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올림픽 격변기 “게임은 계속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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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 2020.04.13 09:18:43
  • 호수 12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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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A뉴스] 코로나19 사태로 오는 724일 개막 예정이었던 ‘2020 도쿄올림픽1년 후로 연기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프랑스 쿠베르탱 남작에 의해 근대 올림픽이 부활된 지 124년이 흐른 지금, 그동안 역사적인 격변기에 휘말렸던 역대 올림픽들을 살펴봤다.
 

▲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

191274일 스웨덴의 스톡홀름서 열린 제15IOC 총회서 IOC는 후보지 중의 하나였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탈락시키고 독일 베를린서 1916년 올림픽을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IOC 위원장이었던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은 독일 제국의 황제 카이저 빌헬름 2세에게 전보를 보내 이 사실을 알렸다.

1916년 베를린

독일은 올림픽을 위해 베를린 서쪽 그뤼네발드지역에 3만 석 규모의 주경기장을 건설했다. 당시 올림픽 역사학자 볼커 클루게는 그뤼네발드 주경기장이 올림픽 최초의 스포츠 단지로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며 독일 스포츠의 정신적 본거지가 될 중심지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191368일 완공된 주경기장은 카이저 빌헬름 2세의 즉위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기념행사서 독일 경기장(German Stadium)’으로 명명됐다.

올림픽 경기의 진행 프로그램은 게임 위크’(528일부터 64일까지), ‘스타디움 위크’(71일부터 10일까지), ‘세일링 위크’(812일부터 21일까지) 세 부분으로 나눠 계획됐다.


올림픽의 모든 준비는 1914627일과 28일에 열린 테스트 이벤트까지 잘 진행됐다. 그러나 628일 유고슬라비아의 사라예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왕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과 그의 아내가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는 결국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도화선이 됐다.
 

▲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전쟁에 휘말린 대부분 국가들 간 갈등으로 인해 결국 1916년 베를린에서는 올림픽을 개최할 수 없었다. 쿠베르탱은 전쟁 중 IOC 본부를 스위스의 로잔으로 옮겼고, 독일 제국은 전쟁 기간 중 올림픽 주경기장을 포함한 그뤼네발드의 스포츠 단지를 철거했다.

그후 독일은 동일한 장소에 다시 경기장을 건설해 1936년 베를린올림픽의 주경기장으로 사용한다.

1940년 도쿄

20113월 발생한 일본의 관동대지진과 쓰나미 사태 후 2013년 일본의 도쿄가 2020년 대회 개최지로 선정된 것과 동일하게, 일본의 수도인 도쿄는 1923년 대지진 후 올림픽을 통한 재건의 기대를 품었던 1940년 올림픽 후보지였다.

당시 일본 유도의 창시자이자 일본 최초의 IOC 위원인 전설적인 스포츠인 가노 지고로가 1940년 일본의 도쿄올림픽 개최를 주도했다. 도쿄는 1936년 베를린서 열린 제36IOC 회의서 선정됐다.

왕위 계승자 아내 암살로 중단
1·2차 세계대전 때문에 연기


이 대회는 전설 속 일본의 초대 황제였던 진무의 대관식 26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릴 예정이었으나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해 중일전쟁이 발발하며 개최가 어렵게 됐다.

1938716일 일본 IOC 위원인 토구카와 소에시마는 코메 드 바일레-라투르 당시 IOC 위원장에게 서신을 보내 즉각적인 평화의 전망이 없는 오랜 적대행위가 도쿄 올림픽 개최의 취소를 의미하는 것에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라고 명시하며 올림픽 개최 포기를 통보했다. 동시에 같은 해 일본도 홋카이도 최북단 섬 삿포로서 열릴 예정이던 동계 올림픽 개최도 취소됐다.

그후 IOC1940년 하계 올림픽의 대체 개최지로 핀란드의 헬싱키를 선택했고, 동계 올림픽의 대체 개최지는 스위스의 상트 모리츠로 계획했고, 이후 헬싱키를 다시 독일의 가르미슈-파텐키르헨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며 역시 개최되지 못했다.

일본은 1964년 하계 올림픽을 도쿄서, 1972년 동계 올림픽을 삿포로서 개최하며 결국 아시아 최초로 올림픽을 개최한 나라가 됐다.

1944년 런던

39IOC 총회는 19396월 런던서 열렸으나 독일군의 군화 소리가 이미 유럽 전역에 울려 퍼지고 있던 시기였다. 독일 제3제국의 군대가 폴란드를 침공한 91일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이 시작됐다.

영국의 런던은 1944년 개최지로 로마(이탈리아), 디트로이트(미국), 로잔(스위스)에 앞서 올림픽 무대를 꾸몄다. 그러나 프랑스처럼 영국은 전쟁 발발 후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독일과의 전쟁에 참가했다.
 

세계를 폐허로 만든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의 항복으로 1945년서야 끝이 났고, 1944년 하계 올림픽 개최지였던 영국 런던과 동계 올림픽 개최지였던 이탈리아 코르티나 담페초서 올림픽은 열리지 않았다.

그후 런던은 1908년 대회 40년 후, 2차 세계대전 종전 3년 만에 두 번째로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게 된다. 1948년 올림픽은 독일의 폭격으로 상처를 입은 영국의 수도 런던서 열렸는데 궁핍한 올림픽으로 알려졌다.

“일본 처음 아니다”
후보지 꼽혔다 포기

전쟁의 패전국이었던 독일과 일본은 참가하지 않았고, 1948년 런던올림픽은 전 세계에 재건에 대한 한줄기 희망을 안겨주었다. 동계 올림픽 또한 1948년에 스위스 상트 모리츠서, 1952년에는 노르웨이의 오슬로, 1956년에는 드디어 이탈리아의 코르티나 담페초서 개최됐다.

1972년 뮌헨


올림픽 대회 기간 중 경기가 중단된 사태가 발생한 올림픽이다. 1972년 뮌헨서 열린 하계 올림픽 기간 중 95일 오전 팔레스타인 테러단체인 검은 9월단(Black September)’의 테러리스트들이 올림픽 선수촌의 이스라엘 팀 숙소에 침입해 인질들을 구금한 사태가 발생했다.

인질극 과정서 11명의 이스라엘 선수, 코치, 심판, 그리고 한 명의 서독 경찰들의 목숨을 앗아간 이 사건으로 IOC는 올림픽 기간 중 34시간 동안 모든 경기를 중단시켰다.
 

다음 날 올림픽 경기장서 무고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약 8만명의 관중 앞에서 열렸고 베토벤의 3번 교향곡의 장례 행진곡이 연주됐다. 당시 IOC 위원장 에이버리 브런디지는 게임은 계속돼야 한다고 발표했다.

국제 스포츠 운동은 테러리즘에 굴복하기를 거부했고, 평화, 나눔, 단결이라는 올림픽 정신이 자리를 잡았다. 올림픽과 그 이후, 특히 올림픽 선수촌을 보호하는 면에서, 올림픽 경기에선 보안이 강화되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이스라엘은 이후 자국의 정보기관인 모사드의 요원들로 해금 1972년 뮌헨올림픽 테러에 관계된 테러리스트들을 끝까지 추적해 응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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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