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솟는 기름값 대해부

  • 김세훈 기자 space0122@naver.com
  • 등록 2018.06.18 10:49:04
  • 호수 11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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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고 또 오르고 ‘왜 오를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세훈 기자 = 요즘 기름 값이 그야말로 금값이다. 이달 초 서울의 평균 휘발유 값은 리터당 1697원을 찍었다. 자동차를 모는 운전자들은 연일 울상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기름 값의 전모를 파헤쳤다.
 

이달 들어 전국 휘발유 판매금액은 리터당 1600원대를 돌파했다. 기름값 상승은 자가용 운전자뿐만 아니라 기업에게도 생산 원가를 높이는 악재로 작용한다. 연일 지속되는 유가 상승에 온 국민이 살 떨리는 물가를 체감하고 있다.

한국석유공사 정보서비스센터가 밝힌 이달 첫째 주 전국 평균 휘발유 판매가격은 전 주 대비 4.7원 상승한 리터당 1609.7원이다. 경유도 4.7원이 올라 1410.5원을 기록했다. 지역단위로 살펴보면 서울과 제주의 휘발유 값이 가장 비싸다. 서울은 리터당 1697원을 기록했고 제주는 1661원 수준이다.

지금 얼마?
얼마까지?

전국 평균가에 비해 휘발유 가격이 비싼 지역은 ▲인천(1620원) ▲경기(1621원) ▲강원(1617원) ▲충북(1611원) ▲충남(1608원)으로 집계됐다. 반면 휘발유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지역은 ▲경남(1586원) ▲대구(1589원)로 조사됐다.

지난 2014년 12월 전국 평균 휘발유 가격이 리터당 1621원을 기록한 이후 휘발유 값은 3년 반 만에 최고치다.


시시각각 변하는 기름값은 어떻게 책정되는 걸까? 

휘발유와 경유가격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뤄져있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항목은 세금이다. 소비자들은 휘발유 가격의 약 57%를 세금으로 내고 있다. 

두 번째로 많은 부분은 정유사에 지불하는 금액인데 휘발유 가격의 38%가량이 여기에 해당된다. 나머지 5% 내외는 주유소가 챙기는 마진과 기타 유통비용으로 쓰인다. 경유도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비슷한 구조다.

세금, 주유소 마진, 유통비용은 소비자 물가에 따라 변동이 있지만 그 폭은 크지 않다. 결정적으로 유류 가격을 정하는 변수는 정유사에 지불하는 비용이다. 정유사가 원유를 수입하는 가격에 따라 국내 소비자가는 변한다.

현재 원유는 전 세계적으로 약 200여종이 거래되고 있다. 이 가운데 국제원유시장의 대표 유종은 미국서부텍사스중질유(WTI, West Texas Intermediate), 영국 브렌트유, 아랍에미레이트의 두바이유가 있다. WTI는 북미, 브렌트유는 유럽과 아프리카, 두바이유는 중동을 대표해 기준유가를 정한다.

1980년대 중반까지 국제원유가격은 석유수출국기구(OPEC:Organization of Petroleum Export Countries)의 가격을 기준으로 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두 차례 석유파동을 겪은 국제원유시장은 석유 시장의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찾아야 했다. 
 

일부 석유 생산 국가가 담합해 원유생산을 제한하고 원유가격을 임의로 조절하는 행위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국제유가시장은 원유에 대한 선물거래를 활성화했다. 금융시장서 말하는 선물은 퓨처(Futures)라고 불리는 금융상품이다. 선물거래는 향후 오르거나 내릴 물건 값을 미리 정해두고 판매자와 구매자가 합의한 금액으로 거래하는 것이다. 

유가시장처럼 가격변동을 예측하기 어려운 시장은 선물거래를 통해 시장에 안정성을 줄 수 있다. 현물이 급등락 할 때 발생하는 위험을 사전에 없애는 것이다.

원유의 선물거래가 활성화된 후 원유의 선물가격은 유가를 결정하는 실질적인 기준이 됐다. 이에 따라 선물시장에서 가격정보가 풍부한 대표유종(두바이, WTI, 브렌트)가격이 국제원유가격을 정하고 있다. 특히 WTI와 브렌트유 선물시장은 실제 필요한 원유수요의 다섯배 가량이 하루에 거래될 만큼 활발한 시장이다.

국제유가 배럴당 65달러 박스권
만약 100달러까지 가면…대혼란

국제원유가격은 궁극적으로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 원유공급지의 지정학적 리스크, 기상, 미국 달러의 가치, 주요 산유국의 석유재고 같은 여러 가지 요인이 선물시장 거래가격을 정한다.

그렇다면 현재 국제유가시장이 어떻길래 국내 기름 값이 연일 치솟는 걸까?

최근 국제유가는 혼조세를 보인다. 이달 12일(현지시각) 뉴욕상업거래소(NYMEX)는 7월에 현물거래 될 미국 서부 텍사스원유 가격은 전일에 비해 배럴당 0.4%(0.26달러) 오른 66.36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영국 ICE 선물거래소는 8월 국제유가 가격을 0.8%(0.58달러) 내려 75.88달러로 장을 마감했다.

국제 유가시장은 오는 22일에 열릴 석유수출국기구(이하 OPEC)회의를 주시하고 있다. 주요 산유국들이 원유 생산을 줄일 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하기 때문이다. 원유시장은 OPEC회의서 구체적인 내용이 나올 것을 기다리고 있다.

2016년 배럴당 30달러를 유지하던 국제유가는 2017년부터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2016년 당시 산유국들은 하루 50만∼200만 배럴가량 석유를 뽑아냈다. 유류 공급량은 연일 수요를 초과했다. 

당시 골드만삭스는 “배럴당 20달러대로 떨어져야 원유 생산이 감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란의 비핵화 선언으로 경제 제재가 해제돼 하루 50만배럴 이상이 더 시장에 나올 것이라는 분위기도 한몫 했다. 국제유가가 바닥을 친 2016년과 현재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지속되는 유가 상승이 세계경제에 지나친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지난달 29일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가 OPEC 회원국과 비회원국의 감산 조치를 완화하는 협상을 하겠다고 발표한 가운데 자체 공급을 늘리겠다는 소식이 있었다. 

1일 1백만배럴 내외로 공급을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여전히 유가 선물시장이 배럴당 70달러 이상의 수준을 유지하는 것으로 볼 때 감산 완화가 전개되더라도 점진적으로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고공행진
언제까지?

국제금융센터는 올해 들어 크게 오른 기름값의 원인을 4가지로 진단했다. 첫 번째 이유로는 미국과 중국의 경제호황에 따른 유류 수요 증가를 꼽았다. 미국은 석유 최대 수요국이다. 지난 2017년 미국의 일일 원유 사용량은 2038만배럴로 전년에 비해 2.5% 증가했다. 

이어 올해 4월까지 일일 2067만배럴로 5.4% 증가했다. 중국의 원유 사용량도 증가세다. 중국은 지난 3월 기준 하루 922만배럴을 사들였다. 이는 역대 두 번째로 많은 수입 규모다. 중국은 지난 분기에 비해 올해 1분기 7.0% 더 수입하는 등 견조세를 유지했다.

주요 에너지 관련 기관들은 글로벌 경기회복세를 이유로 들며 올해 원유수요가 꾸준할 것으로 보고 있다. 미 에너지정보청(EIA)은 올해 2분기 수요 전망을 일일 9976만배럴로 발표했다. 올 초 예상했던 규모보다 33만배럴(+0.3%) 더 책정한 것이다. OPEC도 2분기 수요전망을 9779만배럴서 9784만배럴로(+0.1%) 상향조정했다.

국제금융센터는 두 번째 이유로 OPEC의 감산 정책 재연장을 들었다. 산유국들은 과잉재고를 해소하고 유가를 조정할 목적으로 원유를 감산한다. 지난 2017년 1월부터 시작된 OPEC 감산 정책은 산유국 사이서 성공적인 정책이라 평가 받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감산 종료시점을 미루고 싶어 하는 눈치다. 감산 목표가 상당 부분 달성됐음에도 사우디는 미국의 생산증가를 우려한 공급과잉이 발생할 수 있다며 감산 연장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지난 3월 OPEC이 하루 생산하는 원유의 양은 3181만배럴로 전달에 비해 20만배럴 적은 수준이다. 감산 이행률도 163%로 목표를 크게 상회하고 있다. 러시아 같은 비OPEC회원국도 목표치의 90% 수준까지 감산하고 있다.

쿠웨이트와 UAE는 감산 연장을 지지하는 모양새다. 반면 러시아와 이란, 이라크 같은 반 사우디 국가는 감산 연장에 찬성하되 이행률을 낮추겠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줄곧 원유 감산이 루블화 강세로 이어질 수 있다며 감산 장기화를 경계했다. 하지만 최근 루블화가 약세를 나타냄에 따라 감산 연장 반대 명분이 약화된 실정이다.
 

중동국가의 지정학적 불안감이 고조되는 것도 유가상승 원인이다. 지난달 공식적으로 미국과 이란의 핵 협정(JCPOA, 포괄적 공동행동계획)이 파기됨에 따라 유가시장에 이란이 내놓던 원유량이 감소할 전망이다. 

앞서 골드만삭스와 시티그룹 관계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중동국가와 관련한 주요 참모진을 강경파로 교체했기 때문에 관계개선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보고서를 꾸준히 냈다. 과거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가 있던 시기 원유시장에 유통되는 전체 원유량은 하루 최대 100만배럴가량 차이가 났다.

한방울 안나는 
나라의 설움

금융전문가들은 올해부터 유가의 공급이 수요를 웃돌것으로 예상했지만 현재로선 이란산 원유의 공급차질이 가시화돼 국제유가 시장은 불확실성이 높아진 상태다. 

골드만삭스는 최근 “6개월간 일일 50만배럴 공급이 부족하게 될 시 국제 유가는 10%상승한다”고 밝힌 바 있다. 시리아 사태도 중동 정세 불안과 공급 불확실성을 가중시키는 요인이다.

시리아의 원유생산은 지난 2010년 기준 하루 40만배럴 내외였으나 지속된 내전으로 최근 2만배럴 수준으로 떨어졌다. 시리아의 원유공급량이 국제 원유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지만 사우디와 이란의 이권경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어 시장 불안정성을 높이는 요인이 된다. 

이밖에 예멘 내전, 미국의 예루살렘 수도 인정에 따른 중동 내 반미감정 고조 등도 원유시장을 불안케 하는 요소로 꼽히고 있다. 

국제금융센터는 마지막으로 베네수엘라의 원유생산 불확실성을 국제유가 상승의 원인으로 꼽았다. 최근 베네수엘라의 유류생산량은 감소세가 지속되 1950년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지난 2000년 일일 300만배럴을 상회하던 생산량은 2005년들어 250만배럴 수준으로 감소했다. 

최근까지 감소세가 가속화되 올해 3월에는 150만배럴을 밑돌았다. 베네수엘라의 감산 이행률은 올 3월 기준 700%에 육박한다. 베네수엘라의 생산량 감소 원인은 정권과 관계된 구조적 이유 때문이다.

지난 1999년 집권한 차베즈 정권은 시추업계의 숙련노동자들을 정치적 지지자들로 대체했다. 이어 각종 석유관련 사업을 국유화해 석유산업으로 전문인력 유입이 제한됐다. 최근에는 미국의 경제재제와 베네수엘라 최대기업인 PDVSA의 채무 불이행 여파까지 겹쳐 당분간 원유생산량 감소가 지속될 전망이다. 

중국과 러시아 같은 동맹국들의 지원에도 단기간 내 문제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올해 베네수엘라의 일일 생산량은 140만배럴 이하로 줄어들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주요 투자은행들은 세계적인 원유의 수요 증가와 맞물린 중동지역의 지정학적 리스크를 반영해 최근 유가 전망치를 큰 폭으로 상향 조정했다. 이달 4일(현지시각) 월스트리트저널은 월가 12개 투자은행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브렌트유 평균 가격이 배럴당 70달러를 넘어설 것이라고 말했다. WTI의 가격도 지난달에 비해 6달러 오른 배럴당 66달러로 상향 조정했다.

다만 국내 금융계는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국제 유가가 현재 수준서 더는 오르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현대차투자증권의 강동진 연구원은 “WTI 유가가 배럴당 70달러를 돌파하기도 했지만 현재 65달러 수준으로 조정받고 있다”며 “Peak Demand 논란이 가속화될 수 있기 때문에 수요에 부담을 주는 높은 수준의 유가는 OPEC으로서도 결코 원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 호황과 맞물린 중동 리스크
사우디·러시아 유가조절 눈치작전

유류 사용자와 판매자 모두 극단적인 상황으로 시장이 변질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러시아 입장은 감산량이 목표치보다 더 많아 생산증대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강 연구원은 “OPEC과 러시아는 원유생산량이 최근 1800KBPD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까지 감소한 베네수엘라의 부진을 주목하고 있다. 만약 이란 수출이 감소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면, OPEC 및 러시아는 추가 증산으로 안정적인 원유 공급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견조한 수요로 그 들이 목표로 했던 수준까지 원유재고는 감소한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고 전했다. 

결국 수요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 수준서 원유가격이 책정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감산정책이 원유 수요 감소로 이어지는 상황은 산유국들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2012년 국내 휘발유 가격이 리터당 2000원을 넘는 시기가 있었다. 당시 국제유가는 1배럴당 100달러를 호가했다. 금융전문가들은 최근 국제 유가가 큰 오름세를 보이고 있지만 현재 수준이 최고 수준일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가장 큰 원인은 미국 내 셰일가스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달 14일(현지시각) 최근 유가 상승세의 여파로 미 셰일 업계가 텍사스주를 넘어 인근 오클라호마와 뉴멕시코주까지 생산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국제유가가 올라가면 미국에서 시추기 가동률이 올라간다. 셰일가스는 WTI 기준 배럴당 60달러 선에서 국제 유가와 줄다리기하며 가격을 조정하고 있다. 석유 가격이 많이 올랐지만 앞으로 더 오르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지난주 미국의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RB)가 연방기금 금리를 1.75%서 2.00%로 0.25% 포인트 인상했다. 미국 금리인상은 여러 가지 경제지표에 영향을 준다. 보통 주식시장은 금리와 반대로 변동한다. 

금리가 높아지면 주식시장에 돌아다니는 투자금이 은행으로 빨려 들어간다. 같은 논리로 우리나라도 기준금리 인상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얼마 전 열린 한국은행 국제컨퍼런스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미국 금리 인상에 대해 강력한 어조로 경고했다.

정부 대책은?
정유사 입장은?

이 총재의 발언을 요약하면 이렇다. 미국이나 선진국이 앞다퉈 금리를 올리면 이로 인해 세계적 금융 불안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지금 한국의 기준금리가 1.50%인데 미국금리가 한국금리보다 높아지면 외국자본 입장에서는 한국에 투자할 이유가 없어진다는 데 있다. 미국의 금리인상은 세계적으로 투자심리를 위축시켜 그 여파로 국제유가를 떨어뜨릴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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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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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