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스러진 달 (31)채찍

결심했지만…흔들리는 마음

소설가 황천우는 지금까지 역사소설 집필에 주력해왔다. 역사의 중요성,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알고 또 미래를 올바르게 설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 과정에서 ‘팩션’이란 장르를 만들어냈다. 팩트와 픽션, 즉 사실과 소설을 혼합하여 교육과 흥미의 일거양득을 노리기 위함이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의심의 끈을 놓지 않은 사건을 들추어냈다. 필자는 그 사건을 현대사 최고의 미스터리라 칭함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바로 1974년 광복절 행사 중 발생했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이다.

“시아주버니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내가 운전하고 있는 석원에게 말을 건넸다. 백미러로 뒤를 바라보자 아내가 이미 잠에 빠져든 아들을 품에 안고 있었다.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고 그저 사는 이야기했어.”

“무슨 소리야. 큰 소리까지 들렸었는데. 솔직하게 말해봐.”

아내의 다그침에 잠시 전 형들이 했던 이야기를 곰곰이 되새겨보았다. 물론 윤대중과 관련한 이야기였다. 남조선의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겠다고 기고만장했던 일 역시 윤대중과 연계된 일이었다.

그런데 형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윤대중과 일본은 더 이상 관계가 이어지지 않을 듯했다. 그렇다면 자신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일어났다.

“무슨 이야기했느냐니까?”

아내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별건 아니고 요즈음 내 씀씀이가 헤픈데 그 사유가 무엇이냐 물었어.”

“그래서?”

“뭘 그래서야. 지금 조총련 사람들과 일을 하고 있고 그 보수를 받고 있다 했지.”

“그랬더니 뭐라고 해.”


“빤한 소리지 뭐. 그쪽 사람들과 거리 두고 이제 가정에 신경 쓰라는 이야기지.”

아내가 품에서 잠들어 있는 아이의 얼굴을 살피더니 다시 석원에게 시선을 주었다.

“나도 한번 생각해보았는데, 요즈음 내게 가져다주는 돈 말이야.”

“그 돈이 어때서?”

“출처는 그렇다고 해도 당신이 무슨 일을 하기에 받는 돈인지 궁금했어. 그런데 당신 성격이 워낙 그래서 묻지 않았거든.”

“실은….”

석원이 일시적으로 말을 멈추었다.

“자세하게 털어놔 봐.”

“남조선에 계신 윤대중 선생을 다시 일본으로 모시고 오려는 작업을 추진 중이야.”

“그 일에서 당신 역할은?”

“어차피 내 경우 행동대장 격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어.”

아내가 행동대장을 되뇌었다.

“그러면 당신이 남조선에 잠입해 윤대중 선생을 구출해서 일본으로 모셔 온다는 이야기 아니야.”


“결국 그런 이야기지.”

아내가 잠시 침묵을 지키며 석원의 말을 되새기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제발 철부지처럼 행동하지 마. 당신이 무슨 수로 윤대중을 구출해 오겠다는 거야. 그것도 남조선에서.”

막상 뭔가 대답해야 하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아주버니들 말씀대로 이제는 당신 앞길 제대로 생각해.”

예전 같으면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아내의 말이 가슴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애로 사항 있습니까?”

정동일이 차주선의 연락을 받고 도쿄 외곽에서 점심 무렵 은밀한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문석원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자세히 말씀 주시겠습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누구인지, 아마도 주변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모양인데 박 대통령 암살에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동일이 즉답을 피하고 차주선을 주시했다. 주선이 슬그머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일은 어차피 예견했던 것 아닙니까.”

“하면 어찌 처리하는 게 이롭겠습니까?”

“그동안 그저 당근만 제공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대통령 암살 성공 가능성 희박
점점 계획에 대한 의구심 커져

“그렇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이번에는 채찍을 들어보시지요.”

주선이 채찍을 되뇌며 잠시 생각에 잠겨들었다.

“미처 그 생각을 못했습니다. 이제는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경고하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시고. 그런데 그 친구가 머뭇거리는 사유는 무엇입니까?”

“저는 원래 윤대중 구출에 초점을 맞추었었다 이거지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박 대통령 암살은 다른 차원에서 바라볼 일이다 이 말입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우리가 너무 치고 나갔으니 이제 돌릴 수 없습니다.”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순간 동일이 주선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무슨 의미입니까?”


“문득 오사카 항에 입항해 있는 만경봉호가 생각나서요.”

“만경봉호!”

“한번 그를 이용하는 방법도 괜찮을 듯합니다.”

주선이 만경봉호를 되뇌며 동일의 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채찍의 수단으로 그리고 후일 문석원이 북한과 연계되었다는 확고한 증거를 위해서라도 한번 심도 있게 고려해봄이 좋을 듯합니다.”

주선이 답에 앞서 슬그머니 미소를 흘렸다.

“참으로 기발한 생각입니다. 이른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말을 마친 주선이 급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벌써 가시게요.”

“쇠뿔도 단김에 뽑으랬다고, 그 친구가 너무 나락으로 빠져들기 전에 빨리 조처 취하도록 해야지요.”

저녁 무렵 이호룡이 문석원과 함께 승용차를 이용하여 오사카 항에 도착했다. 한 장소에  주차시키고 밖으로 나서자 이호룡이 앞서 나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뒤를 따르는 석원의 발걸음은 무거워 보였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를 연상시키는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부장님, 좀 천천히 가요.”

“이제 다 왔으니 서두르자고. 저쪽 사람들은 약속시간이 칼 같아. 그러니 별 일 아닌 걸로 저들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어.”


“도대체 누구를 만나는데요.”

“가보면 알아.”

호룡이 고개 돌려 석원을 힐끗 보고는 내처 앞으로 나아갔다. 별 도리가 없다 판단했는지 석원 역시 호룡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서둘러 쫓아갔다. 이어 오래지 않아 호룡이 조그마한 건물 앞에 멈추었다.

석원이 고개 들어 건물 뒤를 바라보자 옆면에 ‘만경봉호’라 쓰인 배가 시선에 들어왔다. 가만히 만경봉호를 주시했다. 말로만 들었던 그 배를 직접 바라보니 감회가 새로운지 석원이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배 안에서는 각별히 주의해야 하네. 저 안은 일본이 아니라 북조선이야.”

건물 안에서 간단히 수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서자 호룡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석원이 다시 시선을 만경봉호로 주었다. 스산한 저녁 분위기마냥 만경봉호 역시 그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 동무는 만경봉호 승선이 처음입니까?”

“그렇소.”

안내원의 질문에 호룡이 짤막하게 답했다. 순간 안내원의 싸늘한 시선이 석원 쪽으로 쏟아지자 석원의 몸이 절로 움찔거렸다. 

“호룡 동무, 이 사람이 문석원 동무요?”

일행이 막 배에 승선하기 위해 트랩을 오르자 그곳에 경비를 서고 있던 한 남자가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석원을 주시했다. 호룡이 그렇다고 짤막하게 답하자 그 사람이 석원을 한쪽으로 불러 세웠다. 이어 석원의 전신을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너무 염려하지 말게. 승선하기 위해서 반드시 치러야 하는 절차라네.”

저만치에서 호룡이 안내를 맡았던 사람과 한담을 나누다 석원에게 시선을 주었다.

“석원 동무, 만경봉호에 승선한 일을 영광으로 알게. 이 배는 아무나 탈 수 있는 배가 아니네. 살거나 죽거나….”

안내원이 말하다 말고 호룡에게 시선을 돌렸다가는 이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듯이 걸음을 옮겼다. 석원이 멀어져가는 안내원과 자신의 몸을 수색하는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급격하게 찾아든 듯 잔뜩 움츠러들었다.  

“들어가도 좋소.”

그 남자의 짧은 한마디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비쩍 마르고 눈이 흡사 칼날처럼 찢어진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갑세다!”

석원이 남자가 내뱉은 한국말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이 시선을 호룡에게 주었다.

“그 동무의 안내를 받도록 하게. 나는 여기 이 동무와 대화를 좀 더 나누고 잠시 후에 갈 테니 먼저 가서 일보게.”

순간 불길한 생각이 일어났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천근만근 발걸음으로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이동하면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얼어붙은 듯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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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