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오롯이 ‘나라 위해 사는’ 김영진 전 농림부장관

끊임없는 도전, 그리고 응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인류의 역사는 도전과 응전으로 점철돼있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서 자연의 도전에 대한 인간의 응전이 인간 사회의 문명과 역사를 발전시키는 바탕이 된다고 했다. 개인도 안팎서 덮쳐오는 도전을 극복할 때마다 성장한다. 김영진 전 농림부장관은 도전과 응전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일평생을 바쳤다.
 

<일요시사>는 지난 4일, 서울 여의도의 4·19혁명 UN·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등재 및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사무실서 김영진 전 농림부장관을 만났다. 김 전 장관은 인터뷰서 “도전과 응전, 신앙, 약자, 역사, 초심”이라는 단어를 자주 언급했다. 그의 삶이 응축된 표현이다. 국회의원, 농림부장관, 대학 석좌교수, 재단 이사장, 기념사업회 위원장 등 김 전 장관은 세상의 부름에 답하지 않은 적이 없다.

빈농의 아들
학비없어 고생

“빈직다사(貧職多事)라는 말이 있습니다.”

김 전 장관은 최근 근황을 묻는 질문에 ‘빈직다사’라고 했다. 직책이 대단치 않지만 일은 바쁘다는 뜻이다. 김 전 장관은 현재 광주대학교 석좌교수, 사단법인 국제사랑재단 대표회장, 사단법인 5·18광주민주화운동/4·19혁명/3·1운동 UN·유네스코 등재 및 아카이브센터 이사장, 사단법인 사랑의 쌀나눔본부 상임대표 등 10여개의 직책을 맡고 있다. 

야인이 되기 전에는 5선 국회의원, 농림부 장관 등의 화려한 명패가 그를 수식했다.


1946년 11월17일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장남이었던 그가 네 동생의 학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우체국 사환으로 1년간 일하며 학비를 벌어 이듬해 강진농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대학 공부의 꿈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뤄졌다. 가난의 기억은 평생 그가 소외된 사람들에게 헌신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1988년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국회에 입성할 때 다짐한 게 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의회 선교의 작은 심부름꾼이 되겠다, 날 닮은 농민과 소외된 사람들이 이 땅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성심을 쏟겠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명백히 규명하겠다,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김 전 장관은 1988년 4·26총선서 평화민주당 소속으로 전남 강진·완도군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의 국회 입성 과정은 광주서 시작됐다. 1980년 5월 광주는 핏빛으로 물들었다. 시민들은 거리로 나왔고 이 과정서 희생이 잇따랐다. 계엄군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시민을 상대로 총구를 들이밀었다.
 

자식 잃은 부모들이 통곡했고 부모를 여읜 아이들은 울부짖었다. 하지만 1981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1주기 추모식은 진행되지 못했다. 유족들은 집에서도 제사를 지내지 못해 다른 지역의 사찰로 도망치듯 떠났다가 2∼3일 후 숨죽여 돌아왔다. 그만큼 냉혹한 시절이었다.

당시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회장이던 김 전 장관은 전남도청 앞 YMCA서 5·18광주민주화운동 2주기 추모예배를 계획했다. 그는 추모예배 당일까지 당국의 눈을 피하기 위해 후배 집, 교회, 사찰 등을 전전했다.

그가 붙들리면 추모예배는 영락없이 실패로 돌아갈 상황이었다. 2000명이 운집한 추모예배에 나타난 김 전 장관은 “광주의 죄 없는 양민을 학살한 전두환 정권을 처단해야 한다”고 외쳤다. 이후 그는 투옥됐다.


민주화운동
두 번 투옥

두 번째 구속은 야간통행 금지제도 해제 운동 때문이다. 1980년 초에는 밤 12시부터 오전 4시까지 4시간 동안은 말 그대로 돌아다닐 수 없었다. 종교활동은 물론이고 생계와 직결되는 논이나 밭에 문제가 생겨도 나갔다가 붙들리면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다. 인권 의식이 바닥을 치던 때였다.

“야간통행 금지제도는 농민의 생존권과 종교의 자유를 침해했습니다. 반드시 없어져야 할 제도였습니다.”

1980년대부터 농가에 비닐하우스 재배가 퍼졌다. 문제는 비닐하우스가 자연재해에 약하다는 점이었다. 눈이 오면 쓸어내고 바람이 불면 붙잡아야 했다. 제때 그러지 못하면 비닐하우스가 주저앉거나 날아가 한 해 농사를 망치기 일쑤였다. 김 전 장관이 재해대책피해 관련 법안을 발의하기 전까지 피해는 오롯이 농가의 몫이었다.

또 그는 언제, 어디서든 종교의 자유를 표현하기 위해서라도 야간통행 금지제도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전 장관은 3페이지 분량의 청원서를 만들어 교회 등에서 강연하고 국회우체국을 통해 국회의장에게 1000통가량을 보내는 등 운동을 지속했다. 

계엄사령부는 그런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김 전 장관은 입에 재갈이 물리고 눈에 딱지를 붙인 채 기절해 광주 계엄사 분실에 끌려갔다.

그는 발가벗겨진 채 2.3㎡(0.7평) 크기의 방에서 눈을 떴다. 계엄사령부는 그에게 통금 해제 운동의 배후를 물었다. 김 전 장관은 “자금을 받은 일도 없고 배후도 없다”고 반복해 말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백열등은 머리 위에서 작열하고 두들겨 맞고 대화는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고. 김 전 장관은 당시 말 그대로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고 토로했다.

그때 김 전 장관의 귓가에 찬송가가 들렸다. 그의 어머니가 교인들을 이끌고 분실 앞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던 것이다. 농민들도 합세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노랫소리는 높아졌다. 계엄사령부는 김 전 장관에게 ‘분실서 있었던 일을 발설하지 않고, 통금 해지 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라고 강요했다. 

김 전 장관은 이를 거절했다. 분실 앞을 찾는 지역 농민의 수가 점차 불어나자 계엄사령부는 그를 무죄 방면하기에 이른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일평생
세상이 부르면 “나는 간다”

“신앙으로 훈련된 일꾼, 약자인 농민이나 서민들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게 제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김 전 장관이 계엄사령부에 끌려가 한 저항은 빠른 속도로 지역 사회에 퍼져 나갔다. 다시 일터로 돌아간 그는 어느 날 지역 농민 대표, 교인 대표 등의 방문을 받는다. 이들은 믿을 만한 사람을 한 명 뽑아서 국회로 보내기로 했다고 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을 말하는지 몰랐던 김 전 장관은 신협 조합원들과 함께 동참하겠다고 의지를 드러냈다. 그리고 지역 대표들이 자신을 지목했을 때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저는 한 번도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기도해 본 적 없었습니다. 저는 못 합니다.”

그러나 지역 대표들은 거듭 김 전 장관을 찾아왔다. 그는 고민 끝에 출마를 결심했다. 당시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의 공천을 받아 그는 전남에 출마했다. 그의 상대는 전두환·노태우씨의 육사 11기 동기였고, 재선 국회의원인 민주정의당 김식 전 의원이었다. 모두 상대가 너무 강하다고 했지만 개표함을 열어보니 김 전 장관의 승리였다. 
 

호남 출신 고졸 정치인의 등장이었다.

김 전 장관의 초선 시절 활약은 엄청났다. 그는 13대 국회서 부활한 국정감사의 스타였고,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 규명을 위한 ‘광주청문회’서 활약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이해찬 전 총리가 김 전 장관과 함께 광주청문회서 활약했다. 김 전 장관은 저수지서 멱을 감다 총에 맞은 소년들의 사진을 내밀며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노무현과
청문회 스타

1980년 5월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이후 1988년 청문회가 열릴 때까지 광주는 폭도들의 도시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였다. 계엄군에 저항하다 사망한 시민들이 묻힌 망월동은 저주의 땅으로 불렸고 사람들은 그곳에 침을 뱉었다. 광주청문회는 국회의 정부 비판과 견제, 감시 기능을 되살리고 정의를 확립하는 기점이 됐다.

“아무리 굳은 결심을 해도 도전을 받게 마련입니다. 정치를 하는 동안 제게 찾아왔던 큰 도전은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었습니다.”

그는 초선부터 14대, 15대, 17대까지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이하 농수산 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했다. 일반적으로 2년에 1번, 전반기와 후반기 상임위를 바꿀 수 있음에도 김 전 장관은 4선을 하는 동안 농수산 위원회에만 있었다. 

상임위를 정할 때 원내대표실에 희망 상임위를 3개 적어 내는데, 그의 1∼3지망은 늘 농수산위원회였다.

그가 농수산 위원회서 활약할 때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문제가 불거졌다. 협상의 핵심 쟁점은 쌀 시장 개방이었다. 총 농민의 90%가 쌀이라는 단일품목에 생계를 걸고 있던 때였다. 쌀 시장 개방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김 전 장관은 스위스 제네바로 넘어갔다. 

그는 한글과 영어로 ‘미국은 람보식 수입 개방 압력을 당장 중단하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거세게 항의했다.

김 전 장관은 미국 대표를 붙들고 대화를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자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그때 나온 방법이 삭발식과 단식 투쟁이다. 그는 머리를 밀고 물과 소금만으로 15일을 버텼다. CNN, NHK 등 외신을 통해 김 전 장관의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 농민들이 제네바로 날아와 그에게 힘을 보탰다. 

통역을 위해 제네바에 온 장정애씨도 함께 머리를 밀고 김 전 장관의 곁에 앉았다.

한국서 온 국회의원이 머리를 깎고 단식투쟁을 하는 모습은 국내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김 전 장관의 행동은 각국 의원들이 모여 만든 연맹의 저항으로 발전했다. 

김 전 장관은 NHK 등 외신과의 인터뷰서 “한국과 제3세계 농민의 생존권을 짓밟는 협상은 인류 공영과 세계 평화라는 UN의 지상 목표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투쟁의 결과는 한국의 쌀 관세화 유예조치로 나타났다.

“어느 날인가 보좌관이 코앞에 봉투를 들이 밀었습니다. 생선 냄새가 강하게 올라왔습니다. 제 지역구 완도군 어민이 생선을 잡아다 판 돈 중 3000원을 봉투에 넣어 후원금으로 낸 겁니다. 물고기 잡는 어민이 저한테 의정활동 잘하라고 격려 차원서 보내주신 돈이죠.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농수산 위원회 외길을 걸었던 김 전 장관은 2003년 노무현정부서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발탁됐다. 노 전 대통령과 김 전 장관은 민주화 운동 동지이자 ‘야자 트는’ 친구 사이였다.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당시 제네바서 단식투쟁을 하던 김 전 장관에게 노 전 대통령은 수차례 전화로 응원을 전했다고 한다.

김 전 장관은 농림부장관 재직 당시 노 전 대통령에게 “북한 어린이들은 피골이 상접해 있다. 3∼4세 때 영양 공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설령 성인이 된다 해도 인간 구실을 못한다”며 북한에 쌀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 반대가 있긴 했지만 결국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쌀 300만석이 북한으로 전달됐다.

약자 보듬고 역사 관심
소외된 사람들에 헌신

“새만금 사업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국민적 합의가 도출된 국책사업이었습니다. 그런 대형 사업이 법원의 결정으로 중단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주무장관인 제가 나서야 했습니다.”

김 전 장관의 장관 재임 기간은 채 5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그는 법원서 새만금 사업 중단을 결정하자 이에 항의하는 뜻에서 사퇴를 결심했다. 노 전 대통령은 그에게 사퇴 의사를 철회하라고 권고했지만 김 전 장관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관직서 물러난 그는 새만금 친환경개발 범국민협의회를 만들어 활동을 이어 나갔다. 대법원은 2006년 새만금 사업의 ‘계속 추진’ 판결을 내렸다.
 

5선 국회의원과 장관직을 뒤로 한 김 전 장관이 최근 몰두하고 있는 것은 북한 어린이 돕기 운동과 5·18 광주민주화운동/4·19혁명/3·1운동 UN·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추진이다. 

대표회장을 맡고 있는 국제사랑재단은 그가 농림부장관 재직 당시 쌀 북송과 궤를 같이 한다. 북한 아이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도를 하면서 가족 단위별로 한 끼를 금식하고, 그 금액을 모아 이유식이나 분유, 빵 등을 구입해 북한으로 보내는 것. 올해로 11회째를 맞았다.

김 전 장관의 기록유산 유네스코 등록 추진 여정은 2008년 18대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이하 교육위원회)서 시작됐다. 광주 서구을서 당선된 그는 상임위를 교육위원회로 정했다. 

지역구 여론조사 결과 지지자들이 그가 교육위원회서 활동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아태지역 국회 교육위원 야당 중진 자격으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찾았다가 유네스코 등재 기록유산에 한국 관련 자료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5·18광주민주화운동, 4·19혁명, 3·1운동이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등재돼있지 않다는 사실에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신청조차 돼있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습니다.”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는 2년에 한 번 각국서 들어온 자료를 검토해 선정한다. 그는 고심 끝에 가장 최근에 일어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먼저 등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광주시민들에게 당시의 자료가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그 결과 수만 점의 자료가 모였다.

“광주여고 1학년 주소연양이 쓴 일기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광주시민은 폭도가 아닙니다. 저는 엄마, 아빠, 오빠들과 함께 인간 띠를 만들어 밤새 광주은행을 지켰습니다. 광주시민은 폭도가 아닙니다’ 그 일기장 끝부분에 눈물자국이 배어 있습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유산 등재를 반대하던 나라도 주소연양의 일기 구절에 마음을 돌렸다. 현재 4·19혁명은 영문 번역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김 전 장관은 4·19혁명이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등재되면 5·18광주민주화운동처럼 아카이브를 크게 만들어 국민들, 특히 젊은 세대에게 우리 역사를 알리고 싶다고 포부를 드러냈다. 

3·1운동까지 기록유산에 등재되면 그가 생각하는 한국 근현대사의 3대 민족민주화평화운동이 모두 유네스코에 올라가는 셈이다.

기록유산 등재
3·1운동까지

평생 신앙과 약자 그리고 역사라는 세 가지 초심을 지키며 살아온 김 전 장관의 목표는 소박했지만 여전히 사회의 부름에 목말라 있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뭐가 돼야겠다는 생각은 지금도 전혀 없습니다. 그저 앞으로 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사회가 저를 부를 때 어디든지 가서 어떤 역할이든 감당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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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특집 - 백운비의 천기누설> 병오년 국운 대예측

[설 특집 - 백운비의 천기누설] 병오년 국운 대예측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다사다난한 한 해가 지나고 2026년 새해가 밝았다. 병오년(丙午年), 불의 기운을 가진 말띠의 해다. 불처럼 열정적이고 도전적인 에너지가 강한 해라는 의미다. 그러나 치솟는 불길이 되레 화가 될 모양이다. 올해를 둘러싼 경제 전망이 밝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까지 대한민국은 또 하나의 고비를 넘는 중이다. 과연 국민들은 이 보릿고개를 넘을 수 있을까? <일요시사>가 백운비 역리원장을 만나 병오년 대한민국 국운의 흐름을 들어봤다. 대한민국의 공기는 무겁다. 정치·경제·사회 어느 한 분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반적인 흐름이 동시에 눌린 듯한 느낌이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이어진 장기화된 경기침체와 고환율·고물가 상황은 국민들의 일상을 짓누르고 있다. “이보다 더 나빠질 수 있느냐”는 말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일터에서는 “버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체념 섞인 반응이 늘어났다. 나빠지다… 치솟는 불길 백운비 원장은 최근 몇 년간 국민들이 체감하는 삶의 무게가 급격히 달라졌다고 봤다. 그는 불과 10년 전 국운이 비교적 안정돼 있을 때만 해도 대체로 먹고사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당시에는 동네 구멍가게조차 유지가 가능하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통용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표현이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후 약 9년간 국운이 점진적으로 나빠지는 흐름이 이어졌다고 봤다. 역리학적으로 보면 2026년은 ‘양화(陽火)’의 기운이 강하게 작용하는 해다. 불의 기운은 본래 위로 치솟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상황이 열려 있을 때는 성장과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막힌 상태에서 불기운만 강해질 경우 화(禍)로 작용하기 쉽다. 백 원장은 “양화가 득세하면 좋은 것도 함께 올라가야 길한데, 지금은 차단된 상태에서 불만 위로 치솟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는 분노와 충돌, 사회적 마찰이 빈번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화마(火魔)와 비슷한 형국”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사회 곳곳에서 갈등과 충돌이 잦아지고, 사소한 문제도 쉽게 감정싸움으로 번지는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백 원장은 “열은 많은데 출구가 없을 때 가장 위험하다”며 “2026년은 바로 그런 해”라고 진단했다. 그는 2026년 국운을 ‘사통팔달(四通八達)’이 막힌 상태’에 비유했다. 사통팔달은 사방으로 통하고 여덟 갈래로 길이 열려 있다는 뜻이다. 예부터 역리에서는 운이 좋을 때를 사통팔달에 비유해 왔다. 길이 열려야 사람이 움직이고, 움직여야 살 길이 생긴다는 논리다. 반대로 사통팔달이 막혔다는 것은, 아무리 애를 써도 빠져나갈 통로가 없다는 의미다. 백 원장은 “전쟁이 나면 피난을 가야 하는데, 산도 물가도 사람 속도 안전하지 않은 형국”이라며 “움직일수록 위험하고, 가만히 있어도 불안한 구조”라고 설명했다. 그는 “운이라는 것은 원래 사통팔달이 돼야 한다”고 했다. 사방이 열려야 길이 나고, 여러 가지가 순환하며 성취가 생긴다는 뜻이다. 그러나 올해는 “사방이 막혀 있다”고 봤다. 그래서 “갈 곳이 없다. 헤맨다”고 표현했다. 이와 관련해 그는 정감록에 등장하는 ‘인근불·산근불·수근불’이라는 구절을 언급했다. 사람 속으로 가도 안 되고, 산으로 가도 안 되며, 물가로 가도 안 된다는 뜻으로, 결국 도망칠 곳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백 원장은 이를 오늘의 국운에 빗대어 출구 자체가 막혀 있는 구조로 해석했다. 이 막힘이 가장 먼저 드러나는 곳이 경기라고 했다. 백 원장은 현재의 경제 상황을 두고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돈이 돌지 않는 구조”라고 말했다. 경제의 본질은 순환인데, 지금은 그 순환 고리가 곳곳에서 끊어졌다는 것이다. “에너지·부동산·건설이 유일한 해법” “뛰어난 인재 등용으로 위기 관리해야” 불안이 커질수록 소비가 줄고, 소비가 줄면 기업은 투자를 멈춘다. 이 과정이 반복되며 경제 전체가 점점 움츠러드는 악순환에 빠졌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경제 지표만 놓고 보면 아직 버틸 여지가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외환보유액은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수출 역시 완전히 꺾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국민들이 느끼는 현실은 다르다. 자영업자들은 하루하루 버티는 데 급급하고, 직장인들은 월급날이 와도 통장이 스쳐 지나갈 뿐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청년층 역시 미래 계획보다 당장의 생존을 먼저 고민하는 상황이다. 백 원장은 이런 체감경기가 쫓기고 쫓는 구조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빚을 갚아야 하는 쪽은 쫓기고, 물건을 팔아야 하는 쪽도 쫓기며, 소비자는 사기 위해 애쓰고 사업자는 버티기 위해 애쓴다. 몸과 마음을 다 써도 역부족을 느끼는 사람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다만 그는 2026년을 ‘마지막 고비’라고 표현했다. 고비가 있다는 말은 넘어설 구간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넘는 방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백 원장이 올해를 ‘양화’로 설명한 부분도 같은 맥락이다. 음화가 따뜻한 햇볕이나 곁불에 가까운 성격이라면, 양화는 활활 타오르는 불처럼 강도가 크다는 것이다. 불기운은 본래 위로 치솟는 성질이 있어, 표면적으로는 ‘올라가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경제가 올라가고 산업이 살아나고 활력이 돌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백 원장은 지금의 국운이 이미 ‘차단’돼있다는 점을 문제로 들었다. 즉, 불이 치솟는데 출구가 막혀 있으면 그 불은 성장의 동력이 아니라 ‘화마’처럼 작동할 수 있다는 경고다. 그는 “화기가 중천한다”는 표현을 쓰며, 이 기운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사회 전반에 과열과 충돌, 갈등이 함께 치솟을 수 있다고 봤다. 그렇다면 해법은 없는걸까? 백 원장은 “답이 없는 해는 없다”며 화와 상생하는 것이 바로 토(土)와 목(木)이라고 설명했다. 백 원장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방침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방침은 곧 정책이다. 그는 답을 세 갈래로 정리했다. 에너지, 부동산, 건설이다. 백 원장은 “이 세 가지가 유일한 해법”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가장 강조한 해법 중 하나는 에너지 정책이다. 국내외 산업과 수출입 구조에서 에너지 비용과 수급이 흔들리면 경제 전체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는 “에너지 정책을 중심에 두고 전략적으로 관리해야 국가 경제의 체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사통팔달 생존 급급 부동산에 대해서는 규제로 묶어두는 접근을 경계했다. 자금이 회전하지 않으면 내수가 얼어붙고 체감경기는 더 악화된다는 이유에서다. 그가 말한 부동산은 단순한 주택 거래에 국한되지 않았다. 농지, 임야, 전답 등 토지 전반과 농업 관련 규제, 지역 단위 개발과 거래 규제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 같은 규제가 완화돼야 농업과 지역 경제가 살아나고, 내수 회복의 여지가 생긴다는 논리다. 부작용이 따르더라도 순기능이 더 크다면 이를 관리하면서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건설 분야 역시 중요한 고리로 제시됐다. 백 원장은 오행의 상생 논리를 들어 불기운이 강해지는 해에는 ‘목(木)’이 연동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건설은 단순히 건물을 짓는 행위가 아니라 자재, 설비, 인력, 금융 등 연쇄 산업이 함께 움직이는 분야다. 부동산과 건설을 동시에 움직이게 하면 파급 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백 원장은 자산 형성의 사다리가 막히면 젊은 층의 기대가 꺾이고 사회 전반의 활력이 떨어질 수 있다고 봤다. 그는 정책의 방향만큼이나 이를 실행할 ‘사람’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인재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같은 정책도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백 원장은 이재명 대통령의 개인 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개인의 운만으로 국운을 뒤집을 수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 때문에 그는 2026년을 두고 “성군(聖君)이 나오기 어려운 해”라고 단언했다. 국운이 나쁜 시기에는 누구든 성과를 내기 어렵고, 성군이 나오기 힘든 구조라고도 했다. 연산군과 광해군을 예로 들며, 국운이 기울어진 시기에 즉위한 지도자에게는 선택지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런 구조에서는 누가 자리에 앉아도 비판을 받기 쉬운 환경이 형성된다고 봤다. 정치권 전반에 대해서는 국운의 분산이 갈등을 증폭시킬 수 있다고 분석했다. 힘이 한 곳에 모이지 못하면 작은 사안도 쉽게 정치적 충돌로 번지고, 여야를 넘어 같은 진영 내부에서도 분열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상황을 두고 “양분과 분열의 해”라고 표현했다. 양분(兩分)은 둘로 나뉜다는 뜻이지만, 현실에서는 둘로 끝나지 않는다. 둘로 갈라진 뒤 다시 갈라지고, 결국 여러 갈래로 흩어진다. 백 원장은 “이럴 때 정치권은 합치자는 말은 많아도, 실제로는 더 쪼개지는 흐름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2026년 정치 지형에 대해선 “높이 쌓아 올린 알이 언제 깨질지 모르는 형국”이라고 비유했다. 겉으로는 안정돼 보일 수 있지만, 작은 충격에도 균열이 날 수 있다는 의미다. 권토중래 전복후괴 백 원장은 “군계일학(群鷄一鶴)”을 꺼냈다. 무리 속에서 돋보이는 한 사람, 즉 뛰어난 인재를 등용해 위기를 관리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런 해일수록 백 원장이 가장 강조한 것은 ‘인사(人事)’다. 국운이 나쁠 때는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판단이 흐려지기 쉽기 때문이다. 이럴수록 사람의 선택이 결과를 좌우하게 된다. 백 원장은 이 대통령에게 올해가 불안정한 만큼 ‘아첨하는 사람’이 늘 수 있다고도 경고했다. 운이 나쁜 시기에는 이상하게도 권력자나 부자에게 빌붙어 아첨하는 행동이 늘어나고, 그 과정에서 배신과 척을 지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국제 정세에 대한 전망도 같은 결로 이어졌다. 백 원장은 특징으로 ‘분산(分散)’을 들었다. 힘이 한 곳으로 모여야 외부 압력을 버틸 수 있는데, 올해는 국운이 흩어져 힘을 제대로 쓰기 어렵다는 진단이다. 분산되면 허점이 드러나고, 허점이 드러나면 외부 공격이 들어온다는 논리다. 그는 이를 복싱에 비유했다. 복싱 선수가 가드를 올리면 상대가 쉽게 치지 못한다. 그런데 가드를 내리면 약점이 보이고 공격이 들어온다. 백 원장은 “우리가 튼튼하면 공격이 안 오는데 이번에는 들어온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공격은 군사적 충돌만을 뜻하지 않고, 외교적 압박과 경제적 공세, 국제 갈등의 심화까지 포괄하는 의미로 읽힌다. 그는 “외교 혼동과 시행착오로 갈등이 심화되고 외부의 압력과 공격이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국제 분야에서의 대응책은 무엇이냐고 묻자, 백 원장은 다시 ‘사람’으로 돌아왔다. ‘철저한 방어 준비’가 필요하며, 그 방어를 위해 ‘인적 자원 파견’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해외로 사람을 내보내고, 현장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협상과 조율을 담당할 인재를 배치해 허점을 줄여야 한다는 취지다. 그는 “이번 해는 어느 해보다 인재 발굴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국운이 바닥난 것이 아니므로 “틈새가 있다”고 했고, 그 틈새를 메우고 넓히는 것이 인재라는 뜻이다. “6월 지선 대대적 물갈이” “아첨하는 사람 조심해야” 오는 6월에 시행되는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키워드는 권토중래(捲土重來)다. 권토중래는 “실패했던 사람, 포기했던 사람이 다시 분기해 세력을 찾는다”는 뜻이라고 풀었다. 다시 일어서고, 다시 판이 바뀌는 사례가 늘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번에 공천 못 받고 밀려났던 사람이 다시 부활하는 케이스’를 예로 들면서 “물갈이가 다 되는 건 아니지만 물갈이가 많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백 원장은 이 대통령에게 “전복후계(前覆後戒)”의 태도를 강조했다. 앞사람의 실패를 거울삼아 뒤의 사람이 경계한다는 뜻이다. 그는 이를 “전임 대통령의 실수를 경계 삼아야 한다”는 식으로 풀었다. 이는 이 대통령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장관·부처·기관·기업 대표 등 ‘조직의 책임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덕목이라고 했다. 즉, 불리한 국운의 해에는 새 일을 무리하게 벌이기보다, 전임의 실수와 실패를 분석해 같은 구멍에 다시 빠지지 않는 것이 우선이라는 주장이다. 국민들의 삶도 우려했다. 백 원장은 지난 몇 년간 국민 갈등이 극심했다는 문제의식에 동의하며, 2026년에는 그 갈등이 더하다고 했다. 그는 “운이 나쁜 해에는 인심이 각박해지며 배려와 용서가 줄고, 민감하고 예민해진 사회 분위기가 형성된다”며 “친했던 사람끼리도 견제 대상이 되고, 이해관계에 따라 적이 되는 일이 많아질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이를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말로 표현하며, 각자도생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백 원장은 의지하는 대상이 있더라도, 무너질 수 있는 해이기 때문에 결국 자기 책임 의식을 더 가져야 한다는 취지다.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조차도 현실의 무게 앞에서 시험대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이혼과 결별, 인간관계 단절이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며 “경제적 불안과 심리적 피로가 겹치면 사회 문제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우울감이나 분노 조절 문제 등 정신적 부담이 커질 수 있다”며 “2026년은 몸보다 마음이 먼저 지치는 해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자는 더 못 살게 된다”고도 전했다. “마지막 고비다” 2027년에는 회복기로 들어선다. 백 원장은 “27년부터 회복기로 들어간다”는 취지로 말하면서도, 곧바로 후유증을 언급했다. 병이 나아도 후유증이 남듯이, 회복이 시작되더라도 이전의 고통이 흔적으로 남아 일정 기간 지속될 수 있다는 뜻이다. <imshar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