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세의 골프 인문학> 영국의 위대한 삼두마차 골퍼들

영국이 골프 전성기를 맞이하던 19세기 말,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골프 3인방이 동시대에 함께 나타났다. 존 헨리 테일러, 해리 바든, 제임스 브레이드 3명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위대한 삼두마차’(THE GREAT TRIUMVIRATE)라고 불렀다. 

로마시대 케사르와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의 삼두정치처럼 이들 3명의 골퍼는 1894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14년까지 21년간 무려 16차례의 디 오픈 우승을 번갈아 가면서 나눠 가졌다. 그중 으뜸이 해리 바든이었다.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지대한 공을 세운 그는 현대 골프의 선구자이며 ‘해리 바든 그립’으로도 불리는 오버래핑을 고안해낸 골퍼였다. 

해리 바든

21세기 현재에도 널리 사용되는 바든 그립은 왼손 검지 위에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올려놓는 형태이다. 1870년 영국과 프랑스 해협 사이의 저시섬에서 태어난 그는 20살 되던 해 골프채를 짊어지고 당시 골프의 전투장으로 불렸던 스코틀랜드로 무작정 입성했다. 1893년 디 오픈에 처녀 출전했으나 우승자와 22타나 뒤져 실망하곤 자신의 스윙을 가다듬으며 훗날을 기약한다.

존 테일러

존 테일러는 1888년 약관 17세의 나이로 프로 데뷔 첫해에 디 오픈에 출전, 34년간 스코틀랜드 골퍼가 우승한 전례를 깨고 최초의 잉글랜드 출신 우승자가 된 혜성 같은 골퍼였다. 타고난 킬러였던 그는 중원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을 물리치며 영국 최고수라는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895년 해리 바든과 존 테일러 두 고수는 마침내 요크셔골프장의 프로 대항전에서 마주쳤다. 팬들의 지대한 관심 속에 벌어진 맞대결에서 예상을 뒤엎는 이변이 벌어졌다. 테일러에게 5홀을 뒤지던 상황에서 바든이 마지막까지 쫓아가 동점을 만들었고, 다음 날 36홀 플레이오프에서 4타 차로 테일러를 이겨버린 것이었다. 

테일러는 바든의 스윙을 지켜보면서 그가 자신과 동시대를 함께할 최고의 골퍼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비록 프로 대항전에서는 패했지만 1894, 1895년 디 오픈에서 2연패를 하면서 바든과 숙적관계를 팽팽하게 유지했다. 1년 뒤 1896년 디 오픈 대회장. 2만여명의 갤러리들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떠오르는 다크호스인 바든이 지난해 프로 대항전에서는 테일러를 이겼지만, 아직은 테일러가 우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 최고의 디 오픈에서도 바든은 예상을 깨고 우승을 하는 이변을 일으켰다. 

이에 영국은 “잉글랜드의 섬 출신 촌놈이 우승을 했다”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회가 끝난 뒤 테일러는 “이제껏 나를 망신 준 유일한 골퍼가 바든이었다”고 말했다. 바든은 이후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1914년을 포함, 디 오픈 6회 최다 우승으로 명성을 떨쳤다.

테일러 역시 비록 동시대에 바든이라는 복병을 만났지만, 당대 최고수답게 디 오픈에서 4차례나 우승을 거머줬다. 당시의 시대 상황에 따라 바든과 테일러는 미국에도 진출, 미국프로골프협회인 PGA의 탄생에도 일조했다.

제임스 브레이드

마지막 선수는 제임스 브레이드로 185센티미터의 장신에서 뿜어져나오는 장타가 당대 일품이었다. 세인트 앤드루스 출신의 정통 스코틀랜드인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골프 연습을 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결국 브레이드는 골프 연습장이 아닌 런던의 목공소 견습생으로 보내졌다.


브레이드는 목공소의 조수로 일하면서 다행히 일요일에는 골프를 칠 수 있었기 때문에 독학으로 틈틈이 골프 실력을 다졌다. 

세인트 앤드루스 태생 특유의 천부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브레이드는 16세부터 프로 수준의 실력을 보였다. 그는 24세의 늦은 나이에 프로에 입문했고 30세가 넘은 1901년에야 처음으로 디 오픈에서 우승을 한 늦깎이였지만, 10년 동안 총 5차례나 오픈 타이틀을 차지하면서 위대한 3인방 중 한 명이 됐다. 배멀미 때문에 미국 진출을 싫어한 그는 ‘최고로 성공한 골퍼’라는 칭호를 받았다.

20세기 초반 미영 양국 간 주요 교통수단은 여객선이었다. 10여년 전부터 미국을 왕래하던 해리 바든은 미국인들에게도 위대한 골퍼로 명성이 자자하던 터였다. 1912년 4월10일 유명한 타이태닉호가 영국에서 건조되어 처녀 출항을 하던 날이었다. 미국에서 열리는 초청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바든의 특실이 예약돼있었다. 

“영광입니다. 바든씨. 새로 건조된 타이태닉의 탑승객들은 기대에 부풀어 있습니다. 바든씨도 그 배에 타는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라고 예약 당시 친절했던 선박 직원에게 연락이 온 것은 출항 사흘 전이었다. 미국 입국을 위해서는 누구나 결핵반응검사 엑스레이를 첨부해야 하는데 해리의 병원기록카드에 결핵 소견이 나와 입국이 거부됐다는 것이다.

심한 결핵을 앓던 그는 미국 체류 중에도 치료를 지속했기에 결핵이 다 나은 줄 알았다. 하지만 2주 전 부터 병세가 악화되어 장기간의 여행이 불가능해진 것이었다. 부득이 바든은 그해 4월에 있을 미국에서의 모든 대회를 취소해야 했고 타이태닉호의 승선도 취소될 수밖에 없었다.

1894~1914년 21년간 무려 16차례
‘디 오픈’ 우승 번갈아 가면서 나눠

“해리, 이것 보게 큰일 났네.” 집에 누워 있던 해리에게 골프 친구인 테일러가 헐레벌떡 찾아왔다. 타이태닉이 침몰됐다는 신문을 들고 온 것이었다. 1912년 4월14일 항해 중이던 타이태닉호가 거대한 빙상에 부딪쳐 2000여명의 승객 대부분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요란한 뱃고동 소리와 함께 전 영국인들의 자부심을 한 몸에 안은 채 처녀 출항한 타이태닉호가 승객들과 함께 바다 속으로 수장되는 20세기 최악의 침몰 사고를 당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아침에 한 차례 결핵으로 피를 조금 쏟은 해리는 머리가 빙빙 도는 현기증을 느꼈다.

타이태닉의 승선이 취소되는 바람에 20세기 영국의 전설이었던 해리 바든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그의 스윙은 특이했다. 숙적 테일러는 바든의 스윙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바든의 스윙은 볼을 때릴 때 사려 깊은 포즈로 너무도 쉬운 스윙을 한다. 좁은 어드레스로 좁은 스탠스를 유지하며 고요하게, 아무런 힘의 느낌도 없이, 눈에 거슬리는 동작이 한 순간도 없이, 마치 세상을 이해하고 관대한 아량을 베푸는 것처럼, 그리고 자신이 위대한 골퍼라는 자만심은 전혀 없으면서 무의식의 세계로 가는 듯한 부드러운 스윙을 한다.” 

고향에서는 그를 ‘그레이 하운드’(GREY HOUND)라고 불렀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그를 ‘스타일리스트’(STYLIST)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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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 올린 ‘2차 계엄’ 수사 큰 그림

닻 올린 ‘2차 계엄’ 수사 큰 그림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내란 특검팀이 2차 계엄 의혹에 대한 실마리를 풀기 시작했다. 비상계엄 선포 다음 날인 지난해 12월4일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핵심이다. 법무부와 민정수석실 간 교감과 이날, 군 수뇌부의 움직임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재구성 중인 특검팀은 윤석열 전 대통령을 재소환할 방침이다. 내란 특검팀(특별검사 조은석)은 비상계엄 선포 이후의 상황을 재구성해 왔다. 법무부와 민정수석실의 역할은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고 있다. 특히 2차 계엄 논의 여부는 여전히 의혹에 그치고 있다. 박성재 전 법무부 장관과 김주현 전 민정수석이 무엇을 위한 법률을 검토했는지가 포인트가 될 전망이다. 안가 회동 정조준 특검팀은 지금까지 12·3 내란이 어떻게 준비됐는지에 대해 수사력을 집중했다. 북풍 공작과 평양 무인기 침투 작전, 국군정보·방첩사령부의 움직임 등이 상당 부분 사실로 확인됐다. 내란 이후의 상황을 수사하기 시작한 특검팀은 지난달 24일 오전 10시 박 전 장관을 소환 조사했다.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를 받는 박 전 장관은 13시간가량 조사를 받고 귀가했다. 박 전 장관은 내란 당일 대통령 집무실에서 계엄 선포 계획을 가장 먼저 들은 국무위원 중 한 명이다. 이후 법무부로 돌아와 실·국장 회의를 열고 검찰국에 ‘합동수사본부 검사 파견 검토’ 지시를 내렸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계엄 당일 법무부 출입국본부에 출국금지팀을 대기시키라고 지시한 혐의도 적용됐다. 계엄 이후에는 정치인 등 수용을 위해 교정본부에 수용 여력 점검 및 공간 확보를 지시한 혐의도 있다. 특검팀은 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로 그가 지난해 12월3일 오후 11시쯤 대통령실에서 정부과천청사로 이동하면서 통화한 내역을 확보했다. 박 전 장관이 통화한 인물은 임세진 전 검찰과장, 배상업 전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장, 신용해 전 교정본부장, 심우정 전 검찰총장 등이다. 임 전 과장은 박 전 장관과의 통화를 마치고 검사·수사관 인사를 담당하는 실무진 2명에게 전화를 걸었고, 배 전 본부장은 출국금지·출입국 관련 담당자들에게 연락했다. 신 전 본부장은 김문태 전 서울구치소장과 연락을 취했다. 박 전 장관은 이후 간부 회의를 열어 관련 논의를 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후 다음 날 한상대 전 검찰총장과 연락하기도 했다. 한 전 총장은 퇴직 검사 모임인 검찰동우회 회장으로 윤석열 전 대통령과 탄핵 당시 가장 많이 연락한 인물이다. 국회 계엄 해제 요구안 의결 이후에는 김 전 수석과 비화폰으로 통화한 것으로 조사됐다. 특검팀은 두 사람이 2차 계엄 등 후속 대책을 논의했다고 보고 있다. 박 전 장관 측은 김 전 수석에게 포고령에 문제가 있으며 국회가 의결했으니 국무회의를 신속히 소집해 계엄을 해제해야 한다고 전했다는 입장이다. 박성재·김주현 곧바로 2차 계엄 법률 검토? 용산 CCTV 속 최측근들 메모 후 문건 만지작 특검팀은 박 전 장관이 ▲계엄사령부 산하 합동수사본부 검사를 파견하라고 검찰국에 지시 ▲출입국본부 ‘출국금지팀’ 대기 지시 ▲교정본부 수용 여력 점검 및 공간 확보 지시 등을 추진했다고 판단한다. 조사를 마친 박 전 장관은 “제가 한 일에 대해 소상하게 다 말씀드렸다”며 “통상적인 업무 수행에 대한 다른 평가를 하는 것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모든 내용을 상세하게 말씀드렸다”고 했다. 이어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지속적으로 특검법의 위헌성에 대해 지적을 했었는데, 이 부분이 현재 특검법에도 시정되지 않은 채 시행되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그 점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어떤 내용을 (특검에) 말했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의문이 제기되는 모든 점에 대해 상세히 말씀드렸다”고 답했다. ‘혐의를 전면 부인하는지’ 묻자 “나는 항상 업무를 했을 뿐”이라고 했다. ‘5급 이상 간부들에게 비상대기를 지시했다’는 주장에는 “부당한 지시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구치소장 연락 지시’ 관련 질문에는 “질문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수용 지시가 계엄과 관련됐느냐’는 질문에는 “누구에게도 체포·구금하라는 지시를 한 사실이 없다”고 답변했다. 특검팀은 윤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 선포 직전 국무회의를 열기 위해 일부 국무위원을 용산 대통령실로 소집했을 때의 CCTV 영상도 확보했다. 박 전 장관은 대통령실 대접견실에서 A4 용지에 직접 내용을 메모하고 특정 문건을 들여다봤다고 한다. 특검팀은 그가 윤 전 대통령 등으로부터 문건 형태로 계엄 이후 법무부가 해야 할 조치 등을 지시받고 현장에서 이를 직접 정리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다. 앞서 계엄 선포 당일 대통령실에 모인 일부 국무위원 등은 윤 전 대통령으로부터 계엄 이후 조치 사항이 담긴 문건을 직접 전달받았다. 최상목 전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계엄 이후 가동할 비상입법기구 예산 편성 등을 지시받았고,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은 <경향신문> 등 언론사에 단전·단수 조치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지시를 한 사실 없다” 조태열 전 외교부 장관은 ‘공관을 통해 대외 관계를 안정화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다. 박 전 장관 측은 윤 전 대통령으로부터 개별 지시 문건을 받지 않았고 통상적인 절차에 따라 법무부에 지시를 내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지난달 24일 특검 조사에서도 A4 용지에 메모했는지 등에 대해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 전 장관 측은 이날 “해당 CCTV 장면을 보여달라”는 취지의 의견서를 특검에 제출했다. 특검팀이 김 전 수석을 소환한 건 지난 7월 초다. 그는 지난해 12월4일 서울 삼청동에 위치한 대통령 안전가옥(안가)에서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 박 전 장관, 이완규 전 법제처장 등과 계엄 관련 법률 검토를 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모두 윤 전 대통령과는 고교·대학 및 검찰 동기나 선·후배로 윤석열정부 최고위직 법률가들이다. 지난해 말부터 정치권에서 “비상계엄 수사 등 법률적 대응 방안 또는 제2의 내란 모의 가능성을 논의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자 이들은 국회와 경찰 조사에서 “연말에 얼굴 보자는 취지였다”(박성재 전 장관), “신세 한탄이나 하자는 자리였고, 법률을 검토할 겨를도 없었다”(이상민 전 장관)며 의혹을 부인했다. 그러나 검찰과 경찰은 이 자리에 한정화 전 법률비서관이 동석한 사실을 확인했다. 주변 CCTV 등 안가 회동 참석자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한 전 비서관의 존재를 인지하고 소환 조사까지 진행했다. 특검팀은 삼청동 안가 모임 성격을 ▲비상계엄 선포 절차 사후 보완 ▲대통령 탄핵 대비 법적 대응 논리 개발 자리 등으로 보고 있다. 특히 내란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나온 관련자 진술의 위법성을 면밀히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장관과 김 전 수석, 이 전 처장 등은 안가 회동 이후 휴대전화를 바꿨다. 류혁 전 법무부 감찰관은 지난 3월 <일요시사>와의 인터뷰에서 “윤 전 대통령 최측근으로 꼽히는 김주현 전 민정수석, 박성재 전 법무부 장관 등 밑에서 일하던 검찰 고위 관계자들은 대통령을 ‘운명 공동체’로 생각한다”며 “박 전 장관이나 김 전 수석에 대해서는 검찰이 적극적으로 수사하지 않았다. 이들에 대해 합리적이고 납득할 만한 수사 결론이 나오지 않으면 국민이 받아들이겠나. 모든 의혹이 해소될 때까지 그 사람들에 대한 수사는 계속돼야 한다. 이들은 죽을 때까지 수사선상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증거 이미 폐기했다? 특검팀은 과거 검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본부가 작성했던 수사보고서도 확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검찰 특수본 수사보고서의 제목은 ‘2차 비상계엄 가능성에 대한 의혹 등 정리 보고’다. 수사보고서에는 “12·4 국회에서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통과되고 난 직후, 윤 대통령이 계엄사령부 상황실로 찾아가 김용현 국방부 장관에게 ‘왜 국회의원들을 잡지 않았느냐’ ‘내가 다시 계엄을 할 테니 그때는 철저히 준비해서 국회부터 장악하라’라고 지시한 정황”이 있다고 적혔다. 해당 의혹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에서 처음 제기했다. 민주당은 지난해 12월6일 비상 의원총회에서 윤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 2차 발령을 준비했다는 정황을 공개했다. 검찰이 이 같은 민주당의 의혹 제기와 관련해 수사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검찰은 수사보고서에 “계엄사령관인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은 윤 대통령, 김용현 장관과 함께 합참 지휘통제실 내 별도의 방에 들어갔다고 국방위 현안 질의에서 답한 바 있으나 대화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발언했으나 박 총장이 답변한 날인 12월5일은 윤 대통령의 위와 같은 발언이 공개되지 않은 시점”이라며 박 전 총장에 대해 조사 필요가 있다고 적었다. 검찰은 수사보고서에서 시민단체와 언론사 보도 등 2차 계엄 의혹과 관련한 의혹 확인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육군 복수 부대에 지휘관 휴가 통제 지침이 내려졌고 비상계엄 선포 이후 경계 태세가 유지되고 있다는 의혹과 계엄 둘째 날 지방 공수여단의 서울 진입 계획이 있었다는 육군특수전사령부 간부의 언론사 인터뷰 등이 그 근거다. 검찰은 윤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곽종근 전 특수전사령관에게 ‘국회 문을 열고 들어가 의사당 내 의원들을 밖으로 이탈시킬 것’이라고 동일한 명령을 내렸지만, 지시가 이행되지 않아 2차 계엄이 준비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12월4일 새벽 중요…검도 “수사 필요” 인정 자료 이미 사라졌나…용산 PC 전부 포맷 확인 검찰은 수사보고서에 “윤 대통령의 ‘국회의원 이탈 명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자 김 장관에게 위와 같은 발언(왜 국회의원들을 잡지 않았느냐)을 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어 보이고, 이와 더불어 ‘추가 계엄 선포’와 관련된 발언을 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이므로 관련 내용 수사 필요성 있음”이라고 적었다. 특검팀은 대통령실 고위 간부들이 조직적으로 2차 계엄 관련 자료를 폐기했다고 보고 있다. 지난달 18일 정진석 전 대통령실 비서실장을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한 특검팀은 정 전 실장에게 계엄 이후의 상황을 따져 물은 것으로 파악됐다. 정 전 실장은 불법 계엄 전후 윤석열 전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좌했다. 그는 계엄 선포 직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 있었다. 국무위원은 아니지만 계엄 선포 전 국무회의에 신원식 전 국가안보실장과 함께 참석했다. 이튿날 새벽에 계엄 해제 국무회의가 열리기 전, 윤 전 대통령이 합동참모본부 전투통제실에 머물 때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 정 전 실장은 지난해 12월4일 국회가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의결한 이후 윤 전 대통령, 박 전 총장, 김 전 장관 등과 함께 합동참모본부 전투통제실 내 결심지원실에 함께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그는 국회에서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의결된 후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와도 통화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앞서 “지난해 12월4일 오전 2시58분쯤 정 전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국회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정부에 도착했음을 확인하고 정부의 신속한 계엄 해제 조치를 촉구했다”고 밝혔다. 정 전 실장은 대통령실 윗선이 계엄 증거를 조직적으로 은폐했다는 의혹에도 연루돼있다. 특검은 지난 4월 대통령실 컴퓨터(PC) 전체 초기화 계획이 정 전 실장의 지시로 실행됐을 가능성을 살펴보고 있다. 특검팀은 앞서 별도 전담팀을 꾸려 정 전 실장 관련 의혹을 수사해 왔다. 특검팀은 이날 정 전 실장을 상대로 계엄 당시 국무회의와 대통령실 상황, 추 전 원내대표와의 통화 경위 등을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간이 부족하다 특검팀은 박 전 총장도 참고인 신분으로 재조사했다. 앞서 박 전 총장은 계엄 당시 계엄사령관으로서 불법 포고령을 발령한 혐의(내란중요임무종사) 등으로 구속 기소됐다. 박 전 총장도 국회가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의결한 뒤 윤 전 대통령, 김 전 장관 등과 합참 결심지원실에 함께 있었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