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치는 재계> 쪼개지는 중견기업 대해부

‘같이 못해’ 갈기갈기 찢어 경영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형제간 우애가 남다르더라도 자식 세대의 유대관계는 선대만 못한 법이다. 경영권을 쥔 오너 일가 역시 마찬가지다. 1세대와 2세대를 거쳐 3·4세대로 경영권이 승계될수록 끈끈했던 공조체제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한 뿌리를 공유하던 몇몇 기업들이 각자 생존을 도모하고자 계열분리 카드를 꺼내드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과거 그룹사 계열분리는 ‘형제의 난’을 통해 주로 이뤄졌다. 창업주에게 선택받지 못한 다른 핏줄이 갈라져 나오거나 동업자 가문이 따로 떨어져 나오는 형태로 계열분리가 이뤄진 것이다. 후대로 갈수록 유대관계가 느슨해지는 특성상 재벌가에선 계열분리가 당연한 수순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사촌 체제서
각자 생존 모색

사촌경영 체제를 구축한 그룹사 가운데 계열분리 가능성이 점쳐지는 곳은 세아그룹과 삼보판지그룹이다.

형제경영 체제로 운영되던 세아그룹은 고 이운형 회장이 2013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후 이태성 전무와 이주성 전무를 내세운 ‘3세 사촌경영 체제’로 탈바꿈했다.

아버지인 고 이운형 전 세아그룹 회장에게 세아제강 지분을 상속받은 2013년까지만 해도 이태성 세아홀딩스 전무의 세아제강 지분은 19.12%였다. 그러나 상속세 마련을 위해 이태성 전무는 세아제강 지분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세아제강 지분율은 지난해 말 15.44%까지 떨어졌다.


대신 세아홀딩스 지분을 32.05%서 35.12%로 늘렸다. 반대로 이주성 세아제강 전무는 같은 기간 세아제강 지분율을 10.77%서 11.2%로 늘렸다.

지분변화가 발생하자 이순형 회장과 이주성 전무가 세아제강과 해덕기업 등 계열사를 중심으로 계열분리 가능성을 점치는 목소리도 한층 커졌다. 고 이운형 회장의 아들인 이태성 전무는 세아홀딩스, 이순형 세아홀딩스 회장의 아들인 이주성 전무는 세아제강을 주축으로 계열분리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창업세대인 류종욱 회장과 류종우 부회장 형제의 긴밀한 협력관계로 유명한 삼보판지그룹은 오너 2세들이 공동 경영행보를 계속 이어갈지 관심이 집중된다. 삼보판지그룹은 주력 계열사인 삼보판지만 공동 대표이사 체제를 유지할 뿐 오너 2세로 승계가 이뤄지면서 각자 지분 정리가 끝난 양상이다.

류 회장 일가는 삼보판지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삼보판지는 류 회장의 차남인 류진호 사장이 21.87%(306만 1100주)로 최대주주다. 류 사장의 형인 류경호 이사가 13.68%, 류 회장도 10.99%를 보유해 류 회장 일가 지분율이 총 46.54%에 달한다.

류 부회장의 장남 류동원 사장은 공동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삼보판지 지분 15.18%를 보유해 2대 주주로 이름을 올렸지만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뒤쳐진다.

또 다른 주력 계열사인 대림제지는 류 부회장 일가 소유다. 대림제지의 최대주주는 지분 22.47%를 가진 류 부회장의 차남 류창승 대표다. 2대 주주는 15.35%를 가진 류 부회장이며 류 회장은 지분 2.56%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경영권 때문에
갈라서는 형제


형제경영 체제를 띠고 있는 중흥건설, 대웅제약, 매일유업 역시 계열분리 가능성이 언급된다.

중흥건설 승계 과정서 주목할 회사는 중흥토건과 시티건설(옛 중흥종합건설)이다. 중흥토건과 시티건설은 정창선 회장의 장남인 정원주 사장과 차남인 정원철 사장이 각각 지분 100%를 갖고 있다.

중흥건설은 중흥토건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분위기다. 정원주 사장이 중흥토건을 통해 계열사를 지배하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 중흥토건은 중흥에스클래스의 지분 90%를 확보한 것을 비롯해 중봉건설, 다원개발, 새솔건설, 에코세종, 중흥엔지니어링, 청원개발, 청원산업개발 등의 지분을 과반 이상 보유한 상태다.

정원철 사장은 시티건설을 앞세워 독자 생존을 모색 중이다. 정 사장은 시티건설과 시티글로벌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시티글로벌은 시티주택건설, 시티개발, 아이시티건설 지분 100%를, 시티종합건설 지분 51.18%를 갖고 있다.
 

시티글로벌이 실질적인 지주사 역할을 하면서 계열사를 지배하는 구조다. 시티건설은 2005년 중흥건설의 본거지인 광주를 떠나 서울 강남으로 이전했다.

일반화되는 3·4세 경영승계 속도 
경영권·상속분쟁 계열분리로 해결

대웅제약그룹은 윤재훈 알피그룹 회장이 ㈜대웅 주식담보대출을 모두 상환하면서 사실상 계열분리가 끝났다. 윤 회장은 최근 삼성증권과 체결했던 주식담보대출(주담대) 계약을 해지했다. 계약해지로 주식 자본거래가 자유로워진 윤 회장이 대웅제약그룹과의 계열분리를 마무리 짓기 위해 ㈜대웅 지분을 모두 처분할 가능성이 거론된다.

윤 회장은 2015년 대웅제약그룹 후계자 자리를 놓고 동생인 윤재승 회장과 경합을 벌였지만 결국 계열사인 알피코프를 가져가는 형태로 형제간 경영권 분쟁을 마무리했다. 현재 윤 회장이 보유한 ㈜대웅 지분은 33만8823주(2.91%)까지 줄어든 상태다.

업계에선 대웅제약그룹과 선을 그은 윤 회장이 ㈜대웅 지분을 모두 처분할 것으로 보고 있다.

지주회사 전환에 나선 매일유업그룹은 김정완 매일유업 회장과 동생인 김정민 제로투세븐 회장을 주축으로 계열분리 가능성이 점쳐진다. 매일유업은 오는 5월1일 투자회사 매일유업홀딩스(가칭)와 사업회사 매일유업으로 분할된다. 매일유업홀딩스가 지주회사로서 매일유업 등의 자회사를 거느리는 구조가 될 전망이다.

지주회사 전환은 형제간 계열분리 시나리오를 고려한 포석이라는 관측이 적지 않다. 계열분리의 대상으로 꼽히는 기업은 제로투세븐이다. 매일유업이 34.74%의 지분을 보유한 제로투세븐은 김정완 회장의 막냇동생인 김정민 회장이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김정민 회장은 원두커피 기업인 씨케이코퍼레이션, 커피전문점 루쏘랩 등을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등 새 사업 발굴에 적잖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희미해지는
선대의 유산

일동제약, 영풍, 삼천리 등 동업관계로 출발한 기업서도 계열분리 가능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된다.

일동제약과 일동후디스라는 이분화된 체계로 운영되는 일동제약그룹은 지난해 지주사 출범을 공표한 이래 계열분리 가능성이 누차 언급된 곳이다. 일동후디스 경영권을 쥐고 있는 이금기 명예회장 일가서 그룹사를 떠날 거란 관측이다.

이금기 회장은 일동후디스 지분 21.47%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일가로 확대하면 42.84%로 늘어난다. 일동제약이 보유한 일동후디스 지분은 29.91%로 이금기 회장 일가에 훨씬 못 미친다. 이 회장은 1960년 일동제약에 입사한 평사원 출신으로 26년간 대표이사로 활동했고 일동제약 지분 5.47%를 보유한 주요 주주다.

일동제약과 이 회장이 서로 보유한 주식을 스왑(주식 교환)하는 형태로 계열분리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증권가서 나온다.

수면 아래서 치열해지는 합종연횡 
사촌·형제·동업…유대관계 옛말


영풍그룹은 오너2세인 장형진 영풍그룹 명예회장이 2015년 3월, 22년 만에 대표이사에서 물러난 데 이어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도 지난해 3월 등기이사에서 사임했다. 두 사람은 영풍그룹 공동창업주인 최기호, 장병희씨의 장남이다.
 

장 명예회장의 장남인 장세준 영풍전자 부사장과 최 명예회장의 차남인 최윤범 고려아연 부사장도 영풍그룹 경영을 이끌 오너 3세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장세준 부사장은 2009년부터, 최윤범 부사장은 2007년부터 영풍그룹의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두 집안은 전자사업과 비철금속 제련사업을 각각 맡고 있다. 장씨 일가는 지주회사 격인 영풍을 중심으로 영풍전자, 영풍문고, 영풍개발 등을 거느리고 있다. 최씨 일가는 고려아연을 중심으로 유미개발, 서린상사, 서린정보기술, 알란텀 등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런 지배구조 때문에 고려아연과 고려아연 지분을 보유한 유미개발, 영풍정밀 등을 중심으로 계열분리 가능성이 떠오른다. 계열분리 수준을 밟는 것이 회사의 성장성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삼천리그룹은 창업자인 고 이장균 회장과 고 유성연 회장이 공동 설립한 후 60년 넘게 ‘한 지붕 두 가족’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2세인 이만득 회장과 유상덕 회장도 동업 체제를 이어받았다. 두 사람은 삼천리와 삼탄의 지분을 절반씩 나눠 갖고 동업체제를 유지한 바 있다. 서로 경영에 간섭하지 않고, 이씨 집안은 삼천리 계열, 유씨 집안은 삼탄 계열을 독자 경영하기로 한 것이다.

삼천리그룹 오너 3세 가운데 경영에 참여한 사람은 이씨 집안의 이은백 부사장과 이은선 이사 둘 뿐이다. 유씨 일가 3세 중에는 아직 경영에 참여한 사람이 없다.

이해관계 얽힌
당연한 수순?

재계에선 60년간 이어져왔던 동업경영이 언제쯤 중단될지 주목하고 있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3세 경영시대가 갖춰지면 각자 생존을 모색하는 모양새로 오너 경영체제가 자리잡을 거란 관측이다.

재계 관계자는 “경영에 참여하는 구성원이 증가하면 필연적으로 계열분리가 뒤따르는 경우가 많다”며 “3·4세대에 이르러 자연스럽게 유대력이 약해지고 독자노선을 추진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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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한미 정상회담 팩트시트가 공개되자, 가장 큰 화제가 된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에 대해 “문구가 추상적이어서 모호하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자극 받은 일본도 핵잠수함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핵잠수함 건조를 현실화하지 않으면 “일본에 핵 보유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의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하게 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달 29일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타결된 한미 관세·안보 협상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가 지난 14일 공개됐다. 가장 큰 논란은 핵 추진 잠수함(이하 핵잠수함) 관련 합의 문구였다. 산 너머 산 구체성 없다 팩트시트를 통해 확인되는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선 “구체성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팩트시트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민간·해군의 원자력 프로그램 ▲한미 원자력 협정에 부합하고 미국의 법적 요건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로 귀결될 절차 등을 지지한다. 이어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고, 한국과 조선 사업 요건 진전·연료 조달 방안 등을 포함해 긴밀히 협력한다. 미국은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 지지·승인·협력할 뿐이다. 이를 두고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같은 날 브리핑에서 “한미 정상의 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에서 건조하는 게 전제였다”며 “우리 핵잠수함을 미국에서 건조하는 방안은 거론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같은 날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며 “국내 건조 장소 합의는 팩트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기자들 앞에서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을 발표하면서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건조될 것”이라며 “미국 조선업이 곧 대대적인 부활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핵잠수함이 건조되려면, 산적한 현안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 팩트시트엔 건조 장소가 적시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명시해 발표했기 때문에, 미국이 순순히 양보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같은 회담 결과를 두고 양국의 주장이 엇갈리는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다.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및 핵연료 재처리엔 ▲한미 원자력 협정 부합 ▲미국의 법적 요건 준수 ▲한국의 평화적 이용 등 단서가 붙는다. 기술 이전 과정에도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핵잠수함 보유국은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인도 등 6개국이다.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30일 “미국이 핵잠수함 기술을 공유한 사례는 1950년대 최우방국 영국과 협력한 사례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미국의 핵잠수함 기술은 미군이 보유한 가장 민감하고 철저히 보호돼온 기술”이라며 “가까운 동맹인 영국·호주와 체결한 핵잠수함 협정에서도 직접 기술 관련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우리에겐 우라늄 농축·재처리 기술이 없어서 미국으로부터 핵연료를 공급받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하지만 연료 공급 장소·방식은 팩트시트에 명시되지 않았다. 연료 공급 방법을 확보하지 못하면, 핵잠수함을 만드는 의미가 없다. 핵잠 건조 추상적인데 “고정밀지도 내놔” 발 빠르게 비핵 3원칙 수정하려는 일본 미국의 법률 개정 절차도 거쳐야 한다. 미국 원자력법은 ‘미국이 다른 나라와 군사적 목적의 원자력 협력을 하려면, 원자력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미 원자력 협정을 개정한 후 미국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국제 무기 거래 규정도 상원의 동의를 얻어 개정해야 한다. 원자력 협정 개정이 팩트시트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미국 에너지부의 반대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미국 일각에서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한단 것이다.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미국에 고정밀지도를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팩트시트엔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포함한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정책에 있어 미국 기업이 차별당하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위치·재보험·개인정보에 대한 것을 포함해 정보의 국경 간 이전을 원활하게 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도 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온라인플랫폼의 ▲자사 우대 ▲끼워팔기 ▲멀티호밍 제한 등을 막는 내용이 담긴 우리의 온플법 제정을 반대했다. 팩트시트를 따르면, 미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가 어려워진다. 아울러 우리는 구글·애플이 요청하는 1:5000 축척 고정밀지도 국외 반출 요청을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정부는 애플이 요청한 지도 반출 여부를 다음 달에, 구글의 요청은 내년 2월 결정할 예정이다. 팩트시트에 게재된 합의 사항대로라면, 애플·구글의 요청을 수용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 박성훈 수석대변인은 지난 15일 논평을 통해 팩트시트 속 위험요소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박 대변인은 “정부는 ‘농·축산물 개방은 없다’고 말해 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대로 농·축산물 개방 문구가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고정밀 지도 반출 등 대한민국의 디지털 주권과 직결된 사안까지 미국의 요구를 반영해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반도체 관세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보다 불리하지 않게 한다’는 모호한 문구만 있다”며 “경쟁국 대만과 비교해 어떻게 적용할지 등 구체적인 내용은 팩트 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50억달러(약 36조7183억원) 규모의 미국산 군사 장비를 5년 동안 구매하고, 주한미군에 대해 330억달러(약 48조4682억원)를 포괄적으로 지원하면, 천문학적인 재정 부담을 떠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핵잠수함 건조 과정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라서 장밋빛 전망만 내세울 때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고정밀지도 반출 가능성 실제로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가 실현되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해서 실질은 아직 불투명하다”며 “선언이 지나치게 앞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는 핵잠수함 나비효과가 일본으로 번졌단 점이다.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자, 일본 정치권도 크게 술렁였다.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은 지난 12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미국·중국은 이미 핵잠수함을 갖고 있고, 지금은 핵잠수함을 보유하지 않은 한국·호주가 앞으로 보유하게 된다”며 “일본의 억지력·대응력을 강화하려면, 전고체·연료전지·원자력 등 다양한 동력원에 대해 폭넓게 논의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일본은 1967년 사토 에이사쿠 당시 총리가 선언했던 비핵 3원칙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비핵 3원칙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선언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일찍부터 핵무기 반입 금지 방침 완화를 주장했다.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도 같은 날 “현 시점에선 재검토 여부를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국회 연설에서 “내년 중 3대 안보 문서 개정을 위해 검토를 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3대 안보 문서는 ▲국가안보 전략 ▲국가방위 전략 ▲방위력 정비 계획 등을 말한다. 여기엔 비핵 3원칙이 모두 포함돼있다. 일본은 이미 지난 2022년 “반격 능력을 보유하고, 장거리 미사일 전력을 향상한다”는 내용을 3대 안보 문서에 포함했다. 묘한 것은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이 일본 국내 정치구도까지 뒤흔들 가능성이 있단 것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카이치 총리가 선출될 당시 라이벌이었다. 지난달 4일 진행된 자민당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183표(31.1%)를 얻었고, 고이즈미 방위상은 164표(27.8%)를 얻었다. 결선투표에선 다카이치 총리가 185표(54.3%)를, 고이즈미 방위상은 156표(45.7%)에 머물렀다. 하마터면 다카이치 총리는 자민당 총재·총리로 선출되지 못할 뻔했다. 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로 통하는 다카이치 총리에 반발한 공명당이 지난달 10일 자민당과의 연정에서 탈퇴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명당 사이토 데쓰오 대표는 고이즈미 방위상에 대해선 “정치자금 규제와 관련된 공명당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면서 호평했다. 고이즈미 방위상도 “지금까지 정책 실현에 대해 힘써 주신 것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화답했다. 미일 협력 중국 견제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0일 기적적으로 일본유신회와의 각외 협력 형태의 연립 정권 구성에 합의했다. 각외 협력은 연립 정권 구성엔 합의하지만, 내각엔 참여하지 않는 형태를 말한다. 일본유신회가 제시한 조건은 ▲오사카 부수도 지정 구상 수용 ▲국회의원 정원 10% 감축 ▲기업·단체 후원 폐지 ▲평화 헌법 개정 ▲방위력 강화 등이었다. 자민당과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모두 수용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1일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했다. 가장 큰 정치적 의미는 ‘당내 정적 포용’이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전혀 없는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해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정반대의 의미를 강조하는 해석도 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없는 고이즈미를 현안이 산적한 방위성 장관으로 임명해 자멸을 유도한다”는 취지의 해석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주어진 현안은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 ▲자주적 방위력 강화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 ▲방위 장비 수출 운용지침 폐지 등이다. 이중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은 ‘중국 견제’라는 미국·일본의 공통 이해관계로부터 시작됐다. 일본은 군사력을 강화해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역할을 맡으려고 한다. 미국은 일본의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더 효율적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 문제는 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 “방위비를 GDP(국내총생산)의 3.5%로 증액하라”고 요구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8일 진행된 미일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위비 증액·방위력 강화 방침을 설명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음 날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을 만나 “방위비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오는 2028년 3월까지 방위비를 GDP의 2%까지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방위 정책과 관련해 국내 정세와 가장 민감하게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을 곤란하게 할 사안이 있다. 바로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이다. 일본 오키나와현 소재 후텐마 기지는 기나완시 시가지 한복판에서 시 면적의 1/4을 차지하고 있다. 후텐마 기지는 1945년 건설됐고, 일본에서 크고 작은 논란을 일으켰다. 오키나와현의 주민 중 상당수는 미군의 범죄와 소음 피해 등을 이유로 기지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팩트시트’ 고이즈미 날개 다나 견제 압박 와중에 뜻밖의 호재 지난 2004년엔 후텐마 기지 소속 헬리콥터가 오키나와국제대학에 추락하는 등 사고도 여러 번 발생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편입된 시점은 1879년이었다. 1945년부터 1972년까진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따라서 오키나와에선 반미 감정이 강하고, 자민당 지지율이 낮은 편이다. 후텐마 기지와 관련해서도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섬 내 나고시 헤노코 이전을 추진했지만, 오키나와 현·주민의 반대가 강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23년엔 다마키 데니 현지사가 방위성이 신청한 비행장 설계 변경 신청을 승인하지 않고 공사 중단을 요구했다.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은 일본의 역사적 맥락과 맞물려 수십년 넘게 해결되지 못한 사안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중국 견제를 위한 새 안보 질서와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정치적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 2019년 고이즈미 방위상을 환경상으로 발탁했다. 이 임명에 대해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무게를 키우면서도, 문제가 발생하면 그를 정치적으로 낙마시킬 수도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의 아버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퇴임 이후 강력한 원자력 발전소 폐지론자가 됐다. “아버지의 활동이 아들의 정치적 미래를 흐리게 할 수 있어 고이즈미 방위상을 견제하는 묘수”란 평가도 있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기후 변화 문제는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등 적당히 괴상한 발언을 하는 등 바보 행세를 하면서 견제를 피했다. 한동안 일본에선 고이즈미 방위상이 진짜로 바보인지, 바보인 척 연기를 하는지 장난 섞인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후 고이즈미 방위상은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고노 다로 전 외상과 연합해 이시바 내각 탄생에 큰 공을 세웠다. 이어 농림수산상으로서 쌀값 폭등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지난 2023년엔 자민당 내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조기 의회 해산 및 총선거 진행을 적극적으로 제안한 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자민당은 중의원 과반에 미달하는 의석을 얻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더 큰 패배를 당하기 전에 적절한 시점에서 중의원 해산을 건의했다”며 긍정적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방위상 취임 이후엔 어떻게 구 아베파·아소파의 견제를 피할 것인지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한 사안은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견제 수위를 낮추면서 자민당·내각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뜻밖의 호재로 다가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이 일본의 핵잠수함 도입을 주도한다면,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가 될 수도 있다. 견제 회피 일거양득 우리의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일본 정치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사안이 된 것이다. 만약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불확실해지면, 이재명정부는 이 때문에 더욱 큰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일본의 군비 증강에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미래를 위한 발판을 제공한 것”이란 비판이 따라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핵잠수함 나비효과는 이렇게 일본으로 번졌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