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떠나 월북한 사람들

그들은 왜 북으로 갔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최근 남북관계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만큼 평화모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반도는 분단국가. 월북과 탈북이라는 단어에 사회가 술렁이는 것은 여전하다. 지난 6일 한 인사가 월북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일요시사>가 월북 인사들을 조명해봤다.
 

남한판 황장엽으로 불렸던 최덕신 전 외무장관의 차남 최인국씨가 월북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북한 선전매체 <우리 민족끼리>는 지난 7일 류미영 전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의 아들 최인국 선생이 공화국에 영주하기 위해 6일 평양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최덕신과 류미영은 부부 관계로 지난 1986년 월북했다.

부모 따라?
갑자기 왜?

최씨는 평양국제비행장서 발표한 도착 소감을 통해 민족의 정통성이 살아 있는 진정한 조국, 공화국의 품에 안기게 된 지금 저의 심정을 무슨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전했다.

이어 가문이 대대로 안겨 사는 품, 고마운 조국을 따르는 길이 곧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언을 지켜드리는 길이고 그것이 자식으로서의 마땅한 도리기에 늦게나마 공화국에 영주할 결심을 내리게 됐다고 밝혔다.


최씨의 부친 최덕신은 박정희정권서 외무장관과 서독 주재 대사로 활동했으나 박 전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류미영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한 뒤 월북했다. 최덕신은 북한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천도교청우당 위원장 등으로 활동했고, 류미영도 남편 사망 후 천도교청우당 위원장직을 이어받았다.

류미영이 사망한 후 천도교청우당 위원장직은 비어 있는 상태다.

최씨는 2001년 이후 가족 상봉과 성묘 등의 목적으로 총 12회에 걸쳐 북한을 방문했다. 이전 방북 때는 정부 승인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방북 신청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통일부 관계자는 최씨의 방북 경과, 가족 동행 여부 등 구체적인 경위에 대해 “현재 관계기관서 파악 중”이라고 밝혔다.

최씨는 천도교 교인이다. 천도교 최고지도자인 송범두 교령은 지난 9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최씨는 교단서 큰 직책을 맡지도 않았고 열심히 교회 활동을 하지 않은 교인이었지만 대한민국 법을 어겼다는 점에서는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최씨의 아버지나 그의 처가를 보면 북한에 갈 수 있는 바탕이 다른 어떤 사람보다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최씨 “북한서 살겠다”
부모님도 1986년 넘어가

기자간담회에 동석한 임형진 천도교 종학대학원 원장은 최인국 선생은 천도교 산하기관인 동학민족통일회 대외협력위원장을 맡으며 누구보다 북쪽과 많이 접촉했다”며 우리 추측으로는 (청우당) 위원장을 맡을 것이다. (북한이) 위원장 자리를 주려고 한 게 아닌가 싶다고 추측했다.

임 원장은 북한에선 대를 이어 자리를 맡는데 청우당 위원장 자리가 최씨 집안 자리라며 류미영씨가 사망한 이후로 위원장 자리는 공석으로 뒀다고 그 근거를 들었다.
 

▲ 최덕신 류미영 부부 ⓒSBS

통일부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월북자에 대한 통계는 따로 없다. 지난 8일 이상민 통일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서 최씨와 같은 월북자 통계를 파악하고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 대변인은 현실적으로 정부가 개별 국민의 소재지를 다 파악해서 일일이 확인한다거나 그러지는 않고 있다고 전햇다.

이어 헌법상 거주이전의 자유가 있는 우리나라의 체제 특성에 따라 국민들의 행적을 추적해서 월북 여부를 확인한다든지, 통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실제로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다만 작년 같은 경우에는 북측서 두 차례에 걸쳐 불법 입북한 우리 국민 2명을 송환한 적은 있다인도주의 차원서 돌려보낸다는 취지의 언급은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이런 상황 때문에 월북 인사의 면면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최근 독립유공자 서훈 문제로 논란의 중심에 섰던 약산 김원봉 선생이 대표적인 월북 인사로 꼽힌다. 영화 <암살>서 배우 조승우가 김원봉 역할을 맡아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1898년 경남 밀양서 태어난 김원봉은 19193·1운동이 시작될 무렵 만주로 넘어가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했고, 이후 의열단을 만들어 단장이 됐다. 당시 의열단은 친일파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밀양경찰서 투탄사건, 조선총독부 투탄사건 등 굵직한 거사가 의열단의 작품이었다.

통계 없어
추적 안 해

김원봉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한 사실은 명백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은 분단 이후의 월북 행적 때문이라는 게 중론이다. 그는 1945년 귀국 이후 여운형 등과 좌우 합작을 위해 힘쓰다 1948년 북한으로 넘어간다.

김원봉의 월북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친일경찰이자 악질 고문자로 알려진 노덕술에게 뺨을 맞고 모멸감을 느껴 북으로 갔다는 말도 있다.

1948년 남북협상 당시 월북한 김원봉은 그해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됐고, 9월에는 북한 초대 내각의 국가검열상에 올랐다. 6·25전쟁 당시에는 군사위원회 평북도 전권대표로 활동했다. 19525월에는 국가검열상서 노동상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는 6·25전쟁에서 공훈을 세웠다는 이유로 북한 정부로부터 훈장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에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 북한 정부서 고위직을 지냈으나 1958년 김일성의 옌안파 제거 때 숙청됐다. 그의 죽음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돌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김원봉에 대한 논란은 지난달 6일 문재인 대통령의 추념사 때 불거졌다. 문 대통령은 추념사를 낭독하면서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되며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다고 언급했다.

이후 김원봉에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주는 것이 맞느냐를 두고 정치권서 논란이 불거졌다.
 

▲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포상심사 기준에 따르면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 및 적극 동조한 것으로 판단되거나 정부 수립 이후 반국가 활동을 한 경우 포상서 제외하고 있다. 청와대는 이 조항을 근거로 김원봉 선생은 서훈, 훈격 여부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로 잘 알려져 있는 박태원 선생도 한국전쟁 중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경위와 동기는 확실하지 않다. 프랑스 칸 영화제서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을 탄 봉준호 감독이 박태원의 외손자다.

190912월 서울서 태어난 박태원은 14세 보통학교 시절 소설 <입학>으로 주목을 받았다. 1933년에는 이태준, 김기림, 김유정 등과 함께 ‘9인회로 활동했다. 이때 쓴 작품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청춘송> <천변풍경> 등이다.

잊힌 작가들
다시 부활해

월북 이후에는 장편소설 <갑오농민전쟁> 3권 중 1권을 출판하는 등 주로 계급교양을 위주로 한 작품 활동에 주력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태원은 19867월 세상을 떠났다. 남한의 가족들은 1964년 사망 신고를 냈지만 실제 삶은 22년 뒤에 끝난 것이다. 1988년 이후에야 그의 소설들이 복원됐다.


박태원과 함께 활동했던 상허 이태준 선생도 대표적인 월북 작가로 꼽힌다. 1904년 강원도 철원서 태어난 이태준은 박태원과 함께 9인회로 활동했다. 1947년 북한으로 넘어간 그는 1950년대 중반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태준은 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라고 불릴만큼 탁월한 문학적 성과를 낸 것으로 유명하다. 1930년대 시는 정지용, 소설은 이태준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이태준은 월북 이력 때문에 남한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작가였다.

그러다 2000년대 초 상허학회가 결성되면서 그의 문학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해졌고, 2004년에는 탄생 100주년 기념문학제가 열렸다. 올해 1월에는 이태준의 삶과 문학을 조명하는 평설이 발간되기도 했다.

영화인들 중에서도 해방 이후 북한으로 넘어간 인사들이 있다. 월북 영화인을 언급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이름은 문예봉 선생이다. 문예봉은 일제강점기 조선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다. <춘향전> <인생항로> 등에서 주연을 맡아 한국적 미모와 연기력으로 해방 직전까지 ‘3000만의 연인이라는 예명으로 불렸다.

문예봉은 해방 후 극작가인 남편 임선규와 좌익연극계에 가담했다가 1948년 월북했다.
 

▲ 김원봉

월북 이후 문예봉은 남한에선 잊혔지만 북한에선 그를 체제선전에 적극 활용했다고 전해진다. 실제 문예봉은 1949년부터 북한의 첫 극영화 <내고향><빨치산 처녀> <금강산 처녀> 등 수십편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1952년 그는 북한 최초로 공훈배우가 됐다. 연극의 김선초, 무용의 최승희와 함께 북한 공연예술을 이끄는 트로이카로 이름을 날렸다. 문예봉 외에도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에 출연했던 주인규, 남궁운이 해방 후 북한으로 넘어갔다.

해방 후 작가·영화인들 월북
해금 이후 남한서 조명받아

1949년 강태무, 표무원 등은 대대 병력의 부하를 데리고 월북했다. 당시 표무원은 소령 계급으로 강원도 지역 모 사단 예하 대대장으로 복무하다 소령 강태무 등과 함께 600명의 국군 장병을 이끌고 북한으로 갔다.

표무원은 월북 후 북한군 연대장과 재북의거자 정치학교 소장, 평안북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현역 중장(남한의 소장 계급에 해당)으로 6.25전쟁 역사관 격인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강사로 활동해왔다. 그는 2006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북풍 논란을 불렀던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도 대표적인 월북 인사로 꼽힌다. 1929년생인 오씨는 1989년부터 1994년까지 24대 천도교 교령을 지냈다. 오씨는 19952월 이미 월북한 류미영 천도교 중앙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북한에 있는 본처와 딸을 만나려고 했지만 방북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 19976월에도 방북 허가를 받으려 했지만 무산됐다.
 

▲ 영화 암살 포스터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발기인으로 정치권에 몸담았던 오씨는 19977월 민주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상임위원으로 위촉됐지만 한 달 후 돌연 월북했다. 당시 부인에게 바람이나 쐬고 오겠다. 동해안인데 며칠 더 있다가 갈 테니 그렇게 알라고 말한 뒤다. 그는 19978월 김포공항서 미국 LA로 나가 북측의 안내를 받아 중국 베이징을 거쳐 열차 편으로 평양에 도착했다.

199712월 대선을 앞두고 오씨는 당시 새정치국민회 김대중 후보에게 대선 필승을 바라며 대통령이 되면 금세기 내 통일이 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또 대선 6일 전에는 북한 방송에 출연해 김 후보의 통일 방안이 북한의 고려연방제와 유사하다고 말하면서 북풍 논란이 불기도 했다.

집단 월북
북풍 논란

북한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고문, 북한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으로 활동한 오씨는 201291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소식을 전한 조선중앙통신은 오씨가 평안남도 회창군 대곡리서 태어났고, 해방 후 천도교 종리원 교화부장을 지냈다고 소개했다. 이어 오익제는 (남조선)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적극 투쟁했고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이 무참히 유린당하고 파쇼 독재가 살판치는 썩고 병든 남조선 사회에 환별을 느끼고 19978월 공화국의 품에 안겼다고 전했다.


<jsja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탈북했다 다시 북한에… 납치 논란 불거져

탈북자가 재입북한 사례도 있다. 20141월 탈북한 임지현씨다. 임씨는 201612TV조선 <모란봉 클럽> 등에 출연하면서 얼굴을 알렸다. 특히 남한 남성과 북한 여성의 가상결혼 생활을 다룬 <남남북녀>에서는 배우 김진과 가상 부부로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그런데 20177월 북한 선전매체 <우리 민족끼리> 영상에 임씨가 전혜성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영상에는 한복 차림의 전혜성과 남성 1, 여성 1명이 함께 나왔다.

북한 체제 비판하다가 돌연

전혜성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성은 “20141월 탈북했고 지난달 돌아왔다. 평안남도 안주시서 부모님과 살고 있다한국서 임지현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종편 등 국내 방송에 출연해 북한 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해오던 임씨가 돌연 재입북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러 논란이 불거졌다.

납치인지 자의적인 재입북 인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당시 경찰은 임씨의 재입북이 자의적인 것으로 판단했다. <>

 

<기사 속 기사> ‘대 이어 월북’ 할아버지가 김일성 스승

최근 월북한 것으로 알려진 최인국의 할아버지이자 최덕신 전 외무장관의 아버지인 최동오는 만주 독립운동 시절 김일성 북한 주석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최동오는 해방 이후 월북했고, 최덕신의 북한 망명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전해졌다.

최덕신이 월북했을 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는 등 고위직을 보장받고, 사망했을 때도 북한 당국이 국가장을 치러준 배경에는 아버지 최동오의 영향이 있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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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춤 추는 이정현 마이웨이

칼춤 추는 이정현 마이웨이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이정현 공천관리위원장이 거침없이 칼을 휘두르고 있다. 주호영 국회부의장·김영환 충북도지사가 이 공관위원장의 칼에 희생됐다. 변방의 이방인이어서 휘둘러야 했던 칼의 운명은 반복되고 있다. 그는 왜 칼을 휘두르는 걸까? 국민의힘 이정현 공천관리위원장(이하 공관위원장)이 지난 13일 “여러 의견을 존중하는 과정에서 제가 생각했던 방향을 더는 추진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면서 사퇴했다가 이틀 후 번복했다. 이 공관위원장은 사퇴했던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이틀 후 또 번복 정치권 안팎에선 대체로 이 공관위원장의 갑작스러운 사퇴의 주요 원인으로 오세훈 서울시장과의 갈등을 주된 원인으로 거론했다. 오 시장은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절연에 소극적인 지도부 혁신 ▲혁신적인 선거대책위원회 조기 출범 등을 요구하면서 지방선거 공천 기간 내 후보 등록을 하지 않았다. 이 공관위원장의 사퇴 번복에는 장 대표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사퇴 번복 후 “장 대표가 지난 14일 공천 혁신을 완수해 달라면서 공천 관련 전권을 맡긴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밝혔다. 따라서 이 공관위원장의 사퇴는 대체로 ‘무력 시위’로 해석되고 있다. 결국 오 시장은 지난 17일 국민의힘 서울시장 경선 후보로 등록했다. 복귀한 이 공관위원장은 ‘장 대표가 부여한 공천 관련 전권’을 거침없이 휘둘렀다. 지난 16일에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회(이하 공관위)는 박형준 부산시장 공천 컷오프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박 시장을 컷오프하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을 단수공천하자”고 주장한 핵심은 이 공관위원장이었다. 그러자 부산에 지역구를 둔 국민의힘 의원들이 장 대표를 방문해 항의했고, 장 대표는 박 시장·주 의원 간 경선을 결정했다. 같은 날 공천이 날아간 현역 광역자치단체장은 김영환 충북도지사였다. 공관위는 김 지사를 컷오프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그저 “김 지사의 공적·업적을 부정·평가절하 하기 위한 게 결코 아니”라면서 시대 교체·세대 교체를 언급했다. 정치권에선 ▲만 70세 고령 ▲수뢰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는 등 사법 리스크 ▲재임 중 각종 발언 논란 등 대체로 김 지사의 약점이 컷오프의 실제 이유 아니겠느냐는 추측이 돌고 있다. 김 지사는 곧바로 “특정인을 두고 면접을 진행하다니 기가 막힌다”면서 일각에서 거론됐던 ‘국민의당 김수민 전 의원 충북도지사 후보 내정설’을 암시했다. 김 전 의원은 지난 2024년부터 1년 동안 충북 정무부지사를 지냈다. 김 지사는 지난 18일엔 서울남부지법에 공천 배제 효력 정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이어 다음 날 진행된 심문에서 “이 공관위원장이 김 전 의원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해서 출마 여부를 타진했다”며 “절차적 정당성이 파기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공관위는 이와 상관없이 지난 20일 김 지사를 제외한 경선 구도를 확정했다. 이 공관위원장은 국민의힘 대구시장 후보 공천과 관련해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공관위는 지난 22일 국민의힘 대구시장 후보 경선과 관련해 주호영 국회부의장·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을 공천에서 배제했다. 광주시장 출마 아닌 공관위원장 지방선거와 묶인 운명의 끝은? 대구시장 후보 경선에 대해선 한동안 “국민의힘 최은석 의원 공천이 사실상 내정된 게 아니냐”는 설이 돌아다녔다. 그러자 최 의원은 지난 21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 공관위원장은 공천 심사 면접에서 처음 만났다”면서 이를 강하게 부인했다. 주 부의장은 공천 배제에 크게 반발했다. 그는 공천 배제 가능성이 거론되던 지난 17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대구를 공천 실험장으로 삼으면 안 된다”며 “대구시장을 더불어민주당에 상납하려는 거냐”고 비판했다. 이어 “이 공관위원장은 대구의 자존심을 더 이상 짓밟지 말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주 부의장 공천 배제는 지난 22일 확정됐다. 그는 지난 25일 가처분 신청과 무소속 출마 가능성을 언급했다. 일각에서 의아하게 해석하는 지점은 유튜버 고성국씨 등 강경 보수 진영에서 강하게 지지했던 이 전 위원장이 공천에서 배제됐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추 의원이 국민의힘 대구시장 후보로 확정돼 의원직에서 물러나면, 이 전 위원장이 추 의원의 지역구 대구 달성 재보궐선거에 출마하는 게 아니냐”는 설이 나왔다. 반대로 “주 부의장이 무소속으로서 대구시장 선거에 출마하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주 부의장의 지역구인 대구 수성갑에 출마하는 것 아니냐”는 설도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친한(친 한동훈)계 일원으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박정하 의원은 지난 24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주 부의장의 공천 배제엔 감정이 어느 정도 반영돼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하지 않고선 해석이 잘 안 된다”며 “장 대표의 생각도 분명히 들어가 있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이어 주 부의장과 한 전 대표의 연대설에 대해서도 “한 전 대표가 보수 재건 후 당에 돌아오는 길을 찾아가는 길에 있어선 주 부의장의 선택 여하에 따라 모든 가능성을 다 열어 검토할 것이라고 본다”면서 연대설을 부정하진 않았다. 장 대표는 지난 23일 국민의힘 대구시당을 방문해 “공천 관련 모든 것은 당 대표인 제 책임”이라면서 공천 내정설에 대한 간접적인 의견을 밝혔다. 이어 “시민이 납득할 수 있는 경선을 치르겠다는 말씀을 드렸고, 당 대표로서 역할을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광역지방자치단체장 경선 상황·흐름에 대해선 “영남권 기성 중진과 반 장동혁 성향 인사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니냐”는 의문이 나오고 있다. 일각에선 장 대표와 이 곤공관위원장이 각각 ‘굿 캅’과 ‘배드 캅’으로 역할을 분담한다고 의심하고 있다. 의외의 연대설 이 공관위원장의 활동 방향을 놓고, 일각에선 그가 “사실상 장 대표의 칼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의 삶과 정치 활동은 국민의힘 주류 정치인과 많이 다르다. 국민의힘은 영남을 주된 지역 기반으로 두고 있지만, 이 공관위원장은 전남 곡성 출신이다. 그가 태어나 자란 곡성에서도 특히 위치가 외진 목사동면 동암리로 알려졌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을 둔 것으로 알려졌고, 정계 입문 계기는 그의 고향을 지역구로 두고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던 민주정의당 구용상 전 의원의 비서관으로 발탁된 것이었다. 구 전 의원이 지난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낙선한 후 이 공관위원장은 민주정의당의 말단 간사로 특채됐다. 영남 기반 정당의 호남 출신 당직자였던 그는 훗날 “늘 근본 없는 놈 취급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26년 후 그는 고향 전남 순천·곡성에서 진행된 재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당선되는 이변을 일으켰고, 다시 2년이 지나선 새누리당 대표로 당선됐다. 당선 이후 그의 28년에 대해선 “한 편의 드라마” 혹은 “인간 승리”라는 평가도 나왔다. 이 공관위원장에겐 2명의 이 위원장이 있다. 그는 재보궐선거 당시 49.43%를 득표해 40.32%를 득표한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서갑원 후보를 물리쳤다. 이 후보의 당선엔 서 후보와 노관규 전 순천시장의 갈등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있다. 하지만 정치적 흐름만을 탄 결과라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도 있다. 고향 곡성에서 이 공관위원장에 대한 지지세가 높아 70% 이상 득표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그는 새누리당이 아닌 ‘곡성 출신 이정현’을 내세워 자전거를 타고 지역구를 누볐다. 당시 그는 스스로 ‘머슴’ 혹은 ‘촌놈’을 자처했다. 그러면서 “고향을 위해 미치도록 일하고 싶다”며 “죽도록 부려먹다가 못하면 그때 쓰레기통에 다시 넣으시더라도 이번 한번만큼은 제 손을 한 번 잡아달라”고 호소하는 등 지역의 호감을 얻는 발언을 이어나간 영향도 컸던 것으로 분석됐다. 비판·조롱 낯설게하기 지난 2016년 총선에선 지역구 조정 영향으로, 이 공관위원장은 전남 순천에 출마했다. 고향이 아닌 지역구에 출마한 것은 일견 불리할 수도 있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는 44.54%를 득표해 당선됐다. 그는 재보선 당선 이후 매주 지역구를 방문해 현장을 누빈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당시 야권이었던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에서 모두 후보를 출마시킨 구도의 영향도 호재로 작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공관위원장은 지난 2022년 지방선거에선 국민의힘 전남도지사 후보로 출마해 선거 비용 보전액 하한선 15%를 넘기는 18.81%를 득표해 “선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그는 중앙 정치에선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중앙 정치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을 때 그 원인은 대체로 설화였다.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으로 재직했던 2014년엔 길환영 당시 KBS 사장에게 연락해 “세월호 참사 관련 해경에 대한 비판을 지금은 자제해 달라”고 요구한 게 2년여가 흐른 후 뒤늦게 알려져 물의를 일으켰다. 이는 방송 편성 관련 규제·간섭을 금지한 방송법 위반 행위가 될 위험이 있었는데 실제로 그는 벌금형을 확정받았다. 새누리당 최고위원이었던 지난 2015년엔 광주를 방문해 ‘광주 비하’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을 했다. 당시 그는 “광주 시민이 이정현이를 쓰레기통에 버렸다”며 “박근혜 대통령이 나 같은 쓰레기를 끄집어내서 탈탈 털어 청와대 정무수석·홍보수석을 시켜주는 배려를 했다”고 주장했다. 박 전 대통령에게 과잉 충성하는 이 공관위원장의 모습이나 발언은 지금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였던 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12년 9월 과거사 사과 기자회견에서 회견문을 읽은 후 고개 숙여 인사했다. 당시 상황을 촬영한 사진 중에 후보 공보단장이었던 이 공관위원장이 “질의 시간을 가지면 안 된다”는 의미로 손가락으로 X 표시를 만드는 사진도 있다. 새누리당 대표였던 지난 2016년 11월엔 야권이 박 전 대통령의 임기 단축 협상을 거절하고 탄핵소추를 추진하자 “그 사람들이 탄핵을 실천하면 뜨거운 장에 손을 집어넣겠다”고 반발해 한동안 이 공관위원장을 조롱하는 합성 사진이 범람했다. 정치인은 대체로 선거 현장·당내 투쟁에선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일부 정치인은 그 간극이 커서 주목받는다. 이 공관위원장의 태도는 “상대방에게 진정성 있게 몰입한다”는 장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그 진정성 있는 몰입은 정반대의 이미지를 연출한다. 지역구에선 유권자들이 전통적인 지역 구도에 따른 관성을 무시하고 그를 지지하는 이변으로 이어진다. 반대로 중앙 정치에선 지지자들의 환호와 반대파의 비판·조롱으로 나뉜다. 주호영·김영환 치니 한동훈 꿈틀…나비효과? 마구 휘두르고 장동혁이 수습…굿 캅 배드 캅? 20세기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따르면, 이 공관위원장은 ‘호남 출신 보수정당 소속’으로 던져졌다. 이는 그 스스로 선택한 것이지만, 주어진 운명이 그를 던진 측면도 있다. 던져진 상황을 극복하는 것은 그의 선택이 부여한 운명이었다. 이 때문에 이 공관위원장은 고향에선 ‘친근한 고향 사람’이 돼 선거에 임하면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하지만 보수정당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그를 발탁한 사람은 박 전 대통령이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충성은 그 스스로 선택해 자신의 삶을 던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영남 출신 엘리트’ 주축으로 구성된 국민의힘 기준에서 이 공관위원장은 변방의 이방인이다. <조선일보> 양상훈 주필은 지난 2016년 8월 이 공관위원장이 새누리당 대표에 당선된 후 그에 관한 칼럼을 썼다. 양 주필에 따르면, 이 공관위원장은 당직자 시절 자신보다 어린 당 출입기자로부터 반말을 들어가면서 그의 심부름을 했다. 변방의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태도는 훨씬 ‘편하게’ 나왔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국민의힘에 있다. 러시아 문예비평가 빅토르 슈클로프스키는 시 창작과 관련해 ‘낯설게하기’란 이론을 창안했다. “익숙한 대상을 생경하게 바라보면서 그 본질을 시로 표현할 수 있다”는 취지의 이론이다. 그런데 이 공관위원장은 존재 자체가 ‘낯설게하기’였다. 고향에선 보수 정당 소속이기 때문에 낯설다. 보수 정당에선 호남 출신인 그의 존재는 낯설면서도 동시에 강렬하다. 공천관리위원장으로서 시행하는 주요 정치인 컷오프도 그가 낯선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부각된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그의 충성도 반대파·비판자의 관점에선 개종자의 열정·과잉 사회화로 보일 여지가 있다. 개종자의 열정은 원래 특정 집단 소속이 아니었던 사람이 집단에 들어간 이후 기존 구성원보다 더 근본주의적인 태도로 열정을 쏟아붓는 현상을 말한다. 이는 대체로 “난 원래 이 집단 사람이 아니었다”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진행된다. 그에게는 늘 ‘근본’과 관련된 비판을 받으면 안 된다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이다. 과잉 사회화도 뒤늦은 주류 문법 학습 때문에 유연성을 발휘하기보다 집단의 규범을 그대로 집행하려는 경향으로 이어지는 측면을 일컫는다. 개종자의 열정·과잉 사회화를 상징하는 역사 속 인물로는 긍정적인 측면에선 한때 유대교 바리새파에서 촉망받았다가 예수의 가르침을 전파한 사도 바울을 언급할 수 있다. 부정적인 측면에선 20세기 소련의 공안 탄압을 상징하는 라브렌티 베리야를 언급할 수 있다. 조지아 출신인 베리야는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발탁된 후 대숙청을 진두지휘했던 니콜라이 예조프를 몰아내고 방첩기관 NKVD의 수장이 됐다. 지금도 베리야는 공안 탄압을 상징한다. 특정 집단에 기반이 없는 이방인이 그 집단에서 생존하기 위해 누군가의 ‘칼’이 되는 것은 숙명에 가깝다. 숙명적으로 묶인 운명 이 공관위원장은 원래 광주·전남통합시장 출마를 준비했다가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임명된 직후 군복을 연상시키는 야전상의를 입고 다시 등장했다. 사실상 장 대표의 칼로써 공천을 진두지휘하면서 그의 정치적 운명은 지방선거에 묶였다. 그의 운명은 여전히 칼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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