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 만의 총수 청문회 막전막후

‘죄송, 송구, 다시는…’ 그때 그 정주영은 없었다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총수 9명이 총출동한 재벌청문회는 의원들의 ‘거친 목소리’로 시작해 증인들의 ‘버티기’로 끝났다. 정경유착 고리를 끊겠다던 총수들은 강요에 의한 상납 차원이었다고 발뺌하기 바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이 그대로 통용된 셈이다. 그나마 지금껏 의혹 수준에 그쳤던 몇몇 정황이 사실로 판명됐다는 건 위안 삼을 만한 구석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진상규명’ 특별위원회 제1차 청문회가 지난 6일, 국회서 열렸다.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이날 청문회는 밤 11시까지 약 13시간 동안 진행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허창수 GS그룹 회장(전국경제인연합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손경식 CJ그룹 회장 등 재벌 총수 9명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뻔한 질의와 응답이 오갔지만 틈틈이 눈길을 끌 만한 발언이 이어졌다. 

[입 맞춘 듯]
[동문서답]

이날 증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대가를 바라고 돈을 낸 게 아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청와대의 요청을 현실적으로 거절하기 힘들었을 뿐 사면, 경영 특혜, 세무조사 회피 등 대가를 기대하진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이재용 부회장은 쏟아지는 질문에 “제가 부족한 점이 많다”며 대부분의 질문을 피해갔다. 정몽구 회장도 “잘 몰랐다”가 주된 답변이었다. 구본무 회장의 경우 ‘정부의 압력’을 강조하며 특혜 의혹을 부인했다. 대신 대기업이 준조세를 내는 것에 대해 입법을 통해 막아달라는 등 직설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최태원 회장 또한 대가성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특히 “면세점 사업은 우리에게 매우 적은 부분”이라고 강조하며 특혜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신동빈 회장은 긴장 속에도 다소 편한 모습으로 질의에 응했다. 지난 6월 진행된 검찰 압수수색과 관련해 "알지 못했다. 조직 정보력이 그렇게 좋지 않다"고 웃으며 말하는가 하면 규제 완화를 요구하기도 했다.


김승연 회장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해 부정적인 보고서를 쓰지 말라는 압박이 있었다는 주진형 전 한화증권 사장의 발언이 나오자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조양호 회장과 손경식 회장은 청와대의 인사 개입을 인정하며 비교적 솔직한 모습을 보였다.

[애먹은 회장님]
[후속조치 고심]

이번 청문회서 가장 바빴던 인물은 이재용 부회장이다. 의원들의 전체 질의 가운데 80% 이상이 이 부회장을 향했다.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했던 이 부회장은 삼성 미래전략실 해체라는 깜짝 계획을 내세웠다.

속시원한 한방 없었던 13시간 공방전
대가성 전혀 없었다…정부 입김만 살짝

이 부회장은 “(미전실 관련) 여러 의원님들의 질타가 있었고 미전실에 관해서 의혹과 부정적인 시각이 많은 것을 느꼈다”며 “창업자인 선대회장이 만든 조직이고 회장님이 유지한 것이라 조심스럽지만 부정적 인식이 있다면 없앨 것”이라고 말했다.

1959년 이병철 창업주 시절 회장 비서실서 출발한 삼성 미래전략실은 60년 가까이 명맥을 유지해왔다. 그룹 컨트롤타워 역할을 담당해 온 미래전략실은 ▲전략팀 ▲기획팀 ▲인사지원팀 ▲법무팀 ▲커뮤니케이션팀 ▲경영진단팀 ▲금융일류화지원팀 등의 편제로 이뤄져 있다.

미래전략실 해체 발언은 삼성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해소하는 차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삼성 안팎에선 미래전략실이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의 말 지원에 개입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재계에선 이 부회장의 발언이 특위 위원들의 압박으로 인한 돌발 언사였는지, 의도된 발언이었는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재계 관계자는 “미전실 축소 및 폐지 이야기는 예전부터 있어왔는데 결과적으로는 이번 청문회 발언으로 명분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준 미래전략실 커뮤니케이션팀장(부사장)은 이 부회장이 언급한 미래전략실 해체설에 대해 예정된 발언이 아니라고 밝혔다. 컨트롤타워라는 점에서 미래전략실 해체 작업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다만 이 부회장의 입을 통해 미래전략실 폐지가 공식화됨에 따라 삼성 전체 조직도에 큰 변화가 생길 것이라는 게 업계의 전망이다. 삼성은 조만간 미래전략실 해체를 위한 조직 재편작업에 착수할 것으로 알려졌다.

[잇단 탈퇴 선언]
[침몰 직전 전경련]

전국경제인엽합회(전경련)의 존폐를 가늠할만한 발언도 쏟아졌다. 이번에도 이 부회장이 앞장섰다. 그는 “(전경련)해체를 논할 자격은 없지만 탈퇴하겠다”고 말했다. “(전경련에 내는)기부금을 중지하겠다고 약속하라”는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의 추궁에 이 부회장은 “그렇게 하겠다”고 재차 화답했다.

이로써 그간 정경유착의 매개물 역할을 하는 것으로 지목되어 온 전경련에 대한 삼성의 탈퇴가 기정사실화된 모양새다. 전경련은 삼성그룹 창업주이자 이 부회장의 조부인 고 이병철 회장이 주도해 1961년 출범한 단체다.

정몽구 회장, 최태원 회장, 구본무 회장, 손경식 회장도 전경련 탈퇴 의사를 밝혔다. 더불어민주당 안민석 의원이 전경련 탈퇴 의사를 묻자 정몽구 회장은 “(탈퇴할)의사는 있다”고 말했다. 최태원 회장과 구본무 회장은 하태경 의원이 연이어 전경련 탈퇴 의사에 동의하느냐고 묻자 “예”라고 답했다.

삼성 집중포화…미전실 폐지 깜짝 발언
잇단 탈퇴 선언…전경련 이대로 침몰하나

주요 그룹이 속속 탈퇴 의사를 밝힘에 따라 전경련이 해체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전경련은 600여개 회원사로부터 매년 400억원의 회비를 걷고 있다. 5대 그룹인 삼성·현대차·SK·LG·롯데그룹이 이 가운데 절반인 200억원 정도를 부담하고 있다. 삼성이 내는 회비만 연간 100억원 안팎인 것으로 알려졌다.

향후 전경련이 어떤 쇄신안을 내놓는지에 따라 조직의 존속 여부가 결정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전경련은 청문회 의견과 회원사들의 견해를 반영해 조직 쇄신안을 준비하고자 내부적 실무 작업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잇단 공개 탈퇴 선언 와중에서도 청문회에 출석한 대기업 총수 9명 중 정몽구, 구본무, 신동빈, 김승연, 조양호 회장 등 5명은 “전경련 해체에는 반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또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전경련은 헤리티지 단체처럼 운영하고 친목단체로 남아야 한다”는 구체적인 의견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회원사들의 의견수렴에서부터 쇄신안 마련까지 매 단계 난관이 적지 않을 전망이다. 당장 공식적인 의견수렴을 위한 회장단 회의를 열기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지난달 개최하려다 최순실 국정 농단 관련 검찰 수사와 참석률 저조 탓에 무산돼 버린 정례 회장단 회의는 다시 일정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의혹에서 사실로]
[밝혀지는 실체들]

이번 청문회를 통해 정부 차원의 재벌기업에 대한 압력 행사 의혹 상당수는 사실로 재확인됐다. 최순실씨와 연루된 각종 의혹이 총수들의 입을 통해 정황상 의심 차원을 넘어 실제 있었던 일로 판명된 셈이다.

손경식 회장에게는 청와대의 이미경 부회장 퇴진 압력에 대한 질문이 주로 나왔다. 손경식 회장은 “조원동 당시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이 이 부회장이 조금 자리를 비켜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라고 증언했다.
 

김경진 국민의당 의원이 ‘자유경제주의적 시장 질서에 어긋난 요구 아닌가’라고 묻자 손경식 회장은 “과거에 군부정권 때에는 이런 일이 있었지만 흔한 일은 아니라는 것은 안다”라고 답했다. 또 “차은택씨가 CJ창조경제혁신센터장이 되고 싶다고 했지만 직원들이 거절했다고 들었다”는 내용도 공개했다.

조원동 전 수석과 재차 통화한 배경에 대해 “이미경 부회장이 대통령이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고 해서 그러면 자기가 조 수석 얘기를 들어봤으면 좋겠다고 해서 전화를 걸었다”고 주장했다.

조양호 회장은 평창 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으로 일하던 당시 정부 차원의 사퇴 압박을 받았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조 회장은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부터조직위원장직의 사퇴 압력을 받았냐는 질문에 “사퇴하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언급했다. 이만희 새누리당 의원이 “조 회장께서 평창올림픽 성공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하지 않았나”고 물자 조 회장은 “(열심히 한 것이) 맞다”고 답했다.

조 회장은 “최순실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물러난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그런 내용을 신문기사를 통해서 알았기 때문에 정확히 대답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최태원 회장은 K스포츠재단에 대한 추가 출연 압박을 거절한 이유를 공개했다. 최태원 회장은 “K스포츠재단의 추가 요청을 왜 거절했느냐”는 최교일 새누리당 의원의 질문에 “K스포츠재단이 80억원을 추가 요청한 적 있다”며 “당시 계획이 부실했고 돈을 전하는 방법도 부적절해 실무진 차원서 거절했다”고 밝혔다.

새롭게 추가된 의혹도 있었다. 장제원 새누리당 의원은 한화그룹이 정유라에게 8억원 상당의 말을 상납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장 의원은 김승연 한화 회장에게 “2014년 4월26일 한화갤러리아 명의로 원산지가 독일인 8억3000만원 상당의 말을 두 필 구입했다. 어디에 썼는가”라고 따져 물었다. 그는 이 말 두 필이 사실상 정유라 전용말로 쓰였고 정유라는 이 말로 훈련을 받고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딴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김 회장은 “정유라가 금메달 딴 건 알고 있다”면서도 “(증여한 사실은) 없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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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터질’ 11월 국회 막전막후

‘박 터질’ 11월 국회 막전막후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9월 정기국회 첫날부터 한복과 상복으로 기싸움을 벌이던 여의도 전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12월 정기국회 종료까지 겨우 한 달 남았지만 여야 간의 파열음은 여전하다. 더불어민주당은 개혁 추진 동력을 얻기 위해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이에 질세라 국민의힘은 야당으로서 거대 여당의 폭주에 맞서겠다며 맞불을 놨다. 고성과 퇴장이 난무하던 이재명정부 첫 국정감사(이하 국감)가 종합감사만 남긴 채 막바지에 돌입했다. 수많은 안건 속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언급된 건 김현지·조희대 두 사람의 이름이다. 여전히 베일에 싸인 김현지 제1대통령실 부속실장과 사퇴 압박에도 꼿꼿하게 버티는 조희대 대법원장을 둘러싼 국감 후폭풍이 이어질 전망이다. 김현지 조희대 오는 6일 열리는 국회 운영위원회가 대통령실을 대상으로 한 종합감사에 김 실장 이름을 증인으로 올렸지만 끝내 불발됐다. 그동안 국민의힘은 김 실장을 증인으로 불러 모든 의혹을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감사가 아닌 정치공세”라며 이를 거부했다. 민주당은 김 실장이 국감 당일 오전 또는 오후 1시까지만 출석할 수 있다고 밝혔고 ‘반반 출석’ 논란을 키웠다. 국민의힘 김은혜 의원은 “김현지 증인 출석을 놓고 민주당이 내놓은 안은 오전 출석, 오후 불출석이라고 하는데 국감이 치킨인가? 반반 출석하게”라며 “김 실장 한 사람을 지키려고 하니 이런 코미디가 나오는 것”이라고 비꼬았다. 국민의힘이 ‘김현지 흔들기’에 나서자 민주당은 조 대법원장을 도마 위에 올렸다. 민주당은 “국감이 끝난 이후 사법개혁을 처리하겠다”며 조 대법원장이 스스로 거취를 정할 수 있는 데드라인을 그어줬다. 민주당 전현희 최고위원은 “이번 사법개혁안은 제왕적 대법원장의 전횡을 막고 재판의 민주적 절차를 강화하기 위한 사법정상화법이다. 사법 독립성과 책임성을 두텁게 하고 국민의 공정한 재판받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라며 사법부 장악 논란을 사전에 잠재웠다. 조국혁신당(이하 혁신당)은 조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혁신당 조국 비상대책위원장은 “대법원이 조 대법원장의 사퇴 요구를 외면할 경우 탄핵을 포함한 모든 법적·정치적 수단을 강력히 추진하겠다”며 으름장을 놨다. 두 사람의 이름은 오는 12월 정기국회를 마치고 해를 넘겨서도 호명될 것으로 보인다. 여야 모두 내년에 있을 지방선거를 겨냥해 상대편의 아킬레스건을 물고 늘어지겠다는 전략이다. 한 야권 관계자는 “김건희 특검이 12월까지 갈 것으로 봤는데 조희대라는 새로운 공격 포인트가 생겼다. 민주당이 쉽게 놔주지 않을 것”이라며 “‘내란 세트’로 묶어서 지방선거까지 끌고 가겠다는 심산이다. 내란이라는 키워드만큼 국민의힘을 공격하기 좋은 소재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반면에 민주당은 부동산 실책이 뼈아프다. 그걸 덮기 위해 조 대법원장을 계속해서 끌어들일 것”이라며 “국민의힘 권성동 의원과 추경호 의원에 대한 수사가 이뤄지면 이제 그쪽을 노리지 않겠나? 여아가 머리채만 안 잡았지, 아마 역대급 국회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여야 ‘사이좋게’ 하나씩 쥔 약점 특검 앞 권성동·추경호 운명은? 추 의원은 지난달 30일 국회의 계엄해제 의결을 방해한 혐의로 첫 조사를 받았다. 특검은 당시 원내대표였던 추 의원을 비롯한 국민의힘 지도부가 의원총회 장소를 여러 차례 변경함으로써 고의로 표결을 방해했는지를 들여다볼 예정이다. 이날 추 의원은 조은석 내란특검에서 진행되는 1차 피의자 소환조사에 응해 “무도한 정치 탄압”이라며 “당당하게 특검에 임하겠다”고 밝혔다.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수감 중인 권성동 전 원내대표의 첫 재판은 오는 3일로 예정돼있다. 권 전 원내대표는 불법 정치자금 1억원을 수수한 혐의를 받아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처럼 각종 악재가 국민의힘을 단단히 휘감자 부동산으로 한차례 휘청한 민주당이 반사이익 효과를 볼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여기에 여론조사 대납 의혹을 받는 오세훈 서울시장과 정치 브로커 명태균씨의 대질이 오는 8일 예정돼 내년 6월 치러질 지방선거 판까지 흔들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오는 5일부터 시작되는 내년도 예산안 심사를 놓고 긴장감이 고조된다. 이정부 출범 후 첫 예산 심사로 국민의힘은 지역사랑 상품권 등 이 대통령의 트레이드마크인 지역 화폐를 겨냥해 맹공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올해 두 차례에 걸쳐 민주당 주도로 추경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국민의힘이 크게 반발했고, 지난 8월 정부 예산안이 공개되면서 본격적으로 ‘이재명식 포퓰리즘’ 프레임 굳히기에 나섰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는 오는 5일 있을 예산안 공청회를 시작으로 6∼7일 이틀간 종합정책질의를 실시할 예정이다. 10~11일에는 경제부처, 12∼13일에는 비경제부처 부별 심사가 진행되고 17일에는 소위원회 예산안의 감·증액을 심사하는 예산안조정소위가 가동된다. 각 소위의 논의를 거친 예산안은 전체회의 의결을 통해 본회의에 상정된다. 예산안 국회 본회의 처리 법정 시한은 매년 12월2일이지만 늘 그렇듯 여야의 예산 샅바싸움으로 해당 날짜를 넘길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앞서 정부는 지난 8월 728조원의 예산을 편성했다. 올해 본예산에 견줬을 때 8.1% 늘어난 규모다. 이 대통령은 초혁신 경제 분야 등에 큰 폭으로 투자해 경제의 마중물 역할을 하겠다는 방침이다. 예산안이 의결되던 날 이 대통령은 “지금은 어느 때보다 재정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씨앗을 빌려서라도 뿌려서 농사를 준비하는 게 상식이고 순리”라고 말했다. 역대급 규모 쩐의 전쟁 이어 “현재 우리 경제는 신기술 주도의 산업 경제 혁신, 그리고 외풍에 취약한 수출 의존형 경제의 개선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며 “국무회의에서 의결되는 내년도 예산안은 이런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하고 경제 대혁신을 통해 회복과 성장을 이끌어내기 위한 마중물”이라고 설명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AI 투자다. 그동안 이 대통령은 AI 3대 강국을 강조한 만큼 예산 역시 이에 맞춰 전년 대비 3배 이상 증가한 10조1000억원으로 책정했다. 자동차·조선, 반도체 등 주요 산업에 AI를 접목하고 휴머노이드 로봇용 AI 모델 등 ‘피지컬 AI’ 분야에도 집중 투자를 예고했다. 과학기술 연구개발(R&D) 예산은 지난해보다 19.3% 증가한 35조3000억원이다. 역대 규모인 이번 예산 중 10조6000억원이 AI·바이오·콘텐츠·방산·에너지·제조 등 6대 첨단산업의 핵심 기술개발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된다. 이 중에서도 국민의힘은 26조2000억원으로 책정된 ‘민생경제 회복과 사회연대경제 기반 구축’ 부문을 눈여겨보고 있다. 정부는 24조원 규모로 지역사랑상품권 발행을 지원하고 지역별 여건을 고려해 국비 보조율을 상향 조정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민주당은 24조원은 총 발행되는 상품권의 액면가이며 이 중 3~7%를 예산으로 지원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디지털 온누리상품권 예산은 4000억원으로 도합 4조5000억원 규모로 책정됐다. 또 정부는 연 매출 1억400만원 미만인 소상공인 230만개 사에 경영안정 바우처 25만원을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예산안이 발표되자 국민의힘은 곧바로 ‘국민 부담 가중 청구서’라고 반박했다. 국민의힘 박성훈 수석대변인은 “이정부 예산이 올해보다 8.1% 늘어난 728조원 규모로 편성됐다. 조세감면까지 포함하면 실질 지출은 무려 808조5000억원에 달한다”며 “내년도 국가채무는 1415조원, 2029년에는 무려 1789조 원으로 폭증할 전망이다.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올해 49.1%에서 내년 51.6%, 2029년에는 58%까지 치솟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지난 문재인정부 5년 동안 국가채무 비율이 33.9%에서 46.8%로 뛰어올랐는데 이정부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나랏빚을 통제하기는커녕, 폭발 직전까지 끌어올릴 심산”이라고 지적했다. 민주당은 “거짓 선동”이라며 민생 최우선에 초점을 맞췄다고 반박했다. ‘올려’ ‘내려’ 본회의 난타전 쟁점 법안 처리 여부도 관전 포인트다. 민주당은 사법개혁을 위한 법 왜곡죄를, 국민의힘은 이정부의 부동산을 겨냥한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 폐지를 밀어붙이고 있다. 앞서 민주당과 혁신당은 각각 법 왜곡죄를 발의했다. 해당 법안은 판·검사가 증거를 조작하거나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등 잘못된 사실관계에 법을 적용해 기소나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경우 처벌토록 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현재 법 왜곡죄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 소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민주당 김현정 원내대변인은 지난달 28일 국정감사 대책 회의 후 기자들과 만나 사법개혁안에 대해 “이번달 까지 (입법을) 마무리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백혜련 사법개혁특별위원장도 MBC 라디오를 통해 “특위에서 낸 5대 개혁안은 상당한 공감대가 이미 이뤄져 있다”며 “당내, 국민적으로 그리고 법원과도 대법관 증원 문제 빼고는 의사소통이 이뤄졌다. 법사위 논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면 이번 정기국회 내 충분히 처리 가능하다”고 밝혔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 역시 최고위원회의에서 “민주당은 개혁 골든타임을 절대로 실기하지 않고 연내에 반드시 마무리 짓겠다”며 힘을 실었다. 헌법 제84조이자 형사소송법 개정안인 ‘대통령 재판중지법’에도 군불을 땠다. 법사위 국감에서 국민의힘 송석준 의원이 “이 대통령 파기환송심은 다시 기일을 잡아 (재개)할 수 있느냐” 고 물은 데 대해 김대웅 서울고등법원장이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라고 답한 것이 도화선이 됐다. 헌법 제84조는 ‘대통령은 내란·외환죄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에 발생한 범죄로 형사상 소추를 받지 않는다’고 규정한다. 당시 사법 리스크 족쇄를 풀지 못한 이재명 대표의 당선이 확실시되자 ‘대통령의 불소추특권’ 조항을 놓고 여러 갈래의 해석이 제기됐다. 민주당은 법안이 당론은 아니라면서도 향후 사법부의 행동에 따라 결정하겠다고 압박에 나섰다. 민주당 박상혁 의원은 YTN 라디오를 통해 “많은 국민이 지난 국감에서 서울고등법원장의 발언을 보고 깜짝 놀라셨을 것”이라며 “벌써 몇 달째 계류 중인 법안을 처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국민이 만들어주신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사법개혁? 부동산? 마음은 지선 노발대발 ‘쇼츠각’ 잡는 의원들 거대 여당인 민주당이 의석수로 법안을 통과시킨다면 국민의힘은 막아낼 도리가 없다. 대신 국민의힘은 부동산 규제를 파고들면서 이정부의 가장 아픈 곳을 찔렀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을 향해 이번 정기국회에서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이하 재초환) 폐지 법안을 여야 합의로 처리하자고 제안했다. 재건축 활성화의 핵심인 재초환은 재건축으로 얻은 초과이익에 부담금을 부담하는 규제다. 앞서 민주당은 재초환 폐지 가능성을 언급했다가 “당 차원의 결정은 아니”라며 입장을 선회했다. 10·15 부동산 대책 발표 후 예상보다 후폭풍이 크자 신중론을 내세운 것이다. 여당의 갈지자 부동산 행보가 오히려 시장 혼란을 부추겼다는 비판이 나오는 지점이다. 국민의힘 김도읍 정책위의장은 국회에서 열린 국정감사 대책회의에서 “민주당이 10·15 부동산 대책 발표 이후 국민적 비난과 여론의 뭇매로 궁지에 몰리자 이제야 국민의힘이 줄곧 주장해 온 재초환 폐지를 검토하겠다고 한다”며 “이미 김은혜 의원이 법안을 발의해 놨다. 정기국회에서 재초환 폐지 법안을 여야 합의로 신속 처리하자”고 말했다. 하지만 김윤덕 국토교통부 장관이 국감에서 재초환 유지 방향에 공감한다는 뜻을 밝히면서 여야 간 이견만 커지는 모양새다. 민주당 이연희 의원이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재초환 폐지는 투기 광풍을 불러올 조치기 때문에 결코 안 된다. 반드시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에 김 장관은 “공감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민주당은 재초환 폐지를 정기국회 내 처리하자는 국민의힙 요구에 대해 “원내 중심의 대화를 기대한다”며 협상의 여지를 열어뒀다. 다만 더 이상 부동산 문제로 자책골을 넣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강한 만큼 국민 여론을 충분히 반영하겠다는 방침이다. 문제는 여당인 민주당이 언제까지나 ‘신중하게’ 입장을 보류할 수 없다는 점이다. 부동산 시장 혼란이 가중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지만 “국민의힘 페이스에 말려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기류가 흐르는 만큼 돌파구를 모색해야 한다.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여야의 강대강 대치는 불가피해 보인다. 지난달 26일 국회가 이례적으로 국감 도중 본회의를 열고 비쟁점 민생 법안 70여건을 일괄 처리하면서 협치의 물꼬가 트이나 싶었지만 또다시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는 형국이다. 앞서 민주당은 APEC 주간을 앞두고 국민의힘을 향해 “무정쟁 주간을 갖자”고 제안했으나 국민의힘은 “경제 참사·부동산 참사를 덮기 위한 침묵 강요이자 정치적 물타기”라고 오히려 비판 수위를 높였다. 김도읍 정책위의장은 “이정부와 민주당이 독선과 독재를 멈추고 정치를 회복시키면 정쟁은 없어진다”고 훈수했다. 손 내밀어도 고개만 팽 한 정치권 관계자는 “여당인 민주당은 정부의 외교 성과를 띄우고 야당인 국민의힘은 야당으로서 잘한 것과 아쉬운 것을 구분해 견제해야 하는데 지금 의원 한 명 한 명이 국회를 자기 정치의 장으로 쓰고 있다”며 “내년 지방선거 영향이 크다. 선거를 앞뒀는데 어떤 정당이든 서로 의견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회의감을 내비쳤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