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아직도 잘못 모르는 박근혜

  • 박창민 기자 cmp@ilyosisa.co.kr
  • 등록 2017.04.03 09:37:56
  • 호수 11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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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평 독방행’ 칠순도 감옥서 지낼라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됐다.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인용되면서 그간의 ‘정치 인생’이 막을 내리게 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뇌물 혐의로 구속되면서 ‘인생’까지 막을 내릴 위기에 처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하루아침에 범죄자 신세로 전락했다. 파란만장한 박 전 대통령의 인생사를 돌아봤다.

검찰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영렬)가 삼성으로부터 433억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 등으로 청구한 박 전 대통령의 구속영장이 지난달 31일 법원서 발부됐다. 서울중앙지법 강부영 영장전담판사는 지난달 30일 박 전 대통령의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한 뒤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을 다음 날 오전 3시3분에 발부했다. 강 판사는 “주요 혐의가 소명되고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어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 상당성이 인정된다”며 구속사유를 설명했다.

주요 혐의 소명
증거인멸 우려

전직 대통령이 구속된 것은 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에 이어 역대 세 번째다. 검찰은 최장 20일 동안 박 전 대통령을 구속 수사할 수 있지만, 대선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공식 선거일이 시작되는 오는 달 17일 전에는 수사를 마무리하고 재판에 넘길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통령 구속은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파면된 지 21일 만이다. 대통령에서 범죄자로 전락하기까지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인생사였다. 박 전 대통령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2월2일 경북 대구시 삼덕동(현재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서 당시 육군본부 작전차장 박정희 대령과 중학교 교사 출신 육영수 여사의 1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나 두 살 때부터 서울서 자랐다.

아홉 살이 되던 해인 1961년 당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이던 박정희 소장이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고 2년 뒤인 1963년 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큰 영애’로 불리며 청와대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이 시기부터 각종 외교행사에 참석했다. 1966년 존슨 미국대통령 방한 당시 ‘한국의 밤’ 행사에 등장했고, 1968년 9월에는 대통령 부부의 호주 방문에 동행했다. 1969년에는 일본 요코하마서 열린 당시 세계 최대 유조선인 ‘유니버스 코리아호’의 진수식에서 샴페인을 터트리기도 했다.

성심여중에 입학한 박 전 대통령은 성심여고 졸업까지 재학하는 동안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고 1974년 서강대 이공학부(전자공학 전공)를 4년 평균 학점 4점 만점에 3.82로 수석 졸업했다.

탄핵으로 사실상 ‘정치인생’ 막 내려
뇌물혐의 구속…‘인생’도 막 내릴 위기

대학 졸업 후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그해 8월15일, 어머니 육 여사가 광복절 기념식장서 문세광의 총격을 받아 숨졌다.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9년 10월26일,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서거하면서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생활도 마무리됐다.

박 전 대통령은 10·26 사건이 발생한 지 한 달가량 지나 서울 신당동 자택으로 들어가 18년간 칩거 생활을 했다. 당시 27세의 박 전 대통령은 두 동생들과 청와대를 나와 육영재단 운영 외 특별한 직업이나 대외활동 없이 18년을 보냈다.

이 기간 동안 최태민 목사와 그의 딸 최순실씨, 최씨의 남편 정윤회씨 등 일부 측근들에 의지한 것으로 알려진다. 일각에선 칩거 기간 동안 박 전 대통령이 한번 믿은 사람은 끝까지 믿는 가치관이 형성됐다고 주장한다.

세상으로 다시 걸어 나온 건 1997년이었다. 그해 대선을 불과 여드레 앞두고 한나라당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 총재에 대한 지지선언으로 정치행보를 시작했다. 앞서 박 전 대통령은 정치권의 영입 제안을 여러 번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이 후보는 대선서 패배했고 박 전 대통령은 대구 달성 재보선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며 본격적인 정치를 시작했다.


박 전 대통령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천부적 재질을 타고난 듯했다. 사람들은 그의 정치 감각을 부친인 박정희 대통령에게 물려받은 것이라고 했다. 한나라당 부총재 시절인 2002년 이 총재가 자신이 주장한 당개혁안(총재직 폐지, 당권.대권 분리)을 수용하지 않자 탈당하는 강수를 둬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

가혹한 운명
역사에 오점

한나라당은 이후 이 총재의 대선패배와 이후 차떼기사건 수사,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 등으로 사면초가에 내몰렸다. 박 전 대통령은 당을 살릴 구원투수로 화려하게 등판했다. 2004년 천막당사서 보여준 원칙과 개혁의 리더십은 명실상부 차기 대권주자로 각인되기에 충분했다.

2006년 5월20일. 서울시장 선거 유세지원 현장서 괴한에게 커터칼 피습을 당해 오른쪽 뺨 11㎝가 찢겨 대수술을 받았음에도 깨어나자마자 선거 격전지인 대전 지역의 판세를 걱정하는 "대전은요?"라는 첫 마디로 단숨에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면모를 보였다.
 

2007년 당 경선에선 이명박 후보에게 밀렸으나 또다시 위기에 빠진 당의 구원투수로 전면에 나서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개혁에 착수, 2012년 4월 총선서 야권연대로 맞선 민주통합당을 누르고 과반 의석(152석) 확보에 성공했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2012년 압도적 지지로 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으며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개정했다. 이후 2012년 12월 치러진 대선에서 득표율 51.7%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꺾고 승리하며 한국의 첫 여성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박 전 대통령은 2013년 2월25일 경제부흥과 국민행복, 문화융성, 평화통일 기반 구축을 4대 국정기조로 제시하며 5년 임기의 시작을 알렸다. 그는 국민이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고 희망의 새 시대를 열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대내외 악재에 크게 흔들렸고 이를 수습하느라 국정운영에 큰 차질을 빚었다.

취임 첫 해부터 박 전 대통령은 인사난맥으로 위기를 맞았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 김용준 국무총리 후보자 낙마를 시작으로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장관 후보자, 김병관 국방부장관 후보자, 한만수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 황철주 중소기업청장 내정자, 김학의 법무부 차관 내정자 등이 박 전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13년 3월 줄줄이 낙마했다.

특히 미국 순방 도중 벌어진 윤창중 전 대변인의 성추문 사태가 국제적 큰 화젯거리로 부상하며 박 전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윤진숙 전 해양수산부장관 사퇴와 안대희·문창극 총리 후보자 낙마가 이어져 인사 실패 논란은 계속됐다. 이를 탈피하기 위해 박 전 대통령은 인사수석실을 신설하는 등 청와대의 인사검증시스템을 개선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인사 문제가 계속 지적돼 인사에 골머리를 앓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인사 실패와 더불어 국가정보원의 정치개입 논란도 구설수에 올랐다.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건, 2014년 국정원의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해킹 프로그램 구입과 민간인 사찰 의혹 등으로 박 전 대통령은 국론분열과 민심악화를 겪은 것이다. 이는 국정운영에 부담으로 작용했다.


집권 2년차인 2014년 박 전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와 비선 실세 문건 파동 등으로 또 한 번 국정운영에 위기를 맞았다. 박 전 대통령은 집권 2년차를 맞아 2014년 2월25일 취임 1주년 대국민담화를 통해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제시하며 경제살리기 성과 창출에 대한 의지를 내세웠다.

그러나 그해 4월16일 세월호 침몰사고로 국정운영이 사실상 올스톱 상태에 빠졌다.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사고 현장을 방문하는 등 수색과정을 챙겼지만 ‘세월호 7시간 의혹’만이 남았다. 특히 수습과정서 드러난 정부의 무능한 대처와 부조리,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청와대의 태도 등은 국민의 공분을 샀고 결국 박 전 대통령의 국정운영에도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를 탈피하기 위해 박 전 대통령은 참사 한 달여 만에 대국민담화를 통해 해양경찰청 해체를 선언하고 국가안전시스템에 대한 대대적인 개선작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두 명의 총리 후보자가 낙마하면서 사고 책임 차원에서 사퇴 의사를 밝혔던 정홍원 전 총리를 유임시키는 등 진통이 계속 이어졌다.

최씨의 전 남편 정씨의 국정개입 의혹이 제기되면서 박 전 대통령은 또다시 위기를 맞았다. 박 전 대통령은 비선 실세 의혹을 ‘지라시’ 수준으로 규정하며 청와대 문건 유출 의혹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당부했다. 하지만 문건 유출과 관련해 조사를 받던 최모 경위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황이 발생하며 파장이 확대됐다.

선거의 여왕
어쩌다 이 지경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재만·정호성·안봉근 비서관 등 이른바 ‘문고리 3인방’과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의 갈등이 드러나며 청와대 내부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받으며 국정운영이 순탄치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집권 3년차를 공공·노동·금융·교육 등 4대 구조개혁의 원년으로 삼을 계획이었다. 한국 경제 재도약을 위해서는 사회 각 부문의 강력한 개혁이 필수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전국단위 선거가 없는 2015년이 구조개혁의 적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2015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파문에 측근들이 연루되는 등 국정 동력을 상실했다.

2015년 4월 자살한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금품 리스트’ 메모가 정권에 악재로 작용했다. 메모에 이완구 전 총리와 전현직 대통령비서실장 등의 이름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의 지지율도 20%대로 곤두박질쳤다.

당시 일각에선 ‘조기 레임덕’을 우려했다. 파문은 현직 총리에 대한 검찰 수사로 연결됐고 이 전 총리는 결국 낙마했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새누리당의 4·29 재보선 압승으로 국정동력을 회복하는 듯했다.
 

집권 4년차에 들어선 지난해 박 전 대통령은 20대 총선서 새누리당이 참패하면서 레임덕에 빠지게 됐다. 지난 16대 총선 이후 16년 만에 여소야대 구도가 형성되면서 박 전 대통령의 국정 동력도 크게 떨어진 것.

이에 박 전 대통령은 여소야대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협치(힘을 합쳐 잘 다스려 나간다는 의미)’를 내세웠다. 하지만 사드 배치를 둘러싼 야당과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청문회 개최 요건을 완화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취임 후 두 번째 거부권을 행사하며 국회와의 협치도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질곡의 65년 인생사 
굴곡의 18년 정치사

일각에선 지난해 7월 처가의 부동산 매매로부터 시작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둘러싼 각종 의혹이 박 전 대통령을 몰락으로 이끌었다고 주장한다. 박 전 대통령은 우 전 수석의 자진사퇴를 주장하던 야당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우 전 수석을 품고 놓지 않은 점이 큰 요인이다.

박 전 대통령이 우 전 수석을 감싸는 동안 최씨가 현 정부의 비선 실세라는 의혹이 점차 불거졌다. 그러면서 박 전 대통령의 지지율도 하락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에 박 전 대통령은 지난해 10월24일 국면 회복을 위해 ‘개헌’ 카드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이 개헌 카드를 제시한 당일 최 씨의 태블릿PC와 관련한 JTBC의 보도가 나오면서 모든 것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JTBC는 2015년 10월 최씨에게 대통령 연설문과 각종 정부 문건들이 유출됐다는 보도를 시작으로 최씨의 딸 정유라의 이화여대 입시·학사부정, K스포츠·미르재단 설립지원 등을 보도했다. 이는 ‘최순실 게이트’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박 전 대통령은 JTBC 보도 다음날 대국민사과에 나서는 등 총 세 차례 대국민담화를 했다. 새 국무총리 후보자에게 전권을 맡기고 자신은 2선으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으며 여야가 자신의 진퇴 문제를 합의하면 그에 따르겠다고도 약속했다.

4년 집권 내내
조용한 날 없어

하지만 성난 민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2016년 12월9일 국회의 탄핵소추 가결로 박 전 대통령은 직무정지상태를 맞았다. 그로부터 91일 만인 지난달 10일 헌재 탄핵심판으로 박 전 대통령은 헌정 사상 처음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으로 물러난 ‘최초의 탄핵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cmp@ilyosisa.co.kr>

 

[최순실 게이트 일지]

<2016년>
▲10월24일 = 최순실 국정운영 개입 의혹 보도.
▲10월31일 = 최순실 피의자 소환조사. 긴급체포
▲11월4일 = 박 전 대통령 두 번째 대국민 담화. ‘검찰 조사·특검 수용’입장 발표
▲11월20일 = 최순실·안종범·정호성 구속기소
▲11월27일 = 차은택·송성각 전 원장 구속기소
▲11월29일 = 박 전 대통령, 세 번째 대국민 담화. “진퇴 문제 국회 결정에 맡기겠다”입장 표명
▲12월08일 = 장시호 구속기소
▲12월28일 = 문형표 조사 중 피의자 입건·긴급체포

<2017년>
▲1월22일 = 최순실 체포영장 청구. 최순실 체포영장 발부
▲1월29일 = 남궁곤 이대 전 입학처장 구속기소
▲2월07일 = 김기춘·조윤선 구속기소
▲2월15일 = 최경희 전 이대 총장 구속
▲2월17일 = 이재용 부회장 구속
▲2월22일 = 우병우 구속영장 기각. 박채윤 구속기소
▲3월10일 =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 파면 결정.
▲3월21일 = 박 전 대통령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 조사
▲3월31일 = 박 전 대통령 구속영장 발부. 서울구치소 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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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머외 쿠팡’ 막가는 싸가지 행보

‘검머외 쿠팡’ 막가는 싸가지 행보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고객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쿠팡의 태도가 도마 위에 올랐다. 현재까지 대응만 봐서는 국민은 물론, 정부와도 전면전을 벌일 기세다. 새어나간 정보의 범위와 규모가 ‘역대급’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최악의 사태임에도 불구하고 쿠팡의 고개는 꺾일 줄 모르고 있다. 일각에서는 ‘뭘 믿고 저러나’ 소리가 나오는 중이다. 쿠팡의 고객 개인정보 유출 사건, 이른바 쿠팡 사태가 점입가경이다. 사태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수습은커녕 국민의 화만 돋우고 있다. 쿠팡의 대응 태도가 미지근한 수준을 넘어 뻔뻔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 김범석 의장은 모습을 비추지 않고 보상안은 꼼수로 가득하다. 국민을 조롱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한 달 만에 고개 숙여 지난해 11월 말 3370만명에 이르는 쿠팡 고객의 개인정보가 ‘탈탈’ 털렸다. 앞서 쿠팡은 4500여건의 고객 정보가 유출됐다고 정부 당국에 신고했지만 2주 만에 그 수치는 7500배까지 늘어났다. 전 국민의 65% 수준이며 지난해 4월 SKT 개인정보 유출 사태 범위(2300만명)를 훌쩍 넘는 사태였다. 쿠팡은 이커머스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다. 대형마트 등이 규제에 막혀 뒷걸음질 칠 때 쿠팡은 로켓배송으로 시장을 싹쓸이했다. 전날 저녁에 주문해도 새벽이면 물건이 문 앞에 와 있는 총알 배송에 소비자는 쿠팡으로 몰렸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비판을 받던 물류센터는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아이러니하게도 쿠팡이 국민의 실생활에 얼마나 스며들어있는지를 바로 보여줬다. 쿠팡 사태가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글로벌 투자은행 JP모건은 “쿠팡이 경쟁자가 없는 시장 지위를 누리고 있고 한국 고객이 데이터 유출에 덜 민감해 보인다”며 “잠재적 고객의 이탈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놨다. 그래서일까? 쿠팡은 역대 최악의 정보 유출 사태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대통령이 언급하고 정부 차원의 TF가 꾸려졌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힘겨루기’를 하는 태도를 보이는 중이다. 최근에는 정부의 반박에도 자체 조사 결과를 고집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보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쿠팡은 지난달 25일 ‘정보 유출자는 3300만개 계정에 접근했으나 실제 저장한 정보는 3000여개에 불과하며 제3자 유출 정황은 없는 등 피해가 미미하다’는 내용의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면서 “(유출자는)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언론 보도를 접한 이후 저장했던 정보를 모두 삭제하고 범죄에 사용한 노트북을 파손해 하천에 던졌다”고 주장했다. 쿠팡은 “잠수부들이 벽돌에 담긴 쿠팡 가방에 든 노트북을 하천에서 회수했고 유출자가 클라우드 계정에 등록한 일련번호와 해당 노트북의 일련번호가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범행에 사용된 PC 와 노트북 등 모든 장치를 회수해 안전하게 확보했고 글로벌 보안업체들의 조사 결과도 진술 내용과 같았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매출 90% 나오는데 정보 유출 태도·대응 낙제점 쿠팡이 발표한 대로라면 고객 정보 유출 피해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또 유출자와 접촉해 장치를 확보했으니 추가 피해는 없다. 전체적으로 사건이 축소되는 것이다. 쿠팡의 발표에 정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쿠팡의 조사 내용은 사전에 정부와 어떤 논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됐다는 설명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부)는 “정보 유출 종류와 규모, 경위 등은 민관합동조사단이 조사 중인 사안”이라며 “쿠팡이 발표한 내용은 조사단에 의해 확인된 바 없다”고 밝혔다.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과도 “쿠팡 측이 제출한 진술서와 노트북 등 증거물을 분석 중”이라며 “사실관계를 면밀하게 확인하겠다”고 했다. 논란이 계속되자 쿠팡은 정부의 지시를 받아 조사를 진행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경찰은 사전 협의가 없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사실관계가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쿠팡은 지난달 26일 내놓은 입장문에서 “정부의 지시에 따라 수주간 진행한 조사였다”고 선을 그었다. 같은 달 9일 정부가 쿠팡 측에 유출자와 접촉할 것을 제안했고 14일 쿠팡은 유출자를 처음 만난 뒤 해당 사실을 정부에 보고했으며 16일에는 정부 지시에 따라 유출자의 데스크톱과 하드드라이브를 정부에 제공했다는 게 쿠팡 측 주장이다. 하지만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도 “쿠팡의 입장문 형식의 보도자료에서 정부와 협력했다는 내용 중 일부 국정원으로 추정되는 부분도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된 부분이 있다”고 반박했다. 쿠팡이 자체 조사와 관련해 정부와 사실 공방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김범석 쿠팡 의장이 사건 발생 한 달여 만에 사과했다. 그동안 박대준 전 대표가 청문회 등에서 뭇매를 맞고 있는 동안에도 김 의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정부의 압박이 거세지자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다. 5만원 상당 속사정은? 김 의장은 지난달 28일 “쿠팡의 창업자이자 이사회 의장으로서, 쿠팡 전체 임직원을 대표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이어 “저희의 책임으로 발생한 이번 데이터 유출로 인해 많은 분께서 자신의 개인정보가 안전하지 않다는 두려움과 불안을 느꼈고 사고 초기부터 명확하게 직접적으로 소통하지 못한 점으로 인해 큰 좌절감과 실망을 안겨 드렸다”며 “사고 직후 미흡했던 초기 대응과 소통 부족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김 의장은 한 달 만에야 입을 연 부분에 대해 “무엇보다 제 사과가 늦었다”면서 “모든 사실이 확인된 이후에 공개적으로 소통하고 사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돌이켜보면 이는 잘못된 판단”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비판과 질책을 겸허히 받아들인다고도 했다. 하지만 자체 조사 논란에 대해서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김 의장은 “쿠팡은 조사 초기부터 정부에 전면적으로 협력해 왔다”며 “일련의 과정에서 많은 오정보가 확산하는 상황에서도 정부의 ‘기밀 유지’ 요청을 엄격히 준수했다”고 주장했다. 김 의장의 사과는 국회 6개 상임위원회가 참여하는 대규모 연석 청문회를 이틀 앞두고 나왔다. 정부가 범부처 TF를 과기부 총리 산하로 확대하고 다각도로 압수수색과 조사를 진행하는 등 대응 수위를 높이는 상황에 압박을 느꼈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그러나 사과와는 별개로 김 의장은 청문회에 불출석하겠다고 밝혔다. 김 의장뿐만 아니라 동생인 김유석 쿠팡 부사장, 강한승 전 쿠팡 대표 등이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하면서 쿠팡에 대한 부정적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여기에 쿠팡이 내놓은 보상안도 도마 위에 올랐다. 쿠팡은 지난달 29일 고객 정보 유출 사태와 관련해 총 1조6850억원 규모의 보상안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전체적으로 보면 1인당 5만원 상당이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뜯어보면 쿠팡의 ‘꼼수’가 보인다. 청문회는 나 몰라라 보상안은 ▲쿠팡 전 상품 구매 이용권 5000원 ▲쿠팡이츠 5000원 ▲쿠팡트래블 2만원 ▲명품 플랫폼 알럭스 2만원 등으로 구성됐다. 소비자들은 보상금의 상당 부분이 쿠팡트래블과 알럭스 등 평소 이용 빈도가 낮은 서비스 이용권 위주로 구성된 점을 지적했다. 실제 이번 보상안을 통해 쿠팡트래블과 알럭스를 처음 알게 됐다는 소비자도 있다. 시민단체도 쿠팡의 보상안에 반발했다. 참여연대는 “1인당 5만원 보상이라고 했지만 현금이 아닌 구매 이용권으로 사실상 강제 소비를 유도하는 방식”이라며 “보상이 아니라 매출 확대를 위한 마케팅에 불과하다”는 내용의 논평을 발표했다. 쿠팡의 행보는 사사건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국민을 조롱하고 정부를 기만하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쿠팡이 미국 시장에 상장한 기업이지만 매출 대부분을 우리나라에서 벌어들이는 상황인데도 이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에 분노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회원 탈퇴, 보상안 거부, 집단소송 참여 움직임이 거세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심지어 이재명 대통령도 쿠팡 사태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했다. 이 대통령은 쿠팡 사태가 일어나고 사흘 뒤인 지난달 2일 “쿠팡 때문에 국민의 걱정이 많다”면서 “사고 원인을 규명하고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면서 “관계부처는 해외 사례를 참고해 과징금을 강화하고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도 현실화하는 등 실질적인 실효적 대책에 나서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뒤늦은 사과·꼼수 보상안 도마 위에 이래서 정치권 인사 영입했나? 의혹 12일에도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반복되는 것에 대해 “경제 제재가 너무 약해서 규정 위반을 밥 먹듯이 한다”며 “앞으로는 규정을 위반해 국민에게 피해를 주면 엄청난 경제 제재를 당해서 ‘회사가 망한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규정을 위반하면 난리가 나야 하는 것 아니냐”며 “그런데 위반해도 태도를 보면 ‘그래서 어쩔 건데’ 이런 느낌이 든다”고 지적했다. 정부도 쿠팡에 강력하게 경고하며 전방위 대응을 예고했다. 실제로 같은 달 29일, 배경훈 부총리 겸 과기부 장관 주재로 ‘쿠팡 사태 범정부TF’ 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과기부와 경찰청, 개인정보위원회, 금융위원회 등은 역할을 분담해 신속한 조사를 진행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배 부총리는 “쿠팡이 국내 고객 정보 3000만건 이상을 유출한 것은 명백한 국내법 위반 사항으로 정부는 쿠팡이 관련 법령을 위반한 사실이 확인될 경우, 다른 기업과 동일하게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영업정지 여부도 판단할 것으로 보인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압박에도 쿠팡이 연달아 이상한 행보를 보이자 ‘믿는 구석’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그 정도로 쿠팡의 현재 대응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일각에서는 쿠팡이 미국 기업인 것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 증시가 쿠팡의 모든 결정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라는 것이다. 실제 쿠팡이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한 다음 날 미국 뉴욕 증시에서 쿠팡의 주가는 6% 급등했다. 국내에서는 쿠팡의 ‘셀프 조사’에 분통을 터트리고 있는데 미국 시장에는 호재로 작용한 것이다. 쿠팡이 정치·국회 인사를 대거 영입한 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정치권 인사를 영입해 쿠팡 관련 각종 논란을 틀어막고 있다는 의혹이다. 해당 의혹은 ‘강력 경고’ ‘전방위적 대응’ 등의 수사를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 조사는 흐지부지될 것이라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나오는 배경으로도 꼽힌다. 변죽 울리다 무사통과? 실제 최근 원내대표직에서 사퇴한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의원이 국정감사를 한 달여 앞둔 시점에 박대준 전 쿠팡 대표 및 대관 총괄과 오찬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쿠팡이 일용직 퇴직금 미지급 사건에서 검찰 외압 의혹, 물류센터·배송 기사의 과로 및 산재 사망 문제가 제기된 상황이었던 만큼 적절성 논란이 불거졌다. 김 의원은 그달 16일 자신의 SNS에 “공개 일정이고 적어도 5명이 (함께) 식사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만남보다 대화의 내용이 중요한 것 아니냐? 참고로 지난해 7월16일 쿠팡 물류센터도 방문했었다”고 적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