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해지는 GS그룹 후계구도

‘야금야금’ 막내가 큰형 잡았다

[일요시사 취재1팀] 박호민 기자 = GS그룹의 회장 승계구도가 복잡해지고 있다. 그룹 3세 막내인 허용수 GS에너지 부사장이 지분 매입에 나선 것이다. 이번 지분 매입으로 허 부사장의 지분율이 사촌형이자 그룹을 이끌고 있는 허창수 GS그룹 회장을 넘으면서 그룹 회장 자리에 성큼 다가섰다. GS그룹이 승계구도에 대해 말을 아끼는 사이 차기 그룹 회장 자리가 요동치고 있다.

가족경영을 이어가고 있는 GS그룹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자산기준 재계서열 7위(공기업 제외), 69개의 계열사, 그룹 전체 매출 52조원 등을 책임지게 될 차기 회장 후계자 자리가 안갯속이다. 2004년 LG와 갈라선 후 줄곧 ‘허창수’ 체제를 이어가고 있는 GS그룹 승계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조짐이다.

허창수 체제
허용수 부각

허용수 GS에너지 부사장은 지난달 30일부터 이달 6일까지 GS그룹 지주사 GS 주식 14만7522주를 매입했다. 기존 GS 지분율 4.47%서 4.63%까지 늘어난 것이다. 지난 9일에는 재차 18만2846주를 매수하면서 지분율을 4.82%까지 끌어올렸다.

이로써 허용수 부사장의 지분율은 현재 GS를 이끌고 있는 허창수 회장의 지분율 4.75%를 뛰어넘으며 GS 최대주주가 됐다. 허 부사장이 GS 최대주주에 오르자 차기 그룹 회장 후보로 단숨에 부각됐다. 허용수 부사장은 고 허만정 GS그룹 창업주의 막내 허완구 승산회장의 외동아들이다.

3세 가운데는 막내인 셈. 허 부사장은 본격적인 주식 매입 전인 지난 11월22일 GS 주식 144만1401주를 담보로 자금을 확보했다. 담보로 설정된 주식은 당일 종가(5만5500원)를 기준으로 약 800억원 규모다. 허용수 부사장이 11월 말부터 최근까지 사들인 GS 주식은 약 180억원어치로 추산된다.


따라서 앞으로도 추가적으로 지분을 확대할 가능성이 있다. 허창수 회장을 따돌리고 지분을 급격히 늘릴수 있는 여력이 남아 있다는 의미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이기도 한 허창수 회장은 전경련이 미르·K스포츠 재단 모금을 주도하는 등 정경유착의 한 축으로 지목되면서 체면을 구긴 상황이라 향후 GS그룹 수장 자리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최근 인사에서도 미묘한 변화가 감지됐다. 허용수 GS에너지 에너지/자원사업본부장 부사장은 GS EPS 대표이사에 신규 선임됐다. GS그룹도 “40대의 차세대 경영자를 대표이사에 신규 선임하는 등 지속성장이 가능한 사업 포트폴리오 강화를 위해 100년 장수기업의 플랫폼을 마련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허용수 부사장은 2007년 GS홀딩스에 입사, 사업지원담당 상무를 거쳤으며, 2010년 GS 사업지원팀장 전무, 2013년 GS에너지 종합기획실장 부사장을 지냈다. 올해부터는 GS에너지 에너지·자원사업본부장 부사장을 맡았다.

GS그룹 오너일가가 가족 간 화합을 중시하고 가족회의를 통해 중대사를 결정하는 전통이 있다는 점을 볼 때 이번 지분 매입도 가족 간 합의가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GS그룹은 허창수 회장 체제 이후 한 번도 승계가 이뤄지지 않아 이번 허용수 부사장의 행보가 사전에 조율돼 있는지 여부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사전 조율없이 허용수 부사장의 독자적인 판단에 의해 지분 매입에 나섰다면 가족경영이 깨지는 단초로 작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재 허용수 부사장의 나이를 감안해 아직 그룹 회장으로 나서기에는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허 부사장은 1968년생으로 아직은 40대다. 1948년생인 허창수 회장보다 나이가 20년 아래다. 허 회장이 처음 GS그룹 회장에 올랐을 때와의 나이 차이도 8살이나 난다.
 


3세 가운데 허용수 부사장을 제외하면 유력 후보군은 허창수 회장의 동생들과 사촌들이다. 최근까지 그룹 차기 회장으로는 허진수 GS칼텍스 회장이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허 회장은 지난 11월 말, 임원인사를 통해 부회장서 회장으로 승진했다.

지난 2월, 사촌 형인 허동수 회장이 경영 일선서 물러난 뒤 회사를 이끌다 회장직에 오른 것이다. GS칼텍스는 GS그룹의 핵심 계열사로 허진수 회장의 차기 그룹을 이끌 회장후보의 행보로 자연스럽다는 평가가 있었다.

GS칼텍스는 GS그룹 전체 매출의 60%를 책임질 만큼 비중이 크다. 미국 석유회사 셰브론과 합작으로 1967년 탄생한 GS칼텍스는 지난 9월 말 연결기준 순자산만 18조6000억원에 달한다.

전설의 가족경영
혹시 돌출행동?

허진수 회장이 허창수 회장의 친동생이라는 점도 차기 그룹회장 후보로 거론되는 이유다. 창업주의 삼남 고 허준구 GS건설 명예회장의 아들들이 회사의 주류 자리를 공고히 하는 모양새라 이 같은 분석에 힘이 실렸다. 일단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3세 가운데 고 허준구 명예회장의 자녀가 가장 많다.

첫째 허창수 회장과 셋째 허진수 회장을 비롯해 둘째 허정수 GS네오텍 회장, 넷째 허명수 GS건설 부회장, 막내 허태수 GS홈쇼핑 부회장 등 총 5형제가 그룹 핵심 계열사를 이끌고 있다. 물론 허진수 회장 뿐만 아니라 허정수 회장, 허명수 부회장, 허태수 부회장 등도 차기 그룹 회장자리를 꿰찰 가능성이 있다.

이들의 지분을 살펴보면 허진수 회장은 2.02%, 허정수 회장 0.12%, 허명수 1.95%, 허태수 1.98% 수준이다. 2세 가운데 맏인 고 허정구 전 삼양통상 명예회장의 자녀들은 그룹사 경영권 외각서 지원하는 모습이다. 장자 승계원칙을 감안하면 이들이 경영 전면에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지분율도 장남 허남각 삼양통상 회장 2.58%, 차남 허동수 전 회장 1.75%, 삼남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날 회장 2.27%로 낮지 않다. 다만 이들 삼형제가 GS그룹 내에서 사실상 독자 노선을 걷고 있어 당장 경영전면에 나설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허동수 전 회장은 GS칼텍스 회장직을 내려놓은 뒤 경영 참여가 아닌 재단 복지사업에 힘쓸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허남각 회장은 GS그룹에 속해 있는 삼양통상을 이끌고 있지만 사실상 독자노선을 걷고 있다. 삼남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날 회장 역시 허남각 회장을 돕고 있는 모양새다.

2세 가운데 차남 고 허학구 전 새로닉스 회장은 고 허전수 새로닉스 회장을 외동아들로 뒀지만 고 허전수 새로닉스 회장이 지난 2010년 별세하면서 대가 끊겼다. 2세 중 넷째인 허신구 GS리테일 명예회장은 두 아들이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장남 허경수 코스모화학 회장이고, 둘째는 허연수 GS리테일 사장이다. 지분율은 허경수 회장(2.11%)과 허연수 회장(2.58%) 모두 2%를 기록하고 있다.

창업주 아들 가운데 막내인 허완구 승산회장은 허용수 GS에너지 부사장만을 외아들로 뒀다.

현재 GS그룹을 상황을 요약해 보면 허창수 회장의 5형제가 그룹을 이끌고 있는 가운데 다른 사촌들은 경영권 외각서 지원하는 형식이다. 하지만 허용수 부사장의 이번 행보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향후 그룹내 승계구도가 바뀔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허용수 부사장의 행보가 주목되는 점은 그동안 GS그룹이 3세경영 체제서 4세 경영체제로 넘어가는 승계 작업이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4세 가운데 허세홍 GS글로벌 대표이사, 허준홍GS건설 전무 등이 본격적으로 경영 전면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인 상황이었다. 허세홍 대표이사는 내년도 인사에서 대표이사로 최고경영자가 됐다.

이에 따라 허용수 부사장이 허창수 회장으로부터 그룹 회장직을 물려받아 3세와 4세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차기 그룹 회장직으로 허용수 회장이 거론되면서 3세를 이어 회사를 이끌 4세를 바라보는 시각에 미묘하게 변했다.

허창수 회장 체제 아래에선 허윤홍 GS건설 전무가 차기 선두주자로 꼽혔다. 그는 허창수 회장의 외아들이다. 올해 38세인 허윤홍 전무는 허창수 회장과 같은 미국 세인트루이스대학을 졸업하고 2002년 GS칼텍스(당시 LG칼텍스)서 평사원으로 경업수업을 시작했다.

허윤홍 전무는 2004년 말까지 평사원으로 재직하면서 영업전략팀과 강남지사, 경영분석팀 등을 거쳤다. 2005년 GS건설(당시 LG건설)로 자리를 옮겨 재경팀 대리로 승진했고, 경영관리팀 과장·차장·부장을 거쳐 2013년 상무로 승진했다.

입사해 임원에 오르는 데 11년이 걸렸다. 다른 대기업 2∼4세들의 평균 임원 선임 나이가 31세, 승진기간이 28개월이란 점을 감안하면 현장을 두루 경험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나씩 뚝뚝
계열분리 가능성

하지만 허용수 부사장이 허창수 회장의 뒤를 이어 그룹을 이끌 경우 ‘4세 리더’의 기회가 어디로 갈지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범LG가는 보수적인 가풍 속에서 ‘장자승계 원칙’을 고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LG와 함께 그룹을 이끌던 GS그룹 역시 유교적인 가풍으로 남성 중심의 지분구도가 눈에 띈다.

그 기준을 적용하면 현재 4세 가운데 허윤홍 전무의 가장 큰 라이벌은 GS그룹의 장손 허준홍 전무다. 그의 GS 지분율은 1.73%로 4세 가운데 가장 높다. 허윤홍 전무의 지분율은 0.49%로 4세 가운데 높은 편이 아니다. 허동수 회장의 외아들 허세홍 대표이사도 1.43%로 4세 중 두 번째로 높은 지분율을 기록하며 강력한 후보 중 하나다.

그룹 장악력만 놓고 보면 4세 가운데 가장 유력한 후보이기도 하다. 그는 빠른 승진으로 그룹내 장악력을 높여가고 있다. 허세홍 대표이사는 4세 가운데 가장 먼저 등기이사에 이름을 올렸다. 그의 경영능력은 올해 본격적인 평가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끌고 있는 GS글로벌은 2009년 GS로 편입된 계열사다. 국제무역 전문업체로 글로별 역량과 사업 관련 경험이 풍부한 허세홍 부사장의 경영시험대로 제격이라는 평가다.

허정수 회장의 첫째 허철홍 GS과장도 지분율로만 따지면 후보군으로 분류된다. 그의 지분율은 1.37% 수준이다. 최근에는 허광수 회장의 장남 허서홍 GS에너지 전력집단에너지사업 부문장(상무)이 지분 매입에 공격적으로 나서며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허서홍 상무는 지난달 초 GS 주식 총 1만5000주를 장내매수 했다. 이로써 허 상무가 보유한 GS 주식은 1.08%에 달한다. 주목되는 것은 이전에도 허서홍 상무가 GS 주식을 꾸준히 늘려왔다는 점이다. 허 상무는 지난해 말 부장에서 상무로 승진한 이후 지금까지 13만9351주의 주식을 사들였다. 1년 새 지분율은 0.93%에서 1.08%로 0.15% 포인트 늘었다.

GS그룹은 허용수 부사장의 행보에 대해 단순 주식 매입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확대 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허창수 회장이 직을 내려놓을 마땅한 이유가 없을뿐더러, 서열상 허용수 부사장 위로 차기 회장이 될 만한 후보가 많다는 게 근거다.

“미리 조율”
계획된 행보

재계 관계자는 “지금은 그룹 모양새를 갖추고 있지만 허 회장의 형제, 사촌들이 각 계열사들을 경영하고 있어 다음 세대엔 계열 분리까진 몰라도 사실상 별도로 운영될 가능성이 크다”며 “따라서 누가되든 반쪽짜리 그룹을 승계 받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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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