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대선주자 7인 현미경 검증 ⑨학력& 학창시절

  • 김명일 mi737@ilyosisa.co.kr
  • 등록 2012.08.03 17: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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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은 미래 위한 가장 큰 준비 "준비 된 후보 없나요?"

[일요시사=김명일 기자] 오는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여야의 대선주자들이 치열한 대권레이스를 벌이고 있다. 상대를 이겨야 웃을 수 있는 치열한 레이스에서 최후에 웃게 될 자는 누가 될 것인지에 벌써부터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일요시사>는 여(박근혜·김문수)와 야(문재인·김두관·손학규·정세균) 6인과 비정치권 주자로 안철수 원장을 유력 대선주자로 선정해 세세히 검증하기로 했다. 앞서 출생과 정치입문·병역·정치권 지지기반·배우자·재산·화법까지 살펴본데 이어 아홉번 번째로 그들의 '학력'과 '학창시절'을 살펴봤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배움은 미래를 위한 가장 큰 준비"라고 했고, 독일의 문학가 괴테는 "유능한 사람은 언제나 배우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려는 인물이라면 무엇보다 미래를 위한 준비가 철저하고, 유능한 인물이어야 할 것이다. 때문에 대선주자 7인의 학력과 학창시절을 살펴본다면 유권자들은 그들이 얼마나 대권에 적합한 인재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박근혜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 졸업>
대통령의 딸 "공부만 열심히!"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경선후보는 1964년 서울 장충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아들 정몽준이 그의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사실은 이미 유명하다. 박 후보가 초등학교 6학년생이던 1963년 부친 박정희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다음 해 박 후보는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성심여중에 들어갔다. 한 학년에 두 반뿐이고, 한 반에 30명 정도의 학생이 공부를 했던 일종의 '귀족학교'였다는 후문이다. 1학년 때는 기숙사에서 생활했고 2학년 때부터는 청와대에서 학교를 다녔다. 당시 그는 불어를 잘 했고 성적이 항상 1등이었다고 한다. 그 결과 성심여중을 수석 졸업하고 성심여고를 수석 입학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성심여고에서도 박 후보는 줄곧 1등이었다.

1970년 3월 박 후보는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박 후보는 대학시절 어머니를 대신해 해외 무대에 나서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외국어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어학공부를 열심히 했다. 물론 다른 성적도 우수했다. 전 학년 C학점은 1개뿐이었고 대부분 A학점을 받았다. 평점은 4.0을 기준으로 할 때 3.82, 대학 역시 수석졸업을 했다.


박 후보는 1974년 서강대 졸업 후 곧바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평소 불어를 잘했고 대학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6개월이 채 되지 않아 1974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어머니 육영수가 피격으로 사망했다는 급보를 접하고 급거 귀국했다. 어머니 사후 아버지 박정희는 재혼하지 않았고 박 후보는 대한민국의 영부인 역할을 대행했다.

한편 박 후보가 여자임에도 전자공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부친인 박정희 대통령의 추천 때문이라고 알려졌다. 원래 박 후보는 역사에 관심이 많아 사학을 전공하려 했다. 박 전 대통령이 박 후보에게 전자공학과를 추천한 이유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박 후보가 사회·정치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실제로 박 후보는 동기생들이 유신반대 시위를 할 때 말없이 책만 봤다고 한다. 자신의 아버지를 향한 시위에 딸로서 차마 참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대학시절은 무척 외로웠을 것이다. 실험실과 도서관에서 공부만 하다 대학시절 그 흔한 미팅 한 번 못해봤다고 하니 20대 청춘을 경호원들의 경호 속에 날려버린 셈이다.

김문수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학생운동 투신, 25년만의 졸업

김문수 새누리당 대선경선후보는 경북 영천에서 4남 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매우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7남매 가운데 유일하게 대학(서울대 경영학과 70학번)에 진학했지만 순탄한 인생은 결코 아니었다.

김 후보는 경북 영천초등학교를 졸업 한 후 대구로 유학하여 경북중학교를 거쳐 1967년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으로는 삼성전자 CEO를 역임하고 제4대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맞붙었던 진대제가 있다.

그는 고3 때 3선 개헌 반대운동에 나섰다가 무기정학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학업의 뜻을 포기하진 않았다. 김 후보는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고학으로 1970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에게 대학시절의 낭만은 없었다.


대학 입학 후 그는 대학 내 모임인 후진국 사회연구원에 가입해 활동했다. 이때부터 그의 대학시절은 학생운동으로 점철됐다. 김 후보는 1974년에는 불온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시키고 공산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돼 대학에서 제적됐다.

김 후보의 부모는 그에게 "대학은 졸업하고 데모할 수 없겠느냐"고 읍소했지만 그는 "다시 대학생이 되더라도 반독재 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대학 제적 후 그는 노동운동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서울 청계천 재단보조공부터 시작해 전국금속노조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을 역임했다. 1986년 인천 5·3사태와 서노련 사건 등으로 두 차례나 투옥돼 2년6개월간이나 수감 생활을 했다. 이처럼 노동운동으로 수배와 투옥생활을 반복하던 그는 1994년 25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문재인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치열한 반독재투쟁에도 사법연수원 차석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경선후보는 1953년 거제도 피난민 수용소에서 태어났다. 문 후보의 가족은 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부산 영도로 내려왔다. 문 후보는 부산남항초등학교와 경남중학교,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에 72학번으로 입학했다.

문 후보는 경상남도에서 학력고사 전체 수석으로 경남고에 수석입학 했었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형편으로 방황을 하다 고교 말기에는 성적이 떨어져 끝내 서울대 입시에 실패했다.

당시 경희대 총장이었던 조영식(경희대 창립자)은 그런 문 후보를 알아보고 '4년 전액 장학금'을 약속하며 적극적으로 입학을 권유했다. 문 후보는 경희대 법대에 수석으로 입학한다. 그러나 문 후보는 경희대 입학 후 운동권 학생으로 변신, 학생운동을 주도하며 치열한 반독재투쟁을 벌인다. 1975년에는 결국 학교에서 제적을 당했다. 그 해 8월 문 후보는 강제 징집돼 특전사령부 수중폭파요원으로 복무했다.

문 후보는 군복무를 마치고 사법시험을 준비해 2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문 후보는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경찰에 붙잡혀 있었다. 때문에 마지막 관문인 3차 면접시험에 응시하지 못할 위기에 처한다. 조영식 경희대 총장은 문 후보를 위해 직접 신원보증을 서는 등 학교차원에서 당국에 간곡하게 사정을 했다.

문 후보는 우여곡절 끝에 사법고시 3차 면접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사법고시 3차 면접시험 직전 안기부 직원이 문 후보에게 "과거 학생운동을 반성하느냐"고 물었지만 문 후보는 "나는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했다. 끝내 사법고시에 최종합격한 문 후보는 감옥에서 풀려나 사법연수원에 들어간다. 문 후보는 사법연수원을 차석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도 대학시절 학생운동을 했다는 이유 하나로 법무부에서 아무런 임용도 되지 못한 채 고향 부산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운명처럼 문 후보는 고향으로 돌아와 노무현을 만나 법무법인 부산에 합류함으로써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된다.

김두관 <동아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가난 때문에 가고 싶은 대학도 못 가고…"

김두관 민주통합당 대선경선후보는 1958년 11월 경남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주민등록상 생일은 59년 4월10일로 돼 있다. 유아 사망률이 높아 출생 후 5∼6개월이 지나 출생 신고를 하던 관습 때문이다.

5남 1녀의 다섯째인 김 후보는 초등학교 4학년 11살 때 농민이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할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너무 가난해서 학교를 다닐 때 학생회비를 낼 형편이 되지 못해 늘 선생님 앞에 불려나가 야단을 맞았다고 한다.


남해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국민대 어문계열에 합격했지만 등록금 23만8000원이 없어 입학을 포기했다. 이후 2년간 고향 마을에서 마늘 농사를 짓다가 1979년 경북 영주에 있는 경상전문대학(현 경북전문대) 행정학과에 진학했다. 경북 영주와 경남 남해가 먼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1981년 동아대 정치외교학과 3학년에 편입했다.

이듬해 군에 입대해 경기 의정부 2군수지원사령부 16보급대대에서 30개월을 복무했다. 군 제대 후에는 민주화운동에 뛰어든다. 1986년 4월 재야 운동세력의 연합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간사로 활동했다. 개헌추진본부 충북지부 결성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돼 재판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 일로 김 후보는 민주화운동 유공자 인정을 받는다. 출소 후 김 후보는 1987년 대학을 졸업한다. 

손학규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약간 놀았지만(?) 불의는 못 참아!" 

손학규 민주통합당 대선경선후보는 1947년 11월22일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현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에서 태어났다. 손 후보의 부모는 교사였다. 손 후보는 10남매 중 막내다. 손 후보는 1953년 시흥초등학교에 입학해 4년을 공부한 뒤 서울 매동초등학교로 전학해 졸업했다. 1959년 경기중학교에 입학, 밴드부에 가입해 트럼펫을 맡았다. 그래서 트럼펫 실력이 상당한 수준급이다. 그러나 1962년 경기고에 입학해서는 연극부에 가입했다. 그가 요즘도 자주 연극을 보러 다니는 것은 연극반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손 후보는 자신의 학창시절에 대해 "약간 불량기가 있었다"고 너스레를 떨며, "초등학교 5학년 때 시골에서 올라와서 서울 아이들에게 주눅이 많이 들었으나 고등학교 때 밴드반을 하고 연극반에 합숙하면서 선배들과 술도 한 잔 하고 어울리면서 생각을 외향적으로 바꾸고 적극적인 사고를 가지게 됐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그는 고3 때 대학생들과 함께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참가하기도 했다. 1965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후 한일협정 반대투쟁에는 거의 빠짐없이 참가했다. 대학 2학년 때에는 삼성그룹의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무기정학을 받기도 했다. 무기정학 중 데모를 해서 또 무기정학을 받아 강원도 함백탄광에 가서 광부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했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춘천에서 칩거한 것도 이 때 강원도와 깊은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학교로 돌아온 손학규는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 김근태 전 민주당 대표와 더불어 서울대 삼총사로 불리며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또 시인 김지하, 김정남, 김도현, 이현배, 허현 등의 선배들과 활동하며 문리대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들어섰다. 1969년 군대에 입대한 손 후보는 1972년 만기제대 한 후 1973년 대학을 졸업했다.

정세균 <고려대학교 법학과 졸업>
"우리 학교 '빵돌이'가 고려대를?"

정세균 민주통합당 대선경선후보는 전북 진안에서 4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가난한 가정환경과 오지의 환경에서 자란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검정고시를 치르고서야 중학교 졸업 자격증을 얻을 수 있었다.

중학교 졸업장을 얻고 전주공고 입학한 그는 대학진학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전주 신흥고로 전학한다. 신흥고 시절 그는 워낙 생활이 어려워 학교 매점에서 빵을 파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별명이 '빵돌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뛰어난 성적을 바탕으로 고려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대학교에 진학한 그는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과 대학 신문기자로 활동하며 유신 체제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법학과였던 정 후보는 서울 종로구 팔판동에서 입주과외를 하면서 고시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1972년 10월 유신헌법이 선포돼 헌법을 가르치던 한동섭 교수가 유신헌법을 작성하라는 박정희 정권의 요구에 불응해서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고문을 받은 사실에 충격을 받아 법관의 길을 포기했다.

정 후보는 대신 교내 신문인 '고대신문' 기자로 활동하면서 유신 체제 반대운동을 주도했고 총학생회장에 당선돼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하지만 다른 후보들과는 다르게 구속된 전력은 없다. 1974년 대학 졸업 후 동아일보 입사를 지원하지만 유신정권의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에 실망하고 쌍용그룹에 지원했다.

1978년 쌍용에 입사해 미국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그룹의 종합상사 주재원으로 일했다. 그런 가운데 뉴욕 주재원 시절 뉴욕대에서 행정학을 공부하고, LA 주재원 시절 페퍼다인 대학교에서 MBA를 취득했다.

안철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학창시절 성적은 그럭저럭 중간"

안철수 서울대융합과학기술대학 원장은 1962년 경상남도 부산시(현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을 보내며 부산동성초등학교, 부산중앙중학교,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에 그는 60명 중 30등을 할 정도로 평범했으며 운동 등 특별히 잘하는 게 없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독서는 매우 좋아했다. 초등학생 시절 학교 도서관의 책을 매일 몇 권씩 읽어 결국 도서관에 있는 책은 거의 다 읽게 됐다. 도서관 사서는 매일 몇 권씩 대출과 반납을 하는 안철수가 장난을 치는 걸로 오해해 대출을 거부할 정도였다.

안철수는 "당시 책의 페이지수, 발행 연월일, 저자까지 모두 다 읽고, 바닥에 종이가 떨어져 있으면 그것마저도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활자 중독증이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교과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과학책과 소설책을 좋아해 주로 읽었는데 책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지 사춘기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중간 정도의 성적을 유지하던 안 원장은 고등학교 3학년 때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1등을 차지하고 1980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많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다른 학생들과 경쟁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안 원장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재학 중이던 1982년 가을에 처음 컴퓨터를 접하고 이후 컴퓨터에 흥미를 갖게 됐다.

1986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안 원장은 동 대학원에서 의학 석ㆍ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의대 교수가 됐다. 하지만 의사생활을 뒤로하고, 컴퓨터바이러스 백신 연구를 시작, 안티바이러스(백신)를 개발했다. 이후 국내 최초이자 최대의 백신프로그램 연구소인 안철수 연구소를 설립해 10여 년간 경영했다. CEO를 그만두고나서는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벤처 비즈니스 과정을 거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MBA 2년 과정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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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분오열’ 의료계 내분 내막

‘사분오열’ 의료계 내분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뚝심인가, 고집인가?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대통령의 뜻이 확고해도 너무 확고하다. 겉으로는 유연한 대처를 언급하면서 ‘2000명’이라는 수치는 굽히지 않을 기세다. 강 대 강 대치에 나섰던 의료계는 우왕좌왕하는 모양새다. 의료계 내부의 의견을 모으는 일도 쉽지 않아 보인다. <일요시사>와 인터뷰한 지방의대 A 교수는 의과대학 정원 확대를 밀어붙이는 윤석열정부의 강경 기조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정규군은 수뇌부만 처리하면 와해되기 쉽다. 하지만 현재 의료계는 게릴라 방식으로 대응 중이다. 주동자를 찾기 어렵고 실제 주동자도 없다. 전공의, 의대생 모두 조직의 통제하에 움직이는 게 아니라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윤정부 입장에서는 협상 대상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일괄 협상에 따른 일괄 타결은 어렵다고 본다.” 2월 이후 평행선만 실제 의료계는 대학의사협회(의협),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의대협) 등 여러 단체가 의대 정원 확대 정책에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의대 정원 확대 반대’를 큰 틀로 하되 대응 방식이나 세부적인 요구사항은 각각 다른 상황이다. A 교수의 말대로 의료계는 현재 단일협의체가 없다. 협상테이블이 마련된다 해도 앞에 대표로 나설 사람이 없는 셈이다. 과거 의정갈등이 일어났을 때 주로 의협이 나서서 의료계 입장을 전달하고 대응을 이끌었다면 현재는 각개전투를 진행하고 있다. 이미 정부는 의협의 대표성에 대해 의문을 표한 상태다. 정부는 지난 2월 말 의협 대신 ‘대표성을 갖춘 협의체’를 구성해 의대 정원 확대 등에 대해 대화하자고 의료계에 요청했다. 의협이 전체 의사들의 대표성을 띠기 어렵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당시 주수호 의협 비상대책위원회 언론홍보위원장은 “의협 회원엔 전공의·봉직의 등 모든 직역이 포함돼있고 모든 직역이 배출한 대의원 총회 의결을 거쳐 만들어진 조직이 비대위”라며 “정부가 의협의 대표성을 부정하는 이유는 내부 분열을 조장하기 위함”이라고 반발했다. 의협은 의료법에 근거해 모든 의사가 가입하는 법정 단체지만 개원의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번 의정갈등 국면서 가장 선봉에 선 단체는 전공의가 모인 대전협이 꼽힌다. 전공의가 의대 정원 확대에 반발해 병원을 떠나는 등 집단 강경 투쟁에 나서면서 의정갈등에 불이 붙었다. 의대생은 집단 휴학으로 힘을 실었다. 유급 마지노선에 이른 대학들이 수업을 재개했지만 의대생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집단사직에 나선 전공의가 여전히 버티고 있는 상황서 의대생의 복귀 가능성 역시 낮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대통령실 1년 유예안 일축하면서도 ‘2000명 정원’ 논의 가능성 제시해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기준 학칙에 따른 형식적인 신청 요건을 지킨 의대생의 휴학 신청은 누적 1만242명으로 전체 의대 재학생 대비 54.5% 규모에 이른다. 의대생들의 집단 휴학과 수업 거부는 지난 2월부터 시작됐다. 대학 사이에선 이달 중순이 지나면 여름방학까지 총동원해도 유급을 막을 수 없다. 의대는 특정 수업서 3분의 1 또는 4분의 1 이상을 결석하면 낙제(F) 처리되고 F가 하나라도 나올 경우 유급이 되도록 학칙을 세워둔 곳이 많다. 전공의의 집단사직으로 병원 업무가 마비되고 일부 의료진에 업무가 과중되는 이른바 ‘의료대란’이 벌어졌다. 여기에 의대생의 집단 휴학은 의사 수급 부족 현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의료현장에 구멍이 생기면서 의사를 찾지 못해 환자가 사망하는 ‘응급실 뺑뺑이’ 사건도 일어났다. 문제는 정부의 태도다. 지난 2월6일 2025학년도 의대 입학 정원을 5058명으로 현행보다 2000명 늘리겠다고 발표한 이후부터 현재까지 요지부동 상태다. 정부는 2035년까지 1만명의 의사 인력을 확충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2006년 이후 19년 동안 동결됐던 의대 정원 확대를 예고한 것이다. 당시 보건복지부(이하 복지부)는 발표 당시 의료계와 소통한 결과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지난해 10월26일 ‘의대정원 확대 추진계획’을 발표한 이후 40개 대학으로부터 증원 수요와 교육역량에 대한 자료를 받았고 현장점검을 포함한 검증을 마쳤다고 밝혔다. 의료계를 비롯해 사회 각계각층과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했다는 점도 언급했다. 특히 정부는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강조했다. 언론사 여론조사 등에서 의대 정원을 늘리는 문제에 대해 국민 10명 가운데 8명 이상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것을 의미있게 언급했다. “흔들림 없는 의료개혁을 완수하겠다”는 정부의 입장에 국민의 응원을 지지대로 삼은 것이다. 요구 다른 의사단체 윤석열 대통령의 의지는 더 강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 1일 ‘국민께 드리는 말씀’ 대국민담화서 “역대 정부들이 9번 싸워 9번 모두 졌고 의사들의 직역 카르텔은 더욱 공고해졌다”며 “이제는 결코 그런 실패를 반복할 여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2000명이라는 숫자는 정부가 꼼꼼하게 계산해 산출한 최소한의 증원 규모”라며 “이를 결정하기까지 의사단체를 비롯한 의료계와 충분하고 광범위한 논의를 거쳤다”고 설명했다. 연구 결과를 들어 그 배경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윤 대통령은 “정부는 국책연구소 등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연구된 의사 인력 수급 체계를 검토했다. 수요 측면서 저출산 고령화와 같은 인구구조의 변화, 만성질환의 증가와 같은 질병구조의 변화, 소득 증가에 따른 의료수요 변화까지 반영했다”며 “어떤 방법론이더라도 지금부터 10년 후인 2035년에는 자연 증감분을 고려하고도 최소 1만명 이상의 의사가 부족하다는 결론은 동일하다”고 말했다. 의대 정원 확대 시기에 대해서도 정부는 가차없는 태도를 보인다. 대통령실은 지난 8일, 의협이 제안한 의대 증원 1년 유예안에 대해 “정부는 그간 검토한 바 없고 앞으로도 검토할 계획도 없다”고 밝혔다. 앞서 박민수 복지부 차관이 “내부 검토는 하겠고 현재로서 수용 여부를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내놓은 답변서 더 강경해진 입장이다. 대통령실은 1년 유예안을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만약 의료계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거, 그리고 통일된 의견으로 제시한다면 논의할 가능성은 열어놓고 있다”며 “열린 마음으로 임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팔짱 낀 정부 공은 의료계로 일각에서는 정부는 초지일관 원론적인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현재로선 ‘2000명’이 정부와 의료계 간 대화의 장벽이 되고 있다. 정부는 2000명이라는 수치를 꿋꿋하게 고수하고 의료계는 2000명 백지화가 대화의 선결 조건이라는 뜻을 굽히지 않는 중이다. 정부든 의료계든 어느 한쪽이라도 구부려야 맞닿는 법인데 평행선만 그리는 모양새다. 이 와중에 의료계는 내분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정부가 의료계에 요구하는 ‘통일된 의견’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새 회장을 선출한 의협이 그 중심에 있는 상황이다. ‘강성’으로 꼽히는 임현택 의협 회장 당선인과 의협 비대위가 엇박자를 내고 있고 대전협의 박단 비대위원장도 의협 비대위와 갈등 조짐을 보이는 중이다. 현재 의협은 비대위원장과 차기 회장이 공존하는 상태다. 의협은 지난달 26일, 임 당선인을 차기 회장으로 선출했다. 임 당선인은 결선투표서 65%의 지지를 얻어 당선됐고 임기는 다음 달 1일부터다. 임 당선인의 등장으로 의협의 대정부 투쟁 수위가 올라갈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됐다. 임 당선인은 의대 정원 증원 철회를 비롯해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파면을 요구하는 등 다른 의사단체에 비해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마찰음이 나온 건 ‘단일대오’를 구성하는 과정에서였다. 의협 비대위는 지난 7일, 기자회견서 전의교협, 대전협, 의대협 등과 함께 합동 기자회견을 이번주 안에 열겠다고 예고했다. 하지만 임 당선인이 이런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의협 비대위, 차기 회장·전공의 회장 갈등 삐걱거리는 단일대오에 대화 공전 가능성도 의협 회장직 인수위원회는 의협 비대위와 대의원회에 공문을 보내 임 당선인이 김택우 현 비대위원장 대신 의협 비대위원장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한 지붕 두 가족’ 상황의 의협 창구를 단일화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대전협 박 위원장도 의협 비대위와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 박 위원장은 자신의 SNS에 “의협 비대위 김택우 위원장, 전의교협 김창수 회장과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있지만 합동 브리핑 진행에 합의한 적은 없다”고 적었다. 합동 기자회견은 일단 취소된 상태다. 박 위원장과 임 당선인의 갈등도 관심사다. 임 당선인은 지난 4일, 윤 대통령과 박 위원장의 비공개 만남에 불만을 드러냈다. 의협 비대위는 윤 대통령과 박 위원장의 만남을 ‘의미 있다’고 평가했지만 임 당선인은 SNS에 ‘내부의 적’을 운운하며 박 위원장을 강도 높게 비난하는 듯한 글을 남겼다. 박 위원장은 이 같은 보도 내용을 게시글에 공유하며 ‘유감’이라고 적었다. 전의교협은 의대 비대위에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다. 전의교협은 전국 40개 의과대학 교수협의회로 구성된 단체다. 김창수 전의교협 회장이 의협 비대위에 합류하면서 의료계 단일대오 구성이 빨라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통일된 의견을 내놓을 단일협의체 구성 속도에 따라 의정갈등의 타결 가능성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의협 비대위를 중심으로 단일대오를 구성하려던 시도가 임 당선인과 박 위원장의 행보로 삐걱거리면서 의료계 상황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여기에 협상테이블이 마련돼 정부와 의료계의 대화가 이뤄진다 해도 합의까지 가는 데는 하 세월이 걸릴 것이라는 의견이 만만찮다. 입장차가 그만큼 첨예하다는 뜻이다. 타결까지 첩첩산중 일각에서는 정부와 의료계 모두 환자에 대한 배려는 뒷전에 두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2월 이후 두 달 넘게 갈등이 계속되면서 환자들은 불편을 겪고 있고 일부 의료진은 업무 과중으로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전공의가 떠난 병원은 매일 막대한 손해를 입고 있다. 정부와 의료계의 10번째 갈등이 어떤 결론으로 끝나느냐에 따라 의료계 지각변동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