나키스트였던 <박열>의 박열, 미제전담사건을 파헤쳤던 tvN <시그널>의 해영, 그리고 도박장을 털어 새 인생을 꿈꾸는 넷플릭스 최신 영화 <사냥의 시간>의 준석까지, 이제훈의 눈빛에는 늘 광기가 서려 있었다.

이제훈의 광기에 대한 영화감독들의 평가도 주목할만하다. <박열>의 이준익 감독은 그의 광기를 두고 “수백 번을 돌려봤지만 볼 때마다 소름 돋는 연기”라고 평했고, 이번 <사냥의 시간> 윤성현 감독은 “이제훈이 가진 감정적 진정성과 집중력, 그 안의 에너지, 그걸 다양한 표정으로 보여줄 수 있는 얼굴까지, 모든 것에서 타고난 배우”라고 칭찬했다.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에 진학했다가 연기자의 꿈을 위해 한국예술종합대학교(이하 한예종) 연극원에 입학한 이제훈은 영화 <밤은 그들만의 시간> <약탈자들>로 영화 관계자들 사이서 조금씩 회자됐다. 그리고 <파수꾼>을 통해 단숨에 라이징스타로 발돋움했다.


<사냥의 시간>서 재회한 이제훈과 박정민, 윤성현 감독의 인생에 있어 <파수꾼>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최근 화상 인터뷰를 통해 이제훈은 <사냥의 시간>서 다시 함께하게 된 것은 <파수꾼>이 엄청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파수꾼>을 하면서 윤성현 감독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와 자세에 아주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영화를 보는 시각도 그렇고, 윤 감독은 모든 걸 다 바쳤다. <파수꾼> 때도 열악한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잠 안 자면서 서로 모든 걸 갈아 넣어 만들었다. 그 작품이 내게 있어서 큰 뿌리가 됐다고 생각한다. 배우 인생서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한 뿌리를 내려준 사람이 윤 감독이다. 그가 생각하는 영화의 다양한 이야기와 장르. 무엇이 됐든 배울 것도 있을 것 같았고, 성장할 기회라고 생각해 이 작품에 출연했다.”

윤성현 감독과 <사냥의 시간> 재회
“도망치고 싶을 만큼 촬영 힘들었다”

2011년 이후 무려 9년 만의 재회다. 이제훈은 국내 정상급 배우로 발돋움했다. 윤 감독은 차기작이 없었다. 여러 소문은 무성했지만, 차기작까지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럼에도 과거나 지금이나 연기가 어려운 건 매한가지였다. 

“첫 작품보다 20배는 힘들었던 것 같다. 기태 역할을 연기할 때도 이게 맞는 건지 아닌지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웠는데, 이번에도 비슷했다. 공포감에 쫓기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을 연기해야 하는데,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상상력을 극대화해서 연기했는데, 정말 쉽지 않았다.”

무려 9년이다. 스스로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털어놨다. 앞만 보던 경주마였는데, 이제 주위를 둘러볼 줄 알게 됐다고 했다. 
 

▲ ⓒ넷플릭스

“단편 영화만 찍다가 <파수꾼>으로 첫 장편영화 주인공이 됐다. 그때는 그저 경주마처럼 ‘연기를 잘해야겠다’만 생각했다. 그 인물처럼 살아야겠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췄다. 시야라는 게 없었다. 그 이후에 많은 작품을 하면서 작품에 있어 무게감이나 책임감을 갖고 임하다 보니까, 함께 하는 동료 배우들 및 스태프와 잘 어우러지는 법을 배웠다. 배우로서 연기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분위기를 띄우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소통하려는 자세가 예전에 비해서는 생긴 것 같다.”

윤성현 감독에 대해서는 집념이 더욱 강해졌다고 설명했다. 오랫동안 사적인 친분을 유지해왔는데, 현장서의 윤 감독은 더욱 치열해져 있었다는 게 이제훈의 말이다. 

“윤 감독 입장에선 첫 상업영화였다. 녹록지 않았을 것이고, 버거웠을 텐데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했던 것을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결국 만들어냈다. 영화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 같았다. 감독이 한 장면 한 장면을 엄청난 에너지와 열정으로 담아내다 보니까, 나 역시도 연기를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힘들었고, 모든 것을 던졌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다음 작품은 이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명배우의 집념
미친 듯한 기운

길고 긴 프리 프로덕션 과정을 거치며 촬영을 하던 중 중단된 적도 있었다. 코로나19 여파로 인해 개봉을 미뤘고, 넷플릭스와 손잡는 과정서 해외 세일즈 업체인 콘텐츠 판다와도 잡음이 있었다. <사냥의 시간>은 우여곡절 끝에 공개됐다. 힘들었던 기간이었다고 토로했다. 

“여러 과정으로 인해 연기를 하기도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끝내 잘 극복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보다 나를 더 힘들게 하는 작품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만큼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이 정도로 바닥까지 내리게 하는 작품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 지쳤었다. 촬영, 프로덕션 기간도 길었고, 계속 쫓기는 준석으로 살아가면서 이러다 황폐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파수꾼>에 대한 뜨거운 찬사와 함께 이제훈, 최우식, 안재홍, 박정민 등 충무로를 이끄는 30대 연기자들이 대거 참여한 이 작품은 개봉 전부터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막상 뚜껑을 연 <사냥의 시간>은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린다. 스릴러 장르의 서스펜스는 상당하지만, 악역 한(박해수 분)이 준석(이제훈 분)을 놓아주는 장면부터 ‘산으로 간다’는 평가가 많다. 아울러 이야기를 매듭짓지 않고 끝낸 대목은, 신선하지만 허무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제훈은 아쉬움보다는 <사냥의 시간>이 가진 특별한 장점을 더욱 주목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가 직선적이고 제가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액면 그대로의 상황과 그 상황을 타개해가는 그런 이 치기 어린 젊은이들의 모습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미술이나 이미지적인 면에서 이런 한국영화는 없었다고 자부한다.”

영화는 공포스러운 한과 맞서기 위해 떠나는 준석의 얼굴로부터 마무리된다. 이 대목서 청춘을 향한 윤 감독의 응원이 녹아있다. 교훈적인 메시지가 있으나, 노골적이지 않다. 이제훈에게 이러한 메시지가 큰 울림을 줬다고 한다. 

“영화 마지막 장면 찍을 때 감독이 이 이야기를 통해 하고 싶은 의중이 이해됐다. 내가 선택한 뭔가에 대해 결과를 받아들여야 할 때 ‘나는 도망갈 것인가’ 아니면 ‘맞서 싸울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다. 결과물만 보고 그 의미를 해석한 영화 팬분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시나리오를 보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것을 영화 막판에 느꼈는데, 영화 완성되고 알았던 걸 영화만 보시고 알아주시는 것이 기뻤다.”

디스토피아
베를린영화제


촉망받는 배우로서 매번 유의미한 연기력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온 이제훈에게도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인생을 살다 보면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 선택에 있어서 결과가 주어진다. 저 역시도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 텐데,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거나 아니면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게 될 수도 있고, 또는 회피하고 도망갈 수도 있다. 현재 배우라는 길을 걷고 있다. 나 역시도 힘든 순간을 맞을 수도 있는데, 그 모든 것이 배우라는 울타리 안에서 도약하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배우의 길을 포기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를 몸소 체험하고 느낀 점이다.”

<사냥의 시간>은 디스토피아에 관한 이야기다. 암울함 그 자체다. 말로만 나오는 ‘헬조선’의 실사화기도 하다. 한화의 가치는 떨어졌고, 총기류는 마음만 먹으면 살 수 있다. 경제는 물론 치안도 무너졌다. 약자들은 죽임을 당하는 약육강식의 세상. 유토피아를 꿈꾸는 청춘들이 희망 대신 절망을 맛본다. 희망을 보기 위해서는 ‘맞설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제훈에게 있어 유토피아는 무엇일까. 작은 영화관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 배우 이제훈 ⓒ넷플릭스

“내 꿈은 소박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건데, 극장 하나 차리는 게 꿈이다. 그곳에서 팬들과 영화를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사냥의 시간>이 끝나자마자 뉴욕으로 떠났다. 뉴욕에 가면 독립영화관이 많다. 50∼60년 전에 만들어진 필름을 상영하는 영화관이다. 그런 곳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된다면 작은 영화관을 만들고 싶다.”

이제훈이 준석을 통해 표현해야 했던 감정은 주로 공포심이다. 정보를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닌 존재 앞에서 느끼는 공포감을 온전히 표현해야 했다. 주로 과거의 경험을 많이 의지했다고 한다. 

“한(박해수 분)과 마주할 때 극심한 공포심을 표현해야 했는데, 어릴 적 학교 앞에서 내게 ‘이리 와 봐’라고 했던 형들을 만났을 때의 감정을 끄집어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와보라고 할 때의 트라우마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때 무작정 도망쳤는데, 그렇게 심장이 떨렸던 적이 없다. 한을 연기한 박해수 배우가 워낙 강렬한 이미지를 구축해줘서 하체에 전율이 있으면서 기운이 확 빠지는 경험을 했다. 회생 불가능한 낭떠러지 앞에 있는 기분으로 연기했다.”


에너지, 열정, 진정성 ‘엄지 척’
“영화·드라마 이어 제작자 도전”

<사냥의 시간>에는 젊은 30대 배우들이 주축을 이룬다. 30대 초중반의 또래 배우들이 한 앵글에 담긴다는 점도 이 영화만의 특색이다. 그리고 이들 사이서 나오는 시너지가 어마어마하다. 연기에 뛰어난 감각을 지닌 배우들의 힘이 모니터를 통해 그대로 전달된다. 연기만큼은 호불호가 없다.

“영화를 찍으면서 ‘왜 이렇게 안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에너지로 똘똘 뭉친 작품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있으면, 우선적으로 캐스팅을 생각해볼 것 같다. 현장에 가는 게 정말 행복했다. 일하러 간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같은 꿈을 꾼다는 것이 정말 좋은 순간이었던 것 같다.”

<사냥의 시간>이 한국영화 최초로 베를린국제영화제 베를리날레 스페셜 갈라 섹션에 초청되면서 이제훈은 지난 2월 열린 제70회 베를린영화제에 다녀왔다. <사냥의 시간>은 영화제 상영관 중 가장 큰 규모인 팔라스트 극장 1600여석을 매진시켰고, 뜨거운 반응을 이끌었다.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나온 영화들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 저런 영화제서 내 작품으로 레드카펫을 밟을 수 있을까 했는데 <사냥의 시간>으로 베를린을 가게 됐다. 꿈만 같았다. 가기 전부터 설렜다. 1600여석이 꽉 찬 모습과 상영 후 박수와 환호를 들었을 때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영화제에 오고 싶어 하는구나라고 새삼 느꼈다. 좋은 작품을 만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또 다짐하게 된 계기였다.”

<사냥의 시간>이 끝나도 이제훈은 바쁘다. 영화 <도굴>이 개봉을 앞두고 있고, 또 다른 넷플릭스 드라마 <무브 투 헤븐:나는 유품정리사입니다> 촬영도 한창이다. 아울러 제작자로서도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도굴>은 타고난 천재 도굴꾼이 전국의 전문가들과 함께 땅속에 숨어있는 유물을 파헤치는 이야기를 그리는 범죄 오락 영화다. 이제훈과 함께 조우진, 신혜선, 임원희가 나선다. 코로나19로 인해 침체기에 놓인 영화계를 살려줄 영화로 꼽힌다.

<무브 투 헤븐:나는 유품정리사입니다>는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는 청년과 후견인의 이야기로 죽은 이들이 남긴 이야기를 풀어내는 과정을 담는다. 뮤지컬 배우 탕준상과 투톱 영화다. 이제훈은 “굉장히 파격적인 이미지의 영화”라고 정의했다.

배우뿐 아니라 제작자로서도 활동의 영역을 넓힌다. 최근 정우성, 하정우 등 선배 배우들의 변신에 이제훈도 동참한 셈이다. 지난 10월 양경모 감독, 김유경 프로듀서와 제작사 하드컷을 설립하고 첫 작품 <팬텀>을 준비 중이다. 이 모든 것이 영화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출발한다. 

다음은…
제작자?

“영화를 떼어놓고 제 인생을 논하기도 힘들고 영화가 아니면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다. 그래서 제작도 도전하게 됐다. 지금 많은 공부를 하고 있다. 뜻이 맞는 사람들과 대중이 좋아할, 혹은 오래 남겨질 작품을 만들어 보여드리는 게 제 꿈이다. 어떤 방향성으로 나아갈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해볼 테니 주목해주시길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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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생기업 잡은’ 신정훈 의원실 수상한 보도자료

[단독] ‘생기업 잡은’ 신정훈 의원실 수상한 보도자료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한 업체가 국회의원실발 보도자료에 직격탄을 맞았다. 해당 업체는 보도자료의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보도자료를 쓴 의원실 보좌관은 “잘못된 부분이 없다”고 반박했다. 양측의 입장이 첨예하게 엇갈리는 상황에서 <일요시사>가 사건의 전말을 파헤쳐 봤다. 국회의원은 최고 헌법기관인 국회의 구성원인 동시에 개개인이 헌법기관이라는 이중적 지위를 갖는다. 법률을 만들고 개정하는 입법 기능 외에도 인사청문회, 국정감사 등을 통해 행정부를 견제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투표로 선출된 ‘국민의 종’으로서 국회의원은 기자회견, 보도자료 등을 통해 국민에게 활동 상황을 보고한다. 국회의원 민원 창구? 국회의원 이름으로 하루에도 수건씩 보도자료가 쏟아진다. 법안을 발의하거나 지역구 예산을 수주했다는 내용, 자료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정부 기관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용 등이다. 언론은 국회의원실발 보도자료를 받아 기사로 작성한다. 언론 보도는 사정기관의 감사나 수사 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최근 한 국회의원실에서 나온 보도자료가 논란이 되고 있다. 보도자료에 언급된 정부 기관, 그 기관과 일하는 업체 등이 후폭풍에 휘말렸다. 보도자료를 받아 쓴 일부 매체는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됐다. 언론사 기자들의 이메일로 배포된 보도자료는 국회의원실 보좌관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5월14일 더불어민주당 신정훈 의원실 오모 보좌관은 ‘경찰청, 순찰차 납품 지연 및 특정 업체 유착 의혹에도 자료 제출 거부!’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작성해 언론사 기자들에게 보냈다. 신정훈 의원은 전남 나주·화순을 지역구로 하는 3선 의원으로, 현재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경찰청은 행정안전위원회의 피감기관이다. 순찰차는 일반 차량에 특장 작업을 거쳐 경찰청에 납품된다. 멀리서도 순찰차임을 확인할 수 있는 리프트 경광등을 달고 겉면에 스티커를 부착하는 ‘데칼’ 작업을 거쳐 수배·체납·도난 차량을 확인할 수 있는 멀티캠을 내부에 다는 등의 작업을 거친다. 순찰차 한 대를 특장하는 데 약 1700만원의 비용이 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매년 1000여대의 노후 순찰차가 교체된다. 신정훈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해 노후 순찰차 959대를 교체하기 위해 총 491억원의 예산이 집행됐다. 하지만 이 중 약 225억원 상당인 343대가 납기를 맞추지 못했고 완성 검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또 납품업체의 문제로 순찰차 납품이 늦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발주 기관인 경찰청은 지체상금 부과, 계약 해지 등의 조치를 하지 않는 등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정훈 의원실의 자료 요구에 경찰청이 제출을 거부하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신정훈 의원실은 ‘공공계약에 정통한 한 법조계 관계자’의 “경찰청이 계약성 권리조차 행사하지 않고 이를 묵인한 데다 국회의 자료 제출 요구도 거부한 것은 행정 편의주의를 넘어 법적 의무의 명백한 방기”라며 “이 정도 사안이면 감사원 감사는 물론 직권남용과 배임 혐의까지 적용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라는 코멘트를 인용했다. 순찰차 납품 과정 지적 해당업체 “사실과 달라” 납품업체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신정훈 의원실은 “동일한 지배 구조를 가진 Y사(보도자료에는 A사)와 N사(B사)가 10여년간 경찰청의 대형 계약을 반복적으로 수주해 왔다”며 “수의계약이나 경쟁입찰의 형식을 빌린 사실상의 내정 또는 담합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공정거래법상 ‘부당 공동행위’ 및 ‘입찰 방해’에 해당될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N사는 Y사의 임직원이 만든 회사로 두 업체는 모회사-자회사 관계다. 신 의원은 “국민의 세금으로 집행되는 치안 장비 도입 사업이 법적 절차와 원칙을 무시한 채 일부 업체에 특혜로 왜곡되고 있다”며 “기존 계약분에 대한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규 발주가 진행돼서는 안 된다. 철저한 진상 조사와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대책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보도자료를 바탕으로 몇몇 언론이 기사를 냈다. 보도 이후 납품업체인 Y사가 보도자료 내용에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고 주장했다. Y사는 경찰, 법무부 등에 차량을 개조해 납품하는 특장업체다. Y사 관계자는 “보도자료가 배포되기 전, 기사가 나가기 전에 신정훈 의원실이나 언론으로부터 단 한 차례의 연락도 받지 못했다. 보도가 나간 이후 오 보좌관을 만나 사실과 다른 부분을 상세히 설명했지만 아무것도 반영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달에 관련 보도가 한 차례 더 나갔다”고 주장했다. Y사는 경찰청과 직접 계약을 맺거나 현대자동차로부터 하도급을 받는 형태로 이번 납품에 참여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경찰청은 현대자동차로부터 616대(소나타), Y사로부터 73대(스타리아 37대, 넥쏘 36대), N사로부터 270대(아이오닉 181대, 그랜저 89대) 등 총 959대를 납품받았다. Y사 관계자는 신정훈 의원실에서 지적한 납품 지연과 검사 불합격에 대해 “제작은 이미 완료됐고 출고를 기다리던 중에 검사 하나가 마무리되면 또 다른 검사를 요청하는 식으로 5개월 동안 시간을 끌었다”며 “2015년부터 경찰청에 순찰차를 납품해 왔지만 이번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납기에 늦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우리와 N사의 계약 차량은 납품까지 5개월 넘게 걸렸고 H사의 계약 차량은 검사 하루 만에 출고 처리됐다”며 “그동안 경찰청 검사가 미진했다고 주장하려면 우리든 H사든 같은 잣대로 진행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사실 확인 안 했다? H사는 순찰차에 설치하는 리프트 경광등을 제작하는 업체로 현대자동차와 하도급 계약을 맺고 납품한 것으로 알려졌다. Y사와 N사가 담합해 경찰청 계약을 10년 동안 수주해 왔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경찰청은 조달사업법에 따른 나라장터 종합쇼핑몰 우선 구매 제도를 통해 (업체들과) 계약했다. 나라장터에 물건을 올리면 경찰청에서 선택하는 방식”이라면서 “우리와 N사는 같은 차종으로 경쟁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다”고 반박했다. 반면 오 보좌관은 순찰차 사업과 관련해 드러난 문제를 고치라고 여러 차례 얘기했는데 시정되지 않자 보도자료를 통해 지적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1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비서실에서 <일요시사>와 만나 “공무원이 어떤 업무를 하다가 다소간 실수가 발생할 수 있고 관행적으로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그걸 인정하고 시정하면 끝까지는 안 간다”고 말했다. 이어 “순찰차 관련 문제를 (경찰청에) 수도 없이 얘기했는데 고쳐지지 않았다. 1차 차량 검사에서 불합격이 나왔는데 2차 검사를 할 때 보니 1차에서 나온 문제가 하나도 시정되지 않았다. 3차 검사는 나도 모르게 진행됐다. 시험성적서를 달라는 말에도 개인 정보를 이유로 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번에 납품한 순찰차에 설치된 경광등이 사양서에 맞지 않는다고도 지적했다. 오 보좌관은 “리프트 경광등의 핵심 기능은 주야간 150m 구간에서 잘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납품된 것은 그게 안 된다. 30m만 떨어져도 잘 보이지 않는다. 순찰차에 치명적인 장애”라고 비판했다. Y사 관계자는 “사양서가 존재하는데 30m 밖에서 안 보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경찰청에서 3회가량 시연회를 진행했고 현장에서도 더 밝다는 의견이 있었다. 경광등이 사양서와 일부 맞지 않는 건 애초에 사양서 자체가 H사의 제품에 맞춰진 것이기 때문”이라면서 “오히려 H사의 경광등이 경찰청 순찰차 사양서에 적용돼 2015년부터 2024년, 우리와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 10여년간 독점적으로 사용됐다”고 반박했다. “현장 직원들 사이에서 고장이 잦아 수리 비용이 많이 나온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는 이 관계자는 “이번 일이 일어난 것도 H사가 자사의 경광등을 납품하기 위해 오 보좌관에게 문제 제기를 한 게 시발점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정 안 해” “문제 없다” 순찰차를 납품하는 업체들이 자사의 경광등이 아닌 다른 업체의 것을 사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H사가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이번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Y사 관계자는 “2022~2023년 H사 경광등에 문제가 발생해 현대자동차가 납기를 놓치는 일이 일어났다. 이 일을 계기로 지난해 5~6월 경광등 납품업체를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던 걸로 안다”고 주장했다. Y사 역시 H사와 경광등 발주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Y사 관계자는 “지난해 6월부터 11월까지 H사에 경광등 발주 견적서를 달라고 요청했지만 답을 받지 못했다. 납기가 (지난해) 12월12일까지라 우리한테도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해) 11월15일 경찰청과 경광등 업체를 바꾸는 문제로 협의를 진행했고, 11월26일에 바뀐 업체의 경광등으로 우리 공장에서 시연회를 열었다”고 말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H사는 순찰차 납품업체들과의 갈등을 ‘민원’을 통해 해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H사 대표가 신정훈 의원실 오 보좌관을 만나 억울함을 토로했고 그 내용이 지난 5월 나온 보도자료의 배경이 됐다는 의혹이다. 실제로 오 보좌관은 처음에는 민원을 받아 보도자료를 작성한 게 아니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H사 대표를 만났다고 인정했다. 지난해 8월경 지역의 향우회장과 함께 H사의 대표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오 보좌관이 경찰청의 순찰차 사업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 오 보좌관은 지난 5월14일에 나온 보도자료에 대해 묻자 “지난해 8월부터 이 문제를 파고 있었다”며 “내부에서 나온 정보도 있고 경찰청에서도 (순찰차 사업에 대해) 문제 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 문제로 경찰청 관계자를 30~40번 만났다”고 밝혔다. 눈여겨볼 대목은 H사 대표가 같은 시기 신 의원에게 정치후원금을 냈다는 점이다. <일요시사>가 나주시·화순군 선거관리위원회를 통해 입수한 신 의원의 ‘연간 300만원 초과 기부자 명단’을 확인한 결과 H사 대표는 지난해 8월22일 500만원을 기부했다. 신 의원은 2014년 7월30일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국회의원이 됐고 20대(2020년), 21대(2024년) 총선에서 배지를 달았다. 2014~2016년, 2020~2024년 등 신 의원이 국회의원 활동을 하는 동안 H사 대표가 후원금을 낸 건 지난해 8월이 유일하다. 경광등 업체 변경 문제 때문? “사기업 갈등에 보좌관이 왜?” 오 보좌관은 H사 대표가 신 의원에게 후원금을 낸 사실을 알았냐는 질문에 “몰랐다”면서 “회계를 관리하는 직원은 나주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H사 대표에 대해 “이전까지 전혀 몰랐던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전체 정치후원금 모금 한도) 3억원 중에 500만원을 후원했다고 해서 지난해 8월부터 지금까지 이 문제에 매달리겠느냐”며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한 업체의 문제 제기가 합당하다고 생각했고, 자료를 받아보니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진행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좌관은 “경찰차 특장 시장 자체가 그렇게 크지 않아 뛰어드는 업체도 많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맨날 같이 했던 업체를 빼버리면 가만히 있겠나. 나는 Y사가 욕심을 부리면서 이 상황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기존에 해왔던 곳과 똑같이 하면 되지, 더 이익을 취하려 하느냐”고 되물었다. 업체 간 중재의 의도도 있었다는 것이다. H사 대표는 신 의원에게 후원금을 낸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민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신 의원을 지지하는 차원에서 후원금을 냈다는 것이다. H사 대표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일을 잘하신다는 말을 들어서 후원금을 냈다. 지금 이 문제와는 무관하다”며 “사업을 접을까 생각할 정도로 머리 아픈 문제”라고 말했다. 지난해 8월 오 보좌관을 만나 민원을 넣었는지는 “오래돼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Y사는 신정훈 의원실발 보도자료로 큰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Y사 관계자는 “정부 기관에 납품하는 제품을 만드는 건 맞지만, 엄연히 사기업 간 일어난 일에 국회 보좌진이 개입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며 “기사가 나간 이후 우리 회사는 경제, 이미지 부분에서 큰 타격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경찰청과 지체상금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업체 문제로 인한 지연이 결정되면 지체상금을 물어야 하는 상황이다. 차량 출고가 늦어지면서 보관을 위한 토지 대여료가 1억2000만원 정도 나갔다. 무엇보다 자회사인 N사의 신용등급 하락, 기사로 인한 이미지 훼손 등 무형적인 피해도 만만찮다”고 하소연했다. 받아쓴 언론 “취하해 달라” 한편 Y사는 신정훈 의원실에서 나간 보도자료로 기사를 작성한 매체 3곳을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했다. Y사는 “언론의 잘못된 보도로 인해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됐으며 국민에게 경찰 장비 도입 과정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다”며 “신청인(Y사)의 업무 수행 능력과 투명성에 대한 의구심을 야기해 치안 활동에 대한 신뢰도 저하로 이어질 수 있는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어 정정보도를 구한다”고 조정을 신청했다. Y사 관계자는 “2곳의 매체에서 ‘기사를 내릴 테니 소를 취하해 달라’는 내용의 답변을 언론중재위원회에 보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