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부리 여행 ①서대문 영천시장

고소한 냄새가 10리까지 퍼지는 주전부리의 향연

출출한 오후 4시 반, 입이 심심한데 뭐 먹을 게 없을까 고민이라면 서대문 영천시장으로 가보자. 시장의 명물 꽈배기와 떡볶이부터 참기름 바른 꼬마김밥, 든든한 팥죽, 고소한 인절미, 쫀득한 찹쌀순대, 시원한 식혜까지 입맛 돋우고 속 채워줄 간식거리가 모두 모였다. 저렴한 값은 덤이다.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인근의 영천시장에서는 그야말로 먹거리의 향연이 펼쳐진다. 시장은 깔끔한 모습으로 정비됐지만, 그 역사는 60년 세월을 품고 있다. 심심풀이로 먹던 주전부리에 맛을 더하는 시장 인심이 살아 있는 곳, 한 번도 못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는 영천시장으로 맛있는 간식 여행을 떠나보자.
 

시장 인심 가득한 곳

시장 주전부리 가운데 선두주자는 꽈배기다. 밀가루 반죽이 170℃ 기름에 노릇노릇 익어 갈색 옷으로 갈아입는다. 뜨끈한 열기 품은 꽈배기가 설탕 통에 툭 떨어진다.

흰 안개꽃을 맷돌에 곱게 갈아놓은 듯한 설탕이 빠지면 팥소 없는 찐빵. 한 입 베어 물면 달콤하고 바삭하게 씹히는 맛에 기분이 좋아진다. 후드득 떨어지는 설탕을 털어내며 또 한 입, 멈출 수가 없다.
 

영천시장 대표 옛날 꽈배기 장사는 두 자매가 책임진다. 언니는 시장 안 ‘원조꽈배기’서, 동생은 시장 입구 ‘달인꽈배기’서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다. 자매가 서대문에 터를 잡았을 때만 해도 인근 아파트가 모두 판자촌이었다.


“1980년대에 영천시장이 꽈배기 골목으로 유명했어요. 꽈배기 집만 13곳이나 됐지요. 꽈배기 하나에 25원일 때니까요. 고무 대야에 물건 파는 아주머니들이 매일 아침 가게 앞에 늘어서서 받아 가곤 했어요.”

지금은 인근 사무실 직원이나 등산객이 출출할 때 간식으로 많이 찾는다. 1000원짜리 한 장에 어른 손바닥만 한 꽈배기를 네 개나 담아주니 고맙다. 비싼 물가에 빈 장바구니와 배 속을 넉넉하게 채워줄 고마운 먹거리다.

‘독립문영천도넛’의 쫀득한 찹쌀도넛도 인기다. 직접 불려 만든 찹쌀 반죽을 5분간 튀긴다. 찹쌀 반죽은 밀도가 높아 밀가루 반죽보다 기름에 오래 머물러야 제맛이 난다. 주문은 1번에서 6번까지 번호로 하면 된다. 못난이찹쌀꽈배기와 못난이찹쌀팥도넛은 천안남산중앙시장서 반죽을 가져오고, 나머지는 직접 개발했다. 휴일이 따로 없다.“

원래 수요일이 휴일인데 거의 쉬지 못해요. 모처럼 한 번 쉬면 다녀간 사람들이 ‘헛걸음했다. 이제 장사 그만하려고 그러냐’면서 한마디씩 하거든요.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들이 고마워서 매일 나옵니다.” 주말에는 주인과 똑 닮은 딸아이가 일손을 돕는다.

이곳 시장 사람들은 손님이 모두 이웃이다. 영천시장 먹거리가 맛있는 까닭이다. 정겨움과 따스함이 비법 양념이 되고, 내 가족이 먹는 음식이라는 생각으로 정성을 더한다. 거래가 아니라 나눔인 것. 그래서 사람 냄새 풀풀 나는 이야기가 넘친다.
 

영천시장의 또 다른 먹거리인 매콤하고 달콤한 떡볶이는 대체 불가 메뉴다. 과거 인근에 떡 공장이 많아 자연스럽게 떡볶이 가게가 늘어났다고 한다.

손님은 잊히지 않는 맛을 기억해서 매번 찾아오고, 주인은 그 맛을 대접하려고 평생 떡볶이를 만든다. 떡볶이 장사만 40년. 독립문역 방향 초입에 있는 ‘원조떡볶이’가 방송을 타며 유명세를 얻었고, 덕분에 영천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꽈배기, 떡볶이, 팥죽… 정성 가득 주전부리
서대문독립공원, 개미마을 등 가족 나들이로 제격

“한 총각이 예쁜 처녀를 데리고 와서 ‘할머니, 아직 살아 계시네요!’ 하더라고요. 대전에 사는데 10년 만에 왔다면서요. 가는 길에는 ‘다시 올 때까지 꼭 건강하세요’라고 하는데, 내 나이 일흔다섯이니까 그 총각 때문에 백 살까지 살아야겠어요.” 정정한 주인 할머니의 모습에 기분이 좋다.


바로 옆 ‘영천떡볶이집’은 이곳 상인들도 인정하는 맛이다. 국산 쌀로 직접 뽑은 떡을 사용하고, 모든 튀김 재료는 직접 마련해 믿고 먹을 만하다. 도톰한 김말이도 매일 저녁 국산 당면으로 사장이 직접 만든다. 꼬마김밥은 우엉을 넣어 맛이 알차다. 식사 대용으로도 맞춤이라 가족 단위 손님이 많다.

몇 년 전 일본 관광 잡지에 소개돼 외국인 손님이 자주 찾는다. 특수 제작한 패널 의자가 엉덩이를 데우고, 먹기 전에 나오는 보리차가 입맛을 돋운다.

“좋은 재료를 쓰는 건 25년 장사에 변함없는 철학이에요. 2000원짜리 판다고 아무렇게나 만들면 안 되죠. 처음에는 적자였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손님이 가득하니 기분이 좋아요.”

영천시장의 가게 이름은 직관적이다. 40년 전통의 일명 ‘갈떡’, 떡볶이 마니아 사이에 유명한 갈현동 할머니 떡볶이에 ‘둘째네’가 붙었다. 갈현동 할머니 떡볶이집의 둘째 아들이 운영하는 곳이다. 국물떡볶이를 맛보고 싶다면 둘째네를 찾으면 된다. 말랑한 밀가루 떡과 떡볶이 국물에 푹 젖은 군만두가 잘 어울린다.
 

한 끼 식사로 손색없는 ‘맛나팥죽’의 팥죽과 호박죽도 일품이다. 붉은팥과 쌀 모두 국산을 쓴다. 푸근해 보이는 주인이 새알을 빚어 매일 아침 팥죽을 끓인다.

엄마가 끓여준 것처럼 달지 않고, 밥알이 부드럽게 씹히면서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팥죽 한 그릇에 건강을 담았다. 이 집의 또 다른 인기 품목은 식혜. 시원하고 깔끔한 단맛이 갈증을 풀어준다. 2ℓ생수병에 담긴 식혜 한 통에 4000원.
 

비 오는 날에 영천시장을 찾는다면 파전에 막걸리가 제격이다. 끼니와 끼니 사이, 구수한 막걸리 한 잔과 잘 구운 파전 한 점이면 쌓인 피로가 스르르 녹는다. 전집은 맑은 날에도 안산자락길 걷기를 마친 등산객으로 붐빈다. 쫄깃한 찹쌀순대 역시 허기를 채우는 간식으로 훌륭하다.

인절미와 흑임자인절미는 하루가 지나도 쫀득하다. 영천시장 골목 250m는 배가 불러도 먹고 싶은 먹거리로 가득하다. 가벼운 주머니로 허기를 채우고, 그저 한 입 먹어보라는 시장 인심이 있어 계속 가고 싶은 곳이다.
 

서대문구의 주전부리 여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빵 굽는 냄새 가득한 연희동 베이커리 골목이 있다. 서울 3대 빵집으로 꼽히는 ‘리치몬드’ 연희점, 역사가 50년이 훌쩍 넘은 ‘독일빵집’ 등 연희삼거리를 중심으로 빵집 여섯 곳이 모였다.

이 가운데 ‘피터팬제과(PETERPAN1978)’의 크로앙슈가 인기다. 부드러운 페이스트리와 달콤한 아몬드크림이 만나 여성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현미를 커피콩 로스팅하듯 갈아 차처럼 만든 오늘의차와 함께 먹으면 좋다.


역사의 발자취

영천시장 주변에는 볼거리도 많다. 길 건너 서대문독립공원에 있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가족 나들이나 데이트 코스, 아이들의 체험 활동지 등으로 많은 이들이 찾는다. 서대문형무소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를 탄압·통제하기 위해 만든 전국 최대 규모의 근대 감옥이다.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건물에서 역사의 발자취를 거슬러 올라가자.


형무소 뒤편의 서대문구립이진아기념도서관을 따라가면 혼자만 알고 싶은 도심의 쉼터, 안산자락길을 만난다. 산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그리 높지 않고, 전국 최초로 조성된 순환형 무장애 산책로라 노약자나 장애인도 불편함 없이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연희숲속쉼터는 4월이면 벚꽃과 개나리, 목련이 흐드러져 봄을 만끽할 최고의 장소로 변한다. 안산 정상(295. 9m)의 봉수대는 서울시를 한눈에 담기 벅찰 만큼 탁 트인 시야로 도심 속 서울 전망대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인왕산을 품은 홍제동 개미마을도 놓치지 말자. 서울에 몇 남지 않은 달동네로, 지하철 3호선 홍제역 1번 출구에서 서대문 07번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면 된다. 언덕길을 오르며 세월에 지워진 벽화를 바라보면 할머니의 분칠처럼 정겹다. 골목골목 연탄 냄새가 짙게 배었다.

살림살이 곳곳에 가난의 흔적이 묻어나지만, 이곳 사람들은 개미처럼 열심히 산다. 마을 중간에 위치한 ‘버드나무가게’는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집이다. 오가며 우연히 만난 이에게 따뜻한 차 한잔 건네는, 사람 냄새 그득한 동네다.  

 


<여행 정보>

당일 여행 코스
영천시장→서대문독립공원(독립문-서재필 선생 동상-독립관-3·1독립선언기념탑-순국선열추념탑-서대문형무소역사관-서대문구립이진아기념도서관)→홍제천→개미마을

1박2일 여행 코스
- 첫째 날: 영천시장→서대문독립공원(독립문-서재필 선생 동상-독립관-3·1독립선언기념탑-순국선열추념탑-서대문형무소역사관-서대문구립이진아기념도서관)→홍제천→개미마을
- 둘째 날: 홍제역→인왕시장→연희숲속쉼터→안산자락길→서대문자연사박물관→연희동 베이커리 골목

관련 웹 사이트 주소
- 영천시장 www.facebook.com/sijangyc
- 서대문구청 서대문여행 www.sdm.go.kr/educate/travel.do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www.sscmc.or.kr/newhistory/index_culture.asp
- 서대문자연사박물관 namu.sdm.go.kr

문의 전화
- 서대문구청 문화체육과 02-330-1410
- 서대문구청 지역활성화과 02-330-8106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02-360-8583
- 서대문자연사박물관 02-330-8899

대중교통 정보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4번 출구, 도보 약 8분. 5호선 서대문역 2번 출구, 도보 약 14분.
(문의: 서울메트로 1577-1234, www.seoulmetro.co.kr)

자가운전 정보
경부고속도로 한남 IC→한남대교→소월로→후암로58길→서울역사거리에서 연신내역·서대문역·서울역 방면으로 좌측→통일로→의주로지하차도→독립문 앞 공영주차장
(독립문사거리 직전에 독립문 앞 공영주차장이 있다. 요금은 10분당 500원. 평일 오후 7시 이후, 토요일 오후 3시 이후, 일요일·공휴일에는 무료. 주말에는 영천시장 옆 대로 갓길에 오전 10시~오후 6시 무료 주차 가능.)

숙박 정보
- 그랜드힐튼서울: 서대문구 연희로, 02-3216-5656, www.grandhiltonseoul.com
- Ever8레지던스: 서대문구 신촌역로, 02-6946-0808, ever8.co.kr
- 신라스테이 서대문: 서대문구 충정로, 02-6388-9000, www.shillastay.com/seodaemun/index.do

식당 정보
- 석교식당(순댓국): 서대문구 통일로, 02-363-2803
- 녹원쌈밥(쌈밥): 서대문구 연희로25길, 02-336-9483
- 대성집(도가니탕): 종로구 사직로, 02-735-4259, daesungjip.modoo.at

주변 볼거리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대문독립공원, 딜쿠샤, 돈의문 터, 서울 경교장, 서울 홍파동 홍난파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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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