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회생’ 한국당 총선 필승카드

산토끼 잡으러 또 산으로 갈라

[일요시사 정치팀] 설상미 기자= 자유한국당(이하 한국당)의 민생투쟁 대장정이 막을 내렸다. 한국당은 황교안 당 대표를 주축으로 전국을 순회했다. 현장에서 국민들과 소통하며 패스트트랙을 원천 무효화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을 얻고자 했다. 한국당은 보수층들을 결집해 ‘집토끼’ 잡기에는 성공했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민생 법안을 제쳐두고 국회를 오래 방치했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총선이 11개월 남짓한 시점서 한국당이 떠난 ‘산토끼’들을 잡을 카드는 무엇일까.
 

▲ 민생 순회 도중 대구 찾은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

내년 총선은 문정권과 한국당의 마지막 빅매치다. 총선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승리한다면, 기세를 몰아 다음 대선을 승리로 이끌 가능성이 농후하다. 반대로 한국당이 이긴다면 문재인 대통령의 레임덕에 속도가 붙어 정치 판도가 완전히 뒤집힐 수 있다.

동물국회
책임론


흐름을 주도할 수 있는 기회를 앞두고 최근 한국당의 지지율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다. ‘동물국회’ 사태와 한국당 의원들의 막말 논란으로 중도층이 등을 돌리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혐오 프레임을 씌운 정치를 벗어나 국회로 돌아가 통합의 정치를 보여줘야 한다는 의견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 이유다.

당마다 총선을 두고 새로운 인재들을 영입하고 있지만, 국민들에겐 사실상 의미가 없다. 기득권 양당의 자존심 싸움으로 텅 빈 국회가 된지 오래됐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남은 여·야 사람들에게 국회 정상화는 해야 할 과제가 됐다. 한국당에게 출구의 길을 열어 줄 ‘다크호스’는 누가 될지 주목되는 시점이다.

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는 새 취임사를 통해 “내일이라도 당장 나경원 원내대표를 만나뵙겠다”며 국회 현안을 논하고자 했다. 바른미래당(이하 바미당) 신임 오신환 원내대표 역시 나 원내대표와 이 원내대표와의 호프타임을 제안했다.

극적으로 성사된 세 원내대표의 만남은 20일 저녁 여의도에서 진행됐다. 하지만 5월 임시국회 소집을 비롯한 현안 논의와 국회 정상화의 결론을 도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국당은 국회 정상화를 위해서는 패스트트랙의 원천 무효, 민주당의 사과, 대통령과의 일대일 영수회담을 요구했다. 집을 떠난 한국당과의 협치를 위해 남은 당들이 골머리를 썩고 있는 상황이다.

국민들의 반응은 어떨까. 지난 20일 ‘리얼미터’가 실시한 유권자 조사 결과 민주당이 상당 폭 결집한 반면, 한국당은 상승세를 탄 3개월 만에 가장 큰 폭으로 떨어지면서 상승세가 꺾였다. 이를 두고 한국당이 보수층을 결집해 ‘집토끼’는 잡았으나 동물국회와 혐오 프레임을 씌운 정치 행보로 중도층인 ‘산토끼’를 놓쳤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등 돌린 중도층…어쩌나
갈등만 남아, 정치혐오↑


한국당의 전신인 새누리당은 2012년 국회 폭력을 없애고 몸싸움이 아닌 설득과 대화로 입법을 유도하고자 ‘국회선진화법’을 만들었다. 그로부터 7년 후, 국회서 빠루가 등장하고, 무력 충돌로 의원들과 보좌관들이 다수 다치면서 이는 무용지물이 됐다.

한국당은 선거법과 검찰 개혁 법안의 패스트트랙 선정에 격렬히 반대했다. 바미당 채이배 의원이 패스트트랙에 찬성표를 내는 것을 막기 위해 한국당 의원들은 채 의원을 의원실 안에 감금했다. 의안과에 들어가려는 민주당 의원들을 한국당 의원과 보좌진이 서로의 팔을 엮어 저지했다. 밤샘 대치와 몸싸움에 골절상과 실신, 깁스 등 부상자가 속출하며 의안과 사무가 불가능해지자 문희상 국회의장은 33년 만에 경호권을 발동했다.

이후 국민적인 비난이 거세지자, 한국당은 “한 당만 일부러 제외한 ‘야합’으로 패스트트랙을 해결하려 한 여야 4당의 잘못”이라며 의회 민주주의 절차를 먼저 어겼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장상환 경상대 명예교수는 “여당이 한국당을 따돌리고 다른 야당과 협력해 법안 통과를 추진하는 것은 다른 민주주의 국가서 일상인 연정의 모습이다. 정치적 자유와 절차적 민주주의가 보장돼있는데도 독재라고 하는 것은 자신을 존중해주지 않는다는 불평을 드러낸 표현일 뿐”이라고 말했다.
 

▲ 국회서 여야4당의 패스트트랙에 반대하며 시위 중인 자유한국당 ⓒ사진공동취재단

성난 민심은 예상대로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동물국회 이후 한국당의 해산을 요구하는 청와대 청원글은 180만명에 육박하는 동의를 얻었다.

한국당 나 원내대표는 지난 22일 원내대표·중진의원 연석회의서 “패스트트랙이 무효인 것은 자명하고 절차와 내용이 모두 틀렸다”며 “청와대와 여당서 분명한 사과와 원천 무효에 대한 입장을 밝혀달라”고 압박했다.

민주당이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한국당의 요구안을 민주당이 선뜻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만큼 원내수석 간 협상은 난항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만났지만
성과는…

당 일각에서는 체면을 차리기 위한 명분을 따지며 장외서 싸우는 대신 원내서 싸워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국회 파행이 계속 장기화 되면, 민생은 뒷전이라는 여론의 역풍이 고스란히 총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당 장제원 의원은 “국회에 돌아가기 위한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면, 조건 없이 등원하는 것이 훨씬 더 깔끔하다”며 “조건 없이 등원해서 추경도 심의하고, 법안도 논의하면서 묵은 감정을 풀어가는 것이 훨씬 진지한 정치”라고 주장했다.

‘5·18 망언 3인방’에 대한 미징계도 민심이 얼어붙는 데 일조했다. 올해 2월, 한국당 이종명 의원의 “5·18은 북한군이 개입한 폭동” 발언과 5·18 유공자를 ‘세금을 축내는 이상한 괴물집단’이라 말한 김순례 의원의 발언은 논란을 불러왔다. 김진태 의원은 “5·18 문제만큼은 우파가 결코 물러서면 안 된다”는 입장을 표명하기에 이르자, 당 내부서도 세 의원에 대한 징계절차를 밟았다.

김진태·김순례 의원에게는 경고와 당원권 정지 3개월이 내려졌다. 이 의원의 제명 절차는 여전히 의원총회 의결을 넘지 못했다. 솜방망이 처벌과 미징계로 한국당은 5·18 희생자들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고 유야무야 넘기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지난 18일 한국당 황 대표는 광주서 열린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여했다. 광주 시민들의 거센 반발이 예상됨에도 호남 민심을 위한 불가피했던 선택으로 보인다. 망언 의원들에 대한 징계 없는 기념식 참석을 반대해 온 시민단체가 황 대표를 향해 달려들면서 현장에선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문 대통령 역시 이날 연설문서 “독재자의 후예가 아니라면 5·18을 다르게 볼 수 없다”며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조속한 출범을 국회에 촉구했다. 보수층에서는 황 대표가 5·18 추모식에 참여한 것을 ‘잘한 결정’이라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이와 반대로 진보층과 호남에선 80% 전후가 ‘잘못한 결정’이라고 응답했고, 무당층과 중도층서도 ‘잘못한 결정’이라는 부정적 응답이 우세했다.

황 대표가 20일 전북 지역 핵심현안들을 집중 부각하고 나선 것도 주목되는 점이다. 당 차원의 청사진 마련을 통해 불모지의 표심을 이끌어 오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정치 신인 황 대표의 행보가 일관적이지 못하다는 공개적인 목소리도 흘러나온다. 내년 총선을 대비해, 호남에 외연을 확장하고자 한다면 색깔론을 접어두고, 5·18 과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게 의견이 우세하다.

▲ 5·18기념식에 참석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잇단 망언
유야무야


황 대표는 색깔론으로 강성 보수 지지층을 결집하고자 했다. 문정부를 ‘좌파독재’로 규정하고, “좌파 중에 정상적으로 돈 번 사람들이 거의 없다. 다 싸우고 투쟁해서 뺏은 것” 등과 같은  적대적 발언으로 수위를 높여갔다. 지난 21일 황 대표는 장외투쟁 현장서 “내가 왜 독재자의 후예냐”며 “진짜 독재자의 후예에게는 말 하나 못하니까 대변인 짓을 하고 있다”며 문 대통령을 겨냥해 각을 세웠다. 황 대표의 말에 청와대는 “막말이 또 다른 막말을 낳는 상황”이라고 강력히 반발했다.

혐오가 혐오를 부추기는 정치권의 흐름은 이뿐만 아니다. 정의당 이정미 대표의 “황 대표는 거의 싸이코패스 수준”이라는 말에 한국당 김현아 의원은 문 대통령을 국민들의 고통을 못 느끼는 ‘한센병 환자’로 맞받아쳤다. 이후 한센병 환자와 가족들의 큰 반발이 일자, 김 의원은 발언 다음날 대국민 사과를 했다.

나 원내대표는 대구서 문 대통령의 지지자들을 향한 ‘달창’ ‘문빠’ 발언 이후 “정확한 의미를 몰랐다”며 사과했다. 이에 여야 4당 여성의원들은 ‘최악의 여성 혐오와 비하 표현’으로 강한 유감을 표명하며 징계안을 제출했다. 정의당은 “한국당이 표 벌이를 위해서 혐오정치를 조장하고 있다”며 유감을 표했다.

경제지표 악화와 두 차례에 걸친 북한의 미사일 도발은 중도층의 표심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한국당서 문정부의 레임덕 문제를 지적하며 분위기를 전환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달창’ 발언에 묻혔다. 정부의 실책들이 고스란히 반사이익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중도층의 관심과 기대에 찬물을 끼얹게 된 셈이다.

▲ 국회 본회의 통과를 기다리는 민생 법안들이 국회 의안과에 방치돼있다.

최창렬 용인대 정치학 교수는 “현재 장외투쟁은 갈등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겠다는 한국당의 총선 전략은 강경 보수 지지층을 결집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지속할 경우 중도층의 반감과 염증을 키울 수 있다”고 진단했다.


지난 19대 총선서 한국당의 전신 새누리당은 참패했다. 보수의 성지라 불리는 대구·경북과 부산·경남서 민주당과 무소속에 두 자릿수 이상의 의석을 내주고 말았다. 중도층의 이탈이 지난 총선 패배의 원인으로 꼽혔다.

합리적 충청 민심
보수대통합 언제?

지난 지방선거서 홍준표 전 대표는 강경보수 노선으로 대구·경북 중심의 당 운영을 고수했다.

“호남 민심을 배제하는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홍 전 대표는 “나는 거(그곳) 민심 안 봅니다"라고 답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지방선거서 대구시장과 경북지사 선거서만 승리했고, 호남 지역에선 3% 미만의 ‘싸늘한’ 지지율로 심판 받았다.  홍 전 대표의 보수 우파 결집 수단이었던 호남 배제 전략이 패배에 이르게 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대한민국은 국민의 절반이 중도인 나라다. 지역을 불문하고 중도층의 반감이 이대로 극심해지면 한국당은 내년 총선서도 패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충청 민심을 얻기 위한 쟁탈전서 한국당이 선점하는 것도 중요해 보인다. 충청도는 지금까지 민심의 바로미터 역할을 해왔다. 역대 대선서 충청권서 승리한 후보는 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당선됐다. 총선서도 예외가 아니다.


13대 총선부터 충청권서의 성적이 좋을 땐 그 당의 전국 성적표가 좋았다. 14·17·19대는 충청권 1당이 다수당이 됐다. 20대는 여야가 고르게 충청권 의석수를 고르게 나눠 가졌다. 충청도는 연고 정당에 상관 없이 실리적인 판단을 한다는 방증이다.

지역 정치권 한 관계자는 “그동안 그랬듯 내년 총선 역시 충청권이 캐스팅보트 역할을 할 것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며 “이 때문에 내년 선거 역시 충청권 표심을 잡기 위한 경쟁이 어느 때보다 치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당 나 원내대표는 유튜브 방송 ‘신의한수’에 출연해 “창원 성산 보궐선거서 대한애국당(이하 애국당)의 표가 저희에게 왔으면 이길 수 있었다”며 “우파는 통합해야지만 다음 선거서 승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산술적으로 계산했을 때 나 원내대표의 주장에 설득력이 있다는 게 정설이다. 그렇다고 한국당이 애국당과의 통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고 할지는 미지수다. 애국당과의 통합이 ‘중도층 표심 확장’에는 오히려 마이너스로 작용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달창’으로
기회 놓쳤나

또, 당내 개혁 보수층과 바른정당 출신 인사들이 세력 규합을 통해 현 지도부 등 주류층과 조율에 나선다면 보수 통합이 이뤄질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바미당은 최근 내홍으로 내년 총선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바미당 유승민 전 대표는 “내년 총선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낮다고 해서 한국당에 다시 들어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입당설을 일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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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