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는 지금’ 호남 건설사 전성시대

촌스럽다고? 이제는 ‘전국구’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호남지역에 뿌리를 둔 중견 건설사들이 약진하고 있다. 이들 건설사는 10년 새 시공능력평가액이 최대 10배 가까이 늘어나며 건설업계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대체로 IMF 경제위기 때 적극적인 투자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고, 2기 신도시 개발 당시 공공택지 개발에 적극 참여하면서 성장 기반을 갖췄다. 이제는 대형 건설사들에 비견될 정도다.
 

호반건설주택은 지난해 시공능력평가서 평가액 2조1619억원을 받아 13위에 올랐다. 호반건설과 호반건설산업, 호반베르디움의 평가액은 각각 1조7859억원, 1조1582억원, 438억원이다. 네 기업의 시공능력평가액을 합하면 모두 5조1498억원으로, 통상 3조원을 넘으면 대형 건설사로 간주하는 건설업계서 이미 안정적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형 건설사 
부럽지 않아

재벌 대기업의 건설 계열사인 SK건설과 HDC현대산업개발, 한화건설의 시공능력평가액은 각각 3조9578억원, 3조4280억원, 2조8623억원으로 호반건설그룹에 비해 한참 떨어진다. 호반건설그룹이 건설 계열사들에게서 얻는 영업이익은 이미 대형 건설사를 앞질렀다.

호반건설과 호반건설산업, 호반건설주택이 2017년에 낸 매출은 연결기준으로 모두 5조1171억원이다. 삼성물산과 현대건설, 대림산업, 대우건설, GS건설 등 대형 건설사들이 해마다 10조원 이상의 매출을 낸다는 점과 비교할 때 절반 수준이다.

하지만 영업이익만 살펴보면 호반건설그룹은 호반건설과 호반건설산업, 호반건설주택을 통해 모두 합쳐 흑자 1조3474억원을 냈다. 대림산업과 대우건설, GS건설이 2017년에 낸 영업이익을 합쳐도 1조3000억원을 밑돈다.


김상열 회장은 주택사업에만 전력투구하는 전략을 썼는데 건설업계서 호반건설그룹의 입지를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김상열 호반건설 회장은 1961년생 전남 보성 출신으로 조선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한 뒤 중소건설사에서 일하다가 호반을 설립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회장은 호반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금융업을 시작했다. 지금 호반건설은 호반이 설립한 호반건설산업이 모체다. 호반건설산업은 현대파이낸스라는 이름으로 1996년 설립됐다. 김 회장은 이듬해 현대파이낸스의 이름을 현대여신금융으로 변경하고 할부금융 사업을 펼쳐나갔다. 그러던 중에 IMF사태가 발생했다. 하지만 IMF사태는 김 회장에게 기회였다.

호반, 10년 새 10배 성장…시평 2조 넘어
중흥, 자산규모만 7조 넘는 대형사 성장

현대여신금융은 1999년 신화개발주식회사로 이름을 변경하고 호반의 건설사업부문을 인수했다. 2000년엔 사명을 호반건설산업으로 다시 변경하고 본격적으로 건설사업 확대에 나섰다. IMF사태로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자 여러 곳에 땅을 사 ‘호반리젠시빌’이라는 이름으로 주택분양사업을 펼쳤다.

호반건설의 기반은 광주였지만 이때부터 울산, 대구, 천안 등 전국적으로 사세를 확장해갔다.

중흥건설 역시 광주를 대표하는 향토건설사 중 한 곳이다. 중흥건설을 설립한 정창선 회장은 광주서 태어나고 자란 광주 토박이로 알려져있다. 1983년 중흥주택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시작해 1989년 현재의 중흥건설로 상호를 변경했다.
 


중흥건설은 2000년대 초반에 내놓은 아파트브랜드 ‘중흥S-클래스’로 주택시장서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지방에 거점을 둔 건설사 이미지를 지우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정창선 회장은 대형 건설사들이 관심 있게 지켜보지 않았던 지역의 땅을 싸게 대량으로 매입한 뒤 아파트를 분양해 파는 방식으로 중흥건설의 사세를 급격하게 키웠다.

그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공급하는 공공택지지구 입찰에 주력했다. 특히 대형 건설사들이 수백억원의 위약금을 물고 포기했던 세종시의 땅을 사들인 덕을 톡톡히 봤다.

가파른 상승
계열도 성장

중흥건설은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세종시에 모두 12개 단지, 1만3000가구에 이르는 아파트를 공급했는데 전 물량이 분양돼 중견 건설사로 성장할 기회를 잡았다. 행정복합중심도시로서 위상이 강화되고 있는 덕에 수요가 몰린 효과를 본 것이다.

중흥건설은 2010년만 하더라도 시공능력평가 순위 104위에 머물러 중소건설사로 분류됐다. 하지만 2011년 94위에 올라 ‘100대 건설사’로 진입한 데 이어 2012년 77위, 2013년 63위, 2014년 52위, 2015년 39위, 2016년 33위로 순위가 상승했다. 2018년 순위가 59위까지 밀렸지만 그사이 주요 계열사인 중흥토건을 22위, 시티건설을 51위 등으로 끌어올리며 그룹의 외형은 더욱 커졌다.

지난해 중흥건설이 선보인 분양 단지들이 양호한 청약성적을 거둔 가운데 올해 분양 예정 단지들에 대한 수요자들의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지난달 18일 금융결제원 아파트투유에 따르면, 중흥건설은 지난해 서울·경기·전남(3개)·충남(2개)·광주·제주 등지서 총 9개 단지를 분양했다. 이 중 지난해 1월 충남 당진서 분양한 ‘당진대덕수청 A4 중흥S-클래스 파크힐’과 같은 해 3월 제주시 연동서 분양한 ‘제주시 연동 중흥S클래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1순위 내 마감에 성공했다.

가장 높은 경쟁률을 보인 단지는 전라남도 광양시서 분양한 ‘중흥S클래스 에듀하이’다. 이 단지는 일반분양 381가구 모집에 총 1만7065명이 몰려 평균 44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중흥건설은 올해 수도권을 비롯해 전국서 1만3094가구를 선보일 예정이다.

우미건설은 ‘다크호스 건설사’로 주목받고 있다. 1982년 이광래 회장이 삼진맨션 분양을 시작으로 출발한 이 회사는 1991년 우미주택(현 우미건설)으로 전열을 가다듬고 사업을 확대하면서 성장가도를 달려왔다.

다크호스 회사
브랜드 순위는?

지난해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종합건설업자 시공능력평가서 42위를 기록한 데 이어 건설공제조합과 주택도시보증공사 신용평가서 각각 AA등급을 받았다. 주택분야서 ‘린(Lynn)’ ‘린 스트라우스(Lynn StrauS)’ 등의 브랜드를 사용 중인 우미건설은 지난해 한국리서치와 부동산114가 공동으로 조사한 아파트 브랜드 순위서 10위에 랭크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대형 건설사를 제외한 중견 건설그룹 중에서는 선두를 달렸기 때문이다.

우미건설은 호남지역을 바탕으로 착실히 실력을 쌓기 시작, 오늘날 수도권 주택건설 시장서도 입지를 강화하며 위세를 떨치는 어엿한 중견건설사로 도약했다. 호남지역뿐 아니라 부산, 대전, 천안, 화성, 용인, 인천 등에서도 잇달아 아파트 분양에 호실적을 올리면서 ‘전국구 건설사’로 도약하는 발판을 다졌다.
 

특히 지난 1월 검단신도시에 짓는 ‘우미린 더퍼스트’ 아파트 1268가구의 경우 100% 분양계약을 성사시켰다.

우미건설 관계자는 “검단신도시가 지난해 말 청약제도 개편으로 전매제한 기간이 1년서 3년으로 늘어나고, 인근 3기 신도시 발표 등의 우려 속에서 조기에 100% 계약이 완료돼 그 의미는 남다르다”고 밝혔다.

우미건설은 2017년 뉴스테이(기업형 임대주택), 지식산업센터 등의 신사업이 히트를 치면서 매출이 전년 4000억원대서 7000억원대로 껑충 뛰어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같은 해 2111억원 규모의 ‘김포 북변3구역 재개발사업’을 따냈으며 지난해에는 용산역세권 개발지역인 국제빌딩 5구역 입찰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최근 들어 대형 건설사들만의 독보적 영역으로 여겨온 정비사업에 중견사들도 활발히 진출하면서 향후 우미건설의 행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우미건설은 올해 전국적으로 총 8400가구의 아파트를 공급할 계획이다. 수도권에 5953가구를 집중투입하는 것을 필두로 세종시 465가구, 대전광역시 760가구, 기타 도시 1276가구 등이다.

우미건설 사업 다각화로 성장세
도산한 TK 건설사와 다른 행보 

건설업계 관계자들은 호남지역 건설사들이 김대중정부 때 집중적으로 수혜를 입어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중흥건설의 경우 1999년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경제회복의 밑거름이 됐다며 감사와 치하의 서신을 받았고 대한주택공사로부터 우수시공업체로 선정되기도 했다. 중흥건설은 1999년 매출 456억원서 2000년 매출 864억원으로 1년 만에 매출이 두 배 가까이 급증했다. 이어 이듬해에는 매출 1142억원으로 1000억원을 돌파했다.

다른 건설사들도 김대중정부 시절 가파른 성장을 했다. 호반건설의 매출은 1999년 38억원서 김대중정부 말기인 2002년 988억원으로, 우미건설은 같은 기간 293억원서 1077억원으로 각각 늘어났다.

호남에 뿌리를 둔 건설사들이 2000년대 중반 이후 급성장한 것을 보면 1990년대 대구·경북 건설사들의 수도권 진출과 유사하다는 말도 나온다.
 

정부가 1990년대 수도권 신도시 건설을 추진하면서 대구·경북 지역의 중견 건설사인 청구·우방·건영 등이 분당과 판교, 일산 등 수도권지역에 대거 진출했다. 이들은 공격적으로 주택사업을 확장해 아파트 분양시장의 강자로 떠올랐다. 1997년 건설사 시공능력평가 순위서 청구는 21위, 우방은 32위, 건영은 37위까지 올랐다.

그러나 외환위기 전후로 주택시장이 침체에 빠지고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들 건설사들은 줄도산을 맞았다. 건영은 LIG그룹에 인수돼 2007년 10년 만에 법정관리를 졸업했고, C&그룹에 인수된 우방은 2005년 5년 만에, 청구는 2006년 7년 만에 간신히 법정관리서 빠져나왔다. 지난해 시공능력평가서 LIG건설은 85위, 우방은 187위를 차지했으며 청구는 2010년 결국 부도처리됐다.

DJ정부 수혜?
영남과 다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지역을 기반으로 전국구 건설사로 성장했다는 점은 비슷하나 과거 청구와 우방에 비하면 최근 약진한 호남 건설사들은 재무상태가 나쁘지 않은 편”이라며 “과거 무리한 사업확장으로 도산한 건설사들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는다면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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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한미 정상회담 팩트시트가 공개되자, 가장 큰 화제가 된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에 대해 “문구가 추상적이어서 모호하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자극 받은 일본도 핵잠수함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핵잠수함 건조를 현실화하지 않으면 “일본에 핵 보유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의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하게 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달 29일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타결된 한미 관세·안보 협상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가 지난 14일 공개됐다. 가장 큰 논란은 핵 추진 잠수함(이하 핵잠수함) 관련 합의 문구였다. 산 너머 산 구체성 없다 팩트시트를 통해 확인되는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선 “구체성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팩트시트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민간·해군의 원자력 프로그램 ▲한미 원자력 협정에 부합하고 미국의 법적 요건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로 귀결될 절차 등을 지지한다. 이어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고, 한국과 조선 사업 요건 진전·연료 조달 방안 등을 포함해 긴밀히 협력한다. 미국은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 지지·승인·협력할 뿐이다. 이를 두고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같은 날 브리핑에서 “한미 정상의 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에서 건조하는 게 전제였다”며 “우리 핵잠수함을 미국에서 건조하는 방안은 거론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같은 날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며 “국내 건조 장소 합의는 팩트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기자들 앞에서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을 발표하면서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건조될 것”이라며 “미국 조선업이 곧 대대적인 부활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핵잠수함이 건조되려면, 산적한 현안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 팩트시트엔 건조 장소가 적시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명시해 발표했기 때문에, 미국이 순순히 양보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같은 회담 결과를 두고 양국의 주장이 엇갈리는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다.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및 핵연료 재처리엔 ▲한미 원자력 협정 부합 ▲미국의 법적 요건 준수 ▲한국의 평화적 이용 등 단서가 붙는다. 기술 이전 과정에도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핵잠수함 보유국은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인도 등 6개국이다.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30일 “미국이 핵잠수함 기술을 공유한 사례는 1950년대 최우방국 영국과 협력한 사례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미국의 핵잠수함 기술은 미군이 보유한 가장 민감하고 철저히 보호돼온 기술”이라며 “가까운 동맹인 영국·호주와 체결한 핵잠수함 협정에서도 직접 기술 관련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우리에겐 우라늄 농축·재처리 기술이 없어서 미국으로부터 핵연료를 공급받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하지만 연료 공급 장소·방식은 팩트시트에 명시되지 않았다. 연료 공급 방법을 확보하지 못하면, 핵잠수함을 만드는 의미가 없다. 핵잠 건조 추상적인데 “고정밀지도 내놔” 발 빠르게 비핵 3원칙 수정하려는 일본 미국의 법률 개정 절차도 거쳐야 한다. 미국 원자력법은 ‘미국이 다른 나라와 군사적 목적의 원자력 협력을 하려면, 원자력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미 원자력 협정을 개정한 후 미국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국제 무기 거래 규정도 상원의 동의를 얻어 개정해야 한다. 원자력 협정 개정이 팩트시트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미국 에너지부의 반대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미국 일각에서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한단 것이다.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미국에 고정밀지도를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팩트시트엔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포함한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정책에 있어 미국 기업이 차별당하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위치·재보험·개인정보에 대한 것을 포함해 정보의 국경 간 이전을 원활하게 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도 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온라인플랫폼의 ▲자사 우대 ▲끼워팔기 ▲멀티호밍 제한 등을 막는 내용이 담긴 우리의 온플법 제정을 반대했다. 팩트시트를 따르면, 미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가 어려워진다. 아울러 우리는 구글·애플이 요청하는 1:5000 축척 고정밀지도 국외 반출 요청을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정부는 애플이 요청한 지도 반출 여부를 다음 달에, 구글의 요청은 내년 2월 결정할 예정이다. 팩트시트에 게재된 합의 사항대로라면, 애플·구글의 요청을 수용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 박성훈 수석대변인은 지난 15일 논평을 통해 팩트시트 속 위험요소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박 대변인은 “정부는 ‘농·축산물 개방은 없다’고 말해 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대로 농·축산물 개방 문구가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고정밀 지도 반출 등 대한민국의 디지털 주권과 직결된 사안까지 미국의 요구를 반영해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반도체 관세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보다 불리하지 않게 한다’는 모호한 문구만 있다”며 “경쟁국 대만과 비교해 어떻게 적용할지 등 구체적인 내용은 팩트 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50억달러(약 36조7183억원) 규모의 미국산 군사 장비를 5년 동안 구매하고, 주한미군에 대해 330억달러(약 48조4682억원)를 포괄적으로 지원하면, 천문학적인 재정 부담을 떠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핵잠수함 건조 과정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라서 장밋빛 전망만 내세울 때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고정밀지도 반출 가능성 실제로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가 실현되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해서 실질은 아직 불투명하다”며 “선언이 지나치게 앞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는 핵잠수함 나비효과가 일본으로 번졌단 점이다.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자, 일본 정치권도 크게 술렁였다.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은 지난 12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미국·중국은 이미 핵잠수함을 갖고 있고, 지금은 핵잠수함을 보유하지 않은 한국·호주가 앞으로 보유하게 된다”며 “일본의 억지력·대응력을 강화하려면, 전고체·연료전지·원자력 등 다양한 동력원에 대해 폭넓게 논의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일본은 1967년 사토 에이사쿠 당시 총리가 선언했던 비핵 3원칙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비핵 3원칙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선언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일찍부터 핵무기 반입 금지 방침 완화를 주장했다.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도 같은 날 “현 시점에선 재검토 여부를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국회 연설에서 “내년 중 3대 안보 문서 개정을 위해 검토를 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3대 안보 문서는 ▲국가안보 전략 ▲국가방위 전략 ▲방위력 정비 계획 등을 말한다. 여기엔 비핵 3원칙이 모두 포함돼있다. 일본은 이미 지난 2022년 “반격 능력을 보유하고, 장거리 미사일 전력을 향상한다”는 내용을 3대 안보 문서에 포함했다. 묘한 것은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이 일본 국내 정치구도까지 뒤흔들 가능성이 있단 것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카이치 총리가 선출될 당시 라이벌이었다. 지난달 4일 진행된 자민당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183표(31.1%)를 얻었고, 고이즈미 방위상은 164표(27.8%)를 얻었다. 결선투표에선 다카이치 총리가 185표(54.3%)를, 고이즈미 방위상은 156표(45.7%)에 머물렀다. 하마터면 다카이치 총리는 자민당 총재·총리로 선출되지 못할 뻔했다. 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로 통하는 다카이치 총리에 반발한 공명당이 지난달 10일 자민당과의 연정에서 탈퇴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명당 사이토 데쓰오 대표는 고이즈미 방위상에 대해선 “정치자금 규제와 관련된 공명당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면서 호평했다. 고이즈미 방위상도 “지금까지 정책 실현에 대해 힘써 주신 것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화답했다. 미일 협력 중국 견제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0일 기적적으로 일본유신회와의 각외 협력 형태의 연립 정권 구성에 합의했다. 각외 협력은 연립 정권 구성엔 합의하지만, 내각엔 참여하지 않는 형태를 말한다. 일본유신회가 제시한 조건은 ▲오사카 부수도 지정 구상 수용 ▲국회의원 정원 10% 감축 ▲기업·단체 후원 폐지 ▲평화 헌법 개정 ▲방위력 강화 등이었다. 자민당과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모두 수용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1일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했다. 가장 큰 정치적 의미는 ‘당내 정적 포용’이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전혀 없는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해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정반대의 의미를 강조하는 해석도 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없는 고이즈미를 현안이 산적한 방위성 장관으로 임명해 자멸을 유도한다”는 취지의 해석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주어진 현안은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 ▲자주적 방위력 강화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 ▲방위 장비 수출 운용지침 폐지 등이다. 이중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은 ‘중국 견제’라는 미국·일본의 공통 이해관계로부터 시작됐다. 일본은 군사력을 강화해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역할을 맡으려고 한다. 미국은 일본의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더 효율적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 문제는 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 “방위비를 GDP(국내총생산)의 3.5%로 증액하라”고 요구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8일 진행된 미일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위비 증액·방위력 강화 방침을 설명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음 날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을 만나 “방위비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오는 2028년 3월까지 방위비를 GDP의 2%까지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방위 정책과 관련해 국내 정세와 가장 민감하게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을 곤란하게 할 사안이 있다. 바로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이다. 일본 오키나와현 소재 후텐마 기지는 기나완시 시가지 한복판에서 시 면적의 1/4을 차지하고 있다. 후텐마 기지는 1945년 건설됐고, 일본에서 크고 작은 논란을 일으켰다. 오키나와현의 주민 중 상당수는 미군의 범죄와 소음 피해 등을 이유로 기지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팩트시트’ 고이즈미 날개 다나 견제 압박 와중에 뜻밖의 호재 지난 2004년엔 후텐마 기지 소속 헬리콥터가 오키나와국제대학에 추락하는 등 사고도 여러 번 발생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편입된 시점은 1879년이었다. 1945년부터 1972년까진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따라서 오키나와에선 반미 감정이 강하고, 자민당 지지율이 낮은 편이다. 후텐마 기지와 관련해서도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섬 내 나고시 헤노코 이전을 추진했지만, 오키나와 현·주민의 반대가 강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23년엔 다마키 데니 현지사가 방위성이 신청한 비행장 설계 변경 신청을 승인하지 않고 공사 중단을 요구했다.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은 일본의 역사적 맥락과 맞물려 수십년 넘게 해결되지 못한 사안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중국 견제를 위한 새 안보 질서와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정치적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 2019년 고이즈미 방위상을 환경상으로 발탁했다. 이 임명에 대해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무게를 키우면서도, 문제가 발생하면 그를 정치적으로 낙마시킬 수도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의 아버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퇴임 이후 강력한 원자력 발전소 폐지론자가 됐다. “아버지의 활동이 아들의 정치적 미래를 흐리게 할 수 있어 고이즈미 방위상을 견제하는 묘수”란 평가도 있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기후 변화 문제는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등 적당히 괴상한 발언을 하는 등 바보 행세를 하면서 견제를 피했다. 한동안 일본에선 고이즈미 방위상이 진짜로 바보인지, 바보인 척 연기를 하는지 장난 섞인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후 고이즈미 방위상은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고노 다로 전 외상과 연합해 이시바 내각 탄생에 큰 공을 세웠다. 이어 농림수산상으로서 쌀값 폭등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지난 2023년엔 자민당 내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조기 의회 해산 및 총선거 진행을 적극적으로 제안한 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자민당은 중의원 과반에 미달하는 의석을 얻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더 큰 패배를 당하기 전에 적절한 시점에서 중의원 해산을 건의했다”며 긍정적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방위상 취임 이후엔 어떻게 구 아베파·아소파의 견제를 피할 것인지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한 사안은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견제 수위를 낮추면서 자민당·내각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뜻밖의 호재로 다가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이 일본의 핵잠수함 도입을 주도한다면,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가 될 수도 있다. 견제 회피 일거양득 우리의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일본 정치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사안이 된 것이다. 만약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불확실해지면, 이재명정부는 이 때문에 더욱 큰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일본의 군비 증강에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미래를 위한 발판을 제공한 것”이란 비판이 따라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핵잠수함 나비효과는 이렇게 일본으로 번졌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