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21주년 특집6> ‘창업정신’ 지키는 기업들

불황타개, 초심이 답이다

위기입니다. 대한민국 경제가 벼랑 끝에 있습니다.
서민들의 곡소리가 끊일 날이 없습니다.

자연스레 시선은 재계로 돌아갑니다.
나라의 경제에서 기업을 빼곤 얘기가 안 됩니다.
이들 기업에 우리 주머니가 걸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일요시사>는 창간21주년을 맞아 경제 선봉에 선 주요 기업들의 청사진을 공개합니다.
초심, 창업정신서 길을 찾아보고 희망을 꺼내봤습니다. <편집자주>

 

<삼성> ‘사람’에 아낌없이 투자

삼성은 대한민국 경제를 이끌어 나가는 대표 기업이다. 삼성의 매출 규모가 국내 총생산의 20% 수준이니 무리한 평가는 아니다. 삼성은 끊임없는 혁신으로 대한민국 기업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밑바탕에 호암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있었다. 

이 창업주는 1938년 29세의 나이에 삼성상회를 세워 그룹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 창업주의 경영이념을 한 단어로 정의하면 ‘사람’이다. 이 창업주는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인재 등용에 아낌없는 투자를 했다. 그는 평소에도 사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인재 중심의 경영철학

그는 “일생의 80%를 인재 육성에 힘썼다”고 말할 만큼 사람을 중시했다. ‘물건을 내줘도 사람은 내줄 수 없다’는 그의 어록에서 인재 중심의 경영 철학을 읽을 수 있다. 결정적 장면은 후계 승계였다. 통상의 장자승계 원칙에서 벗어나 3남이었던 이건희 회장을 파격적으로 낙점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경영철학은 옳았다. 이 회장은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지난 3월 기준 삼성그룹의 대표 계열사 삼성전자의 시총은 세계 16위를 기록하며 수많은 글로벌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 창업주의 인재를 중요시하는 사내 문화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인재라고 판단되는 인사의 파격 등용은 삼성에서 특별한 이슈가 아니다. 삼성이 여전히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이다.
 

<현대차> 도전정신으로 똘똘 뭉쳐

국내 수출 효자상품을 꼽으라면 자동차는 항상 거론된다. 업계 맏형 현대자동차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차는 지난해에만 22조3000억원이 넘는 제품을 수출해 나라살림에 보탬이 됐다. 완성차를 만들 수 있는 나라가 몇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자랑스러운 우리 기업 가운데 하나다. 

현대차가 치열한 세계무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창업 초기부터 내려오는 경영 철학 덕분이다. 창업주인 아산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도전정신을 강조했다. 정 명예회장의 삶 자체가 ‘도전의 역사’였다. 1915년 태어난 정 명예회장은 돈이 없어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을 만큼 가난했다.


‘도전’은 현재진행형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 명예회장은 끊임없이 도전했다. 정 명예회장은 막노동부터 쌀집 배달원까지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도전의 과정은 험난했다. 1941년 빚을 내 시작한 자동차수리 공장은 사업 시작 한달 만에 화재가 발생해 접었다. 

그나마 다시 빚을 내 차린 자동차수리 공장마저 일제강점기 ‘기업정리령’으로 일본에 빼앗겼다. 그러나 정 명예회장은 좌절하지 않았다. 결국 1946년 현대자동차의 모체라고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공업사 설립을 통해 현대그룹으로까지 성장시킬 수 있었다. 

정 명예회장의 도전정신은 그의 아들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계승했다. 정 명예회장 곁에서 도전의 가치를 배운 그이기에 현대차의 ‘도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SK> 끊임없이 혁신 또 혁신

SK에 흐르고 있는 경영 이념은 ‘혁신’다. SK 창업주 고 최종건 회장은 혁신적인 사업가였다. 최 회장은 1953년 SK의 기반이 되는 선경직물을 창립했다. 폐허의 직물공장이 혁신적인 기업가를 만나자 성장했다. 

최 회장은 ‘남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경쟁이 안 된다’며 혁신을 경영에 접목했다. 그는 자금 압박에도 품질 혁신과 신제품 개발에 공을 들였다. 제품제일주의자라는 평가는 이 같은 배경에서 나왔다. 

아울러 최 회장은 ‘관계’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는 기업가였다. 그는 “자신이 기업을 운영하고 있지만 공장과 재산은 내 것이 아니고 국민의 것”이라고 강조했다.

“남의 것으론 경쟁이 안돼”

회사 운영에 있어서 나와 상대방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폐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사업가로서의 열정을 보였다. 그의 나이 48세. 젊은 나이였다. 하지만 최 회장이 닦아 놓은 기반을 통해 SK는 재계 3위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 

그 사이 그의 경영 이념은 2대 최종현 회장과 현 최태원 회장을 거치면서 더 세련되고 공고해졌다. 최태원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새해 우리는 더 행복한 미래를 만들기 위한 변화와 혁신을 강력히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초심을 유지하는 SK의 성장에 눈길이 쏠리고 있다.

 

<LG> 소비자 마음을 움직이다


올해 창립 70주년을 맞은 LG는 우호적이지 않은 경영 환경 속에서도 지난해 150조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70년이란 긴 시간동안 성장한 데는 소비자와의 신뢰가 있었다. LG 창업주 연암 구인회 회장의 경영철학이 소비자에게 통한 것이다.

 구 회장의 부친은 그에게 “남과 화복하게 지내 신용을 얻는 사람이 돼라”고 조언했다. 이는 구 회장의 경영이념이 됐다. ‘럭키치약’ 일화는 구 회장의 철학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에피소드다. 구 회장은 광복 후 일본이 버린 화학공장을 인수해 LG의 모태가 되는 ‘락희화학공업사’를 1947년 세웠다.

신뢰·신용이 돈 버는 길

구 회장은 자사의 제품 ‘럭키치약’이 국내 시장을 독점하는 상황에서도 “이윤이 많지 않아도 좋다. 봉사하는 자세를 지키면 럭키의 신용이 소비자에게 남고, 그것이 진실로 돈을 버는 길이 될 것”이라며 무리한 가격인상을 자제했다. 구 회장의 경영철학은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였다. 

LG는 이후 소비자와의 신뢰를 바탕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뤄 재계 상위 그룹이 됐다. LG의 신뢰 경영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LG를 이끌고 있는 구본무 회장은 창립 70주년 기념 최고경영진과의 자리에서 “창업 정신을 고취해 더욱 더 신뢰와 존경을 받는 기업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존경은 신뢰서 나온다. 초심을 이어간다면 불가능한 꿈이 아니기에 기대가 모아진다.

 

<롯데> 화려함 버리고 실리를


롯데는 다양한 제품과 서비스로 국민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 덕분에 5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 만에 재계 5위까지 오를 수 있었다. 신격호 총괄회장의 ‘거화취실’(화려함 대신 실리를 취한다) 경영전략이 먹혀든 셈이다.

 1922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신 총괄회장은 배움을 갈망하던 1942년 관부 연락선을 타고 도일해 신문과 우유배달 등으로 고학생활을 시작해 한국의 큰 기업가로 성장했다. 신 총괄회장은 고객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100년 향해 거침없이 항해

전시였던 당시 일본에는 미군이 주둔하면서 껌이 인기를 끌었다. 신 총괄회장은 이를 통해 자본금 100만엔, 종업원 10명 규모의 롯데를 1948년 설립했다. 1967년에는 롯데제과를 창립하며 모국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창립 후 50년동안 롯데는 끊임없이 고객의 니즈를 찾아다녔다. 유통, 건설, 화학, 금융, 호텔 등 많은 분야에 걸쳐 고객의 필요한 아이템을 공략했고 준수한 성공을 거뒀다. 그 배경에는 화려함보다는 실리를 취하는 경영전략이 있었다. 

현재는 그의 아들 신동빈 회장이 그의 경영이념을 발전시켜 롯데그룹을 이끌고 있다.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은 롯데는 고객과 함께 일상의 가치를 창조하는 롯데로 거듭날 것을 천명했다. 100년 기업을 향해 거침없이 나가고 있는 롯데의 행보에 눈길이 쏠린다.

 

<포스코> 대충 대충은 없다

포스코는 세계적 규모의 철강회사다. 세계무대서 포스코의 제품은 고급 이미지가 있다. 창립 초기 사업성이 낮다는 이유로 홀대 당하던 당시와 비교하면 괄목할만한 성장이다. 올해로 49주년을 맞은 포스코는 국내 산업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박태준 명예회장의 뚝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68년 창립 당시 포항제철소(현 포스코)에는 자본, 기술, 경험, 자원이 없는 상황이었다. 박 명예회장은 특유의 뚝심과 완벽주의로 포스코를 세계적 기업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특히 박 명예회장은 대충대충 일하는 것을 싫어했다.

완벽주의로 한국산업 이바지

 “나는 ‘대충 일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라는 포스코 정신을 만들었다. 이후 종업원들의 일하는 태도가 바뀌는 것을 보고 황홀했다”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부실 공사현장을 폭파시킨 이야기는 그의 완벽주의 정신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다. 

박 명예회장은 1977년 제3기 기초 공사 현장을 시찰하던 도중 부실 공사의 흔적을 발견했다. 확인 결과 시공사와 감독책임자가 공모해 부실공사를 진행한 사실이 밝혀졌다. 박 명예회장은 시공사와 감독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 그들 눈앞에서 부실한 기초 공사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켰다. 

이런 뚝심과 완벽주의 정신은 오늘의 포스코를 있게 만들었다. 포스코는 그의 공로를 기려 포스코청암상을 수여하고 있다. 그의 정신을 잊지 않는 한 포스코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한화> 국민을 먼저 생각

한화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방위산업 기업이다. 한화그룹 창업주 고 김종희 회장이 1952년 한국화약을 설립해 한화의 기틀을 닦았다. 사업이 한국의 국방과 직결되는 기업이니 만큼 김 회장은 국민과 국가에 대한 마음이 컸다.

 이리(현 익산)서 발생한 사건은 그가 국민을 생각하는 진정성을 보여준다. 1977년 화약을 싣고 가던 기차가 호송원의 부주의로 익산에서 폭발했다. 당시 사고로 사망자 59명, 부상자 1343명에 달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함께 성장하는 진정성 유지

김 회장은 책임 유무를 떠나 진정으로 국민들에 대한 보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시 그가 가지고 있던 전 재산 90억원을 헌납하기로 한 것. 당황한 것은 정부 관료들이었다. 정부 관료들은 한국 방위산업이 흔들리까 우려해 김 회장을 설득했다. 

오랜 설득 끝에 김 회장은 90억원을 30억원씩 3년에 걸쳐 내기로 했다. 그러나 이 일로도 마음의 부담감을 떨쳐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그는 과로와 병환으로 1981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국민을 생각하는 창업정신은 한화에 남아 여전히 대한민국의 방위산업을 책임지고 있다.
 

<한진> 나눔을 바탕으로 동행

한진은 1945년 인천서 한진상사로 출발했다. 운수업을 중심으로 재계 10위권까지 올랐다. 한진의 창업주 고 조중훈 회장은 인간존중과 나눔경영을 강조했다. 이 같은 경영철학은 그의 삶에서 나왔다. 

조 회장은 6·25전쟁 직후 도로서 차가 고장나 애를 먹는 외국인 여성을 발견했다. 그는 측은지심이 들었고 1시간이 넘는 시간을 들여 차를 수리해줬다. 여성이 그에게 사례비를 건네려고 했으나 그는 “이런 친절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흔한 일”이라며 거절했다. 

인간존중·인간중심의 경영

하지만 그 여성이 주소라도 알려달라고 사정했다. 주소를 알려줬더니 그 여성과 남편이 찾아와 답례를 하고 싶다고 또다시 간청했다. 알고보니 여성의 남편은 미8군 사령관이었다. 조 회장은 답례를 원한다면 미8군의 폐차를 인수할 권리를 줄 수 있느냐고 그에게 부탁했다. 여성의 남편에게는 어려운 부탁이 아니었다. 

그는 조 회장의 부탁을 들어줬고 그것이 한진의 시작이었다. 이 같은 배경서 한진은 인간존중과 나눔을 바탕으로 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그 결과 한진은 자산 37조(2014년 기준), 매출액 23조의 물류기업으로 성장했다. 선대의 가르침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두산> ‘최장수’ 비결은 진화

지난해 창립 120주년을 맞은 두산은 국내 기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기업이다. 한국 기업의 평균수명이 30년이 채 안 되는 환경에서 120년 넘게 경영을 이어오고 있으니 그 비결 자체가 재계의 관심이다. 

두산은 고 박승직 창업주가 1896년 서울 종로4가에 설립한 ‘박승직 상점’을 모태로 성장했다. 그는 노력정신을 강조했다. 박 창업주는 노력하면 평범함이 비범함으로 바뀐다고 믿었다. 노력은 혁신으로 이어졌다. 두산은 이 정신을 120년 동안 잊지 않았다.

꾸준히 미래 성장동력 발굴

화장품 박가분의 인기로 사업기반을 닦은 두산은 맥주사업으로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1991년 페놀오염 사태가 터지면서 변화가 필요했다. 소비재 중심 기업에서 중후장대 사업 중심 기업으로 변화를 꾀한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2001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인수를 시작으로 중공업 중심 그룹으로 변신했다. 현재까지도 이 같은 노력은 이어지고 있다. 현 두산을 이끌고 있는 박정원 회장은 미래 성장 동력 발굴을 위해 에너지저장장치(ESS)와 가스터빈 등을 미래 성장 동력으로 낙점해 진행하고 있는 것. 

국내 최고(最古)기업 두산. 더 멀리 가기 위해서 두산은 박 창업주의 경영철학을 잊지 않고 있다.

 

<부영> 내실 우선 ‘세발자전거론’

1983년 자본금 5000만원으로 시작한 부영은 30년 남짓 시간이 흘러 재계 순위 16위, 총자산 20조원 기업으로 팽창했다. 막강한 현금 동원력을 앞세워 대형 부동산 자산을 사들이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경기 불황에 대기업들이 줄줄이 투자를 줄이고 구조조정에 나서거나 부동산 자산을 매각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부영 고공행진의 밑바탕에는 창업주인 이중근 회장의 경영철학인 ‘세발자전거’론이 녹아 있다. 세발자전거는 두발자전거보다 느리고 투박하지만 잘 넘어지지 않고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다. 위험에 대처했을 때 손쉽게 정치하기도 용이하다.

안정적으로 한걸음씩 전진

세발자전거론은 이 회장이 경험을 통해 터득한 것이다. 이 회장은 기업의 목표와 책무는 성장보다는 존재 자체라고 생각한다. 그는 “기업은 직원들의 안정적인 생계를 위해 조심스러운 경영을 통해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누차 강조해왔다. 

세발자전거론서 알 수 있듯이 부영은 급속한 성장보다는 안정적이고 내실 있는 경영이야말로 실패 없는 기업을 만드는 지름길이라 믿는다. 1등을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치우치지 않고 꾸준히 성장한다는 생각 즉, 최고보다는 최선을 추구하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세발자전거는 부영의 사업영역인 부동산, 금융, 건설의 세 축을 의미하기도 한다.
 

<대림> 기본과 원칙의 ‘한숲정신’

1939년 인천 부평에서 부림상회로 출발한 대림은 이재준 창업주와 그의 고종사촌형 이석구 전 대림 사장, 이석구의 매제 원장희 등 3명의 손에서 탄생했다. 창업 당시 3만원의 자본금으로 7명의 직원과 함께 출발한 부림상회는 해방정국과 한국전쟁 복구사업, 1960∼70년대 경제개발계획, 1970∼80년대 중동신화와 중화학공업 개발사업을 거치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건설사로 우뚝 섰다. 

대림의 경영철학은 ‘한숲’ 정신이다. 사명(대림·大林)의 순 우리말인 한숲은 ‘쾌적하고 풍요로운 삶을 창출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격변하는 경영환경에 적응

1947년 부림상회에서 ‘대림’으로 상호를 변경한 것부터 창업정신의 발로였으며 격변하는 경영환경에 적응하며 규모를 키워오는 동안 한숲정신은 대림의 근간이 됐다. 대림은 1962년 건설업체 시공능력평가제도가 생긴 이래 55년 연속 10대 건설사의 위상을 지켜오고 있다. 

재계는 이런 대림에 대해 ‘한숲정신’을 바탕으로 한 내실 경영이라고 평가한다. 한숲정신에 입각해 대림은 무리한 사업 확장과 불확실한 투자에 매진하기보다 기본과 원칙에 입각한 위기관리와 환경분석을 통해 수많은 국내외 경제 위기를 극복했다. 

국내 최초 해외 건설 외화 획득, 업계 최초 기술연구소 설립, 국내 최초 아파트 브랜드 론칭 등 대한민국 건설 혁신의 역사를 이뤘다.

 

<금호아시아나> 역경에 굴하지 않는다

금호아시아나의 역사는 고 박인천 창업주가 1946년 광주택시를 설립, 운송업에 뛰어들면서 시작됐다. 박 창업주는 46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운송업에 도전장을 던지면서 제 2인생을 설계했다.

박 창업주의 호에서 사명을 딴 금호아시아나는 광복 후의 피폐한 경제상황과 6·25 전쟁 등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육상 및 항공운송·건설·레저 등을 아우르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박 창업주는 정도경영을 바탕으로 종업원과 이웃을 배려하는 인간존중 경영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연이은 사업의 실패 속에서도 끝없는 도전정신을 바탕으로 온갖 역경을 극복하며 집념과 불굴의 기업가정신을 대표한다고 평가받고 있다.

가치를 창출하는 아름다운 기업

금호아시아나는 박 창업주의 뜻을 받들어 ‘기업을 통한 국가공헌 및 사회기여’라는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금호아시아나 이해관계자들의 삶의 질 향상’을 기치로 내걸고 있다. 여기서 이해관계자는 직원, 주주, 협력사, 사회를 지칭하며 이를 통해 업계 최고의 가치를 창출하는 ‘아름다운 기업’을 지향하고 있다. 

금호아시아나가 말하는 아름다운 기업이란 지탄을 받지 않고 약속한 바를 지키며 건실하고 신뢰받는 기업이다. 사회적 책임과 기업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공헌한다는 뜻도 포함한다. 이 같은 기조를 바탕으로 금호아시아나는 창립 이래 수많은 시련에 봉착하면서도 집념과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난관을 이겨냈다. 

 

<효성> 기술이 곧 경쟁력

효성은 1962년 만들어진 효성물산이 시초다. 조홍제 창업주는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함께 일제 강점기 삼성물산에 공동 투자 후 삼성물산 부사장, 제일모직 부사장, 제일제당 사장을 역임했으나 삼성을 떠나 효성물산을 독자경영하며 독립했다. 

효성의 경영철학 밑바탕에는 ‘기술’이라는 단어가 자리 잡고 있다. 조 창업주는 기술력을 갖춰야 한다는 지론 하에 당시 울산에 최신시설의 공장을 준공, 세계 정상급 나일론 원사 생산기지를 건설했다. 1970년에는 한일나이론을 인수합병 하는 등 국내 최대의 화섬업체라는 위상을 확보했다.

“선도해야 나아간다” 강조

창업주의 뒤를 이은 조석래 전 회장은 재계 오너 가운데서 손꼽히는 기술 경영인이었다. 조 전 회장은 ‘기술이 곧 경쟁력’이라는 신념 아래 수많은 일류 기술을 개발해 효성이 세계선도 기업으로 도약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효성이 100년 기업으로 나아가려면 혁신을 선도하는 기업이 돼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기술이 중요하다는 지론을 펼쳐왔다. 

지난해 말 조석래 전 회장의 뒤를 이어 받은 조현준 회장 역시 기술을 최우선하던 선대의 뜻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취임사에서 “선대부터 이어진 기술 중시 경영철학과 기술 경쟁력이 효성 임직원들을 통해 이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코오롱> 모두 잘사는 ‘상지상론’

“나는 동포에게 헐하고 질긴 의복을 입히고, 부녀자를 빨래의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않고 편하게 살 수 있는 생애로 전환시키려 했다” 섬유산업의 선구자였던 코오롱그룹 창업주 이원만 회장은 이 신념을 가지고 코오롱의 기반을 닦았다. 

1954년 아들 우정 이동찬을 통해 개명상사를 설립해 나일론을 유통하면서 코오롱의 역사가 시작됐다. 사업이 커지자 이 회장은 직접 공장을 세워 나일론사를 생산했다. 사업은 성공가도를 달렸고 그룹은 60년을 쉼 없이 달려오며 섬유산업을 이끌었다. 이 회장은 상대방과 내가 모두 웃는 경영을 지향했다.

국민의 삶을 풍요롭게 

이 회장은 ‘상지상’론을 펼쳤다. 국가와 개인이 모두 이익이 되는 경영을 상지상으로 분류했다. 국가와 개인이 모두 피해를 입는 경영은 하지하로 판단했다. 그러면서 국가와 개인에 모두 이익이 되는 경영을 펼칠 것을 임직원들에게 강조했다. 

그의 경영 철학은 단순히 한 기업에 머문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해 구로동 수출산업공업단지 조성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코오롱은 현재 고객의 삶을 풍요롭게 하겠다는 경영 이념아래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는 패션, 건설, 유통, 환경, 자동차 부품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이 회장의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SPC> 정도경영과 품질경영

SPC는 1945년 상미당으로 시작해 제빵업계를 선도하고 있다. SPC는 정도경영을 최고의 경영원칙으로 삼고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이는 창업주 고 허창성 회장의 경영철학이기도 하다. 1963년 삼립제과 공장서 허 회장은 새로 출시할 빵의 원가를 놓고 직원들 간 격론이 벌어지자 원가가 오르더라도 품질을 높이라고 지시했다. 

허 회장은 원가를 높여 품질이 좋아지면 소비자의 만족도가 올라가 더 큰 이윤을 남길 수 있다고 믿었다.

정직·혁신·협업이 핵심 가치

허 회장의 판단은 옳았다. 허 회장이 내놓은 빵은 고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허 회장의 경영철학은 SPC를 제빵업계 1위 그룹으로 만든 원동력이 됐다. 차남인 허영인 회장도 선대 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회사를 이끌고 있다. 

정도 경영의 핵심 가치는 정직, 혁신, 협업이다. 기본에 충실하고 변화를 추구하며, 다양성을 존중하면 근본적으로 고객과 회사가 동반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SPC의 이 같은 경영철학 덕분에 지속적인 성장을 이어갈 수 있었다. 

지난해 경쟁업체의 역성장에도 불구하고 나홀로 성장세를 이어갔다. SPC는 고객 만족 최우선이라는 가치를 입증하고 있다.

 

<한샘> 고객이 만족할 때까지

1970년 부엌가구 전문 회사로 출발한 한샘은 국내 홈인테리어부문 시장을 선도해나가고 있다. 한샘의 저력은 창업주 조창걸 명예회장에서 시작된다. 그는 부엌이라는 개념조차 낯설던 시절 부엌에 가구라는 개념을 추가하면서 시장을 선도했다. 

이후 한샘은 침실, 거실, 욕실 등 주택의 각 공간에 가구와 기기, 소품, 페브릭 등을 제공하는 토탈 홈 인테리어 기업으로 거듭났다. 현대인에게 집은 재충전의 공간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말이다. 고객의 반응이 좋았다. 

현재 한샘은 부엌가구는 물론 종합 가구 인테리어 분야에서 1위 기업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부엌가구는 이미 세계적인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믿음이 바탕…합리성 중시

조 명예회장은 합리적인 사고를 갖춘 인물이라는 것이 재계의 평이다. 한샘은 재계에서 보기 드물게 전문경영인 경영을 고수하고 있다. 1994년부터 조 명예회장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최양하 회장이 한샘을 현재까지 이끌고 있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는 평가다. 최 회장 체제에서 한샘은 지속적인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2013년 기준 1조를 간신히 넘기던 매출은 현재 2조에 육박하고 있다. 조 명예회장이 전문경영인을 믿고 신뢰한 결과라는 것이 재계의 평가. 

합리성을 중시하는 한샘의 기업문화가 있는 한 향후 미래가 밝다.

 

<bbq> 치킨으로 한식 세계화

치킨은 한류를 대표하는 음식 가운데 하나다. 1995년 설립된 제너시스bbq(이하 bbq)는 국내 치킨업계 1위를 고수하며 한식의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다. bbq는 창업주 윤홍근 회장의 경영철학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윤 회장은 기업가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만들고, 삶을 편리하고 윤택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른바 상생의 경영을 바탕으로 bbq는 성장했다. 그 결과 회사 설립 1년 만에 100호점, 2년만에 500호점, 4년만에 1000호점을 돌파했다.

가맹점주와 쌍방 무한신뢰

10년 이상 계약을 유지하는 가맹점주들도 많다. 가맹점주들과의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울러 위기 앞에서 과감한 판단을 통해 시장을 선점했다. 그는 “위기라는 단어에 위험과 기회가 존재한다”며 “이 위험을 기회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자만이 희망을 붙잡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실제 그는 창업 얼마 뒤 찾아 온 IMF 당시 외연을 축소하는 업계 분위기와는 달리 공격적인 TV광고를 통해 외연확장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제 그는 한국을 넘어 세계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2020년까지 전세계 5만개의 매장을 내는 것을 목표로 올해도 발 빠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애경> 애인경천 정신으로

1954년 창립된 애경은 애인경천(愛人敬天) 정신이 담긴 기업이다. 채몽인 창업주가 국민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좋은 제품을 만들겠다는 경영철학을 담은 것이다. 하지만 1970년 채 창업주가 사망하자 기업은 일대 위기를 맞았다.

해결사로 나선 것은 장영신 회장이었다. 채 창업주의 아내인 그가 회사경영에 나섰다. 그는 채 창업주의 사망 전까지 경영인으로의 삶을 꿈꿔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가정과 기업을 위해 장 회장이 나서야했다. 전업주부에서 기업가로 변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내·결기로 힘든 시기 버텨

장 회장은 인내와 결기로 힘든 시기를 버텨냈다. 기업 내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던 당시 분위기 속에서 자신보다 나이 많은 회사 중역을 이끌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1985년 영국의 세계 최대 브랜드 유니레버사와 유리한 조건에 합작사를 설립하자 주변의 평가가 바뀌었다. 결국 1987년 호평 속에서 애경의 회장 자리에 올랐다. 

애경은 창립 후 쉽지 않은 길을 걸어왔다. 채 창업주가 세상을 떠난 후 장 회장이 회사를 안정화시킬 때까지 많은 위기를 극복해야했다. 그 사이 애경에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한 가지 지키고 있는 것이 있다. 애인경천 사상이다. 애경은 아 사명처럼 창업초기의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향후 미래가 기대되는 이유다.

 

<서희건설> 느림의 미학

서희건설은 1983년 영대운수로 사업을 시작했다. 1994년 서희건설로 상호명을 바꾸면서 건설업으로 업종을 전환했다. 대표 브랜드는 아파트 브랜드인 스타힐즈다. 서희건설의 창업주는 포항제철(현 포스코) 출신의 이봉관 회장이다. 

이 회장은 느림의 미학을 아는 경영인이었다. 2000년 초 부동산 호황기 때 주택개발 사업으로 수혜를 볼 수 있었지만 이 회장은 안정을 택했다. 쉽게 돈을 버는 만큼 위험도 크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경영행보는 다른 경영인들과 구별된다. 

빠름을 중시하는 경영인들 사이에서 그는 느림을 추구했다. 덕분에 서희건설은 정도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안정적인 성장에 방점

느림의 미학이 결코 수익성을 악화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서희건설의 지난 1분기 매출은 243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7% 줄었지만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33.3% 늘어난 128억원을 기록했다. 재계에서는 이 회장이 직원들에게 주인의식을 심어준 것이 경영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한다. 

실제 서희건설에는 정년퇴직이 없다.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정년퇴직이라는 제도로 나이의 한계를 정하는 것은 난센스라는 입장이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일하고 스스로 체력이 다했다고 느껴질 때 물러나면 되기 때문에 그만큼 직원들은 회사에 대한 주인의식을 갖고 일한다고 믿는 것이다. 

남다른 경영철학으로 건설업계을 누비고 있는 서희건설에 눈길이 쏠리는 이유다.

 

<오뚜기> 선행이 먼저다

지난해 오뚜기의 창업주 함태호 명예회장이 별세했다. 함 명예회장이 떠난 뒤 그의 선행이 알려지면서 소비자들은 오뚜기를 갓뚜기(god+오뚜기)라고 부르며 홍보해주고 있다. 결정적인 장면은 오뚜기 주식의 상속이었다. 

함 명예회장이 현재 오뚜기를 이끌고 있는 함영준 회장에게 남긴 오뚜기 주식은 46만5543주(43.53%)로 당시 주가로 3500억원 규모였다. 예상되는 상속세는 1750억원 수준이었다. 함 회장은 이 돈을 군말 없이 냈다. 물론 상속을 받았으니 상속세를 내는 것이 특별할 것은 없다. 

그러나 편법 절세가 난무하는 재계에서 묵묵히 상속세를 내는 오뚜기의 모습에서 소비자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이 아름답다며 오뚜기의 홍보대사 역할을 하기도 했다.

소비자가 홍보대사 역할

오뚜기의 ‘선행 경영’은 연혁이 깊다. 1992년부터 시작한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 후원 사업을 통해 2016년까지 4242명의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 선물했다. 1996년 설립한 오뚜기재단은 500여명에게 25억원의 장학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함 명예회장은 별세하기 전 1000억원 규모의 주식을 기부하기도 했다. 회사의 이미지가 제고되니 기업의 매출도 올라가는 모양새다. 오뚜기는 지난해 2조원을 돌파했다. 충성 고객의 확보는 기업 경영에서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다. 

오뚜기가 착한 기업이라는 자산으로 성장을 이어갈지 눈길이 쏠리는 대목이다.

 

<동원> 성실하면 성공한다

1969년 자본금 1000만원으로 창립한 동원은 성실한 기업활동으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창업이념으로 하고 있다. 경영이념은 고객에게 기쁨을 주는 경영, 사람을 존중하는 경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경영이다. 이는 20대 때부터 바다를 누벼온 김재철 동원 회장의 경영철학이기도 하다. 

김 회장은 23세였던 1958년 한국 최초의 원양어선 지남호의 실습항해사로 참치잡이를 시작해 27세부터 선장 자격으로 원양어선을 이끌고 인도양과 남태평양을 누볐다. 그는 사소한 실수도 놓치지 않는 완벽주의자였다. 작은 실수에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원양어선에서의 경험이 그를 완벽주의자로 만들었다.

미래 비전을 그물질

김 회장은 ‘무대론’을 통해 자신의 경영방식을 강조했다. 그는 “회사를 무대에 비유해 경영자는 일종의 연출자로서 뛰어난 연출과 무대를 제공하고, 임직원과 구성원들은 일종의 배우 역할로 무대에서 성실한 연기를 통해 고객인 관객들로부터 좋은 호응을 얻어 낸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은 김 회장을 두고 “상상력과 창조력으로 미래의 비전을 그물질하는 생명현장인 바다에서 시를 썼고 그 배위에서 어떤 연기자도 흉내 내지 못하는 드라마의 주연이 됐다”고 평가했다. 

완벽주의자의 무대론에 입각한 도전은 현재진행형이다.

 

<하이트진로> 거품 뺀 실용주의

“밖으로 드러내는 허세가 기업의 최대 악덕” 창업주 고 박경복 하이트진로 명예회장은 이 같은 경영철학으로 30여년간 하이트진로를 이끌었다. 주류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박 명예회장은 1967년 한국맥주판매 대표이사로 오르면서 맥주 산업에 뛰어들었다. 

이듬해인 1968년 조선맥주(현 하이트진로)로 자리를 옮긴 후 한국 맥주산업을 정상으로 올려놨다. 박 명예회장은 2001년 뇌졸중이 악화되기 전까지 경영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그의 경영지론은 ‘내실경영’이다. 

2000년 초반 회사를 찾은 외국 애널리스트들이 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허름한 3층 콘크리트 슬래브 구조의 본사 건물을 보고 놀랐다는 얘기는 그의 소탈함을 보여주는 일화로 유명하다.

“허세가 기업의 최대 악덕”

박 명예회장은 현장에서 직접 직원을 격려하는 ‘스킨십 경영’을 중시했다. 현역 시절 매일 오전 7시에 출근해 생산 현장을 돌아보며 직접 제품 생산과 출고 현황을 챙기기도 했다. 1주일에 3일은 전북 전주, 강원 홍천, 경남 마산의 공장을 찾았을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공장 관계자는 “박경복 명예회장은 공장 가동과 제품 생산 현황 등도 직접 파악하는 등 ‘현장경영’을 몸소 실천했다”고 말했다. 

업계에선 그의 소탈함과 열정이 하이트진로를 주류업계 1위로 올려놓은 것 아니겠냐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농심> 실패+정직은 자산

한국인의 사랑하는 라면 리스트에 농심 신라면은 가장 위에 있다. 이는 판매량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20%가 넘는 점유율을 차지하며 30년 넘게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신라면의 ‘맛’은 한국인들만 인정한 것이 아니다. 

신라면은 지난해 식품업계 최초로 ‘1억불 수출’의 탑을 무역협회로부터 받았다. 수출의 탑은 연간 수출액을 집계해 해외시장 개척 및 수출증대에 기여한 업체에 주는 상이다. 농심은 신라면의 인기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여기에는 창업주 신춘호 회장의 경영철학이 담겼다. 농심의 기업이념은 신 회장의 경영철학인 이농심행 무불성사다. 농심을 갖고 일하면 못 이룰 게 없다는 뜻이다. 

새로운 도전과 사명감으로

농심은 우직하고 성실하게 땀의 숭고함을 믿었다. 농부가 자연의 섭리 속에서 땅을 일구듯 새로운 도전과 사명감으로 오늘의 농심을 이뤘다. 이는 신 회장의 경영 방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신 회장은 실패에 너그러웠다. 

실패는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닌 더 이상 실패하지 않는 지혜와 실패에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결과적으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정직하게 기업을 운영하다 보니 1965년 창립이래 꾸준히 국민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는 평이다. 

50년 넘는 장수기업에 30년 넘는 메가히트 상품의 첫 번째 비결로 꼽히는 배경이다.

 

<동아제약> 국민건강에 이바지

“좋은 의약품을 생산해 국민건강에 이바지한다” 동아제약 창업주 고 강중희 회장의 창업이념이다. 동아제약은 1932년 창립돼 이 이념을 바탕으로 국내 최고의 헬스케어 전문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동아제약의 대표 제품 박카스가 1961년 시장에 처음 나왔을 때부터 현재까지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것도 창업이념이 제품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지난해까지 강 회장의 장남 강신호 명예회장이 창업이념을 발전적으로 계승해 기업을 운영했다. 

창업이념 제품에 녹아

강 명예회장은 “내가 의사로서 제약인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의사는 개인을 살릴 수 있지만 제약기업은 더 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라며 자신의 철학을 밝혔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독일서 박사과정까지 마친 그가 현장에서 느낀 부분을 그대로 경영에 접목한 것이다. 

그는 이 지론하에 연구개발(R&D) 투자에 큰 힘을 쏟았다. 회사의 크고 작은 위기에도 R&D 부문의 비용은 아끼지 않았다. 창립 84년주년을 맞는 동아제약은 3세 경영으로 넘어갔다. 

현재 강신호 명예회장의 아들 강정석 회장이 아버지의 정신을 계승해 회사를 이끌고 있다. 동아제약의 ‘100년’ 기업 도전이 시작됐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여당발 검찰과의 전쟁 막전막후

여당발 검찰과의 전쟁 막전막후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검찰의 대장동 항소 포기 후폭풍이 거세다. 더불어민주당과 검찰의 시각이 크게 엇갈리면서 서로를 향해 날을 겨누는 형국이다. 검찰청은 내년 9월 폐지될 시한부 운명이지만, 더불어민주당은 ‘검찰개혁’을 필두로 이참에 검찰의 뿌리를 뽑겠다는 방침이다. 국민의힘을 등에 업고 버티기에 나선 검찰의 반발 또한 만만치 않아 당분간 양측 간의 힘겨루기가 이어질 전망이다. 지난 7일 서울중앙지검이 대장동 사건에 대한 항소 시한을 넘기면서 논란에 불이 붙었다. 서울중앙지검이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을 비롯해 ▲남욱 변호사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씨 ▲정민용 변호사 ▲정영학 회계사 등 대장동 일당에 대한 1심 판결에 항소하지 않은 것이다. 꺾이거나 되치거나 검찰이 항소를 포기하면서 ‘불이익변경 금지 원칙’에 따라 피고인에게 더 무거운 형을 선고할 수 없게 됐다. 대장동 개발 비리로 발생한 범죄수익의 국고 환수 규모가 축소될 것이란 해석에도 힘이 실린다. 화살은 곧바로 이재명 대통령에게로 향했다. 이 대통령은 대장동 사건에서 이해충돌방지법 위반 혐의 등을 받는데, 이미 대장동 민간업자 재판에서 무죄가 나온 만큼 항소 포기로 인해 추가로 다툴 여지를 차단했다는 게 국민의힘의 설명이다. 여기에 대통령실이 항소 포기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이재명 면죄부’라고도 주장했다. 국민의힘 곽규택 대변인은 “대통령실 민정수석실 비서관 4명 중 3명, 법무부 장관 정책보좌관, 법제처장, 국정원 기조실장까지 모두 이 대통령의 변호인 출신”이라며 “이 대통령과 사법연수원 동기인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대장동 사건 주요 피고인 정진상, 김용, 이화영 등을 특별 면회하면서 ‘검찰은 증거가 없다’는 발언으로 회유를 시도한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보수 성향인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 모임’ 역시 “국가의 유례없는 사법 정의 포기 사태는 이재명정부의 책임”이라며 “공소 사실의 핵심에 무죄 선고가 난 사건에 검찰이 항소를 포기한 전례를 찾기 어렵다. 대통령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진 것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정부 출범 이후 대검찰청 차장검사로 승진한 노만석 검찰총장을 겨냥해서는 책임론이 불거졌다. 법조계에 따르면 항소 시한을 앞두고 서울중앙지검은 대장동 일동에 대해 일부 무죄가 선고되는 등 다툼의 여지가 있는 1심 판결에 대해 “관행대로 항소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지만, 이를 전해 들은 대검 수뇌부가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팔이 안으로 굽은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이에 노 대행은 지난 9일 “대장동 사건은 일선 검찰청의 보고를 받고 통상의 중요 사건의 경우처럼 법무부의 의견도 참고한 후 해당 판결의 취지 및 내용, 항소 기준, 사건의 경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며 “검찰총장 대행인 저의 책임하에 서울중앙지검장과의 협의를 거쳐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 역시 대장동 일동에 대해 검찰의 구형량보다 높은 형량이 선고된 만큼 항소 포기가 ‘적절한 판단’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항소 포기 지시는 없었다”고 일축했다. 화약고에 불붙인 ‘항소 포기’ 후폭풍 이재명·노만석·정성호 몽땅 도마 위로 정 장관은 지난 12일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 회의에 출석해 ‘(이진수) 법무부 차관에게 대장동 사건 관련으로 어떤 지시를 했느냐’는 국민의힘 배준영 의원의 질문에 “노 검찰총장 직무대행에게 지휘권을 행사할 수도 있으니 항소를 알아서 포기하라는 지시를 한 적이 없다”고 답했다. 이어 정 장관은 총 3번 정도 대장동 사건에 관해 이야기했다고 언급하며 “(두 번째인) 11월6일 목요일에는 국회에서 예결위 종합질의가 있어 국회에 왔는데, 예결위 끝나고 대검에서 항소할 필요성이 있다고 한 의견을 들었다”며 “당시 ‘중형이 선고됐는데 신중한 판단을 해야 하지 않는가’란 정도의 이야기만 하고 돌아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다음 날인 11월7일에도 마찬가지”라며 “저녁에 예결위가 잠시 휴정돼 검찰에서 항소할 것 같다는 구두 보고를 식사 중에 받았고, 그날 저녁 예결위가 끝난 후 최종적으로 항고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부연했다. ‘신중하게 판단하라’는 대목을 놓고 국민의힘은 “신중한 검토(판단)가 곧 항소 포기인지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며 법무부가 사실상 외압을 행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송언석 원내대표는 “신중하게 판단하라는 이 8글자에 모든 것이 함축적으로 들어가 있다”며 “법무부 장관이 개인적인 견해임을 전제로 하며 검찰에 지시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대장동 사건 수사·공판팀을 이끌었던 일선 검사를 중심으로 반발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김영석 대검찰청 감찰1과 검사는 검찰 내부망 이프로스를 통해 “검찰 역사상 일부 무죄가 선고되고 엄청난 금액의 추징이 선고되지 않은 사건에서 항소 포기를 한 전례가 있었나”라며 이번 결정으로 대장동 일당 등 민간업자에게 수천억원 상당의 범죄수익이 돌아간 점을 꼬집었다. 대장동 사건의 수사·공판팀을 이끌었던 강백신 대구고검 검사도 “항소 포기로 남욱·정영학을 상대로는 범죄수익을 단 한 푼도 환수할 수 없게 됐고, 김만배를 상대로는 당초 예상 금액의 1/10에 불과한 금액만 추징 선고가 이뤄졌음에도 이를 묵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고 지적했다. 기막힌 타이밍 검찰 안팎에서 책임론이 확산하자 결국 노 대행은 항소 포기 논란이 불거진 지 닷새 만에 사의를 표명했다. 그러자 일선 검사들은 ‘검찰총장 권한대행께 추가 설명을 요청드린다’는 제목의 글을 통해 항소 포기 과정에 대한 상세 설명을 요구하는 입장문을 냈다. 해당 입장문은 박재억 수원지검장을 비롯해 ▲박현준 서울북부지검장 ▲박영빈 인천지검장 ▲박현철 광주지검장▲임승철 서울서부지검장 ▲김창진 부산지검장 등 검사장 18명 명의로 작성됐다. 이들은 “서울중앙지검장은 명백히 항소 의견이었지만 검찰총장 권한대행의 항소 포기 지시를 존중해 최종적으로 공판팀에 항소 포기를 지시했다”며 “검찰총장 권한대행을 상대로 항소 의견을 관철하지 못하고 책임지고 사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면 검찰총장 권한대행이 어제 배포한 입장문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의 항소 의견을 보고받고 법무부의 의견도 참고한 뒤 해당 판결의 취지 및 내용, 항소 기준, 사건의 경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며 “검찰총장 권한대행의 책임 하에 서울중앙지검장과 협의를 거쳐 숙고 끝에 항소 포기를 지시했다는 것”이라고 짚었다. ▲하담미 수원지검 안양지청장 ▲최행관 부산지검 동부지청장 ▲신동원 대구지검 서부지청장 등 8개 대형 지청을 이끄는 지청장들도 집단 성명을 냈다. 이들은 “이번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 지시는 그 결정에 이른 경위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면 검찰이 지켜야 할 가치, 검찰의 존재 이유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게 될 것”이라며 “그간 중앙지검장과 검찰총장 권한대행의 입장문, 법무부 장관의 설명만으로는 항소를 포기한 구체적 경위가 설명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법적·행정적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정치 검사들의 반란을 분쇄하겠다”며 검찰의 집단 반발을 ‘항명’이라고 규정하고 이에 대한 징계를 예고했다. 현재 일반 공무원은 6단계 징계 처분(파면·해임·강등·정직·감봉·견책)이 가능하지만, 검사는 파면에 해당하는 징계 규정이 없다. 검사에 대한 징계는 검사징계법에 따라 이뤄지는데, 이를 ‘검사 특혜법’이라고 지적하며 폐지하겠다는 설명이다. 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는 “정치 검사들의 반란에 철저하게 책임을 묻겠다”며 사실상 검찰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김 원내대표는 “정 법무부 장관께 강력히 요청한다. 항명 검사장 전원을 즉시 보직 해임하고 이들이 의원면직하지 못하게 징계 절차를 바로 개시하라”며 “항명에 가담한 지청장과 일반 검사들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이후 김 원내대표가 검사징계법 폐지 법률안·검찰청법 개정안을 각각 국회에 제출하면서 사실상 검찰 징계는 당론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항소 포기 논란 이후 박재억 수원지검장에 이어 송강 광주고검장이 연달아 사의를 표명했지만 민주당은 “사표를 수리하지 말고 징계 절차를 밟아야 한다”며 퇴로를 막았다. 항명? 투쟁? 법무부 내부에서 집단행동에 나선 일부 검사장을 대상으로 평검사 보직이동을 하거나 국가공무원법 위반 등으로 형사 처벌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지면서 또 다른 문제가 불거졌다. 검찰 측에서는 “보복용 강등”이라는 거센 반발이 나오지만 법무부는 “검사장은 직급이 아닌 보직”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강등·징계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은 검사장의 집단행동을 비판하며 징계의 타당성을 주장했지만, 일선 검사들은 항소 포기 판단 경위에 대해 추가 설명을 요청한 것이 어떻게 항명이냐며 갑론을박이 이어지는 상황이다. 그동안 민주당 의원들이 앞다퉈 일선 검사장을 향해 “빨리 나가라”고 윽박지르던 것과 달리 최근 지도부는 숨 고르기에 돌입한 모양새다. 국민의힘이 계속해서 이정부와 대장동을 엮어 공격하는가 하면, 이 대통령의 UAE(아랍에미리트) 순방 성과가 묻힐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톤 조절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와 김병기 원내대표는 이 대통령이 순방을 떠난 17일부터 이틀간 공개 석상에서 검사 항명, 징계 등 관련 현안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민주당 전현희 최고위원 등 일부 최고위원이 내란전담재판부 도입을 주장했으나 당은 “지도부 차원의 의견은 아니”라며 거리를 뒀다. 정 법무부 장관 역시 지난 18일 출근길에 기자들과 만나 검사장 징계 검토 관련 질문에 “어떤 것이 좋은 방법인지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건 국민을 위해 법무부나 검찰이 안정되는 것”이라며 신중한 자세를 택했다. 낮은 볼륨을 유지하는 지도부와 달리 의원 개개인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민주당 김현정 원내대변인은 한 라디오를 통해 정 법무부 장관의 ‘검찰조직 안정’ 발언에 대한 질문에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넘어가는 것이 조직의 안정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방법은 아니”라고 답했다. 이어 “정 법무부 장관은 법무부와 검찰 전체를 총괄하는 수장이기 때문에 고민이 있으신 것 같다”면서도 “다만 중요한 것은 원칙”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현재 민주당이 내세우는 원칙은 항명 검사에 대한 징계로, 그 원칙을 지키는 것이 국민 여론이라는 발언으로 해석된다. 몰아붙이던 지도부 잠시 숨 고르기 이제는 각개전투…검사들도 ‘부글’ 민주당이 다수 석을 차지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에서는 ‘집단 항명 검사장 18인’ 전원을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항소 포기 결정에 반발하는 검사장 18명을 겨냥해 “헌정 질서의 근본인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과 검찰조직의 지휘 감독체계를 정면으로 무너뜨린 사건”이라고 비판하며 법적 조치에 나선 것이다. 지난 19일 법사위 여당 간사인 김용민 의원은 조국혁신당·무소속 의원과 함께 기자회견을 통해 이같이 밝히며 “검찰의 집단 항명은 정치적 집단행동으로 헌정 질서를 훼손하는 중대 범죄”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들의 행동은 단순한 의견 개진이 아니었으며 법이 명백히 금지한 공무의 집단행위, 즉 집단적 항명”이라고 규정했다. 이어 “피고발인 18명은 모두 각 검찰청을 대표하는 검사장급 고위 공무원으로서 정치적 중립성이 누구보다 강하게 요구되는 위치에 있다”며 “그런데 이들은 서로 합의해 공동성명을 작성하고 이를 동시에 내부망과 언론에 공개했다. 이는 다수가 결집해 실력으로 주장을 관철하려는 집단적 압력 행위”라고 말했다. 민주당의 압박이 거세지자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뒤 검사들이 반격에 나설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권력이 교체됨에 따라 검사의 태도 역시 손바닥 뒤집듯 바뀌고, 만일 보수 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갈 경우 검사의 날이 다시 이 대통령을 향할 것이란 점에서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내년 10월 해체 예정인 검찰청이지만 막강한 권력을 지니던 시절의 관행을 버리지 못한다면 이들을 중심으로 정치 검찰의 모습을 한 또 다른 집단이 탄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실은 “검사 인사권은 법무부에 있다”며 이번 사안에 직접 개입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논란의 중심으로부터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며 대통령실이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는 점을 부각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 민주당 관계자 역시 “‘대통령실 외압’은 궁지에 몰린 국민의힘의 프레임”이라며 “만약 5년 뒤에 검찰이 반기를 들면 그때는 (이 대통령의 거취를) 국민 여론에 맡기면 된다. 지난 몇 년간 수십번의 압수수색과 조사가 이뤄졌고, 그 결과를 전부 국민이 지켜봤다”고 설명했다. 피바람 과도기 이 모든 과정을 놓고 최요한 정치 평론가는 “과도기”라고 설명했다. 최 평론가는 <일요시사>를 통해 “검찰이 하나의 권력으로 등장해 민주주의를 유린했다. 그 대상을 개혁하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고, 이정부는 그걸 시스템으로 헤쳐나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어 “개혁은 혁명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혁명은 싹을 자르면 되지만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라며 “검사 징계, 검찰개혁을 놓고 같은 진보라 하더라도 결이 다르지 않나. 다양한 논의와 의견을 두들겨 맞춰서 하나의 안을 만드는 게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개혁안은 보수도 일정 정도 동의를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시스템 개혁이라는 건 단칼에 두부처럼 잘리는 게 아닐뿐더러 이정부가 끝날 때까지 (개혁을) 시도하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 일일 수도 있다”고 부연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