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대망 접은 반기문 20일 천하 풀스토리

괜히 나섰다가 망신만 당했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지난 1일 대선레이스에서 중도이탈했다. 10년간 맡았던 유엔 사무총장직을 내려놓고 지난달 12일 귀국한 뒤 20일 만이다. 반 전 총장이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대선판도는 안갯 속으로 접어들었다.

가뜩이나 후보가 없는 여권은 다시금 자중지란 속으로, 후보가 넘쳐 나는 야권은 누가 대항마가 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입국부터 사퇴까지 ‘20일 천하’가 돼버린 반 전 총장의 행적을 되짚어봤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은 귀국하자마자 최고의 뉴스메이커로 떠올랐다. 그의 행보는 연일 기삿거리를 양산했고 발언은 언론 지상을 뒤덮었다. 그만큼 반 전 총장은 입국부터 사퇴까지 20일간 숱한 논란에 휘말렸다.

반 전 총장과 관련된 논란은 귀국길부터 시작됐다. 그는 비행기에 오르기 전 귀국 소감을 묻는 언론의 질문에 “가슴이 벅차고 설렌다. 국가 발전을 위해 10년간의 경험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 면도 많다”고 말했다.

못 견디고
중도 사퇴

귀국보다 더 큰 관심을 받은 건 반 전 총장의 친인척 비리 문제였다. 반 전 총장의 동생 반기상씨와 조카 주현씨는 경남빌딩 매각과 관련해 뇌물, 사기, 돈세탁 등의 혐의로 그의 귀국 하루 전 뉴욕연방법원에 기소됐다.

반 전 총장은 이 자리서 “아는 것이 없다. 장성한 조카여서 사업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었고 만나지도 않았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가까운 가족이 연루된 것에 당황스럽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대단히 송구하다”고 밝혔다.

지난달 12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한 반 전 총장은 “국민들의 따뜻한 환대에 감사한다”는 말을 시작으로 귀국 연설문을 발표했다.

그는 “국민대통합을 반드시 이뤄내야 한다”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겪은 여러 가지 경험과 식견을 가지고 젊은이의 보다 밝은 미래를 위해 길잡이 노릇을 하겠다” “정권교체가 아니라 정치교체가 이뤄질 때라고 생각한다” 등 국민통합과 정치교체에 방점을 찍은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러면서 “오로지 국민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한 몸을 불사를 용의가 있다”며 사실상 대권 도전 의지를 피력했다.

반 전 총장이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날도 귀국 메시지보다 의전 논란이 더 관심을 받았다. 반 전 총장 측은 귀국 전 인천공항에 대통령 등 3부 요인급에게 제공되는 의전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 전 총장 측은 인천공항에 내려 승용차로 자택에 가려던 일정을 공항철도를 이용하는 방향으로 변경했다. 그가 시민들과 만나고 싶다면서 바꾼 일정이었다. 일정이 변경되면서 수백명의 지지자들이 공항철도로 몰려들었고 일대는 혼란에 빠졌다. 반 전 총장의 동선에 따라 에스컬레이터를 통제하는 등 과잉 의전으로 퇴근길 시민들의 항의가 이어졌다.

귀국 이후 광폭행보 이어갔지만

과거 발언·친인척 비리에 발목

누리꾼의 풍자 대상이 된 ‘2만원 논란’도 이날 나왔다. 반 전 총장은 인천공항역에서 7500원짜리 표를 사면서 무인발매기에 1만원권 두 장을 동시에 집어넣었다. 이 모습을 포착한 누리꾼은 반 전 총장의 행보를 ‘서민 코스프레’라고 비난했다. 이날의 해프닝은 이후 이어질 ‘1일 1논란’의 서막에 불과했다.

귀국 다음 날에는 반 전 총장의 피선거권 논란이 불거졌다. 공직선거법 제16조 1항에 따르면 ‘선거일 현재 5년 이상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40세 이상의 국민은 대통령의 피선거권이 있다. 이 경우 공무로 외국에 파견된 기간과 국내에 주소를 두고 일정기간 외국에 체류한 기간은 국내 거주기간으로 본다’고 규정한다.

이를 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일 현재 5년 이상의 기간을 국내에 거주한 사실이 있는 40세 이상의 국민은 국내에 계속 거주와 관계없이 대통령의 피선거권이 있다”며 “제19대 대통령선거일까지 5년 이상 국내에 거주한 사실이 있다면 공무 외국 파견 또는 국내에 주소를 두고 일정 기간 외국체류 여부를 불문하고 피선거권이 있다”고 해석했다.

중앙선관위의 해석을 놓고 법조계 등 각계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귀국 사흘째인 지난달 14일에는 충북 음성의 사회복지시설인 꽃동네를 방문했다. 반 전 총장은 어르신들의 수발을 드는 과정에서 본인이 턱받이를 한 모습이 보도돼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게다가 똑바로 누워 있는 할머니에게 죽을 건네고 그마저도 얼굴에 흘리는 등 좌충우돌하는 모습으로 세간의 비난을 받았다. ‘반기문 턱받이’ 논란은 하루 종일 포털 사이트 검색 순위 상위권에 오르는 등 큰 관심을 받았다.

입국·사퇴
속전속결

논란이 커지자 반 전 총장 측은 “(턱받이는) 꽃동네 측에서 요청한 복장”이라고 해명했다. 소설가 이외수씨는 자신의 SNS를 통해 “반기문의 어이없는 서민 친화 코스프레. 정치가들의 거짓말과 속임수에 이제는 진력이 났다”며 “제발 국민들께 진실을 좀 보여 주시지요”라고 맹비난했다.

같은 날 조류인플루엔자(AI) 거점 소독소 방문 일정서도 반 전 총장을 비롯, 일부만 방역복을 입고 소독약을 분사해 안전성 논란에 휩싸였다. 이날을 기점으로 전형적인 ‘보여주기식’ 행보라는 비난이 빗발쳤다.

반 전 총장은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와 관련해 지난달 15일 경기도 평택 해군 2함대를 방문한 일정에서 “한반도 현실이 거의 준전시 같은 상황이기 때문에 정부가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은 마땅하다”고 밝힌 바 있다.

반 전 총장의 발언은 즉각 야권 인사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미국 앞에서 작아지는 지도자가 어찌 국익을 지킬 수 있겠느냐”며 “미국이 우리 최대 동맹국이고 앞으로도 최고의 우방이어야 하지만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은 “자신의 고향인 충북 음성에 사드 배치를 유치할 의사가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일각에선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적 지지를 잃고 청와대서 쫓겨날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함께 탄핵당할 정책을 옹호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달 16일에는 반 전 총장이 박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전한 사실이 알려졌다. 이날 전화 통화에서 반 전 총장은 “직접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하는데 상황이 이렇게 돼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부디 잘 대처하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귀국 이후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고 들었다”며 “유엔 사무총장으로 10년간 노고가 많으셨다”고 화답했다. 국민의당 박지원 대표는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 죽이 잘 맞는 것 아닌가”라며 일침을 가했다.

보여주기 행보
과잉의전 구설

국민통합 행보로 경남 봉하마을에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과 세월호참사 희생자 분향소를 잇달아 방문했던 지난달 17일에도 논란은 끊이질 않았다. 반 전 총장은 노무현정부 시절 대통령 외교보좌관과 외교통상부장관을 지냈다.


그뿐만 아니라 노 전 대통령은 반 전 총장을 유엔사무총장으로 적극 지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반 전 총장은 노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조문을 하지 않아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봉하마을을 찾은 그의 행보에 대해 일각에선 대통령이 되기 위한 ‘야권 달래기’에 들어간 게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다.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지난해 12월 자신의 SNS에 “(반 전 총장은) 자신의 모든 노력을 다했던 노 전 대통령의 그 슬픈 죽음에 현직 대통령의 눈치를 보느라 조문조차 못 했던 분”이라며 “정치에 기웃거리지 말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실제 반 전 총장이 봉하마을을 찾았을 땐 분위기가 싸늘했다. 또 반 전 총장은 방명록에 ‘사람 사는 사회’라고 작성해 논란을 자초했다. 김보협 <한겨레신문> 기자는 “그분이 꿈꿨던 세상은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지적했다.

같은 날 세월호참사가 발생한 진도 팽목항에 방문해서는 미수습자 가족들과도 만났다. 그 과정에서 바른정당 박순자 의원이 미수습자 가족들을 불러 반 전 총장과 사진을 찍게 한 사실이 알려졌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자신의 SNS에 “반기문, 오늘 팽목항을 방문했다. 2014년 참사 직후 뉴욕 분향소 조문 외에 그는 세월호에 대해 단 하나의 언동도 하지 않았다”며 “팽목항은 대권용 쇼를 위한 장소가 아니다”고 꼬집었다. 일부 단체 회원들은 반 전 총장의 방문을 반대하며 시위를 벌였다.

‘1일 1논란’ 검증 칼날에 화들짝
현실정치 벽에 걸려 중도 낙마

지난달 14일에는 충북 음성의 부친 묘소 성묘 때 불거진 퇴주잔 논란도 도마에 올랐다.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급속도로 퍼진 영상에는 반 전 총장이 퇴주잔으로 보이는 술잔을 받아 마시는 장면이 담겨 있다.

누리꾼은 통상 묘소에 방문하면 술을 따라 올린 후 묘소 주변에 뿌리며 퇴주하는 것이 풍습이라며 그의 행동을 질타했다. 반 전 총장 측은 SNS에 당시 상황이 담긴 전체 영상을 공개하며 적극적으로 진화에 나섰다.

여기서 끝날 줄 알았던 퇴주잔 논란은 영상을 게재한 누리꾼이 선관위 조사를 받게 되면서 다시 불거졌다.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선관위는 지난달 26일 영상을 게재한 누리꾼이 공직선거법(허위사실 공표죄)을 위반한 혐의가 있다며 출석을 요구했다. 정식 선거운동 기간이 아니고 반 전 총장이 후보등록을 하지 않은 상태인데도 선거법을 적용할 수 있는지 여부에 관심이 쏠렸다.

선관위는 “반 전 총장은 모두가 입후보할 상황으로 보는 입후보 예정자이기 때문에 후보로 해석할 수 있다”며 유권해석을 내렸다. 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나 이재명 성남시장 등이 악의적인 루머에 시달릴 때는 이 같은 사례가 없었던 점을 들어 선관위가 ‘오버’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두고는 기자들과 갈등을 빚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그의 입장은 짧은 시간동안 자주 변했다. 지난 2015년 12월28일 한일 위안부 합의가 이뤄진 이후 반 전 총장은 박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박근혜 대통령께서 올바른 용단을 내린 데 대해 역사가 높게 평가할 것으로 생각한다”며 환영의 뜻을 비쳤다. 당시 발언은 후로 두고두고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귀국 직후 인터뷰에선 “재협상이 필요하다”고 말해 기존 입장과 배치된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상황에 따라 입장을 바꾼다는 비판이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기자들은 반 전 총장의 일정 때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요구했다.

모호한 답변으로 일관하던 반 전 총장은 지난달 18일 “위안부에 관해서 제가 역사적인 과오를 저지른 것처럼 말하는데 절대 아니다”며 “앞으로는 어떤 언론이 묻더라도 답변하지 않겠다”고 벽을 세웠다. 그 자리에 캠프의 이도운 대변인에게 “이 사람들이 와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만 물어보니까 내가 마치 역사의 잘못을 한 것 같다. 나쁜 놈들이에요”라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기자들의 사과 요구에도 며칠간 묵묵부답이던 반 전 총장은 지난달 23일 “시차 적응도 잘 안 되고 갑자기 지방을 돌다보니 수많은 기자들하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감정적인 표현을 한 점이 있었다”며 “후회하고 있고 해당 언론인들에게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반 전 총장은 기자들에게 사과의 말을 하기까지 “페이크 뉴스라든지 가짜 뉴스, 남을 헐뜯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그러는 건 대한민국 국민이 할 일이 아니다” “유엔에선 이런 식으로 취재하지 않는다” 등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대선 불출마 선언 직전인 지난달 31일에는 “촛불 민심이 변질됐다”는 발언으로 누리꾼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반 전 총장은 귀국 당시만 해도 촛불 집회에 대해 “자랑스러웠다” “역사가 2016년을 기억할 것” “광장이 만들어낸 기적” 등의 찬사로 광장에 모인 국민들을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3주 만에 “광장의 민심이 초기의 순수한 뜻보다는 약간 변질한 면도 없지 않다. 직접 가보진 않았지만 TV 화면에서 볼 때 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반 전 총장의 발언은 안 그래도 나빠진 여론에 기름을 끼얹었다. 반 전 총장은 박근혜-최순실게이트가 일어난 이후부터 지지율이 꾸준히 하향곡선을 그렸다. 귀국 직후에도 제대로 된 컨벤션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진 구설에 반등 동력조차 잃어가던 중이었다. 그 와중에 나온 촛불 변질 발언이 쐐기를 박았다.

결국 유권자
마음 못 얻어

반 전 총장은 지난해 <한국대학신문>이 전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대학생 의식조사 및 기업·상품 선호도 조사에서 피겨선수 김연아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2014년 조사에서는 1위였는데, 흥미로운 점은 전국의 대학생들이 가장 불신하는 집단으로 무려 85.3%가 ‘정치인’을 꼽았다는 점이다.

반 전 총장은 20일간의 ‘정치인 체험’으로 수십 년간 쌓아온 모든 명성과 존경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다. 여기에 친동생 반기호씨가 미얀마 사업체 운영 당시 ‘유엔 현지 방문대표단’ 직함을 사용해 특혜를 봤다는 의혹 등 친인척 비리와 관련해 수사기관의 칼날이 반 전 총장을 향한다면 그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것으로 보인다.


<jsja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낙동강 오리알’ 나경원·오세훈 다음 수는?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지난 1일,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멘붕’에 빠진 사람들이 있다. 새누리당 나경원 의원과 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 반 전 총장의 대권행보에 발을 걸쳤던 인물들이다. 나 의원은 반 전 총장의 서울 사당동 자택 복귀 환영식에 참석하는 등 꾸준히 그의 곁에서 지지를 보내왔다.

그는 반 전 총장의 불출마 소식을 듣고 “안타깝고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반 전 총장 개인이나 대한민국의 긴 역사를 볼 때 오히려 더 나은 결정인 것 같다”며 표정 관리에 나섰다.

바른정당 최고위원에 뽑혔지만 반 전 총장 캠프 선대본부장으로 갈 수도 있다고 밝혀 비판을 받았던 오 전 시장의 입장도 난감해진 건 마찬가지다.

오 전 시장은 지난 2일 국회서 열린 바른정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원래 예정대로라면 오늘 최고위원회의가 제가 참석하는 마지막 회의가 됐을 것”이라며 “(반 전 총장이) 바른정당 후보들과 연대 의지가 확고한 것을 보고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바른정당과 반 캠프 사이를 저울질하던 오 전 시장은 자연스럽게 당에 남게 됐다.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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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머외 쿠팡’ 막가는 싸가지 행보

‘검머외 쿠팡’ 막가는 싸가지 행보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고객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쿠팡의 태도가 도마 위에 올랐다. 현재까지 대응만 봐서는 국민은 물론, 정부와도 전면전을 벌일 기세다. 새어나간 정보의 범위와 규모가 ‘역대급’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최악의 사태임에도 불구하고 쿠팡의 고개는 꺾일 줄 모르고 있다. 일각에서는 ‘뭘 믿고 저러나’ 소리가 나오는 중이다. 쿠팡의 고객 개인정보 유출 사건, 이른바 쿠팡 사태가 점입가경이다. 사태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수습은커녕 국민의 화만 돋우고 있다. 쿠팡의 대응 태도가 미지근한 수준을 넘어 뻔뻔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 김범석 의장은 모습을 비추지 않고 보상안은 꼼수로 가득하다. 국민을 조롱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한 달 만에 고개 숙여 지난해 11월 말 3370만명에 이르는 쿠팡 고객의 개인정보가 ‘탈탈’ 털렸다. 앞서 쿠팡은 4500여건의 고객 정보가 유출됐다고 정부 당국에 신고했지만 2주 만에 그 수치는 7500배까지 늘어났다. 전 국민의 65% 수준이며 지난해 4월 SKT 개인정보 유출 사태 범위(2300만명)를 훌쩍 넘는 사태였다. 쿠팡은 이커머스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다. 대형마트 등이 규제에 막혀 뒷걸음질 칠 때 쿠팡은 로켓배송으로 시장을 싹쓸이했다. 전날 저녁에 주문해도 새벽이면 물건이 문 앞에 와 있는 총알 배송에 소비자는 쿠팡으로 몰렸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비판을 받던 물류센터는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아이러니하게도 쿠팡이 국민의 실생활에 얼마나 스며들어있는지를 바로 보여줬다. 쿠팡 사태가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글로벌 투자은행 JP모건은 “쿠팡이 경쟁자가 없는 시장 지위를 누리고 있고 한국 고객이 데이터 유출에 덜 민감해 보인다”며 “잠재적 고객의 이탈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놨다. 그래서일까? 쿠팡은 역대 최악의 정보 유출 사태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대통령이 언급하고 정부 차원의 TF가 꾸려졌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힘겨루기’를 하는 태도를 보이는 중이다. 최근에는 정부의 반박에도 자체 조사 결과를 고집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보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쿠팡은 지난달 25일 ‘정보 유출자는 3300만개 계정에 접근했으나 실제 저장한 정보는 3000여개에 불과하며 제3자 유출 정황은 없는 등 피해가 미미하다’는 내용의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면서 “(유출자는)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언론 보도를 접한 이후 저장했던 정보를 모두 삭제하고 범죄에 사용한 노트북을 파손해 하천에 던졌다”고 주장했다. 쿠팡은 “잠수부들이 벽돌에 담긴 쿠팡 가방에 든 노트북을 하천에서 회수했고 유출자가 클라우드 계정에 등록한 일련번호와 해당 노트북의 일련번호가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범행에 사용된 PC 와 노트북 등 모든 장치를 회수해 안전하게 확보했고 글로벌 보안업체들의 조사 결과도 진술 내용과 같았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매출 90% 나오는데 정보 유출 태도·대응 낙제점 쿠팡이 발표한 대로라면 고객 정보 유출 피해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또 유출자와 접촉해 장치를 확보했으니 추가 피해는 없다. 전체적으로 사건이 축소되는 것이다. 쿠팡의 발표에 정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쿠팡의 조사 내용은 사전에 정부와 어떤 논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됐다는 설명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부)는 “정보 유출 종류와 규모, 경위 등은 민관합동조사단이 조사 중인 사안”이라며 “쿠팡이 발표한 내용은 조사단에 의해 확인된 바 없다”고 밝혔다.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과도 “쿠팡 측이 제출한 진술서와 노트북 등 증거물을 분석 중”이라며 “사실관계를 면밀하게 확인하겠다”고 했다. 논란이 계속되자 쿠팡은 정부의 지시를 받아 조사를 진행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경찰은 사전 협의가 없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사실관계가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쿠팡은 지난달 26일 내놓은 입장문에서 “정부의 지시에 따라 수주간 진행한 조사였다”고 선을 그었다. 같은 달 9일 정부가 쿠팡 측에 유출자와 접촉할 것을 제안했고 14일 쿠팡은 유출자를 처음 만난 뒤 해당 사실을 정부에 보고했으며 16일에는 정부 지시에 따라 유출자의 데스크톱과 하드드라이브를 정부에 제공했다는 게 쿠팡 측 주장이다. 하지만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도 “쿠팡의 입장문 형식의 보도자료에서 정부와 협력했다는 내용 중 일부 국정원으로 추정되는 부분도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된 부분이 있다”고 반박했다. 쿠팡이 자체 조사와 관련해 정부와 사실 공방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김범석 쿠팡 의장이 사건 발생 한 달여 만에 사과했다. 그동안 박대준 전 대표가 청문회 등에서 뭇매를 맞고 있는 동안에도 김 의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정부의 압박이 거세지자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다. 5만원 상당 속사정은? 김 의장은 지난달 28일 “쿠팡의 창업자이자 이사회 의장으로서, 쿠팡 전체 임직원을 대표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이어 “저희의 책임으로 발생한 이번 데이터 유출로 인해 많은 분께서 자신의 개인정보가 안전하지 않다는 두려움과 불안을 느꼈고 사고 초기부터 명확하게 직접적으로 소통하지 못한 점으로 인해 큰 좌절감과 실망을 안겨 드렸다”며 “사고 직후 미흡했던 초기 대응과 소통 부족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김 의장은 한 달 만에야 입을 연 부분에 대해 “무엇보다 제 사과가 늦었다”면서 “모든 사실이 확인된 이후에 공개적으로 소통하고 사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돌이켜보면 이는 잘못된 판단”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비판과 질책을 겸허히 받아들인다고도 했다. 하지만 자체 조사 논란에 대해서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김 의장은 “쿠팡은 조사 초기부터 정부에 전면적으로 협력해 왔다”며 “일련의 과정에서 많은 오정보가 확산하는 상황에서도 정부의 ‘기밀 유지’ 요청을 엄격히 준수했다”고 주장했다. 김 의장의 사과는 국회 6개 상임위원회가 참여하는 대규모 연석 청문회를 이틀 앞두고 나왔다. 정부가 범부처 TF를 과기부 총리 산하로 확대하고 다각도로 압수수색과 조사를 진행하는 등 대응 수위를 높이는 상황에 압박을 느꼈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그러나 사과와는 별개로 김 의장은 청문회에 불출석하겠다고 밝혔다. 김 의장뿐만 아니라 동생인 김유석 쿠팡 부사장, 강한승 전 쿠팡 대표 등이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하면서 쿠팡에 대한 부정적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여기에 쿠팡이 내놓은 보상안도 도마 위에 올랐다. 쿠팡은 지난달 29일 고객 정보 유출 사태와 관련해 총 1조6850억원 규모의 보상안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전체적으로 보면 1인당 5만원 상당이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뜯어보면 쿠팡의 ‘꼼수’가 보인다. 청문회는 나 몰라라 보상안은 ▲쿠팡 전 상품 구매 이용권 5000원 ▲쿠팡이츠 5000원 ▲쿠팡트래블 2만원 ▲명품 플랫폼 알럭스 2만원 등으로 구성됐다. 소비자들은 보상금의 상당 부분이 쿠팡트래블과 알럭스 등 평소 이용 빈도가 낮은 서비스 이용권 위주로 구성된 점을 지적했다. 실제 이번 보상안을 통해 쿠팡트래블과 알럭스를 처음 알게 됐다는 소비자도 있다. 시민단체도 쿠팡의 보상안에 반발했다. 참여연대는 “1인당 5만원 보상이라고 했지만 현금이 아닌 구매 이용권으로 사실상 강제 소비를 유도하는 방식”이라며 “보상이 아니라 매출 확대를 위한 마케팅에 불과하다”는 내용의 논평을 발표했다. 쿠팡의 행보는 사사건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국민을 조롱하고 정부를 기만하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쿠팡이 미국 시장에 상장한 기업이지만 매출 대부분을 우리나라에서 벌어들이는 상황인데도 이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에 분노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회원 탈퇴, 보상안 거부, 집단소송 참여 움직임이 거세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심지어 이재명 대통령도 쿠팡 사태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했다. 이 대통령은 쿠팡 사태가 일어나고 사흘 뒤인 지난달 2일 “쿠팡 때문에 국민의 걱정이 많다”면서 “사고 원인을 규명하고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면서 “관계부처는 해외 사례를 참고해 과징금을 강화하고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도 현실화하는 등 실질적인 실효적 대책에 나서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뒤늦은 사과·꼼수 보상안 도마 위에 이래서 정치권 인사 영입했나? 의혹 12일에도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반복되는 것에 대해 “경제 제재가 너무 약해서 규정 위반을 밥 먹듯이 한다”며 “앞으로는 규정을 위반해 국민에게 피해를 주면 엄청난 경제 제재를 당해서 ‘회사가 망한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규정을 위반하면 난리가 나야 하는 것 아니냐”며 “그런데 위반해도 태도를 보면 ‘그래서 어쩔 건데’ 이런 느낌이 든다”고 지적했다. 정부도 쿠팡에 강력하게 경고하며 전방위 대응을 예고했다. 실제로 같은 달 29일, 배경훈 부총리 겸 과기부 장관 주재로 ‘쿠팡 사태 범정부TF’ 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과기부와 경찰청, 개인정보위원회, 금융위원회 등은 역할을 분담해 신속한 조사를 진행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배 부총리는 “쿠팡이 국내 고객 정보 3000만건 이상을 유출한 것은 명백한 국내법 위반 사항으로 정부는 쿠팡이 관련 법령을 위반한 사실이 확인될 경우, 다른 기업과 동일하게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영업정지 여부도 판단할 것으로 보인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압박에도 쿠팡이 연달아 이상한 행보를 보이자 ‘믿는 구석’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그 정도로 쿠팡의 현재 대응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일각에서는 쿠팡이 미국 기업인 것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 증시가 쿠팡의 모든 결정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라는 것이다. 실제 쿠팡이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한 다음 날 미국 뉴욕 증시에서 쿠팡의 주가는 6% 급등했다. 국내에서는 쿠팡의 ‘셀프 조사’에 분통을 터트리고 있는데 미국 시장에는 호재로 작용한 것이다. 쿠팡이 정치·국회 인사를 대거 영입한 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정치권 인사를 영입해 쿠팡 관련 각종 논란을 틀어막고 있다는 의혹이다. 해당 의혹은 ‘강력 경고’ ‘전방위적 대응’ 등의 수사를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 조사는 흐지부지될 것이라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나오는 배경으로도 꼽힌다. 변죽 울리다 무사통과? 실제 최근 원내대표직에서 사퇴한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의원이 국정감사를 한 달여 앞둔 시점에 박대준 전 쿠팡 대표 및 대관 총괄과 오찬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쿠팡이 일용직 퇴직금 미지급 사건에서 검찰 외압 의혹, 물류센터·배송 기사의 과로 및 산재 사망 문제가 제기된 상황이었던 만큼 적절성 논란이 불거졌다. 김 의원은 그달 16일 자신의 SNS에 “공개 일정이고 적어도 5명이 (함께) 식사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만남보다 대화의 내용이 중요한 것 아니냐? 참고로 지난해 7월16일 쿠팡 물류센터도 방문했었다”고 적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