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논란의 사외이사 막전막후

권력기관 출신 모시기 경쟁 '박 터진다'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사외이사 제도는 경영진의 횡포를 막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다. 전문성을 갖춘 외부 인사를 사외이사로 앉혀 경영진을 견제하자는 게 기본 취지.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사외이사는 이사회의 결정에 순응하는 ‘거수기’로 전락했다. 정기주주총회 현장을 뜨겁게 달군 사외이사 적격성 논란 역시 따지고 보면 사외이사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서 출발한다.

3월이 되면 주주들의 이목은 주주총회에 집중된다. 거의 모든 상장사들이 매년 이 시기에 주총을 거행하는 까닭이다. 올해 3월에 주총을 개최한 상장사만 해도 800곳이 넘는다. 그사이 핵심 관전 포인트였던 사외이사 선임 안건은 거의 모든 주총에서 무사통과 됐다.

일부 사외이사들의 지난 행적이 논란을 야기했지만 별반 달라진 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외이사 선임 안건은 아직까지 갖가지 구설을 양산하고 있다. 이해관계에 취약한 구조적인 문제가 곳곳에서 부각된 덕분이다. 회사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인물이 사외이사로 발탁돼 독립성을 저해하는 경향 역시 마찬가지였다.

되풀이되는
우리 편 뽑기

이해관계자를 임명하는 행태는 사외이사 선임 논란에 불을 지피는 단초가 된다. 하이트진로와 하이트홀딩스는 25일 주총에서 회사 임원 출신 인사를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조판제 하이트진로 사외이사는 과거 하이트맥주 임원을 지낸 인물이다. 하이트홀딩스는 김명규 사외이사를 재선임했다. 그 역시 하이트맥주, 하이트음료, 진로 등에서 임원을 거쳤다. 둘 다 독립성을 중시하는 사외이사에 적합하지 않다는 문제제기가 계속됐다.

조현덕 한진칼 사외이사는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다. 김앤장 법률사무소는 2013년 대한항공을 인적분할해 한진칼을 설립해 지주회사를 전환하는 과정에서 자문용역을 수행했다.


일부 사외이사는 회사와 이해관계가 상충된다. SK텔레콤 오대식 사외이사는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이다. 태평양은 LG유플러스의 법률 대리인으로 SK텔레콤과 CJ헬로비전 인수합병을 반대하고 있다.

LG화학 안영호 사외이사는 김앤장 법률사무소 고문이다. 김앤장은 정부 온실가스 배출권 할당 처분 취소소송에서 LG화학 등의 법률 대리를 맡고 있다. 한진해운 노형종 사외이사는 KSF선박금융 감사다. 노 사외이사는 자신이 감사로 재직한 회사와 거래관계가 있는 한진해운 사외이사로 선임됐다는 점에서 이해상충 소지가 다분하다.

현대엘리베이터 서동범 사외이사 후보는 사모투자펀드 운용사인 이음프라이빗에쿼티 상무로 재직 중이다. 이 회사와 특수관계인 이음제이호기업재무안정사모투자합자회사는 현대엘리베이터 전환사채를 인수했다.

아모레퍼시픽그룹은 주총에서 이옥섭 바이오랜드 부회장을 신임 사외이사로 선임하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이옥섭 사외이사는 아모레퍼시픽의 전신인 ‘태평양’의 화장품생활 연구소 수석연구원 출신으로,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아모레퍼시픽 기술연구원장(부사장) 등을 지낸 인사다.

뜨거운 감자 ‘독립성’ 한계
“보험처럼 갱신” 정권 따라 교체

일부 대형 금융지주사들은 임기가 끝난 사외이사를 이사회에 잔류시켜 논란을 키우는 모습이다. 경영진이 친정 체제를 구축하려 한다는 지적과 비슷한 맥락이다.

지난 24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신한금융지주는 5년 임기를 채운 남궁훈 사외이사를 ‘기타비상무이사’로 선임했다. 금융회사 사외이사 임기는 최장 5년으로 정해져 있지만, 기타비상무이사는 임기 규정이 없기 때문에 사외이사로서 임기를 채웠더라도 이사회에 남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사례는 지금껏 극히 드물었다. 금융권 안팎에서는 내년 3월 임기가 끝나는 한동우 회장이 차기 회장 선임 과정에서 지배구조 안정화를 꾀하기 위해 이사회를 경영진과 교감할 수 있는 인물들로 꾸렸다고 평가한다.

KB금융지주는 지난해 3월 주총을 통해 임기 1년의 사외이사로 임명했던 7명을 전원 유임시켰다. 사외이사의 힘이 너무 크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사외이사 임기를 2년에서 1년으로 단축한 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KB금융지주가 이번에 사외이사 전원에 대해 유임 결정을 내리면서 임기도 다시 2년 으로 돌아오게 됐다. 지배 구조의 연속성을 위한 선택이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김종준 전 하나은행장은 하이투자증권 사외이사로 금융권에 복귀했다. 그는 과거 금융당국으로부터 중징계 조치를 받았던 전례가 있는 인물이다. 그는 2012년 3월 행장으로 취임한 이후 2014년 4월 금융감독원으로부터 2011년 하나캐피탈 사장 시절 영업정지된 미래저축은행을 부당 지원한 사실이 적발돼 문책경고 제재를 받았다. 도덕성이 요구되는 사외이사로 선임하는 것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도 제기된다.

일 안 해도
재선임 OK

업무 능력이 검증되지 않거나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는 인물을 사외이사에 선임하는 경우도 되풀이됐다. 매번 사외이사를 선임 과정에서 잡음을 만들던 기업도 더러 눈에 띈다.

지난 18일 종로구 LG광화문빌딩에서 열린 주총에서 LG생명과학은 ▲재무제표 승인 ▲이사 선임 ▲이사 보수한도 승인 등을 처리했다. 다만 이번에 재선임 된 양세원 사외이사의 저조한 이사회 출석률은 논란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양 이사의 지난 3년간 이사회 출석률은 71%, 75%, 75%로 평균 73.7%이다. 일각에서는 이사회 출석률이 75% 미만인 이사들에 대해서는 업무의 충실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판단해 재선임에 반대를 권고하기도 했다.

현대상선은 이사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외국인 사외이사를 재선임해 논란을 키웠다. 홍콩 국적의 에릭 싱 치 입(ERIC SING CHI IP)은 사외이사에 이름을 올린 지난 10년간 이사회에 거의 참석하지 않은 인물이다. 지난 2005년 3월 처음으로 사외이사에 선임된 이래 불과 6번 출석한 게 전부였다. 2011년부터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현대중공업은 사외이사 선임 과정에서 2년 연속으로 잡음에 휩싸였다. 계획보다 일주일 미뤄진 25일이 돼서야 가까스로 주총을 치렀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사외이사가 중도에 사퇴하면서 주총에 차질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당초 주총에서는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과 민유성 전 산업은행장이 사외이사로 신규 선임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민유성 후보가 이사직 자진 사퇴 의견을 밝힘에 따라 홍기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로 교체됐다. 민 후보는 최근 SDJ코퍼레이션에 몸담고 맡아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에 개입한 데다 정부와 연관된 산업은행장을 역임한 약력이 있어 적격자로 미흡하다는 비판을 받았던 인물이다.

권력기관 출신
정경유착 고리

현대중공업의 사외이사 자질 논란은 지난해에도 일어난 바 있다.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주총을 앞두고 사외이사 후보를 송기영 법무법인 로고스 상임 고문변호사에서 유국현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로 변경했다. 송 변호사의 경우 현대중공업의 대주주인 정몽준 전 의원과 특수관계에 있어 비판이 일었다. 송 변호사는 정몽준 대주주와 현대중공업이 출연해 세운 아산나눔재단의 감사를 맡은 바 있다.


대기업 사외이사 자리에 권력기관 출신 인사들이 진출하는 모습도 변함없이 재현됐다. 사외이사가 경영 투명성이 아닌 정경유착의 고리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는 비판에 자유롭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재벌닷컴이 10대 그룹 상장사의 신규 또는 재선임 예정인 사외이사 후보 140명을 분석한 결과, 43.6%인 61명이 정부 고위관료, 국세청, 금감원, 판·검사 출신으로 나타났다. 전직 장·차관도 16명이나 된다. 권도엽 전 국토해양부장관(GS건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장관(두산인프라코어), 김경한 전 법무부장관(한화생명), 박봉흠 전 기획예산처장관(삼성중공업)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권도엽 전 장관은 요주의 대상이다.

GS건설은 18일 열린 주총에서 권도엽 전 국토교통부장관을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권 전 장관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1년 5월부터 2013년 3월까지 국토해양부장관을 지냈다. GS건설은 사외이사 선임을 두고 권 전 장관의 전문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다만 독립성에 국한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자신이 주무 장관으로 있던 분야에서 기업의 사외이사에 이름을 올린다는 것이 합당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따를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검찰 고위간부 출신 변호사들이 소속 지방변호사회의 허가 없이 대기업 사외이사로 선임됐거나 활동했던 사실이 공개돼 사외이사를 둘러싼 논란이 커지고 있다. 권력기관 출신 변호사들을 대거 영입해 방패막이로 삼거나 향후 돌발상황에 대비한 보험 명목으로 활용한다는 지적이다.

검찰총장 출신인 송광수 변호사는 삼성전자 사외이사로 영입된 이래 3년 동안 20차례 이사회에 참석하며 60여개 의안에 모두 찬성 입장을 냈다. 두산 사외이사로도 활동하는 송 변호사는 이 회사에서도 찬성표를 던지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름만 대면 아는…퇴직 후 방패막이 역할 
전직 검찰 간부들 겸직 위반

법무부장관을 지낸 김성호 변호사도 2013년부터 CJ 사외이사로 활동하며 자신이 참석한 모든 안건에 찬성 입장을 개진했다. 지난해 기아자동차 사외이사로 선임된 이귀남 변호사 역시 7차례 이사회에서 모두 찬성 의견을 나타냈다. 이 변호사는 2009∼2011년 법무부장관을 역임했다.

일부 인사는 재직 시절 수사했거나 직무와 직·간접으로 연관이 있었던 기업과 연고를 맺었다. 송광수 변호사는 검찰총장 시절 삼성가의 편법 경영권 승계 수사를 지휘했지만 퇴임 후인 2013년 삼성전자 사외이사를 맡았다. 올해 주주총회에서 다시 선임돼 3년간 활동한다. 이재원 변호사는 자신이 지검장을 지냈던 서울동부지검장 관할 구역에서 제2롯데월드를 추진하던 롯데쇼핑의 사외이사가 됐다.
 

기업이 판·검사 출신 법조인을 영입한 것은 새삼스러운 그다지 일은 아니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최태원 SK 회장 형제가 회삿돈 횡령 등 혐의로 재판을 받던 2012년 1월 이 회사에 전무급 이사로 영입되기도 했다.

물론 해당 기업이 충분한 검토와 자문을 거쳐 결정한 사안인 만큼 찬성, 반대 여부만으로 모든 상황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사실상 거수기 역할에 그칠 뿐이라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굳건한 방패막이
회사와 한통속

실제로 시민단체들은 권력형 사외이사 선임을 ‘방패막이’ 쯤으로 평가한다. 권력형 인사의 경우, 풍부한 인맥과 경험을 통해 기업에 유리한 정책입안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물론 사정기관 동향파악 등 사실상 방패막이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방패막이 역할을 자처하는 그릇된 사외이사의 행태가 곳곳에서 드러난다"며 ”후진적인 기업 지배구조를 선진화하기 위해서라도 전관예우 문제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djya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가시화된 오너 2·3세 승계작업

정기주주총회를 거치며 대기업들이 경영 승계 작업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오너일가 2·3세들이 그룹 주력 계열사 사내이사 명단에 잇달아 이름을 올린 형국이다.

재계의 대표적인 3세 경영인으로 꼽히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장남 조원태 대한항공 총괄 부사장은 지난 18일 열린 대한항공 주총에서 대표이사로 신규 선임됐다. 조 부사장은 그룹 지주회사인 한국공항의 대표이사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미 한진칼과 대한항공, 한국공항 등 그룹 내 주요 12개 계열사에서 등기이사를 맡고 있는 조원태 부사장은 지난 1월 단행된 대한항공 ‘2016년 정기 인사’에서 회사 전 부문을 관장하는 총괄 부사장으로 선임되면서 존재감을 드러낸 바 있다. 지주회사와 주력 계열사 대표이사에 오르자 일각에서는 사실상 조 부사장을 중심으로 한 한진그룹의 경영 승계가 정지작업을 마쳤다는 평가도 나온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장남인 박세창 금호아시아나그룹 전략경영실 사장은 올해 정기 주총에서 등기이사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금호산업은 28일 열린 주총에서 박세창 사장의 사내이사 신규 선임 안건을 통과시켰다.

금호산업은 아시아나항공 지분 30.08%를 보유한 최대주주로 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 역할을 하고 있다. 박세창 사장의 금호산업 등기이사 선임은 그룹 경영 승계를 더욱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관측된다.
세아그룹의 3세 경영인 이태성 세아베스틸 전무도 등기이사 명단에 새롭게 이름을 올렸다. 이운형 세아그룹 회장의 장남인 이 전무는 세아베스틸 정기 주주총회에서 사내이사로 신규 선임됐다.

이번 세아베스틸 등기이사 선임으로 이태성 전무는 세아홀딩스와 세아특수강 등 그룹 핵심 계열사의 경영 전면에 나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지난 2009년 세아그룹 지주사인 세아홀딩스에 입사한 이태성 전무는 지난해 세아홀딩스와 세아베스틸 전무로 승진한 바 있다.

한술 더 떠 두산그룹은 오너가 4세 경영 시대를 열었다.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이 그룹 경영권을 큰조카인 박정원 ㈜두산 지주부문 회장에게 넘기면서다. 박정원 회장은 25일 주총에 이은 이사회에서 의장 선임절차를 거친 뒤 그룹 회장에 정식 취임했다.

두산그룹은 박두병 창업 회장의 유지에 따라 형제간에 경영권을 승계해왔다. 박 창업 회장의 장남인 박용곤 회장부터 시작해 박용오, 박용성, 박용현, 박용만 회장까지 차례로 경영권이 이어져왔다.

재계 관계자는 “오너일가 1세대가 그룹의 기틀과 성장을 이끌었다면 2·3세대는 신사업과 새로운 미래 성장동력을 발굴해야 하는 중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며 “그룹의 전면에 등장한 이들의 활약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고 말했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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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