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3세시대 개막 효성 조현준 회장

  • 박창민 기자 cmp@ilyosisa.co.kr
  • 등록 2017.07.24 10:27:21
  • 호수 11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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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끌고 동생은 밀고 ‘재도약’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조석래 전 효성그룹 회장이 고령과 건강상의 이유로 경영일선서 하차했다. 1981년 그룹 회장에 취임한 조 전 회장이 36년 만에 물러난 것. 효성그룹은 조 전 회장의 장남인 조현준 회장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게 됐다. 
 

지난 14일 조석래 전 회장이 대표이사직서 사임했다. 조 전 회장은 지난해 조현준 사장을 회장으로 승진시킨 뒤 회장직서 물러나면서도 대표이사직을 유지해왔다.

아버지 사임
큰아들 선임

효성 관계자는 “조 전 회장이 장남 조현준 회장 중심의 경영체제가 안정적으로 구축됐다고 판단하고 경영 일선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며 “향후 경영 전반에 대한 자문을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조 전 회장은 그룹 경영 일선에선 물러나지만 건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봉사활동이나 사회공헌활동을 이어간다는 계획이다. 

이에 따라 효성은 본격적인 3세 경영에 닻을 올리게 됐다. 그동안 효성은 조홍제 창업주와 그의 아들인 조석래 전 회장, 손자 조현준 회장이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조 창업주는 1906년 5월20일 경남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신창부락서 출생했다. 조부의 훈도로 소년 시절을 보냈다. 17세까지 5년 동안 종조부인 서천 선생을 스승으로 섬겼다. 이후 1922년 4월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재학 중이던 1926년 6·10 만세운동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기소돼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1929년 호세이 대학의 독일경제학과에 입학한 뒤, 1935년에 졸업하여 귀국했다. 1948년,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과 공동 출자로 삼성물산공사를 창립했다. 1962년 9월, 15년간에 걸친 이 회장과 동업 관계를 청산하고, 효성물산 주식회사로 독자사업을 시작했다. 

1966년 한국타이어, 대전피혁 등을 인수했다. 이 때부터 장남 조 전 회장이 사실상 효성그룹을 이어받는다. 

조 전 회장은 1935년 11월 19일 경상남도 함안군서 출생했다. 이후 군북국민학교를 다니다 5학년때 서울 재동국민학교로 전학했다. 경기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1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55년 일본 히비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에 진학한다. 

조석래 36년 잡았던 지휘봉 내려놔
두 아들 장남·3남 형제경영 탄력

이후 미국 일리노이 공과대학교에 입학, 화학공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66년 박사 위 과정을 준비 중이던 조 전 회장은 아버지 부름을 받고 귀국, 기업 경영에 참여하게 된다. 이후, 귀국한 그해부터 동양나이론 울산공장 건설을 추진하며, 1973년에 동양폴리에스터를 설립했다.

1970년대에 들어 대한민국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에 부응하며, 민간기업 최초로 ‘기술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기술 개발에 많은 신경을 썼다. 특히 섬유화학 분야서 신소재와 응용 기술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면서 종합 신소재 기업을 탄생시켰다.

1975년 한영중공업을 인수, 효성중공업으로 새롭게 출범시켜 중전기기와 산업기계를 국산화하고 양산하도록 했다. 1980년대에는 화섬산업서 쌓아온 노하우를 바탕으로 석유화학 분야에 많은 투자를 하게 된다. 


이와 함께 금융자동화기기와 중대형 컴퓨터를 비롯한 하드웨어 사업과 소프트웨어 개발 사업에 참여하여, 정보통신 분야에 진출하였다.

1997년 12월 효성그룹의 전 조직을 퍼포먼스 유니트(Performance Unit) 체제로 바꾸고 PU별 책임 경영체제를 구축했다. 한편, 1998년 11월에는 효성T&C, 효성생활산업, 효성중공업, 효성물산 등 주력 4사를 합병하고 비핵심 계열사 및 사업부문을 매각하는 등 혁신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조 전 회장은 효성을 국내 5대 그룹으로까지 끌어올린다. 하지만 주력 사업인 섬유 산업 자체가 사양 산업화 되면서 효성의 사세는 기울기 시작했다. 이후 외환위기가 닥치며 그룹의 생존을 위해 계열사들을 분리해 내면서 한 때 40대 그룹 밖으로 밀려났다. 현재는 타이어코드, 방탄섬유, 스판덱스 등 특수목적 섬유 방면서의 절치부심으로 다시 23위 수준까지 부상해, 20대 그룹 재진입을 목전에 둔 상황이다.

기업인 51년
전경련 회장도  

조 전 회장은 재계 활동에도 적극 나섰다. 2002년 5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서 개최된 태평양경제협의회 총회서 회장에 선임돼 활동했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을 지냈고, 한미재계회의 위원장(2000∼2009년)과 한일경제협회장(2005∼2014년)을 역임했다. 

전경련 회장을 지낼 땐 정부에 규제개혁을 요구하며 기업들의 일자리 창출과 투자활성화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 전 회장이 대표이사직에 내려놓은 이유로는 우선 고령과 건강문제가 꼽힌다. 1935년 생으로 올해로 만 82세의 나이인 데다, 수년 전 담낭암과 전립선암 발병으로 최근까지 병원 치료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조 전 회장이 사임한 뒤 조현준 회장이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효성은 기존 김규영 대표이사 체제서 조현준·김규영 각자 대표이사 체제로 변경했다고 지난 20일 공시했다. 그간 효성 대표이사는 조 회장·이상운 부회장 체제를 유지하다가 지난 4월 이상운 부회장이 대표이사직서 사임했다. 

이후 김규영 사장이 이 부회장을 대신해 각자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이번 선임으로 효성은 기존 조석래·이상운 체제서 조현준·김규영 체제로 세대교체를 완료했다. 

효성 관계자는 “조 회장의 대표이사 선임은 효성이 최근 2년 간 사상 최대 실적을 달성하는 성과를 거두는 등 체제가 안정화된 상황서 책임경영을 강화하겠다는 차원서 이뤄진 것”이라며 “조 회장은 성과중심의 조직체계 개편, 경영시스템 개선, 스판덱스·타이어코드·중공업·정보통신 등 주력사업 부문의 글로벌 시장지배력을 확대하는 등 회사를 성장시켜 왔다”고 설명했다.

앞서 조 회장은 지분을 추가로 확보하면서 경영권 강화에 나섰다. 조 회장이 지난 7일과 10일 각각 효성 주식을 1878주, 9182주를 장내 매수했다. 지분율은 지난 3월30일 14.20%(498만6629주)서 7월 13일 14.23%(499만7689주)로 0.03%포인트(1만1060주) 늘었다. 조 전 회장도 같은 기간 1만1811주를 장내매수하면서 지분율을 10.15%서 10.18%로 0.03%포인트 늘렸다.
 


재계 안팎에서는 효성이 지난해 창사 이후 처음으로 영업이익 1조원을 돌파하면서 조 회장의 경영 기반이 안정화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조 회장은 최근 인도의 경제 정책 수장인 아룬 자이틀리(Arun Jaitley) 인도 재무장관 겸 국방부 장관과 만나는 등 인도 시장 진출에도 속도를 높이고 있다.

앞서 지난 1월 조 회장은 취임사를 통해 조 전 회장의 기술중심 경영철학을 이어받고 소통과 경청을 통해 항상 승리하는 회사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조 회장은 1968년 1월16일 경남 함안군서 태어났다. 조 창업주 손자이자 조 전 회장의 장남이다. 송광자 경운박물관장이 모친이다. 동생으로 조현문 전 효성 부사장과 조현상 효성 부사장이 있다.

1980년 경기초등학교, 1983년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예일대학교 정치학과와 게이오대학교 법학대학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2년 일본 도쿄의 미쓰비시 상사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에너지부와 원유수입부 등에서 근무했다.

1995년부터 모건스탠리 도쿄지점서 일했다. 1997년 효성T&C(현 효성) 경영기획팀 부장으로 입사해 효성T&C와 효성물산, 효성생활산업, 효성중공업을 합병하는 작업에 관여했다. 1998년 효성 전략본부 경영혁신팀 이사로 승진했다. 2000년 상무, 2001년 전무를 거쳤다. 

이때 이희상 동아원그룹 회장의 삼녀 이미경씨와 혼인했다. 이씨와 사이에 2002년 장녀 조인영, 2006년 차녀 조인서가 태어났다.


2003년 부사장에 올랐다. 당시 전략본부장으로서 중공업 사업을 육성하기 위해 대우종합기계와 대우정밀 인수를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대우종기(현 두산인프라코어)는 두산중공업에 밀렸고 대우정밀은 우선협상대상자에 선정됐으나 채권단과 뜻이 맞지 않아 결렬됐다.

2005년 신사업을 발굴하는 역할을 조현상 부사장(당시 전무)에게 넘겨주고 무역PG장으로 옮겨 효성의 의사결정기구인 ‘경영회의’에 참여하게 됐다. 2007년에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섬유PG장을 겸했다. 이후 2011년부터 전략본부장을, 2012년부터 정보통신PG장으로 근무했다.

2008년 대주주로 있는 갤럭시아커뮤니케이션즈, 효성ITX, 갤럭시아일렉트로닉스 등을 통해 제이슨골프, 럭스맥스, 럭스맥스네트워크, 인포허브, 크레스트인베스트먼트, 바로비전 등을 공격적으로 인수합병하며 효성그룹 내 갤럭시아소그룹을 만들었다. 트리니티에셋매니지먼트를 통해 IB스포츠(현 갤럭시아SM)에도 투자했다.

2009년 효성 계열사인 에피플러스(현 갤럭시아포토닉스)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지분율 확대 
본격적 행보 

재계에선 조 회장에 대해 탁월한 글로벌 감각을 지닌 준비된 경영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폭넓은 해외경험과 창의적인 마인드를 갖춘 재계의 대표적인 글로벌인재로 인정받았다. 특히 능통한 3개 국어에 능통해 다양한 국가의 인사들과 네트워크 구축했으며 미국과 일본 등 기업서 근무하며 글로벌 감각을 쌓았다. 

또한 조 회장이 다양한 인맥과 경험 덕분에 전경련 회장을 지낸 아버지만큼이나 글로벌 감각과 경험, 인맥을 갖춘 차세대 리더로 꼽히고 있다. 조 회장은 2014년 첫 외부활동으로 한일경제협회 회장을 역임한 아버지에 이어 한일경제협회 회장으로 나서기도 했다. 

2015년 5월에는 한일 주요경제인들의 모임인 ‘한일경제인회의’에 패널로 나서 ‘미래세대가 바라본 한일 미래상과 협력방안’을 발표한 바 있는데, ICT산업 분야서의 협력과 한국의 창조경제에 대한 투자 등을 제안하기도 했다. 
 

근래에는 효성의 성장을 이끌며 경영능력도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효성은 지난해 매출 12조4585억원, 영업이익 9502억원이라는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둔 가운데 올해 영업이익은 1조원을 달성할 것이란 전망이다. 

이는 섬유, 중공업, 정보통신, 건설 등 핵심사업서 지속적인 수익 창출을 위해 시장 발굴 및 신규고객 확보에 적극 나서고 있는 조 회장의 효과가 긍정적으로 나타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조 회장은 재계서도 유명한 스포츠 마니아로 대학시절까지는 야구, 미식축구, 스키 대표선수를 지냈을 정도다. 조 회장은 야구와 경영이 비슷한 점이 많다며 야구경영론을 앞세우기도 했다. 

경영체제 안정적으로 구축
그룹 내부도 개편될 전망

조 회장과 형제경영을 함께 할 조 전 회장의 3남 조현상 효성 사장에 대해서도 시선이 쏠리고 있다. 조 사장은 올해 정기임원 인사를 통해 산업자재PG장 겸 전략본부장을 맡아 형 조 회장을 보좌하며 회사를 이끌고 있다.

조 사장은 경복고와 연세대를 거쳐 미국 브라운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지난 1996년 베인 앤 컴퍼니 서울 지사, 동경 지사서 컨설턴트로 근무, 실무경험을 쌓았다. 조 사장은 1998년 조 전 회장의 부름으로 사내컨설턴트 역할을 맡아 구조조정에 대한 자문 역할로 경영에 첫 참여했다. 이후 일본 NTT 커뮤니케이션사의 요청으로 NTT에 합류, NTT 유무선 관련 전략 프로젝트, 법인 영업 등을 수행했다.

효성에 2000년 재입사한 조 사장은 산업자재PG장 겸 전략본부의 임원으로 효성을 폴리에스터 타이어코드, 시트벨트용 원사, 에어백용 원단부문 세계 시장점유율 1위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조 사장은 효성의 세계 1위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2000년대부터 글로벌 타이어업체들과의 M&A를 본격화 했다. '협상의 달인'이라 불리며 그룹의 신사업 및 대형 M&A를 주도해 나감으로써 산업자재PG의 성장을 이끌어 왔다. 

조 사장은 2002년 세계 최대 타이어 업체인 미국 미쉐린과 총 3억5000만달러 규모의 타이어코드 장기공급 계약과 미국 버지니아 주 타이어코드 공장을 인수하는 계약을 동시에 체결했다. 이후 미쉐린, 굿이어 등과 연이은 M&A를 성사시키며 생산거점 확대 및 판매확대 기반을 마련했다. 2005년에는 미쉐린과 10년간 총 6억5000만달러 규모의 스틸코드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조 사장은 주요 M&A를 통해 주주, 고객, 임직원 등 이해관계자의 비즈니스 가치 극대화 추구를 이끈 역량을 인정받아 2007년 세계경제포럼이 선정하는 '차세대 글로벌리더(YGL)'로 선정됐다. 2009년에는 세계경제포럼 글로벌 아젠다위원회 멤버로서 아젠다 선정 작업에 참여하는 등 세계경제포럼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긍정적인 평가
사상 최대 실적

 
또한 미국과 아시아의 이해증진을 목적으로 창설된 아시아·태평양지역의 대표적 포럼인 아시아 소사이어티의 '아시아 21 글로벌 영리더'에 선정됐다. 한·중·일 3국 외교부가 선정한 ‘한·중·일 차세대지도자’로 뽑히는 등 차세대 리더로 인정받으며 주목 받고 있다. 조 사장의 활약으로 굿이어와의 M&A를 성사시킬 수 있었고, 장기공급 계약으로 타이어보강재PU가 세계 1위의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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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일요시사 취재1·정치팀] 오혁진·박희영·김철준 기자 =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났다. 특검이 출범하면서 관련 수사도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여러 언론을 통해 핵심 인물들의 수사 기록이 일부 보도됐다. 그러나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에 대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 없다. <일요시사>는 경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단의 ‘노상원 수사 기록’을 단독으로 입수해 공개하기로 했다. “부정선거 증거가 차고 넘치고 나중에는 드러날 것이다.”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이 수사기관에 진술한 내용이다. 그가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처럼 부정선거 음모론에 꽂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노 전 사령관은 윤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주최하는 집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실상 수년 전부터 망상에 빠져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생각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주도하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한 건 2년 전부터로 추정된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노 전 사령관 수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의 집회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노 전 사령관이 전 목사와 개인적으로 알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에게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당시 분위기와 참석자들이 윤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텔레그램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1년간 ‘극우 집회’를 분석한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상호, 정성욱, 김봉규 등과 만날 때 주로 어떤 말을 했느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 “선관위를 얘기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선관위가 부정선거의 온상이라고 김용현 전 장관이 많이 말씀하셨다. 나에게도 여러 번 선관위의 부정선거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고 네이버로 찾아도 봤다”고 말했다. “부정선거를 주로 누구에게서 들었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는 “관련 집회에 여러 번 참여하면서 들었고 특정 인물이 누구인지 실명을 거명하긴 그렇다. 나도 김 전 장관에게 보고를 해야 해서 스스로 공부도 많이 했다. 여론조사 조작이나 선거 부정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고 했다. 전 주도 윤 지지자 극우 집회 직접 참석 김과 텔레그램으로 부정선거 자료 공유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의 근거로 “선관위 산하에 여론조사심의위원회가 있다. 여론조사기관은 여론조사심의위에 등록해야 한다. 여론조사기관의 갑이다. 여론조사심의위원회는 9명으로 위원장 이대영 사무총장과 강성봉 등이고 그 밑에 쭉 있는데 7명이 진보 계열 인물이다. 여론조사기관이 편향되어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임시선거사무소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네이버에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2021년 국회의원 선거 때 동작구 선거사무소가 있는데 옆을 임대해서 임시선거사무소를 만들었었다. 언론에 나오니까 발뺌했었고 김 전 장관에게 보고하자 김 전 장관이 더 많은 자료를 보내 줬었다”고 했다. 노 전 사령관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며 “결국에는 다 까질 것이다. 전산은 한 번 까지면 되돌릴 수가 없다. 폭파하거나 고물상에 갖다 버리지 않는다면 전산은 결국 까진다. 북한이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서울 상공에 포를 쏜 것도 아니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께서는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고 생각하시고 정국이 전시에 준하는 사태라고 민감한 상황이라고 보신 것 같다.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그렇게 행동한 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2시간짜리 호소였다. 만약 국회 결정을 윤 전 대통령께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유혈사태가 났을 것”이라고 윤 전 대통령을 옹호했다.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2월 초, 선관위가 서버 교체를 검토했다가 교체하려 했던 것을 두고 “윤 전 대통령께서 어디에선가 확실하고 핵심적인 정보를 들으셨을 것 같다. 서버 조작이 있었기에 그 서버를 우리가 확보하려 할 때 선관위 측이 폭파했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의 군검찰·검찰 피의자 신문조서를 보면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초 ‘정보사 군무원 간첩 사건 수사 결과’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 등 인물들에 대해 “비상대권을 사용해 이 사람들에 대해 조치를 해야 한다”며 “현재의 사법체계, 형사소송법, 방탄국회 및 재판지연 아래에선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재명 조치’ ‘2시간짜리 계엄’ 겹치는 윤·노 발언 "서버 확보하려 했다면 선관위가 폭파했을 것” 주장 윤 전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사용한 조치”를 언급한 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만큼 이 대통령과 자신의 의견을 거스르는 인물들에 대한 복수심이 극에 달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노 전 사령관도 마찬가지다. 노 전 사령관은 경찰에 “김용군(대령)과 구삼회 등에게 ‘이재명은 죄가 7개인데 봐주고 지연시키고 구속도 안 되고 당 대표까지 하는데 더불어민주당이 감사원장, 중앙지검장, 판사 등을 모두 탄핵하려고 하는 게 과연 올바른 세상이냐’고 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윤 전 대통령과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말이 일치하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12일 “국정원 직원이 해커로서 해킹을 시도하자 얼마든지 데이터 조작이 가능했고 비밀번호도 아주 단순해 ‘12345’ 같은 식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노 전 사령관도 “선관위가 헌법기관인데 스스로 깨끗해야 하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황제·세자 채용 등 문제가 나왔다. 각종 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은 다 저질렀다. 그리고 전산 해킹이 언급될 때 서버 본체를 보여준 것도 아니고 일부 샘플만 살짝 보여줬는데 얼마든지 전산 조작이 가능하고 해킹에 얼마나 취약하면 비밀번호가 ‘1234’냐. 이미 그런 게 다 나왔다. 그렇게 떳떳하면 왜 본체를 못 열어주나”고 말했다. 그러나 조태용 국정원장은 같은 해 12월 검찰 조사에서 “선관위 시스템에 보안상 취약점이 발견됐지만, 부정선거에 관한 단서는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일각에서는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과 직접 비화폰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보고 있다. 실제 노 전 사령관도 지난해 12월2일 자신의 지인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노 전 사령관은 당시 “나 같은 경우는 브이(V, 윤 전 대통령 지칭)하고 이렇게 좀 도와드리고 있다. 원래 한 4~5년, 3~4년 전에 알았다뿐이고 그래서 이제 뭐 이렇게 여러 가지로 좀 도와드리고 있다. 비선으로”라고 했다. 친분 과시 노 전 사령관은 안산 ‘롯데리아 회동’에 참석했던 구삼회 전 육군 2기갑여단장에게도 “며칠 전에는 김용현과 함께 대통령도 만났다. 갈 때마다 대통령이 나한테만 거수경례를 하면서 ‘사령관님 오셨습니까’라고 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대통령과 장관 같이 만난다. 나는 벌써 여러 번 만났다”고 했다. <hounder@ilyosisa.co.kr> <hypak28@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