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역전의 용사 윤석열 검찰총장 내정자

  • 박창민 기자 cmp@ilyosisa.co.kr
  • 등록 2019.06.24 10:15:24
  • 호수 12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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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에 울었고, 대통령에 웃었다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박근혜정부 시절 국정원 댓글 수사를 했다가 좌천당했던 검사 윤석열. 문재인정부서 검사장 승진과 동시에 ‘검찰의 꽃’ 서울중앙지검장으로 발탁됐다. 그는 그 후 2년 만에 고검장급 선배 기수를 제치고 검찰총장에 내정됐다. 
 

▲ 서울고검 국정감사에 출석해 답변하는 윤석열 검찰총장 내정자 ⓒ사진공동취재단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7일, 문무일 검찰총장 후임으로 사법연수원 5기수 아래인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을 내정했다. 윤 내정자가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검찰총장에 임명되면, 검찰총장 임기제가 도입된 1988년 이후 31년 만에 고등검찰청장(이하 고검장)을 거치지 않고 총장으로 직행하는 첫 사례가 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구속과 탄핵으로 이어진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수사의 일등 공신이자, 문재인정부 집권 후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 구속, 양승태 대법원장의 사법 농단 수사 등을 주도하며 ‘적폐 청산의 칼’ 역할을 한 윤 내정자를 발탁함으로써 청와대가 흔들림 없는 적폐 청산 메시지를 보냈다는 분석이 나온다.

파격에 파격
개혁 적임자?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춘추관 브리핑서 윤 내정자에 대해 “서울중앙지검장으로서 탁월한 지도력과 개혁 의지로 국정 농단과 적폐 청산 수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검찰 내부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아왔다”며 “윤 내정자가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를 뿌리 뽑음과 동시에 시대적 사명인 검찰개혁과 조직쇄신 과제도 훌륭하게 완수할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밝혔다.

윤 내정자의 발탁은 고검장을 거치지 않았고 현 총장보다 5기수 아래라는 점에서 파격적이다. 신군부 시절인 1981년 정치근(고등고시 8회) 검찰총장이 6기수를 건너뛰고 임명된 적은 있지만, 1988년 검찰총장 임기제가 도입된 이래 검사장서 검찰총장으로 직행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관례대로라면 윤 내정자 선배 기수인 현직 고검장 6명은 물론, 선배·동기 기수 검사장들의 퇴진이 불가피하다. 다만 이를 두고 ‘조폭 문화’ ‘권위주의 검찰의 유산’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은 데다, 윤 내정자가 어지간한 선배 기수들보다 연장자라는 점에서 윤 내정자 지명을 계기로 관행이 깨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여러모로 파격적인 인사지만 검찰 내부의 동요는 크지 않다. 2년 전 문 대통령이 고검 검사였던 윤 내정자를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임명했을 때부터 ‘차기 검찰총장은 윤석열’이란 것이 기정사실화됐기 때문이다. 

여야 정치권은 차기 검찰총장으로 윤 내정자가 지명되자 상반된 시각을 드러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진보 진영은 ‘적임자’라는 입장이지만, 자유한국당(이하 한국당) 등 보수 야당은 ‘코드인사’라며 날 선 반응을 보였다.

민주당 홍익표 수석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을 통해 “우리 사회에 남은 적폐 청산과 국정 농단 수사를 마무리하고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검찰개혁을 이끌 적임자”라며 “‘저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습니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한 윤 내정자는 검찰개혁을 원하는 국민적 요구를 반영한 인사라고 판단된다”고 평가했다.

문무일 총장보다 5기수 아래
31년 만에 고검장 안 거쳐

민주평화당(이하 평화당)과 정의당은 현 정부가 추진하는 검찰개혁을 완수할 것을 주문했다.

평화당 박주현 수석 대변인은 “개혁적이라는 측면서 일단 적임이라고 평가한다”며 “윤 내정자가 지휘하는 검찰이 검찰개혁은 물론, 지속적인 사회 개혁의 추진체가 돼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정의당 정호진 대변인도 “공수처 설치와 검경수사권 조정 등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보수 야당은 문 대통령이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고 있다며 지명 자체를 문제 삼고 나섰다.

한국당 민경욱 대변인은 “윤 내정자는 문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서울중앙지검장에 올랐고, 야권 인사들을 향한 강압적인 수사와 압수수색 등으로 ‘문재인 사람’임을 몸소 보여줬다”며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수사의 독립성은 날 샌 지 오래”라고 비판했다. 한국당은 인사청문회서 윤 내정자에 대해 철저히 검증하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다.

바른미래당 이종철 대변인도 “문정부의 가장 전형적인 코드인사다. 검찰의 독립이 아닌 검찰의 종속을 선언한 것”이라며 “윤석열 체제의 검찰은 권력에 더 흔들릴 게 뻔하다”고 비난했다.

반면 국민 다수는 윤 내정자의 지명을 반겼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오마이뉴스>의 의뢰로 지난 18일 조사해 발표한 내용을 보면 ‘잘했다’는 긍정평가가 49.9%로 조사됐다. ‘잘못했다’는 부정평가(35.6%)보다 14.3%포인트 높았다. ‘모름·무응답’은 14.5%였다.

긍정평가는 민주당 지지층(긍정평가 87.4% vs 부정평가 3.2%)과 정의당 지지층(85.7% vs 8.3%), 진보층(78.2% vs 11.8%)서 압도적으로 나타났다. 또 중도층(긍정평가 49.8% vs 부정평가 37.8%)과 연령대별로는 40대(61.3% vs 28.7%), 30대(57.0% vs 22.6%), 50대(51.4% vs 41.6%), 20대(42.8% vs 36.0%)서, 지역별로는 광주·전라(64.1% vs 24.6%), 경기·인천(55.3% vs 32.4%), 서울(52.8% vs 32.3%), 대전·세종·충청(42.8% vs 21.5%)서 긍정평가가 우세했다. 
 

▲ 취재진 질문 받는 윤석열 검찰총장 내정자

부정평가는 한국당 지지층(긍정평가 4.8% vs 부정평가 85.7%)과 바미당 지지층(22.2% vs 51.7%), 보수층(19.3% vs 68.8%), 부산·울산·경남(38.4% vs 51.6%)서 대다수이거나 절반을 넘었다. 60대 이상(긍정평가 40.2% vs 부정평가 44.3%)과 대구·경북(43.6% vs 48.4%)서도 부정평가가 다소 우세했다. 무당층(33.5% vs 34.6%)에서는 긍·부정 평가가 팽팽하게 엇갈렸다.

이번 조사는 전국 19세 이상 성인 8950명에게 통화를 시도해 최종 500명이 응답한 결과다. 

정권 밉보여
한직 돌다…

향후 국회 인사청문회서 여야 간 첨예한 공방이 벌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윤 내정자는 기관장 신분으로 지금까지 세 차례 국정감사 증인석에 섰다. 매번 소신 발언을 쏟아냈던 그는 자신의 인사청문회서도 야당 의원들의 공세를 정면으로 반박할 가능성이 높다. 

야당은 윤 내정자에 대한 송곳 검증을 벼르고 있다. 야당은 우선 적폐 청산 수사를 정치 보복으로 규정하고, 윤 내정자를 몰아세울 전망이다.

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지난 18일, 정책 의원총회서 “문재인 대통령의 윤 내정자 지명은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와 엉터리 검경수사권 조정에 대한 검찰의 쓴소리를 이제 완전히 틀어막겠다는 것”이라며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정치 보복을 통해 공포사회를 만들겠다는 선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재인정권에 맞서는)첫 번째 과제가 윤 내정자 청문회다. 검찰을 정권의 하수인으로 만들려는 음흉한 계략을 청문회를 통해 저지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윤 내정자는 인사청문회 준비단을 꾸리고 본격적인 청문회 준비에 돌입했다. 문찬석 대검 기조부장이 이끄는 ‘국회 인사청문회 준비팀’은 청문회 과정서 제기될 각종 질의에 대응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준비단은 기획총괄팀장에 김태훈 대검 정책기획과장, 홍보팀장에 주영환 대검 대변인, 신상팀장에 김창진 서울중앙지검 특수4부장 등을 앉히는 등 검사 10∼15명으로 구성됐다. 기획총괄팀과 홍보팀은 인사청문회 전반에 대해 준비한다.

신상팀은 윤 내정자의 신상 문제와 관련된 사항을 맡는다. 준비단을 위한 별도의 사무실은 마련되지 않는다.

준비단은 인사청문 요청서를 작성해 지난 20일 국회에 제출했다. 요청서가 제출되면 국회는 20일 이내에 청문회를 실시해 인사청문 경과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송부해야 한다. 다만 기간 내로 청문회를 열지 못하거나 보고서를 송부하지 못하면, 대통령은 재송부를 요청해야 한다. 이후에도 보고서가 송부되지 않을 경우 대통령은 추가 절차 없이 윤 내정자를 검찰총장에 임명할 수 있다. 

정치권은 청문회서 윤 내정자의 ‘검찰개혁 의지’와 ‘정치적 중립성’ ‘재산 문제’ 등을 집중적으로 검증할 것으로 보인다. 윤 내정자는 문정부가 추진하는 검찰개혁의 상징으로 활용됐다. 문 대통령은 정권 출범 초기인 2017년 5월 당시 고검 검사였던 윤 내정자를 지검장으로 승진시키며 기존에 고검장급이 맡던 서울중앙지검장 자리에 앉혔다. 

서열을 중시하는 검찰서 문 총장보다 5기수가 낮은 윤 내정자를 파격적으로 지명한 것은 검찰개혁을 이어가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으로 풀이된다. 인사청문회에선 윤 내정자가 청와대가 추진하고자 하는 방향과 의지에 부합하는 인물인지에 관해 집중적인 검증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윤 내정자는 그동안 검경수사권 조정안 등 청와대와 여당이 추진하는 검찰개혁 방향에 대해 공식적으로 의견을 밝힌 적은 없다. 총장으로 지명된 직후 검찰개혁안 등 현안에 관한 질문에 대해 “차차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이라며 말을 아꼈다. 다만 검찰의 직접 수사에 관한 의지가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적폐수사도 인사청문회의 주요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윤 내정자는 2016년부터 박영수 특별검사팀 수사팀장, 서울중앙지검장을 맡아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사법 농단 등 적폐 수사를 적극 이끌어온 만큼 한국당을 중심으로 한 야당이 이 부분을 적극적으로 문제 삼을 것으로 예상된다.

기사회생
선배들 용퇴

윤 내정자의 60억대 재산도 야당의 집중 공세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3월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가 공개한 2019년도 정기 재산변동사항에 따르면 윤 후보자는 65억9076만원을 신고, 검찰 고위 간부 37명 중 가장 많은 재산을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윤 내정자 재산의 대부분은 2012년 혼인한 배우자 명의다. 65억여원 중에는 배우자 명의로 된 12억원 상당의 서울 서초구 소재 복합건물과 49억7000만원 상당의 예금이 포함돼있다. 본인 예금은 2억1000여만원 정도다.

윤 내정자의 배우자 김건희씨는 문화예술계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큐레이터다. 김씨가 대표로 있는 코바나컨텐츠는 문화예술 콘텐츠를 제작·투자하는 기업으로 2007년부터 앤디 워홀, 샤갈, 르 코르뷔지에 등 유명 전시를 주관해왔다. 

김씨는 2015년 전 세계서 가장 비싼 작품으로 손꼽히는 마크 로스코의 작품 전시를 주관하며 전시 기획의 큰손으로 자리매김했다. ‘마크 로스코전(展)’은 예술의전당 예술대상 3관왕(최다 관람객상, 최우수 작품상, 기자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2017년에는 현대조각의 거장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작품을 국내에 선보이며 전시기획자로서의 실력을 입증했다.

최근에는 ‘20세기 현대미술의 혁명가들’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김씨는 미술을 전공하고 경영학 석박사 과정을 밟은 재원으로, 2012년 12살 연상의 윤 내정자와 결혼했다. 지금의 60억원대 재산은 1990년대 후반 주식으로 번 돈을 밑천으로 사업체를 운영하며 이룬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 수장으로 지명받기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던 윤 내정자는 서울 출신으로 서울 충암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일각에선 조부와 부친의 고향이 충남 논산이어서 충청 인맥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대학 재학 당시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에 대한 모의재판서 전두환씨에게 사형을 구형했던 일화는 아직도 회자된다. 당시 정국 상황을 감안하면 모의재판이라고 해도 전씨에게 사형을 구형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고, 윤 내정자는 이 모의재판 후 한동안 강원도로 도피해 있었다고 한다.

윤 내정자는 대학교 4학년 재학 중 사법시험 1차에 합격했지만, 2차 시험서 9년간 낙방하다가 1991년 제33회 사법시험에 뒤늦게 합격해 검사에 임용됐다. 그는 대구지검을 시작으로 서울지검, 부산지검 등에서 검사 생활을 하다가 법무법인 태평양서 약 1년간 변호사 활동을 거친 후 검찰에 재임용됐다. 

정치권 시각차 ‘극명’  
수사권·공수처 입장은?

검찰에 재임용된 이후 광주지검과 의정부지검 고양지청 등에서 근무했고, 대검 검찰연구관, 대검 중수1·2과장,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윤 내정자는 검찰 내에서 특별수사에 정통한 대표적 특수통이자 소신이 뚜렷한 강골 검사로 꼽힌다. 

그래서인지 검사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윤 내정자는 박근혜정권 초기인 지난 2013년 수원지검 여주지청장으로 있다가 국가정보원 대선·정치 개입 의혹 수사 당시 특별수사팀장을 맡았다. 그러나 수사 도중 검찰 지휘부의 반대에도 용의선상에 오른 국정원 직원의 체포를 강행한 일로 마찰을 빚었고, 이로 인해 좌천성 인사 조치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는 그해 10월 국정감사 당시 “(수사 강도를 낮추기 위한)검사장의 외압이 있었고 그를 모시고 사건을 더 끌고 가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고 말해 항명 파동의 당사자가 되기도 했다. 윤 내정자는 한 의원의 질의에 “(검찰)조직을 대단히 사랑하고 있다”면서도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발언해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 검찰 인사서 한직으로 불리는 대구고검 검사로, 2016년에는 대전고검 검사로 발령났다. 검찰 내부에서는 부장검사급 검사를 수사권이 없는 지방 고검만 맴돌게 하는 것은 사실상 검찰을 떠나라는 무언의 압력이라는 말도 나왔다. 

그 후 윤 내정자는 2016년 국정 농단 의혹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출범한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수사팀장으로 임명되면서 수사를 진두지휘하게 됐다. 그는 이 과정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국정 농단’ 게이트에 연루된 사회 각계 인사들을 거침없이 수사하며 강골 검사의 면모를 가감없이 드러냈고, 국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윤 내정자는 문재인정부 출범 후 첫 서울중앙지검장을 맡으며 화려하게 복귀했다. 청와대는 차장검사급이던 그를 검사장으로 승진 발탁하며 파격 기용했고, 고검장급이 맡았던 서울중앙지검장은 지검장급으로 직급을 내렸다.

국민 여론은?
찬성이 많아

윤 내정자 재임 기간 동안 서울중앙지검은 다스(DAS) 의혹, 사법농단 의혹 수사로 각각 이명박 전 대통령,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구속기소하며 전직 행정부 수장과 전직 사법부 수장을 재판에 넘기기도 했다. 또 이명박정부 시절 국가정보원 심리전단 산하 ‘민간인 댓글부대’, 옛 국군기무사령부 ‘세월호참사 유가족 사찰’, 삼성전자 서비스 ‘노조 와해’,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등의 사건을 수사했거나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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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