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오롯이 ‘나라 위해 사는’ 김영진 전 농림부장관

끊임없는 도전, 그리고 응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인류의 역사는 도전과 응전으로 점철돼있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서 자연의 도전에 대한 인간의 응전이 인간 사회의 문명과 역사를 발전시키는 바탕이 된다고 했다. 개인도 안팎서 덮쳐오는 도전을 극복할 때마다 성장한다. 김영진 전 농림부장관은 도전과 응전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일평생을 바쳤다.
 

<일요시사>는 지난 4일, 서울 여의도의 4·19혁명 UN·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등재 및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사무실서 김영진 전 농림부장관을 만났다. 김 전 장관은 인터뷰서 “도전과 응전, 신앙, 약자, 역사, 초심”이라는 단어를 자주 언급했다. 그의 삶이 응축된 표현이다. 국회의원, 농림부장관, 대학 석좌교수, 재단 이사장, 기념사업회 위원장 등 김 전 장관은 세상의 부름에 답하지 않은 적이 없다.

빈농의 아들
학비없어 고생

“빈직다사(貧職多事)라는 말이 있습니다.”

김 전 장관은 최근 근황을 묻는 질문에 ‘빈직다사’라고 했다. 직책이 대단치 않지만 일은 바쁘다는 뜻이다. 김 전 장관은 현재 광주대학교 석좌교수, 사단법인 국제사랑재단 대표회장, 사단법인 5·18광주민주화운동/4·19혁명/3·1운동 UN·유네스코 등재 및 아카이브센터 이사장, 사단법인 사랑의 쌀나눔본부 상임대표 등 10여개의 직책을 맡고 있다. 

야인이 되기 전에는 5선 국회의원, 농림부 장관 등의 화려한 명패가 그를 수식했다.

1946년 11월17일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장남이었던 그가 네 동생의 학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우체국 사환으로 1년간 일하며 학비를 벌어 이듬해 강진농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대학 공부의 꿈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뤄졌다. 가난의 기억은 평생 그가 소외된 사람들에게 헌신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1988년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국회에 입성할 때 다짐한 게 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의회 선교의 작은 심부름꾼이 되겠다, 날 닮은 농민과 소외된 사람들이 이 땅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성심을 쏟겠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명백히 규명하겠다,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김 전 장관은 1988년 4·26총선서 평화민주당 소속으로 전남 강진·완도군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의 국회 입성 과정은 광주서 시작됐다. 1980년 5월 광주는 핏빛으로 물들었다. 시민들은 거리로 나왔고 이 과정서 희생이 잇따랐다. 계엄군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시민을 상대로 총구를 들이밀었다.
 

자식 잃은 부모들이 통곡했고 부모를 여읜 아이들은 울부짖었다. 하지만 1981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1주기 추모식은 진행되지 못했다. 유족들은 집에서도 제사를 지내지 못해 다른 지역의 사찰로 도망치듯 떠났다가 2∼3일 후 숨죽여 돌아왔다. 그만큼 냉혹한 시절이었다.

당시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회장이던 김 전 장관은 전남도청 앞 YMCA서 5·18광주민주화운동 2주기 추모예배를 계획했다. 그는 추모예배 당일까지 당국의 눈을 피하기 위해 후배 집, 교회, 사찰 등을 전전했다.

그가 붙들리면 추모예배는 영락없이 실패로 돌아갈 상황이었다. 2000명이 운집한 추모예배에 나타난 김 전 장관은 “광주의 죄 없는 양민을 학살한 전두환 정권을 처단해야 한다”고 외쳤다. 이후 그는 투옥됐다.

민주화운동
두 번 투옥

두 번째 구속은 야간통행 금지제도 해제 운동 때문이다. 1980년 초에는 밤 12시부터 오전 4시까지 4시간 동안은 말 그대로 돌아다닐 수 없었다. 종교활동은 물론이고 생계와 직결되는 논이나 밭에 문제가 생겨도 나갔다가 붙들리면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다. 인권 의식이 바닥을 치던 때였다.

“야간통행 금지제도는 농민의 생존권과 종교의 자유를 침해했습니다. 반드시 없어져야 할 제도였습니다.”

1980년대부터 농가에 비닐하우스 재배가 퍼졌다. 문제는 비닐하우스가 자연재해에 약하다는 점이었다. 눈이 오면 쓸어내고 바람이 불면 붙잡아야 했다. 제때 그러지 못하면 비닐하우스가 주저앉거나 날아가 한 해 농사를 망치기 일쑤였다. 김 전 장관이 재해대책피해 관련 법안을 발의하기 전까지 피해는 오롯이 농가의 몫이었다.

또 그는 언제, 어디서든 종교의 자유를 표현하기 위해서라도 야간통행 금지제도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전 장관은 3페이지 분량의 청원서를 만들어 교회 등에서 강연하고 국회우체국을 통해 국회의장에게 1000통가량을 보내는 등 운동을 지속했다. 

계엄사령부는 그런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김 전 장관은 입에 재갈이 물리고 눈에 딱지를 붙인 채 기절해 광주 계엄사 분실에 끌려갔다.

그는 발가벗겨진 채 2.3㎡(0.7평) 크기의 방에서 눈을 떴다. 계엄사령부는 그에게 통금 해제 운동의 배후를 물었다. 김 전 장관은 “자금을 받은 일도 없고 배후도 없다”고 반복해 말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백열등은 머리 위에서 작열하고 두들겨 맞고 대화는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고. 김 전 장관은 당시 말 그대로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고 토로했다.

그때 김 전 장관의 귓가에 찬송가가 들렸다. 그의 어머니가 교인들을 이끌고 분실 앞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던 것이다. 농민들도 합세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노랫소리는 높아졌다. 계엄사령부는 김 전 장관에게 ‘분실서 있었던 일을 발설하지 않고, 통금 해지 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라고 강요했다. 

김 전 장관은 이를 거절했다. 분실 앞을 찾는 지역 농민의 수가 점차 불어나자 계엄사령부는 그를 무죄 방면하기에 이른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일평생
세상이 부르면 “나는 간다”

“신앙으로 훈련된 일꾼, 약자인 농민이나 서민들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게 제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김 전 장관이 계엄사령부에 끌려가 한 저항은 빠른 속도로 지역 사회에 퍼져 나갔다. 다시 일터로 돌아간 그는 어느 날 지역 농민 대표, 교인 대표 등의 방문을 받는다. 이들은 믿을 만한 사람을 한 명 뽑아서 국회로 보내기로 했다고 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을 말하는지 몰랐던 김 전 장관은 신협 조합원들과 함께 동참하겠다고 의지를 드러냈다. 그리고 지역 대표들이 자신을 지목했을 때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저는 한 번도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기도해 본 적 없었습니다. 저는 못 합니다.”

그러나 지역 대표들은 거듭 김 전 장관을 찾아왔다. 그는 고민 끝에 출마를 결심했다. 당시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의 공천을 받아 그는 전남에 출마했다. 그의 상대는 전두환·노태우씨의 육사 11기 동기였고, 재선 국회의원인 민주정의당 김식 전 의원이었다. 모두 상대가 너무 강하다고 했지만 개표함을 열어보니 김 전 장관의 승리였다. 
 

호남 출신 고졸 정치인의 등장이었다.

김 전 장관의 초선 시절 활약은 엄청났다. 그는 13대 국회서 부활한 국정감사의 스타였고,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 규명을 위한 ‘광주청문회’서 활약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이해찬 전 총리가 김 전 장관과 함께 광주청문회서 활약했다. 김 전 장관은 저수지서 멱을 감다 총에 맞은 소년들의 사진을 내밀며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노무현과
청문회 스타

1980년 5월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이후 1988년 청문회가 열릴 때까지 광주는 폭도들의 도시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였다. 계엄군에 저항하다 사망한 시민들이 묻힌 망월동은 저주의 땅으로 불렸고 사람들은 그곳에 침을 뱉었다. 광주청문회는 국회의 정부 비판과 견제, 감시 기능을 되살리고 정의를 확립하는 기점이 됐다.

“아무리 굳은 결심을 해도 도전을 받게 마련입니다. 정치를 하는 동안 제게 찾아왔던 큰 도전은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었습니다.”

그는 초선부터 14대, 15대, 17대까지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이하 농수산 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했다. 일반적으로 2년에 1번, 전반기와 후반기 상임위를 바꿀 수 있음에도 김 전 장관은 4선을 하는 동안 농수산 위원회에만 있었다. 

상임위를 정할 때 원내대표실에 희망 상임위를 3개 적어 내는데, 그의 1∼3지망은 늘 농수산위원회였다.

그가 농수산 위원회서 활약할 때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문제가 불거졌다. 협상의 핵심 쟁점은 쌀 시장 개방이었다. 총 농민의 90%가 쌀이라는 단일품목에 생계를 걸고 있던 때였다. 쌀 시장 개방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김 전 장관은 스위스 제네바로 넘어갔다. 

그는 한글과 영어로 ‘미국은 람보식 수입 개방 압력을 당장 중단하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거세게 항의했다.

김 전 장관은 미국 대표를 붙들고 대화를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자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그때 나온 방법이 삭발식과 단식 투쟁이다. 그는 머리를 밀고 물과 소금만으로 15일을 버텼다. CNN, NHK 등 외신을 통해 김 전 장관의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 농민들이 제네바로 날아와 그에게 힘을 보탰다. 

통역을 위해 제네바에 온 장정애씨도 함께 머리를 밀고 김 전 장관의 곁에 앉았다.

한국서 온 국회의원이 머리를 깎고 단식투쟁을 하는 모습은 국내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김 전 장관의 행동은 각국 의원들이 모여 만든 연맹의 저항으로 발전했다. 

김 전 장관은 NHK 등 외신과의 인터뷰서 “한국과 제3세계 농민의 생존권을 짓밟는 협상은 인류 공영과 세계 평화라는 UN의 지상 목표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투쟁의 결과는 한국의 쌀 관세화 유예조치로 나타났다.

“어느 날인가 보좌관이 코앞에 봉투를 들이 밀었습니다. 생선 냄새가 강하게 올라왔습니다. 제 지역구 완도군 어민이 생선을 잡아다 판 돈 중 3000원을 봉투에 넣어 후원금으로 낸 겁니다. 물고기 잡는 어민이 저한테 의정활동 잘하라고 격려 차원서 보내주신 돈이죠.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농수산 위원회 외길을 걸었던 김 전 장관은 2003년 노무현정부서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발탁됐다. 노 전 대통령과 김 전 장관은 민주화 운동 동지이자 ‘야자 트는’ 친구 사이였다.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당시 제네바서 단식투쟁을 하던 김 전 장관에게 노 전 대통령은 수차례 전화로 응원을 전했다고 한다.

김 전 장관은 농림부장관 재직 당시 노 전 대통령에게 “북한 어린이들은 피골이 상접해 있다. 3∼4세 때 영양 공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설령 성인이 된다 해도 인간 구실을 못한다”며 북한에 쌀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 반대가 있긴 했지만 결국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쌀 300만석이 북한으로 전달됐다.

약자 보듬고 역사 관심
소외된 사람들에 헌신

“새만금 사업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국민적 합의가 도출된 국책사업이었습니다. 그런 대형 사업이 법원의 결정으로 중단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주무장관인 제가 나서야 했습니다.”

김 전 장관의 장관 재임 기간은 채 5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그는 법원서 새만금 사업 중단을 결정하자 이에 항의하는 뜻에서 사퇴를 결심했다. 노 전 대통령은 그에게 사퇴 의사를 철회하라고 권고했지만 김 전 장관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관직서 물러난 그는 새만금 친환경개발 범국민협의회를 만들어 활동을 이어 나갔다. 대법원은 2006년 새만금 사업의 ‘계속 추진’ 판결을 내렸다.
 

5선 국회의원과 장관직을 뒤로 한 김 전 장관이 최근 몰두하고 있는 것은 북한 어린이 돕기 운동과 5·18 광주민주화운동/4·19혁명/3·1운동 UN·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추진이다. 

대표회장을 맡고 있는 국제사랑재단은 그가 농림부장관 재직 당시 쌀 북송과 궤를 같이 한다. 북한 아이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도를 하면서 가족 단위별로 한 끼를 금식하고, 그 금액을 모아 이유식이나 분유, 빵 등을 구입해 북한으로 보내는 것. 올해로 11회째를 맞았다.

김 전 장관의 기록유산 유네스코 등록 추진 여정은 2008년 18대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이하 교육위원회)서 시작됐다. 광주 서구을서 당선된 그는 상임위를 교육위원회로 정했다. 

지역구 여론조사 결과 지지자들이 그가 교육위원회서 활동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아태지역 국회 교육위원 야당 중진 자격으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찾았다가 유네스코 등재 기록유산에 한국 관련 자료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5·18광주민주화운동, 4·19혁명, 3·1운동이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등재돼있지 않다는 사실에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신청조차 돼있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습니다.”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는 2년에 한 번 각국서 들어온 자료를 검토해 선정한다. 그는 고심 끝에 가장 최근에 일어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먼저 등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광주시민들에게 당시의 자료가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그 결과 수만 점의 자료가 모였다.

“광주여고 1학년 주소연양이 쓴 일기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광주시민은 폭도가 아닙니다. 저는 엄마, 아빠, 오빠들과 함께 인간 띠를 만들어 밤새 광주은행을 지켰습니다. 광주시민은 폭도가 아닙니다’ 그 일기장 끝부분에 눈물자국이 배어 있습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유산 등재를 반대하던 나라도 주소연양의 일기 구절에 마음을 돌렸다. 현재 4·19혁명은 영문 번역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김 전 장관은 4·19혁명이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등재되면 5·18광주민주화운동처럼 아카이브를 크게 만들어 국민들, 특히 젊은 세대에게 우리 역사를 알리고 싶다고 포부를 드러냈다. 

3·1운동까지 기록유산에 등재되면 그가 생각하는 한국 근현대사의 3대 민족민주화평화운동이 모두 유네스코에 올라가는 셈이다.

기록유산 등재
3·1운동까지

평생 신앙과 약자 그리고 역사라는 세 가지 초심을 지키며 살아온 김 전 장관의 목표는 소박했지만 여전히 사회의 부름에 목말라 있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뭐가 돼야겠다는 생각은 지금도 전혀 없습니다. 그저 앞으로 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사회가 저를 부를 때 어디든지 가서 어떤 역할이든 감당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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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진주교대 교수 논문 표절 의혹

[단독] 진주교대 교수 논문 표절 의혹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학의 교수 수준은 강의의 질과 비례한다. 학교는 학생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과거와 비교해 그 의미가 많이 퇴색했지만 ‘상아탑’으로 불리는 대학의 본질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인재 양성, 특히 초등학생을 가르칠 선생님을 배출하는 ‘교대’라면 그 본질을 향해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진주교육대학교(이하 진주교대)에서 2020년 시작된 교수 채용 논란이 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932년 공립사범학교로 시작해 100여년 동안 초등교육 발전에 힘을 보태 온 학교로서는 불명예스러운 논란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진주교대가 마치 ‘제3자’인 것처럼 멀찍이서 논란을 지켜만 보고 있다는 점이다. 첫 단추 잘못 끼웠나 2020년 10월 진주교대는 미술교육과, 수학교육과 등에 각 1명씩 총 4명의 교수를 채용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 2021년 1학기 임용을 목표로 같은 해 11월부터 채용 절차가 시작됐다. 교육공무원법에 명시된 결격사유가 없어야 한다는 일반 요건과 함께 ‘전공 분야별 박사학위 소지자’라는 자격 요건이 붙었다. 전형은 ▲자격 심사 ▲전공 적부 및 전공 심사 ▲경력 심사 ▲면접 심사(심화 과정) ▲면접 심사(최종) 등으로 이뤄졌다. 논란은 미술교육과 교수 채용 과정에서 불거졌다. 진주교대는 채용 계획에서 미술교육과 전공 분야를 ‘도자공예 또는 미술교육(도자공예)’으로 정했다. 도자공예 교수가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어 그 후임자를 뽑기 위한 채용이었다. 문제는 미술교육과에 최종 합격한 A 교수가 도자 관련 전공을 이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A 교수는 진주교대에서 초등교육을 전공(학사)했고, 석사 학위는 초등미술 교육(진주교대), 박사학위는 디자인학(광주대) 전공으로 받았다. 미술교육과 채용에 지원하려면 ‘전공 분야별 박사학위’ 즉, 도자 관련 전공 박사학위가 있어야 하는데 그가 자격 요건에 못 미친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 A 교수의 전공 적부 논란은 면접 심사 과정에서 언급됐다. 면접에 들어간 한 심사위원이 A 교수의 전공이 채용 분야와 맞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면접 심사(5배수) 대상자 명단’ 자료에 따르면 A 교수를 제외한 4명의 지원자는 학사, 석사, 박사 과정 등에 도자 관련 전공을 이수한 사실이 확인된다. 당시 면접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미술교육과 B 교수는 “전공 적부와 관련해 다시 심사해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했고 재심사가 이뤄지긴 했다”며 “그런데 첫 번째 전공 적부 전형에 참여했던 위원들이 재심사를 담당했다. 결과가 바뀔 리가 있겠나”라고 한탄했다. A 교수는 2021년 2월 최종 임용됐다. A 교수를 둘러싼 논란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가 쓴 <프리미티비즘의 조형 표현 요소 및 특성을 통한 현대 도자 작품 연구> 논문이 표절 시비에 휘말린 것이다. 광주대학교 대학원 디자인학 전공으로 박사 과정을 밟은 A 교수의 학위 논문이다. 2020년 6월경 논문 심사를 통과한 것으로 파악된다. 진주교대 교수 채용공고가 뜨기 3~4개월 전이다. 채용 과정에서 전공 적부 논란 임용 이후 추가 문제 제기됐다 2021년 3월, B 교수는 A 교수의 연구 부정행위(표절)를 광주대에 제보했다. A 교수가 해당 논문으로 광주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기에 검증도 광주대에서 진행해야 했다. 교육부 훈령 제449호 ‘연구윤리 확보를 위한 지침’ 제18조(연구부정행위 검증 절차)에 따르면 연구 부정행위를 검증하려면 예비조사와 본조사, 판정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절차를 총괄하는 게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다.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는 예비조사와 본조사를 위한 위원회 구성과 운영에 대한 심의, 의결 권한을 갖는다. 또 예비조사와 본조사에서 나온 결과를 승인한다. 제보를 받은 광주대는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를 소집했다. 황당한 지점은 광주대에서 A 교수의 논문을 두고 예비조사와 본조사를 수차례 반복했다는 사실이다. B 교수가 마지막에 나온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 결과를 두고 민사소송을 제기한 시점은 2024년 8월로, 처음 제보했던 2021년 3월 이후 무려 3년5개월이나 걸렸다. 그나마도 표절 여부는 여전히 판명 나지 않았다. 교육부의 연구윤리 확보를 위한 지침 제25조(판정)에 따르면 예비조사 착수 이후 판정까지의 모든 조사는 6개월 이내에 종료해야 한다고 돼있다. 물론 이 기간 안에 조사가 이뤄지기 어렵다고 판단될 경우 연장도 가능하다. 하지만 광주대의 경우는 ‘절차상 하자’가 연이어 발생했다. 제보자나 피조사자 양측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재조사하는 일이 반복됐다. 2021년 8월 광주대 본조사위원회는 A 교수의 논문에 대해 만장일치로 표절 판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A 교수에게 의견 진술권을 부여하지 않은 점이 문제로 떠올랐다. 다시 말해 A 교수가 자신의 논문이 표절이 아니라고 반론할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다. 결국 모든 조사는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2022년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가 재구성됐는데 5월 예비조사와 8월 본조사에서 정반대의 결론이 나왔다. 예비조사위원회는 ▲A 교수 논문의 총 1234개 문장 중 425개(34.4%)가 표절로 의심되며 ▲특정인의 논문을 몇 페이지에 걸쳐 연속적으로 사용했고 ▲독창적인 부분을 적시해 달라는 요청에 피조사자가 답변을 회피하며 적극적 방어를 하지 않아 비교 대조표를 그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점 등을 근거로 표절로 판정했다. 거듭된 하자 조사만 4번 반면 본조사위원회는 “이 사건 논문은 ‘작품 논문’이라는 특성상 다른 분야와 같은 기준으로 표절 여부를 판단하기 쉽지 않다”며 “작품 논문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논문의 핵심 부분인 작품 그 자체에는 독창성이 인정되므로 논문 자체를 표절이라고 판정할 수 없다”고 했다. 두 번째 조사에서도 또다시 ‘하자’가 발견되면서 판정이 무효로 돌아갔다. B 교수는 피조사자인 A 교수가 심사위원 제척 여부를 이유로 외부위원 명단을 요청했고 실제 공개된 점, 제보자에게 의견 진술의 기회를 주지 않은 점 등의 절차상 하자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 본조사위원회 보고서에 각 당사자의 진술 요지와 조사 결과 등이 반드시 포함돼야 하는데도 이 부분을 빠뜨리면서 실체상 하자도 발생했다고 강조했다. B 교수는 광주대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동시에 법원에 본조사위원회 판정 효력 정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이 건은 피고(광주대 측)가 “원고 측 이의를 받아들이고 기존 본조사 판정을 무효화하고 다시 본조사위원회를 소집하겠다”고 약속하고 B 교수가 소를 취하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2023년 세 번째로 소집된 본조사위원회는 A 교수의 논문을 표절로 판정했다. 의견서에는 ▲전체 1200여개 문장 중 출처 표시 없이 인용된 문장이 360여개로 과도하게 많은 점 ▲저자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부분이 많지 않은 점 ▲논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제4장과 결론에서도 타인의 학술 논문과 내용이 유사하거나 출처 표시가 없는 문장이 다수인 점 등이 근거로 기재됐다. 하지만 이 결과도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의 구성 문제가 대두되면서 전면 무효화됐다. ‘광주대학교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의 설치 운영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학장, 교무처장 및 산학협력단장은 당연직으로 하고 교무처장이 위원장이 된다’는 조항이 있는데 이를 일부 준수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다시 해를 넘겨 2024년 6월 예비조사위원회는 표절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놨다. 예비조사위원회는 A 교수의 논문이 박사학위 논문 심사를 통과했고, A교수가 KCI 논문 유사도 검사에서 1%의 유사도를 보인 결과서를 제출한 점을 근거로 들었다. 저작위원회 “유사성 인정” 또 A 교수가 인용 표시를 하지 않은 부분이 타인의 아이디어나 창작물을 침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다른 저자의 논문 역시 다른 논문이나 저서를 그대로 따른 것으로 ‘독창적인 아이디어나 창작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표절이 아니라고 판정한 예비조사위원회의 결론을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에서 승인했다는 점이다.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는 본조사를 실시할 필요가 없다는 판정을 내리고 결론을 확정했다. 3년5개월여 동안 진행된 조사에서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의 판정 승인이 떨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단 표면상으로는 최종 결론이 난 셈이다. 첫 채용 공고 시기로 따지면 4년 가까이 이어진 논란은 B 교수의 반발로 법정에 가게 됐다. B 교수는 2024년 7월 광주대가 자신의 이의 신청을 기각하자 같은 해 8월 광주대의 운영 주체인 학교법인 호심학원을 상대로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 판정 무효확인 등’의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예비조사위원회의 결론을 승인한 부분과 본조사위원회가 불필요하다고 한 부분을 무효로 판단해 달라는 취지였다. 이 과정에서도 절차상 하자가 언급됐다. B 교수는 “광주대 연구윤리위원회 규정에 따르면 연구 부정행위에 대한 충분한 혐의를 인지했을 경우에 예비조사를 생략할 수 있고, 피조사자가 연구 부정행위 사실을 모두 인정할 경우 본조사를 생략하고 바로 판정을 내릴 수 있다”며 “또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는 예비조사 결과를 확정해 판정할 근거가 없다. 본조사 결과만 승인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A 교수 논문에 대한 표절 여부도 제대로 다시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비조사와 본조사를 거치는 과정에서 표절 판정이 엇갈린 만큼 저작권법, 연구윤리 확보를 위한 지침 및 한국연구재단이 제시하는 인용 방법 및 논문 표절 기준 등에 따라 A 교수의 논문을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실제 B 교수는 A 교수의 논문을 한국저작권위원회에서 감정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법원에 요청했다. 한국저작권위원회는 저작권법 제112조에 따라 설립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법원이 B 교수의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한국저작권위원회는 A 교수가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12편의 논문을 비교, 감정했다. 반복된 조사 엇갈린 판정 결국 법정 공방으로 번져 <일요시사>가 입수한 감정 결과서에 따르면 A 교수의 논문은 총 12편의 비교 대상 논문 중 총 11편에 대해 저작권법상 보호를 받는 창작적인 표현 형식을 상당 부분 복제하고 있다며 저작권법상 실질적인 유사성이 인정된다고 했다. 또 ‘단순히 학술적 아이디어나 이론적 사실을 공유하는 수준을 넘어 선행 저작자들이 자신의 학문적 관점과 예술적 주관에 따라 논리적으로 체계화한 문장 구조, 단어 선택, 서술 방식 등을 그대로 사용했다’ ‘외국 문헌을 연구자 본인의 시각으로 재해석해 요약하거나 번역한 문장의 경우에도 원저작자의 창작적 개성이 반영돼 저작권법의 보호 범위에 포함됨에도 불구하고 A 교수의 논문은 이를 무단으로 복제해 논문에 활용했다’ 등의 감정 결과를 내놨다. B 교수는 “저작권법 위반 여부는 표절보다 그 인정 범위가 좁다. 논문의 독창성을 저작권으로 인정해 그 부분을 침해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한국저작권위원회의 결론은 A 교수가 다른 사람이 쓴 논문의 독창성을 인용 없이 가져다 썼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광주대의 운영 주체인 호심학원 관계자는 “소송 중인 사안으로 드릴 말씀이 없다”는 답변을 해왔다. 문제는 상황이 여기까지 흘러오는 동안 손 놓고 있는 진주교대의 태도다. A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 표절 여부는 진주교대의 교수 채용과 밀접하게 얽혀있다. 채용 공고에서 지원 자격으로 박사학위 소지자가 명시됐던 만큼 논문 표절 여부는 이번 논란의 중요한 요소다. 표절로 판명되면 학위 자체가 취소되는 사례도 있어 A 교수가 진주교대 교수 채용에 아예 지원조차 할 수 없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진주교대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 광주대와 B 교수 간의 소송 결과가 나오고 그에 따라 광주대가 조치한 뒤에야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진주교대 교무처 관계자는 “(학교가) 손 놓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며 “소송이 진행 중인 만큼 결과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법률 검토 등 내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B 교수는 “학교는 학생들의 수업권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그저 누가 학교에 책임을 물을까 봐 전전긍긍할 뿐이다. 학교 측에서 했다는 법률 검토도 현재 손 놓고 있는 학교의 행보가 나중에 직무유기로 문제가 될까 알아본 것이라고 한다. 교대는 학생들이 커리큘럼에 따라 수업을 신청해야 하는 구조라 교수에게 문제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학생들만 뒷전 됐다 그러면서 “광주대와의 소송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 결과가 나올 때까지만이라도 A 교수가 수업을 하지 못하도록 제한해야 한다. 공무원의 경우 문제가 발생하면 일단 ‘직위해제’ 조치를 하지 않나. 그런 조치가 필요하다. 초등학교 교사를 길러내는 대학이다. 학교가 그 이름에 걸맞은 행보를 보여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한편, A 교수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드릴 말씀이 없다”고 답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