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고 이희호 여사의 97년을 돌아보다

  • 박창민 기자 cmp@ilyosisa.co.kr
  • 등록 2019.06.17 10:04:59
  • 호수 12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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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동지 ‘인동초’ 곁으로 떠나다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9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이 여사의 인생은 ‘정치인 김대중의 부인’이나 ‘퍼스트레이디’라는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는다. 일제강점기·한국전쟁·민주화운동 등을 거쳐 평화적 정권교체까지. 이 여사는 격변의 한국 현대사를 오롯이 온몸으로 이겨낸 여성운동가였다. 
 

▲ 고 이희호 여사와 김대중 전 대통령 ⓒ김대중평화센터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이자 여성운동가·민주화운동가로 평생을 보낸 이희호 여사가 지난 10일 오후 11시37분 서울 서대문구 신촌 연세대세브란스병원서 별세했다. 향년 97세.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졌다. 지난 14일 이 여사의 장례예배는 평생토록 다닌 신촌 창천교회서 치러졌다. 이 여사는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의 김 전 대통령 묘소에 합장됐다. 

여야·각계 망라
추모·애도 물결

이 여사는 올해 들어 건강이 급속히 나빠졌다. 감기 등으로 수차례 입원했다 퇴원하기를 반복했다. 지난 4월엔 ‘위중설’이 보도되기도 했다. 같은 달 20일에 장남인 김홍일 전 의원이 별세했을 때도 주변에선 이 여사에게 아들의 임종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이 여사의 장례집행위원장을 맡은 김성재 김대중평화센터 상임이사는 “이희호 여사님은 모든 가족과 함께 찬송가를 부르다가 지난 10일 밤 11시37분께 편안하게 소천하셨다”고 밝혔다. 김 상임이사는 “이 여사님이 입 모양으로 찬송가를 따라 부르셔서 가족들이 깜짝 놀라고 좋아했다”며 이 여사의 마지막 순간을 전했다.

가족들은 평소 이 여사가 좋아하던 찬송가 ‘나의 갈 길 다가도록’을 부른 것으로 전해졌다.


김 상임이사는 고인이 남긴 유지를 공개하기도 했다. 이 여사는 유언을 통해 “국민들이 남편 김대중 대통령과 자신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다”며 “국민들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해서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또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적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고도 덧붙였다.

이 여사는 생전 거주하던 동교동 사저를 ‘대통령 사저 기념관’(가칭)으로 써달라고 유언했다. 김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상금도 고인의 유지에 따라 대통령 기념사업을 위한 기금으로 쓰일 예정이다.

이 여사는 유언 집행에 대한 책임을 김 상임이사에게 맡기며 “김대중 대통령 기념사업과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위한 김대중평화센터 사업을 잘 이어가달라”고 당부했다. 이 여사와 가족들은 지난해부터 유언장 작성을 준비해왔다.

이 여사의 타계 소식에 사회 각계층의 추모행렬이 이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SNS에 “우리는 오늘 여성을 위해 평생을 살아오신 한 명의 위인을 보내드리고 있다”며 “여사님은 ‘남편이 대통령이 돼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다’ 하실 정도로 늘 시민 편이셨고, 정치인 김대중을 ‘행동하는 양심’으로 만들고 지켜주신 우리 시대의 대표적 신앙인, 민주주의자였다”라는 글을 남겼다.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여야5당은 이 여사의 타계 소식에 애도의 뜻을 전했다.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수석대변인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와 인권운동의 거목이었던 여성지도자 이희호 여사의 삶을 깊은 존경의 마음을 담아 추모한다’고 논평했다.

홍 대변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반자이자 가장 가까운 비판자로서, 독재세력과 싸우는 민주화 투쟁의 동지로서, 매섭고 엄혹한 격정의 세월을 함께 헤쳐오셨다”며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의 삶은 그 자체로 대한민국 현대사였다”고 했다. 이어 “독재정권의 서슬 퍼런 탄압도, 죽음을 넘나드는 고난도, 이 땅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향한 두 분의 굳은 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고 했다.


격변의 현대사 온몸으로 이겨낸 여성운동가
퍼스트레이디이자 민주주의·인권운동의 거목

자유한국당 민경욱 대변인도 서면 논평을 통해 “이희호 여사는 대한민국 1세대 여성운동가로서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 여성문제연구회 회장 등을 맡았으며 가족법 개정 운동, 혼인신고 의무화 등 사회운동에 헌신했다”며 “고인께서 민주주의, 여성, 그리고 장애인 인권운동을 위해 평생 헌신했던 열정과 숭고한 뜻을 기리며,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했다.

바른미래당 이종철 대변인은 서면 논평서 “꼭 쾌차하시어 따뜻한 햇살이 간지럽도록 다시 함박웃음 주시리라 간절히 믿었건만, 여사님께서는 그리운 김대중 대통령님을 만나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으실 기대가 더 크셨던가 보다”라며 “6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 민주의 열망을 온 하늘에 퍼뜨리던 그날을 어이 맞추신 듯, 6월 민주항쟁의 32주기 뜻깊은 날에 소천하셨다. 깊은 애도와 함께 고인의 편안한 영면을 기원한다”고 전했다.

정의당 이정미 대표는 보도자료를 통해 “정의당은 고인의 위대한 삶을 계승하는 데 노력하겠다”며 “특히 고인의 필생의 신념이었던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6.15공동선언을 계승 실천하고, 한반도 평화 번영을 위한 평화 협치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고 했다. 
 

▲ ⓒ김대중평화센터

민주평화당 박주현 수석대변인도 전날 논평서 “우리 모두는 여사님이 걸었던 여성, 민주주의, 인권, 사랑의 길을 따라 전진하겠다. 이희호라는 이름은 항상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추궈홍 주한 중국대사, 동교동계 인사들과 전두환씨 부인 이순자씨 등이 빈소를 찾았다. 지난 12일 이 부회장은 10시50분경 이 여사의 빈소를 찾아 5분이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머무르다 나갔다. 

앞서 한 시간 전에는 김 전 대통령과 ‘악연’이었던 전씨의 부인 이순자씨도 빈소를 찾았다. 이씨는 이 여사의 아들 김홍업씨에게 짧은 인사말을 건네고 장례식장을 빠져나갔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 김영삼민주센터 상임이사(고려대 특임교수)도 빈소에 나타났다. 김 이사는 “이 여사님한테 매 신년 1월1일이 되면 인사를 드리러갔다”며 “반갑게 대해줬고 몇 년 동안 동교동을 찾아뵙고 인사드렸다”고 고인을 회상했다. 

추궈홍 주한 중국대사는 고인을 추모하며 “이 여사님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대모셨다”며 “한중관계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해주신 점에 대해서 깊이 평가하고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밖에 김명수 대법원장, 고건 전 총리, 정동영·장병완·유성엽 의원 등 민주평화당 인사, 방송인 김제동씨 등이 고인을 기렸다.

전두환 부인
이순자 조문

이 여사는 남편 김 전 대통령과 더불어 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험난한 여정을 걸었다. 일제 치하에 태어나 해방과 분단,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결혼 전에는 독신을 고집하며 유학을 다녀온 뒤 한국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활약한 엘리트 여성이었다.

정치인 아내의 길에 들어선 후 수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며 험로를 걸었지만, 대통령의 영부인이라는 영광을 맛보기도 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내조자를 넘어 김 전 대통령이 옥고를 치를 때는 옥바라지로, 망명 때는 후견인으로, 가택연금때는 동지로, 야당 총재 시절에는 조언자로 곁을 지켜 정치적 동지라는 평을 받았다. 


남편이 떠난 후에도 동교동 178-1번지 자택에 걸려 있던 ‘김대중 이희호’ 문패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이 여사도 파란만장한 삶을 접고 ‘인동초’ 김대중의 곁으로 돌아갔다. 

이 여사는 3·1운동으로부터 3년이 지난 1922년 서울 수송동서 6남2녀의 넷째이자 장녀로 태어났다. 부친 이용기씨가 ‘국내 의사면허 4호’였을 정도로 가정환경은 유복했다. 이 여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이순이씨의 영향으로 모태신앙을 가졌다.

이 여사는 이화여고·이화여전을 다녔지만 1944년 일제의 교육긴급조치에 따라 이화여전을 졸업하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했다. 1946년 서울대 사범대학에 입학해 1950년 교육학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활달한 성격의 이 여사는 대학 재학 중 서울대 총학생회서 사범대 대표를 맡는 등 당시 강요되던 ‘얌전한 여학생’ 딱지를 거부했다. 발랄하고 활동적인 리더 타입으로 남학우·여학우를 가리지 않고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이 시절 이 여사의 별명은 중성을 뜻하는 독일어 ‘다스’(das)였다.

남녀공학서 뿌리 깊은 가부장제를 처음 마주한 그는 곧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에 몰두한다. 그리고 여학생의 동등한 권리와 처우를 주장하는 데 앞장섰다.

대학 졸업 직후 발발한 한국전쟁서도 이 여사는 여성운동가들과 어울리며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피란지 부산서 이태영, 김정례 등 1세대 여성운동가들과 대한여자청년단을 조직했다. 2년 뒤에는 여성의 인권과 법적 권리를 도모한 ‘여성문제연구원’ 발족의 실무를 도맡아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 여사가 처음 선거운동을 경험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1954년 5월 3대 민의원 선거서 박순천 캠프를 도운 그는 지프차를 타고 거리를 누리며 외쳤다. “여성은 여성 대표를 찍읍시다!”
 

김 전 대통령과의 첫 만남도 이 무렵이었다. 이 여사가 활동하던 대한여자청년단은 1·4후퇴 당시 피난민들을 배로 후송하기 위해 인천에 있는 해운회사 사장이었던 김 전 대통령의 도움을 받았다. 이후 부산으로 사업 거점을 옮긴 김 전 대통령과 대한여자청년단 간부들이 만나는 자리서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도 이뤄졌다. 

이 여사는 서울 지역 대학생 모임이었던 면학동지회를 주도적으로 이끌며, 간헐적으로 김 전 대통령과 교우했지만 곧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램버스대서 사회학 학사 학위, 스카릿대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958년 귀국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서른일곱의 엘리트 신여성이었던 이 여사는 여성운동가로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당시 여성계를 선도하던 엘리트 집단인 대한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의 총무를 맡아 축첩 반대, 혼인신고 하기 등 각종 여권신장운동을 벌였고,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운명적인 만남
끝까지 바라지

여성운동에 매진하던 이 여사는 1962년 만 40세의 나이로 김 전 대통령과 운명적 결혼을 하면서 ‘정치인 아내’의 길로 들어섰다. 김 전 대통령은 1945년 차용애씨와 결혼해 홍일, 홍업씨를 얻었지만 차씨는 1959년 세상을 떠났다. 

주변에서는 ‘정치 낭인’에 불과한 김 전 대통령과의 결혼을 강하게 반대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두 아들과 노모, 아픈 여동생을 거느린 정치 재수생이었다. 운도 매번 그를 비켜가 1954년 민의원 선거서 낙마했고 58, 59, 60년 선거서도 잇따라 고배를 마셨다. 1961년 강원도 인제의 보궐선거에 당선돼 4전5기에 성공했지만 사흘 만에 5·16쿠데타가 일어나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 여사의 주변에서는 그런 김 전 대통령과의 결혼을 말리는 이가 많았다. 하지만 여사는 연인의 비범함을 알아봤다. 그를 도와 남녀가 평등하고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었다.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보다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 됐다”고 이 여사는 자서전서 밝혔다.

1962년 결혼 열흘 만에 김 전 대통령이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는 등 이 여사는 ‘민주화 운동가의 아내’로서 시련을 겪기 시작했다. 김 전 대통령을 눈엣가시로 여긴 박정희, 전두환 군부정권은 끊임없이 그를 제거하기 위한 공작을 벌였다. 결국 김 전 대통령은 1971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 

1973년에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도쿄 시내 호텔에 머무르고 있던 김 전 대통령을 납치해 대한해협에 수장시키려고 했다. 기적적인 생환 이후에도 김 전 대통령은 재야활동을 계속했고, 가택연금과 투옥(1973∼1979년)이 반복됐다. 

“하늘나라 가서 
평화통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2·12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혐의는 ‘광주사태’를 배후 조종한 내란음모죄. 거짓 모함이었지만 이 일로 아들들까지 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겪어야 했다. 이 여사는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서신을 보내는 등 온 힘을 다해 남편의 구명운동에 나섰다. 

이 여사는 가계를 홀로 꾸려나가면서도 남편의 심신 건강을 지키기 위한 옥바라지에도 지극정성이었다. 이 여사는 옥중의 김 전 대통령에게 600권이 넘는 책을 보내 공부를 돕는가 하면, 청와대 안가서 전두환 전 대통령과 독대해 남편의 석방을 당당히 요구하기도 했다. 

남편의 수감 시절 면회시간이 한 달에 20분밖에 되지 않자 이 여사는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이 시절 가족이 보낸 900여통의 편지와 김 전 대통령의 옥중서신은 각각 책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미국 망명시절과 이후 54차례 이어진 가택연금 때도 이 여사는 남편의 가장 든든한 동지이자 참모로 묵묵히 곁을 지켰다.

김 전 대통령은 1987년 6월 항쟁과 직선제 개헌 이후 다시 정치 전면에 나섰지만 1987, 1992년 대선에서 줄줄이 낙선했다. 당시 이 여사는 남편의 정치활동에 일체 개입하지 않았지만 여성 문제에 한해서는 발언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영향을 받은 김 전 대통령은 시대를 앞서가는 여성정책을 국회에 제시했다.

상속과 이혼문제에서 남녀차별 요소를 삭제한 가족법 개정안이 89년 통과된 데에도 이 여사의 공로가 숨어 있었다. 

1992년 대선 이후 은퇴를 선언한 김 전 대통령은 3년 뒤 지방선거 지원 유세를 계기로 정계에 복귀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97년 5월 당내 경선서 대선 후보로 선출되며, 대통령이 될 마지막 기회를 잡았다. 이 여사는 여느 선거 때처럼 남편의 유세를 적극 지원했다.
 

▲ ⓒ사진공동취재단

특히 여성단체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 지지를 호소했다. 과거 분열로 낙선의 쓴맛을 봤던 김 전 대통령은 15대 대선서 자민련의 김종필, 박태준씨와 손을 잡아 3전4기의 신화를 완성했다. 헌정 사상 처음 평화로운 정권교체에 성공한 순간이었다.

청와대 안주인이 된 이 여사는 아동과 여성 인권에 관심을 두며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김대중정부서 여성부가 신설되고 여성의 공직 진출이 확대되자 ‘국민의 정부 여성 정책 뒤에는 이희호가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 여사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남편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고 기억했다. 이 여사도 2000년 펄 벅 인터내셔널이 주는 ‘올해의 여성상’을 수상했다.

이희호는 
이희호다

이 여사는 2009년 8월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47년 동안 함께했던 ‘동지’와 작별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 서거 후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으로 동교동계의 구심점이자 재야인사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2011년 말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이 사망했을 때 조문단 자격으로 방북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그는 자서전 <동행>서 “참으로 먼 길을 걸어왔다. 문득 돌아보니 극한적 고통과 환희의 양극단을 극적으로 체험한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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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회 문턱을 넘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이 사법부를 강타했다. 검찰은 1999년 특별검사제 도입 이후 권한을 조금씩 잃다가 올해 해체가 결정됐다. 검찰이 26년 전 느끼다가 현실이 된 불안을 이젠 사법부가 느낄 차례일지도 모른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범여권이 지난 24일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내란 사건만 맡는 전담재판부를 만들어 운영한다”는 취지의 예규 제정 방침을 밝혔다. 특별재판부 영장전담 법관 하지만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같은 날 논평을 통해 ‘24일 처리 방침’을 밝혔다. 이날 법안 처리는 이미 예고된 결과였다. 박 대변인은 지난 21일 오전 기자 간담회에서도 “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예정대로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이 원래 처리하려던 법안은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법’이었다. 이 법안이 통과됐다면, 12·3 비상계엄 관련 재판을 맡을 특별재판부가 설치되고, 영장 심사를 맡을 특별영장 전담 법관이 따로 배정됐을 것이다. 이들은 국회·판사회의·대한변호사협회가 3명씩 추천한 위원으로 구성되는 9인 규모의 추천위원회의 2배수 추천과 대법원장의 임명을 거칠 예정이었다. 아울러 상고심에선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임명했던 대법관은 모두 제척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에 대해선 각계에서 위헌 논란을 제기했다. 그러자 민주당은 지난 16일 내용을 대폭 수정했다. 명칭도 특별재판부에서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 전담재판부 후보추천위원회는 법무부 장관·헌법재판소 사무처장 등 외부 인사를 제외한 후 법관으로만 구성될 예정이다. 추천위원회에 들어갈 법관 중엔 각급 판사회의·전국법관대표자회의가 포함된다. 전담재판부에 소속될 법관은 추천위원회·대법관회의를 거쳐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 등 12·3 비상계엄 주요 연루자들은 이미 형사재판 제1심을 받고 있다. 전담재판부는 항소심부터 맡을 예정이다. 대법원은 민주당의 공세에 맞서 반격에 나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대법관 행정회의를 열어 ‘국가적 중요 사건에 대한 전담재판부 설치 및 심리 절차에 관한 예규’를 제정하기로 했다. 여기엔 “형법상 내란·외환죄와 군형법상 반란죄 사건을 전담해 집중 심리하는 전담재판부를 설치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대법원이 규정하는 전담재판부는 무작위 배당을 거쳐 사건을 배당받을 재판부가 지정되는 방식이다. 전담재판부로 지정된 재판부가 원래 맡던 재판은 다른 재판부로 재배당된다. 예규엔 “해당 재판부는 이후 내란·외환과 관련 없는 새로운 사건은 맡지 않는다”는 규정이 포함됐다. 하지만 민주당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박 대변인은 “사법부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왜 이렇게 늦게 했느냐”며 “왜 그동안 국민을 불안과 혼란에 빠뜨렸느냐”고 비판했다. 이어 “국회의 입법권을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맞춰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내란 전담재판부 신설이 갖는 ‘진짜 함의’ 대법원 예규 제정…반격 혹은 타협안 제시 민주당 정청래 대표도 같은 날 최고위원회의 중 “대법원이 헐레벌떡 자체 안이라고 내놨다”며 “더 일찍 해야 하지 않았느냐. ‘조희대 사법부’답다는 생각이 든다”고 비판했다. 국내 헌정사에서 특별재판부는 단 2회만 설치됐다. 제헌헌법 부칙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 등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를 설치했다. 반민특위엔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가 설치됐다. 특별검찰부는 검찰총장 등 9명으로 구성됐고, 특별재판부는 ▲국회의원 5명 ▲법조인 6명 ▲사회 저명 인사 5명 등 총 16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국회가 선출했다. 두 번째 특별재판부는 1960년 4·19 혁명 이후 개정된 제4차 개정 헌법을 근거로 설치됐다. 당시 개정 헌법엔 “3·15 부정선거 및 4·19 혁명 관련자들과 관련된 형사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를 둘 수 있다”는 취지의 부칙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설치된 특별재판부는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제정을 거쳐 설치됐다. 민주당조차 ‘특별재판부’를 ‘전담재판부’로 수위를 낮춰 처리했다는 이유로 내란 특별재판부에 대해 불거진 위헌 시비를 거론한다. 법원은 ‘무작위 전산 재판 배당’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 재판부에 특정 재판을 배당한다”는 취지의 특별재판부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위헌 시비가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아직 헌법재판소가 관련 합헌·위헌 여부를 가린 적도 없다. 하지만 헌법 제27조는 “모든 국민은 헌법·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 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 배당의 무작위성은 재판에 대한 외부의 부당한 압력·영향력으로부터 법관을 보호해 재판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운 원칙이다. 이는 위헌 시비가 불거진 핵심 이유였다. 그래서 과거엔 특별재판부를 설치하기 전에 개헌 과정 중 헌법 부칙에 그 근거를 규정했다. 헌법 부칙은 헌법 본문과 똑같은 효력을 가진다. 그래서 위헌 시비가 불거질 일은 없었다. 피해 가는 위헌 시비 하지만 위헌 시비를 피하려고 제시한 ‘내란 전담재판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이어졌다. 역설적으로 “기존 재판부 배당과 큰 차이가 없다”는 취지의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사법부는 이미 무작위 배당의 예외를 운용하고 있다. ▲특허법원 ▲서울행정법원 ▲지역별 가정법원 등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법원이 따로 설치돼있는 것도 무작위 배당의 예외다. 또 각급 법원은 이미 지식 재산·환경·의료 등 특정 전문 분야를 전담할 재판부를 분류한다. 법원장 재량에 따라, 재판장들과의 협의를 거쳐 특정 사건은 ‘적시 처리 필요 중요 사건’으로 분류해 특정 재판부에 배당해서 신속한 재판 진행을 추진한다. 기소된 사건이 이미 진행 중인 재판과 사실 관계·쟁점·피고인이 같으면, 이미 진행 중인 재판을 담당하는 재판에 배당한다. 물론 민주당이 거둘 수 있는 실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정 대표는 민주당이 ‘특별’을 ‘전담’으로 바꿔가면서도 서둘러 개정안을 추진하는 이유를 분명히 짚었다. 그는 “조희대 대법원장의 사법부와 지귀연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의 재판부는 내란·외환 사건의 심리를 의도적으로 침대 축구하듯 질질 끌었다”며 “조 대법원장은 경고·조치를 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보다 못한 입법부가 나서기 전에 사법부가 진작 내란 전담재판부를 설치했다면, 지난 1년 동안 허송세월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이 분통 터지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대표의 주장 중 핵심 단어는 ‘조희대’와 ‘지귀연’이다. 민주당이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를 추진할 당시 민주당 전현희 최고위원은 지난 9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지 부장판사를 지칭해 “재판의 공정성에 의구심을 갖도록 하는 인사들을 전보·징계한다면, 굳이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들기 위한 입법 조치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정 대표는 지난 15일 최고위원회의 도중 “조희대 사법부는 특검 수사 훼방꾼이 됐다”며 “조 대법원장이 지휘하는 대법원이 지난해 12월3일 내란에 동조한 건 아닌지 강한 의구심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사법행정사무를 총괄하는 조 대법원장의 권한 일부를 사실상 박탈하고, 지 부장판사를 내란 관련 재판에서 손 떼게 할 수 있다면, 민주당은 상당한 실익을 거둘 수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재판부 배당에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힘 실어준 진짜 이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당시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 이후인 지난 2018년 4월 “권한이 집중된 제왕적 대법원장을 견제하고, 법관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를 갖고 설치됐다. 보수 진영 일각에선 이를 일컬어 “지나치게 민주당에 친화적”이라고 비판한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 설치 직후 첫 의장으로 선출됐던 최기상 당시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는 현재 민주당 의원이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지난 9월 민주당이 주장한 의제 ‘대법관 증원론’을 포함한 상고심 제도 개선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어 “사법부는 대법관 증원안을 경청하고 자성해야 한다”는 취지로 보고서를 작성·공개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일컬어 “민주당에 힘을 설어주기 위해 토론회를 개최한 게 아니냐”는 비판 목소리도 제기됐다. 대법원의 이재명 대통령에 대판 파기환송 판결에 대해서도, 정 대표는 지난 9월 전국법관대표자회의에 “조 대법원장 사퇴 권고 등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 회복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일각에선 “대법원의 예규 제정은 반격”이라고 해석한다. 그 근거로는 “내란 전담재판부를 줄곧 반대하다가 갑자기 예규 제정을 밝힌 의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는 점을 들었다. 민주당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 외에도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꿀 만한 사법개혁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대해선 “민주당의 공세를 적절한 선에서 수용해 더 큰 공세에 대비하려는 의도”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특별재판부’가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고 해서 다른 사법개혁안 통과 시도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법원으로선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꾸려는 민주당의 시도를 보면서 검찰이 해체되는 과정을 되새길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미 민주당이 주도하는 사법개혁안 자체가 사실상 ‘기존 법원 해체’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조금씩 권한 잃다 해체 결정 검 종착역은 헌재 최고법원 등극? 민주당 등 범여권이 검찰을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으로 분리해 완수했던 검찰 해체에 대해선 “헌법은 검찰 조직의 존재를 전제로 검찰총장의 존재를 규정했다”면서 위헌 논란을 제기하는 반대 측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범여권은 이를 강행했다. 큰 틀에서 보면, 검찰은 ▲특별검사제도 도입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설치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 분리 등 과정을 거쳐 해체됐다. 최초의 특별검사(이하 특검)는 지난 1999년 김태정 전 검찰총장 부인에 대한 옷 로비 의혹과 한국조폐공사 노조 파업 유도 사건에 대해 진행됐던 최병모 특검이었다. 특검이 성립됐던 배경은 “검찰이 검찰총장의 부인이 연루된 사건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시선이었다. 아울러 당시 국회 구도는 여소야대였다. 한나라당은 “사건을 축소·은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흐름을 타고 강하게 밀어붙여 특검법 제정을 주도했다. 이후 현재까지 개별 특검법은 총 16개가 통과됐고, 상설 특검은 6회 추진됐다. 검찰로서는 1999년 최병모 특검 설치가 수사권·기소권 독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현재까지 총 22회의 특검이 성립됐다는 것은 검찰에 대한 각계의 불신을 상징하는 중요 사실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검찰을 노리는 다음 단계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었다. 최초의 검경 수사권 조정은 지난 2011년 진행됐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사법경찰관이 검사의 수사 지휘에 이의를 제기하는 재지휘 건의 제도 신설 등의 내용이 담긴 안을 대통령령으로 제정해 의결했다. 지난 2016년엔 ▲진경준 게이트 ▲정운호 게이트 ▲김형준 전 부장검사의 스폰서 의혹 ▲최순실 게이트 등이 연이어 발생해 검찰의 신뢰도에 대한 강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이는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장기간 논의된 검경 수사권 논의로 연결된다. 공수처도 설치됐다. 민주당 집권 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을 강하게 기억하는 지지자들의 비원을 외면하긴 어려웠던 측면도 있었다. 그렇게 검찰은 서서히 권한을 빼앗겼다. 그러다가 지난 9월에 이르러 검찰은 내년부터 중대범죄수사청과 공소청으로 갈라질 운명에 처했다. 특히 중대범죄수사청은 행정안전부로 옮겨진다. 서서히 권한을 빼앗기다가 끝내 해체를 앞둔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민주당 등 범여권은 ▲법원행정처 폐지 ▲법 왜곡죄 도입 ▲대법관 증원 ▲재판소원 도입 등 사법개혁안을 시도하고 있다. 범여권이 사법개혁안을 모두 통과시킨다면, 사법부로서는 “검찰에 이어 사법부도 한순간에 와해된다”고 인식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한순간에 와해된다 법원행정처가 없어지면 대법원장의 권한이 줄어든다. 법 왜곡죄가 도입되면, 판사의 재판도 법적 처벌 범위 안에 포함될 위험에 노출된다. 대법관이 늘어나 대법관의 권위·희소 가치가 줄어든 후 재판은 헌법소원 제기 범위 안에 포함된다. 최종 종착지는 헌법재판소가 대법원을 제친 후 최상위 사법기관으로 규정될 순간임을 배제하기 어렵다. 지난 24일은 사법부가 느낄 법한 공포가 처음 피부에 와닿은 날이었을 수도 있다. 새해엔 민주당과 사법부의 전쟁이 더욱 거칠게 진행될지도 모른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