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삽질> 김병기 감독의 4대강 추적기

“삽질은 끝나지 않았다”

[일요시사 정치팀] 설상미 기자 = “책임을 묻지 않으면 결국 강은 계속해서 썩어갈 겁니다.” 영화 <삽질>은 <오마이뉴스>의 김병기 기자와 ‘4대강 독립군’으로 불리는 시민기자들이 이명박정부의 4대강 사업을 12년간 밀착 취재해 담은 추적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정권에 부역한 검찰, 정치인, 교수, 언론 등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일요시사>는 김 감독의 기나긴 추적기를 들어봤다.
 

▲ 영화 &lt;삽질&gt;의 김병기 감독이 &lt;일요시사&gt;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4대강 사업을 추적하던 김 감독은 취재 중 불법 비자금에 연루된 결정적인 공익 제보자를 만나게 된다. 4대강 공사를 하면서 본인이 직접 현금 100억원을 라면 박스에 담아 원청업체인 건설사에 가져다 줬다는 충격적인 제보였다. 하지만 공익 제보자는 검찰 수사 도중 피의자로 신분이 바뀌었다.

“당신은 기자니, 내 얘기를 듣고 특종을 쓰면 끝이지만, 나는 왜 그 불구덩이 속으로 다시 뛰어 들어가야 하는 거냐. 나에 대해 어떻게 책임질 건데.”

제보자 말에 김 감독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언론의 역할은 무엇인가. 결국 제보자의 고발은 취하됐고, 진실은 숨어버렸다. 다음은 김 감독과의 일문일답.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마이뉴스>의 김병기 기자라고 합니다. 지난 14일에 개봉한 <삽질>이라는 영화의 감독이기도 합니다.

-<삽질>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요.
▲환경을 망친 내용도 적나라하게 담고 있지만, 무엇보다 4대강 사업에 국정원·검찰·기무사 등 국가 권력이 총동원돼서 불법과 탈법 등으로 민주주의를 망치는 내용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불법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12년간의 추적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죠.


-영화를 만든 목적이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4대강 사업은 10년 전에 국민 세금 22조2000억을 투입해서 강을 망친 일회성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4대강 사업은, 이 삽질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매년 5000억원서 1조원의 국민 세금이 투입되고 있어요. 책임이 있는 사람한테 책임을 묻지 않으면 결국 강은 계속해서 썩어갈 겁니다.

-취재를 하게 된 이유는요.
▲2006년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이 독일 마인-도나우 운하에 가서 한반도 대운하를 만들겠다는, 국운융성 프로젝트를 제1공약으로 선포했죠. 경제도 살리고 강도 살리겠다는 프로젝트였습니다. 기자니까 당연히 유력 대통령 후보를 철저하게 검증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취재를 시작했고요.

12년 밀착 취재 다큐멘터리
MB정권 부역자들 민낯 공개

-당시 이명박 대통령 후보를 따라 독일도 가셨다고요.
▲이명박 후보가 제1공약을 발표하고 두 달 뒤에 제가 독일로 갔습니다. 이명박 후보한테 브리핑했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가서 운하를 가지고 국운융성을 시킬 수 있는지, 운하를 통해서 강을 살릴 수 있는지를 그들에게 물어봤습니다. 그 분들은 코웃음을 치더라고요.

-뭐라던가요?
▲도로 교통과 철도 교통, 철도 운송 수단이 발달해 운하는 속도가 느린 편에 속하는 데다 하역작업도 상당히 번거롭습니다. “시간이 돈인 시대인데 운하로 어떻게 경제를 살리겠냐. 그걸로 경제 동력을 삼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운하의 물은 깨끗합니까?” 물어보니까 “물이 고여있기 때문에 더러워서 수영도 못 한다”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경제를 살리겠다, 강을 살리겠다, 이 얘기가 다 새빨간 거짓말이었잖습니까.

-4대강 취재 때 MB정권의 탄압이 엄청났다고 들었습니다.
▲환경운동연합과 환경재단을 검찰이 압수수색했어요. 100개의 후원 기업들을 그냥 다 털었어요. 중앙환경운동연합은 간사들이 거의 다 나갔죠. 정권서 본보기를 보여준 거예요. 저항하면 다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걸요. 공포 정치이자, 공포 검찰이었던 거죠.
 

▲ 다큐멘터리 영화 삽질을 찍은 김병기 감독이 일요시사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이명박정부서 3000만원짜리 광고를 주겠다고 회사 쪽으로 전화가 왔다고 들었습니다.
▲당시에 4대강 정비사업 광고를 위해 엄청나게 많은 광고비가 투입됐습니다. <오마이뉴스>에도 3000만원 준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저희가 상당히 힘들 때였어요. MB정권이 사기업 광고까지 조여왔거든요. 근데 안 받았죠. 시민기자들의 모습을 보면서요. 이 사람들은 월급도 안 받는 사람들이에요. 어떤 때는 일용직으로 돈 벌어서 기름값에 쓰면서, 지난 10년 동안 죽어가는 4대강을 고발해왔던 사람들이거든요.


-강의 모습은 어땠나요.
▲2012년 완공되고 나서 곧바로 물고기 떼죽음이 벌어집니다. 다음 해부터 녹조가 가득 낀 ‘녹조라떼’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2014년에는 큰빗이끼벌레가 창궐합니다. 당시 김종술 시민기자가 이를 처음 발견해서 전문가에게 문의했지만 아무도 이 괴생명체의 이름을 몰랐죠. 이후 2년 동안 창궐한 큰빗이끼벌레가 싹 없어집니다.

-큰빗이끼벌레가 사라지고 당시 언론들은 4대강 사업으로 강이 좋아졌다고 보도했습니다.
▲큰빗이끼벌레는 흐르는 강이 아닌 호수나 2·3급수 정도에 사는 생명체거든요. 이마저도 살 수 없는 환경으로 오염된 거예요. 그 다음해부터는 시궁창 펄에 실지렁이, 붉은 깔따구가 득실득실합니다. 자연생태계는 인간처럼 거짓말을 못 해요. 강은 침묵하고 있지만 보여주면서 죽어가고 있는 걸 말해준 거죠.

-문재인정부 들어서 금강은 수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변화가 있던가요.
▲2017년 금강은 수질예보제(녹조류의 발생 정도에 따라 단계별로 예보하는 제도) 관심 이상 발령일수가 120일 정도 됐어요. 문을 열고 나서는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2018년엔 59일로 줄었어요. 올해는 관심 이상 발령일수가 제로였습니다. 수문만 열어도 녹조는 없어진다는 거예요.

괴생명체까지…병든 4대강
권력으로 벌인 22조 돈잔치

-이화여대 박석순 교수는 4대강 사업 후 금강의 수질이 개선됐다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수문을 열었을 때와 닫았을 때를 비교해봤더니, 수문을 닫았을 때가 더 깨끗했다는 논문이었어요. 제가 팩트체크를 해보니 4대강 보, 수문을 열기 전에 데이터는 겨울 데이터를 씁니다. 수문을 연 뒤의 데이터는 여름 데이터를 씁니다. 같은 기간을 같이 비교해야 하잖아요. 책임지기 싫으니까 악마의 편집으로 호도하는 거죠.

-일부 시민 단체나 자유한국당에서는 보 해체를 하는 게 돈이 더 많이 든다고 주장합니다.
▲문재인정부 들어서 감사원 감사 결과가 발표됐는데, ‘비용 편익 분석’이라는 게 있어요. 이 지수가 향후 50년 동안, 이대로 간다면 0.21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어요. 국민 세금 100원을 투자하면 거기서 21원을 벌 수 있다는 거예요. 손해 나는 장사잖아요. 사람들은 이미 만들어 놓은 댐인데 그대로 두면 어떠냐고 얘기를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매년 유지보수비가 5000억원서 1조원을 들여서 수문을 막고 보를 유지하고 있어요.
 

-4대강 사업의 본래 취지는 강과 지역 경제를 살리고 홍수와 가뭄을 예방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의미 있는 투자예요. 자연재해를 예방할 수 있으니까요. 근데 그게 아니거든요. 강과 지역경제를 다 죽이고 있습니다. 어민들은 항상 빈 그물입니다. 4대강 사업 이전에도 4대강 본류에선 홍수와 가뭄이 없었어요. 홍수와 가뭄은 강원도 산간지역, 도서 지역인 영동지역에나 발생했던 거죠. 발목뼈가 금이 가면 깁스하면 되는 건데 심장 수술을 한 격이에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다면...
▲스페인 속담 중에 1000년 뒤에 강은 제 길로 되돌아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돈 잔치를 벌이기 위해 5년짜리 대통령이 아무리 강을 훼손하더라도 1000년 뒤에 인간은 대자연의 섭리를 어길 수 없다는 의미인 거죠. 미래의 세대들이 누려야 할 우리의 4대강이 지금 계속 썩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관심만이 4대강 삽질을 멈출 수 있다는 얘기를 마지막으로 전해드리고요. 많은 관람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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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