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 창업주 조중훈 <사업은 예술이다> 출간

[일요시사 경제2팀] 김해웅 기자 = ‘비행기가 하늘을 날 수 있었던 건 날 수 있다고 믿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그룹을 창업한 정석(靜石) 조중훈 회장의 일대기를 정리한 전기 <사업은 예술이다>가 전격 출간됐다.

지난 1일 창립 70주년을 맞은 한진그룹은 70년 전, 신용 하나로 사업을 시작한 청년 조중훈의 도전과 열정, 수송보국의 창업정신과 경영철학을 되새기기 위한 추모사업의 일환이자, 창업주의 업적을 통해 그룹 성장의 역사적 기록을 남기고, 나아가서는 대한민국 교통·물류산업의 발전사를 조명하기 위해 2010년부터 전기 출간을 준비해 왔다.

책을 쓴 이임광 작가와 함께 ‘사업의 예술가’ 조중훈 회장이 평생에 걸쳐 닦아놓은 길을 걷다보면, 끝없이 펼쳐진 땅길, 바닷길, 하늘길을 따라 일제강점기 절치부심 주경야독하던 식민지의 소년과 원대한 꿈을 품고 현해탄을 건너는 소년, 상하이에서 인천항으로 푸른 꿈을 싣고 돌아오는 청년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베트남 퀴논항에서 사선을 넘는 전설의 수송용사들과 항공의 불모지를 이륙한 파란 점보기가 죽의 장막을 뚫고 만리장성을 넘어 파리로 날아가는 가슴 뭉클한 대한민국 산업발전의 성장기와 마주할 수 있다.

전기 <사업은 예술이다>는 조중훈 회장의 어린 시절과 한진상사 창업 과정을 그린 <파도마저 삼킨 오디세이>, 베트남 전장에서의 숨막히는 수송작전을 담은 <퀴논의 전설>, 한진그룹 도약 계기가 된 대한항공공사 인수와 항공사로서의 발전 과정을 그린 <하늘길을 열다> <대한의 날개에서 세계의 날개로>를 비롯해 <해운왕 꿈을 이루다> <수송외길을 위한 변주곡> <열정의 민간 외교가> <인재의 숲을 가꾼 정원사> <인생과 사업의 예술가> 등 총 9장 392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년은 바다를 꿈꿨고 바다는 소년의 꿈을 품었다

‘주경야독으로 단련한 소년은 기관사가 되어 중국으로 간다. 상하이에서 본 중국의 바다는 일본의 바다보다 넓었다. 세계인이 몰려드는 그곳에서 그는 '지금은 일본 배를 타고 왔지만, 언젠간 나의 배를 타고 오리라!' 다짐한다.' <파도마저 삼킨 오디세이> 중에서
 

어려워진 가정 형편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해원양성소에 들어가 혹독한 훈련을 견디며 기술을 익힌 소년 조중훈은 일본 조선소의 수습기관사로 발탁되어 열입곱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곳에서도 타고난 성실함으로 낮에는 작업장에서 기술을 익히고, 밤에는 하숙방에서 독서에 몰두했다.

이후 외항선의 선원이 되어 중국 상하이와 홍콩 등을 항해하며 '손님의 마음을 읽는' 유대상인의 장사법과 '철저한 품질관리'라는 개성상인의 정신을 배운다. 세계문물을 접하며 사업의 철학을 마련한 조중훈 회장은 1945년 11월 ‘한민족(韓民族)의 전진(前進)’이라는 의미를 담은 ‘한진상사’ 간판을 내걸었다.

전쟁과 그림은 멀리서 봐야…사업은 더 멀리서

‘베트남은 기회의 땅이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누구나 기회를 잡는 것은 아니다. 조중훈은 그것이 기회임을 포착하고 모든 걸 걸었기에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전쟁과 그림은 멀리서 봐야 한다. 멀리서 봐야 한 폭의 그림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쟁도 전투만 보아서는 안 되고 전장을 둘러싼 모든 것을 보아야 한다.’ <퀴논의 전설> 중에서


한진그룹은 월남전 당시 미군의 군수물자 수송을 맡으면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조 회장은 1965년 12월 한국용역군납조합 이사장으로서 경제시찰단의 일원으로 동남아 순방을 하면서 사업상의 중대한 계기를 맞게 된다. 마지막 방문지였던 베트남의 퀴논 항에서 하역 순서를 기다리기 위해 외항에 정박 중인 30여 척의 화물선들을 보는 순간, 한진상사가 퀴논항의 군수품을 하역·수송하면 큰 사업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후 조중훈 회장은 펜타곤을 방문하고, 퀴논에 파병중인 미군들을 끈질기게 설득해 1966년 주월 미군사령부와 790만 달러의 군수물품 수송 계약을 체결했다. 그 후 1971년 종전 시까지 5년간 벌어들인 외화는 총 1억5000만 달러에 달했다. 당시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125~200달러 안팎으로 한진이 벌어들인 외화가 얼마나 큰 금액인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생일대의 모험…세계의 하늘길을 연 '대한의 날개'

‘적자투성이 국영 항공사를 구할 사람은 조중훈밖에 없었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도전을 포기했다면 지금의 대한항공은 없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시작한 항공이었지만, 조중훈은 기왕할 거라면 예술처럼 하고 싶었다. 그 시절 한국에서 항공사를 운영하고 성장시킨다는 것은 라이트 형제가 하늘을 날아보겠다고 했을 때만큼이나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결국 육중한 쇳덩어리가 새처럼 하늘을 날아오른 것처럼 그는 척박한 땅에서 고사 직전의 항공사를 이륙시켰다.’ <하늘길을 열다> 중에서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하는 데는 사업가로서의 자질과는 별도의, 또 다른 의미의 결단력이 필요했다. 당시 대한항공공사는 동남아 11개국 항공사 중 11번째가는 부실 투성이의 항공사였고, 당시로선 항공운송 사업의 미래도 불투명했다. 정부는 조중훈 회장이 ‘한국항공’을 설립했던 경험이 있었고, 그 동안의 사업 과정 및 수송산업의 월남 진출을 통해 알려진 추진력과 애국적인 열정 등을 감안해 그를 대한항공공사 사업자로 주목하고 있었다.

조 회장은 여러 번 당국의 대한항공공사 인수 요청을 고사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국적기는 하늘을 나는 영토 1번지고, 국적기가 날고 있는 곳까지 그 나라의 국력이 뻗치는 것 아니냐. 대통령 재임 기간에 전용기는 그만두고서라도 우리나라 국적기 타고 해외여행 한 번 해보는 게 내 소망”이라는 간곡한 권유를 받아 만성적인 적자를 보이고 있던 국영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했다.

당시 대한항공공사 인수를 반대하는 회사 중역들에게 “돈을 벌자고 시작했다가 밑지는 사업도 있고, 밑지면서도 계속 해야 하는 사업이 있는 것”이라며 대한항공공사 인수는 국익과 공익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소명임을 강조했다.

“선장이 키를 놓지 않는 한 전진하는 배는 흔들리지 않는다”

‘창조적 파괴로 한진해운을 완전히 바꾸어야 했다. 조중훈은 하늘에서 얻은 경험을 바다에서 구현하리라 마음먹었다. 항공사의 경영기법을 해운사에 적용하기로 한 것이다. 세계 해운 역사상 유례가 없는 회기적인 구상이었다.’
 

‘기업재건이 탄력을 받으면서 휘청하던 한진호는 다시 균형을 잡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항공사의 장점으로 재무장한 한진호는 하늘을 나는 배로 환골탈태했다.’<해운왕 꿈을 이루다> 중에서

조 회장은 1987년 11월 만성적인 적자에 허덕이던 대한선주를 한진이 인수할 것을 권유 받자 ‘유일한 육·해·공 종합수송기업으로서 한국의 수송업체를 대표한다고 자부하면서 타산적인 차원으로 관계자들의 고뇌와 업계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면서 대한선주를 인수하여 한진해운과 합병했다.


대한선주의 채무까지 떠안은 한진해운은 선박별 운항스케줄, 예약현황, 화물추적 등의 업무전산화 및 선원들의 근로조건 개선 등을 통해 생산성을 제고함으로써 인수 2년만인 1989년에는 경영정상화를 이루어 126억원의 영업이익을 달성할 수 있었다.

모르는 사업은 손대지 않는다. 조중훈 회장의 ‘수송외길’

‘모르는 사업은 절대 손대지 않겠다’며 조중훈 회장은 수송외길을 고집했다. 그 원칙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수송외길을 걸으려고 해도 당시 국내 기간산업은 걸음마 수준이었다….’

‘조중훈은 우리나라가 물류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관련 인프라부터 구축해야 함을 절감했다. 인천항 건설, 공항청사 확충, 영종도 신공항 건설, 전천후 항공유 수급 시스템 구축, LPG충천소 설치는 그런 의지와 안목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한일개발은 움라지 고속도록 공사에서 큰 손해를 감수하고 신뢰를 지켰다. 이는 훗날 한국 건설업체들의 중동 진출에 밑거름이 되었다.’ <수송외길을 위한 변주곡> 중에서

한진그룹이 설립하거나 인수한 회사들은 수송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거나 이를 보조할 수 있는 기업들이 대부분이다. 이는 조중훈 회장이 평생 한눈을 팔지 않고 전문분야에 집중하는 수송외길 인생을 살아왔음을 엿볼 수 있다.

배움에는 때와 장소도 없다. 배우려는 의지만 있을 뿐


‘인하공대를 인수하는 것이 수익은 커녕 얼마나 비용이 들어갈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모한 투자였지만 그는 교육을 두고 계산하지 않았다…’

‘”공부는 때가 있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은 조중훈은 대학교육이 캠퍼스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할 이유도 없다며 사내대학을 설립했다. 어린시절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학업을 중단했던 조중훈에게 배움은 평생 애틋함이었다…’ <인재의 숲을 가꾼 정원사> 중에서

조중훈 회장은 교육에 투자하는 것을 기업 이윤의 사회환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업보국을 이룩하려는 기업이 마땅히 해야 하는 소명으로 여겼다. 인재의 숲을 가꾼 정원사 조중훈에게 일평생 가장 뜻있는 사업은 인재를 키우는 것이었다.

마음을 낚는 리더... 인간미 있는 사람에겐 사업도 예술

‘그가 마음을 사려하면 누구라도 줄 수밖에 없었다. ‘마음의 언어’로 소통하고 교감했기에 가능했다. 언제나 자신보다는 상대의 편에서 상대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생각했기에 답을 찾아내고 상대를 설득할 수 있었다…’

‘치열한 경쟁환경에서도 ‘지고 이기는’ 지혜와 미덕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대성공을 거두면서도 적을 만들지 않았다.’

‘수송외길을 고집하며 매진한 것도 자신의 사업에서 최고의 작품을 창조하려는 장인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생과 사업의 예술가> 중에서
 

조중훈 회장은 평소 “사업은 지고도 이기는 것이고,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것”이라는 말을 즐겨 했다. 한진이 주한미군 용역사업에 참여한 1956년 무렵 ‘지고도 이긴다’는 조중훈 회장의 사업 신념이 빛을 발휘한 일화가 있다. 어느 트럭회사로부터 임차한 차량의 운전기사가 수송을 맡은 미군 겨울파카 1300여벌을 차떼기로 남대문 시장에 팔아 넘긴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당시 조 회장은 직원 한 명을 남대문 시장에 상주시키고 도난 당한 물건이 시장에 유통되면 전부 사들이도록 했다. 이는 금전적으로 큰 손해를 봤지만 미군들로부터 확고한 신용을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한진의 문제 해결 능력과 신용을 지키려는 열의를 본 미군들은 그 후 한진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이로써 조 회장은 당장 3만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큰 금전적 손해를 봤지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신용을 얻었다.

전기에는 조중훈 회장이 ‘수송보국(輸送報國)’ 신념으로 걸어간 ‘신용의 길’ ‘지혜의 길’ ‘애국의 길’ ‘외교의 길’ ‘교육의 길’에서 신념과 창의로 사업을 예술로 승화시킨 발자취들을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특히 베트남 퀴논항 하역 현장 및 한일경제외교, 국산전투기 제작 등과 관련해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일화와 진귀한 사진들도 다수 수록되어 대한민국 경제/외교사적으로도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조 회장과 교분이 두터웠던 손길승 전 전경련 회장과 이홍구 전 국무총리가 추천사를 썼다.

손 전 회장은 “세상에 철학이 아름다운 경영서는 그리 많지 않다”며 “조중훈 전기는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있는 이야기인 만큼 사업가로서, 기업가로서, 경영자로서 길을 잃었다면 이 책을 읽어보라”고 일독을 권했다.

이 전 총리 역시 “이 책을 인생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젊은이들, 특히 우리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아갈 학생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며 “그것은 평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독서광, 조중훈 회장의 바람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조중훈의 지혜'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샘솟는 것이었다. 사업과 인생의 예술가는 모든 것을 잊고 사라졌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를 잊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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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