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전야 흑석 재개발> 11구역에선 무슨 일이…

생존이냐? 알박기냐?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일요시사>는 지난 4월 말 1058호 ‘현충원 옆 흑석동 재개발 공방전’ 기사를 통해 흑석11구역 재개발 상황을 보도했다. 재개발을 추진하는 조합 측과 반대 입장인 비상대책위 간의 쟁점 사안을 다뤘다. 그로부터 7개월이 지난 12월 현재, 흑석11구역의 재개발 추진 움직임은 여전히 더디다. 이번에는 조합과 교회 사이의 팽팽한 기싸움이다.
 

서울 동작구 흑석동 304번지 일대 흑석11재정비촉진구역(이하 흑석11구역)은 흑석뉴타운 총 11지구 중 가장 늦은 2012년 7월26일 정비구역으로 지정됐다. 2005년 지정된 흑석뉴타운은 지하철 9호선 흑석역이 지나고 한강변에 위치해 ‘강남급 뉴타운’으로 불린다. 흑석11구역 역시 정비구역으로 지정될 당시 입지 및 사업성이 매우 좋은 것으로 평가받았다.

종교부지 갈등

지난 13일, 동작구청 도시재생과 재정비기획팀 관계자는 흑석11구역의 사업성에 대해 “지금 상황에선 예측하기 어렵다”며 “사업성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사업시행 인가, 관리처분 인가 단계 정도는 돼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파트 층수 상향 등 재정비 촉진계획 변경을 위해서는 종교 부지를 둘러싼 갈등 해결이 선결과제라고 지적했다.

흑석11구역 주택재개발 정비사업조합(이하 조합, 조합장 최형용)은 지난해 12월1일, 조합설립 인가를 받았다. 이후 1년이 흘렀지만 종교 시설과 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흑석11구역에 종교 시설은 한가람교회, 천불사, 정은사 등이다. 이 중 조합과 교회의 갈등은 극에 달한 상태다. 갈등의 불씨는 교회 이전 비용이다.

서울시가 2009년 9월 마련한 뉴타운 지구 등 종교시설 처리방안에 따르면 재정비 촉진 계획 수립 시 종교 시설은 우선적으로 ‘존치’를 원칙으로 한다. 이전이 불가피한 경우에는 관련 종교 단체와 협의하되 기존 부지와 예정 부지는 대토가 원칙이다.


또 종교시설 실제 건물 연면적에 상당하는 건축 비용, 사업기간 동안 사용할 임시 장소, 이전 비용 등은 조합서 부담하도록 돼있다. 교회 관계자는 “존치를 원칙으로 하되 조합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내세우면 이전을 검토한다는 게 처음부터 지금까지 우리 입장”이라고 말했다.

당초 교회를 기준으로 ①존치 ②도미노 피자(264-1번지) 쪽으로 이전 ③이화빌라(275-3번지) 쪽으로 이전 등 세 가지 선택사항이 있었다. ②는 현충로 대로변에 있고 ③은 국립현충원과 인접해 있다. ②와 ③은 교회가 이전한다는 전제 하에 조합이 내세운 장소였다. 교회는 ①의 상황과 ②·③의 상황을 나눠 조합 측에 대책을 요구했다.

교회는 존치할 경우, 진입로 공사 및 공사 기간 중 소음방지·진출입로·주차 대책을 두고 협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여기에 재개발로 인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 교인 수와 헌금에 대한 기회손실 보상을 요구했다.

이전할 경우에는 ②의 지역을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 건물을 신축할 때 조망권, 일조권 등의 주장이 제기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대로서 주차장 진입이 용이하도록 진입로를 정비 계획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용 부분에서는 건축비, 인테리어, 특수설비, 성구제작비, 임시처소, 기회손실 보상 등을 들었다. 지상건축물의 경우 공사 계약시점의 국토교통부장관 표준건축비 고시금액의 130%, 지하주차장은 70%를 요구했다.

조합-교회 이전 문제 두고 기싸움
갈등 해결 못하면 향후 진행 불투명

교회 관계자는 “교회는 일반 건물과 달리 층고가 높고 기둥이 많지 않아 건축비가 30% 정도 더 소요된다”며 건축비 책정 이유를 밝혔다.

올해 표준건축비는 1㎡당 176만2000원으로, 1평당 581만4600원이다. 교회는 지난 4월12일 조합 측에 보낸 공문에서 실제 사용 면적은 건축물 580평과 주차장 300평이라고 밝혔다. 교회의 제안에 조합은 협의안을 제시했다. 교회가 이전하지 않을 경우에는 기회손실 비용을 제외하고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교회가 이전을 원할 경우, ②의 자리로 이전하는 것을 조건으로 1대1 등가 대토를 원칙으로 하겠다는 협의안을 내놨다. 지상건축물은 실제 사용하는 580평에 대해 고시금액의 115%로 계산해 부담하는 것으로, 지하주차장의 경우 교회 입장을 수용하겠다고 했다. 그외 인테리어 비용(7.5%→5%), 특수설비(12.5%→7%), 성구제작비(5%→3%) 등에 대해 조합은 교회가 제안한 것보다 비용을 낮췄다.

교회는 조합의 협의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교회는 지난 5월2일 공문서 등기면적 1660㎡(502평)과 미등기면적 520㎡(157평) 등 실제 사용면적이 2180㎡(660평)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실 평수 660평에 대한 가설계 결과 그 평수가 900평이 넘게 나오는데 이 중 800평을 인정해 달라 요청했다.

조합 측에서 수용할 수 없다고 한 기회손실 보상에 있어서도 신축적 협의는 가능하지만 전혀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전했다. 또 설계 및 감리비를 1평당 20만원으로 계산해 달라고 제안했다.

조합은 펄쩍 뛰었다. 조합 관계자는 “한가람교회가 60여년 정도 됐다.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만큼 상생하자는 의미서 좋은 방향으로 협의가 됐으면 했는데 요구가 너무 과하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지상건축물 실평수가 늘어난 점, 표준건축비의 130%를 요구한 점, 기회손실 보상을 포함해 서울시의 종교시설 처리 방안에 없는 내역을 포함시킨 점 등 조합은 황당하다는 주장이다.

조합 계산에 따르면 교회를 이전하는 데 드는 비용은 111억원에 달한다. 건축물과 지하주차장 등 공사비용 78억원, 부대시설비 26억원, 기타 이전 비용 7억원 등이다.

조합 관계자는 “교회가 이번 기회에 단단히 한몫을 챙기려는 모양이다”며 “이런 게 알박기가 아니고 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관계자는 또 “교회와 협상하는 내내 협상위원을 바꾸라는 둥 요구 사항이 많았다. 조합원들이 교회 처사에 불만이 많다”고 고개를 저었다.
 

협상위원과 관련해선 교회도 할 말이 많다고 했다. 교회 관계자는 “몇몇 조합원들은 교회 사람들에 대해 ‘똘마니 집사’ ‘월급 목사’ 등 인격모독도 서슴지 않는다”며 “그분들이 계시는 한 조합이 잘 되긴 어렵지 않을까 한다”고 비판했다.

조합은 지난 10월30일, 11월6일, 11월13일 등 3주간 교회 앞에서 항의 집회를 열었다. 교회 측은 “교묘하게 예배시간에 꽹과리를 치는 등 시끄럽게 군다”며 “협상이 결렬됐으면 교회는 존치하는 것으로 결정된 거 아니냐”며 반문했다. 그러면서도 “협상위원이 변경된다면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조합은 강경한 입장이다. 최형용 조합장은 “더 이상 교회와의 협상은 없다. 존치하는 걸로 결정됐다”며 “이미 조합원들에게도 다 의견을 전달한 상태”라고 밝혔다. 최 조합장은 “협상위원을 해촉하고 재구성할 명분도 없고 의사도 없다”며 “감정평가로 보상비가 정해지는 조합원들로선 교회에 신축 비용을 대주고 대로변으로 이전하는 것에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조합 임원들이 설득작업까지 펼쳤다”고 덧붙였다.


협상 결렬 존치?

교회와 조합의 의견이 평행선을 달리는 사이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 3월, 직권해제 관련 기준·절차와 매몰비용 보조 기준을 담은 ‘서울특별시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 조례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직권해제는 추진위나 조합이 주민의 동의를 받아 자진해산하는 경우와 달리 주민 간 갈등이 심하거나 사업성이 떨어져 더 이상 사업 진행이 어렵다고 판단되는 경우 시장이 직권으로 정비 사업 구역을 해제하는 것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재개발 추진 과정서 주민 간 갈등이 해소되지 않는 한 정상적인 사업 추진은 어렵다고 봐야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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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