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탐사기획> ‘만들어지는’ 학종의 두 얼굴 ②문제 백화점

10년 만에 천덕꾸러기 신세로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을 둘러싼 논쟁이 거세다. 획일적인 입시제도를 다양화하고 학생들의 창의성을 키우려는 학종의 취지에는 공감도가 높다 . 하지만 공정성과 투명성이 결여돼있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학종을 폐지하거나 운영 방식을 전면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일요시사>는 학종의 도입과 현황, 문제점 및 대안을 살펴봤다.

한 교육계 관계자는 우리나라 입시제도를 ‘누더기’라고 표현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여론에 휩쓸려 개편을 거듭하는 입시제도의 현 상황을 꼬집은 표현이다. 또 “현행 입시제도는 학생, 학부모, 교사, 대학, 정부 등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개선이 어렵다”고 말했다.

불공정 낙인
학생부 종합

정부 수립 이후 대학 입시제도는 총 18번, 이번 개정안을 포함하면 19번 바뀌었다. 4년에 한 번 꼴이다. 대체적으로 정부가 바뀔 때마다 입시제도 역시 널을 뛰었다. 본고사, 학력고사, 대학수학능력시험 (이하 수능), 입학사정관제, 학생부종합전형 (이하 학종) 등 용어를 따라가기도 벅차다. 교육은 백년지대계 (백년 후까지의 큰 계획)라는 말은 공염불이 된 지 오래다.

정부 부처끼리도 엇박자를 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최근 유은혜 교육부총리의 말이 대통령 연설로 뒤집혔다. 대통령 연설서 나온 몇 마디 말에 대학은 일제히 입시제도를 손 보겠다고 나서고 있다. 국가교육회의, 대학입시제도 개편 공론화위원회 등에서 나왔던 모든 논의와 결론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매년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문정부는 출범 첫해 수능 개편을 시도했다. 현재 고등학교 2학년부터 새로운 교육 과정이 적용되면서 과목 구조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과정서 수능 절대평가 과목 확대가 갈등의 씨앗으로 떠올랐다. 일부 과목과 전 과목 절대평가 등 2가지 안을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


이견이 좁혀지지 않으면서 종합적인 입시제도 개편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결국 수능 개편 방침이 백지화되고 논의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2022 학년도 입시제도 개편 추진 과정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입시제도는 전 국민의 관심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민감한 문제라 서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사이 입시제도 개편 주체는 교육부서 국가교육회의로, 국가교육회의 산하 대입개편특별위원회, 국가교육회의 산하 공론화위원회 , 시민참여단 등으로 거듭 바뀌었다. 공론화위원회서 논의한 입시제도 개편안을 두고도 갈등이 빚어졌다. 4가지 개편안을 두고 교육계가 쪼개진 것이다.

정부 바뀔 때마다 제도 손봐
논란 불거질 때마다 뜯어고쳐

시민참여단 공론화 결과 ▲정시 45% 이상 및 수능 상대평가 유지 (1안) ▲수시· 정시 비율 대학 자율 및 수능 절대평가 전면 전환(2안) ▲ 수시·정시 비율 대학 자율 및 수능 상대평가 유지(3안) ▲정시 확대 및 학생부전형 균형 및 수능 상대평가 유지(4 안) 중 1안과 2 안이 각각 52.5%, 48.1%로 높은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공론화위원회는 1안과 2안 사이에 유의미한 통계적 차이가 없다는 점을 들어 판단을 유보했고, 국가교육위원회는 ‘수능 위주 정시 전형 확대’라는 결과를 교육부에 내밀었다. 교육부는 이를 바탕으로 ‘수능 위주 정시 전형 30% 이상 확대 및 수능 상대평가 유지’로 가닥을 잡았다.

교육부는 줄곧 정시 확대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유 교육부총리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자녀와 관련된 입시 의혹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에도 ‘정시 확대는 논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학종에 대한 불신과 정시 확대에 대한 여론이 높아졌지만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대신 학종 비율이 높은 대학에 대한 조사에 돌입했다.

그러다 상황이 반전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국회서 진행한 내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서 ‘공정’이라는 단어를 27번 사용하는 등 공정 사회를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어 “국민 요구는 제도에 내재된 합법적 불공정·특권까지 근본적으로 바꿔내고 사회 지도층일수록 더 높은 공정성을 발휘하라는 것으로, 대통령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갖겠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국민께서 가장 가슴 아파하는 것이 교육계의 불공정”이라며 “최근 시작한 학생부종합전형 전면 실태조사를 엄정히 추진하고 고교 서열화 해소를 위한 방안도 강구하겠다. 정시 비중 상향을 포함한 입시제도 개편안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조 전 장관의 자녀 입시비리 의혹으로 불거진 국민들의 분노에 ‘정시 확대’ 카드를 내민 것이다.

대통령 한 마디에
대학들도 들썩들썩

문 대통령이 시정연설서 입시제도의 공정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학종의 불공정성이 또다시 도마에 올랐다. 교육계에선 정시 비중을 40 ∼50%까지 높이고 학생부 비교과 항목 폐지 등 학종을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와 동시에 ‘학종은 불공정한 전형’이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뿌리내렸다.

학종을 바라보는 시선은 엇갈린다. ‘아예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고, ‘고쳐 써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폐지를 주장하는 쪽이나 개선이 필요하다는 쪽 모두 현행 학종 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실제 학종을 둘러싼 논란은 2007년 노무현정부서 도입할 때부터 현재까지 끊이지 않고 있다.

문제가 나올 때마다 교육부에선 환부만 도려내는 방식으로 제도를 뜯어 고쳐왔다. 학종의 역사는 ‘금지’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외부 수상 경력이 문제가 되자 교내 수상 경력으로만 한정 짓고 , 소논문이 문제가 되니 이를 없애는 방식이다. 최근 학종의 비교과 항목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땜질 처방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학종의 불공정성을 유발하는 것은 ‘정보 격차’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접어들면서 정보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아는 게 힘’이라는 말은 어느 덧 고리타분한 표현이 됐다. 정보는 곧 부와 직결됐고, 부는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지름길을 알려줬다. 학종은 그런 의미서 ‘금수저 전형’ ‘현대판 음서제’라는 별칭을 얻었다.

학종은 학교 내신 성적으로 산출하는 교과 항목과 봉사활동·동아리·독서활동 ·수상 경력 등의 비교과 항목으로 구성된다. 교과와 비교과로 채운 학생부에 자기소개서와 교사추천서 등을 종합해 평가받는다. 1차서 합격하면 면접과 수능 최저학력 기준 등을 통해 최종 합격이 가려진다. 점수에 따라 1등부터 꼴등까지 줄 세울 수 있는 정량평가가 아닌 정성평가다.

객관식 시험이 아니라 평가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스펙’이 필요해진 것이다. 수능 ‘한 방’으로 대학이 결정되던 때와는 상황이 달라졌다. 학생과 학부모는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학생부 기록이 끝나는 날까지 초긴장 상태에 놓였다. 교과 성적은 물론 외부활동에도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학부모 전형
돈·지위 영향

학교생활만으로도 바쁜 자녀를 대신해 학부모가 나섰다. 봉사활동이나 수상 실적을 올릴 수 있는 대회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친분이 있는 학부모들끼리는 정보를 공유했다. 학종은 학부모의 개입 여부에 따라 스펙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는 지적을 꾸준히 받아왔다. 특히 학부모의 경제·사회적 지위가 정보량을 좌우했다.

대학교수들이 미성년 자녀를 논문의 공저자로 끼워 넣은 게 대표적인 사례다.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해 4월, 2007∼2017년 발표된 논문을 조사한 결과 49개 대학이 심사한 138개 논문서 교수가 자신의 미성년 자녀를 공저자로 등록한 사실이 드러났다.


자녀를 공저자로 등록한 교수는 모두 86명이다. 2017년 12월부터 지난해 1월까지 조사했을 때에도 29개 대학서 82건이 적발됐다.

교육계에선 미성년 자녀를 교수 부모의 논문에 공저자로 등록하는 것이 입시용 경력 쌓기를 위한 꼼수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봤다. 교육부는 2014 학년도부터 학생부에 논문을 기재하는 것을 금지했다. 학종 평가서도 제외했다. 하지만 일부 대학은 여전히 특기자 전형에 논문을 지원 자격으로 두고 있다.

특별감사를 통해 추가로 드러난 건까지 합치면 교수들의 미성년 자녀가 공저자로 등록된 논문은 794건에 이른다. 이 과정서 서울대 이병천 수의대 교수가 자신의 아들을 공저자로 올린 논문이 2015학년도 강원대 수의학과 편·입학에 활용된 것으로 드러났다. 교육부는 강원대에 편·입학 취소를 통보하고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기로 했다.

교수 부모들이 미성년 자녀를 논문의 공저자로 올린 건수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교수들끼리 서로의 자녀를 논문의 공저자로 올리는 ‘스펙 품앗이’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뿐만 아니라 조 전 장관 딸의 경우처럼 교육부 조사서 누락된 경우가 있을 수 있다 . 조 전 장관의 딸은 고등학생 때 논문의 1저자로 이름을 올렸지만 조사를 통해 드러나지 않았다.

학종이 매년 늘어나는 사교육비에 일조하고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전체 초·중·고 학생 수는 줄고 있는데 총 사교육비는 늘어나고 있다. 특히 지난해 사교육비는 2007년 조사가 시작된 이후 가장 큰 폭으로 늘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교육부와 통계청이 발표한 2018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학생 수는 558만명으로 전년보다 2.5% 줄었다. 하지만 같은 기간 사교육비 총액은 18조7000억원서 19조5000억원으로 8000억원(4.4%) 늘었다. 물가상승률(2%) 의 2배 수준이다.


문 대통령 정시 확대 발언
폐지냐 개선이냐 갑론을박

하유경 교육부 교육통계과장은 “고교 사교육비가 많이 오르면서 전체 사교육비 증가를 이끌었다”며 “대학입시서 수험생들의 예측 가능성이 많이 흔들렸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학종이 확대되고 학생부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수험생들의 불안감이 사교육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실제 드라마 <스카이캐슬>처럼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기 위해 값비싼 ‘입시 코디’를 고용하는 것도 마냥 허구는 아니라는 말이 나온다. 입시 코디는 학생과 학부모뿐만 아니라 교사조차 완벽하게 파악하기 힘든 학종을 세세히 알고 방향을 잡아주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자기소개서 대필이나 매매 등은 이미 성행한 지 오래다. 자기소개서 1회 첨삭에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업체도 있다고 한다. 또 교사가 작성해야 할 학생부 기록을 학생에게 써오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비교과 항목인 자율활동이나 봉사활동, 진로활동 등은 글자 수에 맞춰 담임이나 지도교사가 작성하게 돼있다. 이때도 학생과 학부모는 대필 혹은 컨설팅 업체를 찾는다.

2022학년도 입시에서 자기소개서 등 전형과 관련된 서류의 대필, 허위 작성 등이 확인되면 불합격 처리하고 입학 후에라도 입학 취소를 의무화한다는 ‘2022학년도 대입전형 기본사항’이 발표됐다. 또 학생 1명의 서류를 다수의 입학사정관이 평가하는 것을 의무화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의 이번 발표는 공정하고 투명한 입시제도 마련에 초점을 맞췄다.

교육부서 학종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국민 여론은 싸늘하다. 실제 문 대통령의 정시 확대 발표에 70%가 넘는 국민이 지지를 표했다. 반면 교육계에선 정시 확대와 학종 논란을 두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불공정 전형의 대명사로 낙인 찍힌 학종에 대해서는 폐지와 개선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수능이냐
학종이냐

이종배 공정사회를위한국민모임 대표는 지난 5월 자유한국당 조경태 의원이 진행한 학종 개선 방안 모색 토론회서 “학종은 정성평가로 당락을 결정하는 깜깜이 전형”이라며 “학종은 실패한 제도로 개선될 여지가 없다. 이를 폐지하고 정시모집 비중을 90% 이상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승주 세종로국정포럼 이사장은 “수능은 악습이고 폐습이며, 학생들을 한 줄로 줄 세우는 시험평가 교육의 잔재”라며 “학종, 특히 비교과 항목인 창체 활동은 시대변화를 예측한 생명력 있는 교육 프로그램이지만 그동안 암기 교육, 전담교사 부족 등으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학종을 보완해 운영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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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