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붙은’ 오일머니 10조 쟁탈전

‘석유왕자’ 왔다 가니 재계가 들썩∼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사우디아라비아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압둘 아지드 알사우드 왕세자가 한국을 찾았다. 문재인 대통령, 이낙연 국무총리, 그리고 5대 기업 총수까지 모두 붙었다. ‘기회의 땅’ 사우디를 향한 세일즈에 박차를 가한다는 계산이 깔렸다. 빈 살만 왕세자는 한국 기업에 10조원 규모의 파격적인 경제협력을 약속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압둘 아지드 알사우드 왕세자가 지난 26일, 1박2일 일정으로 방한해 파격적인 경제협력 보따리를 풀었다.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이라고 불리는 빈 살만 왕세자의 공식 직함은 사우디 부총리 겸 국방부장관이다. 

이유 있는 
극진 예우

그는 왕위 계승 서열 1위로, 연로한 부친을 대신해 사실상 사우디를 지배하고 있는 인물이다. 소프트뱅크비전펀드를 통해 우버 등 세계적인 혁신 기업의 사실상 최대주주 지위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에너지 시장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어 첫 방한한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큰 관심이 쏠렸다.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서 빈 살만 왕세자와 회담을 가졌다. 양측은 원자력 에너지의 평화적 이용 분야서 지속적으로 협력할 것을 강조했다. 사우디는 사우디 최초의 상용원전 사업의 입찰에 한국이 계속 참여해온 것을 환영했다. 

또 양국의 경제 협력 수준 및 교역 규모 등을 감안할 때 상호 투자를 확대해나갈 수 있는 여지가 매우 크다는 데 주목하고, 호혜적 투자가 지속적으로 창출될 수 있도록 상호 투자 가능성을 적극 모색해나가기로 합의했다. 사우디가 진행 중인 네옴(NEOM) 프로젝트, 홍해 프로젝트, 키디야(Qiddiya) 엔터테인먼트 신도시 건설 등 대규모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긴밀히 협력해나가기로 했다. 


문 대통령은 ‘사우디 비전 2030’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지지를 표명했다. 양측은 한-사우디 비전 2030 위원회를 통한 전략적 파트너십 강화가 상호이익이 된다는 확신을 재확인했다. 

서울과 리야드에 비전 오피스(Vision Realization Office) 개설 등과 같은 노력을 통해 한-사우디 비전 2030 파트너십의 실현을 위한 협력을 가속화하기로 했다. 양국 협력을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신산업 분야로 다변화하고 확대해나가는 것에도 합의했다. 

사우디 왕세자 방한…이례적인 환대 왜?
정부·기업 MOU 10건…미래차·수소 협력

또 양측은 친환경 자동차, ICT(정보통신기술), 5G(세대) 등 미래지향형 첨단 산업 분야를 중심으로 양국 청년 일자리 확대를 위해 함께 노력해나가기로 했다. 특히 사우디는 세계 시장 내 안정적인 원유 공급을 보장하고 대한민국의 원유 및 석유 제품 수요를 충족하며 공급 교란 상황으로 인한 부족분을 대체한다는 약속을 확인했다.

문 대통령은 한국 내 투자, 특히 에너지·정유 및 석유화학 분야의 투자 추진에 대한 사우디 측 관심을 평가했다. 이러한 관심은 최근 사우디 아람코의 현대 오일뱅크 정유 공장 투자와 SABIC과 SK 간 석유화학 합작투자로 이어졌다. 

빈 살만 왕세자는 현대 중공업의 라스 알 카이르 지역 킹 살만 조선소 건설 참여 등 사우디 비전 2030 내 주요 프로젝트에 대한 한국 기업의 기여를 언급하며, 사우디 내 한국의 투자 건수 증가 및 관련 파트너십을 평가했다. 
 

▲ 문재인 대통령과 반 살만 사우디 왕세자

문 대통령과 빈 살만 왕세자는 양측 간 합의 사항의 성공적인 이행을 위해 한-사우디 간 공동위원회, 한-사우디 비전 2030 위원회 등 기존 고위급 소통 채널을 더욱 발전시켜나가기로 했다. 특히 올해 신설된 차관급 국방협력 위원회를 통해 국방 분야 협력도 더욱 증진시키기로 합의했다. 


이날 양국 정부는 총 83억달러(약 9조6000억원) 규모 계약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양국은 수소차와 연료전지는 물론 수소생산·저장·운송 등 전 주기에 걸친 수소경제를 공동 추진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정부는 친환경차, 수소에너지, 수소연료전지 등에서 중동 시장 진출을 위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됐다.

정부 간 MOU 외에도 양국 석유화학, 조선, 자동차 등 기업들도 계약과 MOU를 총 8건 체결하는 성과를 올렸다. 

10조 규모 계약
노리는 기업들

사우디 국영석유회사 아람코는 에쓰오일을 통해 2024년까지 60억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5조원을 들여 이날 준공 기념식을 진행한 에쓰오일의 복합석유화학시설에 이은 대규모 추가 프로젝트다. 이를 위해 에쓰오일은 울산시 온산공장서 가까운 부지 약 40만㎡를 현대중공업으로부터 매입했다.

현대자동차는 아람코와 수소에너지 및 미래차 분야의 기술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양사가 국내에 수소충전소를 건설하고 사우디 내 수소전기차 보급 확대에 나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아람코, 사우디 산업투자공사와 함께 사우디 내 선박엔진공장을 설립하는 합작투자 계약을 체결했다. 총 4억2000만달러를 투자해 킹살만 조선소에 엔진공장을 세우게 된다.

SK가스는 사우디 석유화학기업인 APC의 자회사인 AGIC와 사우디 주바일에 프로필렌 등의 공장을 건설하는 사업의 타당성 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예상되는 합작투자 금액은 18억4000만달러다.

GS는 아람코와 석유 및 가스, 석유 화학 등 에너지사업뿐 아니라 건설, 무역 등에서 새로운 사업 기회를 모색하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했다. 
 

▲ (사진 왼쪽부터)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효성은 탄소섬유 공장 설립 검토를 위한 MOU를 체결했다. 효성과 아람코는 탄소섬유 생산 기술 개발과 적용에 협력해 향후 사우디아라비아나 국내 등에 탄소섬유 공장을 신·증설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기로 했다. 그 외 효성이 개발한 첨단신소재 폴리케톤, PPDH 등의 화학분야와 ESS, 송·배전 그리드 등 전력분야서도 상호협력을 강화할 예정이다.

재계 총수들도 접촉면을 넓히는 데 적극적이었다. 빈 살만 왕세자와 국내 5대 그룹 총수들은 지난 26일 밤 서울 한남동서 깜짝 회동을 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빈 살만 왕세자가 청와대 만찬을 가졌던 직후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 총수 5명은 이날 오후 7시45분쯤 삼성의 영빈관 격인 서울 한남동 승지원에 도착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해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 최태원 SK 회장, 구광모 LG 대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었다. 대기업 총수들이 이곳에 한꺼번에 모인 건 9년 전인 2010년 7월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9년 만에…
총수들 집결


빈 살만 왕세자가 승지원에 도착한 시간은 이날 오후 8시45분쯤. 왕세자가 도착하기 수십분 이전부터 검은색 정장을 입은 경호 인력과 경찰이 승지원 주변을 정리했다. 삼엄한 경비 속에서 사우디 왕실 소속 취재진 역시 승지원에 입장하지 못했다.  

사우디 왕세자와 5대 기업 오너는 승지원서 약 15분간 티타임을 가졌다. 앞서 청와대 오찬에선 짧은 대화밖에 나누지 못한 탓에 따로 마련된 자리라고 전해진다. 티타임이 끝나고 오후 9시20분을 전후해 정 수석부회장, 최 회장, 구 대표, 신 회장 등 4대 기업 총수의 의전 차량이 먼저 승지원 안으로 들어가 이들을 태우고 나왔다.
 

▲ 구광모 LG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이들 오너 4명이 나간 뒤 승지원의 주인 격인 이재용 부회장과 빈 살만 왕세자, 둘이서만 단독 면담을 했다고 한다. 

빈 살만 왕세자와 이 부회장은 사우디가 현재 의욕적으로 추진 중인 스마트 시티 사업인 ‘네옴(NEOM) 프로젝트’ 등을 놓고 약 10분간 이야기를 나눴다. 스마트시티 및 경제자유구역을 골자로 한 네옴 프로젝트의 규모는 5000억달러(약 600조원)다.

재계 관계자는 “경호 문제도 있고 과거 승지원이 해외 귀빈들을 모시는 영빈관으로 사용됐다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승지원서 대기업 총수들이 모인 건 2010년 7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만찬 이후 처음이다. 당시 사의를 표명한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의 뒤를 이을 전경련 회장을 추대할 목적으로 이건희 삼성 회장이 전경련 회장단을 승지원에 초청했다.


당시 만찬에는 고(故)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등이 참석했다. 

그로부터 9년 뒤 세대교체가 이뤄진 5대 기업 리더가 무함마드 왕세자와 만나기 위해 삼성 승지원에 모였고, 이 모임을 이재용 부회장이 주재한 성격이 짙었다는 게 재계의 분석이다.

5대 그룹 총수 총출동…한밤 중 회동 내용은?
재산 1246조7375억…세계 1위보다 9배 많아

빈 살만 왕세자가 한국 기업과 손을 잡은 것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우선 1970년대 중동 건설 과정서 쌓은 한-사우디 관계를 미래지향적 협력관계로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 산업의 미래 먹거리로 꼽히는 수소경제·ICT 분야 협력이 가시화됐다는 점도 중요하다. 양국은 원자력 기술·안전 분야서도 지속적인 협력을 약속했다. 

재계에선 빈 살만 왕세자의 대규모 경제협력 약속이 한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를 기대한다. 영업이익 규모만 285조원(2018년 기준)인 ‘큰손’ 아람코의 직접투자뿐 아니라, 중동 등 신시장 개척의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란 분석에서다. 

아람코와 협력하기로 한 대기업 관계자는 “미국의 이란 봉쇄로 사우디에 대한 원유 의존도가 높아졌고, 비전 2030을 통해 사우디가 국가적 투자계획을 내놓고 있어 다양한 사업이 가능한 기회”라고 말했다. 
 

한 무역학과 교수는 “중동 비즈니스엔 많은 변수가 작용한다”며 “사우디 안팎의 정치적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실질적 상호 이득을 끌어낼 수 있도록 지속해서 관리하고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빈 살만 왕세자의 방문과 함께 그의 재산 규모에 대해서도 세간의 관심이 쏠렸다. 국내서 이름을 알린 맨체스터 시티 FC의 구단주 ‘만수르’보다 35배 많은 재산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진 빈 살만 왕세자의 재산 규모는 8500억파운드, 한화로 1246조7375억원. 

2019년 <포브스>가 발표한 세계 억만장자 1위인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의 1310억달러보다 약 9배 가까이 많다. 

상상도 못할 재산
만수르보다 35배

그러나 빈 살만 왕세자의 재산은 사우디의 사생활 보호법으로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고, 왕가의 재산과 분리하기 힘들어 억만장자 명단에는 오르지 못했다. 어마어마한 재산가이자 사우디아라비아의 실권을 쥐고 있는 그가 한국의 주요 기업체와 회동을 가지며 관심을 표한 이번 방한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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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