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대 축구부 장학금 미스터리

돈 받고 학교 다닌 선수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2016년 3월 KC대학교 축구단이 창단됐다. 대학부 81번째로 창단된 축구단은 학교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시작했다. 하지만 창단 1년6개월 만에 ‘비리 백화점’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됐다. 현재 경찰 조사 중인 입시 비리 의혹에 이어 장학금 문제까지 불거지면서 축구단은 또 다시 풍랑 속에 빠져 들고 있다.
 

KC대학교(이하 KC대)서 만난 내부 관계자는 “언론보도는 빙산의 일각이다. 실체는 어마어마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지난 2월 <일요시사>는 축구단 선수들 입학과 성적 등 학사 비리 의혹을 고발했다. 또 지난달 25일에는 KBS가 축구단의 장학금 유용 의혹을 끄집어냈다. 이제 관심은 선수들에게 실제 지급된 장학금에 집중되고 있다.

장학금 > 등록금?

KC대는 ‘장학금에 관한 규정’에 따라 교비 장학금과 교외(기탁) 장학금을 구분하고 있다. 교비 장학금은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교외 장학금은 외부서 들어온 기부금 등을 통해 마련된다. 선수들은 2016년 1·2학기와 올해 1학기에 걸쳐 교비․교외 장학금을 골고루 수령했다.

선수 가운데 한 명은 2016년 1학기에만 교비․교외 장학금을 합해 700만원에 이르는 돈을 받았다. 정부서 지원하는 국가장학금을 제외해도 400만원이 넘는다. 

2016년 1학기 등록금이 입학금을 포함, 395만원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해당 선수는 오히려 돈을 받고 학교에 다닌 셈이다. 이처럼 선수들은 국가장학금을 포함, 적게는 80여만원, 많게는 700여만원까지 한 학기 장학금으로 지급 받았다.


학교 관계자는 “장학금 지급 구조부터 잘못됐다”며 “장학금을 만들고 결정하는 사람이 한정돼있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논란의 중심에는 신학부 S교수가 있다. KC대서 장학금을 담당하는 부서는 학생처다. S교수는 당시 학생처장이었다. 학생처장은 장학위원회 위원장을 당연직으로 맡는다. 장학위원회는 장학금 수혜 대상자의 자격과 수혜기간, 지급액은 물론 지급 규정을 제정할 수 있다.

이름 바꾸고 몰아주고
장학금 과다 지급 의혹

여기에 학부별로 지급되는 장학금은 학부장이 관리하는데 신학부의 경우 S교수가 학부장을 맡고 있었다. 선수들은 대부분 신학부를 통해 ‘우회 입학’했기 때문에 신학부 소속이다. 보직해임 전까지 축구단 단장도 S교수의 몫이었다.

장학위원회의 위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은 바로 ‘체육특기자 장학금’. 

2016년 KC대 입학전형에는 체육특기자 전형이 없다. 그럼에도 KC대는 체육특기자 장학금 명목으로 1년에 걸쳐 선수들에게 160여만원을 지급했다. KBS 보도를 통해 드러난, 선수들은 만져보지도 못하고 현금으로 인출된 바로 그 돈이다. 축구단의 장학금 유용 의혹이 불거진 대목이다.
 

체육특기자 장학금을 둘러싼 뒷말은 내부서 먼저 터져 나왔다. 잡음이 이어지자 장학금 명칭이 ‘스포츠 홍보 장학금’으로 슬그머니 변경됐다. 장학금 지급 시행 세칙에도 ‘스포츠 홍보 장학금: 축구단서 추천한 축구단원에게 일정금액을 지급할 수 있다’는 내용이 추가됐다.


교외 장학금 부분은 더 심각하다. 제자사랑 장학금, 자기계발 장학금, 섬김 장학금, 신학제자기금, 동문회 장학금, 써니&제인 장학금, 용산교회 장학금 등의 교외 장학금은 교비 장학금에 비해 수혜자 선정과 지급이 자유롭다. 

올해 1학기 선수 1명에게 지급된 용산교회 장학금의 경우, 해당 교회의 담임목사가 S교수였다.

일반 학생들은 학교를 다니는 내내 그 존재조차 모르는 장학금이 축구단으로 집중된 것이다. 

KC대 재학생은 “자기계발 장학금하고 써니&제인 장학금은 정말 처음 들어봤다”며 “어떻게 하면 탈 수 있느냐”고 거꾸로 물어왔다. 4년간 학교에 다닌 재학생도 모르던 장학금은 축구단 1학년 선수들에게 들어갔다.

써니&제인 장학금은 기탁자의 지명이나 취지에 따라 움직이는 돈이다. 기부자가 지명하지 않았을 경우는 장학위원회의 의지에 따라 학생들에게 지원이 가능하다. 써니&제인 장학금은 매년 학교로 들어오는 돈을 수혜 학생 수에 따라 나눠 지급됐다. 올해 1학기에는 선수 1명이 100만원을 지원 받았다.

이상한 명목으로
최대 700만원 지급

자기계발 장학금은 학교서 추진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해 교수학습지원센터의 인정 및 추천을 받은 자에 한해 받을 수 있다. 교수학습지원센터 관계자는 “자기계발 장학금을 타기 위해선 반드시 프로그램에 참여해 좋은 성적을 거두거나 열심히 해야 한다”며 “일종의 상금 개념”이라고 했다.

선수들은 2016년 1학기 자기계발 장학금 명목으로 140만원씩 받았다. 학교 관계자는 “축구단 선수들은 수업도 제대로 못 들어가는 걸로 알고 있다”며 오후 시간엔 축구 연습 때문에 시간을 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자기계발 프로그램에 참여할 시간이 있었는지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섬김 장학금으로 넘어가면 그 의혹은 더욱 증폭된다. 생활 형편이 어렵고 학교를 위해 공헌한 자에게 주는 섬김 장학금은 일종의 근로장학금이다. 학교 내에서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학생들에게 지급되는 돈이다. 2016년 2학기 선수 3명에게 150만원이 넘는 돈이 섬김 장학금으로 주어졌다.

축구단 섬김 장학금 의혹은 지난 4월20일 KC대 33대 총학생회 ‘울림’이 진행한 공청회 1부서 학생들의 질문으로 불거졌다. 이날 질문한 한 학생은 “축구단 선수들이 근로를 하지 않았음에도 학생처서 근로일지를 가짜로 발급해 (근로)장학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있다”며 S교수에게 답변을 요구했다.
 

S교수는 “내가 선수들을 직접 통솔해 밤 늦게 학교 근처서 담배꽁초를 주운 적이 있다. 여성안심귀가길 서비스라고 해서 경찰들과 함께 돌아다니기도 했다”며 “정정당당하게 봉사시간을 받았다. 내가 책임질 수 있다”고 해명했다.


KC대가 교육부에 제출한 ‘KC대학교 축구단 운영비리에 관한 답변 제출’ 문서를 보면 축구단 장학금과 관련한 좀 더 명확한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민원인은 축구부 단장이었던 S교수가 장학금 지급 기준을 어겨가면서까지 선수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고 지적했다. 

KC대 장학금 지급 시행세칙에 따르면 ‘직전학기 15학점 이상, 평균 성적 2.0 이상’이 돼야 장학금 수혜 대상 요건이 갖춰지는데, 선수들이 해당 요건을 충족했는지 여부를 두고 의혹을 제기했다.

S교수는 “시행세칙에 그런 규정이 있으나 본칙인 장학금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장학위원회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할 수 있다고 돼있다”며 “장학생 선정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학생의 경우 장학위원회의 의견을 통해 지급했다”고 답했다.

또 선수들에게 지급된 한 학기 장학금이 등록금을 초과했는지 여부에 대해 “시행세칙에 섬김 장학금, 봉사장학금, 자기계발장학금, 국외교환학생장학금, GS장학금은 예외로 할 수 있다”고 전했다. 

학교 관계자는 “선수들이 받은 장학금이 규정상으론 아무 문제가 없을 수 있다. 하지만 S교수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 선수들에게 최대한 몰아준 것도 맞다”며 “그 결과 일반 재학생들은 그 수혜 대상서 제외됐다”고 꼬집었다.

재학생만 피해


S교수 후임으로 학생처장과 축구단 단장을 맡고 있는 K교수는 “선수들에게 지급된 장학금을 파악하고 있는데, 내규에 맞춰 지급한 걸로 보인다”며 “규정과 절차를 따랐다면 의도를 갖고 저 쪽(축구단)으로 밀었더라도 장학위원회를 통해 결정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렸으니 최대한 빨리 조사해 9월 안에 결론을 내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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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