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오롯이 ‘나라 위해 사는’ 김영진 전 농림부장관

끊임없는 도전, 그리고 응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인류의 역사는 도전과 응전으로 점철돼있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서 자연의 도전에 대한 인간의 응전이 인간 사회의 문명과 역사를 발전시키는 바탕이 된다고 했다. 개인도 안팎서 덮쳐오는 도전을 극복할 때마다 성장한다. 김영진 전 농림부장관은 도전과 응전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일평생을 바쳤다.
 

<일요시사>는 지난 4일, 서울 여의도의 4·19혁명 UN·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등재 및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사무실서 김영진 전 농림부장관을 만났다. 김 전 장관은 인터뷰서 “도전과 응전, 신앙, 약자, 역사, 초심”이라는 단어를 자주 언급했다. 그의 삶이 응축된 표현이다. 국회의원, 농림부장관, 대학 석좌교수, 재단 이사장, 기념사업회 위원장 등 김 전 장관은 세상의 부름에 답하지 않은 적이 없다.

빈농의 아들
학비없어 고생

“빈직다사(貧職多事)라는 말이 있습니다.”

김 전 장관은 최근 근황을 묻는 질문에 ‘빈직다사’라고 했다. 직책이 대단치 않지만 일은 바쁘다는 뜻이다. 김 전 장관은 현재 광주대학교 석좌교수, 사단법인 국제사랑재단 대표회장, 사단법인 5·18광주민주화운동/4·19혁명/3·1운동 UN·유네스코 등재 및 아카이브센터 이사장, 사단법인 사랑의 쌀나눔본부 상임대표 등 10여개의 직책을 맡고 있다. 

야인이 되기 전에는 5선 국회의원, 농림부 장관 등의 화려한 명패가 그를 수식했다.


1946년 11월17일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장남이었던 그가 네 동생의 학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우체국 사환으로 1년간 일하며 학비를 벌어 이듬해 강진농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대학 공부의 꿈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뤄졌다. 가난의 기억은 평생 그가 소외된 사람들에게 헌신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1988년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국회에 입성할 때 다짐한 게 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의회 선교의 작은 심부름꾼이 되겠다, 날 닮은 농민과 소외된 사람들이 이 땅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성심을 쏟겠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명백히 규명하겠다,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김 전 장관은 1988년 4·26총선서 평화민주당 소속으로 전남 강진·완도군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의 국회 입성 과정은 광주서 시작됐다. 1980년 5월 광주는 핏빛으로 물들었다. 시민들은 거리로 나왔고 이 과정서 희생이 잇따랐다. 계엄군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시민을 상대로 총구를 들이밀었다.
 

자식 잃은 부모들이 통곡했고 부모를 여읜 아이들은 울부짖었다. 하지만 1981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1주기 추모식은 진행되지 못했다. 유족들은 집에서도 제사를 지내지 못해 다른 지역의 사찰로 도망치듯 떠났다가 2∼3일 후 숨죽여 돌아왔다. 그만큼 냉혹한 시절이었다.

당시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회장이던 김 전 장관은 전남도청 앞 YMCA서 5·18광주민주화운동 2주기 추모예배를 계획했다. 그는 추모예배 당일까지 당국의 눈을 피하기 위해 후배 집, 교회, 사찰 등을 전전했다.

그가 붙들리면 추모예배는 영락없이 실패로 돌아갈 상황이었다. 2000명이 운집한 추모예배에 나타난 김 전 장관은 “광주의 죄 없는 양민을 학살한 전두환 정권을 처단해야 한다”고 외쳤다. 이후 그는 투옥됐다.


민주화운동
두 번 투옥

두 번째 구속은 야간통행 금지제도 해제 운동 때문이다. 1980년 초에는 밤 12시부터 오전 4시까지 4시간 동안은 말 그대로 돌아다닐 수 없었다. 종교활동은 물론이고 생계와 직결되는 논이나 밭에 문제가 생겨도 나갔다가 붙들리면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다. 인권 의식이 바닥을 치던 때였다.

“야간통행 금지제도는 농민의 생존권과 종교의 자유를 침해했습니다. 반드시 없어져야 할 제도였습니다.”

1980년대부터 농가에 비닐하우스 재배가 퍼졌다. 문제는 비닐하우스가 자연재해에 약하다는 점이었다. 눈이 오면 쓸어내고 바람이 불면 붙잡아야 했다. 제때 그러지 못하면 비닐하우스가 주저앉거나 날아가 한 해 농사를 망치기 일쑤였다. 김 전 장관이 재해대책피해 관련 법안을 발의하기 전까지 피해는 오롯이 농가의 몫이었다.

또 그는 언제, 어디서든 종교의 자유를 표현하기 위해서라도 야간통행 금지제도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전 장관은 3페이지 분량의 청원서를 만들어 교회 등에서 강연하고 국회우체국을 통해 국회의장에게 1000통가량을 보내는 등 운동을 지속했다. 

계엄사령부는 그런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김 전 장관은 입에 재갈이 물리고 눈에 딱지를 붙인 채 기절해 광주 계엄사 분실에 끌려갔다.

그는 발가벗겨진 채 2.3㎡(0.7평) 크기의 방에서 눈을 떴다. 계엄사령부는 그에게 통금 해제 운동의 배후를 물었다. 김 전 장관은 “자금을 받은 일도 없고 배후도 없다”고 반복해 말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백열등은 머리 위에서 작열하고 두들겨 맞고 대화는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고. 김 전 장관은 당시 말 그대로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고 토로했다.

그때 김 전 장관의 귓가에 찬송가가 들렸다. 그의 어머니가 교인들을 이끌고 분실 앞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던 것이다. 농민들도 합세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노랫소리는 높아졌다. 계엄사령부는 김 전 장관에게 ‘분실서 있었던 일을 발설하지 않고, 통금 해지 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라고 강요했다. 

김 전 장관은 이를 거절했다. 분실 앞을 찾는 지역 농민의 수가 점차 불어나자 계엄사령부는 그를 무죄 방면하기에 이른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일평생
세상이 부르면 “나는 간다”

“신앙으로 훈련된 일꾼, 약자인 농민이나 서민들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게 제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김 전 장관이 계엄사령부에 끌려가 한 저항은 빠른 속도로 지역 사회에 퍼져 나갔다. 다시 일터로 돌아간 그는 어느 날 지역 농민 대표, 교인 대표 등의 방문을 받는다. 이들은 믿을 만한 사람을 한 명 뽑아서 국회로 보내기로 했다고 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을 말하는지 몰랐던 김 전 장관은 신협 조합원들과 함께 동참하겠다고 의지를 드러냈다. 그리고 지역 대표들이 자신을 지목했을 때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저는 한 번도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기도해 본 적 없었습니다. 저는 못 합니다.”

그러나 지역 대표들은 거듭 김 전 장관을 찾아왔다. 그는 고민 끝에 출마를 결심했다. 당시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의 공천을 받아 그는 전남에 출마했다. 그의 상대는 전두환·노태우씨의 육사 11기 동기였고, 재선 국회의원인 민주정의당 김식 전 의원이었다. 모두 상대가 너무 강하다고 했지만 개표함을 열어보니 김 전 장관의 승리였다. 
 

호남 출신 고졸 정치인의 등장이었다.

김 전 장관의 초선 시절 활약은 엄청났다. 그는 13대 국회서 부활한 국정감사의 스타였고,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 규명을 위한 ‘광주청문회’서 활약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이해찬 전 총리가 김 전 장관과 함께 광주청문회서 활약했다. 김 전 장관은 저수지서 멱을 감다 총에 맞은 소년들의 사진을 내밀며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노무현과
청문회 스타

1980년 5월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이후 1988년 청문회가 열릴 때까지 광주는 폭도들의 도시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였다. 계엄군에 저항하다 사망한 시민들이 묻힌 망월동은 저주의 땅으로 불렸고 사람들은 그곳에 침을 뱉었다. 광주청문회는 국회의 정부 비판과 견제, 감시 기능을 되살리고 정의를 확립하는 기점이 됐다.

“아무리 굳은 결심을 해도 도전을 받게 마련입니다. 정치를 하는 동안 제게 찾아왔던 큰 도전은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었습니다.”

그는 초선부터 14대, 15대, 17대까지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이하 농수산 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했다. 일반적으로 2년에 1번, 전반기와 후반기 상임위를 바꿀 수 있음에도 김 전 장관은 4선을 하는 동안 농수산 위원회에만 있었다. 

상임위를 정할 때 원내대표실에 희망 상임위를 3개 적어 내는데, 그의 1∼3지망은 늘 농수산위원회였다.

그가 농수산 위원회서 활약할 때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문제가 불거졌다. 협상의 핵심 쟁점은 쌀 시장 개방이었다. 총 농민의 90%가 쌀이라는 단일품목에 생계를 걸고 있던 때였다. 쌀 시장 개방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김 전 장관은 스위스 제네바로 넘어갔다. 

그는 한글과 영어로 ‘미국은 람보식 수입 개방 압력을 당장 중단하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거세게 항의했다.

김 전 장관은 미국 대표를 붙들고 대화를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자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그때 나온 방법이 삭발식과 단식 투쟁이다. 그는 머리를 밀고 물과 소금만으로 15일을 버텼다. CNN, NHK 등 외신을 통해 김 전 장관의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 농민들이 제네바로 날아와 그에게 힘을 보탰다. 

통역을 위해 제네바에 온 장정애씨도 함께 머리를 밀고 김 전 장관의 곁에 앉았다.

한국서 온 국회의원이 머리를 깎고 단식투쟁을 하는 모습은 국내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김 전 장관의 행동은 각국 의원들이 모여 만든 연맹의 저항으로 발전했다. 

김 전 장관은 NHK 등 외신과의 인터뷰서 “한국과 제3세계 농민의 생존권을 짓밟는 협상은 인류 공영과 세계 평화라는 UN의 지상 목표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투쟁의 결과는 한국의 쌀 관세화 유예조치로 나타났다.

“어느 날인가 보좌관이 코앞에 봉투를 들이 밀었습니다. 생선 냄새가 강하게 올라왔습니다. 제 지역구 완도군 어민이 생선을 잡아다 판 돈 중 3000원을 봉투에 넣어 후원금으로 낸 겁니다. 물고기 잡는 어민이 저한테 의정활동 잘하라고 격려 차원서 보내주신 돈이죠.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농수산 위원회 외길을 걸었던 김 전 장관은 2003년 노무현정부서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발탁됐다. 노 전 대통령과 김 전 장관은 민주화 운동 동지이자 ‘야자 트는’ 친구 사이였다.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당시 제네바서 단식투쟁을 하던 김 전 장관에게 노 전 대통령은 수차례 전화로 응원을 전했다고 한다.

김 전 장관은 농림부장관 재직 당시 노 전 대통령에게 “북한 어린이들은 피골이 상접해 있다. 3∼4세 때 영양 공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설령 성인이 된다 해도 인간 구실을 못한다”며 북한에 쌀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 반대가 있긴 했지만 결국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쌀 300만석이 북한으로 전달됐다.

약자 보듬고 역사 관심
소외된 사람들에 헌신

“새만금 사업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국민적 합의가 도출된 국책사업이었습니다. 그런 대형 사업이 법원의 결정으로 중단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주무장관인 제가 나서야 했습니다.”

김 전 장관의 장관 재임 기간은 채 5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그는 법원서 새만금 사업 중단을 결정하자 이에 항의하는 뜻에서 사퇴를 결심했다. 노 전 대통령은 그에게 사퇴 의사를 철회하라고 권고했지만 김 전 장관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관직서 물러난 그는 새만금 친환경개발 범국민협의회를 만들어 활동을 이어 나갔다. 대법원은 2006년 새만금 사업의 ‘계속 추진’ 판결을 내렸다.
 

5선 국회의원과 장관직을 뒤로 한 김 전 장관이 최근 몰두하고 있는 것은 북한 어린이 돕기 운동과 5·18 광주민주화운동/4·19혁명/3·1운동 UN·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추진이다. 

대표회장을 맡고 있는 국제사랑재단은 그가 농림부장관 재직 당시 쌀 북송과 궤를 같이 한다. 북한 아이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도를 하면서 가족 단위별로 한 끼를 금식하고, 그 금액을 모아 이유식이나 분유, 빵 등을 구입해 북한으로 보내는 것. 올해로 11회째를 맞았다.

김 전 장관의 기록유산 유네스코 등록 추진 여정은 2008년 18대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이하 교육위원회)서 시작됐다. 광주 서구을서 당선된 그는 상임위를 교육위원회로 정했다. 

지역구 여론조사 결과 지지자들이 그가 교육위원회서 활동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아태지역 국회 교육위원 야당 중진 자격으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찾았다가 유네스코 등재 기록유산에 한국 관련 자료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5·18광주민주화운동, 4·19혁명, 3·1운동이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등재돼있지 않다는 사실에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신청조차 돼있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습니다.”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는 2년에 한 번 각국서 들어온 자료를 검토해 선정한다. 그는 고심 끝에 가장 최근에 일어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먼저 등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광주시민들에게 당시의 자료가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그 결과 수만 점의 자료가 모였다.

“광주여고 1학년 주소연양이 쓴 일기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광주시민은 폭도가 아닙니다. 저는 엄마, 아빠, 오빠들과 함께 인간 띠를 만들어 밤새 광주은행을 지켰습니다. 광주시민은 폭도가 아닙니다’ 그 일기장 끝부분에 눈물자국이 배어 있습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유산 등재를 반대하던 나라도 주소연양의 일기 구절에 마음을 돌렸다. 현재 4·19혁명은 영문 번역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김 전 장관은 4·19혁명이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등재되면 5·18광주민주화운동처럼 아카이브를 크게 만들어 국민들, 특히 젊은 세대에게 우리 역사를 알리고 싶다고 포부를 드러냈다. 

3·1운동까지 기록유산에 등재되면 그가 생각하는 한국 근현대사의 3대 민족민주화평화운동이 모두 유네스코에 올라가는 셈이다.

기록유산 등재
3·1운동까지

평생 신앙과 약자 그리고 역사라는 세 가지 초심을 지키며 살아온 김 전 장관의 목표는 소박했지만 여전히 사회의 부름에 목말라 있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뭐가 돼야겠다는 생각은 지금도 전혀 없습니다. 그저 앞으로 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사회가 저를 부를 때 어디든지 가서 어떤 역할이든 감당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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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도이치 브로커’ ‘청담동 사기꾼’ 연결고리 추적

[단독] ‘도이치 브로커’ ‘청담동 사기꾼’ 연결고리 추적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김건희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의 핵심 인물인 이준수가 3년간 수백 차례 연락에 사용한 휴대전화를 특검팀이 확보했다. 이준수는 주식·코인 주가조작으로 수백억원의 부당이득을 챙기다 구속된 이희진에게 오광수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소개한 인물이다. 앞서 이희진이 구속된 2016년에도 그를 옹호하는 영상을 웹사이트에 올려 친분을 과시했다. 이준수는 과거 무자본 인수합병(M&A) 혐의 등으로 여러 차례 형사처벌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당시에도 김건희 계좌와 연관된 거래를 한 정황이 드러나 검찰 수사를 받았지만, 불기소 처분된 바 있다. 같은 부류 서로 옹호 지난 7월15일 김건희 특검은 김건희와 이준수가 주고받은 문자메시지 내용에서 단순한 투자 조언을 넘어선 사적 관계가 확인됐다고 밝혔다. 2013년부터 2016년까지의 메시지에는 주식 매매 관련 대화뿐 아니라, 사적인 감정 표현과 비공식적 만남 정황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포렌식 결과 이준수는 김건희에게 건진법사 전성배씨를 처음 소개한 인물로 드러났다. 2013년 이준수는 김건희에게 보낸 문자에서 “무당이라기보다는 거의 로비스트에 가깝다. 정치권 네트워크가 막강하다”고 표현하며 전씨를 추천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검은 이 관계를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이준수→건진법사→김건희’로 이어지는 핵심 연결고리로 보고 있다. 특히 건진법사가 윤석열 전 대통령 당선 후에도 대통령실 인사들과 접촉하고 영향력을 행사 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만큼, 특검은 이 라인과 김건희의 대선 이후 행보와의 연속성을 주시하고 있다. 이후 특검은 이준수의 최근 행적 단서를 발견했다. 지난해 10월, 이준수가 음주 운전 혐의로 적발됐는데, 경찰 조사에서 “가까운 지인이 검찰 수사에서 무혐의를 받아 술을 마셨다”고 진술했다는 것이다. 당시 ‘무혐의’를 받은 인물은 도이치모터스 사건에서 불기소 처분을 받은 김건희를 의미한다. 경찰 조사 조서에는 ‘지인’이라고만 기록됐지만, 특검은 실제 진술 내용과 시점을 대조해 그 ‘지인’이 김건희임을 확인했다. 이는 2023년 말까지도 김건희와 이준수 간에 연락이 이어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특검은 수사 과정에서 이준수가 차명계좌 등을 통해 거래에 참여한 정황을 새롭게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그는 음주 운전 혐의로 경찰에 수배된 상태였으며, 특검팀은 지난달 압수수색 현장에서 그를 발견하고 체포를 요청했으나, 경찰이 도착하기 직전 건물 2층에서 뛰어내려 달아난 것으로 전해졌다. 이준수는 김건희의 금융 거래와 밀접한 인물로 여러 차례 거론됐다. 특히 2022년 대선 당시 김의겸 의원은 김건희가 2010년 4월 주가가 급등락하던 태광이엔씨 주식을 대량 매수한 뒤 하루 만에 1000만원이 넘는 이익을 보고 매도했다며,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 투자 의혹을 제기했다. 이준수, 김건희-건진법사-도이치모터스 핵심 코인판으로 진화한 주가조작 조직 ‘VIP’까지 당시 태광이엔씨를 실질적으로 인수해 주가를 띄우고 회사 자금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돼 징역형을 확정받은 인물이 바로 이준수였다. 김건희가 이준수로부터 미공개 정보를 받아 주식을 사고 팔았던 것 아니냐는 과거 의혹이 재조명되고 있다. 김건희 측은 이에 대해 “이준수가 일방적으로 투자와 관련해 연락을 취한 적은 있으나, 김건희는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 적이 없으며 이준수와 밀접한 관계도 아니”라고 반박했다. 또 “이준수와 지난해까지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이준수는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의 핵심으로 불린다. 과거 증권사 애널리스트 출신으로 유명한 그는 여러 투자자 명의 계좌를 동시에 관리하며 시세조종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김건희의 계좌 출고 명령을 직접 수행했다는 내부 증언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검찰은 그를 기소하지 않아 ‘봐주기 수사’ 논란이 불거졌다. 이준수는 “주가조작 전과 4범, 닉네임 ‘새강자’”로 유명했다. 이희진 주가조작 사건 당시 검찰 전관 변호사 오광수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중개했다. 해당 사실은 이준수가 이희진에게 변호사를 알선하고 대가를 받아 챙긴 혐의를 받으면서 드러났다. 이희진은 지난 2016년 9월 무인가 투자매매사를 설립했고, 2014년 7월부터 2016년 8월까지 1600억원대의 주식을 판매해 자본시장법·유사수신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이희진과 조기축구 모임에서 친해진 이준수는 2016년 8월 이희진에게 오광수 등 변호사를 알선하고 그 대가를 받거나 약속받은 혐의를 받았다. 당시 이희진은 증권방송 회원들에게 비상장 주식을 매도한 의혹 등으로 수사를 받고 있었다. 끼리끼리 축구 모임 이희진은 수사기관에서 이준수가 검사·수사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변호사들을 소개하고, ‘착수금’ 2000만원과 불구속 수사를 받을 경우 성공 보수 5000만원을 달라는 요구를 했다고 진술했다. 이준수의 혐의에 관한 증거는 대부분 이희진의 진술에서 비롯됐다. 이희진에 따르면 이준수는 “변호사들에게 적지 않은 선임료를 주는데 나도 그동안 너를 위해 열심히 노력했으니 돈을 달라. 변호사들은 앞선에서 일하고 나는 뒷선에서 일을 볼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를 승낙한 이희진은 자신의 주거지에서 이준수에게 현금 1000만원을 줬다. 또 며칠 뒤 이준수는 이희진에게 “검찰 수사관에게 알아보니 너 골인(구속)될 것 같다. 약속한 1000만원을 달라”고 해 나머지 1000만원을 더 지급했다고 한다. 이에 관해 이준수는 “1000만원은 비상장 주식을 담보로 한 담보대출을 추진하기 위해 수고비 명목으로 받았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이희진의 공소 사실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진술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재판부는 이희진과 다른 증인의 진술이 상반된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재판부는 “이희진은 변호사를 선임하고 이준수와 돌아오는 차 안에서 착수금·성공 보수를 요구받았다고 했지만, 해당 차량 운전사는 이 같은 말을 들은 사실이 없다고 진술했다”고 짚었다. 이희진의 진술은 동생 이희문의 말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이희진은 동생과 이준수에게 돈을 지급할지, 깎을지 상의했다고 했지만, 동생은 “당시 변호사 소개비 등 명목으로 2000만원을 줬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고 나중에 들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2017년 2월14일 서울남부지검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은 이희진과 그의 동생을 사기 혐의 등으로 추가 기소했다. 검찰은 이들이 2015년 4월부터 지난해 4월까지 피해자 28인에게 허위, 과장된 내용을 말하며 대략 41억원 상당의 비상장 주식을 판매한 혐의를 받고 있다고 전하며 추가 조사를 이어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미인가 금융투자업을 영위하며 비상장주식 종목을 추천한 뒤 선행 매매한 주식을 판매해 122억6000만원의 부당이득을 챙긴 혐의로 2020년 2월 징역 3년6개월, 추징금 122억6000만원이 확정됐다. 최근 이씨 형제는 현재 가상화폐(피카코인) 시세조종 사건에 연루돼 구속 상태로 재판받고 있다. 국가권력으로 범죄 네트워크 이희진의 절친이자 김건희와 주가조작 사건의 공범으로 지목된 이준수는 주가조작 전담 브로커로서 “증권사 내부망 접근, 차명계좌 운용, 대포폰 관리” 등을 통해 시세조작을 총괄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이희진 코인 사건의 자전거래 구조 및 주식시장 조작 방식과 유사하다. 통정·자전 거래 구조가 동일하다. 차명계좌·직원을 동원해 리딩방을 운영하고, 허위 보도자료·루머형 호재를 유포하는 패턴도 동일하다. 지난 2016년 이준수는 웹사이트를 통해 이희진을 두둔하는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그는 해당 방송에서 “언론이 사건을 과장했다”며 혐의 전반을 축소하고, “1600억 허가 안 받은 것뿐이지 큰 죄는 아니”라고 말했다. 이어 “유사수신죄는 원금 보장 약속이 있어야 성립한다. 계약서엔 그런 말이 없다”며 기소 자체의 정당성을 부정했다. 또 이준수는 “주가가 4배, 5배 간다고 했다가 떨어졌다고 죄는 아니”라며, 주가조작을 단순한 ‘예측 실패’로 치부했다. 또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이 목표가를 제시하는 것도 죄냐”고 반문하며, 이희진이 진행했던 거래를 “시장 참여자의 일반적 행위”로 표현했다. 영상에서 이준수는 전환사채 거래와 내부자 정보 이용 혐의를 언급하며 “브로커들이 조작했고, 희진이는 오히려 그 사실을 검찰에 말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IS동서 전환사채권은 큰 잘못이지만 희진이는 계약 불이행 피해자”라며 범죄의 고의성을 부정했다. 이는 공소장과 재판기록상 사실과는 상충되는 주장이다. 수백억 먹은 이희진 절친 전 청와대 민정수석 소개 또 다른 발언에서 그는 “사기적 부정거래는 회사가 거짓말로 주식을 파는 행위”라며 “이희진은 단지 회사 공시를 믿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올리패스 등 현재 상장폐지된 기업을 언급하며 “공시가 취소됐다고 사기라 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금융감독 규정상 ‘허위 공시 정보 활용’과 ‘공모 행위’의 구분을 의도적으로 축소한 해석이다. 영상 말미에서 이준수는 피해자들의 법적 구제 가능성마저 부정했다. “이희진한테 피해 입었다고 나라가 받아주지 않는다. 민사·형사도 성립 안 된다”며 “다 변호사들이 사기 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법조계를 “돈에 눈먼 집단”이라 비난하며, 피해자들의 소송을 “쓸데없는 짓”이라 재차 강조했다. 한편, 이준수가 옹호한 주가조작범 이희진은 코인 시세조종 혐의로 기소된 상태다. 서울남부지방검찰청이 2023년 10월4일자로 제출한 공소장에 따르면, 피고인 이희진과 이희문은 A, B, C 토큰을 이용한 대규모 가상자산 시세조종·사기 조직을 운영한 혐의로 기소됐다. 공소장에 따르면, 두 형제는 실체가 불분명한 ‘스캠(Scam) 코인’을 발행해 거래소 상장을 추진하고, 허위 공시와 자전거래(봇 프로그램 활용)를 통해 시세를 인위적으로 부풀린 뒤 투자자들에게 고점 매도를 유도하는 ‘물량 털기(Pump & Dump)’ 방식으로 약 700억원대의 피해를 입혔다. A 토큰 피해자는 1만564명으로 피해액은 약 217억원, B 토큰 피해자는 4342명, 피해액은 약 341억원, C 토큰 피해자는 1만5641명, 피해액은 약 339억원이다. 김건희 특검의 휴대전화 포렌식 결과는 그의 단순한 과거 인연을 넘어, 사적 네트워크가 실제 정치권력의 형성 과정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특검은 현재 ‘김건희·이준수·건진법사’로 이어지는 삼각관계의 실체를 밝히는 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현재까지 드러난 정황을 종합하면 이희진과 이준수는 변호사·브로커 인맥을 공유하고, 자전거래 기술을 활용해 주식과 코인 양쪽의 시장 조작 기술도 공유했다. 이희진과 김건희의 접점은 없으나 이준수를 경유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는 상황이다. 현재까지 이희진 형제는 ‘코인판 사기’ 혐의로 기소됐지만, 이준수에 대한 직접 수사는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공소장과 언론 보도를 교차 검증할 때 자전거래 시스템, 차명계좌 운용, 허위 호재 유포 패턴 등이 모두 이준수의 과거 주가 조작 수법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검찰의 보강 수사 필요성이 높다. 국정으로 연결 범죄 네트워크 이씨 형제의 범행은 과거 주가조작 사건의 복제판이며, 그 배후에는 이준수 같은 ‘조작 기술자’가 존재한다는 정황이 공소장 등에서 확인된다. 김건희 계좌가 활용된 도이치모터스 사건과의 연계가 입증될 경우, 이 사건은 단순한 금융 사기가 아닌 ‘국가권력과 민간 조작 네트워크의 교차 지점’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