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서원 ②경주 옥산서원

태고의 자연 속에서 학문과 사색의 즐거움을 찾다

▲ 경주 옥산서원 구인당 대청에서 자옥산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선시대 유교 교육기관이자 명문 사립학교인 경주 옥산서원(사적 154호)은 회재 이언적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고 배향하는 곳이다. 풍광 좋은 안강의 자계천에서 숲과 계곡이 가장 아름다운 자리에 있다. 역락문을 지나 무변루, 구인당, 민구재와 암수재까지 작은 문고리 하나 무심히 지나칠 수 없을 만큼 회재의 학문적 열정이 스며들었다. 엄격한 강학과 성현의 문화가 만나는 옥산서원에서 학문과 사색의 즐거움을 찾았다.
 

▲ 회재 이언적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고 배향하는 옥산서원

회재 이언적은 김굉필, 정여창, 이황, 조광조와 함께 동방5현으로 꼽히는 조선 시대 성리학자다. 1514년 문과에 급제한 뒤 이조정랑, 밀양부사 등을 거쳐 높은 벼슬에 오르며 승승장구했지만, 두 번이나 정변에 밀려 낙향하는 불운을 겪었다. 회재가 택한 곳은 본가가 있는 양동이 아니라 독락당이다. 그는 직접 구상하고 지은 독락당에서 약 7년간 기거하며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회재 사후 19년이 지난 1572년, 후손들이 독락당 인근에 옥산서원을 세웠다. 회재의 삶이던 성리학은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영남학파 학풍의 뼈대를 이루고, 그를 기리는 옥산서원은 사액을 받았다.
 

▲ 울창한 숲과 계곡이 아름다운 옥산서원

자연과 함께

옥산서원 앞에는 사철 마르지 않는다는 자계천이 흐른다. 회재가 이름 붙이고 퇴계가 썼다는 세심대(洗心臺)는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삼아 학문을 구하라’는 뜻이다. 회재가 이 천혜의 자연을 얼마나 아꼈을지 짐작할 만하다. 거대한 너럭바위 사이로 힘차게 들리던 물소리가 서원 안으로 들어서니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강학에 몰두하는 데 거친 자연의 소리가 거슬리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사라지고, 적막한 고요에 마음이 차분해진다. 무변루 통문을 지나 돌계단에 올라서면 강학 공간의 마당이다. 마당은 휴식 공간인 무변루와 강당인 구인당 사이에 기숙사인 민구재와 암수재가 양쪽에 끼워진 정방형 공간이다. 전학후묘는 여느 서원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기품 있는 공간 배치가 돋보인다.
 

▲ 옥산서원으로 들어가는 역락문

옥산서원으로 들어가는 정문은 역락문(亦樂門)이다.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 가운데 유붕자원방래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에서 따온 이름이다. ‘멀리서 벗이 찾아오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의미다. 여러 해석 중에 출세가 목적이거나 남이 알아주기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성숙을 위해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먼 곳에서도 사람이 찾아온다는 뜻이 가장 선명하게 다가온다.
 

▲ 구인당에서 바라본 무변루

무변루(無邊樓)는 서원 건축에서 접하기 어려운 누마루가 눈길을 끈다. 2층으로 된 무변루는 총 7칸이지만, 마당에서는 5칸처럼 보인다. 통나무 계단으로 오르는 누마루는 가운데 3칸이 대청이고, 양쪽에 온돌방이 있다. ‘배움에 끝이 없다’는 뜻의 무변루는 서원 밖 경관을 차단하는 판문의 푸른색이 폐쇄적인 느낌이지만, 판문을 열어젖히면 푸른 자옥산과 자계천이 펼쳐진다니 상상만 해도 아름답다. 서원의 규율과 위계가 엄격해서 학업에 집중하기 위해 외부와 만남을 삼갔다는 이야기가 실감 난다. 무변루로 가는 나무계단은 난간이 없어 올라가기 어려울 듯한데, 내려올 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휴식에서 학업으로 돌아오는 데 그보다 좋은 긴장감이 없었을 것이다.
 

▲ 난간이 없어 아찔한 무변루 계단

무변루에서 마주 보이는 ‘구인당(求仁堂)’은 회재가 저술한 〈구인록〉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회재는 “오상(五常)의 으뜸은 인(仁)이며 이것이 심덕(心德)의 전부요, 만선(萬善)의 근본”이라고 했다. 강의와 토론이 열리던 구인당은 대청 3칸과 양쪽 온돌방으로 구성된다. 구인당에는 내로라하던 대가들의 친필이 있다. 강당 처마에 걸린 ‘옥산서원’ 편액은 추사 김정희, 대청에 걸린 옥산서원 편액은 문신이자 명필 이산해의 글씨다. 마루 안쪽에 걸린 구인당 편액은 무변루와 함께 한석봉의 글씨다. 한 획 한 획 힘차고 믿음직한 글씨를 보면, 인(仁)의 선비 정신에 강한 호기심이 생긴다.
 

▲ 추사 김정희가 쓴 ‘옥산서원’ 편액
▲ 툇마루에 앉아 바라본 하늘이 고요하고 아름답다.

회재 이언적의 덕행·학문 기리는 곳
풍광 좋은 안강의 자계천에 위치

구인당과 무변루 사이 좌우에는 기숙사인 민구재와 암수재가 있다. 민구재(敏求齋)는 ‘민첩하게 진리를 구하다’, 암수재(闇修齋)는 ‘드러나지 않게 묵묵히 수양하다’라는 뜻이다. 민구재 툇마루에 앉아 바라본 네모난 하늘이 서원의 기운만큼 반듯하고 고요하며 아름답다. 그 안에 담긴 하늘과 산과 나무까지 옥산서원의 품위를 닮았다.
 

▲ 역락문을 지나 구인당까지 회재의 학문적 열정이 스며든 옥산서원

서원은 1574년 선조에게 ‘옥산’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에도 살아남은 47곳 가운데 하나인 옥산서원에는 보물급 문화재가 많다. 회재가 벼슬살이하며 받은 교지, 독락당과 강계에 유배 중이던 시기에 저술한 책 등이다. 국보인 〈삼국사기〉 본질 9책 50권이 옥산서원유물관에 있지만, 열람이 불가능하다. 또 〈동국이상국전집〉을 비롯한 고서 4000여권, 호구단자와 명문, 도록 등 고문서 1156건, 〈회재선생문집〉 책판 1123판 등 무형 유산과 기록 유산 6300여점이 있다.
 

▲ 마당에서 본 독락당 풍광이 그림 같다.

옥산서원 앞 계곡의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회재가 살았던 경주 독락당(보물 413호)으로 가는 길이다. 회재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지내던 집의 사랑채다. 토담으로 둘러싸여 외부와 차단된 독락당은 숲과 계곡을 집 안으로 들어오게 한 자연 친화적인 건축양식이 돋보인다. 마루와 사랑방으로 구성되고, 마당에서 바라본 풍광이 그림 같다. 엄격한 균형미와 폐쇄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옥산서원과 확실히 비교된다. 무위자연을 존중하며 학문과 수양에 전념하고자 한 회재의 의지가 고스란히 담겼다.
 

▲ 대청에서 냇가를 바라볼 수 있도록 토담에 살창을 만들었다.

독락당은 안채와 사랑채, 별당, 사당, 공수간 등을 갖춘 살림집이다. 옛 독락당은 사랑채를 칭했지만, 지금은 집 전체를 의미한다. 독락당과 공수간 사이 골목은 토담으로 이어진다. 타박타박 걸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독락당에서 감탄을 자아내는 곳이 있다. 첫째, 독락당 옆쪽 담장에 살창을 달아 대청에서 냇가를 바라보도록 한 설계다. 토담에 뚫린 살창은 지금 봐도 신선하고 멋진 발상이다. 둘째, 독락당 뒷쪽 바위에 긴 기둥을 세워 만든 계정이다. 계곡 가까이 지은 정자로, 세속에 지친 마음에 위안을 주는 푸른 숲과 맑은 계곡을 품으려는 회재의 노력이 느껴진다. 계정 난간에 기대앉으면 계곡에서 청아한 바람이 불어온다.
 

▲ 푸른 숲, 계곡과 어우러져 자연 그 자체인 독락당의 계정
▲ 양동마을에서 가장 큰 정자인 심수정에서 본 마을 풍경

회재가 태어난 서백당이 있는 경주 양동마을(국가민속문화재 189호)은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양동마을은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 집성촌으로 전형적인 양반 마을이다. 서백당, 무첨당, 관가정, 향단, 심수정 등 기와집과 초가 150여채가 있다. 심수정(국가민속문화재 81호)은 형인 회재 이언적을 대신해 벼슬을 마다하고 노모를 봉양한 농재 이언괄 공의 효심을 추모해서 지었다. 양동마을에서 가장 큰 정자로, 오래된 정원과 함께 고색창연하다.
 

▲ 독특한 양식과 빼어난 조형미를 보여주는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독락당에서 북쪽으로 700m쯤 올라가면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국보 40호)이 도도하게 서 있다. 정혜사 터에 남은 9세기 통일신라 석탑으로 높이 5.9m에 이른다. 불국사 다보탑,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과 더불어 우리나라 이형 석탑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조형미가 빼어나 볼수록 신비롭고, 예술적인 감동을 준다.


<여행 정보>

당일 여행 옥산서원→독락당→정혜사지 십삼층석탑→양동마을 

1박2일 여행 코스
첫째 날: 옥산서원→독락당→정혜사지 십삼층석탑→양동마을
둘째 날: 양동마을→동궁과 월지→경주 대릉원→황리단길

관련 웹 사이트 주소  
- 경주문화관광 http://guide.gyeongju.go.kr
- 경주愛(경주시 공식 블로그) http://blog.naver.com/gyeongju_e
- 경주양동마을 http://yangdong.invil.org/index.html  

문의 전화 
- 경주시청 관광컨벤션과 054)779-6079
- 옥산서원 054)762-6567
- 독락당 010-7620-7712
- 경주양동마을 054)762-2630
- 신경주역관광안내소 054)771-1336
- 경주버스터미널관광안내소 054)772-9289

대중교통 정보
기차: 서울역-신경주역, KTX 하루 16~19회(05:15~21:30) 운행, 약 2시간10분 소요. 신경주역 정류장에서 50번 버스 이용, 경주역 정류장(호성한의원 앞)에서 203번 버스 환승, 옥산2리 정류장 하차, 약 2시간10분 소요. 옥산서원까지 도보 약 5분. 
*문의: 레츠코레일 1544-7788, www.letskorail.com 새천년미소 054)742-2690
버스: 서울-경주,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하루 17회(06:10~23:30) 운행, 약 3시간30분 소요,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하루 17~19회(07:00~23:59) 운행, 약 4시간 소요. 경주시외버스터미널 정류장에서 203번 버스 이용, 옥산2리 정류장 하차, 약 1시간30분 소요, 옥산서원까지 도보 약 5분. 
*문의: 서울고속버스터미널 1688-4700 고속버스통합예매 www.kobus.co.kr 동서울종합터미널 1688-5979 시외버스통합예매시스템 https://txbus.t-money.co.kr 경주시외버스터미널 1666-5599, http://gyeongjuterminal.co.kr 새천년미소 054)742-2690

자가운전
상주영천고속도로→동영천 IC→임고 방면→국도28호선 8.7km →호국로 12.1km→옥산서원길 2.3km→옥산서원

숙박 정보
- 독락당: 안강읍 옥산서원길, 010-7620-7712, www.독락당.com
- 베니키아스위스로젠호텔: 경주시 보문로, 054)748-4848, www.swissrosen.co.kr
- 신라부티크호텔: 경주시 강변로, 054)745-3500, www.sillaguesthouse.com
- 황남관한옥마을: 경주시 포석로, 054)620-5000, http://hanokvillage.hicomedia.com 

식당 정보
- 향적원(연잎밥정식): 경주시 불국로, 054)775-0014
- 전통맷돌순두부(순두부찌개): 경주시 숲머리길, 054)743-0111
- 경주원조콩국(콩국수): 경주시 첨성로, 054)743-9644
- 교리김밥 경주교동본점(김밥): 경주시 교촌안길, 054)772-5130, www.교리김밥.kr

축제·행사 정보
선비옷 입기 체험: 5~10월 토·일요일 오전 10시~오후 5시 옥산서원 관람 시 차와 떡 제공


주변 볼거리
옥산세심마을, 첨성대, 천마총, 경주 최부자댁, 교촌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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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