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스러진 달 (31)채찍

결심했지만…흔들리는 마음

소설가 황천우는 지금까지 역사소설 집필에 주력해왔다. 역사의 중요성,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알고 또 미래를 올바르게 설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 과정에서 ‘팩션’이란 장르를 만들어냈다. 팩트와 픽션, 즉 사실과 소설을 혼합하여 교육과 흥미의 일거양득을 노리기 위함이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의심의 끈을 놓지 않은 사건을 들추어냈다. 필자는 그 사건을 현대사 최고의 미스터리라 칭함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바로 1974년 광복절 행사 중 발생했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이다.

“시아주버니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내가 운전하고 있는 석원에게 말을 건넸다. 백미러로 뒤를 바라보자 아내가 이미 잠에 빠져든 아들을 품에 안고 있었다.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고 그저 사는 이야기했어.”

“무슨 소리야. 큰 소리까지 들렸었는데. 솔직하게 말해봐.”

아내의 다그침에 잠시 전 형들이 했던 이야기를 곰곰이 되새겨보았다. 물론 윤대중과 관련한 이야기였다. 남조선의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겠다고 기고만장했던 일 역시 윤대중과 연계된 일이었다.

그런데 형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윤대중과 일본은 더 이상 관계가 이어지지 않을 듯했다. 그렇다면 자신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일어났다.

“무슨 이야기했느냐니까?”

아내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별건 아니고 요즈음 내 씀씀이가 헤픈데 그 사유가 무엇이냐 물었어.”

“그래서?”

“뭘 그래서야. 지금 조총련 사람들과 일을 하고 있고 그 보수를 받고 있다 했지.”

“그랬더니 뭐라고 해.”


“빤한 소리지 뭐. 그쪽 사람들과 거리 두고 이제 가정에 신경 쓰라는 이야기지.”

아내가 품에서 잠들어 있는 아이의 얼굴을 살피더니 다시 석원에게 시선을 주었다.

“나도 한번 생각해보았는데, 요즈음 내게 가져다주는 돈 말이야.”

“그 돈이 어때서?”

“출처는 그렇다고 해도 당신이 무슨 일을 하기에 받는 돈인지 궁금했어. 그런데 당신 성격이 워낙 그래서 묻지 않았거든.”

“실은….”

석원이 일시적으로 말을 멈추었다.

“자세하게 털어놔 봐.”

“남조선에 계신 윤대중 선생을 다시 일본으로 모시고 오려는 작업을 추진 중이야.”

“그 일에서 당신 역할은?”

“어차피 내 경우 행동대장 격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어.”

아내가 행동대장을 되뇌었다.

“그러면 당신이 남조선에 잠입해 윤대중 선생을 구출해서 일본으로 모셔 온다는 이야기 아니야.”


“결국 그런 이야기지.”

아내가 잠시 침묵을 지키며 석원의 말을 되새기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제발 철부지처럼 행동하지 마. 당신이 무슨 수로 윤대중을 구출해 오겠다는 거야. 그것도 남조선에서.”

막상 뭔가 대답해야 하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아주버니들 말씀대로 이제는 당신 앞길 제대로 생각해.”

예전 같으면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아내의 말이 가슴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애로 사항 있습니까?”

정동일이 차주선의 연락을 받고 도쿄 외곽에서 점심 무렵 은밀한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문석원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자세히 말씀 주시겠습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누구인지, 아마도 주변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모양인데 박 대통령 암살에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동일이 즉답을 피하고 차주선을 주시했다. 주선이 슬그머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일은 어차피 예견했던 것 아닙니까.”

“하면 어찌 처리하는 게 이롭겠습니까?”

“그동안 그저 당근만 제공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대통령 암살 성공 가능성 희박
점점 계획에 대한 의구심 커져

“그렇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이번에는 채찍을 들어보시지요.”

주선이 채찍을 되뇌며 잠시 생각에 잠겨들었다.

“미처 그 생각을 못했습니다. 이제는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경고하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시고. 그런데 그 친구가 머뭇거리는 사유는 무엇입니까?”

“저는 원래 윤대중 구출에 초점을 맞추었었다 이거지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박 대통령 암살은 다른 차원에서 바라볼 일이다 이 말입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우리가 너무 치고 나갔으니 이제 돌릴 수 없습니다.”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순간 동일이 주선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무슨 의미입니까?”


“문득 오사카 항에 입항해 있는 만경봉호가 생각나서요.”

“만경봉호!”

“한번 그를 이용하는 방법도 괜찮을 듯합니다.”

주선이 만경봉호를 되뇌며 동일의 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채찍의 수단으로 그리고 후일 문석원이 북한과 연계되었다는 확고한 증거를 위해서라도 한번 심도 있게 고려해봄이 좋을 듯합니다.”

주선이 답에 앞서 슬그머니 미소를 흘렸다.

“참으로 기발한 생각입니다. 이른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말을 마친 주선이 급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벌써 가시게요.”

“쇠뿔도 단김에 뽑으랬다고, 그 친구가 너무 나락으로 빠져들기 전에 빨리 조처 취하도록 해야지요.”

저녁 무렵 이호룡이 문석원과 함께 승용차를 이용하여 오사카 항에 도착했다. 한 장소에  주차시키고 밖으로 나서자 이호룡이 앞서 나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뒤를 따르는 석원의 발걸음은 무거워 보였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를 연상시키는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부장님, 좀 천천히 가요.”

“이제 다 왔으니 서두르자고. 저쪽 사람들은 약속시간이 칼 같아. 그러니 별 일 아닌 걸로 저들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어.”


“도대체 누구를 만나는데요.”

“가보면 알아.”

호룡이 고개 돌려 석원을 힐끗 보고는 내처 앞으로 나아갔다. 별 도리가 없다 판단했는지 석원 역시 호룡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서둘러 쫓아갔다. 이어 오래지 않아 호룡이 조그마한 건물 앞에 멈추었다.

석원이 고개 들어 건물 뒤를 바라보자 옆면에 ‘만경봉호’라 쓰인 배가 시선에 들어왔다. 가만히 만경봉호를 주시했다. 말로만 들었던 그 배를 직접 바라보니 감회가 새로운지 석원이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배 안에서는 각별히 주의해야 하네. 저 안은 일본이 아니라 북조선이야.”

건물 안에서 간단히 수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서자 호룡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석원이 다시 시선을 만경봉호로 주었다. 스산한 저녁 분위기마냥 만경봉호 역시 그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 동무는 만경봉호 승선이 처음입니까?”

“그렇소.”

안내원의 질문에 호룡이 짤막하게 답했다. 순간 안내원의 싸늘한 시선이 석원 쪽으로 쏟아지자 석원의 몸이 절로 움찔거렸다. 

“호룡 동무, 이 사람이 문석원 동무요?”

일행이 막 배에 승선하기 위해 트랩을 오르자 그곳에 경비를 서고 있던 한 남자가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석원을 주시했다. 호룡이 그렇다고 짤막하게 답하자 그 사람이 석원을 한쪽으로 불러 세웠다. 이어 석원의 전신을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너무 염려하지 말게. 승선하기 위해서 반드시 치러야 하는 절차라네.”

저만치에서 호룡이 안내를 맡았던 사람과 한담을 나누다 석원에게 시선을 주었다.

“석원 동무, 만경봉호에 승선한 일을 영광으로 알게. 이 배는 아무나 탈 수 있는 배가 아니네. 살거나 죽거나….”

안내원이 말하다 말고 호룡에게 시선을 돌렸다가는 이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듯이 걸음을 옮겼다. 석원이 멀어져가는 안내원과 자신의 몸을 수색하는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급격하게 찾아든 듯 잔뜩 움츠러들었다.  

“들어가도 좋소.”

그 남자의 짧은 한마디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비쩍 마르고 눈이 흡사 칼날처럼 찢어진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갑세다!”

석원이 남자가 내뱉은 한국말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이 시선을 호룡에게 주었다.

“그 동무의 안내를 받도록 하게. 나는 여기 이 동무와 대화를 좀 더 나누고 잠시 후에 갈 테니 먼저 가서 일보게.”

순간 불길한 생각이 일어났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천근만근 발걸음으로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이동하면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얼어붙은 듯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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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한미 정상회담 팩트시트가 공개되자, 가장 큰 화제가 된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에 대해 “문구가 추상적이어서 모호하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자극 받은 일본도 핵잠수함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핵잠수함 건조를 현실화하지 않으면 “일본에 핵 보유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의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하게 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달 29일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타결된 한미 관세·안보 협상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가 지난 14일 공개됐다. 가장 큰 논란은 핵 추진 잠수함(이하 핵잠수함) 관련 합의 문구였다. 산 너머 산 구체성 없다 팩트시트를 통해 확인되는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선 “구체성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팩트시트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민간·해군의 원자력 프로그램 ▲한미 원자력 협정에 부합하고 미국의 법적 요건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로 귀결될 절차 등을 지지한다. 이어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고, 한국과 조선 사업 요건 진전·연료 조달 방안 등을 포함해 긴밀히 협력한다. 미국은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 지지·승인·협력할 뿐이다. 이를 두고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같은 날 브리핑에서 “한미 정상의 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에서 건조하는 게 전제였다”며 “우리 핵잠수함을 미국에서 건조하는 방안은 거론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같은 날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며 “국내 건조 장소 합의는 팩트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기자들 앞에서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을 발표하면서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건조될 것”이라며 “미국 조선업이 곧 대대적인 부활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핵잠수함이 건조되려면, 산적한 현안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 팩트시트엔 건조 장소가 적시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명시해 발표했기 때문에, 미국이 순순히 양보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같은 회담 결과를 두고 양국의 주장이 엇갈리는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다.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및 핵연료 재처리엔 ▲한미 원자력 협정 부합 ▲미국의 법적 요건 준수 ▲한국의 평화적 이용 등 단서가 붙는다. 기술 이전 과정에도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핵잠수함 보유국은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인도 등 6개국이다.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30일 “미국이 핵잠수함 기술을 공유한 사례는 1950년대 최우방국 영국과 협력한 사례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미국의 핵잠수함 기술은 미군이 보유한 가장 민감하고 철저히 보호돼온 기술”이라며 “가까운 동맹인 영국·호주와 체결한 핵잠수함 협정에서도 직접 기술 관련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우리에겐 우라늄 농축·재처리 기술이 없어서 미국으로부터 핵연료를 공급받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하지만 연료 공급 장소·방식은 팩트시트에 명시되지 않았다. 연료 공급 방법을 확보하지 못하면, 핵잠수함을 만드는 의미가 없다. 핵잠 건조 추상적인데 “고정밀지도 내놔” 발 빠르게 비핵 3원칙 수정하려는 일본 미국의 법률 개정 절차도 거쳐야 한다. 미국 원자력법은 ‘미국이 다른 나라와 군사적 목적의 원자력 협력을 하려면, 원자력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미 원자력 협정을 개정한 후 미국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국제 무기 거래 규정도 상원의 동의를 얻어 개정해야 한다. 원자력 협정 개정이 팩트시트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미국 에너지부의 반대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미국 일각에서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한단 것이다.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미국에 고정밀지도를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팩트시트엔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포함한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정책에 있어 미국 기업이 차별당하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위치·재보험·개인정보에 대한 것을 포함해 정보의 국경 간 이전을 원활하게 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도 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온라인플랫폼의 ▲자사 우대 ▲끼워팔기 ▲멀티호밍 제한 등을 막는 내용이 담긴 우리의 온플법 제정을 반대했다. 팩트시트를 따르면, 미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가 어려워진다. 아울러 우리는 구글·애플이 요청하는 1:5000 축척 고정밀지도 국외 반출 요청을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정부는 애플이 요청한 지도 반출 여부를 다음 달에, 구글의 요청은 내년 2월 결정할 예정이다. 팩트시트에 게재된 합의 사항대로라면, 애플·구글의 요청을 수용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 박성훈 수석대변인은 지난 15일 논평을 통해 팩트시트 속 위험요소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박 대변인은 “정부는 ‘농·축산물 개방은 없다’고 말해 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대로 농·축산물 개방 문구가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고정밀 지도 반출 등 대한민국의 디지털 주권과 직결된 사안까지 미국의 요구를 반영해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반도체 관세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보다 불리하지 않게 한다’는 모호한 문구만 있다”며 “경쟁국 대만과 비교해 어떻게 적용할지 등 구체적인 내용은 팩트 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50억달러(약 36조7183억원) 규모의 미국산 군사 장비를 5년 동안 구매하고, 주한미군에 대해 330억달러(약 48조4682억원)를 포괄적으로 지원하면, 천문학적인 재정 부담을 떠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핵잠수함 건조 과정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라서 장밋빛 전망만 내세울 때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고정밀지도 반출 가능성 실제로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가 실현되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해서 실질은 아직 불투명하다”며 “선언이 지나치게 앞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는 핵잠수함 나비효과가 일본으로 번졌단 점이다.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자, 일본 정치권도 크게 술렁였다.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은 지난 12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미국·중국은 이미 핵잠수함을 갖고 있고, 지금은 핵잠수함을 보유하지 않은 한국·호주가 앞으로 보유하게 된다”며 “일본의 억지력·대응력을 강화하려면, 전고체·연료전지·원자력 등 다양한 동력원에 대해 폭넓게 논의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일본은 1967년 사토 에이사쿠 당시 총리가 선언했던 비핵 3원칙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비핵 3원칙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선언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일찍부터 핵무기 반입 금지 방침 완화를 주장했다.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도 같은 날 “현 시점에선 재검토 여부를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국회 연설에서 “내년 중 3대 안보 문서 개정을 위해 검토를 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3대 안보 문서는 ▲국가안보 전략 ▲국가방위 전략 ▲방위력 정비 계획 등을 말한다. 여기엔 비핵 3원칙이 모두 포함돼있다. 일본은 이미 지난 2022년 “반격 능력을 보유하고, 장거리 미사일 전력을 향상한다”는 내용을 3대 안보 문서에 포함했다. 묘한 것은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이 일본 국내 정치구도까지 뒤흔들 가능성이 있단 것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카이치 총리가 선출될 당시 라이벌이었다. 지난달 4일 진행된 자민당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183표(31.1%)를 얻었고, 고이즈미 방위상은 164표(27.8%)를 얻었다. 결선투표에선 다카이치 총리가 185표(54.3%)를, 고이즈미 방위상은 156표(45.7%)에 머물렀다. 하마터면 다카이치 총리는 자민당 총재·총리로 선출되지 못할 뻔했다. 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로 통하는 다카이치 총리에 반발한 공명당이 지난달 10일 자민당과의 연정에서 탈퇴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명당 사이토 데쓰오 대표는 고이즈미 방위상에 대해선 “정치자금 규제와 관련된 공명당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면서 호평했다. 고이즈미 방위상도 “지금까지 정책 실현에 대해 힘써 주신 것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화답했다. 미일 협력 중국 견제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0일 기적적으로 일본유신회와의 각외 협력 형태의 연립 정권 구성에 합의했다. 각외 협력은 연립 정권 구성엔 합의하지만, 내각엔 참여하지 않는 형태를 말한다. 일본유신회가 제시한 조건은 ▲오사카 부수도 지정 구상 수용 ▲국회의원 정원 10% 감축 ▲기업·단체 후원 폐지 ▲평화 헌법 개정 ▲방위력 강화 등이었다. 자민당과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모두 수용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1일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했다. 가장 큰 정치적 의미는 ‘당내 정적 포용’이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전혀 없는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해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정반대의 의미를 강조하는 해석도 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없는 고이즈미를 현안이 산적한 방위성 장관으로 임명해 자멸을 유도한다”는 취지의 해석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주어진 현안은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 ▲자주적 방위력 강화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 ▲방위 장비 수출 운용지침 폐지 등이다. 이중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은 ‘중국 견제’라는 미국·일본의 공통 이해관계로부터 시작됐다. 일본은 군사력을 강화해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역할을 맡으려고 한다. 미국은 일본의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더 효율적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 문제는 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 “방위비를 GDP(국내총생산)의 3.5%로 증액하라”고 요구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8일 진행된 미일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위비 증액·방위력 강화 방침을 설명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음 날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을 만나 “방위비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오는 2028년 3월까지 방위비를 GDP의 2%까지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방위 정책과 관련해 국내 정세와 가장 민감하게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을 곤란하게 할 사안이 있다. 바로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이다. 일본 오키나와현 소재 후텐마 기지는 기나완시 시가지 한복판에서 시 면적의 1/4을 차지하고 있다. 후텐마 기지는 1945년 건설됐고, 일본에서 크고 작은 논란을 일으켰다. 오키나와현의 주민 중 상당수는 미군의 범죄와 소음 피해 등을 이유로 기지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팩트시트’ 고이즈미 날개 다나 견제 압박 와중에 뜻밖의 호재 지난 2004년엔 후텐마 기지 소속 헬리콥터가 오키나와국제대학에 추락하는 등 사고도 여러 번 발생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편입된 시점은 1879년이었다. 1945년부터 1972년까진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따라서 오키나와에선 반미 감정이 강하고, 자민당 지지율이 낮은 편이다. 후텐마 기지와 관련해서도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섬 내 나고시 헤노코 이전을 추진했지만, 오키나와 현·주민의 반대가 강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23년엔 다마키 데니 현지사가 방위성이 신청한 비행장 설계 변경 신청을 승인하지 않고 공사 중단을 요구했다.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은 일본의 역사적 맥락과 맞물려 수십년 넘게 해결되지 못한 사안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중국 견제를 위한 새 안보 질서와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정치적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 2019년 고이즈미 방위상을 환경상으로 발탁했다. 이 임명에 대해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무게를 키우면서도, 문제가 발생하면 그를 정치적으로 낙마시킬 수도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의 아버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퇴임 이후 강력한 원자력 발전소 폐지론자가 됐다. “아버지의 활동이 아들의 정치적 미래를 흐리게 할 수 있어 고이즈미 방위상을 견제하는 묘수”란 평가도 있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기후 변화 문제는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등 적당히 괴상한 발언을 하는 등 바보 행세를 하면서 견제를 피했다. 한동안 일본에선 고이즈미 방위상이 진짜로 바보인지, 바보인 척 연기를 하는지 장난 섞인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후 고이즈미 방위상은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고노 다로 전 외상과 연합해 이시바 내각 탄생에 큰 공을 세웠다. 이어 농림수산상으로서 쌀값 폭등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지난 2023년엔 자민당 내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조기 의회 해산 및 총선거 진행을 적극적으로 제안한 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자민당은 중의원 과반에 미달하는 의석을 얻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더 큰 패배를 당하기 전에 적절한 시점에서 중의원 해산을 건의했다”며 긍정적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방위상 취임 이후엔 어떻게 구 아베파·아소파의 견제를 피할 것인지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한 사안은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견제 수위를 낮추면서 자민당·내각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뜻밖의 호재로 다가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이 일본의 핵잠수함 도입을 주도한다면,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가 될 수도 있다. 견제 회피 일거양득 우리의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일본 정치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사안이 된 것이다. 만약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불확실해지면, 이재명정부는 이 때문에 더욱 큰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일본의 군비 증강에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미래를 위한 발판을 제공한 것”이란 비판이 따라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핵잠수함 나비효과는 이렇게 일본으로 번졌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