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 서른셋의 반란 (3)꿈

사라진 님

허균을 <홍길동전>의 저자로만 알고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선시대에 흔치않은 인물이었다.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당시 천대받던 불교를 신봉하기도 했다. 사고방식부터 행동거지까지 그의 행동은 조선의 모든 질서에 반(反)했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같을 수 없었던 그는 기인(奇人)이었다. 소설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허균의 기인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파격적인 삶을 표현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그의 의지 속에 태어나는 ‘홍길동’과 무릉도원 ‘율도국’.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조선시대에 21세기의 시대상을 꿈꿨던 기인의 세상을 마음껏 느껴볼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다.
 

말을 마친 허균이 비에 흠뻑 젖은 옷을 벗어 삼복에게 주었다.

옷을 받아 든 삼복이 어디서 구해왔는지, 보송보송한 옷 한 벌을 허균에게 건넸다.

“나리, 나리의 뜻이 정녕 그러하시다면….”

“이 놈아, 그게 나의 뜻이냐. 네 놈의 주둥아리가 그리 원하는 일이니 내가 어떻게 마다할 일이더냐.”  

“네! 나리도 참….”


목욕재계

삼복이 자신의 입을 손으로 한 번 비벼대고는 쭈뼛거렸다. 

“이놈아, 게서 목욕하는 거 구경하려고 그러느냐?”

“그건 구경해서 뭐한데요.”

“그런데 왜 그러고 있느냐 말이다. 이놈아.”

삼복이 갑자기 뭔가 생각나는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참 깜빡했네. 나리, 급히 다녀오겠습니다.”


“절대로 터지지 않게 조심해서 다룰 일이야.”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삼복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삼복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허균은 주위를 살펴보았다.

휑하니 터진 객사의 한 모퉁이에 마련된 목욕 장소가 그런 대로 아늑했다.

비록 여기저기 틈새가 벌어져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살핀다면 영락없이 속속들이 보여주어야 할 판이었으나 그런 대로 사람들의 시선을 가릴 만했다.

허균이 바가지에 물을 떠서 머리에서 기울였다.

비와 다를 바 없는 같은 물이었건만 이상하리만치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물을 한 바가지 떠서 이번에는 머리가 아닌 자신의 가운데로 기울였다.

그곳에서 짜릿한 기분이 일어나더니 서서히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매창아, 나의 월중항아야.”

막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이었다. 아련하게 들려오는 그 소리에 눈을 뜨고 귀를 곧추세웠다.

잠시 후 다시 창호지로 바른 방문 틈 사이로 애절하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매창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초롱으로 다가갔다. 

초롱에 불을 켜고 가만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슴을 스쳐 지나가는 손길에 하얀 살이 시선에 들어왔다.

작은 가슴이 심하게 뛰고 있었고 온몸이 붉게 물들어가는 듯 달구어지고 있었다.

크게 심호흡하고 조심스럽게 방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야심한 시간에 뉘신지요!”


목소리의 주인공이 자신이 오매불망하는 연인임을 확신한 매창의 목소리에 원망과 그리움의 회한이 묻어 있었다.

“매창아, 나의 월중항아야!”

삼복을 보내고 목욕재계하는 허균
매창이 애타게 찾는 사람은 누구?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급히 방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어둠 속에 당당히 서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방에서 흘러나가는 불빛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확인하자 격한 기운이 서러움으로 바뀌어갔다.

“나리, 소녀 여기 있나이다!”

매창이 맨발로 어둠 속으로 뛰어나갔다.

거의 종이 한 장 차이의 간격을 두고 매창이 얼음처럼 굳어졌다.

그러기를 잠시, 쓰러지듯이 사내의 널따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그 사내에게서는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차라리 목석이라 표현해도 좋을 만큼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고개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불빛 사이로 움푹 파인 볼이 시선에 들어왔다.

매창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그 얼굴로 향했다.

“나으리, 어찌 이리 야위셨는지요. 나리의 그리움도 소녀만하였던가 보옵니다. 어서 드시지요.”

순간 어둠 속 남자의 손이 매창의 손을 떼어냈다.

“아니다. 네가 내게서 가져간 마음을 가지러 왔다.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어서 내어놓아라!”

“무슨 말씀이옵니까, 마음을 내어놓으라니요. 나리께서 제게 주신 그 마음은 이미 제 마음이 삼킨 지 오래되었나이다. 어찌 이제 와서 내놓으라 하시는지요.”

“밤마다 네가 와서 그 마음을 가져가지 않았느냐!”

그리 말하는 사내의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더 이상 그 실체에 대해 미덥지 못했던지 사내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초췌한 모습, 이렇다 할 표정 하나 없는 촌은 유희경이 매창의 손을 잡고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방으로 이끌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촌은이 다짜고짜 매창의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다.

손이 잠시 스치는 것 같더니 바로 매창의 가슴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매창은 촌은이 그리도 서두르는 이유를 알 만했다. 

자신의 사무침과 같은 이유 때문이라 생각하고 가만히 그에게 몸을 맡기며 행동을 주시했다.

그러나 촌은은 옷을 벗기는가 싶더니 갑자기 매창의 가슴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휘젓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잠시 후 자신의 가슴 속에서 살이 토실토실 오른 보름달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매창이 의아한 시선으로 촌은과 보름달을 번갈아 보았다.

촌은의 행동도 행동이려니와 느닷없이 자신의 가슴 속에서 보름달은 또 웬 것이란 말인가.

“보아라, 나의 마음을 밤마다 와서 가져가더니 이렇게 살이 토실토실 올랐구나.”

촌은이 그 달을 가슴에 품더니 급히 열려진 방문을 통해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매창은 옷고름이 풀린 채 촌은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허공을 휘적거릴 뿐 아무 것도 스치지 않았다.

“나리! 나으리!”

오매불망 그리던 연인을 그대로 보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급히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묘한 일이었다.

닿을 듯 닿을 듯 보이는 촌은과의 거리가 자꾸 멀어지고 있었다. 그를 놓칠세라 한층 더 빨리 뒤를 따랐다. 

자나깨나 잊지 못했던 연인이 매창의 처절한 몸부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을을 벗어나더니 산으로 방향을 잡았다.

마을을 벗어나자 숲길이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길게 펼쳐져 있었다. 

다시 한 번 매창이 촌은을 부르며 손을 뻗었다.

한순간 그 손이 촌은에게 닿았다 싶었는데, 잡힌 것은 바짝 마른 나무 가지였고, 그것에 손이 닿자마자 하얀 피가 솟구쳤다.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서는데 촌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만치 가고 있었다. 

요상한 꿈

그 모습을 바라보자 마치 몸이 굳은 듯 발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사라져가는 촌은의 모습을 바라보며 시선을 자신의 가슴으로 주었다.

보름달이 빠져나간 그 자리에 휑하니 구멍이 나 있었고 그 구멍에서 하얀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나으리! 어찌 제게 이러십니까. 어찌….”

매창은 흐느끼고 있었다. 아니, 절규에 가깝도록 울부짖으며 흐르는 하얀 피를 두 손으로 막고 있었다.

한참을 울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일어나 고개를 들었다. 그곳은 숲이 아닌 바로 자신의 방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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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