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8]신묘년 돌풍 몰고 올 코리안 베스트 5

깡충깡충 ‘토끼뜀뛰기’ 2011년을 그대 품안에…


박근혜 전 대표  2011년 대권 겨냥한 행보에 주목
이재용 부사장  사장으로 승진 경영전면 나서게 돼


2010년이 저물었다. 각종 이슈가 끊이지 않던 한해였다. 그리고 그 중심엔 항상 ‘인물’이 있었다. 이들은 가는 길목마다 언론과 국민의 시선을 달고 다녔다. 그렇다면 올해는 과연 어떤 인물들이 화제를 몰고 다닐까. 2011년 신묘년 활약상이 기대되는 ‘5인방’을 정치·경제·사회·연예·스포츠 분야별로 각각 뽑아 봤다.

선거의 여왕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1952년 전쟁 중에 태어나 군인의 딸로 평범하게 살아오던 박 전 한나라당 대표는 1964년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따라 청와대에 입성, 10여년을 ‘공주’로 지냈다. 그러던 1974년 광복절, 박 전 대표의 삶을 통째로 바꿔놓은 사건이 발생했다.

모친인 육영수 여사가 괴한의 총탄에 쓰러진 것. 박 전 대표는 22세 나이에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또래 여대생들이 미팅을 하는 동안 그녀는 박 전 대통령을 보좌해야 했다. 이때의 국정 경험은 그녀에게 커다란 자산이 됐다. 이 가운데 박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은 박 전 대표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권력을 좇아 주변에 머물던 사람들은 철저하게 그녀를 외면했다.

이후 기약 없는 은둔 생활에 들어간 박 전 대표가 세상에 돌아오기까지는 18년이란 긴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이런 고난의 시기는 공주로 살아온 그녀를 완전히 바꿔 놨다. 박 전 대표는 IMF 경제 위기를 겪는 나라를 보며 정치판에 발을 들일 것을 결심했다. 그리고 1998년 대구에서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 출마, 승리를 거머쥐었다. 2000년 총선에선 당시 여권 실세로 불리던 엄삼탁씨와 겨뤄 승리했고, 당내 부총재 경선에서도 당당히 2위로 선출됐다.

그녀가 정치인 박근혜라는 이름을 국민들에게 분명히 각인시킨 것은 2004년 한나라당 대표로 취임한 직후다. “저는 부모님도 없고, 더 이상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라는 연설로 표심을 사로잡아 당선된 박 전 대표는 탄핵풍과 차떼기 정당이란 오명으로 만신창이가 된 한나라당의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이후 각종 선거에서 전승을 거두면서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절정은 2006년 5·31 지방선거였다. 괴한의 피습으로 병상에 누워서도 “대전은요?”라는 말 한 마디로 호남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을 싹쓸이한 것. 이후에도 그녀는 대선 후보 지지율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를 고수하며 전국민적 지지를 받아왔다. 그런 박 전 대표가 최근 본격적인 대선 행보를 시작했다. 한국형 복지, 좋은 복지를 표방한 사회보장기본법 전부개정안이 그 출발점이다. 이제 막 시동을 건 박 전 대표의 대권행보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까.

우리 경제 책임질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

이건희 회장의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했다. 지난 1991년 삼성전자 부장으로 입사한 이 사장은 상무보, 상무, 전무, 부사장을 거쳐 20년만에 삼성전자 최고운영책임자(COO) 사장으로 선임돼 경영전면에 나서게 됐다. 1968년 6월 서울생인 이 사장은 지난 1981년에 서울 경기초등학교, 1984년 서울 청운중학교, 1987년에는 서울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대 동양사학과 87학번으로 입학했다.

이 사장이 학부에서 경영학이 아닌 인문학을 택한 것은 고 이병철 선대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학사과정에서 ‘사람에 대한 공부’를 하라”는 뜻에 따른 것이다. 이어 그는 부친과 같이 일본과 미국에서 경영학을 배웠다. 이 사장은 지난 1995년 ‘일본 제조업의 산업공동화에 대한 고찰’이라는 논문으로 석사를 마쳤다. 이어 2001년에는 미국 하버드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후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경영기획팀에서 해외법인을 돌며 주요 거래선들과 접촉하며 경영수업을 받은 이 사장은 2003년 경영기획팀 상무, 2007년 1월 전무로 승진, 최고고객총괄책임자를 맡아 고객 중심의 비즈니스를 해나갔다. S-LCD 등기임원으로 계열사 경영에 첫발을 내디딘 이 사장은 2008년 특검 당시 ‘백의종군’하겠다고 밝힌 후 해외순환 근무를 통해 브라질·러시아·인도·독립국가연합(CIS) 등 신흥시장과 미국·일본·유럽 선진 시장을 다니며 주요 거래선을 만나 경영의 폭을 넓혀갔다.

당시 이 사장은 애플, IBM, AT&T, 소니, 닌텐도 등 전자·통신업계 최고경영진들과 친분을 쌓아가며 삼성의 브랜드 이미지 제고와 실적 향상에 기여했다. 이외에 엘 고어 전 미 부통령, 콜린 파월 전 미 국무장관 등 미국 정계의 주요 인사들과의 인맥도 키워나갔다.

그리고 지난해 부사장으로 승진, 본격적인 경영에 참여한 이 사장은 휴대폰, 반도체, LCD, 가전 등 주요 사업부만의 경영을 지원하면서 전세계를 대상으로 삼성전자 사업확대에 나서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그는 우리 경제를 책임질 위치에 서게 됐다. 이 사장의 신년 행보에 국민의 시선이 몰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뉴스의 진화 최일구 앵커

40년 전통의 MBC 주말 뉴스데스크가 저녁 9시에서 8시로 이동하면서 획기적으로 변했다. 지난 2005년 뉴스데스크를 떠난 이후 5년만에 복귀한 최일구 앵커와 함께 기존 뉴스 프로그램의 딱딱한 분위기를 편안하게 이끌어 시청자들의 피부에 와닿는 뉴스를 생생하게 전달한다는 방침이다. 뉴스데스크는 ‘편안한 뉴스’ ‘생방송의 활기가 느껴지는 뉴스’ ‘심층성 강화’ 등 세 가지에 초점을 맞췄다.

최 앵커는 “부담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진정성, 소통, 공감 이 세가지는 꼭 지키겠다”며 “앵커로서 할 말은 하는 진정성, 어떻게든지 뉴스를 통해 시청자들과 소통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첫 선을 보인 새 뉴스데스크의 반응은 뜨거웠다. 최 앵커의 거침없는 입담 때문이었다.

최일구 앵커  어떤 어록들을 쏟아낼지에 관심 집중
카라  일본서 ‘걸그룹 신드롬’…새해엔 어떤 모습?
지소연, 한창 성장 중…2012 런던올림픽 활약 기대


지난해 12월12일 방송된 뉴스데스크에서 최 앵커는 회심의 ‘말레이’ 어록을 남겼다. 최 앵커는 서울대공원을 탈출한 말레이곰의 은신처를 발견했다는 뉴스를 전하며 “저는 말레이곰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어요”라며 “자꾸 도망다니지 말레이”라고 말했다. 최 앵커는 또 지난해 12월18일 방송된 뉴스데스크 클로징 멘트에서 영구 말투를 흉내내며 “제가 내일은 ‘잘 모르겠는데요’의 심형래 씨를 만납니다”라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재치 있는 최 앵커의 멘트에 배현진 아나운서는 “영구와 일구. ‘구 브라더스’ 저도 기대됩니다”라고 맞장구 쳤으나 끝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배 아나운서는 뉴스 화면이 끝날 때까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기존의 딱딱한 뉴스에서 벗어나겠다는 각오로 새로운 스타일에 도전한 최 앵커. 그가 2011년에는 어떤 어록들을 쏟아낼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일본 정복 카라


일본에 진출한 카라의 열기가 뜨겁다. 오리콘이 추산한 카라 첫 주 앨범 판매량은 10만7403장. 아시아 걸그룹의 앨범이 일본에서 발매 첫 주에 10만장을 넘긴 것은 2004년 중국의 여성 12인조 그룹 여자십이악방 이후 처음이다.

소녀시대와 함께 일본의 ‘한국 걸그룹 신드롬’을 이끌고 있는 것. 하지만 카라의 성공은 소녀시대와는 의미가 다르다. 소녀시대가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데뷔부터 현재까지 계속 정상의 자리를 놓치지 않은 ‘엘리트 걸그룹’ 코스를 밟았다면, 카라는 한때 ‘생계형 걸그룹’이라 불리던 과거를 극복하고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특히, 일본에서 카라는 소녀시대와 다른 전략을 구사했다. 카라는 ‘완벽 현지화’ 작전을 펼친 것. 각종 일본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야외 악수회를 가지는 등 발로 뛰며 대중 호감도를 높였다. 예능프로인 ‘도쿄 프렌즈 파크’에 카라가 동물분장을 하고 등장한 모습도 화제가 됐다. 일부 한국 팬들은 “안쓰럽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망가짐을 자처하는 일본 예능 추세에 카라가 잘 맞춰가고 있다는 평가다. 그리고 카라의 이 같은 전략은 제대로 먹혀들어갔다.

‘생활 밀착형 스타’로 친근하게 받아들여지면서 인기몰이를 하더니 일본에서 한국 걸그룹 최초로 플래티넘을 수여받은데 이어 2010년 최고의 신인으로 선정되기까지 했다. 21일 ‘제43회 오리콘 연간 랭킹 2010’에 따르면, 신인 음반 매출 부문에서 카라가 1위에 선정됐다. 카라는 일본에서 싱글 2장, 앨범 5장, DVD 1장 등 총 8장을 발표해 49만3000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이는 13억엔, 우리 돈으로 178억원의 가치다.

현재 카라는 새 앨범 ‘점핑’의 국내활동과 내년 1월 일본에서 방영 예정인 일본 드라마 ‘우라카라’ 출연 등 일본 활동까지 병행하며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카라는 2011년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설레게 할까.

여자 박주영 지소연

뛰어난 볼컨트롤 능력과 키핑력, 패싱력과 골 결정력까지 갖춘 천재소녀 지소연의 등장에 축구팬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지소연은 U-20 여자축구에서 총 6골을 넣으며 불모지와 같던 한국여자축구를 사상 첫 4강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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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소연이 본격적으로 공을 차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시절부터다. 우연히 남자아이들과 공을 차며 놀던 모습을 본 이문초등학교 축구팀이 사내아이로 착각해 선수 모집 전단을 주고 간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당시 이문초등학교 김광열 감독(현 고양시 코리아 레포츠 클럽 축구 감독)은 지소연의 재능이 아까워 사내아이들과 함께 훈련하게 했다고 한다. 지소연은 지독한 연습벌레에 타고난 재능을 갖춘 선수였다. 또래 남자아이보다 기술적으로 2~3년은 앞서 있어 초등학교 5학년부터 베스트 11로 고정 출전했다고 한다.

이후 지소연은 엘리트 코스를 밟아가며 차곡차곡 재능을 쌓아갔다. 그런 그녀에게도 남모를 아픔이 있었다. 순탄치 않은 가정환경이 바로 그것이었다. 지소연의 가족은 어머니와 고등학생 남동생이 전부다. 그녀의 집은 동대문구 이문동에 외대앞 가파른 언덕을 올라 한참 지나야 다다를 수 있다. 정부 지원금으로 10평이 채 안 되는 전세방에서 생활했다.

지소연의 아버지는 딸이 축구하는 것을 크게 반대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지소연의 꿈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어머니는 지소연의 경기장을 따라다니며 뒷바라지를 했고 이에 반대하는 아버지와의 마찰은 계속 됐다.

지난 2002년, 지소연의 가정에 불화가 닥쳤다. 어머니의 자궁암 판정과 설상가상으로 닥친 부모의 이혼은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도 공 하나에 희망을 걸던 11살 어린 소녀가 한꺼번에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찼다. 특히 경제적 부담이 컸다. 이혼 후 10년 가까이 두 남매를 키워야 했던 어머니는 하루 12시간 넘게 미싱일로 근근히 버티며 지소연의 뒷바라지를 했다.

이처럼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그녀는 결국 축구계의 주목받는 스타로 성장했다. 하지만 19살 지소연의 ‘진화’는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에서 축구팬들은 벌써부터 2012년 런던올림픽과 2015년 여자월드컵에서의 활약에 기대를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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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회 문턱을 넘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이 사법부를 강타했다. 검찰은 1999년 특별검사제 도입 이후 권한을 조금씩 잃다가 올해 해체가 결정됐다. 검찰이 26년 전 느끼다가 현실이 된 불안을 이젠 사법부가 느낄 차례일지도 모른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범여권이 지난 24일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내란 사건만 맡는 전담재판부를 만들어 운영한다”는 취지의 예규 제정 방침을 밝혔다. 특별재판부 영장전담 법관 하지만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같은 날 논평을 통해 ‘24일 처리 방침’을 밝혔다. 이날 법안 처리는 이미 예고된 결과였다. 박 대변인은 지난 21일 오전 기자 간담회에서도 “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예정대로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이 원래 처리하려던 법안은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법’이었다. 이 법안이 통과됐다면, 12·3 비상계엄 관련 재판을 맡을 특별재판부가 설치되고, 영장 심사를 맡을 특별영장 전담 법관이 따로 배정됐을 것이다. 이들은 국회·판사회의·대한변호사협회가 3명씩 추천한 위원으로 구성되는 9인 규모의 추천위원회의 2배수 추천과 대법원장의 임명을 거칠 예정이었다. 아울러 상고심에선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임명했던 대법관은 모두 제척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에 대해선 각계에서 위헌 논란을 제기했다. 그러자 민주당은 지난 16일 내용을 대폭 수정했다. 명칭도 특별재판부에서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 전담재판부 후보추천위원회는 법무부 장관·헌법재판소 사무처장 등 외부 인사를 제외한 후 법관으로만 구성될 예정이다. 추천위원회에 들어갈 법관 중엔 각급 판사회의·전국법관대표자회의가 포함된다. 전담재판부에 소속될 법관은 추천위원회·대법관회의를 거쳐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 등 12·3 비상계엄 주요 연루자들은 이미 형사재판 제1심을 받고 있다. 전담재판부는 항소심부터 맡을 예정이다. 대법원은 민주당의 공세에 맞서 반격에 나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대법관 행정회의를 열어 ‘국가적 중요 사건에 대한 전담재판부 설치 및 심리 절차에 관한 예규’를 제정하기로 했다. 여기엔 “형법상 내란·외환죄와 군형법상 반란죄 사건을 전담해 집중 심리하는 전담재판부를 설치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대법원이 규정하는 전담재판부는 무작위 배당을 거쳐 사건을 배당받을 재판부가 지정되는 방식이다. 전담재판부로 지정된 재판부가 원래 맡던 재판은 다른 재판부로 재배당된다. 예규엔 “해당 재판부는 이후 내란·외환과 관련 없는 새로운 사건은 맡지 않는다”는 규정이 포함됐다. 하지만 민주당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박 대변인은 “사법부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왜 이렇게 늦게 했느냐”며 “왜 그동안 국민을 불안과 혼란에 빠뜨렸느냐”고 비판했다. 이어 “국회의 입법권을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맞춰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내란 전담재판부 신설이 갖는 ‘진짜 함의’ 대법원 예규 제정…반격 혹은 타협안 제시 민주당 정청래 대표도 같은 날 최고위원회의 중 “대법원이 헐레벌떡 자체 안이라고 내놨다”며 “더 일찍 해야 하지 않았느냐. ‘조희대 사법부’답다는 생각이 든다”고 비판했다. 국내 헌정사에서 특별재판부는 단 2회만 설치됐다. 제헌헌법 부칙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 등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를 설치했다. 반민특위엔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가 설치됐다. 특별검찰부는 검찰총장 등 9명으로 구성됐고, 특별재판부는 ▲국회의원 5명 ▲법조인 6명 ▲사회 저명 인사 5명 등 총 16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국회가 선출했다. 두 번째 특별재판부는 1960년 4·19 혁명 이후 개정된 제4차 개정 헌법을 근거로 설치됐다. 당시 개정 헌법엔 “3·15 부정선거 및 4·19 혁명 관련자들과 관련된 형사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를 둘 수 있다”는 취지의 부칙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설치된 특별재판부는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제정을 거쳐 설치됐다. 민주당조차 ‘특별재판부’를 ‘전담재판부’로 수위를 낮춰 처리했다는 이유로 내란 특별재판부에 대해 불거진 위헌 시비를 거론한다. 법원은 ‘무작위 전산 재판 배당’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 재판부에 특정 재판을 배당한다”는 취지의 특별재판부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위헌 시비가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아직 헌법재판소가 관련 합헌·위헌 여부를 가린 적도 없다. 하지만 헌법 제27조는 “모든 국민은 헌법·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 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 배당의 무작위성은 재판에 대한 외부의 부당한 압력·영향력으로부터 법관을 보호해 재판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운 원칙이다. 이는 위헌 시비가 불거진 핵심 이유였다. 그래서 과거엔 특별재판부를 설치하기 전에 개헌 과정 중 헌법 부칙에 그 근거를 규정했다. 헌법 부칙은 헌법 본문과 똑같은 효력을 가진다. 그래서 위헌 시비가 불거질 일은 없었다. 피해 가는 위헌 시비 하지만 위헌 시비를 피하려고 제시한 ‘내란 전담재판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이어졌다. 역설적으로 “기존 재판부 배당과 큰 차이가 없다”는 취지의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사법부는 이미 무작위 배당의 예외를 운용하고 있다. ▲특허법원 ▲서울행정법원 ▲지역별 가정법원 등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법원이 따로 설치돼있는 것도 무작위 배당의 예외다. 또 각급 법원은 이미 지식 재산·환경·의료 등 특정 전문 분야를 전담할 재판부를 분류한다. 법원장 재량에 따라, 재판장들과의 협의를 거쳐 특정 사건은 ‘적시 처리 필요 중요 사건’으로 분류해 특정 재판부에 배당해서 신속한 재판 진행을 추진한다. 기소된 사건이 이미 진행 중인 재판과 사실 관계·쟁점·피고인이 같으면, 이미 진행 중인 재판을 담당하는 재판에 배당한다. 물론 민주당이 거둘 수 있는 실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정 대표는 민주당이 ‘특별’을 ‘전담’으로 바꿔가면서도 서둘러 개정안을 추진하는 이유를 분명히 짚었다. 그는 “조희대 대법원장의 사법부와 지귀연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의 재판부는 내란·외환 사건의 심리를 의도적으로 침대 축구하듯 질질 끌었다”며 “조 대법원장은 경고·조치를 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보다 못한 입법부가 나서기 전에 사법부가 진작 내란 전담재판부를 설치했다면, 지난 1년 동안 허송세월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이 분통 터지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대표의 주장 중 핵심 단어는 ‘조희대’와 ‘지귀연’이다. 민주당이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를 추진할 당시 민주당 전현희 최고위원은 지난 9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지 부장판사를 지칭해 “재판의 공정성에 의구심을 갖도록 하는 인사들을 전보·징계한다면, 굳이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들기 위한 입법 조치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정 대표는 지난 15일 최고위원회의 도중 “조희대 사법부는 특검 수사 훼방꾼이 됐다”며 “조 대법원장이 지휘하는 대법원이 지난해 12월3일 내란에 동조한 건 아닌지 강한 의구심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사법행정사무를 총괄하는 조 대법원장의 권한 일부를 사실상 박탈하고, 지 부장판사를 내란 관련 재판에서 손 떼게 할 수 있다면, 민주당은 상당한 실익을 거둘 수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재판부 배당에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힘 실어준 진짜 이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당시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 이후인 지난 2018년 4월 “권한이 집중된 제왕적 대법원장을 견제하고, 법관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를 갖고 설치됐다. 보수 진영 일각에선 이를 일컬어 “지나치게 민주당에 친화적”이라고 비판한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 설치 직후 첫 의장으로 선출됐던 최기상 당시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는 현재 민주당 의원이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지난 9월 민주당이 주장한 의제 ‘대법관 증원론’을 포함한 상고심 제도 개선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어 “사법부는 대법관 증원안을 경청하고 자성해야 한다”는 취지로 보고서를 작성·공개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일컬어 “민주당에 힘을 설어주기 위해 토론회를 개최한 게 아니냐”는 비판 목소리도 제기됐다. 대법원의 이재명 대통령에 대판 파기환송 판결에 대해서도, 정 대표는 지난 9월 전국법관대표자회의에 “조 대법원장 사퇴 권고 등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 회복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일각에선 “대법원의 예규 제정은 반격”이라고 해석한다. 그 근거로는 “내란 전담재판부를 줄곧 반대하다가 갑자기 예규 제정을 밝힌 의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는 점을 들었다. 민주당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 외에도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꿀 만한 사법개혁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대해선 “민주당의 공세를 적절한 선에서 수용해 더 큰 공세에 대비하려는 의도”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특별재판부’가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고 해서 다른 사법개혁안 통과 시도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법원으로선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꾸려는 민주당의 시도를 보면서 검찰이 해체되는 과정을 되새길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미 민주당이 주도하는 사법개혁안 자체가 사실상 ‘기존 법원 해체’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조금씩 권한 잃다 해체 결정 검 종착역은 헌재 최고법원 등극? 민주당 등 범여권이 검찰을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으로 분리해 완수했던 검찰 해체에 대해선 “헌법은 검찰 조직의 존재를 전제로 검찰총장의 존재를 규정했다”면서 위헌 논란을 제기하는 반대 측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범여권은 이를 강행했다. 큰 틀에서 보면, 검찰은 ▲특별검사제도 도입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설치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 분리 등 과정을 거쳐 해체됐다. 최초의 특별검사(이하 특검)는 지난 1999년 김태정 전 검찰총장 부인에 대한 옷 로비 의혹과 한국조폐공사 노조 파업 유도 사건에 대해 진행됐던 최병모 특검이었다. 특검이 성립됐던 배경은 “검찰이 검찰총장의 부인이 연루된 사건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시선이었다. 아울러 당시 국회 구도는 여소야대였다. 한나라당은 “사건을 축소·은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흐름을 타고 강하게 밀어붙여 특검법 제정을 주도했다. 이후 현재까지 개별 특검법은 총 16개가 통과됐고, 상설 특검은 6회 추진됐다. 검찰로서는 1999년 최병모 특검 설치가 수사권·기소권 독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현재까지 총 22회의 특검이 성립됐다는 것은 검찰에 대한 각계의 불신을 상징하는 중요 사실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검찰을 노리는 다음 단계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었다. 최초의 검경 수사권 조정은 지난 2011년 진행됐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사법경찰관이 검사의 수사 지휘에 이의를 제기하는 재지휘 건의 제도 신설 등의 내용이 담긴 안을 대통령령으로 제정해 의결했다. 지난 2016년엔 ▲진경준 게이트 ▲정운호 게이트 ▲김형준 전 부장검사의 스폰서 의혹 ▲최순실 게이트 등이 연이어 발생해 검찰의 신뢰도에 대한 강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이는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장기간 논의된 검경 수사권 논의로 연결된다. 공수처도 설치됐다. 민주당 집권 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을 강하게 기억하는 지지자들의 비원을 외면하긴 어려웠던 측면도 있었다. 그렇게 검찰은 서서히 권한을 빼앗겼다. 그러다가 지난 9월에 이르러 검찰은 내년부터 중대범죄수사청과 공소청으로 갈라질 운명에 처했다. 특히 중대범죄수사청은 행정안전부로 옮겨진다. 서서히 권한을 빼앗기다가 끝내 해체를 앞둔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민주당 등 범여권은 ▲법원행정처 폐지 ▲법 왜곡죄 도입 ▲대법관 증원 ▲재판소원 도입 등 사법개혁안을 시도하고 있다. 범여권이 사법개혁안을 모두 통과시킨다면, 사법부로서는 “검찰에 이어 사법부도 한순간에 와해된다”고 인식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한순간에 와해된다 법원행정처가 없어지면 대법원장의 권한이 줄어든다. 법 왜곡죄가 도입되면, 판사의 재판도 법적 처벌 범위 안에 포함될 위험에 노출된다. 대법관이 늘어나 대법관의 권위·희소 가치가 줄어든 후 재판은 헌법소원 제기 범위 안에 포함된다. 최종 종착지는 헌법재판소가 대법원을 제친 후 최상위 사법기관으로 규정될 순간임을 배제하기 어렵다. 지난 24일은 사법부가 느낄 법한 공포가 처음 피부에 와닿은 날이었을 수도 있다. 새해엔 민주당과 사법부의 전쟁이 더욱 거칠게 진행될지도 모른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