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떠난 민주화의 거목…고 김영삼 전 대통령

닭 모가지 비틀어도 새벽은 왔는데…

[일요시사 정치팀] 김명일 기자 = “민주화운동의 영웅이 스러졌다.” ‘민주화의 거목’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22일 향년 88세의 나이로 서거하자 정치권에서는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한국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일요시사>가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며 그가 남긴 족적을 다시 되짚어 봤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오전 0시22분 향년 88세 나이로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으로 숨을 거뒀다. 서거한 김 전 대통령은 지난 2009년 먼저 세상을 떠난 김대중 전 대통령, 현재 생존해 있는 김종필 전 총리와 함께 대한민국 현대 정치에 있어 ‘3김시대’로 상징되는 정치거목이었다. 거산(巨山)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한국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산증인’이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정치권에서는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민주화의 상징
정치권 애도물결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20일 경상남도 거제(통영군)에서 1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 전 대통령은 어렸을 때부터 대통령을 꿈꾸며 자랐다. 어렸을 땐 자신의 책상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글씨를 써놓고 공부를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김 전 대통령은 서울대 철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50년 장택상 후보의 국회의원총선거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하다 그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비서관이 되었다. 이렇게 정치에 입문하게 된 김 전 대통령은 정치사에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김 전 대통령은 1954년 제3대 총선에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26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돼 최연소 국회의원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은 기록이다. 김 전 대통령은 여당 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했지만 1954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3선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을 통과시키자 “이 당은 안 되겠다”면서 이승만의 자유당을 탈당했다. 이때부터 김 전 대통령은 길고 긴 야당 정치인 생활을 시작했다.

김 전 대통령은 최연소자로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된 후 제5·6·7·8·9·10·13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9선 의원을 지냈다. 이는 헌정사상 최다선 기록이다. 김 전 대통령과 함께 김종필 전 의원, 박준규 전 의원이 9선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군사쿠데타를 계기로 민주화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68년 김 전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이 향토예비군을 설치하자 향토예비군법 폐지안을 발의하고 박 전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1969년 초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를 맡고 있었던 김 전 대통령은 자택 인근에서 괴한들에게 습격당했다. 일명 ‘초산테러’라고 불린 당시 사건을 두고 김 전 대통령은 정권 차원의 테러라고 주장하며 박정희정권과 갈등을 더욱 키워나갔다. 김 전 대통령은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는 김대중 전 대통령, 이철승 전 의원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앞세워 대통령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하지만 당 내 경선에서 영원한 맞수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패배하며 고배를 마셨다.


맞수 DJ·JP
애증의 반세기

1974년 '선명야당론'을 기치로 신민당 총재에 선출된 김 전 대통령은 유신체제를 강력히 비판했다. 1979년 ‘YH 여공 신민당사 농성’ 사건을 이유로 박정희정권은 김 전 대통령에 대해 의원직을 제명하고 가택연금했다.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의원직 제명과 가택연금은 부마항쟁을 촉발시켰고 이는 결국 유신정권 붕괴의 계기가 됐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이 남긴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발언은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에는 김대중, 김종필 등과 대권을 놓고 경쟁했다. 하지만 전두환과 신군부의 쿠데타로 좌절되었고, 신군부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계속된 가택연금과 정치적 탄압에 항의하며 장기간 단식투쟁을 단행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회복, 정치복원 등 민주화 5개항을 내걸고 단식에 들어갔으며 전두환정권은 김 전 대통령이 단식을 한 지 1주일이 지나자 그를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켰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병원에서도 단식을 계속했다. 이를 통해 가택연금 해제를 얻어냈다. 이 단식은 추후 민주화투쟁의 기폭제가 됐다.

김대중·김종필과 함께 3김시대 주역
군사 독재에 항거…민주화 운동 투신

이듬해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운동추진협회의(민추협)를 발족시켜 전두환정권에 맞서 싸웠다. 민주화운동의 성과는 1987년 6월항쟁과 직선제 개헌 쟁취로 나타났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운동의 동지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직선제 개헌을 계기로 사이가 벌어졌다.

두 사람은 제13대 대통령선거에 모두 나섰으나 후보단일화에 실패하며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에게 승리를 내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김 전 대통령은 1990년 ‘3당 합당’이라는 또 하나의 승부수를 던졌다. 자신이 이끌던 통일민주당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합쳐 민주자유당을 창당한 것. 3당 합당으로 인해 김 전 대통령은 차기 대선 승리의 초석을 다졌지만 민주화 진영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1992년 민자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김 전 대통령은 제14대 대선에서 김대중·정주영 후보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며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이로써 김 전 대통령은 32년 간의 군사독재를 끝낸 첫 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재임기간 평가가 김 전 대통령처럼 극명하게 엇갈리는 사례도 드물다. 김 전 대통령은 재임 초반에는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강도 높은 개혁으로 절대적인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김 전 대통령은 우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으로 이어진 군대 내 최대 사조직이었던 ‘하나회’ 청산을 통해 국방 문민화의 길을 텄다.


군정 부정과 정통성 확립에 집중했고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하기도 했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의혹 수사와 신군부 처벌도 이끌어 냈다. 투명한 경제 민주화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금융·부동산 실명제도 도입했다. 풀뿌리민주주의인 지방자치제 실시와 전방위적 부패 척결 등 강도 높은 개혁을 통해 대한민국 사회시스템 전반을 한 단계 끌어올린 ‘개혁’은 역사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전방위 개혁
친인척 비리

김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칼국수를 즐겨먹었는데 재임시절 김 전 대통령의 검소함과 청렴함은 ‘칼국수’로 상징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군 평시작전통제권 회수, 최초 남북정상회담 합의와 추진도 김 전 대통령이 이뤄낸 업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임기 중 아들 현철씨가 한보비리에 연루되는 등 친인척 비리와 외환 위기에 따른 국가 부도 사태 초래로 임기 초반 누렸던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대부분 잃고 임기 말에는 초라한 퇴장을 하고 말았다.

퇴임 후 지난 1999년 6월에는 외국 순방길에 나서면서 김포공항 제2청사에 갔다가 환송객과 악수를 하던 중 붉은 페인트로 채워진 달걀 세례를 받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에게 페인트 달걀을 던진 재미교포 박의정씨는 “IMF 때문에 5000명 이상이 자살하는 등 대한민국을 너무 힘들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좌우명으로 삼았던 김 전 대통령은 평생을 민주화 투쟁과 인권 증진의 외길을 걸으면서 군사독재 종식과 민주체제 정착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PK(부산·경남)를 지역기반으로 삼은 민주화세력을 일컫는 상도동계의 영원한 리더로서 오랫동안 현실 정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직접 발굴한 상도동계 사람들 맹활약
김무성·서청원 등 정치권 쥐락펴락

김 전 대통령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단어는 바로 ‘상도동계’다. 서울 동작구 상도동은 1969년 김 전 대통령이 안암동 자택을 팔고 이사한 뒤 46년 넘게 산 곳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계’와 함께 현대 정치사의 명암이 서려 있다. 군부정권과 맞서 싸우던 시절 상도동 자택은 가택연금의 장소로, 또 동료의원들과 모여 당론을 결정하던 곳이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수많은 정치거물들을 정치권에 입문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노무현ㆍ이명박 전 대통령도 김 전 대통령에 의해 발탁돼 정계에 입문했다. 부산의 대표적인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4월 13대 총선 때 당시 통일민주당을 이끌던 김 전 대통령에게 영입돼 부산 동구에서 금뱃지를 달았다.

극과 극 평가
역사 뒤안길로

이 전 대통령은 1992년 3월 치러진 14대 총선에 민자당 전국구(비례대표) 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그해 12월 대선에서 김 전 대통령과 경쟁한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영입의 성격이 강했다. 당시 YS의 깜짝 발탁을 놓고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현대건설 사장을 지낸 이 전 대통령이 정주영 명예회장이 만든 통일국민당에 참여하지 않고 오히려 경쟁자의 품으로 들어간 게 도덕적 논란을 일으켰다.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와 서청원 의원, 정병국 의원은 여전히 여의도에서 활약하고 있는 상도동계로 꼽힌다. 김 대표와 서 의원은 1984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만든 민추협에서 정치경험을 쌓았다. 정 의원은 1987년 대선 때 홍보업무를 담당하며 김영삼의 사람이 됐다. 이외에도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김문수 전 경기지사, 이재오 의원, 정의화 국회의장, 홍준표 경남지사, 안상수 창원시장, 이완구 전 총리도 모두 김 전 대통령에 의해 정계에 입문한 '김영삼 키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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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