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무장’ 경찰용품 거래 백태

“수갑 팔아요” 아무나 구입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최근 ‘치안과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 제복과 경찰 용품이 인터넷을 통해 아무런 제재 없이 일반인들에게 손쉽게 거래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권력의 신뢰 하락과 범죄에 악용될 우려도 제기된다.
 

지난 2015년 경찰 제복 및 경찰 장비의 규제에 관한 법률 시행으로 이러한 불법적인 거래 등을 철저하게 규제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사각지대’는 그대로 남아 있다.

5만원이면…

경찰복과 경찰 용품은 전문 쇼핑몰서 일반 옷을 인터넷서 구입하듯 사이즈 선택부터 결제까지 간편하게 구매 혹은 대여할 수 있다. 의상대여 전문업체 A사에선 부가세 포함 7만7000원에 경찰 남방, 모자, 배지, 넥타이, 호루라기까지 경찰 제복 ‘풀세트’를 2박3일간 대여하고 있다. 

중고품으로는 20만원 상당에 구매할 수도 있다. 거래는 무통장 입금이나 신용카드 결제로 이뤄지며 옷은 택배로 배송된다. 이 업체 판매자는 “서울 서초구에 있는 매장에 직접 방문해 보고 사 가도 된다”며 “경찰 납품하는 회사서 가져와 대여·판매하는 것”이라며 품질을 자랑했다.

실제 경찰들이 입는 제복과 동일하진 않더라도 유사 제복 또한 인터넷을 통해 2만∼3만원의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도 있다. 이처럼 경찰 제복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상황서 경찰 사칭 범죄가 이뤄지고 있어 제복 관리에 주의가 필요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서도 ‘수갑 판매’ ‘수갑 구매’ 등을 검색하면 수백개의 판매글을 찾을 수 있다. 이중에는 “경찰 수갑과 똑같다” “강력한 재질로 돼있다” 등의 소개글도 쉽게 포착할 수 있다.

현행 경찰 제복 및 경찰 장비의 규제에 관한 법률 제9조에 따르면 유사 경찰 제복·장비의 제조·판매, 사용 등을 금지하고 있다. 이를 위반할 경우 구매자는 6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300만원 이하의 벌금, 판매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이 법이 규정한 경찰 제복에는 옷뿐 아니라 계급장과 어깨 휘장 등도 포함되며, 경찰 장비의 경우 수갑과 방패, 권총 허리띠, 경찰차량 등이 일반인 사용금지 대상이다.

하지만 인터넷상에선 암암리에 유사 경찰용품이 버젓이 거래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구입시엔 별다른 신원확인 절차도 필요없다. 한 온라인 판매 사이트에는 ‘진짜수갑’ ‘경찰수갑’ 등의 제목으로 소개 글과 수갑 실물 사진, 장착 사진 등도 확인할 수 있다. 인터넷 주문은 누구나 가능하다.

호신용품이라는 이름으로 경찰장비를 판매하기도 하는데 판매물품은 수갑부터 방탄복, 교통지시봉, 무전기, 시위진압용 방패 등까지 다양하다. 경찰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방패는 한 사이트서 ‘경찰’ ‘POLICE’ 등 글자가 찍힌 그대로 크기와 성능에 따라 8만∼22만원에 판매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경찰’이 찍힌 방검복은 11만원, 2∼4단봉은 3만2000∼9만원, 수갑은 4만5000∼8만원 등의 가격으로 손쉽게 구할 수 있다.
 

판매자는 “이중 잠금기능과 2중날 기어가 있다”고 제품을 광고하면서 “사용자의 불법사용에 대해 판매자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밝혔다. 수갑은 그동안 꾸준히 판매돼온 것으로 파악된다. 구매자들의 사용 후기글에는 ‘완벽한 경찰수갑입니다. 감사합니다’ ‘호신용으로 갖고 다니기 편하다’ 등의 글이 올라와 있다.


유사 경찰용품은 수갑뿐 아니라 경찰 권총 허리띠, 경찰 계급장, 경찰마크 등도 1만원미만의 가격에 쉽게 구입할 수 있다. 모두 법적으로 판매가 금지된 물품들이다.

법망 피해 암암리에…판매 사이트 수십개
수갑 4만8000원, 계급장·경찰패치 1만원

문제는 이렇게 구매한 유사 경찰용품 등이 범죄에 활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1월에는 중국 여성과 교제하다가 이별을 통보받자 납치, 성폭행한 강모(44)씨가 경찰에 붙잡혔다. 피해 중국 여성은 강씨가 인터넷서 구입한 유사 수갑, 무전기 등을 보여 주며 경찰관이라는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다.

지난 4월에는 새벽시간에 편의점에 경찰관 비옷을 입고 들어가 금품을 훔친 최모(24)씨가 경찰에 검거되기도 했다. 최씨는 편의점 종업원에게 “주변에 강도사건이 발생했으니 화장실에 숨어라”라고 한 뒤 범죄행각을 벌인 것으로 조사됐다.

또 지난해 12월 인천에선 미리 준비해둔 가스총을 들이대며 경찰관을 사칭한 A씨가 업주 B씨를 위협, 보호비 명목으로 현금 33만원을 빼앗았다. 그보다 전인 11월에는 형사를 사칭해 여고생에게 접근한 뒤 성추행한 30대 남성이 부산 사하경찰서에 입건됐다.

2015년 11월에는 수갑에 가짜 경찰 신분증까지 갖춘 교회 전도사가 경찰을 사칭해 인터넷 채팅 사이트서 만난 10대 여학생을 성폭행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경찰 제복 및 경찰 장비의 규제에 관한 법률 제9조’는 이러한 경찰용품 등을 통한 경찰 사칭 범죄를 막기 위해 2015년 12월부터 시행됐다. 법에 따르면 유사 경찰 제복·장비는 누구나 제조·판매·대여, 착용·사용 ·휴대 등이 금지된다.

유사가 아닌 실제 경찰 제복·장비 등은 업체가 경찰청 등 관할 기관에 사전 등록을 할 경우 제조·판매·대여가 가능하다. 경찰 공무원은 업체서 장비 등을 구입해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일반인의 경우 처벌을 받는다.

단 예외적으로 영화 촬영, 연극 등의 용도나 교육활동, 광고 등 홍보활동의 용도로는 경찰 제복을 착용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등록 업체에선 판매 과정에 신분확인 절차를 반드시 거치고 있다.

한 경찰용품 판매 업체 관계자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물품을 고르면 직접 가게를 방문하게 한 뒤 신분증 등을 보고 신분확인을 하고 있다”며 “영화촬영의 경우 사업자 등록증 등 증빙서류를 확인한 후 대여를 해주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문제는 신분 확인 절차서도 ‘사각지대’가 생기기 마련이라는 점이다. 영화 촬영 등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경우를 완벽하게 확인할 순 없다는 것도 맹점으로 꼽힌다.

또 다른 경찰용품 판매업체 관계자는 “마음 먹고 서류를 조작해서 오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며 “법 시행 이후 최대한 주의를 하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도 있다”고 토로했다.
 


이밖에 의경 출신 등이 제복을 직접 인터넷 중고거래 사이트에 판매하는 경우도 있다. 의경의 경우 전역시 제복을 반납하거나 폐기하는 게 원칙이지만 외부로 갖고 나가는 경우가 상당한 것으로 파악된다.

한 의경 출신 관계자는 “제복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갖고 나올 수 있다”며 “경찰 직원과 제복이 계급장 등만 다르고 거의 유사해 일반인들은 구별을 못한다. 판매될 경우 범죄에 활용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경찰은 등록업체에 대한 정기점검과 경찰 제복, 용품 등이 외부로 반출되는 일이 없게끔 철저한 관리를 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경찰 관계자는 “법 시행 이후 경찰 용품 등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고 인터넷을 통해 혹시 불법판매를 하고 있는지 제보를 받거나 점검 등을 하고 있다”며 “경찰로 보일 수 있는 유사용품을 팔거나 사고, 사용하는 것은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그는 “경찰들이 사용하고 있는 물품에는 일련번호와 로고가 명시돼있어 일반 물품과 구별이 된다. 만약 이런 물건들이 빠져나가 사용된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며 “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밝혔다.

범죄에 악용


하지만 경찰장비를 공공연히 사이버상에서 판매하는 것에 대해 네티즌들은 ‘이해할 수 없다. 저런 장비를 구입하는 것은 뭔가 의심스럽다’는 반응들을 보이고 있어 대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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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