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 살생부’ 계파별 손익계산서

여의도 칼바람에 떠는 비박 뜨는 친박

[일요시사 정치팀] 최현목 기자 = 결국 올 것이 왔다. ‘살생부’가 존재한다는 얘기가 새누리당을 강타했다. ‘찌라시(증권가 정보지)’도 대서특필되는 민감한 시기에 유력 정치인의 입을 통해 나왔으니, 당이 발칵 뒤집힌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사태는 당 대표의 백기투항으로 일단락됐지만, 불씨는 여전하다. 지도부가 의원들 입단속에 들어갔음에도 계파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당내 분란으로 번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새누리당 ‘공천극장’의 막이 올랐다. 제1막 ‘살생부’는 김무성 대표의 사과로 끝났다. 지난달 29일 최고위원회의(이하 최고위)의 의결사항을 전달받은 그는 “당 대표로서 국민과 당원에게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해 사과드린다”고 입장을 전하고, 클린공천지원단에서 진행하는 진상조사에 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날 최고위는 사태의 진원지 중 하나인 정두언 의원을 불러 조사를 실시, 재발을 막기 위한 사항들을 의결했다.

흥미진진…
새누리 공천극장

의결사항은 크게 두 가지다. ▲공천관리위원회(이하 공관위)의 공정성이 저해되는 언행 금지 ▲이를 어길 시 클린공천지원단이 즉각 조사해 엄중 처리한다가 그것이다. 엄중 처리는 공천 배제까지 염두에 둔 말일 가능성이 높다.

사태는 숨 가쁘게 진행됐다. 지난달 26일 언론에 처음 공개됐고 27일 공천면접장에 모습을 드러낸 정 의원의 입을 통해 다시 한 번 알려졌다. 이날 정 의원은 자신을 포함해 40여명의 이름이 적힌 물갈이 명단이 친박계 핵심인사에 의해 김 대표에게 전달됐다고 주장했다.

즉 휴대폰으로 나도는 찌라시가 아니라 명단이 있고 이것을 친박계 인사가 비박계 수장이자 당 대표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정 의원은 “그동안 우리 당에서 진박 마케팅이니 정말 웃기는 일이 많았는데 이런 일도 그 일환이 아니겠나”라고 덧붙였다. 그렇게 ‘40인 살생부’라는 뇌관이 터졌다.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4일 정 의원은 김 대표와 평소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K교수로부터 40인 살생부 얘기를 듣게 된다. 앞서 그 교수는 김 대표에게서 존재 여부를 전해 들었다는 것이다. 평소 K교수는 김 대표에게 조언을 해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김 대표 측은 K교수에 대해 이미 김 대표와 멀어진 사이라고 해명했다). 이후 정 의원은 같은 내용을 남경필 경기도지사와 서울시당위원장인 김용태 의원으로부터 재차 듣게 된다.

이틀이 지난 26일 정 의원은 국회 본회의장에서 김 대표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김 대표는 “공천배제 인사 40명에 대해 받아들일 수 없다”며 “공천장에 도장을 안 찍고 버티겠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정 의원에게 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 의원의 표현에 따르면 당시 김 대표는 그야말로 ‘비분강개’했다. 정 의원은 “혹시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라”고 답했다.

1막 살생부
김무성 사과

정 의원은 한 번 더 확인을 받았다. “대표실로부터 살생부 이야기를 들었다”는 말을 한 언론사 기자를 통해 듣게 된 것. 40인 살생부는 그날 저녁 모 일간지를 통해 기사화됐다. 이후 김 대표 측에선 기사 내용 중 ‘대표에게 들었다’를 ‘대표 측에게 들었다’로 수정해 줄 것을 요청했고 정 의원이 직접 해당 기자에게 수정 내용을 전달했다.
 

27일 면접장에 모습을 드러낸 정 의원에게 이한구 공관위원장은 사실 여부를 물었고 정 의원은 이 위원장을 따로 만나 “대표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이튿날인 28일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우리 당의 공식 기구에서 철저하게 조사할 것을 요청한다”고 입장을 밝혔다(이 자리에서 이 위원장은 ‘찌라시 작가’ ‘찌라시 전달자’라는 말을 했다. 시중에는 4, 5개 유형의 소위 살생부라는 찌라시가 돌고 있던 상황이었다).

단발마의 총성은 대대적인 포격의 신호탄이었다. 29일 최고위에 참석한 김 대표는 “내 입으로 그 누구에게도 공천 관련 문건이나 살생부 얘기를 한 바 없다”며 정 의원의 말을 전면 반박했다. 이 자리에서 서청원 최고위원은 정 의원의 출석을 요구했다.

엇갈리는 말, 진실한 사람은 누구?
“리스트 없다” 무대 백기 들었지만…


사태는 의원총회(이하 의총)로 넘어갔다. 의총이 비공개로 전환되자 모든 것을 밝히라는 성토가 의원들 사이에서 거셌다는 전언이다. 첫 주자로 단상에 선 김 대표는 “살생부는 없다”고 말했고 이어서 의원들 앞에 선 정 의원은 “(대표가) 앞에서 그렇게 얘기했는데 더 뭘 말하겠나”라며 “최고위에서 모든 걸 말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고 전해진다.

의총 중간에 김을동 최고위원은 “둘 사이에 있었던 대화는 A∼Z까지 다 말해달라”고 요청했다. 김 대표는 의총장에 남고 정 의원은 긴급 최고위가 열리는 장소로 향했다.

살생부의 진위 여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정 의원은 “‘당 대표가 찌라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입장을 전했다. 또한 “김 대표가 나한테 ‘청와대 관계자가 자기한테 살생부 명단을 언급했다’고 말했다”며 청와대를 언급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같은 날 “청와대에 물어볼 일이 아니다”라며 “얘기를 꺼낸 당사자들이 설명할 일”이라고 논평을 자제했다.

의총이 끝나고 정 의원은 기자들에게 “이제는 빨리 수습해 전열을 정비해야 할 때”라며 “다행히 이 과정에서 모든 사람들이 공천 과정에 외부의 부당한 개입은 있을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고 말했다. 최고위 의결사항을 전달받은 김 대표는 앞서 내용처럼 사과했다.
 

4일간의 진실게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러나 계파 손익을 따진다면, 향후 4년의 주도권이 결정될 만한 사건이었다. 한 비박계 인사는 29일 “무게추가 친박계로 많이 기울었다”며 상황을 설명했다.

당초 유출자로 낙인 찍혔던 친박계는 파상 공세를 펼쳤다. 대표직까지 거론하며 강한 발언을 쏟아냈다. 서청원 최고위원은 “그(살생부 사태) 중심에 당 대표 있다는 거 자체가 심각한 일이다”라며 “그럼에도 죄송하다는 말을 안 한 건 유감”이라고 말했다. 이한구·이인제 의원은 “진상을 명백히 밝히고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각을 세웠다.

특히 이인제 최고위원은 “공관위가 공천작업을 열심히 하고 있다. 나도 거기 나가서 면접을 봤다”며 “공관위는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다. 공관위원들은 국민 눈높이에서 국민을 대신해 우리 당의 당헌·당규 정신을 받들어서 공명정대하게 민주적인 경선을 관리하는 것”이라고 손을 들어줬다.

2막 입단속
불똥 주의보

실세 최경환 의원은 자작 가능성을 제기했다. <문화일보>와의 대화에서 “지금 파악된 상황으로만 본다면 김 대표의 자작극일 가능성이 크다”고 언급했다. 당시 시점은 의총이 열리기 전이었다. 김태흠 의원은 “만약 정 의원의 주장처럼 당 대표가 친박 핵심 인사로부터 물갈이 명단을 받았다고 말한 게 사실이라면, 이건 김 대표가 거짓말까지 한 것이니 책임을 져야 할 문제”라며 “지금부터 공천이든 뭐든 당 대표로서의 권한을 내려놔야 한다는 뜻”이라고 몰아세웠다.

반면 비박계는 이번 사태로 가장 득을 본 게 누군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애초에 살생부는 없었다는 것이다. 한 비박계 인사는 지난달 29일 “살생부는 없을 것”이라며 “당장 어떤 사람이 써서 돌려도 살생부라는 이름이 붙는 상황에서 관리하는 살생부가 있을 가능성은 적다”고 말했다. 즉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정가에서 흘러나오던 소문들의 종합이 이번 살생부 사태 전말이라는 것이다.

친박 의원들이 진상 규명을 적극적으로 요구한 것도 뭔가 이유가 있기 때문이란 게 비박계의 시선이다. 또 다른 비박계 관계자는 이번 사태가 이한구 공관위원장의 공천이 투명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과정이었다고 내다본다. 즉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살생부를 조사해봤자 결국 실체는 밝혀지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이 위원장의 공천이 깨끗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게 될 것이란 분석이다.

이 가는 비박 “힘 받는 사람이 범인”
논란 이후…공관위 현역 컷오프 시사


해당 사태로 가장 힘이 실리게 된 쪽은 누가 뭐래도 공관위다. MBC라디오 <신동호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이번 논란이 결과적으로 공관위 입지 확대로 연결될 것으로 보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그렇다. (김 대표가) 공관위의 공정성을 저해하지 않는다고 최고위에서 발표했지 않았느냐”며 “(앞으로) 이 위원장이 상당한 권한을 발휘해서 공천에 임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정당성을 확보한 이 위원장은 사태가 진정된 지 하루 만에 현역 컷오프를 시사했다. 지난 2일 공관위는 구체적 기준안을 제시했다. 현역의 지지율이 당 지지도보다 낮다든지 몇 가지 기준에 미달할 경우, 집중심사에 나설 방침이라고 알렸다. 공관위 전체회의가 끝난 후 이 위원장은 기자들과 만나 “그런 경우(현역이 당 지지도가 낮을 경우)에 대해서는 자세히 들여다 볼 것”이라며 “무조건 자르는 것(컷오프)이 아니라 일단 집중적으로 심사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최근 공관위는 내부적으로 단수·우선추천을 적용할 지역과 부적격 현역 등 공천에 대한 윤곽을 어느 정도 잡아놓은 상황이라고 한다. 일례로 공관위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클린공천지원단이 투서 등을 종합하고 있는데, 실질적인 컷오프의 기준이 될 것이란 예상이 있다.

새누리당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공멸’이다. 사태를 빠르게 진화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공감대가 계파를 넘어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익명의 당 관계자 표현을 빌리자면 선거전 계파 갈등은 자칫 국민에게 오만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2막 ‘입단속’은 확전 자제를 원하는 두 계파의 이해관계가 맞아 시작됐고 현재 진행 중이다. 대표의 사과로 이번 사태는 사실상 종결됐다는 게 최고위의 시선이다.

3막 컷오프
경선 레이스

그러나 갈등의 본질은 바뀌지 않은 채 미봉(彌縫)에 그쳐 더 큰 갈등으로 번질 여지가 충분하다. 복수의 당 관계자는 이한구 위원장을 두고 ‘확실’한 친박이라고 말하고 있고, 근본 원인은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이르면 오는 10일, 새누리당 경선이 시작되는 시점에 제3막 ‘컷오프’가 막을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chm@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필리버스터 후일담
새누리당 프레임에 화들짝해 중단?

더불어민주당(이하 더민주)을 포함한 야당이 테러방지법 표결 저지를 위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지난 2일 중단했다. 당초 2월 국회 마지막 날인 오는 10일까지 계속 진행할 것으로 전망됐으나, 급선회를 결정했다.

필리버스터는 9일간 지속됐다. 지난달 23일 정의화 국회의장이 테러방지법을 직권 상정한 후 이에 반발한 야당 의원들이 릴레이 반대토론을 시작한 것. 더민주 김광진 의원을 시작으로 38번째인 이종걸 원내대표까지 본회의장 단상에 올랐다.

그 중 몇몇 의원들은 여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3번째 주자로 나선 더민주 은수미 의원은 10시간 18분이라는 당시 기준으로 헌정사상 최장 필리버스터 기록을 세우고 내려왔다. 동료 의원들에게 안겨 눈물을 흘리는 사진은 세간의 화제가 됐다. 이후 최장 기록은 17번째로 나선 정청래 의원에 의해 깨졌다가, 38번째로 나선 이 원내대표가 12시간 31분을 기록하면서 경신됐다.

8 번째로 나선 신경민 의원은 새누리당 19대 총선 공약 중 필리버스터가 있었다며 “(새누리당) 홈페이지에서 공약집을 확인해보라”고 말해 한때 접속자가 폭주, 홈페이지가 마비되기도 했다. 컷오프 명단에 이름을 올린 강기정 의원은 필리버스터 도중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 눈길을 모았다.

국회법상 본회의장에서 주제와 관련 없는 발언이 금지돼 있지만, 당시 사회를 보던 정갑윤 국회 부의장은 제지하지 않았다. 노래를 다 부른 강 의원이 단상을 내려가자 정 부의장은 “(필리버스터에) 나와줘서 고맙다. 사랑한다”고 배웅했다. 강 의원은 단상에 오르기 전 정장선 총선기획단장으로부터 당이 자신의 지역구인 광주 북갑에 전략공천을 할 것이란 통보를 받은 상태였다.

10일까지 진행하려다 급선회
38명 의원 단상 올라 열변

필 리버스터 중단이 알려진 지난 1일 34번째로 단상에 오른 박영선 비상대책위원은 필리버스터를 중단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며 눈물을 보였다. 그는 “필리버스터 중단 결정 소식에 많은 국민이 분노하고 계시다는 것 잘 알고 있다”며 “그러나 이는 총선에서 이기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후에 나온 박 비대위원의 발언을 두고 새누리당이 ‘선거용’이라며 비판해 논란이 되고 있다. 박 비대위원은 “여러분이 분노하신 만큼 4월13일 총선에서 야당에게 표를 주시라”며 “야당이 이겨야 평화롭고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다. 야당에게 과반의석을 주셔야 한다. 더민주에 힘을 주시고 야당을 키워주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는 지난 2일에 있었던 의원총회에서 “어제 더민주의 박모 의원께서 필리버스터 도중에 눈물을 쏟으면서 총선에서 표를 모아달라고 하는 걸 보고 아연실색했다”며 “야당의 필리버스터가 총선을 위한 선거버스터였음을 확인시켜주는 장면이었다”고 날을 세웠다.

한 야당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지난달 29일을 전후로 더민주 내에서는 필리버스터를 중단해야 한다는 의견이 꽤 나왔다고 한다. 같은 날 저녁 김종인 대표의 입에서 “(이종걸) 원내대표가 이 선거판을 책임질 것이냐”고 한 발언도 이의 연장선이란 게 정가의 관측이다. 2월을 넘길 경우 여론이 악화돼 총선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의원들 사이에 빠르게 번졌다는 전언이다.

일각에서는 그 이면에 새누리당의 프레임이 있었다고 본다. 익명의 정가 관계자는 “최근 새누리당에서 선거구 획정이 늦어지는 이유가 필리버스터 때문이라는 프레임을 짜고 있었다”라며 “더민주 내에는 그것 때문에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상황을 전했다.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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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