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 만의 총수 청문회 막전막후

‘죄송, 송구, 다시는…’ 그때 그 정주영은 없었다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총수 9명이 총출동한 재벌청문회는 의원들의 ‘거친 목소리’로 시작해 증인들의 ‘버티기’로 끝났다. 정경유착 고리를 끊겠다던 총수들은 강요에 의한 상납 차원이었다고 발뺌하기 바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이 그대로 통용된 셈이다. 그나마 지금껏 의혹 수준에 그쳤던 몇몇 정황이 사실로 판명됐다는 건 위안 삼을 만한 구석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진상규명’ 특별위원회 제1차 청문회가 지난 6일, 국회서 열렸다.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이날 청문회는 밤 11시까지 약 13시간 동안 진행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허창수 GS그룹 회장(전국경제인연합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손경식 CJ그룹 회장 등 재벌 총수 9명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뻔한 질의와 응답이 오갔지만 틈틈이 눈길을 끌 만한 발언이 이어졌다. 

[입 맞춘 듯]
[동문서답]

이날 증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대가를 바라고 돈을 낸 게 아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청와대의 요청을 현실적으로 거절하기 힘들었을 뿐 사면, 경영 특혜, 세무조사 회피 등 대가를 기대하진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이재용 부회장은 쏟아지는 질문에 “제가 부족한 점이 많다”며 대부분의 질문을 피해갔다. 정몽구 회장도 “잘 몰랐다”가 주된 답변이었다. 구본무 회장의 경우 ‘정부의 압력’을 강조하며 특혜 의혹을 부인했다. 대신 대기업이 준조세를 내는 것에 대해 입법을 통해 막아달라는 등 직설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최태원 회장 또한 대가성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특히 “면세점 사업은 우리에게 매우 적은 부분”이라고 강조하며 특혜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신동빈 회장은 긴장 속에도 다소 편한 모습으로 질의에 응했다. 지난 6월 진행된 검찰 압수수색과 관련해 "알지 못했다. 조직 정보력이 그렇게 좋지 않다"고 웃으며 말하는가 하면 규제 완화를 요구하기도 했다.


김승연 회장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해 부정적인 보고서를 쓰지 말라는 압박이 있었다는 주진형 전 한화증권 사장의 발언이 나오자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조양호 회장과 손경식 회장은 청와대의 인사 개입을 인정하며 비교적 솔직한 모습을 보였다.

[애먹은 회장님]
[후속조치 고심]

이번 청문회서 가장 바빴던 인물은 이재용 부회장이다. 의원들의 전체 질의 가운데 80% 이상이 이 부회장을 향했다.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했던 이 부회장은 삼성 미래전략실 해체라는 깜짝 계획을 내세웠다.

속시원한 한방 없었던 13시간 공방전
대가성 전혀 없었다…정부 입김만 살짝

이 부회장은 “(미전실 관련) 여러 의원님들의 질타가 있었고 미전실에 관해서 의혹과 부정적인 시각이 많은 것을 느꼈다”며 “창업자인 선대회장이 만든 조직이고 회장님이 유지한 것이라 조심스럽지만 부정적 인식이 있다면 없앨 것”이라고 말했다.

1959년 이병철 창업주 시절 회장 비서실서 출발한 삼성 미래전략실은 60년 가까이 명맥을 유지해왔다. 그룹 컨트롤타워 역할을 담당해 온 미래전략실은 ▲전략팀 ▲기획팀 ▲인사지원팀 ▲법무팀 ▲커뮤니케이션팀 ▲경영진단팀 ▲금융일류화지원팀 등의 편제로 이뤄져 있다.

미래전략실 해체 발언은 삼성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해소하는 차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삼성 안팎에선 미래전략실이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의 말 지원에 개입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재계에선 이 부회장의 발언이 특위 위원들의 압박으로 인한 돌발 언사였는지, 의도된 발언이었는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재계 관계자는 “미전실 축소 및 폐지 이야기는 예전부터 있어왔는데 결과적으로는 이번 청문회 발언으로 명분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준 미래전략실 커뮤니케이션팀장(부사장)은 이 부회장이 언급한 미래전략실 해체설에 대해 예정된 발언이 아니라고 밝혔다. 컨트롤타워라는 점에서 미래전략실 해체 작업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다만 이 부회장의 입을 통해 미래전략실 폐지가 공식화됨에 따라 삼성 전체 조직도에 큰 변화가 생길 것이라는 게 업계의 전망이다. 삼성은 조만간 미래전략실 해체를 위한 조직 재편작업에 착수할 것으로 알려졌다.

[잇단 탈퇴 선언]
[침몰 직전 전경련]

전국경제인엽합회(전경련)의 존폐를 가늠할만한 발언도 쏟아졌다. 이번에도 이 부회장이 앞장섰다. 그는 “(전경련)해체를 논할 자격은 없지만 탈퇴하겠다”고 말했다. “(전경련에 내는)기부금을 중지하겠다고 약속하라”는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의 추궁에 이 부회장은 “그렇게 하겠다”고 재차 화답했다.

이로써 그간 정경유착의 매개물 역할을 하는 것으로 지목되어 온 전경련에 대한 삼성의 탈퇴가 기정사실화된 모양새다. 전경련은 삼성그룹 창업주이자 이 부회장의 조부인 고 이병철 회장이 주도해 1961년 출범한 단체다.

정몽구 회장, 최태원 회장, 구본무 회장, 손경식 회장도 전경련 탈퇴 의사를 밝혔다. 더불어민주당 안민석 의원이 전경련 탈퇴 의사를 묻자 정몽구 회장은 “(탈퇴할)의사는 있다”고 말했다. 최태원 회장과 구본무 회장은 하태경 의원이 연이어 전경련 탈퇴 의사에 동의하느냐고 묻자 “예”라고 답했다.

삼성 집중포화…미전실 폐지 깜짝 발언
잇단 탈퇴 선언…전경련 이대로 침몰하나

주요 그룹이 속속 탈퇴 의사를 밝힘에 따라 전경련이 해체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전경련은 600여개 회원사로부터 매년 400억원의 회비를 걷고 있다. 5대 그룹인 삼성·현대차·SK·LG·롯데그룹이 이 가운데 절반인 200억원 정도를 부담하고 있다. 삼성이 내는 회비만 연간 100억원 안팎인 것으로 알려졌다.

향후 전경련이 어떤 쇄신안을 내놓는지에 따라 조직의 존속 여부가 결정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전경련은 청문회 의견과 회원사들의 견해를 반영해 조직 쇄신안을 준비하고자 내부적 실무 작업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잇단 공개 탈퇴 선언 와중에서도 청문회에 출석한 대기업 총수 9명 중 정몽구, 구본무, 신동빈, 김승연, 조양호 회장 등 5명은 “전경련 해체에는 반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또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전경련은 헤리티지 단체처럼 운영하고 친목단체로 남아야 한다”는 구체적인 의견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회원사들의 의견수렴에서부터 쇄신안 마련까지 매 단계 난관이 적지 않을 전망이다. 당장 공식적인 의견수렴을 위한 회장단 회의를 열기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지난달 개최하려다 최순실 국정 농단 관련 검찰 수사와 참석률 저조 탓에 무산돼 버린 정례 회장단 회의는 다시 일정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의혹에서 사실로]
[밝혀지는 실체들]

이번 청문회를 통해 정부 차원의 재벌기업에 대한 압력 행사 의혹 상당수는 사실로 재확인됐다. 최순실씨와 연루된 각종 의혹이 총수들의 입을 통해 정황상 의심 차원을 넘어 실제 있었던 일로 판명된 셈이다.

손경식 회장에게는 청와대의 이미경 부회장 퇴진 압력에 대한 질문이 주로 나왔다. 손경식 회장은 “조원동 당시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이 이 부회장이 조금 자리를 비켜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라고 증언했다.
 

김경진 국민의당 의원이 ‘자유경제주의적 시장 질서에 어긋난 요구 아닌가’라고 묻자 손경식 회장은 “과거에 군부정권 때에는 이런 일이 있었지만 흔한 일은 아니라는 것은 안다”라고 답했다. 또 “차은택씨가 CJ창조경제혁신센터장이 되고 싶다고 했지만 직원들이 거절했다고 들었다”는 내용도 공개했다.

조원동 전 수석과 재차 통화한 배경에 대해 “이미경 부회장이 대통령이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고 해서 그러면 자기가 조 수석 얘기를 들어봤으면 좋겠다고 해서 전화를 걸었다”고 주장했다.

조양호 회장은 평창 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으로 일하던 당시 정부 차원의 사퇴 압박을 받았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조 회장은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부터조직위원장직의 사퇴 압력을 받았냐는 질문에 “사퇴하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언급했다. 이만희 새누리당 의원이 “조 회장께서 평창올림픽 성공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하지 않았나”고 물자 조 회장은 “(열심히 한 것이) 맞다”고 답했다.

조 회장은 “최순실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물러난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그런 내용을 신문기사를 통해서 알았기 때문에 정확히 대답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최태원 회장은 K스포츠재단에 대한 추가 출연 압박을 거절한 이유를 공개했다. 최태원 회장은 “K스포츠재단의 추가 요청을 왜 거절했느냐”는 최교일 새누리당 의원의 질문에 “K스포츠재단이 80억원을 추가 요청한 적 있다”며 “당시 계획이 부실했고 돈을 전하는 방법도 부적절해 실무진 차원서 거절했다”고 밝혔다.

새롭게 추가된 의혹도 있었다. 장제원 새누리당 의원은 한화그룹이 정유라에게 8억원 상당의 말을 상납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장 의원은 김승연 한화 회장에게 “2014년 4월26일 한화갤러리아 명의로 원산지가 독일인 8억3000만원 상당의 말을 두 필 구입했다. 어디에 썼는가”라고 따져 물었다. 그는 이 말 두 필이 사실상 정유라 전용말로 쓰였고 정유라는 이 말로 훈련을 받고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딴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김 회장은 “정유라가 금메달 딴 건 알고 있다”면서도 “(증여한 사실은) 없다”고 답했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회 문턱을 넘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이 사법부를 강타했다. 검찰은 1999년 특별검사제 도입 이후 권한을 조금씩 잃다가 올해 해체가 결정됐다. 검찰이 26년 전 느끼다가 현실이 된 불안을 이젠 사법부가 느낄 차례일지도 모른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범여권이 지난 24일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내란 사건만 맡는 전담재판부를 만들어 운영한다”는 취지의 예규 제정 방침을 밝혔다. 특별재판부 영장전담 법관 하지만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같은 날 논평을 통해 ‘24일 처리 방침’을 밝혔다. 이날 법안 처리는 이미 예고된 결과였다. 박 대변인은 지난 21일 오전 기자 간담회에서도 “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예정대로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이 원래 처리하려던 법안은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법’이었다. 이 법안이 통과됐다면, 12·3 비상계엄 관련 재판을 맡을 특별재판부가 설치되고, 영장 심사를 맡을 특별영장 전담 법관이 따로 배정됐을 것이다. 이들은 국회·판사회의·대한변호사협회가 3명씩 추천한 위원으로 구성되는 9인 규모의 추천위원회의 2배수 추천과 대법원장의 임명을 거칠 예정이었다. 아울러 상고심에선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임명했던 대법관은 모두 제척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에 대해선 각계에서 위헌 논란을 제기했다. 그러자 민주당은 지난 16일 내용을 대폭 수정했다. 명칭도 특별재판부에서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 전담재판부 후보추천위원회는 법무부 장관·헌법재판소 사무처장 등 외부 인사를 제외한 후 법관으로만 구성될 예정이다. 추천위원회에 들어갈 법관 중엔 각급 판사회의·전국법관대표자회의가 포함된다. 전담재판부에 소속될 법관은 추천위원회·대법관회의를 거쳐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 등 12·3 비상계엄 주요 연루자들은 이미 형사재판 제1심을 받고 있다. 전담재판부는 항소심부터 맡을 예정이다. 대법원은 민주당의 공세에 맞서 반격에 나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대법관 행정회의를 열어 ‘국가적 중요 사건에 대한 전담재판부 설치 및 심리 절차에 관한 예규’를 제정하기로 했다. 여기엔 “형법상 내란·외환죄와 군형법상 반란죄 사건을 전담해 집중 심리하는 전담재판부를 설치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대법원이 규정하는 전담재판부는 무작위 배당을 거쳐 사건을 배당받을 재판부가 지정되는 방식이다. 전담재판부로 지정된 재판부가 원래 맡던 재판은 다른 재판부로 재배당된다. 예규엔 “해당 재판부는 이후 내란·외환과 관련 없는 새로운 사건은 맡지 않는다”는 규정이 포함됐다. 하지만 민주당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박 대변인은 “사법부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왜 이렇게 늦게 했느냐”며 “왜 그동안 국민을 불안과 혼란에 빠뜨렸느냐”고 비판했다. 이어 “국회의 입법권을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맞춰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내란 전담재판부 신설이 갖는 ‘진짜 함의’ 대법원 예규 제정…반격 혹은 타협안 제시 민주당 정청래 대표도 같은 날 최고위원회의 중 “대법원이 헐레벌떡 자체 안이라고 내놨다”며 “더 일찍 해야 하지 않았느냐. ‘조희대 사법부’답다는 생각이 든다”고 비판했다. 국내 헌정사에서 특별재판부는 단 2회만 설치됐다. 제헌헌법 부칙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 등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를 설치했다. 반민특위엔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가 설치됐다. 특별검찰부는 검찰총장 등 9명으로 구성됐고, 특별재판부는 ▲국회의원 5명 ▲법조인 6명 ▲사회 저명 인사 5명 등 총 16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국회가 선출했다. 두 번째 특별재판부는 1960년 4·19 혁명 이후 개정된 제4차 개정 헌법을 근거로 설치됐다. 당시 개정 헌법엔 “3·15 부정선거 및 4·19 혁명 관련자들과 관련된 형사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를 둘 수 있다”는 취지의 부칙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설치된 특별재판부는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제정을 거쳐 설치됐다. 민주당조차 ‘특별재판부’를 ‘전담재판부’로 수위를 낮춰 처리했다는 이유로 내란 특별재판부에 대해 불거진 위헌 시비를 거론한다. 법원은 ‘무작위 전산 재판 배당’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 재판부에 특정 재판을 배당한다”는 취지의 특별재판부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위헌 시비가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아직 헌법재판소가 관련 합헌·위헌 여부를 가린 적도 없다. 하지만 헌법 제27조는 “모든 국민은 헌법·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 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 배당의 무작위성은 재판에 대한 외부의 부당한 압력·영향력으로부터 법관을 보호해 재판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운 원칙이다. 이는 위헌 시비가 불거진 핵심 이유였다. 그래서 과거엔 특별재판부를 설치하기 전에 개헌 과정 중 헌법 부칙에 그 근거를 규정했다. 헌법 부칙은 헌법 본문과 똑같은 효력을 가진다. 그래서 위헌 시비가 불거질 일은 없었다. 피해 가는 위헌 시비 하지만 위헌 시비를 피하려고 제시한 ‘내란 전담재판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이어졌다. 역설적으로 “기존 재판부 배당과 큰 차이가 없다”는 취지의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사법부는 이미 무작위 배당의 예외를 운용하고 있다. ▲특허법원 ▲서울행정법원 ▲지역별 가정법원 등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법원이 따로 설치돼있는 것도 무작위 배당의 예외다. 또 각급 법원은 이미 지식 재산·환경·의료 등 특정 전문 분야를 전담할 재판부를 분류한다. 법원장 재량에 따라, 재판장들과의 협의를 거쳐 특정 사건은 ‘적시 처리 필요 중요 사건’으로 분류해 특정 재판부에 배당해서 신속한 재판 진행을 추진한다. 기소된 사건이 이미 진행 중인 재판과 사실 관계·쟁점·피고인이 같으면, 이미 진행 중인 재판을 담당하는 재판에 배당한다. 물론 민주당이 거둘 수 있는 실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정 대표는 민주당이 ‘특별’을 ‘전담’으로 바꿔가면서도 서둘러 개정안을 추진하는 이유를 분명히 짚었다. 그는 “조희대 대법원장의 사법부와 지귀연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의 재판부는 내란·외환 사건의 심리를 의도적으로 침대 축구하듯 질질 끌었다”며 “조 대법원장은 경고·조치를 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보다 못한 입법부가 나서기 전에 사법부가 진작 내란 전담재판부를 설치했다면, 지난 1년 동안 허송세월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이 분통 터지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대표의 주장 중 핵심 단어는 ‘조희대’와 ‘지귀연’이다. 민주당이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를 추진할 당시 민주당 전현희 최고위원은 지난 9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지 부장판사를 지칭해 “재판의 공정성에 의구심을 갖도록 하는 인사들을 전보·징계한다면, 굳이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들기 위한 입법 조치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정 대표는 지난 15일 최고위원회의 도중 “조희대 사법부는 특검 수사 훼방꾼이 됐다”며 “조 대법원장이 지휘하는 대법원이 지난해 12월3일 내란에 동조한 건 아닌지 강한 의구심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사법행정사무를 총괄하는 조 대법원장의 권한 일부를 사실상 박탈하고, 지 부장판사를 내란 관련 재판에서 손 떼게 할 수 있다면, 민주당은 상당한 실익을 거둘 수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재판부 배당에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힘 실어준 진짜 이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당시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 이후인 지난 2018년 4월 “권한이 집중된 제왕적 대법원장을 견제하고, 법관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를 갖고 설치됐다. 보수 진영 일각에선 이를 일컬어 “지나치게 민주당에 친화적”이라고 비판한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 설치 직후 첫 의장으로 선출됐던 최기상 당시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는 현재 민주당 의원이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지난 9월 민주당이 주장한 의제 ‘대법관 증원론’을 포함한 상고심 제도 개선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어 “사법부는 대법관 증원안을 경청하고 자성해야 한다”는 취지로 보고서를 작성·공개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일컬어 “민주당에 힘을 설어주기 위해 토론회를 개최한 게 아니냐”는 비판 목소리도 제기됐다. 대법원의 이재명 대통령에 대판 파기환송 판결에 대해서도, 정 대표는 지난 9월 전국법관대표자회의에 “조 대법원장 사퇴 권고 등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 회복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일각에선 “대법원의 예규 제정은 반격”이라고 해석한다. 그 근거로는 “내란 전담재판부를 줄곧 반대하다가 갑자기 예규 제정을 밝힌 의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는 점을 들었다. 민주당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 외에도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꿀 만한 사법개혁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대해선 “민주당의 공세를 적절한 선에서 수용해 더 큰 공세에 대비하려는 의도”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특별재판부’가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고 해서 다른 사법개혁안 통과 시도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법원으로선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꾸려는 민주당의 시도를 보면서 검찰이 해체되는 과정을 되새길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미 민주당이 주도하는 사법개혁안 자체가 사실상 ‘기존 법원 해체’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조금씩 권한 잃다 해체 결정 검 종착역은 헌재 최고법원 등극? 민주당 등 범여권이 검찰을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으로 분리해 완수했던 검찰 해체에 대해선 “헌법은 검찰 조직의 존재를 전제로 검찰총장의 존재를 규정했다”면서 위헌 논란을 제기하는 반대 측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범여권은 이를 강행했다. 큰 틀에서 보면, 검찰은 ▲특별검사제도 도입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설치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 분리 등 과정을 거쳐 해체됐다. 최초의 특별검사(이하 특검)는 지난 1999년 김태정 전 검찰총장 부인에 대한 옷 로비 의혹과 한국조폐공사 노조 파업 유도 사건에 대해 진행됐던 최병모 특검이었다. 특검이 성립됐던 배경은 “검찰이 검찰총장의 부인이 연루된 사건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시선이었다. 아울러 당시 국회 구도는 여소야대였다. 한나라당은 “사건을 축소·은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흐름을 타고 강하게 밀어붙여 특검법 제정을 주도했다. 이후 현재까지 개별 특검법은 총 16개가 통과됐고, 상설 특검은 6회 추진됐다. 검찰로서는 1999년 최병모 특검 설치가 수사권·기소권 독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현재까지 총 22회의 특검이 성립됐다는 것은 검찰에 대한 각계의 불신을 상징하는 중요 사실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검찰을 노리는 다음 단계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었다. 최초의 검경 수사권 조정은 지난 2011년 진행됐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사법경찰관이 검사의 수사 지휘에 이의를 제기하는 재지휘 건의 제도 신설 등의 내용이 담긴 안을 대통령령으로 제정해 의결했다. 지난 2016년엔 ▲진경준 게이트 ▲정운호 게이트 ▲김형준 전 부장검사의 스폰서 의혹 ▲최순실 게이트 등이 연이어 발생해 검찰의 신뢰도에 대한 강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이는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장기간 논의된 검경 수사권 논의로 연결된다. 공수처도 설치됐다. 민주당 집권 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을 강하게 기억하는 지지자들의 비원을 외면하긴 어려웠던 측면도 있었다. 그렇게 검찰은 서서히 권한을 빼앗겼다. 그러다가 지난 9월에 이르러 검찰은 내년부터 중대범죄수사청과 공소청으로 갈라질 운명에 처했다. 특히 중대범죄수사청은 행정안전부로 옮겨진다. 서서히 권한을 빼앗기다가 끝내 해체를 앞둔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민주당 등 범여권은 ▲법원행정처 폐지 ▲법 왜곡죄 도입 ▲대법관 증원 ▲재판소원 도입 등 사법개혁안을 시도하고 있다. 범여권이 사법개혁안을 모두 통과시킨다면, 사법부로서는 “검찰에 이어 사법부도 한순간에 와해된다”고 인식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한순간에 와해된다 법원행정처가 없어지면 대법원장의 권한이 줄어든다. 법 왜곡죄가 도입되면, 판사의 재판도 법적 처벌 범위 안에 포함될 위험에 노출된다. 대법관이 늘어나 대법관의 권위·희소 가치가 줄어든 후 재판은 헌법소원 제기 범위 안에 포함된다. 최종 종착지는 헌법재판소가 대법원을 제친 후 최상위 사법기관으로 규정될 순간임을 배제하기 어렵다. 지난 24일은 사법부가 느낄 법한 공포가 처음 피부에 와닿은 날이었을 수도 있다. 새해엔 민주당과 사법부의 전쟁이 더욱 거칠게 진행될지도 모른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