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대선주자 7인 현미경 검증 ⑨학력& 학창시절

  • 김명일 mi737@ilyosisa.co.kr
  • 등록 2012.08.03 17:16:53
  • 댓글 0개

배움은 미래 위한 가장 큰 준비 "준비 된 후보 없나요?"

[일요시사=김명일 기자] 오는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여야의 대선주자들이 치열한 대권레이스를 벌이고 있다. 상대를 이겨야 웃을 수 있는 치열한 레이스에서 최후에 웃게 될 자는 누가 될 것인지에 벌써부터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일요시사>는 여(박근혜·김문수)와 야(문재인·김두관·손학규·정세균) 6인과 비정치권 주자로 안철수 원장을 유력 대선주자로 선정해 세세히 검증하기로 했다. 앞서 출생과 정치입문·병역·정치권 지지기반·배우자·재산·화법까지 살펴본데 이어 아홉번 번째로 그들의 '학력'과 '학창시절'을 살펴봤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배움은 미래를 위한 가장 큰 준비"라고 했고, 독일의 문학가 괴테는 "유능한 사람은 언제나 배우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려는 인물이라면 무엇보다 미래를 위한 준비가 철저하고, 유능한 인물이어야 할 것이다. 때문에 대선주자 7인의 학력과 학창시절을 살펴본다면 유권자들은 그들이 얼마나 대권에 적합한 인재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박근혜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 졸업>
대통령의 딸 "공부만 열심히!"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경선후보는 1964년 서울 장충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아들 정몽준이 그의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사실은 이미 유명하다. 박 후보가 초등학교 6학년생이던 1963년 부친 박정희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다음 해 박 후보는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성심여중에 들어갔다. 한 학년에 두 반뿐이고, 한 반에 30명 정도의 학생이 공부를 했던 일종의 '귀족학교'였다는 후문이다. 1학년 때는 기숙사에서 생활했고 2학년 때부터는 청와대에서 학교를 다녔다. 당시 그는 불어를 잘 했고 성적이 항상 1등이었다고 한다. 그 결과 성심여중을 수석 졸업하고 성심여고를 수석 입학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성심여고에서도 박 후보는 줄곧 1등이었다.

1970년 3월 박 후보는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박 후보는 대학시절 어머니를 대신해 해외 무대에 나서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외국어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어학공부를 열심히 했다. 물론 다른 성적도 우수했다. 전 학년 C학점은 1개뿐이었고 대부분 A학점을 받았다. 평점은 4.0을 기준으로 할 때 3.82, 대학 역시 수석졸업을 했다.


박 후보는 1974년 서강대 졸업 후 곧바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평소 불어를 잘했고 대학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6개월이 채 되지 않아 1974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어머니 육영수가 피격으로 사망했다는 급보를 접하고 급거 귀국했다. 어머니 사후 아버지 박정희는 재혼하지 않았고 박 후보는 대한민국의 영부인 역할을 대행했다.

한편 박 후보가 여자임에도 전자공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부친인 박정희 대통령의 추천 때문이라고 알려졌다. 원래 박 후보는 역사에 관심이 많아 사학을 전공하려 했다. 박 전 대통령이 박 후보에게 전자공학과를 추천한 이유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박 후보가 사회·정치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실제로 박 후보는 동기생들이 유신반대 시위를 할 때 말없이 책만 봤다고 한다. 자신의 아버지를 향한 시위에 딸로서 차마 참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대학시절은 무척 외로웠을 것이다. 실험실과 도서관에서 공부만 하다 대학시절 그 흔한 미팅 한 번 못해봤다고 하니 20대 청춘을 경호원들의 경호 속에 날려버린 셈이다.

김문수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학생운동 투신, 25년만의 졸업

김문수 새누리당 대선경선후보는 경북 영천에서 4남 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매우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7남매 가운데 유일하게 대학(서울대 경영학과 70학번)에 진학했지만 순탄한 인생은 결코 아니었다.

김 후보는 경북 영천초등학교를 졸업 한 후 대구로 유학하여 경북중학교를 거쳐 1967년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으로는 삼성전자 CEO를 역임하고 제4대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맞붙었던 진대제가 있다.

그는 고3 때 3선 개헌 반대운동에 나섰다가 무기정학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학업의 뜻을 포기하진 않았다. 김 후보는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고학으로 1970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에게 대학시절의 낭만은 없었다.


대학 입학 후 그는 대학 내 모임인 후진국 사회연구원에 가입해 활동했다. 이때부터 그의 대학시절은 학생운동으로 점철됐다. 김 후보는 1974년에는 불온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시키고 공산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돼 대학에서 제적됐다.

김 후보의 부모는 그에게 "대학은 졸업하고 데모할 수 없겠느냐"고 읍소했지만 그는 "다시 대학생이 되더라도 반독재 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대학 제적 후 그는 노동운동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서울 청계천 재단보조공부터 시작해 전국금속노조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을 역임했다. 1986년 인천 5·3사태와 서노련 사건 등으로 두 차례나 투옥돼 2년6개월간이나 수감 생활을 했다. 이처럼 노동운동으로 수배와 투옥생활을 반복하던 그는 1994년 25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문재인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치열한 반독재투쟁에도 사법연수원 차석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경선후보는 1953년 거제도 피난민 수용소에서 태어났다. 문 후보의 가족은 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부산 영도로 내려왔다. 문 후보는 부산남항초등학교와 경남중학교,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에 72학번으로 입학했다.

문 후보는 경상남도에서 학력고사 전체 수석으로 경남고에 수석입학 했었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형편으로 방황을 하다 고교 말기에는 성적이 떨어져 끝내 서울대 입시에 실패했다.

당시 경희대 총장이었던 조영식(경희대 창립자)은 그런 문 후보를 알아보고 '4년 전액 장학금'을 약속하며 적극적으로 입학을 권유했다. 문 후보는 경희대 법대에 수석으로 입학한다. 그러나 문 후보는 경희대 입학 후 운동권 학생으로 변신, 학생운동을 주도하며 치열한 반독재투쟁을 벌인다. 1975년에는 결국 학교에서 제적을 당했다. 그 해 8월 문 후보는 강제 징집돼 특전사령부 수중폭파요원으로 복무했다.

문 후보는 군복무를 마치고 사법시험을 준비해 2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문 후보는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경찰에 붙잡혀 있었다. 때문에 마지막 관문인 3차 면접시험에 응시하지 못할 위기에 처한다. 조영식 경희대 총장은 문 후보를 위해 직접 신원보증을 서는 등 학교차원에서 당국에 간곡하게 사정을 했다.

문 후보는 우여곡절 끝에 사법고시 3차 면접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사법고시 3차 면접시험 직전 안기부 직원이 문 후보에게 "과거 학생운동을 반성하느냐"고 물었지만 문 후보는 "나는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했다. 끝내 사법고시에 최종합격한 문 후보는 감옥에서 풀려나 사법연수원에 들어간다. 문 후보는 사법연수원을 차석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도 대학시절 학생운동을 했다는 이유 하나로 법무부에서 아무런 임용도 되지 못한 채 고향 부산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운명처럼 문 후보는 고향으로 돌아와 노무현을 만나 법무법인 부산에 합류함으로써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된다.

김두관 <동아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가난 때문에 가고 싶은 대학도 못 가고…"

김두관 민주통합당 대선경선후보는 1958년 11월 경남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주민등록상 생일은 59년 4월10일로 돼 있다. 유아 사망률이 높아 출생 후 5∼6개월이 지나 출생 신고를 하던 관습 때문이다.

5남 1녀의 다섯째인 김 후보는 초등학교 4학년 11살 때 농민이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할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너무 가난해서 학교를 다닐 때 학생회비를 낼 형편이 되지 못해 늘 선생님 앞에 불려나가 야단을 맞았다고 한다.


남해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국민대 어문계열에 합격했지만 등록금 23만8000원이 없어 입학을 포기했다. 이후 2년간 고향 마을에서 마늘 농사를 짓다가 1979년 경북 영주에 있는 경상전문대학(현 경북전문대) 행정학과에 진학했다. 경북 영주와 경남 남해가 먼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1981년 동아대 정치외교학과 3학년에 편입했다.

이듬해 군에 입대해 경기 의정부 2군수지원사령부 16보급대대에서 30개월을 복무했다. 군 제대 후에는 민주화운동에 뛰어든다. 1986년 4월 재야 운동세력의 연합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간사로 활동했다. 개헌추진본부 충북지부 결성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돼 재판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 일로 김 후보는 민주화운동 유공자 인정을 받는다. 출소 후 김 후보는 1987년 대학을 졸업한다. 

손학규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약간 놀았지만(?) 불의는 못 참아!" 

손학규 민주통합당 대선경선후보는 1947년 11월22일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현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에서 태어났다. 손 후보의 부모는 교사였다. 손 후보는 10남매 중 막내다. 손 후보는 1953년 시흥초등학교에 입학해 4년을 공부한 뒤 서울 매동초등학교로 전학해 졸업했다. 1959년 경기중학교에 입학, 밴드부에 가입해 트럼펫을 맡았다. 그래서 트럼펫 실력이 상당한 수준급이다. 그러나 1962년 경기고에 입학해서는 연극부에 가입했다. 그가 요즘도 자주 연극을 보러 다니는 것은 연극반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손 후보는 자신의 학창시절에 대해 "약간 불량기가 있었다"고 너스레를 떨며, "초등학교 5학년 때 시골에서 올라와서 서울 아이들에게 주눅이 많이 들었으나 고등학교 때 밴드반을 하고 연극반에 합숙하면서 선배들과 술도 한 잔 하고 어울리면서 생각을 외향적으로 바꾸고 적극적인 사고를 가지게 됐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그는 고3 때 대학생들과 함께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참가하기도 했다. 1965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후 한일협정 반대투쟁에는 거의 빠짐없이 참가했다. 대학 2학년 때에는 삼성그룹의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무기정학을 받기도 했다. 무기정학 중 데모를 해서 또 무기정학을 받아 강원도 함백탄광에 가서 광부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했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춘천에서 칩거한 것도 이 때 강원도와 깊은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학교로 돌아온 손학규는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 김근태 전 민주당 대표와 더불어 서울대 삼총사로 불리며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또 시인 김지하, 김정남, 김도현, 이현배, 허현 등의 선배들과 활동하며 문리대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들어섰다. 1969년 군대에 입대한 손 후보는 1972년 만기제대 한 후 1973년 대학을 졸업했다.

정세균 <고려대학교 법학과 졸업>
"우리 학교 '빵돌이'가 고려대를?"

정세균 민주통합당 대선경선후보는 전북 진안에서 4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가난한 가정환경과 오지의 환경에서 자란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검정고시를 치르고서야 중학교 졸업 자격증을 얻을 수 있었다.

중학교 졸업장을 얻고 전주공고 입학한 그는 대학진학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전주 신흥고로 전학한다. 신흥고 시절 그는 워낙 생활이 어려워 학교 매점에서 빵을 파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별명이 '빵돌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뛰어난 성적을 바탕으로 고려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대학교에 진학한 그는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과 대학 신문기자로 활동하며 유신 체제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법학과였던 정 후보는 서울 종로구 팔판동에서 입주과외를 하면서 고시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1972년 10월 유신헌법이 선포돼 헌법을 가르치던 한동섭 교수가 유신헌법을 작성하라는 박정희 정권의 요구에 불응해서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고문을 받은 사실에 충격을 받아 법관의 길을 포기했다.

정 후보는 대신 교내 신문인 '고대신문' 기자로 활동하면서 유신 체제 반대운동을 주도했고 총학생회장에 당선돼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하지만 다른 후보들과는 다르게 구속된 전력은 없다. 1974년 대학 졸업 후 동아일보 입사를 지원하지만 유신정권의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에 실망하고 쌍용그룹에 지원했다.

1978년 쌍용에 입사해 미국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그룹의 종합상사 주재원으로 일했다. 그런 가운데 뉴욕 주재원 시절 뉴욕대에서 행정학을 공부하고, LA 주재원 시절 페퍼다인 대학교에서 MBA를 취득했다.

안철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학창시절 성적은 그럭저럭 중간"

안철수 서울대융합과학기술대학 원장은 1962년 경상남도 부산시(현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을 보내며 부산동성초등학교, 부산중앙중학교,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에 그는 60명 중 30등을 할 정도로 평범했으며 운동 등 특별히 잘하는 게 없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독서는 매우 좋아했다. 초등학생 시절 학교 도서관의 책을 매일 몇 권씩 읽어 결국 도서관에 있는 책은 거의 다 읽게 됐다. 도서관 사서는 매일 몇 권씩 대출과 반납을 하는 안철수가 장난을 치는 걸로 오해해 대출을 거부할 정도였다.

안철수는 "당시 책의 페이지수, 발행 연월일, 저자까지 모두 다 읽고, 바닥에 종이가 떨어져 있으면 그것마저도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활자 중독증이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교과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과학책과 소설책을 좋아해 주로 읽었는데 책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지 사춘기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중간 정도의 성적을 유지하던 안 원장은 고등학교 3학년 때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1등을 차지하고 1980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많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다른 학생들과 경쟁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안 원장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재학 중이던 1982년 가을에 처음 컴퓨터를 접하고 이후 컴퓨터에 흥미를 갖게 됐다.

1986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안 원장은 동 대학원에서 의학 석ㆍ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의대 교수가 됐다. 하지만 의사생활을 뒤로하고, 컴퓨터바이러스 백신 연구를 시작, 안티바이러스(백신)를 개발했다. 이후 국내 최초이자 최대의 백신프로그램 연구소인 안철수 연구소를 설립해 10여 년간 경영했다. CEO를 그만두고나서는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벤처 비즈니스 과정을 거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MBA 2년 과정을 밟았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종합특검 ‘검사 파견’ 대폭 줄인 이유

종합특검 ‘검사 파견’ 대폭 줄인 이유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2차 종합특별검사팀 출범했다. 이제 수사팀을 꾸린 뒤 내란 관련 혐의 17개 의혹을 규명해야 한다. 내란 외에도 김건희·채 해병 등 각 특검팀에서 매듭짓지 못한 사건들도 들여다볼 방침이다. 이번 특검팀은 과거 특검팀과는 사뭇 다르다. ‘검사 파견’을 대폭 줄였다. 이는 일부 특검팀에서 야기된 내부 갈등을 피하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2차 종합특별검사팀은 3대 특검(내란·김건희·채 해병) 수사로 결론을 내지 못한 사안과 정보기관의 민간인 사찰·블랙리스트, 부정선거 관련 유언비어 의혹 등을 재수사한다. 사무실을 정하고 수사팀을 꾸리는 데만 한 달여의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분주한 움직임 윤석열·김건희에 의한 내란·외환 및 국정 농단 행위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종합특검법)에 따르면 이재명 대통령은 추천받은 날부터 3일 이내에 특검을 임명해야 하기에 지난 5일 특검을 임명했다. 앞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지난 2일 특검 후보자에 전준철 변호사를, 조국혁신당은 같은 날 특검 후보자에 권창영 서울대학교 법전원 겸임교수를 각각 추천했다. 전 변호사는 검찰 출신으로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부장, 수원·대전지검 특수부장, 대검 인권수사자문관 등을 거쳤다. 반면 권 교수는 판사 출신으로 대법원 노동법실무연구회 편집위원 및 간사, 중대재해자문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특검팀 사무실 구성과 인력 파견 요청 등 출범 작업은 곧바로 진행되고 있다. 종합특검팀은 수사 대상이 광범위한 만큼 초반에는 사건별 우선순위와 수사 분담을 정하는 정리 작업이 핵심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게 법조계의 중론이다. 종합특검팀은 수사 대상을 총 17개로 규정했다. 크게 보면 기존 3대 특검이 다뤘지만 규명이 미진했던 사건을 다시 수사하는 한편, 당시 특검 범위에 없던 의혹을 추가로 다룬다. 구체적으로 ▲12·3 불법 계엄 관련 내란·외환 의혹 7개 ▲김건희씨 관련 1개 ▲채 해병 관련 1개 ▲관련 고소·고발 및 수사 과정에서 인지한 사안 2개 등으로 분류된다. 종합특검팀도 앞선 특검팀들과 마찬가지로 인지수사가 가능해 수사 범위가 더 넓어질 수 있다. 과거 특검수사 못한 대상 총 17개로 규정 주로 12·3 내란 사안…‘정보기관’도 포함 종합특검팀이 다룰 불법 계엄 관련 의혹 상당수는 내란 특검팀 수사 과정에서 다뤄졌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거나, 내란 특검팀이 무혐의·각하로 종결했던 사건들이다. 대표적으로 ▲무장 헬기의 북방한계선(NLL) 위협 비행 의혹 ▲삼청동 안전 가옥(안가) 회동 ▲일부 지자체의 계엄 동조 의혹 등이다. 이 밖에도 종합특검팀은 내란 특검팀이 마무리하지 못해 채 군검찰로 이첩한 일부 외환 의혹, 계엄 준비 정황이 담겼다는 ‘노상원 수첩’ 의혹, 국군 방첩사령부의 블랙리스트 작성 의혹 등을 재수사할 계획이다. 종합특검팀 수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던 사건들로는 계엄 당일 계엄사령부 구성을 위해 육군본부 간부들이 계룡대 육군본부에서 서울로 이동하려 했다는 이른바 ‘계엄 버스’ 의혹이 있다. 국방부가 최근 당시 버스 탑승 간부들에게 일제히 중징계를 내린 만큼 종합특검팀은 이 사건을 형사 처벌할 수 있는지, 지시·보고 라인이 있었는지 등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볼 것으로 보인다. 김씨 관련 의혹에서는 이전 특검팀이 정해진 기간 내 수사를 끝내지 못해 경찰에 넘긴 사건들이 종합특검팀에 다수 포함됐다. 대표적으로 ▲대통령 관저 이전 의혹 ▲양평고속도로 종점 변경 의혹 등이 꼽힌다. 종합특검팀은 관저 이전 의혹과 관련해 김씨와 국민의힘 윤한홍 의원을 윗선으로 봤지만 수사 기한이 임박한 시점에 조사가 이뤄지면서 윤 의원은 기소 여부를 결론 내지 못했다. 종합특검팀이 윤 의원 등을 상대로 조사를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 수사 막바지에 착수해 핵심 관련자 조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이른바 ‘김건희 수사 봐주기’ 의혹과 사실상 손을 대지 못했다는 창원 국가첨단산업단지 지정 과정의 부당 개입 의혹 등도 수사 대상이다. 또 김건희·채 해병 특검팀에서 중복 수사 대상이었지만 규명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이른바 ‘구명 로비’ 의혹 역시 종합특검팀이 결론을 내야 할 사안이다. 정치적 계산 확연한 차이 종합특검팀을 둘러싼 가장 큰 변화는 단연 검사 파견 규모의 축소다. 과거 특검팀이 수십명에서 많게는 백여명의 현직 검사를 파견받아 운영됐던 것과 달리, 종합특검팀은 검사 파견을 최소화하고 외부 인력 중심으로 이뤄지는 수사 구조를 택했다. 정치권과 법조계 안팎에서는 이를 두고 “검찰 이후 시대를 염두에 둔 구조적 실험”이라는 평가와 “수사 역량을 스스로 약화시킨 선택”이라는 우려가 동시에 나온다. 단순한 인력 운용의 변화라기보다, 종합특검팀의 성격과 권한, 검찰과의 관계 설정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하려는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동안 특검은 형식적으로는 독립기구였지만, 실제 운영은 검찰 조직에 크게 의존해 왔다. 수사 실무와 기획, 영장 청구와 공소 유지까지 대부분의 과정이 파견 검사들에 의해 이뤄졌고, 특검은 사실상 ‘검찰의 별도 수사본부’에 가까웠다는 지적이 거셌다. 검찰로부터 검사를 파견받으면 대형 수사를 빠르게 진행하는 데는 효과적이었지만, 정치적 중립성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수사 대상에 전·현직 고위 공직자, 검찰 출신 정치인, 혹은 검찰이 과거 불기소하거나 수사했던 사안이 포함될 경우 “검찰의 셀프 수사”라는 비판이 지속됐다. 특검이 검찰의 판단을 다시 들여다보는 구조 자체가 모순이라는 문제 제기도 이어졌다. 이번 종합특검팀의 수사 대상에는 전직 대통령과 고위 권력층, 과거 검찰 수사와 직·간접적으로 얽힌 사안들이 다수 포함돼있다. 검사 파견을 대규모로 유지할 경우, 수사 결과와 무관하게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공격을 피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내부 갈등 의식했나 종합특검팀은 검사 수를 최소화하는 대신, 특검보를 중심으로 한 지휘 체계와 외부 수사 인력을 대폭 늘리는 방식을 택했다. 경찰, 국세청, 감사원, 금융·회계·디지털 포렌식 전문가 등 비검찰 인력 비중을 확대해 복합 사건에 대응한다는 구상이다. 이는 단순히 인력 구성을 바꾼 것이 아니라, 검찰 권한 축소 이후 특검의 새로운 모델을 시험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검찰이 더 이상 모든 대형 수사의 중심이 아닌 상황에서, 특검마저 검사 중심으로 운영된다면 검찰개혁의 취지가 무색해진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검찰이 아닌 방식으로도 대형 권력형 비리를 수사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검사 파견 축소에는 분명한 정치적 계산도 담겨있다. 종합특검팀은 출범 단계부터 ‘정치 보복’ ‘선택적 특검’이라는 야당의 반발에 직면했다. 이 과정에서 검사 중심 특검은 가장 공격받기 쉬운 지점이다. 여권으로서는 ‘검찰이 주도하지 않는 가장 독립적인 특검’이라는 명분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검사 파견을 줄이면 수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최소한 절차적 중립성에 대한 방어 논리는 강화된다. 이는 향후 수사 과정이나 결과 발표 시 정치적 공방을 완화하기 위한 안전장치이기도 하다. 반대로 야권은 이미 “검사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특검은 정치 쇼에 불과하다”는 프레임을 꺼내 들고 있다. 검사 파견 축소가 수사의 공정성이 아니라 수사 역량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실무적으로 보면, 검사 파견 축소는 분명한 부담 요소다. 대형 특검 수사에는 압수수색영장 청구, 구속영장 판단, 법리 구성 등 고도의 형사법 경험이 요구된다. 검사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외부 인력 중심 구조에서는 수사 속도가 늦어질 수 있다. 검 아닌 경찰·국세청·감사원 조사관 비중 확대 “정보사 의혹 수사 시간 오래 걸릴 수도” 우려 특히 수사 이후 공소 유지 단계에서 검찰과의 협조가 원활하지 않을 경우, 재판 과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과거 특검들이 검사 파견을 중시했던 이유는 ‘기소와 유죄 입증’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김건희 특검팀에서 벌어졌던 내부 갈등을 의식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김건희 특검팀에 파견됐던 검사들의 ‘원대 복귀 희망’ 입장문 파동이 종합특검팀에서 재발할 경우 내부 수습에 시간을 빼앗길 수 있다. 당시 입장문이 외부에 유출되며 ‘항명’ ‘집단 반발’ 등으로 알려졌지만, 특검팀 지휘부와 수사팀장들은 ‘하소연 취지’였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한다. 민주당은 파견 검사들을 겨냥해 “징계와 형사 처벌 대상”이라고 비판하고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이 “국민에게 항명했다”고 규정한 것과 달리, 실제론 태업이나 이탈 없이 수사와 공소 유지를 차질 없이 진행했다. 파견 검사들은 검찰에서부터 최대 1년 넘도록 동일한 사건을 수사하며 피로감에 쌓였다. 이들은 검찰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수사를 매듭지으려 노력했다. 다만 재판에 넘겨진 주요 피고인들의 공소 유지 업무가 순조롭게 진행될지는 예측할 수 없다. ▲일선 검찰청의 민생 사건 적체 ▲정성호 법무부 장관의 ‘직관(수사 검사가 공판에 직접 관여) 제한’ 방침 ▲기존 특검 관례 등을 고려하면 최소 인력만 공소 유지 업무를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검 지휘부도 공소 유지 단계에선 복귀를 희망하는 검사들을 강제로 붙잡을 순 없다고 보고, 효율적인 인력 운용 방안을 고심했다. 지휘부가 입장문을 작성하기 2~3주 전부터 김건희 특검 내 일부 수사팀에선 ‘진행 중인 사건을 조속히 마무리한 후 일선으로 복귀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기로 뜻을 모으기도 했다. 종합특검팀은 수사 결과 이전에 이미 하나의 시험대에 올라 있다. 검찰 없이도 대형 권력형 비리를 수사할 수 있는가, 특검이 검찰개혁 이후의 사법 질서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실패하면 역풍 불가피 만약 종합특검팀이 의미 있는 수사 성과를 낸다면, 향후 특검은 검사 중심 구조에서 벗어난 새로운 표준을 갖게 될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성과가 미진할 경우, “그래서 결국 검사가 필요하다”는 역설적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 검사 파견 축소는 정치적 선택이자 제도적 실험인 셈이다. 이번 종합특검팀은 단순히 몇 건의 의혹을 밝히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검찰 이후 한국 사법 시스템이 어디까지 작동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분기점이라는 점에서, 그 성패는 수사 대상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