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당당한 개선장군 천정배

혈혈단신 야권 재편 선봉서나

[일요시사 사회팀] 박창민 기자 = 기나긴 야인생활 끝에 국회의원 천정배가 다시 여의도로 돌아왔다. 무소속으로 보궐선거에 나섰던 그는 제1야당의 성지이자 텃밭인 광주에서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됐다. 천 의원이 내세운 ‘호남정치 복원론’의 발판이 마련됐다. 호남신당 창당도 공언했다. 그는 단숨에 내년 총선 돌풍의 핵으로 부상했다.      

 
천정배 의원은 1954년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도에서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모 슬하에서 암태초등학교를 다녔다. 이후 목포중학교로 진학하며 가족이 있는 목포로 왔다. 천 의원은 중학교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재학 중에 전라남도 학술경시대회에서 1등을 하는 등 공부에 소질을 보였다. 중학교 졸업 후 목포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한다.
 
하지만 천 의원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단 한 번도 학급 반장을 맡아본 적이 없다고 전해진다. 천 의원은 1972년 목포고등학교를 전체수석으로 졸업하고 그해 대학예비고사에서 인문계 전국수석을 차지한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하며 ‘목포 3대 천재’로 불렸다. 
 
법관 임용 거부
변호사로 시작해 
 
그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1학년 재학 중에 사법시험 1차 시험에 합격한다. 그러나 2차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 다시 3학년 때 사법시험에 도전했다. 1976년 졸업과 동시에 제18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78년 천 의원은 사법연수원을 3등으로 수료한다. 주변에서는 우수한 그가 판사나 검사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천 의원은 수원에 있는 전투비행단에서 공군 법무관으로 복무한다. 그러던 중 1980년 전두환정권에서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다. 그는 당시 정권에서 법관 임용을 거부하고 변호사의 길을 선택한다.  
 
DJ와 함께 '목포 3대 천재'
인권변호사로 활발한 활동
 
이후 1981년 김앤장 법률사무소에 입사했다. 4년간 외환무역 조세관련 국제변호사로 활동한다. 1985년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나와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남대문합동볍률사무소를 열며 인권변호사의 길을 자처했다. 이후 19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창립을 주도했으며 국제인권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그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맡았던 주요 사건은 ‘구로구청 부정 투표함 사건’ ‘임수경·문익환·리영희 방북사건’ ‘정태춘 음반 사전검열 사건’ 등을 맡았다. 특히 가수 정태춘 사건에서 천 의원은 헌법재판소로부터 ‘음반 사전심의제’ 위헌 결정을 이끌어냈다. 1994년 ‘한국사회의 이해 사건’으로 유명한 경상대학교 교양교재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의 변론을 맡아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DJ 권유 정치 입문
참여정부 법무부장관
 
1993년 그는 인권변호사 출신인 노무현 전 대통령 등과 법무법인 해마루를 창립한다. 1995년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선택했다. 
 

1996년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제15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경기 안산을(경기 안산시 단원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는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다시 안산을에 출마해 재선이 됐다. 그해 민주당 수석원내부총무를 지냈다. 그는 자유민주연합의 원내교섭단체 구성요건을 20석에서 10석으로 낮추는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2002년 천 의원은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 당시 노 전 대통령을 지지했다. 현역의원으로서는 처음으로 노 전 대통령을 지지한 것이었다. 
 
그리고 2003년 그는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를 주장했다. 소위 ‘천신정’(천정배, 신기남, 정동영)이라 불리는 당내 강경세력으로 지칭됐다. 민주당의 분당과 열린우리당의 창당을 주도한 장본인이 천 의원이다. 이듬해 2004년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를 지냈지만 그해 말 4대 쟁점법안 처리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중도 사퇴했다.
 
2005년 6월 천 의원은 법무부장관에 임명된다. 10월에는 강정구 동국대학교 교수의 한국전쟁 관련 발언에 관해 검찰 수사지휘권을 발동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검찰총장의 사퇴를 불러오게 된다. 하지만 그는 국회의원 시절 법무부장관의 검찰 지휘권을 삭제하는 검찰청법 개정안을 제안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자신의 소신을 바꿨다는 비판이 있었다. 
 
정치철새 오명
긴 인고의 세월
 
그는 2007년 1월 열린우리당을 탈당했다. 이후 대통합민주신당에 입당해 대통령후보 경선에 출마했다. 하지만 예비경선에서 탈락한 그는 문국현 전 의원과 함께 정책연대를 구상하기도 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통합민주당 소속 의원으로 경기 안산시 단원구갑에 출마해 당선된다. 이로써 4선 국회의원이 됐다. 동시에 안산시 최초로 4선 의원의 영광을 안았다. 그는 18대 국회에서 이명박정부를 상대로 언론자유를 수호하는 데 앞장섰다. 민주당의 MB언론악법저지와 언론자유수호특별위원장, 언론장악저지대책위원장을 역임했으며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으로서 활동했다. 
 
천 의원은 2009년 18대 국회에서 미디어법이 강행 처리되자 의원직 사퇴를 선언했다. 이후 그는 원외투쟁에 주력했다. 이듬해 2010년 소속 상임위인 문화체육관광통신위원회 첫 회의에 참석해 유감을 표시하고 공식 복귀를 선언했다. 하지만 당시 한나라당 의원들은 천 의원의 복귀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2010년 10월 민주당 전당대회 지도부 경선에서 총 득표수 5598표, 득표율 10.05%로 5위에 오르며 최고위원으로 뽑혔다. 12월 그는 수원역 앞에서 열린 ‘이명박 독재심판 경기지역 결의 대회’에서 “이명박정부를 소탕해야지 않겠나. 끌어내리자”며 “헛소리하며 국민을 실망시키는 이명박정권을 확 죽여 버려야 하지 않겠나”며 원색적으로 비판했다. 당시 청와대는 “그런 발언을 했다면 패륜아”라고 반박했다. 이어 한 시민은 그를 국가내란죄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해 검찰은 내란죄 혐의로 천 의원을 수사했다.
 
3년 만에 여의도무대 복귀
제1야당 텃밭 아성 무너뜨려
 
2011년 8월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주민투표 결과에 따라 사퇴하자 천 의원은 후임 서울시장 자리에 도전했다. 곧바로 그는 민주당에서 제일 먼저 서울시장 보선 출마를 선언했다. 천 의원은 오 전 시장의 사퇴로 10월26일 재보선이 치러지는 것으로 확정되면서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자신의 국회의원 지역구인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주소지를 서울시장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서울 관악구로 옮겼다. 하지만 9월 치러진 민주당 경선에서 박영선 의원에게 패해 서울시장선거에 나가지 못하게 됐다. 
 
 

2012년 천 의원은 민주통합당 간판으로 서울 송파을 선거에 나섰다. 서울 송파을은 새누리당의 텃밭이다. 그는 46%의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석패했다. 
 
이후 천 의원은 호남에서 재기를 노렸다. 2013년 광주에 법무법인 해마루를 열었다. 그는 호남 곳곳을 누비며 호남정치 부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지난해 7·30 광주 광산을 보궐선거 때 출사표를 내면서 “경선까지 불사하겠다”며 승부수를 띄웠다. 하지만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는 권은희 의원을 전략공천해 출마를 접어야 했던 아픔을 겪기도 했다. 
 
“호남정치 복원” 역설 
압도적 득표율로 당선
 
지난 3월16일 천 의원은 4·29재보선을 앞두고 새정치연합 탈당을 선언했다. 당시 야권에서는 “탈당에 명분이 없다”고 지적했다. 국민모임의 정동영 전 의원은 천 의원에게 함께하자며 여러 차례 제안했다. 하지만 천 의원은 “호남정치를 복원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국민모임 합류 대신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천 의원은 이번 재보선에서 52.37%를 얻어 새정치연합 조영택 후보(29.80%)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승리를 확정 지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줄곧 호남정치 복원론과 호남 대권주자 육성을 역설해왔던 그는 “당선되면 다음 총선에 신당을 만들어 광주지역에 공천을 모두 하겠다”며 “새로운 DJ를 길러내겠다”고 공약했다. 안팎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 이후 강력한 대권주자를 가져본 적 없는 호남민심을 자극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또 그의 당선에는 옛 통합진보당 지지자들의 표심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옛 진보당 후보로 나선 조남일 전 후보가 “광주 기득권정치 타파를 위해 대승적으로 천정배 후보에게 힘을 모아주자”는 시민사회의 의견을 받아들여 사퇴하면서 무소속인 천 의원에게 표가 모인 것이다.
 
천 의원의 당선으로 호남 대망론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천 의원의 승리를 놓고 새정치연합 안팎에서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호남발 야권 개편의 신호탄이 오른 것 아니겠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min1330@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갈 곳 없는 정동영 '어쩌나?'
명분·실리 다 잃어버린 거물 
 
정동영 전 의원이 정치적 위기에 몰렸다. 새정치민주연합에서 탈당까지 하며 배수의 진을 쳤지만 돌파구를 차지 못했다. 그는 지난 3월 ‘4·29 재보선 서울 관악을에 출마할 것’이라고 선언하며 정치생명을 건 모험을 감행했다. 하지만 결국 무릎을 꿇었다. 이에 더해 야권 분열 책임론까지 감수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정 전 의원의 성적표는 20.1%의 득표율로 3위. 대선후보까지 지낸 거물급 정치인으로서 체면을 완전히 구겼다. 그가 공언했던 제1야당 심판은 이루지도 못했다. 결과적으로 새누리당에 의석을 내주는데 일조한 셈이 됐다. 정 전 의원과 새정치민주연합 정태호 후보의 득표율을 합치면 54%로 새누리당 오신환 후보의 득표율(43.89%)을 훌쩍 넘는다.
 
정 전 의원은 지난달 29일 패배가 확정된 뒤 “패배했지만 꿈은 패배한 것이 아니다. 국민모임의 꿈은 앞으로도 계속 전진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의 도전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단순히 원내 진입 실패에 그치는 게 아니라 정시생명에도 상당한 타격을 안겨 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일각에서는 정 전 의원이 선거에서 호남출신 유권자들이나 진보진영 유권자들의 지지세를 일정 부분 확인한 만큼, 내년 총선에서 정치적 고향인 전주·덕진 지역 등에 도전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정 전 의원은 1953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전주고와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했다. MBC <뉴스데스크> 주말앵커 출신인 그는 서울대 동기인 이해찬 전 총리의 권유로 1996년 정계에 입문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15대 총선에 출마한 그는 전주 덕진에서 전국 최다득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6대 총선에서도 전국 최다득표를 획득하며 재선에 성공,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배수진 쳤지만 3위로 패배
“야권 분열 원흉” 질타 이어져
 
국민회의 시절 당대변인과 최고위원을 역임했으며 당시 권력 2인자였던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을 겨냥 ‘정풍운동’을 벌이면서 깨끗한 이미지의 차세대 주자로 떠올랐다. 2002년 당 대선후보경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맞붙어 패배했지만 경선을 완주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2004년 신기남·천정배 의원 등과 함께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했으나 17대 총선을 앞두고 ‘노인 폄훼 발언 파문’으로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다. 17대 총선 비례대표후보까지 사퇴하며 물러난 그는 같은 해 참여정부 통일부장관으로 재기했다. 2006년엔 당의장으로 여의도 정가에 복귀했으나 그해 지방선거에서는 패배했다.

지난 17대 대선에서 민주당 대선후보에 선정됐지만 역대 최대표 차이로 낙선했다. 18대 총선에서도 고배를 마시자 지난해 7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2009년 4월 재보선 출마 선언을 하며 귀국했다. 하지만 당 지도부가 공천 배제를 결정하자 탈당했다. 그후 전북 전주 덕진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2010년 2월10일 민주당에 복당했으며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의 고문으로 활동하다 탈당했다. 이후 국민모임에 합류했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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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2조 물먹은’ 한양 수상한 계열사와 의문의 돈거래

[단독] ‘2조 물먹은’ 한양 수상한 계열사와 의문의 돈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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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C 빛고을 설립 초기 한양이 30%로 최대주주, 우빈산업(25%), 케이앤지스틸(24%), 파크엠(21%) 등이 주주로 참여했다. 한양이 우빈산업과 케이앤지스틸의 SPC 빛고을 참여를 위한 초기자본 49억원을 댔다. 한양이 우빈산업에 49억원을 빌려주고 우빈산업이 다시 케이앤지스틸에 24억원을 대여해 지분을 분배했다. 이때 우빈산업은 케이앤지스틸에 24억원을 빌려주면서 ‘콜옵션’ 계약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콜옵션은 특정한 기초자산을 만기일이나 만기일 이전에 미리 정한 행사가격으로 살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다시 말해 우빈산업은 언제든지 원할 때 케이앤지스틸의 지분을 회수할 수 있는 조건을 걸어둔 것이다. ‘초대형’ 중앙공원 1지구 사업의 이면 한양-케이앤지스틸 모종의 관계 의혹 SPC 빛고을 주주구성에 변화가 생긴 시점은 컨소시엄 구성 당시 한양이 맡기로 한 시공권이 롯데건설로 넘어가면서부터다. 우빈산업은 케이앤지스틸의 지분 24%를 위임받아 주주권을 행사해 롯데건설과 중앙공원 1지구 아파트 신축 도급 약정을 체결했다. 이 과정서 30% 지분의 한양은 배제됐다. 롯데건설을 시공자로 선정할 당시 우빈산업에 지분을 위임했던 케이앤지스틸의 태도가 변한 시기는 2022년 5월경으로 추정된다. SPC 빛고을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케이앤지스틸은 우빈산업에 25억3000만원(대여금 24억원+이자)을 송금한 뒤 주주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SPC 빛고을 설립 과정서 빌린 돈을 갚았으니 24% 지분만큼 주주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우빈산업은 케이앤지스틸에 24억원을 빌려주면서 맺었던 콜옵션을 행사하고 49%의 지분을 확보해 SPC 빛고을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이후 우빈산업 내부 사정이 변하면서 한 차례 더 지분구조에 변화가 생겼다. 우빈산업은 대출금 100억원에 대해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고 부도 처리됐다. 지급보증을 섰던 롯데건설은 우빈산업이 보유하고 있던 지분을 넘겨 받으면서 49%를 확보했다. 지분양도는 롯데건설이 근질권(담보물에 대한 권리)을 행사해 채무를 대신 갚아주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우빈산업이 빠진 자리에 롯데건설이 들어오면서 현재 기준 빛고을 SPC 지분구조는 한양 30%, 롯데건설 29.5%, ㈜파크엠 21%, 허브자산운용 19.5%로 재편된 상태다. 허브자산운용이 보유한 19.5%는 롯데건설로부터 양도받은 것이다. SPC 빛고을 내에서 롯데건설의 발언권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뉜 지분 콜옵션으로? 사업시행권과 시공권을 두고 롯데건설과 우빈산업, 한양과 케이앤지스틸이 궤를 같이 하면서 분쟁이 이어지고 있다. 쟁점은 우빈산업과 케이앤지스틸이 가진 지분이 최종적으로 누구의 소유냐는 것이다. 두 회사의 지분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SPC 빛고을의 최대주주가 바뀔 수 있다. 케이앤지스틸은 우빈산업에 주금 대여금을 갚았으니 24%에 대한 주주권이 자사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양은 SPC 빛고을 설립 과정서 우빈산업에 49억원의 출자금을 대여하면서 맺은 특별약정을 내세웠다. 해당 약정에 한양이 중앙공원 1지구 사업의 비공원시설 시공권을 전부 갖는데 우빈산업이 의결권을 행사한다는 항목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우빈산업이 주도해 롯데건설로 시공사를 바꾼 것은 특별약정에 어긋난다는 설명이다. 광주지방법원은 케이앤지스틸과 한양이 각각 우빈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서 모두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케이앤지스틸 관계자는 “주주권 확인 소송서 승소 판결을 받았다. 우리가 SPC 주식을 실제로 소유한 주주라는 뜻”이라고 강조했다. 한양 관계자도 “1심 법원은 우빈산업이 한양에게 49억원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고 보유 주식 25% 전량을 양도하라는 판결을 내렸다”고 말했다. 반면 롯데건설은 소송 판결 한 달 전, 우빈산업의 지분을 인수했다고 설명했다. 우빈산업이 한양에 양도할 주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과정서 한양은 우빈산업의 ‘고의 부도’를 의심하고 있다. 한양은 1심 법원 판결을 근거로 자사가 지분 55%(한양 30%+우빈산업 25%)의 SPC 빛고을 최대주주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대법원서 한양에 ‘시공권이 없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놓으면서 시공자 지위는 잃게 됐다. 소송 이겨도 지위 잃었다 최근 SPC 빛고을 지분 갈등서 케이앤지스틸의 역할이 관심사로 떠올랐다. 케이앤지스틸은 상하수도 설비공사 업체로 2003년에 설립됐다. SPC 빛고을에 우빈산업과 함께 참여했다가 현재는 빠진 상태다. 케이앤지스틸 관계자는 “전 대표가 우빈산업과 친분이 있어서 (SPC 빛고을에)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현 사태서 롯데건설과 우빈산업은 이른바 ‘비한양파’로 묶여있다. 두 업체의 지분 이동도 비교적 명확히 드러나 있는 상황이다. 반면 케이앤지스틸과 한양은 두 업체 모두 우빈산업과 소송을 진행하면서도 서로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한양 관계자는 “적(우빈산업)이 같을 뿐 특별히 관계가 있는 업체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양의 모기업인 보성그룹 계열사에 속한 ‘앤유’라는 업체가 케이앤지스틸에 2022년 4월, 2억원을 빌려줬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앤유는 이기승 보성그룹 회장의 동생인 이점식씨가 지분 83.6%를 가지고 있는 친족회사다. 전기 조명장치 제조업체로 2007년에 설립됐다. 2022년 기준 매출은 28억2900만원, 영업이익은 3억300만원으로 확인된다. 한양과의 거래를 통해 27억79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앤유는 케이지앤지스틸에 2억원을 빌려주는 과정서 1주일짜리 주식근질권을 설정했다. 1주일 뒤 케이앤지스틸이 2억원을 갚지 못하면서 케이앤지스틸의 주식이 전부 앤유로 넘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또 1주일 뒤 케이앤지스틸의 대표이사를 비롯해 사내이사 3명 등 4명이 등기이사로 이름을 올렸다. 이 가운데 1명은 앤유 대표인 정모씨의 아내로 추정된다. 케이앤지스틸 수뇌부가 물갈이된 것이다. 당시 케이앤지스틸의 채무가 수십억원에 이를 정도로 적자가 누적된 상태였다고 해도 2억원을 갚지 못해 회사의 지배권을 넘겨준 것을 두고 석연찮은 의문이 일었다. 1주일이라는 짧은 주식 근질권 설정도 의문으로 떠올랐다. 보성그룹에 기생하는 ‘앤유’ 푼돈 주고 1주 만 회사 꿀꺽? 더 흥미로운 대목은 같은 해 5월 케이앤지스틸이 우빈산업에 주금 대여금 25억3000만원을 송금한 뒤 주주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의혹이 동시에 불거진 점이다. 다시 말해 2억원을 갚지 못해 회사의 지분 100%를 앤유에 넘겨주고 한 달 만에 20억원이 넘는 돈을 융통해 SPC 빛고을 지분을 확보하려 했다는 의혹이다. 여기에 우빈산업을 상대로 한 주주권 확인 소송 등에 김앤장을 변호인으로 선임하면서 수임료에 대한 의혹이 추가로 제기됐다. 일각에서는 케이앤지스틸이 지분확보를 위해 사용한 자금 출처가 한양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한양 입장서 케이앤지스틸이 가지고 있는 지분을 확보하면 54%로 SPC 빛고을의 최대주주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대법원 판결로 시공자 지위는 상실했지만 롯데건설에 넘어가 있는 시공권을 흔들 수 있는 상황이 생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분 갈등 구조가 롯데건설과 우빈산업, 한양과 케이앤지스틸로 정리되는 셈이다. 하지만 한양과 케이앤지스틸 모두 두 업체 간 모종의 관계 의혹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한양 관계자는 “앤유라는 계열사가 있는지도 잘 몰랐다. 앤유서 케이앤지스틸에 2억원을 빌려줬다거나 주금 대여금을 대줬다는 의혹은 전혀 사실무근이다. 우빈산업서 (1심)소송에 져서 계속 근거 없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듯하다. 대응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보다 광주시가 우빈산업과 결탁해 여러 가지로 유리하게 상황을 봐주고 있다고 판단해 광주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광주시는 사업시행자이자 감독관청으로서 해야 할 일이 참 많은데 그런 일을 하지 않아 공모 제도가 다 무너졌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광주시의 행정행위에 대해 소송을 제기해 재판이 진행 중”이라고 덧붙였다. 석연찮은 자금 출처 케이앤지스틸 관계자는 한양이 주금 대여금을 대줬다는 의혹에 대해 “우빈산업서 하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주주가 들어와 투자가 이뤄지면서 주금 대여금을 갚은 것이다. 우빈산업에서는 (우리가)한양의 위장계열사 아니냐, 대표이사 선임 과정이 의심스럽다, 자금 출처가 어디냐 같은 의혹을 제기하는데 그건 주주권 확인 소송서 져서 그러는 것이다. 한양이랑 우리랑은 큰 관계가 없는데 자꾸 엮어서 흠집을 내려 한다”고 주장했다. 2022년 4월 회사가 어려운 시기에 케이앤지스틸 대표로 오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이 사업이 잘 마무리되면 우리 회사에 300억원 정도의 수익이 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시행이익을 1100억원으로 계산했을 때 우리 회사 지분이 24% 정도니까 그렇게 계산한 것이다. 수익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회사를 맡게 됐고, 새로운 주주들도 그 사업성을 보고 투자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jsjang@ilyosisa.co.kr>