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떠나 월북한 사람들

그들은 왜 북으로 갔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최근 남북관계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만큼 평화모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반도는 분단국가. 월북과 탈북이라는 단어에 사회가 술렁이는 것은 여전하다. 지난 6일 한 인사가 월북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일요시사>가 월북 인사들을 조명해봤다.
 

남한판 황장엽으로 불렸던 최덕신 전 외무장관의 차남 최인국씨가 월북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북한 선전매체 <우리 민족끼리>는 지난 7일 류미영 전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의 아들 최인국 선생이 공화국에 영주하기 위해 6일 평양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최덕신과 류미영은 부부 관계로 지난 1986년 월북했다.

부모 따라?
갑자기 왜?

최씨는 평양국제비행장서 발표한 도착 소감을 통해 민족의 정통성이 살아 있는 진정한 조국, 공화국의 품에 안기게 된 지금 저의 심정을 무슨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전했다.

이어 가문이 대대로 안겨 사는 품, 고마운 조국을 따르는 길이 곧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언을 지켜드리는 길이고 그것이 자식으로서의 마땅한 도리기에 늦게나마 공화국에 영주할 결심을 내리게 됐다고 밝혔다.


최씨의 부친 최덕신은 박정희정권서 외무장관과 서독 주재 대사로 활동했으나 박 전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류미영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한 뒤 월북했다. 최덕신은 북한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천도교청우당 위원장 등으로 활동했고, 류미영도 남편 사망 후 천도교청우당 위원장직을 이어받았다.

류미영이 사망한 후 천도교청우당 위원장직은 비어 있는 상태다.

최씨는 2001년 이후 가족 상봉과 성묘 등의 목적으로 총 12회에 걸쳐 북한을 방문했다. 이전 방북 때는 정부 승인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방북 신청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통일부 관계자는 최씨의 방북 경과, 가족 동행 여부 등 구체적인 경위에 대해 “현재 관계기관서 파악 중”이라고 밝혔다.

최씨는 천도교 교인이다. 천도교 최고지도자인 송범두 교령은 지난 9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최씨는 교단서 큰 직책을 맡지도 않았고 열심히 교회 활동을 하지 않은 교인이었지만 대한민국 법을 어겼다는 점에서는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최씨의 아버지나 그의 처가를 보면 북한에 갈 수 있는 바탕이 다른 어떤 사람보다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최씨 “북한서 살겠다”
부모님도 1986년 넘어가

기자간담회에 동석한 임형진 천도교 종학대학원 원장은 최인국 선생은 천도교 산하기관인 동학민족통일회 대외협력위원장을 맡으며 누구보다 북쪽과 많이 접촉했다”며 우리 추측으로는 (청우당) 위원장을 맡을 것이다. (북한이) 위원장 자리를 주려고 한 게 아닌가 싶다고 추측했다.

임 원장은 북한에선 대를 이어 자리를 맡는데 청우당 위원장 자리가 최씨 집안 자리라며 류미영씨가 사망한 이후로 위원장 자리는 공석으로 뒀다고 그 근거를 들었다.
 

▲ 최덕신 류미영 부부 ⓒSBS

통일부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월북자에 대한 통계는 따로 없다. 지난 8일 이상민 통일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서 최씨와 같은 월북자 통계를 파악하고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 대변인은 현실적으로 정부가 개별 국민의 소재지를 다 파악해서 일일이 확인한다거나 그러지는 않고 있다고 전햇다.

이어 헌법상 거주이전의 자유가 있는 우리나라의 체제 특성에 따라 국민들의 행적을 추적해서 월북 여부를 확인한다든지, 통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실제로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다만 작년 같은 경우에는 북측서 두 차례에 걸쳐 불법 입북한 우리 국민 2명을 송환한 적은 있다인도주의 차원서 돌려보낸다는 취지의 언급은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이런 상황 때문에 월북 인사의 면면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최근 독립유공자 서훈 문제로 논란의 중심에 섰던 약산 김원봉 선생이 대표적인 월북 인사로 꼽힌다. 영화 <암살>서 배우 조승우가 김원봉 역할을 맡아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1898년 경남 밀양서 태어난 김원봉은 19193·1운동이 시작될 무렵 만주로 넘어가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했고, 이후 의열단을 만들어 단장이 됐다. 당시 의열단은 친일파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밀양경찰서 투탄사건, 조선총독부 투탄사건 등 굵직한 거사가 의열단의 작품이었다.

통계 없어
추적 안 해

김원봉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한 사실은 명백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은 분단 이후의 월북 행적 때문이라는 게 중론이다. 그는 1945년 귀국 이후 여운형 등과 좌우 합작을 위해 힘쓰다 1948년 북한으로 넘어간다.

김원봉의 월북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친일경찰이자 악질 고문자로 알려진 노덕술에게 뺨을 맞고 모멸감을 느껴 북으로 갔다는 말도 있다.

1948년 남북협상 당시 월북한 김원봉은 그해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됐고, 9월에는 북한 초대 내각의 국가검열상에 올랐다. 6·25전쟁 당시에는 군사위원회 평북도 전권대표로 활동했다. 19525월에는 국가검열상서 노동상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는 6·25전쟁에서 공훈을 세웠다는 이유로 북한 정부로부터 훈장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에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 북한 정부서 고위직을 지냈으나 1958년 김일성의 옌안파 제거 때 숙청됐다. 그의 죽음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돌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김원봉에 대한 논란은 지난달 6일 문재인 대통령의 추념사 때 불거졌다. 문 대통령은 추념사를 낭독하면서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되며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다고 언급했다.

이후 김원봉에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주는 것이 맞느냐를 두고 정치권서 논란이 불거졌다.
 

▲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포상심사 기준에 따르면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 및 적극 동조한 것으로 판단되거나 정부 수립 이후 반국가 활동을 한 경우 포상서 제외하고 있다. 청와대는 이 조항을 근거로 김원봉 선생은 서훈, 훈격 여부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로 잘 알려져 있는 박태원 선생도 한국전쟁 중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경위와 동기는 확실하지 않다. 프랑스 칸 영화제서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을 탄 봉준호 감독이 박태원의 외손자다.

190912월 서울서 태어난 박태원은 14세 보통학교 시절 소설 <입학>으로 주목을 받았다. 1933년에는 이태준, 김기림, 김유정 등과 함께 ‘9인회로 활동했다. 이때 쓴 작품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청춘송> <천변풍경> 등이다.

잊힌 작가들
다시 부활해

월북 이후에는 장편소설 <갑오농민전쟁> 3권 중 1권을 출판하는 등 주로 계급교양을 위주로 한 작품 활동에 주력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태원은 19867월 세상을 떠났다. 남한의 가족들은 1964년 사망 신고를 냈지만 실제 삶은 22년 뒤에 끝난 것이다. 1988년 이후에야 그의 소설들이 복원됐다.


박태원과 함께 활동했던 상허 이태준 선생도 대표적인 월북 작가로 꼽힌다. 1904년 강원도 철원서 태어난 이태준은 박태원과 함께 9인회로 활동했다. 1947년 북한으로 넘어간 그는 1950년대 중반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태준은 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라고 불릴만큼 탁월한 문학적 성과를 낸 것으로 유명하다. 1930년대 시는 정지용, 소설은 이태준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이태준은 월북 이력 때문에 남한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작가였다.

그러다 2000년대 초 상허학회가 결성되면서 그의 문학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해졌고, 2004년에는 탄생 100주년 기념문학제가 열렸다. 올해 1월에는 이태준의 삶과 문학을 조명하는 평설이 발간되기도 했다.

영화인들 중에서도 해방 이후 북한으로 넘어간 인사들이 있다. 월북 영화인을 언급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이름은 문예봉 선생이다. 문예봉은 일제강점기 조선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다. <춘향전> <인생항로> 등에서 주연을 맡아 한국적 미모와 연기력으로 해방 직전까지 ‘3000만의 연인이라는 예명으로 불렸다.

문예봉은 해방 후 극작가인 남편 임선규와 좌익연극계에 가담했다가 1948년 월북했다.
 

▲ 김원봉

월북 이후 문예봉은 남한에선 잊혔지만 북한에선 그를 체제선전에 적극 활용했다고 전해진다. 실제 문예봉은 1949년부터 북한의 첫 극영화 <내고향><빨치산 처녀> <금강산 처녀> 등 수십편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1952년 그는 북한 최초로 공훈배우가 됐다. 연극의 김선초, 무용의 최승희와 함께 북한 공연예술을 이끄는 트로이카로 이름을 날렸다. 문예봉 외에도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에 출연했던 주인규, 남궁운이 해방 후 북한으로 넘어갔다.

해방 후 작가·영화인들 월북
해금 이후 남한서 조명받아

1949년 강태무, 표무원 등은 대대 병력의 부하를 데리고 월북했다. 당시 표무원은 소령 계급으로 강원도 지역 모 사단 예하 대대장으로 복무하다 소령 강태무 등과 함께 600명의 국군 장병을 이끌고 북한으로 갔다.

표무원은 월북 후 북한군 연대장과 재북의거자 정치학교 소장, 평안북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현역 중장(남한의 소장 계급에 해당)으로 6.25전쟁 역사관 격인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강사로 활동해왔다. 그는 2006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북풍 논란을 불렀던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도 대표적인 월북 인사로 꼽힌다. 1929년생인 오씨는 1989년부터 1994년까지 24대 천도교 교령을 지냈다. 오씨는 19952월 이미 월북한 류미영 천도교 중앙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북한에 있는 본처와 딸을 만나려고 했지만 방북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 19976월에도 방북 허가를 받으려 했지만 무산됐다.
 

▲ 영화 암살 포스터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발기인으로 정치권에 몸담았던 오씨는 19977월 민주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상임위원으로 위촉됐지만 한 달 후 돌연 월북했다. 당시 부인에게 바람이나 쐬고 오겠다. 동해안인데 며칠 더 있다가 갈 테니 그렇게 알라고 말한 뒤다. 그는 19978월 김포공항서 미국 LA로 나가 북측의 안내를 받아 중국 베이징을 거쳐 열차 편으로 평양에 도착했다.

199712월 대선을 앞두고 오씨는 당시 새정치국민회 김대중 후보에게 대선 필승을 바라며 대통령이 되면 금세기 내 통일이 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또 대선 6일 전에는 북한 방송에 출연해 김 후보의 통일 방안이 북한의 고려연방제와 유사하다고 말하면서 북풍 논란이 불기도 했다.

집단 월북
북풍 논란

북한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고문, 북한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으로 활동한 오씨는 201291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소식을 전한 조선중앙통신은 오씨가 평안남도 회창군 대곡리서 태어났고, 해방 후 천도교 종리원 교화부장을 지냈다고 소개했다. 이어 오익제는 (남조선)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적극 투쟁했고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이 무참히 유린당하고 파쇼 독재가 살판치는 썩고 병든 남조선 사회에 환별을 느끼고 19978월 공화국의 품에 안겼다고 전했다.


<jsja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탈북했다 다시 북한에… 납치 논란 불거져

탈북자가 재입북한 사례도 있다. 20141월 탈북한 임지현씨다. 임씨는 201612TV조선 <모란봉 클럽> 등에 출연하면서 얼굴을 알렸다. 특히 남한 남성과 북한 여성의 가상결혼 생활을 다룬 <남남북녀>에서는 배우 김진과 가상 부부로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그런데 20177월 북한 선전매체 <우리 민족끼리> 영상에 임씨가 전혜성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영상에는 한복 차림의 전혜성과 남성 1, 여성 1명이 함께 나왔다.

북한 체제 비판하다가 돌연

전혜성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성은 “20141월 탈북했고 지난달 돌아왔다. 평안남도 안주시서 부모님과 살고 있다한국서 임지현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종편 등 국내 방송에 출연해 북한 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해오던 임씨가 돌연 재입북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러 논란이 불거졌다.

납치인지 자의적인 재입북 인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당시 경찰은 임씨의 재입북이 자의적인 것으로 판단했다. <>

 

<기사 속 기사> ‘대 이어 월북’ 할아버지가 김일성 스승

최근 월북한 것으로 알려진 최인국의 할아버지이자 최덕신 전 외무장관의 아버지인 최동오는 만주 독립운동 시절 김일성 북한 주석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최동오는 해방 이후 월북했고, 최덕신의 북한 망명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전해졌다.

최덕신이 월북했을 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는 등 고위직을 보장받고, 사망했을 때도 북한 당국이 국가장을 치러준 배경에는 아버지 최동오의 영향이 있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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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최대 변수 송영길, 왜?

여당 최대 변수 송영길, 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전 대표가 돌아왔다. 3년의 옥살이 끝에 무죄를 선고받은 만큼 명분과 서사를 모두 거머쥐었다. 두 팔 벌려 환영했지만 송 전 대표를 바라보는 정청래 지도부의 고심이 깊은 모양새다. 앞으로 치러질 각종 선거의 변수가 된 송 전 대표의 쓰임새는 무엇일까? 지난달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송영길 전 대표의 무죄가 확정됐다. ‘돈봉투 사건’을 주도하고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으나 검찰이 상고를 포기하면서다. 송 전 대표는 “돈봉투 의혹 사건, 2심 무죄에 이어 최종 무죄가 확정됐다”며 “긴 시간 함께 걱정해 주시고, 흔들림 없이 믿어주시며 끝까지 곁을 지켜주신 많은 분의 성원에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이어 “진실은 결국 가려지지 않았다. 이제 더 단단해진 마음으로, 책임 있게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강조했다. 돌아온 큰형님 송 전 대표는 지난 2021년 민주당 전당대회 경선을 앞두고 6000만원의 상당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지역 본부장에게 현금이 든 돈봉투를 건네고, 민주당 윤관석 의원을 통해 국회의원에게 나눠줄 돈봉투 6000만원을 제공하는 데 개입한 혐의 등을 받았다. 아울러 그의 외곽 후원 조직인 ‘사단법인 먹고사는문제 연구소(이하 먹사연)’를 통해 기업인 7명으로부터 후원금 명목의 불법 정치자금 총 7억6300만원을 챙긴 혐의 등도 있다. 당초 1심 재판부는 송 전 대표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으나 서울고법 형사1부(부장판사 윤성식)는 이를 뒤집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원심 판단이 돈봉투 사건과 먹사연 사건 범죄 사실의 관련성을 인정한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먹사연 사건 관련 공소 사실의 경우 압수물이 영장 없이 증거로 사용됐다”고 판단했다. 송 전 원내대표의 복귀는 화려했다. 무죄가 선고된 날 서울고등법원 현장에는 민주당 강득구·김교흥·김상욱·박선원·부승찬·전현희 의원 등 10여명이 모였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 역시 자신의 SNS에 “송 대표의 무죄 판결을 축하한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다”며 “검찰 전횡을 바로잡는 검찰개혁에 더 매진하겠다”고 작성했다. 이 판결로 송 전 대표는 ‘정치 검찰의 희생양’이라는 강력한 명분을 얻었다.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도 논평을 통해 “정치 검찰의 서슬 퍼런 칼날을 이겨내고 돌아오신 송 전 대표를 환영한다”며 “이재명정부 성공을 향해 연대와 통합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송 전 대표는 이날 민주당 인천시당을 찾아 복당 신청서를 제출했고, 그달 27일 최종 의결됐다. 정 대표는 “송 전 대표의 복당을 진심으로 환영한다”며 “앞으로 민주당 발전과 이정부의 성공을 위해 큰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요청드린다”고 말했다. 또한 정 대표는 “탈당 후 당의 요청이 아니면 다른 경선에서 20% 감산되는 불이익을 받는데, 당 대표인 제가 요청해 (감산이 없도록) 처리하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인천시당에 복당을 신청한 것이 서울시당으로 이첩됐던 것을 중앙당 당원자격심사위원회로 보내라고 지시해 복당했다”고 말했다. “정치 검찰 피해자” “이재명의 은인” 정점 찍은 서사…‘송 사용법’ 고심 송 전 대표는 2021년 전당대회서 당의 주류였던 친문(친 문재인)계를 꺾으며 비주류에서 주류로 거듭났다. 그런 그에게는 이재명 대통령과 끈끈한 연결고리가 있다. 같은 해 치러진 민주당 대선 경선 과정서 두 사람의 관계가 본격화됐고, 송 전 대표가 당시 이재명 경기도지사를 밀어줬다는 이른바 ‘이심송심’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대선에서 패배한 이재명 후보를 국회로 이끈 인물 역시 송 전 대표다. 그는 2022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인천 계양을 지역구에서 사퇴했고, 그때 이 후보가 보궐선거를 통해 당내에 입성했다. 당시 그는 이 후보의 전략공천을 환영하는 입장을 밝히며 “당의 단단한 결정과 이재명 (당시) 상임고문의 결단이 당원과 지지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됐다. 이 상임고문은 우리 민주당과 현재 한국 정치에 큰 자산”이라고 치켜세우며 “이번 지방선거 승리의 큰 구심점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 후보가 국회 입성에 성공하고 당 대표직을 따내는 등 정치인으로서 성공가도를 걸었던 반면, 송 전 대표는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배하며 정치적 치명상을 입게 됐다. 이때부터 민주당 지지자 사이에서는 송 전 대표가 ‘자신을 희생하고 후배에게 지역구를 물려준 정치인’이라는 인식으로 남았다. 2023년 두 사람에게 본격적인 위기가 찾아왔다. 돈봉투 의혹 수사가 송 전 대표를 덮쳤고, 이재명 대표는 거리를 두는 전략을 택했다. 민주당은 당 전체의 타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송 전 대표의 자진 탈당을 압박했고, 송 전 대표 역시 당에 부담을 주지 않겠다며 당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3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은 송 전 대표가 자신의 서사를 어떻게 활용할지 이목이 쏠린다. 과거의 영광을 누렸던 그가 복귀하자 현 수장인 정 대표의 셈법만 복잡해졌다는 해석이 나온다. 지방선거, 전당대회, 나아가 다음 대선까지 송 전 대표가 차후 진행될 모든 선거의 변수가 됐다. 6월 치러지는 지방선거 및 재보궐선거가 첫 번째 관문이다. 복당 이후 송 전 대표는 자신의 지역구였던 계양을로 이사오면서 이곳에서 치러질 보선에 출사표를 던질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계양구는 송 대표의 정치적 고향으로, 지난 2000년 해당 지역에서 당선돼 16대 국회에 입성한 뒤 17·18·20·21대 총선까지 내리 승리했다. 이때 쌓은 조직력을 기반으로 2010 민선 5기 인천시장에도 당선됐다. 굴리는 주판알 인천 계양에 출마가 유력한 김남준 청와대 대변인과의 교통정리 여부가 변수다. 송 전 대표는 YTN과의 인터뷰서 김 전 대변인도 계양을 출마 의사를 밝힌 것에 대해 “당 지도부가 잘 판단하고 결정할 것”이라며 “지역구라는 게 정치인들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고, 국민과 당원의 뜻이 중요하다. 당 지도부가 여러 가지를 검토해서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에게 지역구를 물려준 중진과 대통령의 최측근인 신인 정치인의 대결구도가 예상되는 만큼 시선은 지도부의 교통정리에 쏠렸다. 정 대표와의 신경전도 예상된다. 정 대표가 당 대표 연임에 도전할 것이란 관측이 우세한 가운데 송 전 대표가 국회에 입성하면 차기 당권을 노릴 것이란 관측이 나오면서다. 송 전 대표가 실제 당권에 도전할 경우 정 대표를 비롯해 ‘차출설’이 제기되는 김민석 총리와 함께 3파전 구도를 형성할 것으로 전망된다. 여론조사에서는 벌써 송 전 대표의 이름이 거론된다. 지난달 26일 <뉴스토마토>가 23일부터 24일까지 이틀간 만 18세 이상 전국 성인남녀 1034명을 대상으로 ‘민주당 8월 전당대회에서 다음 세 사람이 맞붙는다면, 누가 민주당을 이끌 차기 당대표로 적합하다고 보는지’를 묻는 말에 답변은 ▲정청래 대표 21.6% ▲송영길 전 대표 19.4% ▲김민석 국무총리 18.8%로 집계됐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0%이며 ARS(RDD) 무선전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응답률은 1.8%로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그동안 정 대표는 강경 개혁파로서 외연 확장성이 부족하다는 게 단점으로 지적돼 왔다. 정 대표의 강경 노선이 지지층 결집에는 효과적이지만, 중도층과 무당층을 포섭해야 하는 전국 단위 선거에서는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제기된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 대통령과 비슷한 중도·실용주의적 성향인 송 전 대표는 민주 당원의 또다른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이미 온라인 공간에서는 ‘뉴이재명’ 그룹이 송영길 역할론에 불을 지피면서 그의 존재감을 키워주는 상황이다. 거침없는 저격수 따라서 송 전 대표 본인이 나서지 않더라도 정 대표의 리더십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 정청래 VS 송영길 구도를 만드는 등 당내 경선을 앞두고 판이 깔릴 가능성이 제기된다. 결국 모든 권력투쟁의 종착지가 그렇듯 그가 2027년 치러질 대통령 선거에까지 영향을 미칠지 이목이 쏠린다. 송 전 대표는 복귀와 동시에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최근 친청(친 정청래)·친문으로 분류되는 김어준씨의 유튜브 채널 ‘뉴스공장’을 정면으로 비판하는가 하면, 코로나바이러스 백신을 두고 ‘대국민 사기’라며 문재인 전 대통령의 책임을 거론하기도 했다. 그는 한 라디오를 통해 ‘이재명 대통령 공소 취소 거래설’의 근원지인 ‘뉴스공장’을 향해 “괴물과 싸우다가 괴물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라”고 충고했다. 송 전 대표는 “(‘뉴스공장’에) 섭외를 받아도 안 나가고 싶다”며 “특정 언론 유튜브에 국회의원들이 줄 서서 알현하듯이 있는 모습이 좋은 건 아니다. 우리가 국민의힘에 대해서 고성국이나 전한길 비판하듯이 우리 스스로도 돌이켜볼 면이 있다”고 꼬집었다. 여기에 친명인 강득구 의원도 김씨의 방송에 출연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그에게 힘을 실었다. 강 의원은 “큰 틀에서 송 전 대표의 문제 제기에 뜻을 같이 한다”며 “(최근) 김씨는 김 총리의 미국 출장을 두고 ‘차기 주자 육성 프로그램처럼 보인다’고 해석했다. 해석은 자유이지만 다소 자의적인 판단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고 비판했다. 8월 전대 ‘정·송·김’ 3파전? 6월 지선·재보선 첫 번째 관문 코로나 백신 논란에 대해서는 조국혁신당(이하 혁신당) 조국 대표가 참전하면서 사태를 키웠다. 조 대표는 “송 전 대표는 두 가지 음모론을 여전히 믿고 주장하고 있다. 첫째, 극우 변희재가 주장한 최순실 태블릿 PC 조작론. 둘째, 코로나 백신 국가적 사기론”이라고 지적했다. 앞서 송 전 대표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최순실 태블릿PC 조작설’을 주장해 온 변희재씨와 손을 잡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 “(JTBC와 검찰, 특검이 태블릿 PC 조작을 통해 박근혜 탄핵 수사에 활용했다는 의혹이) 법률가인 제가 보기에도 일리 있는 주장이라 공감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조 대표의 부산 출마’ 필요성을 언급한 송 전 대표를 비판했다. 조 대표는 “최근 송 전 대표께서 느닷없이 저와 혁신당을 향해 ‘호남 이삭줍기 말고 영남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는데, 호남 출마자들이 어떻게 이삭이냐”며 “모욕과 폄훼”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혁신당 후보들은 지난 총선 시기에 송 전 대표가 손을 잡았던 극우 인사 변희재·최대집씨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들”이라며 다시 한번 송 전 대표의 과거 행적을 거론했다. 광폭 행보를 보이는 송 전 대표는 ‘뉴이재명 바람’에 올라탔다. 지난 15일 민주당 이언주 최고위원이 개최한 ‘뉴이재명 토론회’ 현장에 나타나 지지자와 인사를 나눴다. 송 전 대표의 축사가 끝나자 지지자들은 연신 “송영길”을 외치기도 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송 전 대표는 이 대통령이 쓸 수 있는 최고의 칼”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송 전 대표와 이 대통령, 두 사람은 혁신과 쇄신을 강조하는 등 성격이 비슷하다”며 “정부·여당에 타격을 입히는 ‘당정 갈등설’을 부인하는 것도, 논란을 만드는 것도 정 대표다. 이정부의 성공을 바라는 지지층이 봤을 때 이 대통령이 어떤 의중을 전달할 때 정 대표가 아닌 송 전 대표의 입을 빌리는 편이 쉬울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쏘리재명’ ‘쏘리영길’ 그러면서 “뉴이재명은 송 전 대표에 대한 부채 의식이 있다. 3년 동안 옥살이를 하게 했다는 미안함과 이 대통령에게 지역구를 물려준 일 등, 송 전 대표의 희생정신을 높게 평가할 것”이라며 “이런 여론이 확산하면 앞으로 치러질 모든 당내 선거에서 송 전 대표가 승산이 있다고 계산해 어떤 방식이든 (출마를) 결심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송영길 소나무당 어디로?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전 대표가 지난 2024년 옥중 창당했던 소나무당이 해체했다. 송 전 대표는 무죄를 선고받자 “소나무당을 해산하고 더불어민주당으로 복당하겠다”고 말했다. 소나무당 시도당위원장 협의회(이하 협의회)는 입장문을 내고 송 전 대표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협의회는 “송영길 대표의 소나무당 해산 및 더불어민주당 복당 천명은 바로 그 위임에 따른 책임 있는 정치적 결단”이라며 “이는 개인의 정치적 유불리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소나무당이 존재했던 이유와 역할을 다른 방식으로 완성해 나가겠다는 결정이라 우리는 이해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소나무당은 해산하지만,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정치적 신뢰와 연대의 경험은 각자의 자리에서 계속 이어질 것”이라며 “송 대표의 정치적 결단을 존중하며 그의 정치적 행보를 함께 지켜보고 응원하는 시민들과 새로운 방식의 역할을 모색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