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내린 권오현시대> 왕년의 삼성 2인자들 ‘어디서 뭐하나’

야인으로 돌아가 안락한 노후

[일요시사 취재1팀] 박호민 기자 =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이 용퇴를 결심했다. 국내 대표기업 삼성의 2인자로 평가 받는 그의 결심에 삼성뿐만 아니라 재계의 눈길이 쏠렸다. 이제 야인으로 돌아간 권 부회장의 향후 거취에도 시선이 모아지는 가운데 역대 삼성서 이름을 날리던 이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삼성전자는 지난 13일 사상 최대 실적을 발표하면서 동시에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의 용퇴 소식을 전했다. 사측에 따르면 권 부회장은 반도체사업을 총괄하는 부품부문 사업책임자서 자진 사퇴함과 동시에 삼성전자 이사회 이사, 의장직도 임기가 끝나는 내년 3월까지 수행하고 연임하지 않기로 했다.

이학수는 지금…
수천억 임대사업

권 부회장은 “사퇴는 이미 오래전부터 고민해 왔던 것이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며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IT 산업의 속성을 생각해 볼 때, 지금이 바로 후배 경영진이 나서 비상한 각오로 경영을 쇄신해 새 출발할 때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사실상 삼성의 2인자로 평가받는 그의 퇴진 소식에 역대 삼성을 1등 기업으로 이끌던 주역들의 근황에도 눈길이 쏠렸다.

그 가운데 이학수 전 삼성물산 고문은 단연 호사가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전문경영인이다. 이 전 고문은 이건희 회장 시대서 활약했다. 이 전 고문은 이 회장의 신임을 바탕으로 회사 2인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제일모직 경리과 출신인 그는 그룹내 재무 부문의 실력가였다.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최측근이었던 소병해 실장의 후임으로 1990년 초부터 20여년동안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이후 구조조정본부장과 전략기획실장을 거치면서 명실상부한 이 회장의 ‘복심’으로 통했다. 

이 전 고문의 인맥은 화려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부산상고 선후배 사이고, 이명박 대통령과는 고려대 동문이라는 인연이 있다. 

이 전 고문은 이 회장이 2008년 경영 일선서 물러났을 때 함께 물러났다가 2010년 삼성물산의 고문으로 복귀, 이듬해 12월 삼성을 완전히 떠났다.

현재 그는 뚜렷한 활동을 하고 있지 않다. 이 전 고문은 부인 자녀 등과 ‘엘앤비인베스트먼트’라는 법인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엘앤비인베스트먼트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엘앤비타워’를 소유하고 임대사업을 벌이고 있다. 

엘앤비타워의 가치는 수천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2006년 토지를 매입해 빌딩을 올려 안정적인 경제력을 확보한 것으로 풀이된다. 국내 최고 기업의 2인자라고까지 평가받는 그는 현재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권오현 부회장 퇴진…바통은 누가?
조용한 분위기 속 내부 실세들 꿈틀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 역시 이 회장의 신임 아래 이 전 고문과 쌍벽을 이루는 행보를 보였다. 윤 전 부회장의 이력은 독특하다. 서울대 전자공학과 출신인 그는 이병철 창업주 시절 1966년 삼성전자(당시 )에 입사한 공학도 출신이다. 그를 적극적으로 중용한 것은 이 회장의 안목이었다.


재계에선 삼성 이 회장 아래 삼성내 이학수 사단과 윤종용 사단이 나눠져 있다는 말이 나왔다. 윤 전 부회장은 지난 2006년 건강보험공단이 건강보험료 산출을 위해 집계한 표준 보수를 기준으로 21억1000만원으로 이 회장(10억원)보다 많은 보수를 챙겨 그룹 내 그의 위상을 실감케 했다.

윤 전 부회장 역시 이 회장이 물러났었던 2008년 삼성전자 부회장직서 물러나 삼성전자 고문으로 활동했다. 이후 2011년을 끝으로 삼성전자를 떠났다. 다만 이 전 부회장에 비해서는 활발한 대외활동을 하고 있다. 

2008년부터 맡고 있는 있는 수원삼성 블루윙즈 프로축구단 구단주로 삼성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또 국제전기전자기술자협회 IEEE 명예회원이기도 하다. 2009년부터는 새만금개발사업 명예자문관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1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이외에도 활발한 활동으로 존재감을 과시하며 삼성그룹서의 경험을 전수하고 있다.

황창규 전 삼성전자 사장(현 KT 대표이사)도 삼성서 알아주는 전문경영인으로 이름을 남겼다. 서울대학교 전기공학과 출신인 황 전 사장은 1992년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 이사로 삼성맨이 됐다. 2009년 회사를 떠날 때까지 황 전 사장의 행보는 반도체의 역사였다. 

CEO 출신들
활발한 행보

반도체 메모리 용량을 1년에 2배씩 증가시킨다는 이른바 ‘황의 법칙’은 반도체 업계에 아직도 통용된다. 이는 18개월에 2배씩 증가시킨다는 인텔 공동창업주 고든 무어의 법칙보다도 빨랐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론은 황 전 사장이 실증했다. 실제 삼성전자는 1999년에 256M 낸드플래시메모리를 개발하고, 2000년 512M, 2001년 1G, 2002년 2G, 2003년 4G, 2004년 8G, 2005년 16G, 2006년 32G, 2007년 64G 제품을 개발한 것. 이 같은 ‘황의 법칙’을 등에 업고 삼성은 반도체 부문 세계 1위에 안착했다.

황 전 사장은 8년전 삼성전자를 나온 뒤에 경영인으로 화려하게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공학한림원 이사, 지식경제부 최고기술경영자, 국가과학기술위원회 민간위원, 지식경제부 R&D전략기획단 단장 등을 거친 뒤 2014년 KT대표이사 회장직을 맡아 현재까지 이끌고 있다. 

그는 공기업 성향이 강했던 KT에 삼성의 정신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강력한 구조조정으로 경영효율화를 극대화하며 흑자경영을 이어가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연임에 성공했다.

‘애니콜 신화’ 이기태 전 부회장도 삼성의 역사 굵직한 이름을 남겼다. 1973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이 전 부회장은 불도저식 인재다. 그는 삼성 역대 부회장 가운데 가장 많은 사표를 낸 인물로 꼽히기도 한다. 

평사원 시절부터 부당한 지시에 사표로 맞섰던 것이다. 1985년 비디오사업부장 때 사표를 내고 강원도로 20여일간 잠적했던 일화는 업계서도 아주 유명하다.


그런 그가 삼성전자의 얼굴이 된 것은 실력이었다. 1991년 이사보가 된 이후 1994년 무선사업부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 전 부회장 시대가 열렸다. 당시만 해도 삼성의 휴대폰 시장서의 인지도는 시장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무선사업부는 비디오나 팩스사업부에 비해 인기가 없었다.

역대 회장 그림자 근황 눈길
퇴임 후 생활 모습 각양각색

하지만 이 전 부회장 특유의 불도저 스타일에는 제격이었다. 1995년 무선전화기의 품질 이상 보고를 받고 모든 제품을 수거해 불태우고 휴대폰 브랜드 애니콜의 인지도가 높지 않았던 시절 품질을 의심하는 바이어 앞에서 휴대폰을 바닥에 던져 제품 내구성을 강조한 일화는 아직도 업계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그 결과 삼성의 휴대폰 사업은 수출 초기인 1998년 4억달러서 2011년 30억달러까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다. 모토로라를 제치고 세계 2위 자리까지 올랐다. 현재 삼성이 휴대폰 및 스마트폰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게 되는 초석을 마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런 그도 황 전 사장과 같은 해인 2008년 회사를 떠났다. 그는 경영서 물러난 뒤 2012년까지 연세대학교 공과대학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이후 KJ프리텍 사내이사, 동양네트웍스 기타비상무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역 시절 언론의 노출을 꺼렸던 최도석 전 삼성카드 부회장 역시 삼성그룹 내 실세로 분류된다. 재무통인 최 전 부회장은 이학수 전 부회장과 보조를 맞추면서 회사내 입지를 다졌다. 


1975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그는 제일모직 경리과를 시작으로 삼성전자 경리 부장, 삼성전자 관리이사, 삼성전자 경영지원실 재경팀장 상무이사, 삼성전자 경영지원실장 전무이사, 삼성전자 경영지원실장 부사장, 삼성전자 경영지원총괄담당 대표이사 부사장, 삼성전자 경영지원총괄담당 사장 등 주요직을 거치면서 실세란 평가가 어색하지 않게 됐다. 

최 전 부회장은 2009년부터 삼성카드로 자리를 옮겨 2010년 12월 삼성카드 부회장을 끝으로 퇴진했다.

현재 그는 현역시절과 마찬가지로 조용한 행보를 보내고 있다. 이따금 대학 강연서 자신의 경험을 학생들에게 전수하며 제2의 인생을 보내고 있다.

김순택 전 미래전략실장(부회장)도 삼성내 2인자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김 전 부회장은 1972년 입사해 78년부터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서 20년간 일했다. 이 회장을 지근거리서 보필했던 그는 이 회장의 경영철학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97년부터 삼성중공업 건설기계부분 대표이사 부사장, 삼성SDI 대표이사를 역임했으며, 2011∼2012년 6월까지 미래전략실장 직을 끝으로 삼성을 떠났다. 삼성을 떠난 그의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아무래도 비서실 출신이다 보니 대내외 활동을 의도적으로 삼가는 것으로 풀이된다”고 말했다.

반면 황영기 전 삼성증권 사장은 현재 금융투자협회 회장으로 활발한 행보를 펼치고 있다. 황 전 사장은 과거 삼성그룹서 실력자로 통했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 방미 당시 이건희 코리아소사이어티 연설 통역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당시 황 전 사장을 삼성그룹서 일정 부분 역할을 할 것으로 꼽히고 있었다. 

경험 살려 자문
대학서 후진 양성

삼성그룹 회장비서실 국제금융팀 팀장, 삼성그룹 회장비서실 인사팀 팀장, 삼성생명 전략기획실 실장 등 핵심 부서를 거친 그였기에 이 같은 평가가 무리가 아니라는 것이 중론. 그는 2001년 6월 삼성증권 대표이사를 끝으로 홀연히 삼성을 떠났다. 

그는 퇴직 후 2004년 우리은행 은행장, 2007년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초빙교수, 2008∼2009년 KB금융지주 회장 등을 역임했다. 2015년부터는 제3대 금융투자협회 회장으로 대외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윤우 삼성전자 고문 역시 삼성그룹을 성장시킨 주역으로 꼽힌다. 경영 일선에 물러나 있지만 고문으로 삼성그룹에 조언을 해주고 있다.

이 고문은 해외파가 즐비한 삼성전자서 토종파로서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 고문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해 1968년 삼성전관에 입사했다. 엔지니어 출신인 이 고문은 1974년 이 회장이 사재를 털어 인수한 한국반도체로 자리를 옮겼다. 

이 고문은 1985년 기흥공장 건설 초기부터 관여했다. 인재를 영입하는 데도 이 고문의 역할이 컸다. 반도체 전문가를 구하기 어려운 당시 권오현 부회장, 조수인 사장, 전동수 사장 등을 직접 영입했다. 

그는 2008년 삼성특검 직후 삼성이 계열사 사장단 협의체를 구성 그룹 의사 결정을 내렸는데 당시 이 고문이 중심이 돼 주요 사안을 처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창업주 세대인 강진구 전 삼성전자·삼성전기 회장이 지난 8월 별세했다. 삼성의 역사이자 반도체의 대부로 평가받는 강 전 회장은 1927년 경북 영주 출생으로 대구사범학교와 서울대 공대 전자과를 졸업했다. 
 

강 전 회장이 사회생활 첫발무터 삼성그룹과 인연을 맺은 것은 아니었다. 육군 대위 복무를 마치고 KBS와 미8군 방송국, 중앙일보 동양방송 이사를 거쳐 1973년에 비로소 삼성맨이 됐다.

당시 강 전 회장의 삼성전자 합류는 이병철 선대 회장의 지시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강 전 회장의 <삼성전자, 신화와 그 비결>이라는 회고록에 따르면 이병철 선대 회장은 동양방송 평이사였던 그와 점심식사도 함께 하고 위성 중계되는 권투경기를 시청하기도 했다.  

강 전 회장은 회고록에 “흔이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에 막연히 ‘회장님께서 나를 눈여겨 보시나보다’ 정도로 생각했지 삼성전자를 맡기실 줄은 몰랐다”고 기술했다.

그는 선대 회장이 1973년 삼성전자 대표이사로 임명하자 1969년 창립 이후 5년간 적자이던 회사를 단번에 흑자로 전환시켰을 정도로 경영자로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선대 회장의 신뢰 속에 강 전 회장은 삼성전자 상무·전무·사장을 거쳐 삼성전자부품·삼성정밀 사장, 삼성반도체통신 사장, 삼성반도체통신·삼성전자 부회장, 삼성전기 대표이사, 삼성전자 회장, 삼성전관·삼성전기 회장, 삼성의료원 강북병원재단 이사장, 삼성전기 대표이사 회장, 삼성그룹 구조조정위원 등을 역임했다. 

이후 2000년 12월31일 건강문제와 후진양성을 이유로 삼성전기 회장직서 사임, 37년간 몸담았던 삼성을 떠났다. 

실제 강 전 회장은 후진양성에 힘썼다. 

강 전 회장은 발명특허협회 부회장, 한국전자통신 사장, 한국전기·전지시험검사소 이사장,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평통 자문위원, 전자공업진흥회 회장, 산업기술진흥협회 부회장, 한·벨기에경제협력위원장, 한·헝가리경제협력위원장, 한국무역협회 부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고문, 대한산업안전협회 회장, 한국엔지니어클럽 회장, 표준과학연구소 이사장, 중동학원 이사장, 한국전자산업진흥회 회장, 전자부품연구원 이사장 등을 지내며 대내외에서 두루 인정받기도 했다. 

2006년에는 서울대와 한국공학한림원이 선정한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에 포함돼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기도 했다.

쏟아지는 러브콜
스카우트 1순위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의 신임을 바탕으로 성장한 삼성그룹내 실세들이 2008년을 기점으로 경영 일선서 물러난 경우가 많다”며 “현재도 활발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인사가 있는 반면 언론서 자취를 감춘 실세도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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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2조 물먹은’ 한양 수상한 계열사와 의문의 돈거래

[단독] ‘2조 물먹은’ 한양 수상한 계열사와 의문의 돈거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광주 노른자위 땅을 개발하는 사업이 건설사 간의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총사업비 2조여원의 초대형 프로젝트가 양측이 제기한 고소·고발로 표류하는 모양새다. 갈등의 본질은 사업을 좌지우지하는 특수목적법인(SPC)의 최대주주 지위가 누구에게 있는지다. 최근 지분확보를 위한 소송 과정서 의문의 돈거래가 포착됐다. 2020년 7월1일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도시계획시설서 도시공원으로 지정해놓은 개인 소유의 땅에 20년간 공원 조성을 하지 않을 경우 땅 주민의 재산권 보호를 위해 도시공원서 해제하는 제도인 ‘도시공원 일몰제’가 시행됐다. 도시공원 일몰제의 도입으로 민간공원 특례사업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민관 합작 윈윈 사업 민간공원 특례사업은 민간에 사업시행권을 주고 공원을 조성해 지자체에 기부채납하도록 하는 제도다. 민간 사업시행자는 공원부지 30% 범위서 아파트 건설 등 비공원사업을 진행해 수익을 챙길 수 있다. 정부나 지자체는 민간 자본으로 공원을 조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민간 사업시행자는 주택 공급 사업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서로 이득 볼 수 있는 구조다. 현재 전국 각지서 진행하고 있는 민간공원 특례사업 중 ‘중앙공원 1지구 민간공원 특례사업’의 규모가 가장 크다. 광주시 서구 금호동과 화정동, 풍암동 일대 243만5027㎡에 공원시설과 비공원시설을 건축하는 초대형 프로젝트다. 비공원시설 부지에는 지하 3층~지상 28층, 39개동 총 2772세대 규모의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총사업비가 2조2000억원에 달한다. 2020년 1월 사업시행사인 특수목적법인(SPC) 빛고을중앙공원개발(이하 빛고을)이 설립되면서 추진되기 시작한 사업은 최근 시행사 지위와 시공권 등을 두고 고소·고발이 난무하고 있다. SPC 설립 시점부터 컨소시엄에 참여한 한양과 이후 시공자로 들어온 롯데건설, 지분 다툼을 벌이고 있는 우빈산업, 케이앤지스틸 등이 갈등의 주체다. SPC 빛고을 설립 초기 한양이 30%로 최대주주, 우빈산업(25%), 케이앤지스틸(24%), 파크엠(21%) 등이 주주로 참여했다. 한양이 우빈산업과 케이앤지스틸의 SPC 빛고을 참여를 위한 초기자본 49억원을 댔다. 한양이 우빈산업에 49억원을 빌려주고 우빈산업이 다시 케이앤지스틸에 24억원을 대여해 지분을 분배했다. 이때 우빈산업은 케이앤지스틸에 24억원을 빌려주면서 ‘콜옵션’ 계약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콜옵션은 특정한 기초자산을 만기일이나 만기일 이전에 미리 정한 행사가격으로 살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다시 말해 우빈산업은 언제든지 원할 때 케이앤지스틸의 지분을 회수할 수 있는 조건을 걸어둔 것이다. ‘초대형’ 중앙공원 1지구 사업의 이면 한양-케이앤지스틸 모종의 관계 의혹 SPC 빛고을 주주구성에 변화가 생긴 시점은 컨소시엄 구성 당시 한양이 맡기로 한 시공권이 롯데건설로 넘어가면서부터다. 우빈산업은 케이앤지스틸의 지분 24%를 위임받아 주주권을 행사해 롯데건설과 중앙공원 1지구 아파트 신축 도급 약정을 체결했다. 이 과정서 30% 지분의 한양은 배제됐다. 롯데건설을 시공자로 선정할 당시 우빈산업에 지분을 위임했던 케이앤지스틸의 태도가 변한 시기는 2022년 5월경으로 추정된다. SPC 빛고을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케이앤지스틸은 우빈산업에 25억3000만원(대여금 24억원+이자)을 송금한 뒤 주주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SPC 빛고을 설립 과정서 빌린 돈을 갚았으니 24% 지분만큼 주주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우빈산업은 케이앤지스틸에 24억원을 빌려주면서 맺었던 콜옵션을 행사하고 49%의 지분을 확보해 SPC 빛고을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이후 우빈산업 내부 사정이 변하면서 한 차례 더 지분구조에 변화가 생겼다. 우빈산업은 대출금 100억원에 대해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고 부도 처리됐다. 지급보증을 섰던 롯데건설은 우빈산업이 보유하고 있던 지분을 넘겨 받으면서 49%를 확보했다. 지분양도는 롯데건설이 근질권(담보물에 대한 권리)을 행사해 채무를 대신 갚아주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우빈산업이 빠진 자리에 롯데건설이 들어오면서 현재 기준 빛고을 SPC 지분구조는 한양 30%, 롯데건설 29.5%, ㈜파크엠 21%, 허브자산운용 19.5%로 재편된 상태다. 허브자산운용이 보유한 19.5%는 롯데건설로부터 양도받은 것이다. SPC 빛고을 내에서 롯데건설의 발언권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뉜 지분 콜옵션으로? 사업시행권과 시공권을 두고 롯데건설과 우빈산업, 한양과 케이앤지스틸이 궤를 같이 하면서 분쟁이 이어지고 있다. 쟁점은 우빈산업과 케이앤지스틸이 가진 지분이 최종적으로 누구의 소유냐는 것이다. 두 회사의 지분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SPC 빛고을의 최대주주가 바뀔 수 있다. 케이앤지스틸은 우빈산업에 주금 대여금을 갚았으니 24%에 대한 주주권이 자사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양은 SPC 빛고을 설립 과정서 우빈산업에 49억원의 출자금을 대여하면서 맺은 특별약정을 내세웠다. 해당 약정에 한양이 중앙공원 1지구 사업의 비공원시설 시공권을 전부 갖는데 우빈산업이 의결권을 행사한다는 항목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우빈산업이 주도해 롯데건설로 시공사를 바꾼 것은 특별약정에 어긋난다는 설명이다. 광주지방법원은 케이앤지스틸과 한양이 각각 우빈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서 모두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케이앤지스틸 관계자는 “주주권 확인 소송서 승소 판결을 받았다. 우리가 SPC 주식을 실제로 소유한 주주라는 뜻”이라고 강조했다. 한양 관계자도 “1심 법원은 우빈산업이 한양에게 49억원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고 보유 주식 25% 전량을 양도하라는 판결을 내렸다”고 말했다. 반면 롯데건설은 소송 판결 한 달 전, 우빈산업의 지분을 인수했다고 설명했다. 우빈산업이 한양에 양도할 주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과정서 한양은 우빈산업의 ‘고의 부도’를 의심하고 있다. 한양은 1심 법원 판결을 근거로 자사가 지분 55%(한양 30%+우빈산업 25%)의 SPC 빛고을 최대주주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대법원서 한양에 ‘시공권이 없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놓으면서 시공자 지위는 잃게 됐다. 소송 이겨도 지위 잃었다 최근 SPC 빛고을 지분 갈등서 케이앤지스틸의 역할이 관심사로 떠올랐다. 케이앤지스틸은 상하수도 설비공사 업체로 2003년에 설립됐다. SPC 빛고을에 우빈산업과 함께 참여했다가 현재는 빠진 상태다. 케이앤지스틸 관계자는 “전 대표가 우빈산업과 친분이 있어서 (SPC 빛고을에)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현 사태서 롯데건설과 우빈산업은 이른바 ‘비한양파’로 묶여있다. 두 업체의 지분 이동도 비교적 명확히 드러나 있는 상황이다. 반면 케이앤지스틸과 한양은 두 업체 모두 우빈산업과 소송을 진행하면서도 서로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한양 관계자는 “적(우빈산업)이 같을 뿐 특별히 관계가 있는 업체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양의 모기업인 보성그룹 계열사에 속한 ‘앤유’라는 업체가 케이앤지스틸에 2022년 4월, 2억원을 빌려줬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앤유는 이기승 보성그룹 회장의 동생인 이점식씨가 지분 83.6%를 가지고 있는 친족회사다. 전기 조명장치 제조업체로 2007년에 설립됐다. 2022년 기준 매출은 28억2900만원, 영업이익은 3억300만원으로 확인된다. 한양과의 거래를 통해 27억79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앤유는 케이지앤지스틸에 2억원을 빌려주는 과정서 1주일짜리 주식근질권을 설정했다. 1주일 뒤 케이앤지스틸이 2억원을 갚지 못하면서 케이앤지스틸의 주식이 전부 앤유로 넘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또 1주일 뒤 케이앤지스틸의 대표이사를 비롯해 사내이사 3명 등 4명이 등기이사로 이름을 올렸다. 이 가운데 1명은 앤유 대표인 정모씨의 아내로 추정된다. 케이앤지스틸 수뇌부가 물갈이된 것이다. 당시 케이앤지스틸의 채무가 수십억원에 이를 정도로 적자가 누적된 상태였다고 해도 2억원을 갚지 못해 회사의 지배권을 넘겨준 것을 두고 석연찮은 의문이 일었다. 1주일이라는 짧은 주식 근질권 설정도 의문으로 떠올랐다. 보성그룹에 기생하는 ‘앤유’ 푼돈 주고 1주 만 회사 꿀꺽? 더 흥미로운 대목은 같은 해 5월 케이앤지스틸이 우빈산업에 주금 대여금 25억3000만원을 송금한 뒤 주주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의혹이 동시에 불거진 점이다. 다시 말해 2억원을 갚지 못해 회사의 지분 100%를 앤유에 넘겨주고 한 달 만에 20억원이 넘는 돈을 융통해 SPC 빛고을 지분을 확보하려 했다는 의혹이다. 여기에 우빈산업을 상대로 한 주주권 확인 소송 등에 김앤장을 변호인으로 선임하면서 수임료에 대한 의혹이 추가로 제기됐다. 일각에서는 케이앤지스틸이 지분확보를 위해 사용한 자금 출처가 한양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한양 입장서 케이앤지스틸이 가지고 있는 지분을 확보하면 54%로 SPC 빛고을의 최대주주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대법원 판결로 시공자 지위는 상실했지만 롯데건설에 넘어가 있는 시공권을 흔들 수 있는 상황이 생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분 갈등 구조가 롯데건설과 우빈산업, 한양과 케이앤지스틸로 정리되는 셈이다. 하지만 한양과 케이앤지스틸 모두 두 업체 간 모종의 관계 의혹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한양 관계자는 “앤유라는 계열사가 있는지도 잘 몰랐다. 앤유서 케이앤지스틸에 2억원을 빌려줬다거나 주금 대여금을 대줬다는 의혹은 전혀 사실무근이다. 우빈산업서 (1심)소송에 져서 계속 근거 없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듯하다. 대응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보다 광주시가 우빈산업과 결탁해 여러 가지로 유리하게 상황을 봐주고 있다고 판단해 광주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광주시는 사업시행자이자 감독관청으로서 해야 할 일이 참 많은데 그런 일을 하지 않아 공모 제도가 다 무너졌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광주시의 행정행위에 대해 소송을 제기해 재판이 진행 중”이라고 덧붙였다. 석연찮은 자금 출처 케이앤지스틸 관계자는 한양이 주금 대여금을 대줬다는 의혹에 대해 “우빈산업서 하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주주가 들어와 투자가 이뤄지면서 주금 대여금을 갚은 것이다. 우빈산업에서는 (우리가)한양의 위장계열사 아니냐, 대표이사 선임 과정이 의심스럽다, 자금 출처가 어디냐 같은 의혹을 제기하는데 그건 주주권 확인 소송서 져서 그러는 것이다. 한양이랑 우리랑은 큰 관계가 없는데 자꾸 엮어서 흠집을 내려 한다”고 주장했다. 2022년 4월 회사가 어려운 시기에 케이앤지스틸 대표로 오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이 사업이 잘 마무리되면 우리 회사에 300억원 정도의 수익이 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시행이익을 1100억원으로 계산했을 때 우리 회사 지분이 24% 정도니까 그렇게 계산한 것이다. 수익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회사를 맡게 됐고, 새로운 주주들도 그 사업성을 보고 투자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