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대망 접은 반기문 20일 천하 풀스토리

괜히 나섰다가 망신만 당했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지난 1일 대선레이스에서 중도이탈했다. 10년간 맡았던 유엔 사무총장직을 내려놓고 지난달 12일 귀국한 뒤 20일 만이다. 반 전 총장이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대선판도는 안갯 속으로 접어들었다.

가뜩이나 후보가 없는 여권은 다시금 자중지란 속으로, 후보가 넘쳐 나는 야권은 누가 대항마가 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입국부터 사퇴까지 ‘20일 천하’가 돼버린 반 전 총장의 행적을 되짚어봤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은 귀국하자마자 최고의 뉴스메이커로 떠올랐다. 그의 행보는 연일 기삿거리를 양산했고 발언은 언론 지상을 뒤덮었다. 그만큼 반 전 총장은 입국부터 사퇴까지 20일간 숱한 논란에 휘말렸다.

반 전 총장과 관련된 논란은 귀국길부터 시작됐다. 그는 비행기에 오르기 전 귀국 소감을 묻는 언론의 질문에 “가슴이 벅차고 설렌다. 국가 발전을 위해 10년간의 경험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 면도 많다”고 말했다.

못 견디고
중도 사퇴

귀국보다 더 큰 관심을 받은 건 반 전 총장의 친인척 비리 문제였다. 반 전 총장의 동생 반기상씨와 조카 주현씨는 경남빌딩 매각과 관련해 뇌물, 사기, 돈세탁 등의 혐의로 그의 귀국 하루 전 뉴욕연방법원에 기소됐다.

반 전 총장은 이 자리서 “아는 것이 없다. 장성한 조카여서 사업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었고 만나지도 않았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가까운 가족이 연루된 것에 당황스럽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대단히 송구하다”고 밝혔다.

지난달 12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한 반 전 총장은 “국민들의 따뜻한 환대에 감사한다”는 말을 시작으로 귀국 연설문을 발표했다.

그는 “국민대통합을 반드시 이뤄내야 한다”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겪은 여러 가지 경험과 식견을 가지고 젊은이의 보다 밝은 미래를 위해 길잡이 노릇을 하겠다” “정권교체가 아니라 정치교체가 이뤄질 때라고 생각한다” 등 국민통합과 정치교체에 방점을 찍은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러면서 “오로지 국민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한 몸을 불사를 용의가 있다”며 사실상 대권 도전 의지를 피력했다.

반 전 총장이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날도 귀국 메시지보다 의전 논란이 더 관심을 받았다. 반 전 총장 측은 귀국 전 인천공항에 대통령 등 3부 요인급에게 제공되는 의전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 전 총장 측은 인천공항에 내려 승용차로 자택에 가려던 일정을 공항철도를 이용하는 방향으로 변경했다. 그가 시민들과 만나고 싶다면서 바꾼 일정이었다. 일정이 변경되면서 수백명의 지지자들이 공항철도로 몰려들었고 일대는 혼란에 빠졌다. 반 전 총장의 동선에 따라 에스컬레이터를 통제하는 등 과잉 의전으로 퇴근길 시민들의 항의가 이어졌다.

귀국 이후 광폭행보 이어갔지만

과거 발언·친인척 비리에 발목

누리꾼의 풍자 대상이 된 ‘2만원 논란’도 이날 나왔다. 반 전 총장은 인천공항역에서 7500원짜리 표를 사면서 무인발매기에 1만원권 두 장을 동시에 집어넣었다. 이 모습을 포착한 누리꾼은 반 전 총장의 행보를 ‘서민 코스프레’라고 비난했다. 이날의 해프닝은 이후 이어질 ‘1일 1논란’의 서막에 불과했다.

귀국 다음 날에는 반 전 총장의 피선거권 논란이 불거졌다. 공직선거법 제16조 1항에 따르면 ‘선거일 현재 5년 이상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40세 이상의 국민은 대통령의 피선거권이 있다. 이 경우 공무로 외국에 파견된 기간과 국내에 주소를 두고 일정기간 외국에 체류한 기간은 국내 거주기간으로 본다’고 규정한다.

이를 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일 현재 5년 이상의 기간을 국내에 거주한 사실이 있는 40세 이상의 국민은 국내에 계속 거주와 관계없이 대통령의 피선거권이 있다”며 “제19대 대통령선거일까지 5년 이상 국내에 거주한 사실이 있다면 공무 외국 파견 또는 국내에 주소를 두고 일정 기간 외국체류 여부를 불문하고 피선거권이 있다”고 해석했다.

중앙선관위의 해석을 놓고 법조계 등 각계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귀국 사흘째인 지난달 14일에는 충북 음성의 사회복지시설인 꽃동네를 방문했다. 반 전 총장은 어르신들의 수발을 드는 과정에서 본인이 턱받이를 한 모습이 보도돼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게다가 똑바로 누워 있는 할머니에게 죽을 건네고 그마저도 얼굴에 흘리는 등 좌충우돌하는 모습으로 세간의 비난을 받았다. ‘반기문 턱받이’ 논란은 하루 종일 포털 사이트 검색 순위 상위권에 오르는 등 큰 관심을 받았다.

입국·사퇴
속전속결

논란이 커지자 반 전 총장 측은 “(턱받이는) 꽃동네 측에서 요청한 복장”이라고 해명했다. 소설가 이외수씨는 자신의 SNS를 통해 “반기문의 어이없는 서민 친화 코스프레. 정치가들의 거짓말과 속임수에 이제는 진력이 났다”며 “제발 국민들께 진실을 좀 보여 주시지요”라고 맹비난했다.

같은 날 조류인플루엔자(AI) 거점 소독소 방문 일정서도 반 전 총장을 비롯, 일부만 방역복을 입고 소독약을 분사해 안전성 논란에 휩싸였다. 이날을 기점으로 전형적인 ‘보여주기식’ 행보라는 비난이 빗발쳤다.

반 전 총장은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와 관련해 지난달 15일 경기도 평택 해군 2함대를 방문한 일정에서 “한반도 현실이 거의 준전시 같은 상황이기 때문에 정부가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은 마땅하다”고 밝힌 바 있다.

반 전 총장의 발언은 즉각 야권 인사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미국 앞에서 작아지는 지도자가 어찌 국익을 지킬 수 있겠느냐”며 “미국이 우리 최대 동맹국이고 앞으로도 최고의 우방이어야 하지만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은 “자신의 고향인 충북 음성에 사드 배치를 유치할 의사가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일각에선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적 지지를 잃고 청와대서 쫓겨날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함께 탄핵당할 정책을 옹호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달 16일에는 반 전 총장이 박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전한 사실이 알려졌다. 이날 전화 통화에서 반 전 총장은 “직접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하는데 상황이 이렇게 돼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부디 잘 대처하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귀국 이후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고 들었다”며 “유엔 사무총장으로 10년간 노고가 많으셨다”고 화답했다. 국민의당 박지원 대표는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 죽이 잘 맞는 것 아닌가”라며 일침을 가했다.

보여주기 행보
과잉의전 구설

국민통합 행보로 경남 봉하마을에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과 세월호참사 희생자 분향소를 잇달아 방문했던 지난달 17일에도 논란은 끊이질 않았다. 반 전 총장은 노무현정부 시절 대통령 외교보좌관과 외교통상부장관을 지냈다.


그뿐만 아니라 노 전 대통령은 반 전 총장을 유엔사무총장으로 적극 지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반 전 총장은 노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조문을 하지 않아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봉하마을을 찾은 그의 행보에 대해 일각에선 대통령이 되기 위한 ‘야권 달래기’에 들어간 게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다.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지난해 12월 자신의 SNS에 “(반 전 총장은) 자신의 모든 노력을 다했던 노 전 대통령의 그 슬픈 죽음에 현직 대통령의 눈치를 보느라 조문조차 못 했던 분”이라며 “정치에 기웃거리지 말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실제 반 전 총장이 봉하마을을 찾았을 땐 분위기가 싸늘했다. 또 반 전 총장은 방명록에 ‘사람 사는 사회’라고 작성해 논란을 자초했다. 김보협 <한겨레신문> 기자는 “그분이 꿈꿨던 세상은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지적했다.

같은 날 세월호참사가 발생한 진도 팽목항에 방문해서는 미수습자 가족들과도 만났다. 그 과정에서 바른정당 박순자 의원이 미수습자 가족들을 불러 반 전 총장과 사진을 찍게 한 사실이 알려졌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자신의 SNS에 “반기문, 오늘 팽목항을 방문했다. 2014년 참사 직후 뉴욕 분향소 조문 외에 그는 세월호에 대해 단 하나의 언동도 하지 않았다”며 “팽목항은 대권용 쇼를 위한 장소가 아니다”고 꼬집었다. 일부 단체 회원들은 반 전 총장의 방문을 반대하며 시위를 벌였다.

‘1일 1논란’ 검증 칼날에 화들짝
현실정치 벽에 걸려 중도 낙마

지난달 14일에는 충북 음성의 부친 묘소 성묘 때 불거진 퇴주잔 논란도 도마에 올랐다.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급속도로 퍼진 영상에는 반 전 총장이 퇴주잔으로 보이는 술잔을 받아 마시는 장면이 담겨 있다.

누리꾼은 통상 묘소에 방문하면 술을 따라 올린 후 묘소 주변에 뿌리며 퇴주하는 것이 풍습이라며 그의 행동을 질타했다. 반 전 총장 측은 SNS에 당시 상황이 담긴 전체 영상을 공개하며 적극적으로 진화에 나섰다.

여기서 끝날 줄 알았던 퇴주잔 논란은 영상을 게재한 누리꾼이 선관위 조사를 받게 되면서 다시 불거졌다.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선관위는 지난달 26일 영상을 게재한 누리꾼이 공직선거법(허위사실 공표죄)을 위반한 혐의가 있다며 출석을 요구했다. 정식 선거운동 기간이 아니고 반 전 총장이 후보등록을 하지 않은 상태인데도 선거법을 적용할 수 있는지 여부에 관심이 쏠렸다.

선관위는 “반 전 총장은 모두가 입후보할 상황으로 보는 입후보 예정자이기 때문에 후보로 해석할 수 있다”며 유권해석을 내렸다. 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나 이재명 성남시장 등이 악의적인 루머에 시달릴 때는 이 같은 사례가 없었던 점을 들어 선관위가 ‘오버’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두고는 기자들과 갈등을 빚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그의 입장은 짧은 시간동안 자주 변했다. 지난 2015년 12월28일 한일 위안부 합의가 이뤄진 이후 반 전 총장은 박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박근혜 대통령께서 올바른 용단을 내린 데 대해 역사가 높게 평가할 것으로 생각한다”며 환영의 뜻을 비쳤다. 당시 발언은 후로 두고두고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귀국 직후 인터뷰에선 “재협상이 필요하다”고 말해 기존 입장과 배치된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상황에 따라 입장을 바꾼다는 비판이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기자들은 반 전 총장의 일정 때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요구했다.

모호한 답변으로 일관하던 반 전 총장은 지난달 18일 “위안부에 관해서 제가 역사적인 과오를 저지른 것처럼 말하는데 절대 아니다”며 “앞으로는 어떤 언론이 묻더라도 답변하지 않겠다”고 벽을 세웠다. 그 자리에 캠프의 이도운 대변인에게 “이 사람들이 와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만 물어보니까 내가 마치 역사의 잘못을 한 것 같다. 나쁜 놈들이에요”라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기자들의 사과 요구에도 며칠간 묵묵부답이던 반 전 총장은 지난달 23일 “시차 적응도 잘 안 되고 갑자기 지방을 돌다보니 수많은 기자들하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감정적인 표현을 한 점이 있었다”며 “후회하고 있고 해당 언론인들에게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반 전 총장은 기자들에게 사과의 말을 하기까지 “페이크 뉴스라든지 가짜 뉴스, 남을 헐뜯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그러는 건 대한민국 국민이 할 일이 아니다” “유엔에선 이런 식으로 취재하지 않는다” 등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대선 불출마 선언 직전인 지난달 31일에는 “촛불 민심이 변질됐다”는 발언으로 누리꾼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반 전 총장은 귀국 당시만 해도 촛불 집회에 대해 “자랑스러웠다” “역사가 2016년을 기억할 것” “광장이 만들어낸 기적” 등의 찬사로 광장에 모인 국민들을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3주 만에 “광장의 민심이 초기의 순수한 뜻보다는 약간 변질한 면도 없지 않다. 직접 가보진 않았지만 TV 화면에서 볼 때 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반 전 총장의 발언은 안 그래도 나빠진 여론에 기름을 끼얹었다. 반 전 총장은 박근혜-최순실게이트가 일어난 이후부터 지지율이 꾸준히 하향곡선을 그렸다. 귀국 직후에도 제대로 된 컨벤션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진 구설에 반등 동력조차 잃어가던 중이었다. 그 와중에 나온 촛불 변질 발언이 쐐기를 박았다.

결국 유권자
마음 못 얻어

반 전 총장은 지난해 <한국대학신문>이 전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대학생 의식조사 및 기업·상품 선호도 조사에서 피겨선수 김연아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2014년 조사에서는 1위였는데, 흥미로운 점은 전국의 대학생들이 가장 불신하는 집단으로 무려 85.3%가 ‘정치인’을 꼽았다는 점이다.

반 전 총장은 20일간의 ‘정치인 체험’으로 수십 년간 쌓아온 모든 명성과 존경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다. 여기에 친동생 반기호씨가 미얀마 사업체 운영 당시 ‘유엔 현지 방문대표단’ 직함을 사용해 특혜를 봤다는 의혹 등 친인척 비리와 관련해 수사기관의 칼날이 반 전 총장을 향한다면 그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것으로 보인다.


<jsja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낙동강 오리알’ 나경원·오세훈 다음 수는?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지난 1일,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멘붕’에 빠진 사람들이 있다. 새누리당 나경원 의원과 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 반 전 총장의 대권행보에 발을 걸쳤던 인물들이다. 나 의원은 반 전 총장의 서울 사당동 자택 복귀 환영식에 참석하는 등 꾸준히 그의 곁에서 지지를 보내왔다.

그는 반 전 총장의 불출마 소식을 듣고 “안타깝고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반 전 총장 개인이나 대한민국의 긴 역사를 볼 때 오히려 더 나은 결정인 것 같다”며 표정 관리에 나섰다.

바른정당 최고위원에 뽑혔지만 반 전 총장 캠프 선대본부장으로 갈 수도 있다고 밝혀 비판을 받았던 오 전 시장의 입장도 난감해진 건 마찬가지다.

오 전 시장은 지난 2일 국회서 열린 바른정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원래 예정대로라면 오늘 최고위원회의가 제가 참석하는 마지막 회의가 됐을 것”이라며 “(반 전 총장이) 바른정당 후보들과 연대 의지가 확고한 것을 보고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바른정당과 반 캠프 사이를 저울질하던 오 전 시장은 자연스럽게 당에 남게 됐다.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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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