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허균, 서른셋의 반란 (24)유배

허봉의 성정

허균을 <홍길동전>의 저자로만 알고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선시대에 흔치않은 인물이었다.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당시 천대받던 불교를 신봉하기도 했다. 사고방식부터 행동거지까지 그의 행동은 조선의 모든 질서에 반(反)했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같을 수 없었던 그는 기인(奇人)이었다. 소설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허균의 기인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파격적인 삶을 표현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그의 의지 속에 태어나는 ‘홍길동’과 무릉도원 ‘율도국’.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조선시대에 21세기의 시대상을 꿈꿨던 기인의 세상을 마음껏 느껴볼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다. 
 

스승 이달의 모습을 그리고 있을 즈음에 팔봉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작 데려오라고 한 언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허균의 시선이 팔봉의 얼굴 그리고 그 뒤를 유심히 살폈다.

“왜, 너 혼자 오는 게냐.”

“혹 떼러갔다가 혹 붙이고 오고 말았습지요.”


“뭐라고!”

혹 떼러 갔다가

“마님께서 급히 도련님을 모셔 오라고 하시던데요.”

“어머니께서.”

“어머니뿐만이 아니라 큰서방님도 함께요.”

“큰형님이 오셨다는 말이냐?”

“그렇다니까요.”


큰형 허성은 비록 배다른 형이지만 자신의 동생들을 애지중지했다.

과거급제가 늦어 최근에야 별시문과 병과로 급제해서 검열의 직위에 있었다.

둘째 형인 허봉보다 한참 늦은 출세였다. 

“큰형님이 지금 어인 일이란 말이냐.”

“그건 도련님이 가서 알아보셔야지요.”

허균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시간에 허성의 출현도 그러려니와 허성이 자신에 앞서 어머니를 찾은 일은 의외였다.

비록 허성에게도 어머니였지만 친어머니가 아니었던 관계로 항상 허균과 함께 만나고는 했었다.

허균이 내당으로 들었을 때 어머니와 큰형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해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 모습에 미처 인사도 건네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균아, 이리로 앉거라.”

허성의 목소리가 조금은 떨리고 있었다.

자리에 앉으면서 가만히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어머니의 눈가에 이슬이 고여 있었다.

그를 의식한 어머니께서 고개를 돌리면서 소매로 눈물을 훔쳐냈다.

균의 머릿속에 급격하게 누나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혹여 누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나 하는 불안감이었다.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항상 누나의 얼굴에 허균의 마음이 사로잡혀 있었다.


애처로운 누나의 환영, 차라리 어머니보다는 누나에 대한 절절함이 더욱 컸었다.

“균에게 말해주도록 해요.”

어머니는 비록 허성이 아들의 신분이었지만 함부로 하대의 표현을 하지 않았다.

“균아, 이야기 잘 듣거라.”

기어이 누나에게 일이 발생한 모양이었다. 그것도 작은 일이 아닌 큰일이 말이다.

균의 가슴이 철렁거렸다.

“너의 형이 말이다.”

형, 그럼 누나의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슴이 다시 출렁거렸다.

누나 일이 아닌데 대한 안도감과 누나만큼 좋아하는 형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형님이 왜요!”

지금 허봉은 창원에 부사로 내려가 있었다.

그 형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말이었다.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로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었다.

지방에 내려가셨다가 집에 당도하시기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환영이었다.  

“너의 형이 한양으로 압송되고 있다 하는구나.”

“네!”

이율곡 탄핵하려던 허봉…오히려 역탄핵?
허균·이달 걱정하는 허봉의 불같은 성정

아버지와는 다른 경우였다.

아버지는 병을 얻어 돌아오시다 봉변당했는데 허봉의 경우는 압송을 당한다고 했다.

“너의 형이 이율곡 대감을 탄핵했고 그게 일이 잘못되어 결국 한양으로 지금 압송당하고 있다고 하는구나.”

순간 스승 이달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와 형은 소위 동인으로, 이율곡은 서인으로서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형이 곤경에 처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탄핵한 사람이 탄핵을 당했다고요!”

균이 생각할 때 이상한 경우였다.

이율곡이 잘못해서 탄핵을 건의 했으면 탄핵을 당한 당사자가 탄핵을 당해야 옳은 일이건만 오히려 탄핵을 건의한 형이 탄핵당해 압송되고 있으니 말이다.

“자세한 사항은 차차 알게 될 터이니 무릇 몸가짐과 말을 조심하도록 하거라.”

허성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 분위기로 보아 더 이상 일에 대한 채근을 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급하게 머리를 회전했다.

그 자리에서 답답하게 앉아있느니 차라리 스승 이달을 만나 자초지종을 들어볼 일이었다.

허균이 공손하게 알았노라 답변하고 내당을 빠져나와 팔봉을 앞세우고 바로 저잣거리로 나섰다.

빨리 스승 이달을 만나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천민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서둘러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저만치 앞에서 균의 발걸음만큼 바쁜 걸음으로 자신을 향해 오고 있는 이달을 발견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자 순간 걸음이 멈추어졌다.

지금 이달의 경우도 저와 같은 이유로 저를 찾아오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챈 때문이었다.

허균에게 다가선 이달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쉬지 않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소식은 들었겠지!”

“그래서 지금 스승님께 가던 길이었습니다만.”

이달이 잠시 호흡을 고르고는 균의 손을 잡고 집으로 이끌었다.

균의 방으로 들어서자 급히 팔봉이 냉수를 떠왔고 조심스럽게 이달에게 권했다.

“스승님, 어찌 된 일인지요!”

마치 그 책임을 추궁하겠다는 듯이 급하게 물었다.

“이율곡과 가까운 성혼이 일을 벌인 모양이야.”

“성혼이라니오?”

다시 한 번 숨을 고른 이달의 입에서 일의 자초지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김효원으로 대표되는 동인과 심의겸으로 대표되는 서인 간에 급격한 대립 양상을 보이자 이율곡과 노사신이 임금인 선조에게 건의하여 두 사람을 외지로 내보냈다.

김효원은 함경도 부령의 부사로 그리고 심의겸은 개성 유수로 임명하여 둘을 갈라놓았다.

당쟁의 핵심들을 떨어뜨려 그 싹을 잘라버리겠다는 의도였다. 

그런데 이율곡의 경우는 정철 등 가까운 친구들이 서인 측에 많이 포진되어 있어 동인들의 의혹의 눈초리를 받았다고 했다.

그러던 중 이율곡이 병약해서 누워있는데 임금이 입궐을 명한 일이 있었다.

입궐하던 이율곡에게 갑자기 현기증 현상이 발생하여 입궐하지 않은 일을 두고 임금을 무시한 처사라고 동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동인들이 이율곡을 탄핵하라고 강력하게 치고 나갔다.

그러나 선조 임금은 그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한편 이율곡은 자신의 죄를 정죄하여 처벌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도 선조의 이율곡에 대한 총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를 틈타 이율곡의 가까운 친구인 성혼이 나서서 이율곡을 공격하는 무리들을 탄핵해줄 것을 요청하자 그에 임금이 이율곡이 아닌 허봉 등의 동인을 탄핵하기에 이르렀다.  

“스승님, 그러면 형님은 어찌 처리되는지요.”

이달이 호흡이 정리되었음에도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역죄가 아닌 만큼 커다란 벌이야 받겠냐마는…….”

“그런데요!”

이달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너의 형이야 유배 정도에서 머물겠지만 정작 문제는 너의 형의 성정 아니겠니.”

“형님의 성정이요!”

“자신이 불의라고 생각하는 일에는 목을 내놓고 거부하는 너의 형의 성정으로 보아 이 일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을 듯하구나.”

가만히 형을 그려보았다.

허봉의 성정

“그렇다면!”

“유배와는 별도로 작금의 상황에 대해 너의 형이 차후에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것이 걱정이로구나.”

형이 분을 삭이지 못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형은 아마도 작금의 일을 결코 용납하지 못할 것이라고 허균도 생각하고 있었다.

형의 모습을 그리며 이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 위에 언년의 모습이 교차하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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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한미 정상회담 팩트시트가 공개되자, 가장 큰 화제가 된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에 대해 “문구가 추상적이어서 모호하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자극 받은 일본도 핵잠수함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핵잠수함 건조를 현실화하지 않으면 “일본에 핵 보유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의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하게 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달 29일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타결된 한미 관세·안보 협상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가 지난 14일 공개됐다. 가장 큰 논란은 핵 추진 잠수함(이하 핵잠수함) 관련 합의 문구였다. 산 너머 산 구체성 없다 팩트시트를 통해 확인되는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선 “구체성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팩트시트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민간·해군의 원자력 프로그램 ▲한미 원자력 협정에 부합하고 미국의 법적 요건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로 귀결될 절차 등을 지지한다. 이어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고, 한국과 조선 사업 요건 진전·연료 조달 방안 등을 포함해 긴밀히 협력한다. 미국은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 지지·승인·협력할 뿐이다. 이를 두고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같은 날 브리핑에서 “한미 정상의 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에서 건조하는 게 전제였다”며 “우리 핵잠수함을 미국에서 건조하는 방안은 거론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같은 날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며 “국내 건조 장소 합의는 팩트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기자들 앞에서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을 발표하면서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건조될 것”이라며 “미국 조선업이 곧 대대적인 부활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핵잠수함이 건조되려면, 산적한 현안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 팩트시트엔 건조 장소가 적시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명시해 발표했기 때문에, 미국이 순순히 양보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같은 회담 결과를 두고 양국의 주장이 엇갈리는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다.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및 핵연료 재처리엔 ▲한미 원자력 협정 부합 ▲미국의 법적 요건 준수 ▲한국의 평화적 이용 등 단서가 붙는다. 기술 이전 과정에도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핵잠수함 보유국은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인도 등 6개국이다.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30일 “미국이 핵잠수함 기술을 공유한 사례는 1950년대 최우방국 영국과 협력한 사례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미국의 핵잠수함 기술은 미군이 보유한 가장 민감하고 철저히 보호돼온 기술”이라며 “가까운 동맹인 영국·호주와 체결한 핵잠수함 협정에서도 직접 기술 관련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우리에겐 우라늄 농축·재처리 기술이 없어서 미국으로부터 핵연료를 공급받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하지만 연료 공급 장소·방식은 팩트시트에 명시되지 않았다. 연료 공급 방법을 확보하지 못하면, 핵잠수함을 만드는 의미가 없다. 핵잠 건조 추상적인데 “고정밀지도 내놔” 발 빠르게 비핵 3원칙 수정하려는 일본 미국의 법률 개정 절차도 거쳐야 한다. 미국 원자력법은 ‘미국이 다른 나라와 군사적 목적의 원자력 협력을 하려면, 원자력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미 원자력 협정을 개정한 후 미국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국제 무기 거래 규정도 상원의 동의를 얻어 개정해야 한다. 원자력 협정 개정이 팩트시트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미국 에너지부의 반대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미국 일각에서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한단 것이다.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미국에 고정밀지도를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팩트시트엔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포함한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정책에 있어 미국 기업이 차별당하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위치·재보험·개인정보에 대한 것을 포함해 정보의 국경 간 이전을 원활하게 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도 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온라인플랫폼의 ▲자사 우대 ▲끼워팔기 ▲멀티호밍 제한 등을 막는 내용이 담긴 우리의 온플법 제정을 반대했다. 팩트시트를 따르면, 미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가 어려워진다. 아울러 우리는 구글·애플이 요청하는 1:5000 축척 고정밀지도 국외 반출 요청을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정부는 애플이 요청한 지도 반출 여부를 다음 달에, 구글의 요청은 내년 2월 결정할 예정이다. 팩트시트에 게재된 합의 사항대로라면, 애플·구글의 요청을 수용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 박성훈 수석대변인은 지난 15일 논평을 통해 팩트시트 속 위험요소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박 대변인은 “정부는 ‘농·축산물 개방은 없다’고 말해 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대로 농·축산물 개방 문구가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고정밀 지도 반출 등 대한민국의 디지털 주권과 직결된 사안까지 미국의 요구를 반영해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반도체 관세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보다 불리하지 않게 한다’는 모호한 문구만 있다”며 “경쟁국 대만과 비교해 어떻게 적용할지 등 구체적인 내용은 팩트 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50억달러(약 36조7183억원) 규모의 미국산 군사 장비를 5년 동안 구매하고, 주한미군에 대해 330억달러(약 48조4682억원)를 포괄적으로 지원하면, 천문학적인 재정 부담을 떠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핵잠수함 건조 과정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라서 장밋빛 전망만 내세울 때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고정밀지도 반출 가능성 실제로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가 실현되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해서 실질은 아직 불투명하다”며 “선언이 지나치게 앞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는 핵잠수함 나비효과가 일본으로 번졌단 점이다.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자, 일본 정치권도 크게 술렁였다.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은 지난 12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미국·중국은 이미 핵잠수함을 갖고 있고, 지금은 핵잠수함을 보유하지 않은 한국·호주가 앞으로 보유하게 된다”며 “일본의 억지력·대응력을 강화하려면, 전고체·연료전지·원자력 등 다양한 동력원에 대해 폭넓게 논의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일본은 1967년 사토 에이사쿠 당시 총리가 선언했던 비핵 3원칙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비핵 3원칙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선언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일찍부터 핵무기 반입 금지 방침 완화를 주장했다.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도 같은 날 “현 시점에선 재검토 여부를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국회 연설에서 “내년 중 3대 안보 문서 개정을 위해 검토를 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3대 안보 문서는 ▲국가안보 전략 ▲국가방위 전략 ▲방위력 정비 계획 등을 말한다. 여기엔 비핵 3원칙이 모두 포함돼있다. 일본은 이미 지난 2022년 “반격 능력을 보유하고, 장거리 미사일 전력을 향상한다”는 내용을 3대 안보 문서에 포함했다. 묘한 것은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이 일본 국내 정치구도까지 뒤흔들 가능성이 있단 것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카이치 총리가 선출될 당시 라이벌이었다. 지난달 4일 진행된 자민당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183표(31.1%)를 얻었고, 고이즈미 방위상은 164표(27.8%)를 얻었다. 결선투표에선 다카이치 총리가 185표(54.3%)를, 고이즈미 방위상은 156표(45.7%)에 머물렀다. 하마터면 다카이치 총리는 자민당 총재·총리로 선출되지 못할 뻔했다. 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로 통하는 다카이치 총리에 반발한 공명당이 지난달 10일 자민당과의 연정에서 탈퇴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명당 사이토 데쓰오 대표는 고이즈미 방위상에 대해선 “정치자금 규제와 관련된 공명당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면서 호평했다. 고이즈미 방위상도 “지금까지 정책 실현에 대해 힘써 주신 것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화답했다. 미일 협력 중국 견제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0일 기적적으로 일본유신회와의 각외 협력 형태의 연립 정권 구성에 합의했다. 각외 협력은 연립 정권 구성엔 합의하지만, 내각엔 참여하지 않는 형태를 말한다. 일본유신회가 제시한 조건은 ▲오사카 부수도 지정 구상 수용 ▲국회의원 정원 10% 감축 ▲기업·단체 후원 폐지 ▲평화 헌법 개정 ▲방위력 강화 등이었다. 자민당과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모두 수용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1일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했다. 가장 큰 정치적 의미는 ‘당내 정적 포용’이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전혀 없는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해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정반대의 의미를 강조하는 해석도 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없는 고이즈미를 현안이 산적한 방위성 장관으로 임명해 자멸을 유도한다”는 취지의 해석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주어진 현안은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 ▲자주적 방위력 강화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 ▲방위 장비 수출 운용지침 폐지 등이다. 이중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은 ‘중국 견제’라는 미국·일본의 공통 이해관계로부터 시작됐다. 일본은 군사력을 강화해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역할을 맡으려고 한다. 미국은 일본의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더 효율적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 문제는 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 “방위비를 GDP(국내총생산)의 3.5%로 증액하라”고 요구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8일 진행된 미일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위비 증액·방위력 강화 방침을 설명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음 날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을 만나 “방위비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오는 2028년 3월까지 방위비를 GDP의 2%까지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방위 정책과 관련해 국내 정세와 가장 민감하게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을 곤란하게 할 사안이 있다. 바로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이다. 일본 오키나와현 소재 후텐마 기지는 기나완시 시가지 한복판에서 시 면적의 1/4을 차지하고 있다. 후텐마 기지는 1945년 건설됐고, 일본에서 크고 작은 논란을 일으켰다. 오키나와현의 주민 중 상당수는 미군의 범죄와 소음 피해 등을 이유로 기지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팩트시트’ 고이즈미 날개 다나 견제 압박 와중에 뜻밖의 호재 지난 2004년엔 후텐마 기지 소속 헬리콥터가 오키나와국제대학에 추락하는 등 사고도 여러 번 발생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편입된 시점은 1879년이었다. 1945년부터 1972년까진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따라서 오키나와에선 반미 감정이 강하고, 자민당 지지율이 낮은 편이다. 후텐마 기지와 관련해서도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섬 내 나고시 헤노코 이전을 추진했지만, 오키나와 현·주민의 반대가 강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23년엔 다마키 데니 현지사가 방위성이 신청한 비행장 설계 변경 신청을 승인하지 않고 공사 중단을 요구했다.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은 일본의 역사적 맥락과 맞물려 수십년 넘게 해결되지 못한 사안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중국 견제를 위한 새 안보 질서와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정치적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 2019년 고이즈미 방위상을 환경상으로 발탁했다. 이 임명에 대해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무게를 키우면서도, 문제가 발생하면 그를 정치적으로 낙마시킬 수도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의 아버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퇴임 이후 강력한 원자력 발전소 폐지론자가 됐다. “아버지의 활동이 아들의 정치적 미래를 흐리게 할 수 있어 고이즈미 방위상을 견제하는 묘수”란 평가도 있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기후 변화 문제는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등 적당히 괴상한 발언을 하는 등 바보 행세를 하면서 견제를 피했다. 한동안 일본에선 고이즈미 방위상이 진짜로 바보인지, 바보인 척 연기를 하는지 장난 섞인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후 고이즈미 방위상은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고노 다로 전 외상과 연합해 이시바 내각 탄생에 큰 공을 세웠다. 이어 농림수산상으로서 쌀값 폭등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지난 2023년엔 자민당 내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조기 의회 해산 및 총선거 진행을 적극적으로 제안한 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자민당은 중의원 과반에 미달하는 의석을 얻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더 큰 패배를 당하기 전에 적절한 시점에서 중의원 해산을 건의했다”며 긍정적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방위상 취임 이후엔 어떻게 구 아베파·아소파의 견제를 피할 것인지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한 사안은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견제 수위를 낮추면서 자민당·내각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뜻밖의 호재로 다가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이 일본의 핵잠수함 도입을 주도한다면,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가 될 수도 있다. 견제 회피 일거양득 우리의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일본 정치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사안이 된 것이다. 만약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불확실해지면, 이재명정부는 이 때문에 더욱 큰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일본의 군비 증강에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미래를 위한 발판을 제공한 것”이란 비판이 따라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핵잠수함 나비효과는 이렇게 일본으로 번졌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