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데뷔 60주년’ 이미자가 걸어온 길

  • 박창민 기자 cmp@ilyosisa.co.kr
  • 등록 2019.03.04 09:58:28
  • 호수 12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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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잃고 배고픈 설움 노래로 달래다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해 올해로 노래 인생 60년을 맞은 가수 이미자. 인생의 8할을 ‘엘레지의 여왕’으로 불렸다. 길었던 세월만큼 우여곡절도 많았다. 그의 노래 인생을 돌아봤다. 
 

▲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

이미자가 지난달 21일 데뷔 60주년을 기념하는 앨범 <노래 인생 60년, 나의 노래 60곡>을 발표했다. 1959년 열아홉에 데뷔, 어느덧 가수 생활 ‘환갑’을 맞이하면서 한 데 모은 60곡이다. 이번 기념 앨범은 ‘감사, 공감, 순수’의 타이틀을 붙인 3개의 CD로 나왔다. 이미자의 대표곡과 신곡에 전통가요를 버무렸다.

노래인생 
어느덧 환갑

가장 눈에 띄는 건 1번 CD의 첫 곡 ‘내 노래, 내 사랑 그대에게’이다. 이 노래는 60주년을 기념해 새로 만든 곡이다. 60년간의 활동을 지지해준 팬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그 뒤를 이어 50주년 기념곡 ‘내 삶의 이유 있음을’, 45주년 기념곡 ‘내 영혼 노래가 되어’ 등이 수록돼있다. 물론 국민적 사랑을 받은 대표곡도 포함돼있다. 

이미자는 “50주년 기념곡이 마지막인 줄로만 알았는데 운 좋게 60주년 기념 공연을 준비하게 됐다”며 “감사한 마음을 보답하기 위해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을 담고자 했다”고 말했다. 실제 공연처럼 라이브 연주에 맞춰 10여곡을 새로 녹음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성량이 예전만 못해 조금 부끄럽기도 하지만 20대부터 70대까지 목소리를 통해 지나온 세월과 변해가는 과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와 ‘흑산도 아가씨’를 듣고 눈물 한 번 훔치지 않았던 청춘이 있었을까. 그는 “다 같이 어렵던 시절과 노랫말 및 목소리가 잘 맞아서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며 “오늘 여기 온 기자들보다 그 부모님 세대의 사랑이 더 컸기에 이런 뜻깊은 자리를 가질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신곡 ‘내 노래, 내 사랑 그대에게’ 역시 이 같은 감정의 연장선에 있다. 50주년 기념곡 ‘내 삶의 이유 있음을’을 만든 김소엽 시인, 장욱조 작곡가와 다시 한번 손을 잡았다. 이미자가 소회를 밝히면 김 시인이 노랫말로 다듬는 식이었다.

59년 19세 데뷔해 무수한 히트곡
2000여곡 부른 ‘엘레지의 여왕’ 

다만 10년 전 노랫말이 설움이 굽이굽이 맺혀있었다면 이번엔 “우리의 눈물은 이슬 되어 꽃밭에 내리고/우리의 아픔은 햇빛 되어 꽃을 피웠네” 등 한결 온화해졌다.   

그 시절 이미자의 마음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는 ‘동백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 등 3대 히트곡이 금지곡으로 묶였을 때를 꼽았다. 각각 ‘왜색이 짙다’, ‘다른 노래와 몇 소절이 같다’, ‘너무 처량해서 비탄조다’ 등의 이유였다.

“1964년 ‘동백 아가씨’가 KBS 음악방송서 35주간 1위를 했는데, 하루아침에 차트서 없어졌다.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고, 무대서 부를 수도 없었다. 목숨을 끊어놓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팬들께서 한사코 불러주신 덕분에 큰 힘이 됐다.”   

이미자는 가장 잊지 못할 순간을 1959년 데뷔, 1973년 베트남 위문 공연, 2002년 평양 단독 공연 등 최초의 순간을 꼽았다. 하지만 이미자 앞에는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니는 아픔이 있다. 이미자는 “가장 기뻐야 했을 때 역시 항상 붙어 다니는 꼬리표 때문에 힘들었다”고 말했다.

당시 세간에서는 이미자의 노래가 ‘천박하다’ ‘술집에서나 부르는 노래다’ 등 세간의 평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미자는 소외감을 느꼈으며, 서구풍 발라드 노래를 불러 볼까도 생각했었다. 이미자는 “당시 참았다. 견뎠다. 60년이 흐르고 난 지금에 와서는 절제하면서 잘 지내왔구나 하는 마음에 자부심까지 갖고 있다”며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이번 앨범은 감사·공감·순수를 테마로 3장의 CD에 각 20곡씩 눌러 담은 앨범이다. 그간 발표된 560장의 앨범과 2100여 곡 중에 추리는 것만도 대작업이다. 첫째 둘째 CD가 기념곡과 히트곡 위주라면, 세 번째는 온전히 가요계 선배들을 위한 장으로 ‘눈물 젖은 두만강’ ‘목포의 눈물’ 등을 담았다.

가요계 전설
애절한 울림

이미자는 “우리 가요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노래를 들으며 나라 잃은 설움, 배고픔의 설움을 달래던 시절이 있었다”며 “그 시절 고마운 곡들이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이를 영구 보존하기 위해 가장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장”이라고 설명했다.   

이미자는 후배들을 향한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그는 “가요의 뿌리가 사라져 가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가사 전달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슬프면 슬픔을 전달해주고, 기쁘면 기쁨을 전달해줄 수 있는 게 가요”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서구풍이 많이 몰려오다 보니 가사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고 발음을 정확하게 들을 수도 없다. 그 부분이 제일 안타깝다. 우리 가요의 뿌리가 남겨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미자는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 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국보급 가수’다. 그가 활동한 기간이 고스란히 한국 가요계의 역사와 포개진다. 작은 체구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애절하면서도 고운 음색은 연구 대상으로 거론될 만큼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쉽게 부르는 것 같지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은 관객의 마음을 울고 웃게 했다. 

이미자는 1941년 10월30일에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서 아버지 이점성과 어머니 유상례 사이서 2남4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이미자가 2살이 되던 1943년에 아버지가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가면서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됐다. 
 

1945년에는 힘든 생활고 때문에 어머니 유상례에 의해 외할머니 댁에서 형제들과 떨어져 외롭게 자랐다. 어릴 적부터 음악에 관심을 가지던 이미자는 1957년에 방송하던 노래자랑 프로그램 KBS의 <노래의 꽃다발>에 출연해 1위를 차지했다. 1958년 이미자는 HLKZ TV 방송이 개최한 아마추어 노래 콩쿨인 예능 ‘로타리’에 출전해 1등에 선정됐다.

당시 유명한 작곡가 나화랑에게 스카우트된 이미자는 '열아홉 순정'으로 가수로 첫발을 내디뎠다. 애절하고 구성진 목소리로 주목받았다. 

1960년 어려운 시절에 함께 알고 지내던 연주자 정진흡과 첫 번째 결혼을 했다. 1964년 이미자가 부른 영화 주제가 ‘동백아가씨’가 대히트를 쳤다. 당시 스카라 극장 근처 목욕탕 건물 2층서 방음장치는 물론, 얼음물에 발을 담가가며 임신 9개월인 상태서 혼신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 

군정 시절 
금지되기도


국내가요 사상 최초로 가요프로그램서 35주 동안 1위를 기록, 25만장이란 엄청난 음반 판매고를 올리며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었다. 당시 대한민국 음반업계가 불황을 겪던 그 해, ‘동백 아가씨’는 말 그대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하지만 왜색조라는 이유로 방송금지령을 선고받았으며 설상가상으로 남편 정씨와 이혼하게 된다. 

이미자는 1965년에 평생의 콤비가 된 작곡가 박춘석과 만나게 됐다. 박춘석은 패티 김, 최양숙, 남진 등 당대 스타들을 발굴한 당대 최고의 작곡가였다. 박춘석과 이미자는 KBS 라디오 연속극 <진도아리랑>의 주제가로 첫 인연을 맺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뗄 수 없는 콤비로 손을 잡게 만든 노래는 ‘흑산도 아가씨’였다. 박춘석은 이미자의 천재적 가창력에 감탄했다.

이어 1966년 KBS라디오 주제가 ‘섬마을 선생님’도 발표한지 불과 일주일 만에 빅히트를 기록했다. 이미자가 스스로 3대 히트곡으로 꼽는 노래 가운데 ‘기러기 아빠’도 박춘석이 작곡한 노래이다. 한창 전성기를 누비던 1966년 2월5일에 강릉서 공연을 하던 이미자는 자신을 찾아온 생모를 22년 만에 극적으로 상봉하게 된다.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를 만났다. 

하지만 이미자와 어머니의 몇 시간의 짧은 만남이 끝난 후 어머니는 영주로 이미자는 다음 공연을 위해 묵호로 떠났다. 이것이 이미자와 어머니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박정희정부가 들어서고 ‘동백 아가씨’를 비롯해 이미자의 히트곡 대부분이 금지곡으로 분류됐다. 왜색이나 경제발전에 저해되는 비탄조의 노래라는 이유에서였다. 히트할 때마다 줄줄이 금지곡 낙인을 받자 그녀는 노래를 그만두려고 했을 만큼 충격을 받았다. 

기념앨범 ‘나의 노래 60곡’
신곡, 히트곡, 애창곡 등
20대부터 70대 목소리 담아  

기회 있을 때마다 해금을 요청했고, 결국 전두환정부인 1987년이 돼서야 금지곡의 족쇄가 풀렸다.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었던 이미자는 1967년부터 영화 주제가로 발표된 ‘그리움은 가슴마다’ ‘아네모네’ ‘여자의 일생’ 등 서정적인 분위기가 돋보이는 정통 트로트를 고수하며 대한민국의 대표가수의 맥을 이어가며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당시 이미자와 함께 대한민국 가요계를 평정하던 패티 김과 함께 1960년대 가요계를 주름잡았다. 이미자를 따라다니는 애칭(엘레지(悲歌)의 여왕)은 1967년에 박춘석이 작곡한 이미자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그린 영화 주제가 ‘엘레지의 여왕’을 히트시키면서 얻었다.

1970년에는 TBC 동양방송 드라마의 주제가였던 ‘아씨’가 큰 인기를 끌었으며 그해 KBS 방송위원이었던 김창수와 결혼했다. 

1979년에는 대한극장서 데뷔 20주년 기념공연을 개최했다. 1985년 (주)민주음악협회의 초청으로 일본 도쿄, 오사카서 공연을 개최, 공연에 앞서 한일(韓日)공동기획으로 ‘한국연가(戀歌)의 계보를 듣는다’는 2장짜리 독집 음반을 출판했다. 1989년에 뉴저지 등에서 미국공연을 가졌다.

가수생활 30년 기념으로 ‘노래는 나의 인생’을 발표,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세종문화회관서 데뷔기념 30주년 공연을 개최했다. 북한의 초청으로 2003년, 평양 동평양대극장서 열린 MBC 평양특별공연서 마이크를 잡기도 했다. 

1970년부터 서서히 가요계의 주도권을 후배 가수 남진, 나훈아, 문주란, 하춘화에게 내주게 됐지만 지금껏 취입한 노래는 스스로도 헤아리지 못할 만큼 많다. 1960년대 내내 한해에 음반을 무려 10여장씩 발표, 데뷔 10년 만인 1969년 <1000곡 돌파 기념 리사이틀>을 가졌을 정도다.

1991년 KBS자료실은 그녀가 취입한 노래를 2064곡으로 집계했는데 이는 국내 가수들 가운데 누구도 견줄 사람이 없는 기네스북에 등재된 기록적인 숫자다. 

가요계 주름
여전한 가왕

지난 1995년엔 화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흔히 그녀가 노래하는 장르를 트로트로 분류하고 트로트의 여왕이라고 부르지만 본인은 자신의 노래들이 트로트보다는 전통가요로 분류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까지도 뛰어난 가창력과 대중을 사로잡는 무대로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2014년에는 데뷔 55주년을 맞이해 전국 투어 콘서트, 디너쇼를 열었으며 이듬해에는 가수 장사익과 <이미자-장사익 특집 콘서트>를 개최했다. 이 특집 콘서트는 KBS 1TV서 방영돼 20.1%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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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C 빛고을 설립 과정서 빌린 돈을 갚았으니 24% 지분만큼 주주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우빈산업은 케이앤지스틸에 24억원을 빌려주면서 맺었던 콜옵션을 행사하고 49%의 지분을 확보해 SPC 빛고을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이후 우빈산업 내부 사정이 변하면서 한 차례 더 지분구조에 변화가 생겼다. 우빈산업은 대출금 100억원에 대해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고 부도 처리됐다. 지급보증을 섰던 롯데건설은 우빈산업이 보유하고 있던 지분을 넘겨 받으면서 49%를 확보했다. 지분양도는 롯데건설이 근질권(담보물에 대한 권리)을 행사해 채무를 대신 갚아주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우빈산업이 빠진 자리에 롯데건설이 들어오면서 현재 기준 빛고을 SPC 지분구조는 한양 30%, 롯데건설 29.5%, ㈜파크엠 21%, 허브자산운용 19.5%로 재편된 상태다. 허브자산운용이 보유한 19.5%는 롯데건설로부터 양도받은 것이다. SPC 빛고을 내에서 롯데건설의 발언권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뉜 지분 콜옵션으로? 사업시행권과 시공권을 두고 롯데건설과 우빈산업, 한양과 케이앤지스틸이 궤를 같이 하면서 분쟁이 이어지고 있다. 쟁점은 우빈산업과 케이앤지스틸이 가진 지분이 최종적으로 누구의 소유냐는 것이다. 두 회사의 지분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SPC 빛고을의 최대주주가 바뀔 수 있다. 케이앤지스틸은 우빈산업에 주금 대여금을 갚았으니 24%에 대한 주주권이 자사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양은 SPC 빛고을 설립 과정서 우빈산업에 49억원의 출자금을 대여하면서 맺은 특별약정을 내세웠다. 해당 약정에 한양이 중앙공원 1지구 사업의 비공원시설 시공권을 전부 갖는데 우빈산업이 의결권을 행사한다는 항목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우빈산업이 주도해 롯데건설로 시공사를 바꾼 것은 특별약정에 어긋난다는 설명이다. 광주지방법원은 케이앤지스틸과 한양이 각각 우빈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서 모두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케이앤지스틸 관계자는 “주주권 확인 소송서 승소 판결을 받았다. 우리가 SPC 주식을 실제로 소유한 주주라는 뜻”이라고 강조했다. 한양 관계자도 “1심 법원은 우빈산업이 한양에게 49억원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고 보유 주식 25% 전량을 양도하라는 판결을 내렸다”고 말했다. 반면 롯데건설은 소송 판결 한 달 전, 우빈산업의 지분을 인수했다고 설명했다. 우빈산업이 한양에 양도할 주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과정서 한양은 우빈산업의 ‘고의 부도’를 의심하고 있다. 한양은 1심 법원 판결을 근거로 자사가 지분 55%(한양 30%+우빈산업 25%)의 SPC 빛고을 최대주주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대법원서 한양에 ‘시공권이 없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놓으면서 시공자 지위는 잃게 됐다. 소송 이겨도 지위 잃었다 최근 SPC 빛고을 지분 갈등서 케이앤지스틸의 역할이 관심사로 떠올랐다. 케이앤지스틸은 상하수도 설비공사 업체로 2003년에 설립됐다. SPC 빛고을에 우빈산업과 함께 참여했다가 현재는 빠진 상태다. 케이앤지스틸 관계자는 “전 대표가 우빈산업과 친분이 있어서 (SPC 빛고을에)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현 사태서 롯데건설과 우빈산업은 이른바 ‘비한양파’로 묶여있다. 두 업체의 지분 이동도 비교적 명확히 드러나 있는 상황이다. 반면 케이앤지스틸과 한양은 두 업체 모두 우빈산업과 소송을 진행하면서도 서로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한양 관계자는 “적(우빈산업)이 같을 뿐 특별히 관계가 있는 업체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양의 모기업인 보성그룹 계열사에 속한 ‘앤유’라는 업체가 케이앤지스틸에 2022년 4월, 2억원을 빌려줬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앤유는 이기승 보성그룹 회장의 동생인 이점식씨가 지분 83.6%를 가지고 있는 친족회사다. 전기 조명장치 제조업체로 2007년에 설립됐다. 2022년 기준 매출은 28억2900만원, 영업이익은 3억300만원으로 확인된다. 한양과의 거래를 통해 27억79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앤유는 케이지앤지스틸에 2억원을 빌려주는 과정서 1주일짜리 주식근질권을 설정했다. 1주일 뒤 케이앤지스틸이 2억원을 갚지 못하면서 케이앤지스틸의 주식이 전부 앤유로 넘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또 1주일 뒤 케이앤지스틸의 대표이사를 비롯해 사내이사 3명 등 4명이 등기이사로 이름을 올렸다. 이 가운데 1명은 앤유 대표인 정모씨의 아내로 추정된다. 케이앤지스틸 수뇌부가 물갈이된 것이다. 당시 케이앤지스틸의 채무가 수십억원에 이를 정도로 적자가 누적된 상태였다고 해도 2억원을 갚지 못해 회사의 지배권을 넘겨준 것을 두고 석연찮은 의문이 일었다. 1주일이라는 짧은 주식 근질권 설정도 의문으로 떠올랐다. 보성그룹에 기생하는 ‘앤유’ 푼돈 주고 1주 만 회사 꿀꺽? 더 흥미로운 대목은 같은 해 5월 케이앤지스틸이 우빈산업에 주금 대여금 25억3000만원을 송금한 뒤 주주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의혹이 동시에 불거진 점이다. 다시 말해 2억원을 갚지 못해 회사의 지분 100%를 앤유에 넘겨주고 한 달 만에 20억원이 넘는 돈을 융통해 SPC 빛고을 지분을 확보하려 했다는 의혹이다. 여기에 우빈산업을 상대로 한 주주권 확인 소송 등에 김앤장을 변호인으로 선임하면서 수임료에 대한 의혹이 추가로 제기됐다. 일각에서는 케이앤지스틸이 지분확보를 위해 사용한 자금 출처가 한양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한양 입장서 케이앤지스틸이 가지고 있는 지분을 확보하면 54%로 SPC 빛고을의 최대주주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대법원 판결로 시공자 지위는 상실했지만 롯데건설에 넘어가 있는 시공권을 흔들 수 있는 상황이 생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분 갈등 구조가 롯데건설과 우빈산업, 한양과 케이앤지스틸로 정리되는 셈이다. 하지만 한양과 케이앤지스틸 모두 두 업체 간 모종의 관계 의혹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한양 관계자는 “앤유라는 계열사가 있는지도 잘 몰랐다. 앤유서 케이앤지스틸에 2억원을 빌려줬다거나 주금 대여금을 대줬다는 의혹은 전혀 사실무근이다. 우빈산업서 (1심)소송에 져서 계속 근거 없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듯하다. 대응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보다 광주시가 우빈산업과 결탁해 여러 가지로 유리하게 상황을 봐주고 있다고 판단해 광주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광주시는 사업시행자이자 감독관청으로서 해야 할 일이 참 많은데 그런 일을 하지 않아 공모 제도가 다 무너졌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광주시의 행정행위에 대해 소송을 제기해 재판이 진행 중”이라고 덧붙였다. 석연찮은 자금 출처 케이앤지스틸 관계자는 한양이 주금 대여금을 대줬다는 의혹에 대해 “우빈산업서 하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주주가 들어와 투자가 이뤄지면서 주금 대여금을 갚은 것이다. 우빈산업에서는 (우리가)한양의 위장계열사 아니냐, 대표이사 선임 과정이 의심스럽다, 자금 출처가 어디냐 같은 의혹을 제기하는데 그건 주주권 확인 소송서 져서 그러는 것이다. 한양이랑 우리랑은 큰 관계가 없는데 자꾸 엮어서 흠집을 내려 한다”고 주장했다. 2022년 4월 회사가 어려운 시기에 케이앤지스틸 대표로 오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이 사업이 잘 마무리되면 우리 회사에 300억원 정도의 수익이 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시행이익을 1100억원으로 계산했을 때 우리 회사 지분이 24% 정도니까 그렇게 계산한 것이다. 수익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회사를 맡게 됐고, 새로운 주주들도 그 사업성을 보고 투자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