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보수 딜레마

친미·친일 명분이…

[일요시사 정치팀] 설상미 기자 = 해방 직후, 극심한 좌우 대립 속 ‘한국 보수’는 ‘친미’와 ‘반공’이라는 독창적인 개념으로 치환됐다. 하지만 미국이 북한과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이어 최근 한일 무역전쟁이 심화되면서 반공을 함께할 우방국들의 상황이 변하고 있다. 딜레마에 빠진 보수진영, 흔들리는 그들의 시선을 조명했다.
 

최근 한미는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검증을 위해 ‘한미연합지휘소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북한은 한미연합훈련을 진행하는 한국에 ‘새벽잠을 설쳐대며 허우적’, ‘겁먹은 개가 요란스럽게 짖어대는 것’ 과 같은 막말을 일삼는 반면, 미국에 대해선 한미연합훈련이 끝나자마자 만나서 협상하고 싶다는 의사를 담은 친서 외교를 보냈다. 정치권에선 통미봉남(미국과의 실리적 통상외교를 지향하면서 남한 정부의 참여를 봉쇄하는 북한의 외교전략)의 고착화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흩어지면 죽고
뭉쳐야 산다!

북미실무협상은 오는 20일에 마무리되는 한미연합훈련 이후 재개될 전망이다. 지난 10일 트럼프 대통령은 “친서에는 단거리 미사일 실험에 대한 작은 사과가 담겨 있었다”며 “한미 연합훈련이 끝나는 대로 (미사일 발사) 시험을 끝낸다고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김 위원장을 머지않은 미래에 만나길 기대한다. 핵 없는 북한은 전 세계서 가장 성공한 나라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북한은 최근 미사일 시험을 강행하며 국제사회를 도발했으나,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발사체가 단거리 미사일이기에 미국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며 북한을 옹호했다. 실무협상 이전 대화에 집중하려는 북한과 외교 능력의 우려를 불식시키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윈윈(Win-Win) 전략으로 읽힌다.

지난 6월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 최초로 북한 땅을 밟았다. 과거 미국 정부는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부르며 극심한 대립각을 세웠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에게 우호적 태도를 유지하며 과거 미국 대통령들과는 남다른 면을 과시, 북한과의 관계를 치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실제 그는 판문점 회동 이후 오바마 행정부서 북핵 문제에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 북한과의 관계를 본인의 경쟁력으로 과시하는 면모를 보였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 재임기간에는 북한이 핵실험을 했고, 미사일을 쏘아 보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좋고 조용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동날 “자신과 김 위원장 간에는 어떤 좋은 케미스트리가 있지 않나, 그래서 이렇게 (판문점 상봉이)성사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넘은 데 대해 “좋지 않은 과거를 청산하고 앞으로 좋은 앞날을 개척하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남다른 용단”이라고 말하며 둘은 특별한 ‘브로맨스’를 보였다.

북미 우호적 관계…불편한 김-트 케미
점점 멀어지는 일본 “편들 수도 없고”

일각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북핵 문제의 주도권 싸움서 자신에게 주도권이 있음을 국민들에게 각인시키고, 외교적 성과를 선거서 활용하려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내년 대선서 재선을 노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대북관계의 성과를 지렛대 삼아 선거서 승리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동북아 평화에 한 발짝 나아간 계기가 된 남북미 회동을 두고 한국 보수진영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을 지켜줄 우방의 대통령이 주적인 북한 땅을 밟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해 보수진영의 친미 노선에 혼란이 생긴 것이다. 외국의 보수는 민족주의와 국익을 중시하지만 냉전 이데올로기로 인해 한국 보수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친미’이자 ‘반공’이다.

그들에게 미국은 ‘선’이자 반미는 ‘악’으로 간주된다. 믿고 따랐던 미국 대통령의 행보로 ‘친미반공’의 프레임이 깨지자 보수진영 사이서 여러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특히 친미적 색채가 강한 우리공화당(이하 공화당) 내부에선 “매 집회 때마다 성조기를 흔드는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볼멘소리가 나오면서 배신감을 감추지 못했다.

공화당은 광화문광장에 천막을 기습 설치해 서울시와 대립했지만 트럼프 대통령 방한이 있던 날 경호를 위해 천막을 자진 철거하며 협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보수≠친미
새로운 개념


공화당 조원진 공동대표는 지난달 청계광장서 열린 당 최고위원회의서 남북미 회동을 두고 “대한민국 국민의 한사람으로 참담함을 금할 길이 없다”며 “통미봉남의 시대가 열렸다”고 평가했다.

<행동하는 자유시민>의 공동대표인 이언주 무소속 의원도 “정작 비핵화는 아무 진전도 없다”고 지적하며 남북미 회동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냈다. 하지만 트럼프정부는 암묵적으로 핵보유국인 북한을 인정하고, 비핵화의 범위를 스몰딜에 의한 핵동결로 전략을 전환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본인의 재선을 위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행보는 반드시 한국 보수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불편한 진실 속, 보수 세력 내에서도 미국에 대한 의존을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보수=친미’ 프레임이 서서히 깨지고 있는 셈이다.
 

▲ 악수 나누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사진공동취재단

펜앤마이크 정규재 대표는 유튜브서 “트럼프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보수 내에서 여러 견해가 있지만, 보수가 트럼프나 미국에 의존하지 않는 올바른 노선을 하루빨리 정립해 움직여야 한다”며 보수 세력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쇼’라는 평가도 있다. 미국을 계속해 신뢰하며 따르자는 입장으로 풀이된다. 보수단체 관계자는 “북한을 중국으로부터 떼어내 친미국가로 만들려는 전략”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한국 때리는
반일 종족주의

김기호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는 “미국과 대한민국은 저마다의 국익이 있고 미국이 반드시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며 “특히 자신의 재선 가능성 등 경제적 논리로 협상에 임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성향을 봤을 때 한국과 이해관계가 들어맞지 않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보수층이 딜레마에 빠졌다고 볼 수 있지만 성조기를 버리는 등의 행동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한미관계를 해칠 뿐”이라며 “한미 방위비 분담금 인상 등의 문제서 우리의 어떤 스탠스가 국익에 도움이 될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거 미국과 함께 일본은 북한에 각을 세우는 보수진영의 우방국이었다. 일본과 반공이라는 가치관을 함께 공유하는 보수진영이 ‘친일’ 프레임에 쉽게 씌이는 이유기도 하다. 하지만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 노선에 이어 일본과의 최근 무역 전쟁에 대해 보수진영내 의견이 분분하면서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일부 보수진영은 한일 무역 갈등의 원인을 아베정권의 잘못보다는 문재인정부의 외교적 실책으로 꼽고, '한국 때리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본의 최근 조치는 경제보복이 아니며, 작년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이 부당하다며 일본 편을 든 것이다. 지난 8일 엄마부대는 “문정권은 한일 관계를 악화시키면서 대한민국 경제를 망가뜨리고 있다”며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여 일본하고 싸우느냐”고 주장해 국민적인 공분을 샀다.

최근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가 낸 <반일 종족주의> 역시 일본에 대한 보수진영의 엇갈린 시선을 극명히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 전 교수는 뉴라이트의 대표적 인사로 꼽히며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한 인물이다. 책에선 식민지배와 친일 청산, 일본군 위안부, 독도 문제 등을 다뤘다. 필자들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 노동자는 강제동원된 것이 아니며 일본에 대한 ‘로망’에 의해 자발적으로 일본에 건너갔음을 주장하고, 토지조사사업으로 토지를 대량 수탈한 점도 사실이 아니라고 적시했다.

‘모든 게 문 탓’ 프레임
정부 외교 실책에 집중

이를 두고 자유한국당(이하 한국당) 장제원 의원은 SNS에 “<반일 종족주의>를 읽고 난 뒤 심한 두통과 모욕을 느낀다”며 “국민을 우민(愚民)으로 여기고 있다. 우민이 된 국민으로서 격한 모욕을 느낀다”고 밝혔다. 이어 “지식인의 용기로 포장된 역사 자해 행위”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댓글에는 장 의원의 의견에 반하는 일부 보수 성향 사람들의 비난 댓글이 잇따라 달리면서 장 의원은 곤욕을 치뤄야 했다.

한국당 홍준표 전 대표 역시 자신의 SNS에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을 읽어보니 이건 아니다 싶은데 왜 이 책을 보수 유튜버가 띄우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보수, 우파들 기본 생각과도 어긋나는 내용이라고 보여진다”고 썼다.
 

▲ 군사분계선 넘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사진공동취재단

극우 성향 만화가인 윤서인이 “실제 진실은 이러한데 그 책의 이런 부분은 이러이러해서 문제다. 명확한 근거와 논리로 말씀해주시면 좋겠다”고 반박하자 홍 전 대표는 “그 책을 읽고 독후감을 적었는데 달려드는 것을 보니 좌파들보다 더 하다”며 불편한 기색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보수진영 내에서 일본을 두고 벌어지는 입장 차에 대해 한 보수단체 관계자는 “아베의 헛된 망상에 대해서 좌우는 없다고 생각한다”며 “아베정권에 죄송하다고 하는 분들도 계시던데 그건 그분들 생각”이라며 선을 그었다.

트럼프 가고
아베 오나

지난 14일 국내 대표적 보수단체인 한국자유총연맹은 아베 정권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자유총연맹은 진보인사로 꼽히는 함세웅 신부를 초청해 첫번째 발언자로 내세우며 진영 간의 논리서 벗어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함 신부는 “350만 자유총연맹 회원 모든 분들이 뜻을 모아 5000만 국민들이 한뜻으로 일본을 도덕적으로 꾸짖고 아베가 회개할 수 있도록 기도드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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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