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면 더 볼만한 풍경·소리 ④안동 농암종택

뒷모습이 아름다운 선비를 찾아서

 

7월 장마철에는 우리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안동 농암종택으로 떠나보면 어떨까. 구름이 내려앉은 청량산 줄기가 수묵화를 그려내고, 낙동강 물소리는 더욱 세차다. 농암 이현보 선생의 손때가 묻은 긍구당에서 하룻밤 묵어보자. 넓은 마루에 앉아 빗소리, 강물 소리, 새소리에 귀 기울이면 몸과 마음이 깨끗해진다. 

 

농암 이현보는 조선 중기 때 문신이자 시조 작가다. 1498년(연산군 4)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 춘추관기사, 예문관봉고 등을 거쳐 38세에 사간원정언이 된다. 

그러나 서연관의 비행을 논하다가 안동에 유배되고, 나중에 중종반정으로 복직돼 30년 이상 조정을 위해 일한다. 1542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시를 벗삼아 지낸다. 

전통이 살아 숨쉬는 곳

조선시대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 사상 강호 시조 작가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작품으로 전해오는 ‘어부가’를 장가 9장, 단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과 ‘효빈가’ ‘농암가’ ‘생일가’ 등 시조 8수가 남았다. 
 

농암종택에 도착하니 비가 그쳤다. 단비를 뿌린 구름은 청량산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비 오는 날 한옥의 운치를 즐기려는 계획은 살짝 어긋났지만, 그래도 촉촉한 풍경이 반갑다. 무거운 구름이 내려앉은 청량산 줄기는 농암종택의 한옥과 어우러져 그윽한 풍경을 빚어낸다. 
 


농암 선생의 17대 종손 이성원씨가 긍구당으로 안내한다. 긍구당(肯構堂)은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농암종택의 별채로 당호는 ‘조상의 유업을 길이 잇다’라는 뜻이다. 고려 때 농암 선생의 고조부가 지은 소박한 건물이다. 

마루에 오르니 낙동강 물소리가 시원하다. 나무에 가려 낙동강은 보이지 않지만 소리 덕분에 유장하게 흐르는 강줄기가 떠오른다. 방에는 색이 고운 원앙금침이 깔렸다.
 

“여기서는 산과 강을 함께 봐야 해요. 건물만 보고 가는 분이 있는데, 그러면 농암종택을 모르는 거야. 산은 높지도 낮지도 않고, 강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아요.”
 

이씨를 따라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본다. 능선과 한옥의 지붕이 부드럽게 이어진다. 과연! 고개가 끄덕여진다. 농암종택이 본래 자리했던 도산서원 앞 분천마을은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됐다. 

1996년 이씨가 이곳에 터를 잡고, 10여년 동안 여기저기 흩어진 종택과 사당, 긍구당, 분강서원 등 문화재를 한데 모아 지금의 농암종택을 만들었다. 종택을 개방한 건 이씨의 결정이다. 안동의 어느 집안도 해본 적 없는 일이다. 
 

이씨가 애일당과 강각에 다녀오라며 열쇠를 건넨다. 긍구당서 나오면 농암 선생을 모신 분강서원이 있고, 좀 더 강변으로 가면 건물 두 채가 보인다. 앞에 있는 애일당은 구순이 넘은 부친을 위해 농암이 지은 건물이다. 

부친이 늙어가는 것을 아쉬워하며 ‘하루하루를 사랑한다’는 뜻에서 애일당(愛日堂)이라 이름 지었다. 선생은 부친을 포함한 노인 아홉 분을 모시고 어린아이처럼 색동옷을 입고 춤추며 즐겁게 해드렸다고 한다. 
 


애일당 뒤에 자리한 강각에 오르니 세찬 물소리와 함께 낙동강과 벽련암이 펼쳐진다. 강각(江閣) 앞에서 강물은 여울을 만나기에 물소리가 클 수밖에 없다. 물소리를 듣는 수성각(水聲閣)이란 이름이 더 어울려 보인다. 마루에 놓인 의자에 앉으면 시간이 느릿느릿 흘러가는 느낌이다. 
 

농암은 뒷모습이 아름다운 선비로 조선 시대 유일하게 은퇴식을 하고 정계서 물러났다. 임금은 금포와 금서대를 하사했고 퇴계 이황은 전별시를 지어 선물했다. 한강까지 이어진 행차를 보고 도성 백성들이 담장처럼 둘러섰다고 한다. 

농암이 고향으로 돌아와 강각서 읊은 시가 ‘어부가’다. 농암은 부모님을 공경하며 자연서 유유자적 지내고 싶어 임금의 계속되는 상경 명령에도 끝내 응하지 않았다. 나라에서는 종일품 숭정대부의 품계를 내려 예우했다. 명예를 포기해 더 큰 명예를 얻은 셈이다. 
 

강각서 강변으로 내려오면 퇴계오솔길(예던길)이 이어진다. 퇴계가 집에서 청량산 갈 때 걷던 길이다. 한동안 낙동강을 따라 조붓한 길이 이어진다. 15분쯤 지나 ‘공룡 발자국’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발길을 돌리는 게 적당하다. 

긍구당에 오니 저물 무렵이다. 마당을 서성이며 땅거미가 풍경을 집어삼키는 걸 바라본다. 산이 검게 변하고, 구름은 비명처럼 푸른빛을 토하며 서서히 블랙홀 같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긍구당 마루에 누워 어둠 저편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 개울물 소리가 공처럼 튄다. 소쩍새가 운다. 쏙독새는 어둠을 쫀다. 호랑지빠귀는 밤하늘에 구슬프게 휘파람을 분다. 
 

다음 날 아침, 새소리에 눈을 떴다. 강각 앞의 강변을 산책한다. 간밤에 비가 그치고 세수한 듯 맑은 하늘이 나왔다. 강가서 연방 물수제비를 떠본다. 이성원 씨가 식사하라고 부른다. 이성원 씨 부부와 오붓하게 담소하며 아침을 먹는 시간도 농암종택의 큰 매력이다. 

청량산·낙동강이 어우러진 농암종택
비 오는 날, 한옥 운치와 함께 금상첨화

농암종택서 나와 2km쯤 가면 강 건너편으로 작은 정자가 있다. 정자 앞으로 미끈한 소나무 한 그루가 강물에 비친 제 얼굴을 본다. 고산정은 퇴계의 제자 금난수가 1560년대에 지은 정자로 주변 경관이 빼어나 농암과 퇴계를 비롯한 선비들이 즐겨 찾았다. 
 

가송리서 남쪽으로 20분쯤 달리면 안동군자마을에 닿는다. 주차장에서 바라보면 산기슭 경사면에 고택이 옹기종기 모였고, 뒤로 미끈한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싼 풍경이 고풍스럽다. 농암종택과 더불어 하룻밤 묵어가기 좋은 고택이다. 
 

군자마을은 조선 초기부터 광산 김씨 예안파가 약 20대에 걸쳐 600여년 동안 살아온 외내에 있던 문화재와 고가를 옮겨다 세운 마을이다. 오천리가 군자마을이 된 것은 입향조인 김효로의 종손과 외손 일곱 명이 ‘오천 칠군자’라 불렸기 때문이다. 

대표적 인물이 퇴계의 수제자 후조당 김부필이다. 군자마을 가장 높은 곳에 후조당의 사랑채와 별당이 자리한다. 퇴계가 애제자를 위해 쓴 후조당 현판이 별당 대청에 걸렸다. 
 


사랑채와 별당을 구경했으면 탁청정을 둘러볼 차례다. 탁청정은 1541년 김유가 지은 가옥에 딸린 정자로, 영남 지방의 개인 정자 가운데 으뜸으로 꼽힌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이고 명필 한석봉이 쓴 현판이 걸렸다. 탁청정 마루에 앉아 연못과 고택을 바라보는 맛이 일품이다. 
 

군자마을서 나와 안동호를 따라 7분쯤 가면 도산서원 주차장에 닿는다. 도산서원의 건축물은 민가처럼 검소하게 꾸민 것이 특징이다. 서원은 퇴계가 제자를 가르치고 기거한 도산서당 영역과 퇴계 사후에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도산서원 영역으로 나뉜다. 

도산서당은 1561년 퇴계가 직접 설계하고 지은 삼간집이다. 가운데 온돌방은 퇴계가 기거한 완락재, 동쪽의 대청은 암서헌이다. 대청이 좁아 궁여지책으로 평상을 댄 것만 봐도 퇴계의 검소함을 알 수 있다. 

이육사의 삶 ‘이육사문학관’

마지막 여행지는 이육사문학관이다. 육사는 퇴계의 14세손으로 본명은 이원록이다. 육사의 저항성과 문학성은 퇴계의 학통서 이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육사문학관은 대대적 리모델링을 거쳐 올해 2월 재개관했다. 전시관과 영상실, 세미나실 등 복합 시설을 갖췄다. 

동선을 따라가면 이육사의 짧지만 강렬한 생애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육사가 생을 마감한 베이징 감옥을 재현한 방에서는 울컥했다. “내 고장 칠월은 /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그의 대표작 ‘청포도’를 읊조리며 안동 여행을 마무리한다. 



<여행 정보>

당일 여행 농암종택→고산정→안동군자마을→도산서원→이육사문학관 

1박2일 여행 코스
[첫째 날] 안동군자마을→고산정→농암종택 
[둘째 날] 농암종택→이육사문학관→도산서원 

관련 웹 사이트 주소
- 농암종택 http://www.nongam.com
- 안동군자마을 http://www.gunjari.net
- 도산서원 http://www.dosanseowon.com
- 이육사문학관 http://www.264.or.kr
- 안동관광(안동시청 문화관광 홈페이지) http://www.tourandong.com

문의 전화
- 안동시청 체육관광과 054)840-6391
- 농암종택 054)843-1202
- 안동군자마을 054)852-5414
- 도산서원 054)856-1073
- 이육사문학관 054)852-7337

대중교통 정보
[기차] 청량리-안동, 무궁화호 하루 7회(06:40~21:13) 운행, 약 3시간30분 소요.
* 문의 : 레츠코레일 1544-7788, http://www.letskorail.com 
[버스] 서울-안동, 동서울종합터미널서 하루 32회(06:00~23:00) 운행, 약 2시간50분 소요. 
* 문의 : 동서울종합터미널 1688-5979, http://www.ti21.co.kr

자가운전
중앙고속도로 풍기 IC→소백로→온천로→온혜교차로서 태백·봉화 방면 좌회전→퇴계로→가송길→농암종택

숙박 정보
- 농암종택 : 도산면 가송길, 054)843-1202, http://www.nongam.com(명품고택)
- 안동군자마을 : 와룡면 군자리길, 054)852-5414, 
http://www.gunjari.net(한옥스테이)
- 안동호반자연휴양림 : 도산면 퇴계로, 054)840-8265, 
http://huyang.gb.go.kr 

식당 정보
- 도산대가(안동찜닭·간고등어정식): 도산면 퇴계로, 054)852-6660, http://www.dosandaega.wo.to
- 뉴서울갈비(갈비): 안동시 음식의길, 054)843-1400
- 보문식당(약산채밥상·보리밥): 안동시 번영길, 054)854-6009 
- 까치구멍집(헛제삿밥·한정식): 안동시 석주로, 054)821-1056, http://andongrice.com 

주변 볼거리
경상북도산림과학박물관, 퇴계종택, 안동호반자연휴양림, 유교문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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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한미 정상회담 팩트시트가 공개되자, 가장 큰 화제가 된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에 대해 “문구가 추상적이어서 모호하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자극 받은 일본도 핵잠수함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핵잠수함 건조를 현실화하지 않으면 “일본에 핵 보유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의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하게 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달 29일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타결된 한미 관세·안보 협상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가 지난 14일 공개됐다. 가장 큰 논란은 핵 추진 잠수함(이하 핵잠수함) 관련 합의 문구였다. 산 너머 산 구체성 없다 팩트시트를 통해 확인되는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선 “구체성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팩트시트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민간·해군의 원자력 프로그램 ▲한미 원자력 협정에 부합하고 미국의 법적 요건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로 귀결될 절차 등을 지지한다. 이어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고, 한국과 조선 사업 요건 진전·연료 조달 방안 등을 포함해 긴밀히 협력한다. 미국은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 지지·승인·협력할 뿐이다. 이를 두고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같은 날 브리핑에서 “한미 정상의 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에서 건조하는 게 전제였다”며 “우리 핵잠수함을 미국에서 건조하는 방안은 거론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같은 날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며 “국내 건조 장소 합의는 팩트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기자들 앞에서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을 발표하면서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건조될 것”이라며 “미국 조선업이 곧 대대적인 부활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핵잠수함이 건조되려면, 산적한 현안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 팩트시트엔 건조 장소가 적시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명시해 발표했기 때문에, 미국이 순순히 양보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같은 회담 결과를 두고 양국의 주장이 엇갈리는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다.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및 핵연료 재처리엔 ▲한미 원자력 협정 부합 ▲미국의 법적 요건 준수 ▲한국의 평화적 이용 등 단서가 붙는다. 기술 이전 과정에도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핵잠수함 보유국은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인도 등 6개국이다.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30일 “미국이 핵잠수함 기술을 공유한 사례는 1950년대 최우방국 영국과 협력한 사례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미국의 핵잠수함 기술은 미군이 보유한 가장 민감하고 철저히 보호돼온 기술”이라며 “가까운 동맹인 영국·호주와 체결한 핵잠수함 협정에서도 직접 기술 관련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우리에겐 우라늄 농축·재처리 기술이 없어서 미국으로부터 핵연료를 공급받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하지만 연료 공급 장소·방식은 팩트시트에 명시되지 않았다. 연료 공급 방법을 확보하지 못하면, 핵잠수함을 만드는 의미가 없다. 핵잠 건조 추상적인데 “고정밀지도 내놔” 발 빠르게 비핵 3원칙 수정하려는 일본 미국의 법률 개정 절차도 거쳐야 한다. 미국 원자력법은 ‘미국이 다른 나라와 군사적 목적의 원자력 협력을 하려면, 원자력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미 원자력 협정을 개정한 후 미국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국제 무기 거래 규정도 상원의 동의를 얻어 개정해야 한다. 원자력 협정 개정이 팩트시트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미국 에너지부의 반대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미국 일각에서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한단 것이다.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미국에 고정밀지도를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팩트시트엔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포함한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정책에 있어 미국 기업이 차별당하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위치·재보험·개인정보에 대한 것을 포함해 정보의 국경 간 이전을 원활하게 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도 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온라인플랫폼의 ▲자사 우대 ▲끼워팔기 ▲멀티호밍 제한 등을 막는 내용이 담긴 우리의 온플법 제정을 반대했다. 팩트시트를 따르면, 미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가 어려워진다. 아울러 우리는 구글·애플이 요청하는 1:5000 축척 고정밀지도 국외 반출 요청을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정부는 애플이 요청한 지도 반출 여부를 다음 달에, 구글의 요청은 내년 2월 결정할 예정이다. 팩트시트에 게재된 합의 사항대로라면, 애플·구글의 요청을 수용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 박성훈 수석대변인은 지난 15일 논평을 통해 팩트시트 속 위험요소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박 대변인은 “정부는 ‘농·축산물 개방은 없다’고 말해 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대로 농·축산물 개방 문구가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고정밀 지도 반출 등 대한민국의 디지털 주권과 직결된 사안까지 미국의 요구를 반영해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반도체 관세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보다 불리하지 않게 한다’는 모호한 문구만 있다”며 “경쟁국 대만과 비교해 어떻게 적용할지 등 구체적인 내용은 팩트 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50억달러(약 36조7183억원) 규모의 미국산 군사 장비를 5년 동안 구매하고, 주한미군에 대해 330억달러(약 48조4682억원)를 포괄적으로 지원하면, 천문학적인 재정 부담을 떠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핵잠수함 건조 과정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라서 장밋빛 전망만 내세울 때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고정밀지도 반출 가능성 실제로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가 실현되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해서 실질은 아직 불투명하다”며 “선언이 지나치게 앞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는 핵잠수함 나비효과가 일본으로 번졌단 점이다.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자, 일본 정치권도 크게 술렁였다.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은 지난 12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미국·중국은 이미 핵잠수함을 갖고 있고, 지금은 핵잠수함을 보유하지 않은 한국·호주가 앞으로 보유하게 된다”며 “일본의 억지력·대응력을 강화하려면, 전고체·연료전지·원자력 등 다양한 동력원에 대해 폭넓게 논의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일본은 1967년 사토 에이사쿠 당시 총리가 선언했던 비핵 3원칙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비핵 3원칙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선언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일찍부터 핵무기 반입 금지 방침 완화를 주장했다.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도 같은 날 “현 시점에선 재검토 여부를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국회 연설에서 “내년 중 3대 안보 문서 개정을 위해 검토를 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3대 안보 문서는 ▲국가안보 전략 ▲국가방위 전략 ▲방위력 정비 계획 등을 말한다. 여기엔 비핵 3원칙이 모두 포함돼있다. 일본은 이미 지난 2022년 “반격 능력을 보유하고, 장거리 미사일 전력을 향상한다”는 내용을 3대 안보 문서에 포함했다. 묘한 것은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이 일본 국내 정치구도까지 뒤흔들 가능성이 있단 것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카이치 총리가 선출될 당시 라이벌이었다. 지난달 4일 진행된 자민당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183표(31.1%)를 얻었고, 고이즈미 방위상은 164표(27.8%)를 얻었다. 결선투표에선 다카이치 총리가 185표(54.3%)를, 고이즈미 방위상은 156표(45.7%)에 머물렀다. 하마터면 다카이치 총리는 자민당 총재·총리로 선출되지 못할 뻔했다. 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로 통하는 다카이치 총리에 반발한 공명당이 지난달 10일 자민당과의 연정에서 탈퇴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명당 사이토 데쓰오 대표는 고이즈미 방위상에 대해선 “정치자금 규제와 관련된 공명당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면서 호평했다. 고이즈미 방위상도 “지금까지 정책 실현에 대해 힘써 주신 것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화답했다. 미일 협력 중국 견제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0일 기적적으로 일본유신회와의 각외 협력 형태의 연립 정권 구성에 합의했다. 각외 협력은 연립 정권 구성엔 합의하지만, 내각엔 참여하지 않는 형태를 말한다. 일본유신회가 제시한 조건은 ▲오사카 부수도 지정 구상 수용 ▲국회의원 정원 10% 감축 ▲기업·단체 후원 폐지 ▲평화 헌법 개정 ▲방위력 강화 등이었다. 자민당과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모두 수용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1일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했다. 가장 큰 정치적 의미는 ‘당내 정적 포용’이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전혀 없는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해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정반대의 의미를 강조하는 해석도 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없는 고이즈미를 현안이 산적한 방위성 장관으로 임명해 자멸을 유도한다”는 취지의 해석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주어진 현안은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 ▲자주적 방위력 강화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 ▲방위 장비 수출 운용지침 폐지 등이다. 이중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은 ‘중국 견제’라는 미국·일본의 공통 이해관계로부터 시작됐다. 일본은 군사력을 강화해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역할을 맡으려고 한다. 미국은 일본의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더 효율적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 문제는 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 “방위비를 GDP(국내총생산)의 3.5%로 증액하라”고 요구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8일 진행된 미일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위비 증액·방위력 강화 방침을 설명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음 날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을 만나 “방위비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오는 2028년 3월까지 방위비를 GDP의 2%까지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방위 정책과 관련해 국내 정세와 가장 민감하게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을 곤란하게 할 사안이 있다. 바로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이다. 일본 오키나와현 소재 후텐마 기지는 기나완시 시가지 한복판에서 시 면적의 1/4을 차지하고 있다. 후텐마 기지는 1945년 건설됐고, 일본에서 크고 작은 논란을 일으켰다. 오키나와현의 주민 중 상당수는 미군의 범죄와 소음 피해 등을 이유로 기지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팩트시트’ 고이즈미 날개 다나 견제 압박 와중에 뜻밖의 호재 지난 2004년엔 후텐마 기지 소속 헬리콥터가 오키나와국제대학에 추락하는 등 사고도 여러 번 발생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편입된 시점은 1879년이었다. 1945년부터 1972년까진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따라서 오키나와에선 반미 감정이 강하고, 자민당 지지율이 낮은 편이다. 후텐마 기지와 관련해서도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섬 내 나고시 헤노코 이전을 추진했지만, 오키나와 현·주민의 반대가 강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23년엔 다마키 데니 현지사가 방위성이 신청한 비행장 설계 변경 신청을 승인하지 않고 공사 중단을 요구했다.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은 일본의 역사적 맥락과 맞물려 수십년 넘게 해결되지 못한 사안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중국 견제를 위한 새 안보 질서와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정치적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 2019년 고이즈미 방위상을 환경상으로 발탁했다. 이 임명에 대해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무게를 키우면서도, 문제가 발생하면 그를 정치적으로 낙마시킬 수도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의 아버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퇴임 이후 강력한 원자력 발전소 폐지론자가 됐다. “아버지의 활동이 아들의 정치적 미래를 흐리게 할 수 있어 고이즈미 방위상을 견제하는 묘수”란 평가도 있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기후 변화 문제는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등 적당히 괴상한 발언을 하는 등 바보 행세를 하면서 견제를 피했다. 한동안 일본에선 고이즈미 방위상이 진짜로 바보인지, 바보인 척 연기를 하는지 장난 섞인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후 고이즈미 방위상은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고노 다로 전 외상과 연합해 이시바 내각 탄생에 큰 공을 세웠다. 이어 농림수산상으로서 쌀값 폭등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지난 2023년엔 자민당 내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조기 의회 해산 및 총선거 진행을 적극적으로 제안한 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자민당은 중의원 과반에 미달하는 의석을 얻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더 큰 패배를 당하기 전에 적절한 시점에서 중의원 해산을 건의했다”며 긍정적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방위상 취임 이후엔 어떻게 구 아베파·아소파의 견제를 피할 것인지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한 사안은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견제 수위를 낮추면서 자민당·내각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뜻밖의 호재로 다가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이 일본의 핵잠수함 도입을 주도한다면,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가 될 수도 있다. 견제 회피 일거양득 우리의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일본 정치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사안이 된 것이다. 만약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불확실해지면, 이재명정부는 이 때문에 더욱 큰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일본의 군비 증강에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미래를 위한 발판을 제공한 것”이란 비판이 따라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핵잠수함 나비효과는 이렇게 일본으로 번졌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