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기획> 현직 판·검사 25명 군면제 사유 대공개

  • 박창민 기자 cmp@ilyosisa.co.kr
  • 등록 2019.07.22 09:54:50
  • 호수 12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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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검찰 수장도 ‘신의 아들’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차관급 판·검사 191명 중 25명이 질병·가사사정·독자 등의 사유로 병역을 면제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병무청이 집계한 일반인 평균 면제 비율보다 4배나 높은 수치다. <일요시사>가 병역사항공개 대상인 법원·검찰의 고위직들을 전수 조사한 결과, 서울대 법대→징병검사 연기→질병판정 병역면제→사법시험 합격 등의 패턴이 여러 차례 발견됐다. 특히 다수의 판·검사들이 근시로 병역을 면제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 일요시사는 병역 공개 사항 대상인 차관급 판검사들의 병역이행 여부를 전수 조사했다.

법조인 출신 고위공직자 병역 문제는 인사청문회의 단골메뉴다. 이번 윤석열 검찰총장의 인사청문회서도 병역면제가 도마에 올랐다. 그동안 인사청문회에서는 매번 법조인 출신 장관 후보자들의 병역 기피 의혹이 불거졌다.

100명 중
13명 통과

향후 장관급 인사에 발탁돼 인사청문회장에 설 수 있는 현직 고위직 판·검사들은 병역을 충실히 수행했을까. <일요시사>가 병역사항공개 대상인 차관급 판·검사들을 전수조사한 결과 191명(판사 150명, 검사 41명) 중 25명(판사 21명, 검사 4명)이 병역을 면제받은 것으로 나타났다(최근 한 달 사이 퇴직한 고위직 판·검사 포함. 실제 법원·검찰 병역공개 대상자의 숫자는 조금 상이할 수 있음).

고위직 판·검사의 병역면제 비율은 13%다. 병무청이 집계한(2007∼2016년) 일반인 평균 면제 비율 2.8%보다 4배 이상 높은 수치다. 전체 고위공직자 병역면제 비율 8.4%(2016년 기존)를 웃돈다. 

고위직 판·검사의 병역면제 사유는 질병(17명)·독자(6명)·가사사정(2명) 등인 것으로 나타났다. 질병으로 병역이 면제된 차관급 부장판사는 13명, 검사장은 4명이다. 주요 병명은 근시 등 시력 문제 12명(판사 9명·검사 3명), 폐결핵 2명(판사 1명·검찰 1명)이다. 이외에 고위공직자 판사 중 골수염 1명, 질병 미공개 2명이 병역을 면제받았다. 


그동안 시력 문제는 병역면제의 단골 소재로 등장했다. 인사청문회서 특히 율사 출신 후보자들이 근시 등으로 군대가 면제돼 병역회피 의혹을 샀다. 판사 출신인 김명수 대법원장이 근시, 이기택 대법관이 고도근시, 권순일 대법관이 고도난시,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부동시 등으로 병역을 면제받아 인사청문회서 곤혹을 치렀다. 

윤석열 검찰총장도 부동시로 병역이 면제돼 인사청문회장서 병역회피 의혹이 제기됐다. 지난 8일, 윤석열 인사청문회서 바른미래당 오신환 의원은 “부동시로 운전면허 취득이나 계단 오르내리기를 못할 정도로 일상생활서 불편함이 많다고 하는데, 언제부터 부동시였는지” 등을 질의했으며 “부동시로 (병역을)면제받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질타했다. 

<일요시사>가 공직자 병역사항공개 자료와 법조인 인명사전 등을 분석한 결과 질병으로 병역을 면제받은 판·검사들에게서는 일정한 패턴이 반복됐다. 대부분 서울대 법대 출신이었으며, 1차 징병검사 때 현역병 판정을 받으면 입영을 연기했다. 이후 병을 앓거나 수술을 받고 2~3차 징병검사 때 병역을 면제받은 사례가 여러 차례 발견됐다.

더불어 사법고시를 합격한 그해 병역면제 판정을 받은 경우도 더러 있었다. 

청문회 매번 병역 기피 의혹 불거져
군대 안 간 차관급 율사들 이유 보니…

다음은 질병 등으로 병역면제를 받은 고위직 판·검사들의 명단이다. 

▲김명수 대법원 대법원장(근시)= 1979년 병역판정 검사를 연기했다. 1980년 병역검사서 근시 판정을 받아 병종 전시근로역 질병 또는 심신장애 등으로 분류돼 병역을 면제받았다. 이후 김 대법원장은 1983년 제25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사법연수원 2년을 거쳐 3년 후 서울지법 북부지원 판사로 법관 생활을 시작했다. 1959년생, 부산고등학교(1977년), 서울대학교 법학과(1981년), 제25회사법시험합격(1983년), 제15기 사법연수원 수료(1985년), 서울지법 북부지원 판사(1986~1988년)


▲강동명 대구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안구진탕)= 1983년 병역판정 검사 연기를 했다. 강 수석부장판사는 1985년 3급 현역병 입영 대상이었지만, 입대를 미뤘다. 2년 뒤인 1987년 안구진탕 판정을 받아 병역을 면제받았다. 이후 그는 1989년 제31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며, 1992년 대구지법 판사로 임관했다. 1964년생, 경북사대부속고등학교(1982년), 서울대학교 사법학과(1986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수료(1988년), 제31회 사법시험 합격(1989년), 제21기 사법연수원 수료(1990~1992년), 대구지법판사(1992~1995년)

조직 수뇌부
줄줄이 미필 

▲김시철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근시)= 1984∼1986년 병역판정 검사 연기를 했다. 김 부장판사는 1987년 병역검사서 근시 판정을 받아 5급 전시근로역 질병 또는 심신장애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병역면제 판정을 받은 그해 김 부장판사는 제29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을 거쳐 1990년 서울지법 판사로 법관 생활을 시작했다. 1965년생, 서울 광성고등학교(1984년), 서울대학교 사법학과(1988년), 미국 U.C. Berkeley (LL.M.)(1998년), 제29회 사법시험합격(1987년), 제19기 사법연수원 수료(1988~1990년), 서울형사지법 판사(1990~1992년) 

▲김주호 부산고등법원 부장판사(근시)= 1984년 병역판정 검사 연기를 신청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87년 근시로 5급 전시근로역 질병 또는 심신장애 판정을 받아 병역을 면제받았다. 그는 1990년 제3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며, 1993년 부산지법 판사가 됐다. 1965년생, 부산 낙동고등학교(1984년), 서울대학교 법학과(1988년), 제32회 사법시험 합격(1990년), 제22기 사법연수원 수료(1991~1993년), 부산지법 판사(1993년)
 

▲ 판검사들의 병역면제 현황

▲강경구 부산고등법원 부장판사(질병 미공개)= 1986년 병역판정 검사 연기를 했다. 강 부장판사는 1987년 5급 전시근로역으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공직자 병역 사항에 따르면 강 부장판사의 질병은 미공개인 것으로 나타났다. 1992년 제34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는 1995년부터 청주지법 판사로 근무했다. 1966년생, 대전 충남고등학교(1984년), 서울대학교 사법학과(1988년), 서울대학교 법학 석사(1993년), 제34회 사법시험 합격(1992년), 제24기 사법연수원 수료(1993~1995년), 청주지법 판사(1995~1999년)

▲박형준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근시)= 1988∼1989년 병역판정 검사 연기를 했다. 이후 1990년 근시로 전시근로역 질병 또는 심신장애 판정을 받아 병역이 면제됐다. 그는 1년 뒤 제23기 사범시험에 합격했으며, 사법연수원 2년을 거쳐 1994년 수원지법 판사로 임관했다. 1969년생, 부산진고등학교(1988년), 서울대학교 법학과(1992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 석사(1998년), 제33회 사법시험 합격(1991년), 제23기 사법연수원 수료(1992~1994년), 수원지법 판사(1994~1996년)

191명 중…질병·독자·가사사정
일반인 병역면제 비율의 4배 이상 

▲이대경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무수정체)= 1978∼1979년 병역판정 검사를 연기했다. 그 다음 해 이 부장판사는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83년 제13기 사법연수원을 수료했다. 같은 해 그는 병역판정 검사서 안구 질환인 무수정체 판정을 받아 병역이 면제됐다. 이후 1983년부터 서울민사지법 판사로 첫 법관 생활을 시작했다. 1958년생, 충암고등학교(1979년), 서울대학교 법학과(1981년), 제22회 사법시험합격(1980년), 제13기 사법연수원 수료(1981~1983년), 서울민사지법 판사(1983~1985년) 

▲이제정 특허법원 부장판사(부동시)= 1985년 병역판정 검사 연기를 했다. 이 부장판사는 1986년 병역판정 검사를 2차 연기했다. 1987년 부동시 판정을 받아 병종 전시근로역 질병 또는 심신장애로 분류돼 병역이 면제됐다. 이후 1992년 제34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 2년을 거친 뒤 그는 1995년부터 부산지법 울산지원 판사로 근무했다. 1966년생, 청주 운호고등학교(1984년), 서울대학교 경영학과(1988년), 서울대학교 경영학 석사(1991년), 제34회 사법시험 합격(1992년), 제24기 사법연수원 수료(1993~1995년), 부산지법울산지원판사(1995~1997년) 

▲이규진 서울고법 부장판사(근시)= 대학교 2학년이었던 1982년 근시 판정을 받아 병역을 면제받았다. 이 부장판사는 병역면제를 받은 뒤 4년 후 1986년 제28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89년부터 서울지법 의정부지원 판사로 법관생활을 시작했다. 1962년생, 서울 인창고등학교 (1980년), 서울대학교 법학과(1984년), 미국 NYU 법학(LL.M.) 석사(1997~1998년), 제28회 사법시험 합격(1986년), 제18기사법연수원수료(1987~1989년), 서울지법의정부지원판사(1989~1991년)

▲이기택 대법원 대법관(근시)= 1979년 근시 판정을 받아 병종 전시근로역 질병 또는 심신장애로 분류돼 병역이 면제됐다. 이 대법관은 대학교 3학년이던 1981년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85년 서울민사지법 판사로 임관했다. 1959년생, 경성고등학교(1978년), 서울대학교 법학과(1982년),미국하버드Law School 국제조세과정 연수(1991년),제23회 사법시험 합격(1981년), 제14기 사법연수원 수료(1984년), 서울민사지법 판사(1985~1987년)

▲이흥구 대구고등법원 부장판사(폐결핵 활동성)= 1982년 병역판정 검사 연기를 했다. 2년 뒤 이 부장판사는 폐결핵 활동성 미정으로 5급 판정을 받아 병역이 면제됐다. 1990년 제3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며, 1993년 서울지법 남부지원이 초임지다. 1963년생, 통영고등학교(1982년), 서울대학교 공법학과(1989년), 제32회 사법시험 합격(1990년), 제22기 사법연수원 수료(1991~1993년), 서울지법 남부지원 판사(1993년) 


‘로얄 코스’
공식 통했나

▲정형식 서울회생법원 법원장(만성골수염)= 1981∼1983년 3차례 병역판정 검사를 연기했다. 정 법원장은 1984년 3급 현역병 입영 대상자로 분류됐지만 군대를 미뤘다. 1986년 5차 병역 검사서 만수골수염 판정을 받아 병역이 면제됐다. 정 법원장은 입영 연기를 한 1985년 제27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사법연수원 2년을 거쳐 1988년부터 수원지법 성남지원 판사로 근무를 시작했다. 1961년생, 서울고등학교(1980년), 서울대학교 법학과(1985),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 석사(1987년), 제27회 사법시험 합격(1985년), 제17기 사법연수원 수료(1986~1988년), 수원지법 성남지원 판사(1988년) 

▲최인규 광주고등법원 수석 부장판사(질병 미공개)= 1983년 5급 판정을 받아 병역이 면제된 최 수석 부장판사의 질병은 밝혀지지 않았다. 1989년 대학교를 졸업한 뒤 1991년 제3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94년 서울지법 서부지원 판사로 법관생활을 시작했다. 1964년생, 광주 조선대부속고등학교(1983년), 서울대학교 사법학과(1989년), 제33회 사법시험 합격(1991년), 제23기 사법연수원 수료(1992~1994년), 서울지법서부지원판사(1994~1996년) 

▲박성진 대전고등검찰청 차장검사(활동성 폐결핵)= 대학교 1학년이었던 1983년 병역판정 검사를 연기했다. 이후 1986년 병역판정 검사서 활동성 폐결핵(경도) 판정을 받아 병역이 면제됐다. 6년 뒤인 1992년 제34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는 1995년 수원지검 검사로 임관했다. 1963년생, 부산 동성고등학교(1983년), 한양대학교 법학과(1992년), 제34회 사법시험 합격(1992년), 제24기 사법연수원 수료(1993~1995년), 수원지검 검사(1995~1996년)

입학→연기→질병→면제→사시
비슷한 코스 ‘서초동 지름길’

▲윤석열 검찰총장(부동시)= 1980∼1981년 병역판정 검사 연기를 했다. 윤 후보자는 다음 해인 1982년 부동시 판정을 받아 병역이 면제됐다. 1991년 제3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며, 1994년 대구지검서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1960년생, 충암고등학교 (1979년), 서울대학교 법학과(1983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 석사(1988년), 제33회 사법시험 합격(1991년), 제23기 사법연수원 수료(1992~1994년), 대구지검 검사(1994~1996년)


▲장영수 수원고등검찰청 차장검사(근시)= 1986년 병역판정 검사를 연기했다. 장 차장검사는 3년 뒤인 1989년 근시(-7.0D)로 5급 전시근로역으로 분류돼 병역을 면제받았다. 1992년 제34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며, 1993~1995년까지 사법연수원 2년을 거쳤다. 1998년 청주지검이 첫 발령지다. 1967년생, 대원고등학교(1985년), 고려대학교 법학과(1990년), 고려대학교 대학원 법학 석사 졸업정보 없음, 제34회 사법시험 합격(1992년), 제24기 사법연수원 수료(1993~1995년), 청주지검 검사(1998년)

▲한찬식 서울동부지방검찰청 검사장(근시)= 1987∼1988년 병역판정 검사를 2차례 연기했다. 이후 1989년 근시 판정을 받아 병역이 면제됐다. 같은 해 한 검사장은 제31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 2년을 거쳐 1992년 서울지검서 첫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1968년생, 성남고등학교(1986년), 서울대학교 사법학과(1990년),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교 법학 (LL.M.) 석사(1998년), 제31회 사법시험 합격(1989년), 제21기 사법연수원 수료(1990~1992년), 서울지검 검사(1992~1994년)

<일요시사>가 질병 등으로 병역이 면제된 법원·검찰 고위직들을 분석한 결과 서울대 법대→징병검사연기→질병으로 병역면제→사법연수원 합격 등의 패턴이 여러 차례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이런 패턴이 반복되는 걸까.

법조계에 따르면 1970∼1990년대 당시 사법고시를 통과하지 못한 법조인들에게 군 복무는 기피 대상이었다.

실제로 고위직 판·검사 191명 중 15명(판사 5명, 검사 10명)만 현역으로 입대해 병장으로 만기 제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병역면제 25명을 제외한 나머지 161명가량은 군 장교 출신이거나 상근으로 병역을 마친 것으로 확인된다. 

대부분 시력
단골 의혹

전직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대부분 현직 판·검사들은 사법고시를 합격하고 법무 장교로 군 복무를 한다. 그렇지 못한 사시 준비생들에게 일반 병사로 군 복무를 하라는 건 3년을 버리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어 “더구나 서울대 법대 출신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다. 이들이 부조리한 군생활을 어떻게 견디느냐. 당시 이들 사이서 군대를 미루고 사시에 합격한 후, 어떻게든 현역으로 가지 않으려고 애쓰던 문화가 있던 것도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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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