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제작사협회는 최근 <쩐의 전쟁> 고액 출연료를 문제 삼아 배우 박신양의 드라마 출연정지는 물론 그와 계약한 제작사 이김 프로덕션을 상대로 편성 금지 요청, 드라마제작사협회 회원사로의 입회 당분간 금지 등을 의결했다. 이런 조치를 두고 드라마제작사협회 측은 드라마 산업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상식 테두리 범위 내라는 입장이지만 일각에서는 박신양에 대한 ‘마녀사냥’이라는 주장이 일고 있다. 특히 이번 조치는 제작사협회 차원을 넘어 최근 방송 3사 드라마국과 드라마PD협회 등 관련 단체가 ‘드라마 산업의 위기’를 공론화하려는 움직임과 맞물려 있다. 따라서 이번 조처가 드라마 산업의 위기를 타개할 실마리가 될 것인지 아니면 그저 일벌백계 차원의 본보기에 그칠 것인지가 관심사다.
사건의 발단은 박신양이 지난해 7월 종영한 <쩐의 전쟁> 4회분을 연장 출연하는 조건으로 출연료 6억2000만원을 추가 지급하기로 제작사와 계약했으나 이 가운데 3억4100만원을 지급하지 않았다고 소를 제기하면서다.
외주 드라마 제작사들의 모임인 드라마제작사협회는 지난 5일 박신양이 과다 출연료를 요구했다는 이유로 박신양에 대해 무기한 출연정지, 제작사 방송사편성금지 요청 등을 의결했다.
이 같은 조치에 대해 배우들과 함께 작업을 하는 일선 PD들은 “박신양은 고액 출연료 문제의 희생양이다”라며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
한 방송사의 드라마PD는 “솔직히 요즘같이 경기가 좋지 않을 때 박신양이 드라마 한 회당 2억원에 가까운 출연료를 요구했다는 사실은 국민적인 반감을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에게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것은 박신양을 희생양으로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PD는 박신양의 독특한 할리우드식 출연료 정산방법을 주목하며 “박신양의 할리우드식 출연료 요구는 궁극적으로 우리 드라마 업계에 도입되어야 할 부분이지만 현재 제작현실에 비추어 봤을 때 너무 이른 것 같다”며 “다른 이들은 밤샘 촬영 뒤 2~3시간 자고 다시 새벽같이 모여 촬영을 하는데 자신은 계약서상의 심야촬영거부안을 들어 프로듀서를 대신 보내고 거액의 출연료를 챙긴다면 협동작업인 드라마 제작현장에서 미운털이 박힐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박신양의 출연정지 소식이 전해지자 네티즌들도 “박신양 씨 드라마 무기한 출연정지를 반대합니다”라는 청원을 내고 거세게 반발했다. 현재 4200여 명의 네티즌이 서명에 참여했다. 박신양을 두둔하는 네티즌들은 “박신양에게만 출연 정지를 시키는 것은 마녀사냥”이라고 들고 나섰다.
비판의 화살은 드라마제작협회로 돌아갔다. 지상파 방송사에 배우 출연 정지와 편성 금지를 요청한 것에 대해 ‘칼만 안들었지 배우를 죽이는 강도’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박신양을 비판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한 네티즌은 “다른 배우들은 전부 4회 연장 계약을 했는데 박신양 혼자서 회당 1억7000만원이라는 거액을 제시했다. 박신양이 훌륭한 연기력을 가진 배우인 것은 인정하지만 융통성이 있어야지 이것은 양심이 없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또 한류스타 배용준과 비교하며 “배용준은 회당 2억원 이상씩 요구해도 해외에 드라마를 수출하면 수익이 나기 때문에 가능하지만 국내시장만 노리는 작품에서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비판했다.
박신양을 향한 질타에 경기 불황도 한몫을 했다. “이번 일은 박신양의 지나친 욕심과 자만에서 비롯된 것 같다. 어려운 시기에 많은 국민들에게 좌절과 상실감을 안겨줬다”는 댓글도 이어졌다.
드라마제작사협회의 결정에 찬성표를 던진 다른 네티즌은 “제작비용이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많이 집중될 경우 다른 출연자들은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드라마 출연정지 결정은 자신을 한번 돌아보고 반성하라는 의미에서 근신하라는 조치다”라고 말했다.
한편 그동안 입을 닫고 있던 박신양은 지난 10일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에 근황을 전했다. 지난 4일 <바람의 화원>의 마지막 촬영 후 가족이 머물고 있는 미국 뉴욕으로 떠난 박신양은 자신의 팬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 뒤 “빠른 시일 내에 새로운 프로젝트로 다시 만나 뵙겠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는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나의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줘야 하는 약속을 지켜야 하고 강아지를 데리고 함께 놀아준다는 약속도 지켜야 한다”며 가족과 조우한 기쁨을 나타냈다.
드라마제작자협회, 박신양 출연정지·제작사 편성 금지 요청
네티즌 ‘배우 죽이는 강도’ vs ‘박신양 지나친 욕심과 자만’
이어 “드라마를 본 아이들이 바닥에 엎드려서 그림을 그리는 흉내를 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하는 일이 절대로 무책임한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기도 했다”고 했다.
그는 최근 드라마제작사협회가 자신에 대한 무기한 출연 정지를 의결한 것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피했으나 “매년 혹독하고 긴 시간들이 지나면 어김없이 들판에는 꽃들이 피어났다”며 “그 꽃은 노란 민들레였다. 노란 민들레가 빨리 많이 피었으면 좋겠다”고 최근 자신의 심경을 돌려 말했다.
드라마 제작 위기론 속에서 박신양의 고액 출연료 파문이 맞물려 업계에는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일단 박신양에 대한 조치는 확실히 고액 몸값을 받은 스타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는 듯하다. 박신양의 사례를 토대로 앞서 방송사에서 호소한 출연료 1500만원 상한선과 비슷하게 스타들이 파격적인 몸값 낮추기 대열에 속속 합류하고 있다.
<못된 사랑>에서 회당 5000만원을 받은 권상우는 박신양 파문 이후 차기작 <신데렐라맨>에서 1500만원을 받기로 했다는 소식이 발표됐다. 제대 후 첫 드라마인 <카인과 아벨>에서 회당 3000만원을 받기로 했던 소지섭도 2000만원으로 몸값을 낮췄다. 현재 방영 중인 <에덴의 동쪽>에 출연하는 송승헌은 회당 7000만원에서 50% 삭감해 3500만원만 받기로 했다.
내년 방영 예정인 <선덕여왕>의 고현정, <친구, 못 다 한 이야기>의 현빈, 김민준 등 톱스타들의 출연료 조정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스타들은 드라마 위기의 고통을 분담하는 차원에서 몸값 낮추기에 동참한다고 한다. 불황을 겪고 있는 드라마제작사협회와 방송사가 한 목소리로 스타들의 몸값 낮추기에 높은 목소리를 내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이런 움직임이 계속된다면 몸값 낮추기는 표면적으로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제작사협회의 한 관계자는 “드라마 제작 편수가 줄고, 생계 위협을 받는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늘어난 상황에서 스타 출연료와 제작비를 낮추면 저예산 드라마 시스템이 구축돼 드라마의 다양성을 찾을 수 있다”며 “방송사 쪽과 출연료 상한제 등 필요한 조처를 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논란이 출연료를 둘러싼 제작사와 소속사간 힘겨루기 양상으로 치달으면서 드라마 산업 위기를 타개할 근본적인 대책 마련은 뒷전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대형 매니지먼트의 한 관계자는 “드라마 산업이 위기라는 사실엔 공감한다. 하지만 최근 논란은 일부 톱스타와 잘못된 관행을 가진 소속사들의 문제이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한 방송관계자도 “당장 톱스타들과 소속사, 드라마 제작사들이 심리적 위축은 되겠지만 부풀려지고 왜곡된 드라마 제작 관행과 제작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방송사와 제작사가 추진 중인 출연료 상한제나 등급제 재조정 등의 조처가 실제로 잘 지켜질지, 또 이를 통해 드라마 제작비의 거품을 얼마나 걷어낼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지금으로선 톱스타를 기용하려고 특정 제작사가 업계 관행보다 많은 출연료를 지급하는 ‘이면계약’을 한다 해도 이를 일일이 규제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100여 개에 이르는 제작사들 가운데 37개 회원사를 대표하는 제작사협회가 법적으로 다른 제작사들을 감시하거나 규제할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또 한정된 방송 시간을 따내기 위해 경쟁을 벌이는 제작사들 가운데 단 한 곳이라도 약속을 깨고 거액 출연료를 지불해 방송사의 편성을 따낸다면 그나마 제작사협회의 자구책은 물거품이 될 수 있다. 게다가 방송사가 우월적 지위를 남용해 제작사를 관리한 사례들도 있어 불공정 거래가 사라질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지금은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상대를 규제하고 퇴출시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드라마 제작 관계자들 각자가 자신의 원칙을 만들고 합의해 나가야 할 때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