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21주년 특집5> ‘지난 21년’ 재계서열 변천사

셋 중 한명은…자주 바뀌는 재벌 자리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돌이켜보면 <일요시사>가 막 태동했던 1996년은 폭풍전야나 마찬가지였다. 곳곳서 불거졌던 사건·사고는 이듬해 닥칠 외환위기의 전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판 거품경제’의 끝물서 재벌기업들은 나태함에 빠져있었다. 거품이 꺼지자 진면목이 드러났다. 신문 경제면을 화려하게 장식하던 재벌기업 대다수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상태였다.  
 

기업집단은 ‘동일인이 사실상 사업내용을 지배하는 회사의 집단’으로 정의된다.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는 매년 동일인의 지분율과 지배력을 기준으로 기업집단과 여기에 속하는 계열사의 공정자산을 평가한다. 이 기준에 따른 기업집단 순위는 국내 재벌 순위로 공인되고 있다. 

잘 나가더니
거덜난 재산

공정위는 1987년 공정거래법을 개정하고 기업집단을 규정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자산총액 4000억원이 기준이었다. 초대 10대 기업집단에 선정된 것은 현대와 대우, 삼성, 럭키금성(LG), 쌍용, 한진, 선경(SK), 한국화약(한화), 대림 등이었다. 

이때부터 1991년까지는 현대, 대우, 럭키금성이 빅3를 형성했다. 2001년 재계 1위에 등극한 뒤 올해까지 한 번도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는 삼성은 당시만 해도 4위에 그쳤다.

매년 발표된 대규모 기업집단 규정은 1996년 10번째를 맞이했다. 대림이 10대 기업서 빠진 자리를 기아가 대체하고 현대가 굳건히 1위 자리를 수성했을 뿐 나머지 기업들의 순위 변화는 그리 크지 않았다. 


11~30위에는 금호, 두산, 대림, 한보, 동아, 한라, 효성, 동국제강, 진로, 코오롱, 동양, 한솔, 동부, 고합, 해태, 삼미, 한일, 극동, 뉴코아, 벽산이 자리 잡는 구도였다. 

IMF 직전 폭풍전야 ‘죽느냐 사느냐’
흥청망청 쓰더니 순식간에 부도 처리

21년의 간극을 감안하더라도 1996년 재계 순위는 올해 공정위가 발표한 것과 현격한 차이를 나타낸다. 지난 1일 공정위가 발표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지정현황을 보면 상위 10대그룹은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롯데, 포스코, GS, 한화, 현대중공업, 농협 순이었다. 
 

11∼30위에는 신세계, KT, 두산, 한진, CJ, 부영, LS, 대림, 금호아시아나, 대우조선해양, 미래에셋, S-OIL, 현대백화점, OCI, 효성, 영풍, KT&G, 한국투자금융, 대우건설, 하림이 포진해 있다.

최상위권은 물론이고 중하위권 기업의 순위도 크게 요동쳤다. 21년 동안 큰 풍파없이 30대 기업에 꾸준히 이름을 올린 곳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다. 

삼성, LG, SK, 한진, 한화, 롯데, 금호아시아나, 두산, 대림, 효성 등 10개 기업에 불과하다. 대우, 쌍용, 기아자동차, 한보, 동아, 진로, 동양, 고합, 해태, 삼미, 한일, 극동, 뉴코아, 벽산은 공중분해 수순을 밟았다. 현대, 한라, 동국제강, 코오롱, 한솔, 동부는 30대 기업서 밀려났다.    

모진 풍파에
속속 공중분해


1996년과 올해 재계 순위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하는 건 1997년 11월 불어닥친 외환위기(IMF구제금융)의 여파 때문이다. 외환위기 전까지 대기업들은 설비를 수입해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해 제품을 생산하고 이를 싼 가격에 수출하는 방식을 썼다. 

사업 확장을 위해 대기업들은 주저 없이 금융권에 손을 벌렸다. 당시 은행권 전체 대출 중 30대 기업 대출이 3분의 2에 해당할 정도였다. 

그러나 1996년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국가경제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고 자금 융통에 어려움을 겪던 시중은행들은 재빨리 기업 대출 회수에 나섰다. 때마침 동남아발 외환위기가 먼저 촉발되면서 외부의 도움을 구하기도 힘든 여건이었다.

일본 금융기관들은 동남아시장에 투입했던 자금을 회수하기 바쁜 상황이었다. 결국 시중은행들의 대출금 회수는 대기업 줄도산으로 연결됐다. 여기서부터는 악순환이었다. 대기업의 부실채권이 궁극적으로 금융기관 부실화를 야기했다. 

철강사업에 손대면서 대규모 차입을 했던 재계순위 14위 한보가 1997년 1월 도산한 것을 시작으로 4월에는 삼미가 부도나고 진로는 부도유예협약이 결정됐다. 7월에 기아 역시 부도유예협약이 적용됐다. 10월에는 뉴코아, 해태, 동아 등이 부도처리 되면서 한 달 동안 30조의 부실채권이 발생했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한국은행과 시중은행 간 금융 프로세스마저 단절되면서 시중은행의 파산도 가시화됐다. 사실상 외환시장은 폐쇄됐고 정부는 외환보유고서 달러를 배급하기에 이르렀지만 결국 1997년 11월 외환보유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IMF’라는 생소한 이름이 전 국민의 머릿속에 각인된 순간이다. 
 

외환위기 전후로 대기업들이 줄줄이 파산하면서 재계 순위는 본격적으로 요동쳤다. 은행 돈으로 문어발 확장에 집중하던 대기업들은 유동성 위기를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대마불사’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았다.  

‘세계경영’을 외쳤던 대우가 공중분해 수순을 밟은 것도 이 무렵이다. 외환위기 당시 대우는 확장전략을 전개했다. 이 과정서 자금난을 겪던 대우는 현금 확보를 위해 총 100억달러에 달하는 채권을 발행했고 이는 1999년 3월에 부채비율 400%로 되돌아왔다. 

차입의존도가 높았던 대우는 연 20%를 넘는 고금리를 감당하지 못했고 빚을 얻어서 빚을 갚는 악순환이 되풀이됐다. 결국 같은 해 8월 대우에 대한 워크아웃이 결정되고 12개 계열회사가 채권은행단의 관리로 들어갔다. 

쌍용을 필두로 고합, 해태, 한일, 극동, 벽산 역시 대우와 비슷한 시기에 차례로 무너졌다.

시멘트, 해운, 제지 기반서 정유, 중공업, 자동차 부문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던 재계 6위 쌍용은 외환위기 후 구조조정을 실시하며 해체 수순을 밟았다. 1997년 쌍용제지를 미국 P&G에, 1998년에는 쌍용자동차를 대우그룹에 넘겼다. 

1999년과 2000년에는 쌍용정유와 쌍용중공업에 팔려나갔다. 쌍용건설과 모기업인 쌍용양회공업은 기업재무구조 개선(워크아웃) 절차에 들어가 채권단이 지배주주가 됐다. 


고합은 지나친 사세확장으로 금융위기 직후 워크아웃 1호 기업으로 전락했다. 당시 고합의 부채 규모는 3조5000억원, 부채비율은 424%에 달했다. 

고합은 68개 채원금융기관으로터 2430억원의 협조융자를 받으면서 13개 계열사를 ㈜고합으로 합병하고 3400억원의 유가증권과 부동산을 매각하면서 정상화를 시도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했다. 장치혁 회장은 2001년 채권단의 결정으로 경영 일선서 완전히 퇴진했다.

제과업을 주축으로 성장했던 해태는 1997년 11월 주력기업인 해태제과 부도를 시작으로 이듬해 15개 계열사 중 해태상사와 해태타이거즈만 남고 해체됐다. 
 

1999년 해태산업의 제과사업부문과 해태가루비는 해태제과에 흡수·합병됐고 해태상사, 해태중공업, 대한포장, 해태텔레콤, 해태I&C 등은 파산했다. 1999년 12월 법원으로부터 재산보전 처분이 결정된 해태상사는 2000년 5월부터 법정관리에 돌입했고 11월 시장서 퇴출됐다. 

이외에도 외환위기 발발 2년 전 우성건설을 편입시키던 한일그룹은 1998년 모기업이었던 한일합섬과 주력기업인 국제상사가 부도를 내면서 그룹이 사실상 해체됐다. 

극동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7년과 1998년에 동서증권과 국제종합건설이 잇따라 부도를 내면서 경영난에 빠졌다. 건축자재를 주력으로 하던 벽산은 1998년 외환위기 직후 경영난에 빠지면서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대마불사 옛말
새로운 얼굴들

외환위기와 상관 없이 최근 30대기업 명단서 제외된 기업도 제법 눈에 띈다. 현대, 동양, 동부 등이 이 부류에 포함된다. 

현대는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겪으며 현대,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백화점 등으로 쪼개졌다. 그룹의 모체였던 현대는 2001년 유동성 위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현대건설, 현대전자, 현대투자신탁, 현대정유 등 우량 계열사를 채권단의 손에 넘겨야 했다.

 2003년에는 정몽헌 회장의 자살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지난해 현대상선 분리와 함께 대기업 집단서 제외됐다. 

2006년부터 자금난을 겪던 동양은 2013년 9∼10월 주요 계열사인 동양, 동양레저, 동양시멘트, 동양네트웍스, 동양인터내셔널 등 5개 계열사가 연달아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해체의 길을 걸었다. 

이 과정서 2013년 2월부터 9월까지 동양증권을 통해 4만여명의 개인투자자들에게 기업어음(CP) 및 회사채를 불완전 판매한 이른바 ‘동양사태’가 불거지기도 했다. 

철강, 반도체, 금융, 농업, 물류 분야를 아우르던 동부는 부채비율 급증을 비롯한 악재가 겹치면서 2015년 전자·금융을 축으로 그룹이 재편됐고 지난해부터 대기업집단서 빠졌다.

M&A 따라…요동치는 순위 
뒤안길로 사라진 기업도

몰락한 30대기업의 빈자리는 새로운 얼굴로 채워졌다. 1968년 포항종합제철로 설립돼 2002년 3월 지금의 사명으로 변경한 포스코는 2000년 10월 민영화 완료 후 2001년 재계순위 7위로 대기업집단에 편입됐다. 지난 1일 발표된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에 의거한 재계순위는 6위.

1981년 12월 세워진 한국전기통신공사를 모태로 하는 KT는 2002년 5월 정부가 보유하고 있던 주식을 전량 매각함에 따라 완전 민영화됐다. 2003년 대기업집단에 포함되자마자 재계순위 5위에 이름을 올렸다. 
 

부영은 주택건설 및 임대주택업을 주축으로 하는 기업이다. 1983년 삼신엔지니어링으로 설립해 1993년에 현재의 상호로 변경했으며 2010년 재계순위 24위로 대기업집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외에도 2000년에 30위로 대기업집단에 편입된 영풍은 2004년 30대기업서 자취를 감췄다가 2013년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미래에셋(2014년·29위), S-OIL(2010년·26위), OCI(2009년·27위), KT&G(2016년·30위), 하림(2016년·28위)등이 30대기업 명단에 이름을 올린 상태다. 한국투자금융은 올해 처음으로 30대기업에 포함됐다. 

어제의 가족이
오늘의 경쟁자

그룹사와 우산을 공유하던 계열사가 계열분리를 거쳐 30대기업에 합류한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삼성그룹서 떨어져 나온 신세계와 CJ는 각각 2000년, 2003년부터 30대기업에 포함됐다. 

과거 LG그룹의 일원이던 GS와 LS는 2003년에 30대기업에 함께 이름을 올렸다. 범현대가의 일원이던 현대차, 현대중공업, 현대백화점은 30대 기업서 제외된 모기업(현대)보다 재계순위에서 높은 곳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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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 밥도 아닌 트럼프 따라하기

죽도 밥도 아닌 트럼프 따라하기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강경 보수와의 밀착을 밑바탕 삼아 용꿈을 현실화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장 대표에게 영감을 준 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공화당 장악·대권 도전 과정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30년 넘게 이어진 미국의 문제점과 유권자의 불만을 꿰뚫었다. 장 대표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빙글빙글 정치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장 대표와 국민의힘 지도부는 지난 6일 광주를 방문해 5·18 민주묘지를 참배하려고 했다. 그러자 광주전남촛불행동 등 광주 시민단체 회원들과 일부 시민들은 장 대표 일행의 참배를 막았다. 결국 장 대표 일행은 추념탑 앞에서 5초 동안 묵념한 후 발길을 돌려야 했다. 같은 콘셉트 다른 행보 장 대표의 참배 시도엔 ▲국민 통합 ▲호남 구애 및 지역 현안 해결 ▲강경 보수 이미지 희석 등 이유가 담겨있었다. 하지만 장 대표의 이후 행보는 참배를 시도했던 이유에 대한 의문을 자아낼 가능성이 있다. 광주북부경찰서는 장 대표 등의 참배를 막은 시민들에게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재물손괴 등 혐의를 적용해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국민의힘 광주시당은 지난 18일 광주시의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당일 집회는 신고되지 않은 불법 시위였고, 각종 욕설과 모욕으로 일관된 폭언·폭력이 난무한 아수라장이었다”며 “시민을 가장한 과격 단체와 특정 인사들이 국민의힘 당 대표의 참배를 거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는 지난 12일 내란 특검에 체포됐다가 이틀 후 구속영장 청구가 기각돼 석방된 황교안 전 국무총리를 두둔했다. 황 전 총리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당시 자신의 페이스북에 “우원식 국회의장을 체포하라. 대통령 조치를 정면으로 방해하는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도 체포하라”는 내용의 비상계엄 동조 게시글을 올리는 등 행동으로 말미암은 내란 선전·선동 혐의를 받고 있다. 장 대표는 국회에서 대장동 항소 포기 규탄대회를 진행하던 중 황 전 총리 체포에 대해 “전쟁이다. 우리가 황교안이다. 뭉쳐 싸우자”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선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비판이 이어졌다. 황 전 총리가 활발하게 부정선거론을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비판이 이어지자, 장 대표는 지난 13일 의원총회에서 부정선거론에 선을 그으면서 “전략적으로 한 발언”이라고 해명했다. 장 대표·황 전 총리의 행적을 되새겨보면, “우리가 황교안이다”라는 구호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 구호는 미국 정치 드라마 <웨스트윙>에서 크게 화제가 됐던 대사 “나는 민주당원이다”와 대비되기 때문이다. <웨스트윙>에선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후보 매튜 산토스가 상대 후보 에릭 베이커의 약점을 감싸는 연설을 한다. 에릭 베이커는 부인의 만성 우울증을 숨겼다. 이 때문에 논란이 발생하자, 매튜 산토스는 “어차피 우리는 모두 망가져 있는데, 아닌 척 위선을 할 뿐”이라며 “지도자에게 완벽하다는 환상을 요구하면, 이는 단지 거짓을 종용하는 것”이라고 연설했다. 이어 “완벽한 후보·특혜를 줄 후보가 아니라 이상·희망·꿈을 공유하는 후보에게 투표해야 한다”며 “그렇게 하면 우린 자랑스럽게 ‘나는 민주당원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광주 방문 시도 이어“우리가 황교안이다” 트럼프 당선엔 30년 밑밥…어설픈 표절? “나는 민주당원이다”는 상대의 약점을 감싸면서 정치의 본질을 호소하는 이상적인 정치인의 상징으로 통한다. 하지만 황 전 총리는 윤 전 대통령의 뜬금없는 비상계엄 선포를 두둔하면서 폭력적인 정적 숙청을 요구했다. “우리가 황교안이다”는 “나는 민주당원이다”와 극단적으로 대비될 수밖에 없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지난 9월 채널A <정치시그널>에 출연해 “장동혁 대표에 대해선 충청도에서 몇 안 되는 용꿈을 꾸는 분이란 평이 있었다”며 “그 용꿈을 망상에 가깝다고 보기엔 유연하게 정치를 한 분”이라고 주장했다. 장 대표는 대표 취임 후 김도읍 정책위의장 임명 등 중도 보수 성향 유권자를 의식한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그에게서 ▲장외 집회 집착 ▲황 전 총리 두둔 ▲한 전 대표 퇴출 시도 등 강경 보수 성향 유권자들이 좋아할 만한 행보가 더욱 두드러졌다. 이 때문에 그는 빙글빙글 회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광주 5·18 민주묘지 참배와 황 전 총리 두둔이란 극단적인 행보를 불과 며칠 사이에 보인 것도 장 대표 특유의 빙글빙글 정치를 상징한다. 강경 보수에 더욱 치중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 대표의 행보는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과정과 비교할 만하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 과정엔 미국 민주당에 모여 정치적 올바름에 집착하는 리버럴 엘리트들에 대한 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반발이 큰 역할을 했다. 국민의힘 박민영 대변인은 지난 12일 유튜버 감동란의 개인 방송에 출연해 같은 당 시각장애인인 김예지 의원을 원색적으로 비판했다. 친한(친 한동훈)계로 알려진 김 의원은 윤 전 대통령 탄핵 표결 당시 찬성표를 던졌고, 특검법 3개에도 모두 찬성했다. 박 대변인은 “김 의원은 눈 불편한 것 빼고는 기득권인데, 장애인이라서 배려받는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며 “장애인에게 너무 많은 할당을 하는 게 문제”라고 주장했다. 이어 “한 전 대표가 김 의원을 일종의 에스코트용 액세서리 취급을 했다”고 지적했다. 김 의원은 지난 17일 박 대변인을 경찰에 고소했다. 하지만 장 대표는 박 대변인에게 엄중하게 경고할 뿐, 징계는 하지 않았다. 박 대변인의 발언과 장 대표의 미지근한 대응은 김 의원에게 강한 반감을 갖는 강경 보수 성향 유권자를 의식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시각장애인이자 여성이란 김 의원의 정체성과 그에 대한 박 대변인의 공격은 미국에서 만성 구조화된 정치적 올바름 논쟁의 흐름과 정확히 일치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대권 쟁취는, 진보 진영이 신자유주의·정치적 올바름을 추진하면서 민주당이 월스트리트와 강하게 연계하자 국민이 여기에 반감을 갖게 된 것으로부터 비롯됐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딕 체니 전 부통령·도널드 럼즈펠드 전 국방부 장관으로 상징되는 네오콘에 대한 반감도 큰 역할을 했다. 드라마 대사 표절?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재임 당시 강하게 추진된 신자유주의로 인해 산업 패러다임은 제조업에서 금융업으로 바뀌었다. 월스트리트의 힘이 더욱 막강해졌고, 미국 내 제조 기업은 비용 절감을 위해 인건비가 저렴한 해외로 이전하는 흐름이 가속화됐다. 지난 2008년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미국 내 중산층 몰락에 쐐기를 박았다.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막대한 세금을 대외 전쟁에 쏟아부었던 네오콘도 유권자의 큰 반감을 사서 몰락했다. 고립주의를 선호하는 미국 보수의 전통적인 흐름과 달리, 네오콘은 막대한 세금을 쏟아부어 미국의 가치를 퍼트리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그 “막대한 세금을 쏟아붓는다”는 것 때문에 네오콘은 오래 지나지 않아 몰락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구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엔 미국 특유의 고보수주의가 함축됐다. 미국의 역사는 이주·개척의 역사다. 지금과 같은 세계 경찰의 위상은 제2차 세계대전 승전 이후 확보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엔 지역 강국 정도의 위상을 가졌고, 현재의 미국 영토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주로 얻었다. 이 때문에 미국에선 서부 개척 시대를 다룬 영화가 흔하게 제작된다. 미국인이 광적으로 열광하는 시리즈 <스타트렉>과 <스타워즈>도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를 은유해 제작됐다. 건국 신화가 따로 없는 미국에선 이 양대 시리즈가 신화로 통한다. 미국 고보수주의의 핵심은 다른 나라의 전쟁·정치 개입에 반대하는 외교 정책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인위적으로 고립시켜 대륙 내 미국의 기득권을 지키자는 것이다. 미국의 국력이 지금과 같지 않았던 19세기엔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미국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 전 대통령은 1823년 “유럽은 아메리카에 새 식민지를 만들지 말고, 미국은 유럽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먼로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어 ‘명백한 운명’이란 구호하에 서부 개척에 몰두했다. 트럼프 대통령·JD 밴스 부통령은 지난 2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면서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왜 감사하단 말을 하지 않느냐”고 몰아붙였다. 미국이 지난 2022년 2월 이후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지원 규모는 약 820억달러(약 113조4880억원)이고, 전비는 670억달러(약 98조4591억원) 규모로 확인된다. 미국 상원은 지난해 4월 608억달러(약 89조3480억원) 규모의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첨단 무기 등 대규모 군사 지원이 계속되고 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이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지지자들을 달랠 거대한 쇼가 필요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상징 중 하나는 제1기 행정부 당시 멕시코 국경에 설치한 거대한 장벽이다. 미국 내 블루칼라들이 갖는 불만 중 하나는 “멕시코 불법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잠식한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미국·멕시코 접경지역에선 멕시코 마약 카르텔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이를 실질적 효과와 정치적 이벤트를 모두 거둘 수 있는 일거양득 상황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크다. 로망의 정치화 트럼프 대통령의 고보수주의 성향은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7월 우리에게 방위비 분담금 100억달러(약 14조6942억원)를 요구했다. 내년에 우리가 부담해야 할 방위비 분담금은 1조5192억원이다. 지난 14일 공개된 한미 정상회담 조인트 팩트시트엔 주한미군에 대한 330억달러(약 48조4948억원) 규모의 종합적 지원 내용이 담겨있다. 또 우리는 오는 2030년까지 미국산 군사 장비 구매에 250억달러(약 36조7385억원)를 지출해야 한다. 일본도 지난 5월부터 미국으로부터 주일미군 분담금 인상 압박에 시달려 매년 증액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부터 캐나다·그린란드·파나마 등 아메리카 대륙과 그 인근 지역으로 사실상 영토를 확장하려 하고 있다. 미국인에겐 영국·멕시코 등과 전쟁하면서 중·남부로 영토를 확장했던 19세기의 재림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대통령의 고보수주의 성향은 각국에 안기는 관세 폭탄에서도 잘 드러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그린란드 주민이 투표를 통해 미국 편입·독립을 결정한 상황에서 덴마크가 이를 방해하면 덴마크에 고액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관세를 군사·외교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단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에 대해 “포퓰리즘”이란 지적이 이어지는 이유는 관세 폭탄에서 잘 드러난다. 공화당은 지난 6일 진행된 뉴욕시장·버지니아 주지사·뉴저지 주지사 선거에서 참패했다. 선거의 핵심 쟁점은 생활비 부담이었다. 뉴욕시에선 주거비가 급등했고, 뉴저지주에선 전기요금이 연 20% 상승했다. 특히 버지니아주에선 트럼프 대통령의 연방정부 인력 감축 방침과 셧다운 여파로 공무원들이 급여를 받지 못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4일 커피·바나나·쇠고기·견과류 등 생활필수품에 대한 상호 관세를 면제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부과 방침 이후 생활필수품 물가가 급상승한 여파로 선거에서 패배하자 뒤늦게 상호 관세를 면제한 것이다. 특히 쇠고기는 미국 축산농가의 반발을 무시하면서 관세를 면제했다. 장 대표는 이 같은 트럼프 대통령의 ‘겉’만 빌리는 것으로 해석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1990년대 이후 미국 정치권이 주도한 변화의 여파로 서민의 삶이 악화한 흐름을 날카롭게 찌르면서, 이들의 바람을 선동적 언어로 표현해 대권을 거머쥔 것이다. 불만 조직화한 트럼프 지지율↓ 원인 장동혁 30년 넘게 진행된 신자유주의·개입주의에 대한 반감 때문에 강경 보수가 대규모 조직화한 영향도 트럼프 대통령의 대권 도전에 날개를 달아줬다. 하지만 국내에선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전한길씨 등이 주도하는 강경 보수에 대한 대중의 거부감이 매우 크다. 이들의 언행은 강경 보수의 틀을 벗어나면, 조롱 대상이 될 뿐이다. 아울러 미국에선 민주당이 신자유주의 질서를 주도했다. 이 때문에 공화당은 미국 특유의 고보수주의를 표방하는 트럼프 대통령을 통해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반면 국민의힘은 시장경제·기업 경영의 자유 등 신자유주의 질서를 지지하는 의견을 유지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당시부터 신자유주의 성향의 경제 정책을 유지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양당의 의견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아울러 양당은 특히 젊은 남성들이 민감하게 여기면서 비판하는 각종 검열을 적극적으로 진행한다. ▲셧다운제 도입 ▲확률형 아이템 규제 ▲게임물관리위원회 검열 논란 등 검열 논란은 정당을 불문하고 꾸준히 일어났다. 미국에선 민주당과 지지자들이 주도하는 정치적 올바름 논쟁이 영화계로 이어져 <백설공주>와 <인어공주> 등 영화에 유색인종 주인공이 발탁돼 큰 논란으로 확산했다. 이런 논란을 주도하면서 서민을 훈계한 대표 세력은 월스트리트·각계 엘리트·언론이었다. 이 논란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대권 도전 과정에 큰 영향을 줬다. 국민의힘은 각종 검열 논란과 관련해 더불어민주당과 별 차이가 없다. 이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처럼 젊은 보수 성향 유권자들을 유인하기가 쉽지 않다. 아울러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 세력 중엔 불법 이민을 통해 미국에 입국한 멕시코인을 경계하는 기존 유색인종 유권자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대선에서 ▲흑인 중 8% ▲히스패닉 중 28% ▲아시아계 중 27% 등 득표율을 보였다. 지난해 대선에선 ▲흑인 중 13% ▲히스패닉 중 46% ▲아시아계 중 40%가 그에게 투표했다. 반면 장 대표는 지난 6일, 광주에서 5·18 민주묘지를 참배하지 못했고 국민의힘은 장 대표를 비난하는 시위를 한 시민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공화당을 완전히 장악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장 대표는 국민의힘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언더 찐윤(진짜 친윤)’에 의해 옹립된 재선 의원에 불과하다. 국민의힘은 장 대표 취임 이후에도 지지율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한국갤럽이 지난 11일부터 13일까지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지지율은 24%였다. 이는 전주보다 2% 낮아진 수치며, 지지율 42%를 기록한 민주당보다 18% 낮다. 심지어 전통적인 표밭 대구·경북에서도 지지율 42%를 얻는 데 그쳤다. 표밭도 위험하다 어설픈 표절은 죽도 밥도 안 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30여년 동안 누적된 미국의 문제점과 유권자의 불만을 꿰뚫은 후 유권자들이 향수를 느끼는 옛 로망을 자극해 대권을 거머쥐었다. 정치에 대한 유권자의 불만을 투표로 연결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진정한 ‘트럼프 벤치마킹’은 아닐까? 장 대표는 꾸준히 정체되고 있는 국민의힘의 지지율에서 뭘 보고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